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8장 10절 (아름다운 과정)211019b-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8장 10절 (아름다운 과정)211019b-이근호 목사
씨 뿌리는 비유에 의하면 성도는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은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지키는 방식 그런 것은 없어도 되는 상관없는 거에요. 왜냐 하면은 나는 과정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일의 시작과 마감은 내 소관이 아니에요. 그래서 몇 주 전에 설교에 의하면 그만하자.
그러니까 주님하고 나하고 상관이 없다는 점이 너무나 홀가분하고 감사하다 이 말이죠. 주의 일이 내가 관여할 게 없는 거에요. 관여할 게. 주께서 잡채 만들고 있는데 내가 거기 끼어들어서 저 당근 좀 썰어드릴까요? 됐어 됐어. 과정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과정 속에.
그러면 그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뭐가 되느냐. 보통 이 세상 현실에서는 이걸 자아라고 해요. 자아는 이게 주체 노릇을 합니다. 주체란 주인공이란 뜻인데. 이 자아라고 하는 것은 나는 여기 있다 또는 나는 ‘나’다 이런 뜻이거든요. 나는 ‘나’인데 이게 어디에 해당하느냐 하면은 이 주체를 세상이라고 쓰겠어요. 세상에서 내가 주인공처럼 나의 주인공처럼 행세하는 거에요.
그런데 씨의 세계, 천국 세계에서는 자아가 아니고 이걸 단자 또는 하나의 개체가 됩니다. 하나의 개체가 되어서 개체는 뭐냐 하면은 주체 노릇을 못합니다. 개체를 다루시는 분인 이 주인공은 누구이기 때문에? 주님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공 노릇할 이유가 할 필요도 없고 할 이유도 없지요.
그래서 이걸 더 응용하면 목적과 기대에 자기를 투신하지 말고 과정에 투신해야 돼요. 목적 기대에 몸을 던지지 말고 과정에 투신해야 돼요. 목적과 기대에 투신하지 말라. 이 말만 들어보면 그럼 그냥 놀까요? 이렇게 나와요. 노는 게 아니고 그 과정에 주께서 이루시는 그 과정 있잖아요. 씨가 30배 60배 100배가 되게 하는 그 과정. 그 과정에 참여하는 거에요.
그럼 30배 열매가 나입니까? 라고 물으면 안 된다고 했지요. 열매는 누구 열매입니까? 주님의 열매. 주님이 포도나무고 주님의 포도나무가 그 열매가 우리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주체가 내가 내 인생을 챙길 주체가 못 된다니까요. 우리는 어디에 연관되어 있어요. 주님의 벌렸던 그 거미줄에 사로잡힌 자 된 거에요. 내 세계가 아니고 내 세계가 따로 없어요. 주님에게 얽혀 들어간 겁니다.
이걸 뭐냐 하면은 사랑의 밧줄로 꽁꽁 묶어라. 사랑의 밧줄로. 그 밧줄이 나를 꽁꽁 묶는 거에요. 고린도전서 13장에 말씀에 이런 거 있지요. 13장 5절에 나오는 말씀. 제가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오늘 강의 듣고 한번 비교해보세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자기의 노림수를 생각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이 과정 속에 우리가 포함된 거에요. 네가 하란 말이 아니고. 참 말을 끝까지 들어야 돼요. ‘네가 이렇게 하면 천당 보내줄게’ 가 아니라 이렇게 되는 말씀이 이렇게 되는 그 과정 속에 네가 여기서 이미 네가 말려들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을 냈는데 나는 성을 냈는데 주님이 성을 낸 게 아니래. 이 말이 이게 진짜 말이야 막걸리야 이게. 정말 희한한 해석을 부여받는 거에요. 나는 성냈는데 그게 성이 아니래요. 나는 화냈는데 화가 아니랍니다. 저 화내는 것 좀 봐 얼마나 귀여워 이러고 있다니까요. 다들 경험이 없는 모양이지.
말씀이 말씀된다 할 때 그 말씀의 예를 든 게 바로 고린도전도 13장 예를 든거에요.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그 작업에 우리를 하나의 씨, 그 말씀의 씨로 들어가는 거에요. 그럼 마귀가 와서 우리 마음에 와서 있는 대로 다 솎아내는 거에요.
세상이라 하는 것은 일체 씨 뿌렸다는 그런 흔적이 남지 않기를 목표로 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마귀가 통치한다 이렇게 정의 내릴 수 있어요. 왜냐? 마귀의 노림수는 뿌려진 씨에 있기 때문에 그걸 없애버리는 거에요.
자, 여기서 그 다음 문제 해야 돼요. 그 다음 문제가 뭐냐 하면은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서 나는 사일로 네 개의 그 과정 통 속에서 나는 30배 60배 100배에 속합니까? 그 과정에 속합니까? 아니면 떨기나무 속에 떨어진 씨입니까? 아니면 바위에 떨어진 씨입니까? 아니면 길가에 떨어져 마귀에 잡혀 먹은 씨입니까?
또 이걸 묻는다고요. 그냥 묻는 게 아니고 스윽 물어요. 훅 하고 들어온다니까요. 자기 걱정 되는 거에요. 왜? 내가 주체니까. 내 인생 내가 책임지지 누가 책임지겠어요. 내가 챙겨야 되지 않습니까. 쑥 들어온단 말이죠.
이게 뭐냐 하면은 이 과정의 특징을 몰라서 그런 질문이 들어오는데 과정의 특징은 ‘홀로 움직이지 않는다’ 에요. 홀로 움직이지 않아요. 과정은 전체가 같이 움직여요. 같이. 예를 들어서 우리 머리 뒤쪽에는 눈이 없잖아요. 눈이 없는데 앞에 있는 눈이 뒤쪽을 향하여 막 놀리는 거에요. 너는 눈도 없고 나는 눈이다 자랑하면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왜냐? 같은 한 몸 안에 있기 때문에. 뒤에는 눈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눈이 없는 거고 앞에는 눈이 있어야 되잖아요. 전체가 씨의 나라, 천국이죠. 말씀의 나라에서는 이런 정황 저런 정황 이게 다 동시다발적으로 늘 다발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거에요. 그걸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기서 진짜 어려운 거 들어가는데요 이 사일로. 네가지 통로. 길가에 떨어진 것, 가시밭에 떨어진 것, 바위에 떨어진 것, 100배 열매를 맺는 것 과정들요. 주님께서 분리를 했잖아요. 각각 밭이 다르다. 이 전체가 과정은 결과와 닮지 않는다. 과정은 결과와 닮지 않아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걸 아주 쉽게 설명하는 방법이 있어요. 제가 한번 쓸게요.
자동차 생산라인은 자동차와 닮지 아니한다 이 원리입니다. 생산라인, 자동차 생산라인은 과정이거든요. 과정은 그 결과물 생산물과 전혀 안 닮았어요. 로봇 팔 이렇게 있고 용접하고 있지 그 라인은 자동차를 안 닮았어요. 자동차 조금 조립은 되겠지만 그것은 그냥 흘러가야 될거고 그 라인 자체는 안 닮았어요. 라인에 관여하는 거에요.
어떤 결실물을 내가 어떤 결실물을 내가 쟁취한다든지 내가 가지면 안 된다 이 말이죠. 나 열매할래 나 가시덤불 그거 안 할래 나는 마귀한테 먹혀버리는 씨 안 될래 라고 우린 그런 주체, 그런 자아가 나설 입장이 못 되는 겁니다. 또 성경적 예를 하나 들으면 요한계시록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 13절에서 16절까지.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
이거 지상에 오신 예수님 닮았습니까? 안 닮았습니까? 전혀 안 닮았지요. 지상의 예수님은 마리아 닮았어요. 마리아의 DNA 유전자 입었기 때문에. 인간 모습이이에요. 그러나 여기 보면 인간 모습이 아닙니다. 도저히 닮을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본래 모습이 영광스런 주가 되었을 때 모습이 영광스러운 모습이거든요. 심지어 변화산에서도 이렇게 해같이 빛났어요. 모세, 엘리야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인자가 구름 타고 온다니까 사람들이 안 믿었어요. 왜냐? 보통 인간이 구름을 탄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뭐 타고 올라갔습니까? 구름이 내려와서 타고 올라갔잖아요. 이거는 뭐냐 하면은 주체가 있을 때와 그 과정 속에 있을 때에 그 면면이 모양새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인간세계에서는 이걸 이런 일이 없기 때문에 그걸 분간을 못 하는 거에요. 우습게 보는 거에요. 인간 세계에서. 인간 세계의 출발점은 뭐냐? 나같이 생기고 어벤져스.
다시 말해서 아주 슈퍼맨이 된다든지 보다 능력이 가미된 영웅적인 모습, 이걸 원하지. 못 알아 볼 정도의 주님이 현재 인간의 모습을 하고 왔다는 것은 그 인간 모습 속에 감추어진 그 영광스러운 주의 영광은 아무도 알아 볼 수가 없는 거에요. 이게 죄인의 모습이거든요. 로마서 8장에 그가 오실 때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죄인의 모습으로.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어요.
그렇다면 모양만 그러냐? 아니면 그분의 하시는 말의 의미도 그럴까. 말의 의미도 그런 거에요. 말의 의미는 천국의 세계에서 주어진 거에요. 천국의 세계에서는 완성된 단계고 이 세상은 뭐냐? 과정이에요. 과정. 과정에 있는 사람이 완성된 세계의 그 전체를 미리 넘보면 안 됩니다. 100배의 결실이 뭐가 좋아요? 100배의 결실 맺을래요? 아니면 여러분이 해 같이 빛날래요? 어느 쪽 할랍니까?
여기 비유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비유라고 하는 것은 씨, 땅, 밭 전부 다 이 세상에 있는 단어들이고 이미 그 어휘들이에요 이게. 단어를 주께서 사용할 때는 인간들이 기껏 아는 그 밭이면 밭이란 의미 있잖아요. 씨라면 씨라는 의미. 가시덤불 의미. 이걸 인간들은 자기가 익히 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마치 생산 라인이 곧 자동차인줄 아는 것처럼. 생산 라인 타고 달립니까? 자동차타고 달리지. 생산 라인 해서 로봇해서 뭐 할라고요? 인간들 기껏 아는 게 뭐냐? 눈에 보이는 것이 그게 곧 과정이고 결과물로 생각하는 거에요. 이런 세상적인 과정을 통해서 놀라운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은 인간의 머리로서 상상이 안 되는 겁니다. 이것만 상상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도 이해가 안 되는 거에요. 자기들은 이해됐다고 하는데 주님 보시기에는 영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8장 10절 봅시다.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되어있지요. 그럼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 알아들었습니까? 못 알아들었습니까? 못 알아들었지요.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님 배신할거에요.
자, 이 원인이 어디 있느냐. 근본적으로. 자기 안에서 자기 현실에 살던 자기 현실의 의미가 자기 안에서 뽑혀나가지 못해서 그래요. 소멸되지를 못 한 거에요. 비유를 들어도 인간들끼리 사용하는 비유 있잖아요 그거 드는 거에요. 들어가지고 나는 길가에 떨어지는 씨 안 될래. 나는 100배 결실 맺을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에요. 가시덤불 안 될래 이런 식으로 하는 거에요.
그러나 이 모든 네 가지 과정은 전부 다 주님의 일입니다. 심지어 마귀가 와서 먹는 것도 주님의 일이에요. 이 일을 씨가, 씨들이, 오직 씨들만이 다 겪어야 돼요. 다 겪어야 돼요. 말씀이 왔다가 다 먹히는 경험도 이미 구원받은 자가 겪어야 됩니다. 네 가지 과정 다 말씀에 속한 거에요.
그러면 성도는 말씀의 씨 안에 있으면서 예수님의 이 말씀 중에서 한 가지 나는 1번, 2번, 3번, 바위 위에 떨어진 것, 가시에 떨어진 것, 길가에 떨어진 것 그건 안 하고 4번만 나 잡을래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이것 다 매일같이 이것 네 개 다 우리는 경험해야 됩니다. 이것도 하나의 과정입니다.
목사님 13절에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라고 하는데 그럼 우리는 배반하면 안 되잖아요.! 이렇게 나오거든요. 그 배신자야 배반자야 그게 누굽니까? 베드로 아닙니까. 베드로에게 다 경험케 했다니까요 이걸요.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 베드로, 야곱, 요한 뭐했습니까? 겟세마네 기도할 때. 잤잖아요. 마귀가 와서 기도 말씀 다 가져갔잖아요. 안 들렸잖아요. 잠자는데 바쁜데 주님께서 무슨 기도하지? 그건 나중에 성령이 와서 알려줬지 그들이 알겠어요? 자고 있었는데요. 그때는 동영상도 없었고 유투브도 없었는데요.
왜 기꺼이 이런 과정을 왜 기꺼이 안 받을려고 합니까? 아직 내 안에서 내가 안 빠져나간 증거 아닙니까? 그게. 이미 우리는 귀신을 못 이겨요. 악마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왔다가 자기 집으로 거주했어요. 그런데 성령이 와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일곱 악귀를 악한 마귀를 악한 귀신을 쫓아냈어요.
여기서 이제 흔히 나오는 귀신 영화 이게 큰 방해돼요. 귀신 영화에 하면 귀신들렸다고 몸 아프다가 목 휙 돌아가고 정상이 되고 난 뒤에는 엄마! 하고 껴안고 이러는데 그게 바로 귀신이 만든 귀신 영화 아닙니까. 결국 귀신 영화에서 원하는 것은 그거에요. 나는 기어이 구원받아야 되겠고 나는 기어이 행복해야 돼. 이거잖아요.
나는 기어이 안 아프고 행복해야 돼. 우리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 자이언티가 불렀죠. 나는 기어이 구원받아야 해. 나는 기어이 행복해야 해. 이게 바로 귀신 이야기에요 이게 바로 귀신 이야기. 마귀가 이것 때문에 우리를 꼼짝마라 하고 있었던 거에요. 이게 원인이 뭐냐 하면은요 앞에 뭐가 붙어요? 나는, ‘나는’이 붙잖아요. 이게 빠져야 돼요. ‘나는’ 이게 빠져야 돼요. 이게 뭐가 되야 되느냐 하면은 씨가 되야 돼요. 씨가.
그래서 이걸 빼내는 방법을 여기서 알려드려요? 알려드리겠습니다. 빼내는 방법. 말씀은 자체적으로 과정을 거쳐서 완성으로 갑니다. 말씀이 완성돼요. 이 완성된 걸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성령의 공동체라고 합니다. ‘성령의 공동체’. 개인 아니지요 공동체입니다. 손이 발더러 소용없다고 하면 안돼요. 한 몸이에요.
서로가 서로 비교하고 대조하는 것 경쟁하는 것 이런 것 안돼요. 성령의 공동체가 뭐냐 하면은 이게 미래의 도래의 공동체에요. 미래라는 말이 쉬운데 어려운 말로 도래의 공동체에요. 미래가 그냥 살면 있는 게 미래지만 그 미래가 움직이는 것은 도래라고 합니다. 단어 하나 쓰는 것도 진짜 조심스럽게 쓸 수밖에 없어요.
미래가 움직이는 게 도래거든요. 도래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현재를 잡아먹어요. 삼켜버립니다. 현재를 삼킨다. 현재를 삼켜버리면 ‘나는 행복해야 돼’가 뭐가 삼키느냐 하면은 ‘다 이루었다’가 ‘나는 행복해야 돼’ 이걸 삼켜버려요. 마치 고래가 요나를 삼키듯이.
요나는 바다에서 빠질 때 자기는 죽은 줄 알았죠. 요나가 물에 빠지는 것이 바다에 빠지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인데 요나가 배에 빠지고 난 뒤에 예상도 못한 큰 고래가 삼켜야 요나가 생명을 아는데 그렇지 않고 요나가 물에 빠질 때 딱 보고 큰 고래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타이밍 맞춰가지고 뛰어내리면 그것도 고래가 아가리를 벌릴 때 딱 해가지고 계산해가지고 속도, 뛰는 거리, 풍속 계산해가지고 뛰어내리면 자기가 알아서 요나의 물고기 뱃속에 구원받은 거에요. 자기가 알아서 구원받은 거에요.
이게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짓이 그 짓이에요. 십자가 딱 가져가서 몸 아플 때, 어려울 때, 가정 우환이 있을 때 딱 들어가게. 일단 죽음이 없어요. 일단 나의 소멸이 없어요. 일단 살아있는 내가 어떻게 수작을 벌려가지고 살아있는 것을 괜찮게 살아보느냐. 이거는 미래로 가는 거에요. 내가 미래를 계산을 하는 거에요.
벌써 완성된 미래가 나를 삼키는 방식이 아니란 말이죠. 이 완성된 미래를 가지고 무슨 공동체? 앞에 뭐가 붙었습니까? 성령의 몸. 성령. 성령이 왔다는 것은 미래가 미래 안에 우리가 이미 포함이 되어버린 거에요. 그러면 나는 아무리 나는 설쳐도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은 정지화면 돼요. STOP. 정지된 화면.
만약에 제가 춤을 춘다면 정지화면이에요? 정지화면 아니에요. 세상 현실적으로 정지화면 아닌데 씨앗 말씀세계에서는 이것도 정지화면이에요. 제가 미국에 이민 간다. 이거 무슨 화면입니까? 정지화면이에요. 미국이나 한국이나 하늘나라에서 보기엔 매 제자리 뛰기에요. 네가 어디서 무얼 하든지 어떻게 하던지 간에 다 성령 안에서, 성령 안에서 확정된 주께서 이미 예상한 일을 그 과정에 네가 참여한 겁니다.
나는 구원받았다를 빼게 되면 모든 말은 다 이해가 돼요. 내 구원을 빠져버리면 이해가 다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집단 구원이 ‘나’라는 개인 구원을 삼켜서 없애버린 거에요. 삼켜서 없애버린 거에요. 아까 저녁 피자 먹었잖아요. 나 혼자 먹었습니까? 피자 나 혼자 먹었습니까? 내가 만든 피자를 나 혼자 먹었습니까? 아니지요. 여기 목격자들 있지요. 여러분 다 드셨잖아요. 일찍 오신 분들. 네?!
이게 뭐냐 하면은 식탁 공동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떡을 뗄 때 각자 도시락 너희 떡 너희 먹고 너희들 포도주 너희 먹어라 했습니까? 어떻게 했습니까? 각자 떡 STOP. STOP. STOP. 주님이 떡을 떼요. 주님의 떡이에요. 베드로 떡 뺏어온 게 아니고 주님이 자기 떡을 나눠주게 되면 주님의 몸체의 분배가 되는 겁니다. ‘분배’.
내 몸 너한테 간다 이게 언약, 이게 약속이에요. 하나님은 우리하고 절대 약속을 안 합니다. 약속을 자격이 없어요 우리는. 약속은 주님하고 약속하지, 우리하고 약속 안 해요. 주님은 우리가 뭘 해도 그리스도 한 몸 안에 지체라는 조건 하에 약속이 유효하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내 이름이 아니고 누구의 이름으로? 주의 이름으로.
그럼 내 이름은 뭐냐? 죽은 이름이죠.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얼마나 허접하고 허술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 와도 알아먹지 못하고 마귀가 뺏어가도 그걸 모르는 우리가 되야 되고 그 다음에 바위에 떨어져가지고 말씀을 받아 기쁘지만 시험들 때는 나자빠지고 배반하는 그런 나여야 되고 가시덤불 떨어져가지고 말씀 다 듣다가 갑자기 세상 유혹과 세상 돈 버는 재미에 빠져가지고 그걸 해야 되고 그 다음에 좋은 땅에 있다고 착하고 인내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얼마 안 되서 홀랑 다 날아가버리는 그런 것을 경험을 해야 되는 거에요.
왜? 다 같이 말씀이기 때문에. 내가 골라서 지키는 게 아니고 미래의 완성된 말씀이 나를 덮치니까. 나 이 말씀 할래. 이 말씀 안 지킬래 골라 골라 골라잡을 그럴 입장이 안 됩니다. 그냥 따라 말씀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지금 누가복음 8장 12절 말씀을 지금 보여주고 있다는 것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주께서 그렇게 다루시는 거에요. 하나의 과정이니까요.
여기 10절 한번 봅시다. 8장 10절.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그 다음에 뭐라고 되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이죠. 비밀은 나타났다고 비밀이 공개되는 게 아니에요. 비밀은 끝까지 비밀답습니다. 끝까지 비밀다워요. 그러면 비밀은 인간 힘으로 캐낼 수 있다? 못 캐낸다? 못 캐내죠.
막달라 마리아가 비밀을 캐냅니까? 못 캐내요. 막달라 마리아에 막달라 마리아가 있다면 하늘나라 비밀하고 아무 연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비유의 세계에서 씨로 바꾸니까 이건 뭐냐? 허락 맡은 자가 되어버려요. ‘허락 맡은 자’. 제가 여러분들에게 공부하시는 것을 확인 차 해보겠습니다. 문제를 하나 내볼게요. 문제 이겁니다.
씨 뿌리는 비유의 반대되는 비유를 제시하세요. 한번 맞춰보세요. 씨 뿌리는 비유에 꼭 반대되는 비유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까 이야기했는데요. 제가 적을게요. 씨 말리는 비유. 씨를 없애는 비유죠. 이걸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는 게 아니고 이게 뭐냐 하면은 이게 현실이라는 거에요. 이게 오늘날 현실이라는 거에요. 이게 220개국 국가가 만들어낸 이 지구상의 오늘날 모습이 이 모습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뭐냐 하면은 이미 이 세계에 있다가 성령 받아서 오늘 본문대로 허락을 받아 가지고 무슨 비밀을 알게 되었다? 천국 비밀을 알게 되었잖아요. 그럼 알게 된 우리 자신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우리 자신이 천국의 비밀 요원이 되야 돼요. 그러니까 전에 현실에 있던 내가 지금의 나를 이해 못해야 돼요.
내가 미쳤지 미쳤지. 내가 돈도 안 되는데 예수를 왜 믿지. 전에 있던 우리 모습을 우리가 잊을 수가 없어요. 몸이 잊을 수가 없는데 지금 현재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이것이 도저히 예상을 못한 겁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은 인간의 현재는 그게 뭐가 쌓여서 현재가 되느냐 하면은 과거가 계속 쌓여 올라가서 현재가 된 거에요. 과거는 밑에 계속 내려가거든요. 계속 내려간다고요. 참 이건 알아놓으면 참 좋은데요.
2010년도 2015년도 2021년도죠. 2015년에 현재화되었던 것은 그동안 2010년 가운데서 자기가 그 기억에 남는 그런 과거만 2015년도 현재가 되는 거에요. 그러면 2015년도의 현재가 되지 않은 2010년도의 과거는 어디 있느냐? 현재 2021년도 제일 밑바닥에 있다니까요. 잠재되어 있단 말이죠. 잠재되어.
세상에 고등학교 졸업한지 40년 지났는데 늘 고등학교 동창생 생각하는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없는데 우연히 길에서 뒤에서 차가 받았는데 보니까 동창생이다 뭐 이런 경우 예를 들면 했을 때에 “너 아냐? 너 맞지? 이름도 잊어 버렸어. 너 맞지? 고양이 때려죽인 너 맞지?” 기억나는 아주 참혹한. 담임 선생님한테 대들었던 너 맞잖아, 한다고요.
그러니까 생각 안 해도 잠복되어 있는 2010년도는 2015년도에는 현실이 안됐다가 2021년도에 우연히 만났을 때 되거든요. 그럼 21년도는 뭐냐? 과거에 누적된 그 가운데 지금 내가 생존에 필요한 기억만 여기서 뽑아서 나의 삶의 배경, 환경을 만든 거에요. 다른 것은 필요치 않으니까. 내가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현재를 만든 거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인간은 현재를 잊는다? 못 잊는다?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현재, 과거를 조성하는 자가 누구냐 하면은 나란 말이죠. ‘나’. 개인적으로는 자아고 사회에 나가면 주체로서의 나. ‘나’가 이 현재를 구성하거든요. 그런데 이 현재를 누가 와서 삼킨다고 했습니까? 이미 다 이루었다. 이미 구원 끝났어요.
이미 하늘에 앉히신 에베소서 2장7절의 말씀처럼. “이미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아는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한 자를 영화롭게” 끝내느니라. 끝내버렸어요. 이미 성도에요. 구별된 성도에요. 이건 자기가 노력해서가 아니라 성령이 오면 성령이 안에서 주관하기 때문에 성령이 오게 되면 성도.
이 성령이 와서 삼켜버리면 이런 모든 것이 소급해서 무슨 일이 되느냐 하면은 나의 일이 아니고 이게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주의 일이 되면서 비로소 우리는 마귀 짓 했고 가시덤불 떨어진 씨앗 질 했고 씨는 씨인데 바위에 떨어져서 배신했고 가시덤불 떨어져 농부가 원하는 열매 못 맺었고 그것이 불현듯 계속해서 기억나게 하는 거에요.
그러면 나의 기억이 아니고 누구의 기억입니까? 주께서 의도적으로 나를 건드려서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우며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로마서 5장의 그 말씀, 그것도 말씀이잖아요. 그 말씀을 이렇게 너한테 완성시켰다는 것을 티내게 만드는 그 작업에 계속해서 우리가 가게 하는 거에요. 그러면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가 아니고 누가 주인공이에요. 내 안에 살아계신 분, 주님이 살아 계신 거에요.
데살로니가 2장에 이런 말씀은 몇 주 정도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만은 아무리 생각하고 두고두고 생각해도 이 말씀이 우리한테 정말 참 여러 가지 말씀도 중요하지만 이 말씀도 참 중요하다고 생각이 드는 게 바로 2장 13절 말씀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그 뒤에 나오는 말씀. 그 뒤에.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일한다”
네가 일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공장해도 일해도 네가 아니고 말씀이 공장경험 하라고 나보고 그 길을 주신 거에요. 왜? 오늘밤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죽는 걸 몰라.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몰라요. 그러나 죽을 때 죽더라도 충분히 다 우려먹고 죽는 거에요. 주께서. 이미 구원했으니까 본전 뽑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골곰탕 우려내듯이 우려내는 어떤 가수 이름 있죠. 홍자. 곰탕 국물 우려내듯이 말씀만 우려내는 거에요.
바로 그 장면이 네가 바위에 떨어진 씨야. 씨의 과정이야. 그게 바로 가시덤불의 근거야. 그럼 우리는 이미 합격된 상태잖아요. 합격된 상태에서 뭐 아주 감사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니죠. 왜? 맨날 하는 게 어설프니까. 남는 것은 감사만 하는 거죠. 머리를 긁어서 머리 다 빠지게 생겼어. 아이고 고마워라. 아이고 감사해라 이러고 있다는 거에요.
아까 동영상 두 번째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성도의 그 자세는 당당하자. 당당합시다. 마귀 세계에 대해서 벌벌 떨 일이 없어요. 당당해야 돼요. 오늘 제목은 뭐냐 하면은 오늘 제목을 이렇게 한번 정해 봤습니다. ‘아름다운 과정’. 주의 일에 우리는 주인공이 아니고 과정으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들어가게 된 것이 허락 맡은 거에요. 하나님께 허락 맡은 거에요.
다시 한번 누가복음 8장으로 돌아와서 다시 한번 제자들 한번 봅시다. 제자들이 이 비유의 뜻을 9절에 보면 “무슨 뜻입니까” 물은 거에요. 제자들이 이 뜻을 무슨 뜻이냐고 물었던 취지가 여러분들은 이해해야 돼요. 왜냐하면 4절에서 8절 있잖아요. 이게 무슨 뜻인지 모를까요? 이건 주일학교 애들도 알아요 이거는. 주일학교 애들 일반 초등학교 애들도 알아요.
어떤 농부가 씨를 뿌렸는데, 이게 어렵습니까? 농부가 씨 뿌리지 농부가 고기 잡습니까? 씨 뿌리잖아. 그런데 밭에 뿌렸는데 공중에 새가 와서 물어 갔거든. 그럼 새가 물어가지 드론이 물어갑니까? 너무나 이건 현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거에요. 현실 그대로를. 현실 그대로를 보여주는데 이게 현실이 아닌 것을 제자들이 감 잡은 거에요.
“아니야 이건 그냥 현실이야기 농부가 농사짓는 이야기 아니야.” 그러면 100배의 결실은 뭡니까? 내가 펀드 하니까 100배 수익이 오르는 그것 말하는 거에요? 기도하니까 응답보다 100배 많은 그런 겁니까? 가게 하나 차려놨는데 프랜차이즈 100개 생기는 그럴 때 기도 응답받은 거에요? 99개는 응답 아니고 100개 되야 응답입니까? 아니잖아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거는 주께서 필히 이 세상에서 네가 이런 세상에서 네가 탈출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필수 코스에요. 하나의 과정 속에 들어가는데 그 과정 역할을 누가 하느냐? 바로 성도이기 때문에 이 말씀이 들을 귀가 있기 때문에 들을 수 있는 거에요. 아 말씀이 왔을 때 마귀가 뺏어가는구나. 이게 성도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에요.
성도가 아닌 사람은 “당신 마귀가 와서 복음 말씀 뺏어간 거 압니까?” “뭘 뺏어가? 나는 잠 잤는데.” 자기는 잠잤대요. 마귀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잠잤고 별로 관심이 당기지도 않고 그 자리에 있기 참 거북스럽습니다. 뭐 이정도로 이야기해요.
세상에서 말하는 그 비유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을 부정하지 않은 채 그냥 두고서 그걸 쉽게 의미를 설명을 덧붙이기 위해서 하는 거라면 주님의 비유는 뭐냐 하면은 허락 맡아야 알고 비밀이고 일체 악귀가 지배하는 악마가 있는 이 세상과 주님의 나라는 완전히 등을 돌린 상태. 건너올래야 건너올 수 없다는 것, 그걸 분명히 하는 그게 바로 비유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그 말씀 자체가 이미 천국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거에요. 비유의 모습으로서. 남은 것은 뭐냐? 비유에는 절차가 있지요. 열매가 다시 씨 될 수는 없어요. 주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마지막 십자가에서 이룰 때까지 그대로 밀어붙이는 겁니다. 이런 과정들 밀어 붙이는 거에요. 여기 15절에 봅시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 가진 사람 누구 있습니까? 12제자 가운데 착하고 좋은 마음 있었습니까? 12제자 가운데 없었지요. 착하고 좋은 마음 있으면 도망칩니까? 아니잖아요. 12제자는요 자기만 생각해요. 자아가 있고 자기 주체가 있는 겁니다. 차라리 막달라 마리아가 더 나아요. 그렇지요? 전부 다 겁나서 붙잡혀가가지고 겁나있는데 막달라 마리아하고 야고보 어머니 마리아하고 마리아 3인조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하고 마스크도 안하고 무덤에 들어갔어요. 벌금 낼 각오하고 무덤에 갔다니까. 코로나 있는데. 비비 꼬는 거 아니에요.
참 다음 주부터는 여기서 안하고 대치동에서 합니다. 대치동에서 해요. 과거, 현실 안 잊어버렸지요? 이제는 비유로 갑시다. 이미 구원받은 자로 대치동에 한번 가봅시다. 대치동도 무너지면 못 가지만 지금 계획은 그렇습니다. 15절 말씀 봅시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착하고 좋은 마음 있다는 이 말은 만약에 이렇게 열매를 맺는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 능력입니까? 땅 자체가 좋아서 그렇습니까? 밭 자체가 땅 자체가 좋아서 그런 거에요. 주여 저를 왜 좋은 땅으로 사용했습니까? 오히려 반문해야 되지요. 왜 차이가 없는데 다 같이 어둠이고 다 같이 죄인인데 왜 차이를 두십니까. 너 잘나서 차이 두는 게 아니고 과정에 오다 보니까 그 과정 속에서 주님이 일방적으로 주님 자신이 통과해야 될 위치거든요.
주님은 마귀도 통과하고 바위도 통과하고 가시덤불로 통과하고 다 통과 통과 통과 해가지고 주님 자신이 좋은 밭이 되었잖아요. 그럼 그 통과를 제자들도 같이 통과하는 거에요 이제. 어차피 열매가 되었으니까. 포도나무 열매가 되었으니까요. 그 다음에 16절 봅시다. 16절.
자, 16절 들어가기 전에 좀 걱정이 되가지고 뭐 들었는데 뭘 들었는지 모르겠다 되거든요. 뭘 들었는지 모르겠다. 이거 들어온 거에요. 이거. 과정 속으로. 이거. 제목은 ‘아름다운 과정’이에요. ‘아름다운 나’가 아니고 그냥 내가 과정 속에 흡수, 통합되어 버리는 겁니다. 그럼 주인은 누굽니까? 주님이 주인이죠. 주님이 과정을 이끄는 거죠.
이게 바로 사도들이 성령 받은 사도들이 이 과정 속에 들어간 거에요. 고생도 하고 굶기도 하고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도 하고 그렇게 하지요. 해도 결국은 뭐냐 하면은 주께서 지옥 천국이 같이 있으니까 그 가운데서 지옥 같은 너를 천국으로 끄집어냈다가 매일같이 이걸 반복시켜 주니까 자기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 복음, 내 살과 내 몸, 주님의 몸이 움직인다는 것 우리는 정지화면이고 stop된 거고 진짜 움직이는 것은 우리를 데리고 주님이 우리를 큰 함선을 만들 듯이 우리를 데리고 다닌 거에요.
심지어 지중해 폭풍을 지나서 로마까지 주님이 데려간 거에요.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네 옆에 내가 있잖아. 이걸 그 폭풍 치는 그 속에서 이 이야기를 하니 참 사도는 죽을 지경. 그럼 폭풍을 멈추던지 안 멈춰요. 사도 바울이 소망이 뭐냐? 이제 따로 놀지 말고 주와 같이 있고 싶습니다. 이게 소망이었어요 사도는.
그냥 이 땅에 사는 것은 이거는 그냥 합격되고 난 뒤에 수능 다 합격되고 난 뒤에 시험 치는 거죠. 안 쳐도 합격이에요. 합격인데 그 시험 과정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너 있는 자리에서 있는 나이대에 있는 시대에 따라 있는 국가 따라 각자 각자 주님께서 거기서 주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우리로 하여금 제사장으로 왕 같은 제사장 되게 하신 겁니다. 잊지 마세요 하나의 과정속입니다. 본인이 열매를 챙길려고 하지 마세요. 열매는 나를 통해서 나타나지. 온유와 화평과 자비는 나를 통해서 나타나요. 내 과정을 통해서.
16절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이제는 이런 것 조차 뭐냐 다 비유처럼 느껴져요. 그렇죠? 이걸 누가 몰라. 평상 아래 두겠습니까 등경 위에 두지요. 환하게 비취라고 두잖아요. 그런 이야기 나도 하겠다 이러거든요. 그러나 주님이 나도 하는데 전에는 내가 하게 되면 나 따로 등불 따로 있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나로 등불 되게 만드는 거에요.
주님이 우리를 숨기지 않고 올리면 우리는 또 안 갈라고 애를 쓰거든요. 주께서 기어이 높이 들게 만듭니다. “이번에 수석합격하란 말이야.” “안돼요 안돼. 나는 판사 되기 싫어요.” “해!” 그럼 해야지 뭐. “시험에 또 합격. 또 합격해.” “나는 시험에 합격하는 거 싫어.” “해!!” 하나의 과정이니까. 약간 기분 좀 좋아지지요? “암에 걸려!” 이런 것 보다 훨씬 낫잖아요. 이왕 과정인데.
“그 빛을 보게 함이라” 그 빛은 주님이죠. 17절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야 이걸 빠트리면 안돼요. 오늘 강의에서. 우리는 비밀요원이에요. 다 드러났는데 비밀요원이에요. 심지어 어느 정도냐? 나도 나를 이해 못할 정도로.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지. 내가 왜 이렇게 살지. 우리는 현실을 알아요. 현실에 사는데 어떻게 살고 지금도 알 뿐더러 우리는 과거 내의 현실에서 내가 주인공처럼 살기 때문에 현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거는 바뀌어도 예상 못하게 바뀐 거에요. 전에는 내가 마귀 들렸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씨를 외면한 그것이 바로 그게 마귀 짓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지요. 아 내가 십자가 대신 사랑의 하나님 믿었구나. 이게 마귀 짓이란 사실을 이제 아는 거에요. 사랑의 하나님은 지금 나 좋아라고 하잖아요.
그러나 복음은 이건 내 살이다 내 피다 하잖아요. 그럼 예수님의 살과 피는 곧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이 살과 이 피가 담겨있는 나라는 주인공은 죽었다. 너도 나처럼 죽어야 부활되는 거야. 그걸 공유하자. 그 체험을. 이게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잖아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신다 이 말이죠. 그럼 우리는 또 안돼 애가 지금 7살인데 안돼. 뭐 이러고 있단 말이죠.
누가 하라고 그랬나. 가만 있어봐 내가 해줄게. 내가 너 애고 뭐고 네 일은 없고 내가 너의 자식은 어떻게 되고 내가 분배하고 내가 알아서 다 할 테니까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주어진 대로 그냥 범사에 감사하면 돼. 그냥. 어떤 채로?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남들이 나를 못 알아준다고 섭섭해 하지 말고 나도 나를 못 알아주잖아요. 나도. 내가 나를 배신하고요 내가 맨날 정신 차려 인간아 막 이런다고요. 복음이 뭔데 네가 그걸 왜 믿어?! 내가 나를 막 나무랜다고요. 18절에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참 이 말씀이요 이게 존재자로 이해하면 이거는 성립 안 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없는데 빼앗길 것도 없잖아요. 빼앗길 것도 없는데 뭘 빼앗겨요. 아예 없는데. 하나의 존재자로 생각한다면 말이 안돼요. 있는 자가 빼앗긴다는 것은 이해되는데 아예 없는데 빼앗길 것도 없는데 빼앗아간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 이 비슷한 말씀 나오지요. 마태복음 25장에. 10달란트 5달란트 한 달란트 이야기.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없는데 있는 것도 빼앗긴데. 있다 없다는 도대체 어떤 위치에서 어떤 위상에서 그걸 사용하시는지를 알고 있어야 돼요. 그것은 바로 생명을 두고 이야기합니다. 주시고 누구나 아무도 생명이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 주시면 천국의 비밀을 주게 되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있음이 생겨요. 생명 있음이 생겨요. 이것을 가져가시는 거에요. 이것을. 그러면 생명이 없는 자는 생명이 오게 되면 여기 생명이 없다가 드러나요. 생명이 없다가 되면 없음 자체를 주께서는 저주해버립니다. 왜 없느냐고.
그러니까 불신자는 뭐냐? 주지도 않고 닦달낸다는 거에요. 그게 주의 방식입니다. 주지도 않고 왜 없느냐고 나무래는 것. 아 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래서 불신자는 바른 이야기만 해요. 그런데 신자는 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인간들이 알아먹지 못하는 그들 보기에 거짓말 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이 있는 자는 그 생명 때문에 구원받고 생명이 없는 자는 없다는 이유로 지옥 간다. 말을 이렇게 바꾸시면 됩니다. 믿거나 말거나.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이 땅에 오시고 다녀간 그것을 모든 의미와 모든 가치의 출발점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이제 다시는 우리 자신의 생존을 구원을 출발점으로 여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