안양20211111a슥9장9절(확인)-이 근호 목사
안양20211111a슥9장9절(확인)-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9장9절하겠습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리 되어있어요. 여기에 구원을 베푸시는데 굳이 나귀가 동원될 이유가 무엇이냐, 그리고 나귀 타시는 것을 겸손이라고 거기다가 하나님이 스스로 거기다가 해석을 붙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석을 붙여놓게 되면 그 해석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그 해석에 도달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해석은 무얼 경유해야 하느냐 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하신 일을 토대로 해서 이게 해석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어느 인간도 알지 못하게 오신 거예요. 그래서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겸손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방식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방식.
그러니까 이 나귀 타셨다. 나귀 타시는 것이 겸손이라고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귀를 일반인들이 서민들이 타게 되면 겸손이겠습니까? 아니지요. 나귀가 겸손 되려면 굳이 나귀를 안 타셔도 되는 분이 나귀를 타고 오셔야 되지요. 그 분이 바로 왕입니다. 왕은 뭐타고 와야 되느냐 하면 나귀를 타시는 것이 그것도 나귀를 다 자란 나귀가 아니고 오늘 본문에 보면 나귀라 해놓고 뭘 또 강조하느냐 하면 다 자란 나귀가 아니고 나귀 새끼라고 되어있지요. 나귀 새끼를 가지고 여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귀의 그 다음에 뭡니까? 나귀의 작은 것. 이리 되어있지요. 9절에. 나귀의 작은 것.
누가 타시느냐 하면, 구원자, 메시아 왕입니다. 왕이 나귀 새끼를 타셨다. 이리 되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겸손이다 말이죠. 겸손인데 아무도 그걸 알지 못하는 방식을 사용한 겁니다. 그러면 인간들이 이리 있다면 인간들이 겸손을 이해하려면 뭐부터 알아야 되느냐 하면 어떤 왕이 오신다 부터 알아야 되고요. ‘왕과 그 분이 나귀를 타실 분이 아니고 말을 타실 분으로 오셔야 되고 거창하게 오셔야 되는데’ 라고 이러한 생각을 인간들이 미리 가지셔야 돼요. 말을 타야 되는데 왜 나귀를 타시지? 그것도 나귀 새끼를 타시지? 아~ 저게 겸손이구나! 이렇게 인간들이 알아듣게 되어야 됩니다. 알아듣도록 그리 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왕이 나귀를 탔다는 생각을 못하고요, 나귀를 타게 되면 그냥 나귀 타실만 해서 타신 분. 이리돼요. 그리되면 뭐가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겸손이라는 게 날아가 버립니다. 겸손한 것이 없어요.
만약에 우리나라에 제일 큰 재벌집 아들이 재벌3세가 조그만 제일 작은 차 티코를 타고 다니면 그 티코만 보고도 사람들이 야~ 재벌3세다. 알아듣습니까? 안 알아듣습니까? 전혀 관심 없지요. 티코 탈만한 수준이라서 티코 타지. 벤츠 탈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안에 운전안속에 들어있는 사람이 누구냐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앞에 티코 그것만 보고 이미 확정 규정을 지어버리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나귀 탈만해서 나귀 타는 거예요. 그러니 무엇은 아니다? 아니 만유의 왕은 아니고 구원자는 창조자는 하나님은 아니다. 벌써 신속하게 판단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것을 좀 더 깊이 규명 있게 하기 위해서 나귀 새끼를 이걸 뭐로 보느냐 하면 인간들은 사용가치로 본다. 가치인데 나귀의 가치는 그 사용하는 사람과 같다. 사용가치라 하는 거예요. 사용가치. 인간들은 사용가치를 통해서 ‘나귀에 딱 맞는 적합한 그만한 수준밖에 안 되는 사람이 탔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나귀를 무슨 가치로 하느냐 하면 사용가치로 하지 않고 교환가치로 보는 거예요. 교환 가치.
여러분들이 사용가치, 교환가치가 나오니까 요 개념이 좀 낯설게 마련인데. 요즘에 유명한 요소수라는 있잖아요. 요소수. 자동차에 들어가는 필수용. 일본에는 20L가 삼만원이래요. 이게 일본의 사용가치에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1L에 삼만원이 넘어요. 갑자기 한국 요소수에는 금 들었습니까? 금 들었으면 1L에 삼만원 받아도 돼요. 똑같은 요소수는 동일한 사용가치를 갖고 있잖아요. 가치, 가격은 왜 이 쪽은 1/20로 차이가 나는 겁니까? 이건 한국에는 풍기현상 일어나가지고 사려해도 살게 없잖아요. 돈 많이 줄 테니까 다오. 이리 되면 사용가치를 넘어서서 교환가치가 되는 겁니다. 교환가치가.
프로선수를 스카웃 하는데 너무 언론에서 부풀어 놔가지고 잘하지도 못하는데 한 10만불 데려왔다. 해보니 동네야구 수준이라. 그러면 이건 뭐 사용가치는 엉망인데 너무 언론에서 교환가치를 들떠놔서 거기에 너무 돈을 지불한 게 되잖아요.
또 어떤 사람은 예를 들어서 스웨터를 하루에 12시간씩 해가지고 한 달 동안 해가지고 스웨터를 한 10벌 만들었습니다. 하루에 12시간이니까 10일 동안 일했다 합시다. 120시간 들어갔지요. 그럼 한 시간 동안 꼼짝 않고 해서 뜨개질했으니까 한 시간 동안 한 오만원치고, 6백만원들지요. 자기는 요 스웨터 하나에 육백만원 이상 받아야 돼요. 육백만원 스웨터 내놓으면 시장에서 얼마에 삽니까? 오천원 내지 만오천원. 재료값도 안 나오지요. 요새 스웨터를 손으로 뜨는 게 어디 있어요. 중국산 수입하면 되는데. 공장에서 다 찍어내는데. 그래도 이 사람은 뭐라고 하는가, “나, 노력했어요.” 노력한 건 인정하겠는데 시장에서 교환가치가 없는 거예요. 시장에서 교환가치가.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자기 딴아 열심히 시험 치는데 일주일동안 밤새우면서 시험 쳤는데 50점 나왔어요. 머리가 안 돼. 머리가 안돼요. 그런데 어떤 공부 잘하는 애는 그 날 밤에 두 시간 했는데 100점 맞았어요. 머리가 돼요. 머리 나쁜 사람은 집중이 안 되니까 백날해도 진도가 안 나가지요. 실컷 공부하고 시험 치면 멍하니 다 잊어버리고.
이 세상에서는요, 교환가치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용가치 인정해줘요. 사용가치. 이게 필요한 사람한테 필요한 거예요. 이 세상에는 사용가치로 보기 때문에 ‘그 나귀 탈만해서 나귀에 딱 맞는 인간이 탔겠지.’ 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 사용가치를 교환가치로 나가버려요. 뭐냐 하면 ‘나귀=왕’ 으로 쳐버립니다. 나귀=왕.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왕=말, 왕은 뭘 타야한다? 말. 그것도 최고의 백마. 김정은처럼 백마 타고 백두산 왔다 갔다 한 거요. 감기 안 걸렸는지 몰라. 왕은 말을 타야 되는데 이게 인간들이 알고 있는 이게 사용가치 및 교환가치에요. 적어도 대단한 분이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가지고 나귀=왕이다. 이걸 받아들이라. 이걸 받아들이래요. 그럼 이걸 받아들일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인간 세상은 왕은 적어도 말을 타야 돼요. 나귀를 타게 되면 그건 누가 뭐래도 그건 왕이 아니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귀=왕을 만들었으니까 나귀와 왕 사이에 연계가 되어서 사람들은 아는 바가 없어요. 이건 생뚱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겸손은 뭐냐,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방식. 왜? 그래야 인간들은 자체적으로 뭐하다? 겸손의 반대말이 뭡니까? 교만한 거예요.
교만한 가운데 메시아를 기다렸고, 교만한 가운데 왕을 기다린 겁니다. 완전히 인간 세상을 엎어버린 거예요. 너희들은 보고도 못 믿는 존재다. 못 믿는 존재. 들어도 못 알아듣는 존재. 맞닥뜨려도 누구세요? 하고 그냥 지나가는 존재. 여보세요? 그냥 지나갈 존재. 도대체 어디서 문제가 되었기에 인간들은 메시아가 코앞에 등장해도 못 알아보느냐. 만약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신 게 아니고 말을 타고 왔다면 인간은 더더구나 예수님을 못 알아봅니다. 아니 예수님을 못 알아봤다는 그 자체가 안 드러나요. 그러니까 못 알아보는 거죠.
마태복음21장2절에서 9절 한 번 봅시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이제 이 선지자가 누군지를 우리가 알았지요. 스가랴선지자. 몇 장 몇 절? 9장9절)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자, 여기서 시온의 딸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방식으로 나귀를 탔다는 말은 현재에 있는 예루살렘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 시온 사람들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라고 간주를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왕이 왕 되시는 분이 나귀타고 왔으면 그 백성 또한 백성 되는 사람부터 시작해서 백성이 아닌 조차도 못 알아보는 방식으로 백성이 되게 하는 작업이 예수님의 겸손부터 개시가 되는 거예요. 시작이 되는 거예요.
8절에 보면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이리 되어있거든요. 호산나 라는 뜻은 나의 구원의 주여,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대목에서 다른 성경에 보게 되면 아이들이 그렇게 한다는 거예요. 아이들이.
그러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요, 예수님보고 나귀타고 오신 분이 우리의 구원의 주다. 라고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찬미한다는 뜻으로 덩달아 그들도 겸손한 백성으로서 튀어나와버렸어요. 교만한 백성과 차이나는 겸손한 백성. 특히 아이. 그러니까 나귀, 그리고 아이, 여기에 많은 다수의 군중들, 이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중에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한테 이 사람들이 한꺼번에 욕을 얻어먹어요. 물론 여기 제자들도 포함하고 예수님도. 마치 기존의 그 당시의 기존의 성경해석을 한 사람들에게 한 묶음으로 다 욕을 얻어먹습니다.
그러면 전부 다 뭡니까? 이 사람들이 한 통속이 되면서 시온의 딸의 편성이 되어버려요. 예수님마저 욕을 얻어먹고요. 예수님은 겸손해서 나귀 탔는데, 메시아로 오실 분이 나귀 탈분이 아니라고 이렇게 규정을 받아가지고 어디 가짜가 설치냐, 이런 식으로 욕을 얻어먹지요. 그런데 가짜가 왔는데 그걸 또 환영하는 사람들은 또 뭐고? 또 애들은 또 뭘 안다고 저리 흔들고 난리냐, 이리 된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라는 것은 본의 아니게 예수님의 겸손에 참여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잖아요.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그 피만이 구원하잖아요. 그게 절대적이고 그게 제일 기쁜 겁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걸 오히려 조롱하게 돼요. 십자가 그게 뭔데? 이리 되거든요. 사도행전20장28절에 보면 교회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피로 샀다 했어요. 교회라는 것은 그 기초가 하나님의 피 입니다. 하나님의 피. 하나님이 피 흘렸다 이리되잖아요. 하나님이 피를 흘리면 하나님이 뭐가 되어야 피를 흘립니까? 하나님이 이미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는 이야기가 돼요.
그들은 하늘을 보고 하나님! 하나님! 찾고 있는데 하나님은 이게 인간들의 해석인데, 하나님의 해석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 뭐가 되어버렸어요? 인간이 알아보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미 인간이 되시고 뭐까지 흘렸습니까? 피까지 흘렸어요. 요 피에서 시작하는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이게 교회입니다.
그런데 피를 왜 흘렸습니까?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모욕을 당하고 굴욕을 당하지요. 그러면 교회는 뭡니까? 그 흘린 피로 말미암아 구원됐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도 덩달아 사람들에게 모욕을 받고 배척을 받고 무시를 당하고 비난을 받는 그러한 운명에 동참된 자들이 교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존재보다도 뭐가 더 우선이냐 하면 인간의 기능이 우선인 거예요. 기능이. 나 신자다! 나 성도다! 그거 소용없어요. 주께서 대번에 묻는 것은 “너, 무엇이 제일 기뻐?” 이걸 묻는 거예요. “저 신자입니다. 저 성도입니다.” 아니고 니가 평소에 뭐가 제일 기쁘냐, “제가 죽는다는 게 기뻐요.” “이 세상에 내가 죽어 없어진다는 것보다 더 기쁜 게 없습니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성도라면. 괜히 살아서 온갖 근심, 걱정 다하는 것보다는 주께서 없애준다는 게 얼마나 특급사랑입니까. 볼따구 잡아야 돼. 김 지애입니까. 이 땅에서 매일 매일 내가 소실되고 아무것도 안했는데도 사라져 주고 계시니 이게 얼마나 기쁜 소식이에요.
어차피 이 세상에 갇혀서 못 빠져나오는 거 빠져나올 방법은 뿅! 하고 사라지는 거예요. 이 땅에서 사라져서 다른 세계에 도달하면 되잖아요. 그럼 내가 나를 없앱니까? 이건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이지요. 불교가 아무리 도 닦아도 무아(無我)가 될 수 없어요. 자기 자신을 없앨 수가 없어요. 내 이름을 내가 없앨 수가 없어요. 내 운명을.
그런데 주님의 운명이 들이 닥쳐가지고 내 운명, 내 팔자를 아주 시답지 않게 여기는 거예요. 뭐 이런 운명이 다 있어. 지워버린다. 지우개가지고 지워 버린다. 아이고~ 이 가치도 없는 거. 내가 싹싹 지워줄게. 지워볼까요. 싹! 싹! 니가 언제 있었어? 이런 식으로. 아예 없는 존재로 지워주니까. 걱정, 근심도 같이 없어지네. 세상에 이런 묘수가. 걱정 근심도 같이 없어져요. 없어진 자리에 뭐만 나옵니까. 예수님의 피의 업적과 실적과 성과와 효과. 이 전체를 가지고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오늘 본문에서 제목으로 삼으면, 효과에요. 효과.
성도는 효과를 확인하는 자라서 성도된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건드렸습니다, 를 거기다 뭘 보태지 말고 섞지 말고, 확인해 주는 거예요. 주께서 오늘도 나의 일이라고 여겼던 것을 지우고, 오늘도 나의 일을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예수님의 피로 싹 지워버려요. 니 하루는 니가 만든 것이 아니고 피의 업적과 피의 설계, 피의 스케줄에 따라서 그 피의 효과를 확인하라고 오늘도 하루를 조성해 놨다. 이게 바로 성도가 받은 특급사랑이에요. 특급사랑입니다. 얼마나 기쁜 줄 몰라요.
사람이 자기 소망이 하나 이루어지면 기쁘지요. 기쁜데, 그 기쁨은요, 예를 들면 이게 얼마 안가요. 예를 들어서 어떤 남자가 너무나 예쁜 여자하고 결혼하고 싶어서 굉장히 공을 많이 들였는데. 드디어 그 여자와 혼인하게 되었어요. 그러면 그 기쁨은 거기서 끝나는 겁니까? 그 기쁨은 앞으로 계속 되는 거예요?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탐을 냈던 여자를 내가 가졌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결혼하고 난 뒤에는 감시에 들어갑니다. 혹시나 공 들였는데 그 여자가 내 아내가 다른 남자에게 눈 돌릴까봐 공을 배나 감시체제에 들어가는 거예요.
인간이 내 팔자, 내 운명을 내가 쥐고 있으면요, 그게 자기가 악마의 미끼에 완전히 빠진 거예요. 여러분들이 초등학교 때 들었던 옛날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어떤 바닷가에 아주 다정한 노부부가 있었는데 굉장히 가난하지만 그래도 굉장히 금슬 좋게 살았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았는데 고기가 금고기가 올라왔어요. 금고기가 사정사정해서 풀어주면 한 가지 소원 들어주겠다고 해가지고 어쩔까 하고 있을 때 그 할머니가, 할머니가 문제라. 우리 집에 부뚜막에 깨진 물동이가 있는데 그걸 성한 것으로 바꿔주면 좋겠다. 그 물고기를 풀어주니까 물동이가 멀쩡한 물동이가 됐어요. 다음에 가니까 또 잡혔어. 그 금고기는 왜 자꾸 잡히는지 몰라. 또 잡히니까 요번에는 잡거든 쌀 한가마하고 다시 기울 필요 없는 새 옷 하나 주세요. 하라고 했어요. 풀어줬더니만 쌀가마하고 새 옷이 왔어요.
그 다음에 또 할머니가 또 잡거든 이제는 이 학고방 말고 기와집 해달라고 부탁해가지고 기와집 됐어요. 그 다음에 또 할머니가 양반되게 해달라고 해서 양반 해줬어요. 그래서 할머니가 성에 안 차가지고 다음에는 만나거든 나라 임금님 되게 해달라고 해서 잡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물고기를 풀어주니까 지금까지 받았던 거 원상복귀 되어가지고 다시 다정하지도 않고 깨진 물동이가 있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물고기가 나를 풀어주면 소원 들어줄게. 해가지고 보이스피싱 비슷한 그런 건데. 해주고 풀어주는 게 아니고. 풀어놓으면 해줄게. 신용 거래한 거죠. 여기 할머니 한 번 보세요. 이 정도 하면 욕망이 멈출 줄 알았지요. 계속해서 해석을 하는데 무슨 해석이냐 하면 자기 해석에 대한 갱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자기 해석. 나는 이 정도에 멈출 위인은 아닐 거라는 것.
자기 해석에 대한 갱신이 이게 욕망에 미끼가 되어서 계속 이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 이건 금 물고기를 잡은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지옥을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원래 못 믿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인간은 못 믿게 되어있는데 교회에서 전부 다 강제로 예수 믿으라 하니까 이건 뭐 안 믿으면 안 되는 줄 알고 믿습니다. 하고 손들고 다 나오는 거예요. 본인은 전혀 달라진 것도 없고. 자기 욕심은 그대로 있고. 예수만 덜렁 숟가락 하나 얹어놓듯이 예수만 믿은 거예요.
그 예수의 활용도가 뭡니까. 자기 욕망을 위한 교환가치로 사용해요. 교환가치. 자기 욕망을 위한 교환가치로 사용할 게 뻔하지요. 이 뻔한 것. 인간들이 뭐하는데 뻔하는 걸 알고 계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 뻔한 논리 사슬에 얽매이지 않은 교환가치로서 나귀를 동원한 겁니다. 나귀를 탄 사람은 결코 왕이 될 수 없고 메시아 될 수 없다는 걸 철석같이 믿는 이 인간세대에다가 주님께서는 나귀를 타신 거예요. 이 겸손은 인간이 이해하는 개념의 겸손이 아닙니다.
인간이 그걸 겸손으로 이해하지를 못해요.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어린아이나 아무것도 모르는 군중들이나 그냥 우~~ 해서 떠들어 본 거예요. 아무나 뭐 하도 로마의 압제가 심하니까 아무나 뜨기만 하면 우르르 호응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신 이유가 의도적으로 분위기를 띄운 겁니다. 의도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시는 작업을 하신 거예요.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나귀 = 왕이 되는 그 의식이 그들에게 없다는 사실을 주님께서 되돌려준 겁니다. 너희에게는 나귀가 왕이 된 게 없다. 군중들도 마찬가지에요. 나중에 예수님이 잡혔을 때 군중들도 그 분은 왕 맞다. 일괄적이지 않아요. 한결같지 않아요. 전부다 바라바를 살릴래? 예! 예수는 죽여라. 이리 된 거예요. 전혀 거기에 어떤 여론몰이가 형성이 되지 않았던 겁니다. 일시적인 어떤 분위기 띄우는 데는 됐지요.
우리가 방금 한 걸 다시 해봅시다. 나귀는 뭐와 교환한다? 왕과 교환한다. 이게 하나님의 원칙인데 이런 바보 같은 흥정이나 거래는 인간세계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왕이 나귀새끼 한 마리하고 바꿀 가치인가. 안되지요. 인간개념에서 왕은 나귀 탄다. 이런 공식이 있을 수 없지요. 이걸 통해서 왕은 주님은 스스로 사라집니다. 스스로 사라져요. 물론 인간들이 죽였지만. 스스로 사라질 것을 계산하신 거예요.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는 뭐가 없는 거예요? 인간세계에는 다른 신이 있었고, 다른 메시아가 있었지 진짜 메시아는 없다는 것이 뭐되느냐 하면 확인되는 겁니다. 확인.
자, 이런 확인차원에서 드러난 것은 그 나귀타는 왕은 인간에게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 되었습니다. 아무 쓸모없는 존재로 낙인 되었는데 이게 주님께서 스스로 의도했던 겁니다. 의도했던 일이에요. 그러면 그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은 없지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걸 알았으니까 다음과 같은 요 문장을 이해해 주셔야 됩니다. ‘진리는 선 아니고 악 아니고 선과 악 그 사이에서 진리가 나타난다.’
그러면 인간은 선과 악 이것 밖에 모르잖아요. 여기에 갇혀 있잖아요. 갇혀있으니까 여기서 나타나는 진리는 이 선악 계에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지요. 인간은 선 아니면 악. 악 아니면 선이니까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진리는 인간세계에서 진짜냐, 아니면 가짜냐, 이게 인간 세상에 둘이거든요. 주님은 진리는 진짜도 아니고 가짜도 아니고 진짜, 가짜, 그 판 자체가 이게 가짜로 드러내게 하는 제3의 없던 구석에서 나온 게 이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아까 했던 마태복음 보게 되면 나귀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귀를 주님이 친히 쓰시겠다, 하라. 쓰신다. 주님이. 아까 봤지요. 마태복음21장3절에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그러면 인간은 뭐보다 못하냐 하면 인간은 뭐보다 못합니까? 인간은 나귀보다 못하지요. 이게 인간 존재냐, 안 존재냐가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쓰시느냐에 따라서 이 참과 거짓이 안 쓰시면 거짓이고, 쓰시면 그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등장해야 돼요. 주님이 등장하셔서 주님이 쓰시면 그건 성도고 안 쓰시면 그건 성도 아닌 거예요.
그런데 하필 왜 나귀하고 인간하고 비교하느냐 나귀는 환상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아주 어린 아이라. 이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에요. 그런데 인간은 악마가 만든 환타지가 있어요. 환타지. 지 욕망이 만든 환타지 꿈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속지 않으려고 하는 자체가 이미 속아 넘어간 거예요. 속지 않으려고 한다는 말은요, 나는 거짓은 버리고 오직 참된 것, 진리만 얻겠다고 나대는 그 자체가 속아 넘어간 증거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 보면 제목이 이란 영화가 있는데 그 영화를 간단히 말씀드리면 어떤 눈 먼 소녀가 환타지 상상을 가지고 먼 친척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고 있는데, ‘우리 가게에 큰 부잣집 멋있는 분이 우리 가게에 단골로 오신다.’ 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 분이 물건사고 한다 한 겁니다. 그리고 그 분이 와서 눈 먼 소녀가 불쌍하다고 다정하게 해주니까 나는 커서 그 분과 결혼해야지. 할 정도로 굉장히 연모하고 흠모했다. 이 말이지요. 눈이 감긴 채. 말도 따뜻하게 해주니까. 그런데 우째 우째 해가지고 그 사람은 거부도 아니고 부잣집 아저씨도 아니고요, 떠돌이였고 그냥 잡부였고 그것도 일 안돼서 떠돌이 하다가 오해를 받아가지고 교도소 갔다가 나왔어요.
교도소 갔다가 나오면서 우연히 돈이 생겨가지고 그 돈을 자기를 잘해줬더니 눈 먼 소녀에게 주고 교도소에 갔어요. 자기는 훔친 게 아닌데. 도둑으로 몰려가지고. 그래서 이왕 도둑으로 몰린 거 돈도 필요 없다 싶어 그 돈을 눈 먼 소녀에게 다 줬어요. 그래서 그 눈 먼 소녀가 그 돈 가지고 눈을 치료를 했어요. 자기 돈 준 사람은 교도소에 가서 못 만나고. 나중에 교도소에서 나왔으니까 직업도 없고 돈도 없고 헐벗은 모습으로 딱 왔을 때에 소녀가 눈 떠 있는 거예요. 눈 떠 있으면서 어서 오세요. 하니까 그 떠돌이 아저씨가 동전 하나를 그 아가씨 손에 쥐어주니까 그 때 아가씨가 눈이 멀었을 때는 촉각이 발달하잖아요. 그 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제 보이느냐?”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 아저씨가. “이제 눈이 보이느냐?” 그 때 아가씨가 “이제 보여요.” 자, 본다는 말이 뭔 뜻이냐 하면 내와 당신 사이를 본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그동안 환타지 속에 놓여있는 나를 비로소 그 아가씨는 본 거예요.
주님께서 모든 일은요, 니가 마귀한테 갇혀있고 속고 있다는 것을 보게 하는 식으로 일을 하시는 거예요. 주님의 모든 일은. 그래서 예수 믿고 하나님 믿는 것은요, 그건 결국 우리가 나귀가 아니고 인간인 이상 우리가 제대로 못 본 이상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어도 이건 뭐가 되느냐 하면 결국 발견하는 것은 신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잘난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것 밖에 안돼요. 그게 신이 됐든, 예수가 됐든, 성령이 됐든. 자기 욕망을 발견하는 거예요. 자기 욕망. 나는 저렇게 되고 싶음을 발견하는 거예요.
진짜 찐 찐 찐짜 메시아 예수님은 뭐냐 하면 모든 일을 할 때에 나, 이렇다. 자, 꼼꼼히 따져 봐라. 가 아니라 나는 너에게 이렇게 다가갔다. 나는 너희들이 알고 있는 거 뒤집어버렸다. 왕인데 나는 나귀 탔다. 그런 의도를 아느냐? 니가 지금 누구한테 속고 있기 때문에 속는 것에는 거짓말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 다가오는 방식이 무슨 방식이냐, 바로 고통입니다. 고통. 고통이에요. 아픔입니다. 아픔.
주의 성경 말씀은요, 아픔을 토대로 해서 경유하지 아니하면 해석이 안돼요. 모든 말씀이. 모든 말씀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경유하지 않으면 해석이 안 되는 말씀이에요. 왜 하나님께서 거창하게 오시면 되는데 왜 이렇게 살과 피로 십자가에 죽으시느냐, 문제가 뭐냐 하면 자기 백성을 건져내면서 오직 자기 백성을 건짐 받은 백성으로 하여금 메시아가 메시아임을 확인차 확인하기 위해서. 이걸 증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님도 사실은 아버지 앞에 그렇게 하셨어요. 율법에 보면 증인이 두 사람이 됐어야 돼요. 아버지가 증인이고 본인이 증인이에요. 예수님이 증인 된다는 것은 이제 예수님이 만들어낸 사람과 예수님 자신이 증인되는 거예요. 율법을 이룬다 말이죠. 그 증인 되는데, “딱 보니까 예수님 믿는다.”가 아니라 “십자가 지신 분 맞네요.” 이런 식으로 십자가를 경유해야 찐 찐 진짜로 메시아를 만난 거예요.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말이 아니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만이 이게 주님의 제자에요. 주님의 제자고 주님의 백성입니다. “나 같은 것은 나귀보다 못하니까 나 같은 것은 상대할 가치도 없습니다. 나를 떠나소서.” 한다고 주님이 떠날까요? 주님이 우리 말 듣고 떠나고 안 떠나고 합니까. 우리 말 듣고 지옥 보내고 천국 보내고 합니까? 일체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내는 것은요, 우리 말 안 들어요. 우리하고 상대도 안 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지옥에 있기 때문에 지옥의 인간이 뭐 장래를 지가 걱정해가지고 나는 천국 가겠다. 아이고~ 성질나는데 지옥갈래. 이런 말 한다고 하등의 참고 내용이 될 수가 없어요. 그냥 일방적으로 결정지어버리면 천국 가기 싫어도 천국 가야 돼요. 지옥 가려면 천국에 오지 말아야 되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과정을 통해서 주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는 것은 주님을 확인하기 때문에 성도 자신의 가치와 의미 있잖아요. 교환가치, 사용가치 이걸 스스로 우리로 하여금 사라지도록 그렇게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사라지도록. 어떻게 사라지게 하느냐, 성경해석 전부 다 니가 한 해석 다 바꿈으로서 너 라는 존재 자체가 별 사용가치도 없고 교환가치도 없음을 분명히 하면서, “흠~ 나는 있으나 마나 하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있으나 마나한 존재는요, 걱정하거나 염려하거나 불안을 떨 자격도 안돼요. 있으나 마나 한데. 이걸 뭐라고 하느냐 영어로 nothing. 아무것도 아니다. 이걸 또 다른 말로 하면 성도는 주님을 만날 때 죽은 채로 만나는 거예요. 죽음 안에서 만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그렇게 이 땅에서 죽음으로서 주가 되셨기 때문에. 그 절차를 그대로 반복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인간들은 도대체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성도든 불신자든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성령이 오시기 전에, 인간들은 어떻게 사는가, 인간의 사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화를 내면서 살아요. 분노를 터트리면서 사는 겁니다.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악마가 인간들에게 뭐를 집어넣었느냐 하면 자기 의로 살도록 그렇게 만들었어요. 자기 의로 살도록. 자기 정당성. 자기 정당성을 지키도록 그렇게 그런 식으로 자기 잘남과 자기 대단함 그 보람으로 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의, 자기 정당성을 늘 이걸 신경 오로지 여기만 신경 쓰고 살기 때문에 조금만 자기 의와 정당성에 뭔가 튀어나가게 되면 왈칵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분노가 화를 터트리게 되어있어요. 그냥 짐승 같아요. 물어뜯는 게 주특기에요.
이건 뭐 한 살, 두 살, 50살, 70살, 100살 돼도 이건 예외가 없습니다. 자기 정당성과 자기 의로움에 대해서 조금만 손실이 가게 되면 왁 뜯어먹어요. 그래서 부부라든지 자식 관계가 사실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의로움과 자기 정당성으로만 살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하나라는 것이 성립이 안돼요. 다만, 내 정당성과 내 의를 유지시켜 주고 피워준다면 내가 당신과 사는 것을 내가 봐줄게. 하는 식이에요. 자식들도 마찬가지고요. 왜냐하면 본인이 신이고 본인이 왕이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왕이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땅에 와서 나귀 타고 오는 이상한 퍼포먼스를 벌인 거예요. 인간들은 왕이라는 것은 자기 이상향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왕이 누가 있는 게 아니고 내가 되고 싶은 그것이 왕이에요. 인간이 남을 가족이든 부부든 자식이든 만날 때 뭘 보느냐 하면 타인을 통해서 내가 얻고 싶은 것만 봐요. 인간은. 가족이라도 내가 찾고 싶은 것만 본다고요. 이 말은 ‘인간은 자신이 타인을 만든다.’ 이 문장입니다. 오늘 강의 제일 어려운 문장인데. 남은 내가 만들어요. 내가 남을 만들어서 그 남은 내 잘남을 증명해주고 확인해줄 수 있는 상대로서 떡하니 내 앞에 부부라는 이름으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설정해 놓은 거예요.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 당기면 할아버지는 허허 웃습니다.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어요. 손자가 할아버지 수염 당기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나이 40 넘은 조카가 수염 당기면 그 아는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선택하지 않은 타인이거든요. 내가 용납하지 않은 타인이에요. 아이는 어리기 때문에 내 의에 손상이 안가요. 내 위신과 권위에 흠집이 안 난다고요. 만약에 이제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제명이가 와가지고 악수한 번 할까요. 하면, 아이고~ 감격스러워라. 오늘 손도 안 씻을게요. 하잖아요. 그런데 윤석열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제명이가 악수할까요, 하면, “이게 어딜 성폭행! 성추행을 하다니! 고소한다. 사진 찍어라. 찍어라. 어딜 나의 의와 나의 정당성을 니가 뭔데 니는 내가 원하는 타인이 아니야.” 타인도 내가 정해요. 내가 정한다고.
내가 정하는 타인이 어딜 나의 의를 침범해. 용납이 안돼요. 이게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인간에게 주께서 일괄적으로 타인을 만들어줬어요. 그 타인이 뭐냐,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다가와요. 성도든 성도 아니든 주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다가와 가지고 이 죽음 앞에서 너의 의와 너의 정당성이 과연 어떻게 되는지. 한번 니 정리해봐! 이 나의 죽음 앞에서. 과연 너의 의와 정당성이 아직도 유지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 한 번 생각해 봐라. 너희는 그 정도로 너의 죽음을 너의 이웃과 내 모습 이상형으로 받아들일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은 스스로 사라져버린 거예요. 아무도 주의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런데 미가라는 선지서에 보면, 5장2절에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작다는 말이 나오거든요. 아까 나귀 할 때 그냥 새끼 아니고 작은 나귀 새끼 했지요.)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지역 자체가 예루살렘이 아니고 예루살렘의 딸이 생산되는 곳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들레헴이에요. 왜? 예루살렘에 비해서 작기 때문에. 그 다스릴 자가 거기서 나온다는 거예요. 주님의 출생지부터 해서 주님의 나귀 타는 것까지 전부 다 인간이 갖고 있는 인간의 자기 정당성, 자기 의. 인간은 자기 잘난 맛에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택하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주님은 오히려 그 정당성에 의해서 침을 받고 희생을 당하는 그 죽음으로서 다시 타인으로 다가 설 준비를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나의 죽음을 너의 영원한 안식처로 받아들일 용의가 되어 있느냐, 그걸 물으시는 겁니다. 아무도 없었지요. 성령이 오면 가능하지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