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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11108a 부산강의 : [시편]43(27:10)-십자가 소리자유게시판시편

20211108a 부산강의 : [시편]43(27:10)-십자가 소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27편,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렇게 시작하지요. 시편 해석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자체적으로 시편 안에서 우리에게 해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편 27편 10절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거기에 보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부모한테 버림받으면 나라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신약적 용어로 하면 육이거든요. 혈육이죠. 혈육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면 시편 해석이 안 된다는 그런 뜻이죠.

나라는 것은 어디에 포함되느냐? 나라는 환경은 먼저 선제된 부모의 육에서 내가 나왔기 때문에 그 안에 포함이 돼있어요. 포함이 돼있으면 나의 존재 경계선은 부모를 버릴 수가 없어요. 부모를 떠날 수가 없어요. 부모 떠난 나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부모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시편에 나오는 다윗,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 신앙인 전부는 어떤 절차를 밟아야 되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부모로 태어난 나 자체가 제거돼야 되고 해체돼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이 시편이라는 언약의 세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들어설 수 없어요. 언약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면 성경 자체가 해석이 안 되게 돼있어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라고 1절에 그렇게 돼있지요. 이 ‘나’가 누구냐?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할 때 나는 누가 되느냐 하면 여호와의 확장이 됩니다. ‘여호와=나’가 돼요. 그러니까 여호와만 나가 될 수 있지 그 외에는 나가 될 수 없는 거예요. 하나님 자신이 나가 되기 위해서 하늘에 있는 여호와께서 지상에 인간세계에 찾아오게 돼있어요. 그 과정이 시편이고, 시편 27편입니다. 저는 이걸 여호와의 확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여호와께서 이렇게 확장 돼야 나가 되는 이유는, 여기 시편에 나오는 모든 개념의 의미가 여호와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기 장막이라는 것, 전쟁이라는 것, 그리고 초막이라는 것, 그리고 나의 원수 전부 다 우리 인간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육의 인간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더 확실하게 말씀드려서 성경과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너무 잘 지워져서 미안하다. 왜 여기만 이렇게 잘 지워지는지. 원조가 되어 그렇지요. 이 원조, 원형, 기원 그 출발점에 대해서 현재 기존에 부모에 속한 육의 나는 이런 것을 방해해 왔다. 방해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원조, 원형, 기원을 훼방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등장함으로써 다윗을 통해서 육과 영의 경계선을 확립하려고 하는 거예요. 확립 또는 확정지으려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 여러분 어떻게 합니까? 신앙생활 제가 하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신앙생활은 뭐냐? 날마다 육과 영의 경계선을 확인하는 게 신앙생활이에요. 육과 영의 경계선. 어디까지가 육의 범위고 어디까지가 영의 범위 넘어온 것인지 날마다 확인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육이라는 것은 어떻게 아느냐? 육이라 것은 영의 세계가 들이닥쳐야 육이 등장하지요. 영의 세계가 안 들이닥치면 나는 나에요. 나는 그냥 나라니까요. 부모님은 그냥 부모님이고.

부모님께 버림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거예요. 부모님이, 나가. 니 내 자식 아니라 해도 버림받은 게 아닙니다. 부모라는 의식이 있는 한 그게 버림받은 게 아니에요. 사이가 안 좋은 거지. 사이가 안 좋고 자식 취급하지 않는다는 그 정도 인간적인 감정의 문제지 근원적인 문제, 기원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육에서 끊어져야 되는데 육이란 자체가 우리한테는 받아들이질 않습니다. 나는 인간이지 육이 된 적이 없어요. 나는 그냥 인간이에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으로 와서 인간으로 태어난 이것을 알기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나를 조롱한 적이 없다.” 이것 평생 갈 겁니다. 우리 인간은 평생 가요. 나는 나를 조롱한 적이 없어요. 남들이 나를 조롱한 적이 있지만 내가 나를 어떤 경우라도 지옥 가더라도 나는 나를 조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로 나는 나를 조롱하지 않는 한 나는 해체되지 않아요. 해체되지 않으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여기서 고집이 발생해요. 내 존재에 대한 강력한 고집, 집념이 생깁니다. 나는 나를 유지하려는 집념이 생겨요. 물어볼게요. 우리가 ‘나’들의 집합, 개인들이 모인 게 이 세상인데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것보다 중요한 것 이야기해보세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보리건빵 먹고 하는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이게 없어요. 왜냐하면 그것이 어디를 향하느냐 하면 나에게 달려와서 나의 의미를 확립해주기 때문에 내가 중요하기 때문에 내 확립에 도움 되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이거는 우리가 스스로 포기할 수 없어요.

특히 나는 나를 조롱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나를 미워한 적이 없어요. 항상 나는 아무리 이 세상이 나를 버린다할지라도 나만이 나를 변호해줘요. “힘내라, 힘!” 이런 것 있잖아요. “쓰러져도 일어서야지. 달려라, 하니.” 세상이 너를 실망케 해도 나는 나를 실망케 해선 안 된다는 것.

그래서 나는 나를 조롱한 이상은 여기서 뭐가 살아 있느냐 하면 육과 영의 경계선이 날아가 버려요. 왜냐? 나로 통합된 세계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 눈에 보이는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것은 다 나에게 향하여 달려와서 나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서 집약이 되는 재료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내 쪽에서 버릴 수가 없어요. 내 잘 되기 위해서 세상 모든 것은 움직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걸 버립니까? 버릴 수 없지요.

나는 스스로 해체되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파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성경에서는 사무엘상, 시편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선택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겁니다. 누가 사무엘상 16장 1절 읽어봅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뭐했습니까? 버렸다 하잖아요.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입니까. 이게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게 통할까요? 내가 날 안 버렸잖아요. 내가 날 안 버렸는데 감히 누가 나를 버린다는 게 성립이 안 되거든요. 내가 나를 안 버리는 한 남이 날 버린 것은 버림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왜? 내가 날 버리지 않으면 살 권한과 자신감이 유지되기 때문에 그래요.

여기 아까 시편 27편 10절에서 부모가 나를 버렸다고 돼있어요. 부모가 버리든 남이 버리든 이 버림이 제대로 버려지는 경우가 발생된다면 기존의 육에서 영으로 선택된 자에게만 이것이 성립이 돼요. 여러분들 부모가 나를 버리는 경우는 없고요 내가 부모를 버리는 경우는 있어요. 왜냐하면 버림이라는 것, 누굴 버리고 누굴 택하는 것은 그 권한이 누구한테 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나 오직 나한테만 그런 자유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남이 나를 깐다? 이거는 우리는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내가 까지 않는 한 내가 까인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되게 돼있어요. 내가 나를 안 깠는데 니가 뭔데 나를 까? 이래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우리는 시편 27편 들어갈 자격조차 안 된다는 거예요. 이걸 해석할 자격조차 안 돼요. 무엇을 의지하지 않는 한? 선택이란 걸 의식하지 않는 한.

다윗이 아니라 사울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에 대해서 사무엘상 16장 1절에 보니까 사울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 라는 이야기가 성립이 된다면 이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내가 나를 안 버리면 되지 나는 나를 쥐면 되지, 라는 말 자체가 애초부터 성립이 안 되고요 하나님이 사울처럼 나를 버릴 거냐, 유지할 거냐? 이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된 거예요. 하나님이 나에게 더 중요한 문제가 된 겁니다.

내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잘 먹고 잘 사는 이거는 이 상태로서는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인할 길이 없어요.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타고 돌아다니면서 이게 지금 버림받은 짓인지 아닌지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어떤 근거가 될 수 없어요. 나는 즐기기 위해서 내 인생 여유롭게 살기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다. 이렇게 된 이상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는지 증명이 안 되잖아요.

증명이 안 되면 뭐가 사라지냐 하면 아까도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육이냐 영의 경계선을 찾을 수 없어요. “그 찾는 게 왜 필요하지? 나는 그것 안 찾아도 나는 나 혼자 살 거야.” 이러면 끝나는 문제에요. “교회 안 가도 별로 아픈 것 없는데. 교회 안 가면 집에 혼자 있지, 뭐.” 육과 영의 경계선 자체가 자기한테 생각나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택 의미 지상에 주어져야 여기서 너를 버렸다, 너는 너를 선택했다가 하나님의 선택이 전제가 될 때 이 결과가 성립되는 겁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것은 리브가에게 계시, 꿈으로 나타나야 비로소 가능한 거예요. 야곱과 에서는 그냥 태어났을 뿐이지 누구의 선택에 의해서 또는 버림받기 위해서 태어났나는 사실은 둘 다 어린애일 때는 모르는 겁니다.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시편 27편을 이렇게 생각하면 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들을 두고서 자신의 선택의 의미를,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의미를 생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육의 인간과 영의 인간, 대조되는 인간을 여기서 생산했다. 만들어낸 거예요. 여기서 여러분들이 이것 하나 정리합시다. “진리는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것이다.” 이것 많은 설명이 필요한 문장이에요.

어떤 사람이 교회 왔습니다. 목사님이 설교합니다. 구원은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듣는 사람이, 행함은 별로 안 좋은 거고 믿음은 상대적으로 좋은 것으로 들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할 때 그걸 듣고 이 사람은 뭘 시도하느냐 하면 성경에 나오는 믿음과 나의 행동을 여기서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면 나는 진리대로 구원받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건 뭐냐 하면 이것은 일치되기를 노력하는 거예요. 성경말씀대로 일치되기를 노력하는 사람이지 생산되는 게 아니에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는 말을 성경에서 봤을 때 나는 이 성경구절대로 꼭 합치돼야지. 누굴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되고, 나는 여호와의 빛이 되고, 난 여호와의 구원이 되어야지, 라고 시도하는 것이 바로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육의 사람의 특징이 되는 거예요.

생산이라는 것은 없는 데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를 생산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생산자가 나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순간 나는 있으나마나 되기 때문에. 이 세계무대에서 좀 꺼져줄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꺼져주려면 나는 나를 조롱해야 됩니다. 어떤 입장에서? 주님의 안목에서 나를 조롱해야 돼요. 나를 미워해야 돼요. 하여튼 니는 주님의 일에 방해물이 돼, 라고 그대로 나를 표현할 수 있어야 그게 바로, 이게 뭐냐? 그게 기원의 문제고, 원조의 문제고, 원형의 문제가 되는 겁니다.

좀 진도 나가볼게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나라고 지칭하는 자를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나를 전부 다 제거해버리고 여호와께서 생산하고자 하는 나의 자리를 그 누군가에 확립하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여호와와 나 사이에 시편 27편을 깔아놓은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뭐냐? 나는 길이요, 라고 돼있지요. 나는 길이요, 라는 말은 이 세상에 어느 것도 길이란 말이 아니고 길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옛날 신화의 세계라든지 고대 중국에 보면 천국으로 가는 길 나와 있잖아요. 이쪽 밑바닥은 길이 아니에요. 길은 따로 있다, 따로 있음이 골치 아픈 거예요. 아무데나 가는 게 아니고.

기차가 아무데나 가면 기차가 아니지 트랙터지요. 기차는 어느 길로 가야 돼요? 궤도가 있는 곳만 갈 수 있어요. 주님께서 궤도를 따로 깔아놨다는 겁니다. 그 궤도이름이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나는 궤도요, 나는 길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하는 나 있잖아요. 나와 기존에 인간들이 육에서 만들어낸 모든 나와 여기서 비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한테 묻는 겁니다. 너 어느 쪽 나할래? 어느 나에 네가 머물래? 우리한테 이걸 다그치는 거예요. 요한복음 13장 마지막에서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하나의 길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를 합니다. 주님 가신 길에 나도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할 때 주님께서는 베드로 너는 이게 될 수 없어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길은 베드로가 아니고 길은 오직 예수님으로 이미 끝났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길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같이 붙어서 갈 수 없는 거예요.

베드로가 주님의 길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베드로 자기 자신을 조롱해야 됩니다. 조롱해야 돼요. 조롱이란 말보다 더 어려운 말이 뭐냐 하면 ‘피곤’이에요. 피곤이란 나를 응시하는 것을 더 이상 수축할 수 없는 지경. 풀이보다 피곤이 더 쉽지요. 피곤이란 나를 응시하는 것을 더 이상 수축할 수 없는 지경 또는 지점. 내 생각이 안 나는 그 상태, 그게 피곤입니다. 내가 나한테 지쳐버렸어.

여기에 적절한 노래가 있는데 그게 뭐냐? 김종환의 자기 삶에 지쳐서 뻗었어. 자기가 뻗었으니까 자기의 존재 의미도 같이 상실하겠지요. 그러나 그 노래에서는 최후로 자기의 손에 여자 친구의 사진을 쥐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비록 나는 뻗어가고 완전히 피곤에 절었지만 그래도 내가 내일 되면 또 배달 나가고 수고하는 이유들 다 너로 인하여 너 때문에 활동하는 의미가 있다는 게 마지막 사진 쥐고 뻗어버립니다. 피곤에 지쳐서. 쓰리잡한다고 뻗은.

그러니까 이십대 후반, 삼십대, 사십대 남자들의 이 노래를 안 좋아할 수가 없지요. 왜 좋아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그거에요. 그 가사에도 나와요. 이게 진짜 핵심이에요. 나는 왜 이래 사는 거야. 자기가 자기한테 묻는 겁니다. 나 왜 이래 사는 거야? 절망적이죠, 자기한테 절망. 절망이지만 희망인 것은 너 때문에 내가 비로소 이렇게 힘들지만 살 이유가 있는 것은 다 너 때문이야. 내가 달려갈 거야. 조금만 기다려줘. 내레이션 막 나옵니다. 달려가서 그 여자와 결혼했잖아요. 이게 바로 육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궁극적으로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김종환)

언젠가는 너와 함께 하겠지 지금은 헤어져 있어도
네가 보고 싶어도 참고 있을 뿐이지 언젠간 다시 만날 테니까
그리 오래 헤어지진 않아 너에게 나는 돌아갈 거야
모든 걸 포기하고 네게 가고 싶지만 조금만 참고 기다려줘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지만
니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니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

(내레이션)그래 다시 시작하는 거야 조금 늦는다고 바뀌는 건 없겠지
남자란 때로 그 무엇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릴 때도 있는 거야
넌 이해할 수 있는 거야 넌 이해할 수 있겠지
정말 미안해 널 힘들게 해서
하지만 너무 슬퍼는 하지 마 너의 곁엔 항상 내가 있을 테니까
우리의 미래를 위해 슬퍼도 조금만 참아줘
내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니가 있기 때문이야
널 사랑해

저녁 늦게 나는 잠이 들었지 너를 생각할 시간도 없이
너무나 피곤해서 쓰러져 잠이 들었지 난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눈을 뜨면 또 하루가 가고 내 손엔 작은 너의 사진뿐
너를 다시 만나면 꼭 안고 놓지 않으리 헤어져있던 시간만큼

알 수 없는 또 다른 나의 미래가 나를 더욱더 힘들게 하지만
니가 있다는 것이 나를 존재하게 해
니가 있어 나는 살 수 있는 거야
조금만 더 기다려 네게 달려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니

그래서 시편 27편을 보면서 사람들은 이 말씀이 자기한테 용기가 되기를 바라서 말씀을 보는 거예요. 이 말씀대로 되게 하옵소서. 지금 그 인간은 육과 영의 경계선 날아가 버렸어요. 오직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귀환돼요. 나 좋으라고 성경책 있고 하나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럼 경계선은? 네가 육이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그 전쟁은? 없지요. 나는 어떤 경우라도 잘 돼야 되기 때문에.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고집이 있어요. 나는 무조건 잘 돼야 돼. 무조건 천국 가야 되고 이건 묻지도 따지고 할 것도 없이 나는 무조건 잘 돼야 돼. 이런 고집 있잖아요, 황소고집. 선택에 의미가 없어요. 왜? 본인이 본인을 선택했기 때문에. 주님의 선택이 오게 되면 나는 그동안 나를 선택했던 내 선택에 손을 놔야 돼요.

놓으면서 시원하게 누굴 조롱하느냐? 내가 나를 조롱하면서 놔야 돼요. “아이고, 인간아. 인간 같지도 않는 것.” 이게 남이 이야기하지 말고 내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시편 27편을 들어갈 수가 없어요. 제가 지금 뜸을 들이고 있어요. 이 해석하는데.

경계선이 없다는 말, 육과 영이 경계선이 있어야 된다는 것. 인간들은 경계선 같은 것은 생각지 않고 무조건 자기 자신을 잘 돼야 되는 쪽으로 그냥 가니까. 자기가 길도 아니면서 행세하는 그런 경우를 쉬운 예를 들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이 두 개의 차이를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내가 밤길을 가는데 달이 계속 따라온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시겠지요. 모르거든 노사연의 에 보면 다 나와요. 두 번째, 내가 직접 달에게 간다. 이 차이? 한쪽은 내가 가는데 달이 따라오잖아요. 그런데 이쪽은 뭐냐? 아예 자기가 달에 올라 타. 직접 달에 가는 거예요. ①번이 육이라면, ②번은 영입니다. 내가 달에 합세하는 거예요.

이게 가당치 않지요. 가당합니까? 달이 몇 킬로 떨어졌는데 거기에 갑니까? 달은 천상에 있고 나는 지상에 있는데 어떻게. 따라오는 것은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지만 달에 직접 가는 것은 아폴로에다 돈이 얼마나 들었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겠지요. 이 불가능함을 시편 27편에다 담은 거예요.

내가 길을 가는데 따라온다. 이게 육이에요. 그래서 이걸 교회에서 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주인공은 나에요. 나야 나. 내가 주인공이에요. 여기 내가 달에 직접 가면 달이 주인공이에요. 달이 나를 소멸시켜버린 거예요. 달이 내 자리에 찾아와서 그동안 나였던 것을 달이 내 자리를 다 차지하고 만 겁니다. 그래야 여호와와 연결되고 하나님과 연결이 가능해요. 왜? 하나님은 인간과 안 만나주니까.

이 둘 모습을 다 보여주는 것, 우리들이 익히 아는 용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언약, 이걸 약속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이라는 것을, 보통 인간들은 언약이 약속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은 아까도 했지만 일치시키려고 합니다. 의도가 뭡니까? 나 언약과 함께 살래, 이거잖아요. 그런데 진짜 언약은 일치를 시키는 게 아니고 언약 자체의 확장, 그리고 생산하는 거예요.

네 육이 낳은 너 말고 하나님이 생산한 너이기를 바라는 거예요. 그러면 예를 들어 야곱이라면 뭐로 바뀝니까? 야곱이라면 나중에 우리가 알다시피 뭐로 바뀝니까? 이스라엘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야곱은 이스라엘을 예상해본 적 없다는 사실이에요. 야곱은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지 하나님이 친히 생산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은 생각도 못한 거예요.

야곱이 밤중에 천사를 만나서 이스라엘 됐잖아요. 그 상황을 신약에서는 그냥 이렇게 보면 돼요. 십자가 만나서 이스라엘 됐다, 같은 말이 될 수 있어요. 십자가 만나서 십자가 안에는 야곱이 죽은 거예요. 야곱이 죽어야 이스라엘 되니까. 육이 죽어야 영이 되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뭘 아느냐? 육과 영의 경계선이 여기서 발생되는 겁니다.

아브람이 뭐 됐지요? 아브라함 됐지요. 아브라함 될 때 육과 영의 경계선이 발생되는 겁니다. 경계선에 아브라함이 될 수밖에 없는 생산된 어떤 근거가 있을 거예요. 이것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누구라고 지시받느냐 하면 바로 이삭, 바로 자기로 생산될 수 없는 것, 인간이 아브라함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아브라함은 불임이에요. 자식 못 낳아요. 아내와 더불어서.

그런데 사라와 아브라함이 불임인데 임신을 했다는 말은, 이것은 뭘 아느냐 하면 우리는 기껏 육에 불과하다는 것, 주께서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아브라함이 와야 비로소 그 경계선이 파악이 되는 겁니다. 일치가 아니고 주께서 새롭게 생산해요.

이것은 뭐냐? 언약의 확장이에요. 걷잡을 수 없는 확장입니다. 확장하면서 육과 영이 경계선이 발생되거든요. 육과 영 할 때 요 앞에 중간에 있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 하나님의 선택은 뭘 공격한다? 내가 나를 선택하는 선택 자율성을 공격하는 거예요. 난 어떤 경우라도 나를 포기하지 않을래, 라는 것을 하나님의 선택이 공격하는 거예요. “제발 너를 조롱하고 너를 미워하고 그만큼 너를 많이 쥐고 살아왔잖아. 이젠 너를 좀 놔줘라.”

너를 놔준다는 것? 나의 고유성을 포기하게 하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생각에 자기가 포기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포기하면 나를 포기시킨 내가 새로운 괜찮은 나로 등장하기 때문에 이거는 없앨 수가 없어요. 자기를 부인하면 자기를 부인할 때 개입된 나의 의지와 결심이 또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이게 범죄 한 인간의 딜레마에요. 아무리 도를 닦아도 구원이 안 돼요. 사람들마다 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정도 노력해도 구원이라 쳐주자. 이렇게 저희끼리 착각들을 벌이고 있어요. 그 작업을 누가 했느냐 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했어요. 이방인들과 우리는 확연히 차이 나잖아. 이방인들과 우리가 다르니까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선택받았고 구원받았다고 치자,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런데 막상 누가 왔습니까? 여호와가 나라고 지칭한 나에게 지상에서 이게 확장되니까 나머지 모든 인간들은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육이 되어서 하나님의 언약적 생산물이 아니었단 말이죠. 언약에 대해 방해물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아까 중요한 것 다시 이야기할게요.

야곱은 이스라엘 되기를 기대하거나 상상하거나 소망하거나 은근히 희망하거나 이게 전혀 없었단 말이죠. 야곱에게 없는 게 나왔어요. 그럼 야곱의 의미는 뭐냐? 야곱이 야곱에게 충실함으로 말미암아 그 충실한 것 말고 여기에 구원이 있는 거예요. 내가 나 구원받기에 충실할수록 그게 구원이 아님을 알리는 도구로써 야곱을 사용한 겁니다. 구원에 대한 집착, 다른 사람 지옥 가도 나는 천국 가야 돼, 라는 집착 그것으로 인하여 구원은 딴 데 있다는 것을 드러나는 하나의 전제가 되는 거예요.

한 가지 방금 이러한 내용이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데요. 여러분 너무 잘 아는 거예요. 요한복음 3장 17절과 18절을 보게 되면 설교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분명히 요한복음 3장 17절에 보면 독생자를 보내신 것은 심판을 하려 하심이 아니라고 분명히 나와 있어요. 그런데 18절에 보면 뭡니까? 벌써 심판을 받았다고 돼있어요. 지금 인간적인 안목에서는 이 두 개가 결합이 안 돼요. 심판 안 한다는 느낌으로 이게 나온다고요.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아아, 심판을 안 해주시는구나.” 안 해주신다고 편안한데 18절에 가니까 벌써 심판을 받았단 말이죠.

그럼 이 두 개의 서로 상반된 내용을 통합하려면 뭐냐 하면 벌써 심판받았기에 새삼스럽게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다, 라는 두 가지 내용을 하나로 통합된 사건이 일어나야 됩니다. 그게 뭐냐?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거예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은 벌써 심판받아야 됨을 알리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신 겁니다. 이 땅에. 벌써 심판을 받았기에 심판받은 자는 심판을 안 해줄 거야, 라는 기대와 그리고 소망은 여기서는 허용이 안 되지요. 이미 심판됐기 때문에 잘하면 내 구원받을 걸, 라는 그런 헛된 망상은 용납이 안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이해할 때 조금 있으면 잘못하면 심판받는다. 이럴 것 같으면 희망이 있어요. 그래 정신 바짝 차려야 돼. 하나님께서 심판주기 때문에 정신 바짝 차려야 돼. 생전에 어떻게 조치를 해야 돼, 라고 했는데 성경에선 요한복음 3장 18절에 이미 심판이 되었기 때문에 심판을 유지하라 이 말입니다. 너는 심판 대상이 됐기 때문에 거기서 구원의 희망은 갖지 말란 뜻이에요. 구원을 희망은 가져선 안 된단 말이죠.

그러면 심판 안 받고 구원한다는 게 근거는 나에게는 안 나오지요. 그게 뭐냐 하면 사랑은 여기 있나니,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사랑이란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심판받은 자에게 예상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네가 심판받아 마땅함을 유지할 때 비로소 그때 느껴지는 게 뭐냐? 사랑이 되는 거예요. 독생자 사랑이 돼요.

그러면 예수님이 중요하느냐, 내가 중요하느냐 할 때 누가 더 중요해요? 나는 심판대상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아요. 나를 충분히 조롱해도 괜찮아요. 나를 저주해도 괜찮아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사랑이란 그것만 우리를 통해서 발현하면 돼요. 생산하면 돼요. 나타나면 된다고요. 별로 어렵지 않지요. 우리 정신머리가 중요하지, 우리 마음의 자세가 중요하지 성경말씀 하나님 보시기에 하등 어려운 게 없어요. 내 너한테 이야기했잖아. 그런데 왜 자꾸 구원받으려고 시도 해. 하여튼 너희는 내 말 안 듣는데 도사야. 기어이 내 말 안 들어 하여튼. 심판받았다니까, 벌써. 끝났어.

“그렇다면 하나님, 심판받았는데 어떻게 구원됩니까?” 그것 봐. 말하는 싸가지 봐. 심판받았잖아. 심판받았으면 유지해줘야지. 그런데 무슨 틈새시장을 노리냐 말이죠. 그거는 왜 그러냐 하면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는데 이게 안 돼서 그래요. 피곤하지 않아서 그래요. 아직까지 나한테 응시할 게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응시하고 수축할 게 있다고 보는 거예요. 아직도 나한테 기대할 게 있다고 보니까 성경에서 이미 심판받았다고 하면 심판받은 줄 알면 되는데 은근히 그래도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뭔가 조치가 있을 거야. 기다려보자. 자꾸 이런 식으로 되지도 않는 희망을 갖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진리는 일치가 아니고, 일치가 아닙니다. 일치가 되려면 나도 살아 있어야 되고 모범되는 모델도 살아 있어야 되는데, 일치가 아니고 생산이란 말은, 나는 죽어 버렸어요. 나는 죽고 그분을 살아 계셔서 살아 계신 분이 뭘 생산하느냐? 주의 백성을 생산하는 거예요. 언약대로. 누구에게? 선택한 분. 살아 계신 분이 선택하게 되면 죽은 자 위에서 예수님의 나가 확장되는 영토가 하나님 쪽에서 마련하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 진자교회가 부흥되어 사람들이 많아서 예배당을 새로 교회 모습으로 지을 때 기존의 건물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헐어버리죠. 그건 교회 모습이 아니니까. 예쁜 고딕양식이 아니니까 전부 헐어버리잖아요. 주께서 하는 작업이 이거에요. 말씀으로 나를 헐어버릴 때 네가 네 자신에 대해 아까워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고마운 줄 알아야지.

아이고, 내가 내 인생 이만큼 끌어오기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얼마나 내가 나한테 수고를 많이 했는데 아까워서 못 버리겠다. 이런 경우는 생산되지 않게 하는 거예요. 철저하게 주님의 안목으로 저를 헐어버릴 수 있도록 해주세요, 하고 자길 맡겨버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부모는 나를 버리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다윗 아버지 이름이 이새거든요. 이새와 사이좋다, 안 좋다 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다윗이 어떻게 구원받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그 문제에 대해서 시편 27에 나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알았으면, 아아 필수코스가 있구나, 그게 뭐냐 하면 기존의 나의 죽음이 필수코스입니다. 반드시 거쳐야 되죠. 죽음이라는 것이 기존의 내가 여기 살아 있고 죽는 것의 의미, 그리고 언약에 의해서 죽음의 의미, 이게 같은 수가 없지요. 내가 죽을 때는 내가 아까워하지요.

기존의 죽음은 다 아는 거구요. 목숨 끊어지는 거죠. 여기에 언약적 죽음은 시편 27편 4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이렇게 돼있어요. 여호와의 집에서 이탈하는 것, 이걸 죽음이라 합니다. 여호와의 집에서 이탈하면 찬양이 안 돼요. 찬양이 나오지 않는 자리는 죽음의 자리에요. 그래서 다윗이 하는 전쟁은 자기 구원을 위한 전쟁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을 어떻게 나타나게 하는 전쟁에 다윗이 선택된 겁니다. 그것과 대조되는 사람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사울 왕이죠.

사울 왕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있어서 하나님의 집이 돼야 된다는 이 사명을 부여받았음에도 사울은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화시킨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은 자기 목적이 있으니까 사무엘상 16장에 의해서 사울을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을 버렸지요. 사울을 버렸다는 말은 그전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선택한 적이 있다 뜻이에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두 개의 절차를 필히 보여주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은 버림이 무엇인지 안 버려짐이 무엇인지를 언약을 통해서 알려주는 겁니다. 이 사이에 경계선이 성립되겠지요. 사울은 본인중심이에요. 본인중심에서 본인이 육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영이 오지 않았으니까 육이라는 의식도 없지요. 영이 와야 되니까요. 사울은 본인이 본인을 선택한 거예요. 때려죽여도 자기의 야망을 자기의 포부를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버려도 자기는 자기를 안 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언약에 의해서 사울을 통해서는 버림을 설명해주고, 다윗을 통해서는 안 버림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언약이 언약대로 나타나려면 버림받은 자와 짝을 이뤄서 그렇지 않고 안 버려진 자가 등장하게 되겠지요. 자, 그렇다면 다윗은 본인이 본인을 버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다윗도 인간이에요. 자기 자신을 버릴 수 없지요. 언약에서는 버림받음과 하나님께서 받아주심이 두 가지 내용이 다 있는 겁니다. 안 버려지고 그냥 받아주시는. 신약에서는 이걸 가지고 뭐냐? 예수님의 죽음이고, 이것이 뭐냐? 예수님의 부활이 돼요.

그래서 모든 언약 안에는 예수님의 죽음과 플러스 부활의 요소가 같이 담겨있는 겁니다. 이 죽음과 부활의 요소 절차를 누가 하느냐 하면 언약적으로 오신 나,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나의 자리에 가요. 이 나는 그냥 나가 아니고 시편 27편을 따라서 생긴 나가 돼요. 그래서 시편 27편 다 같이 봅시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가 누굽니까? 예수님이죠.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왜? 유일하게 하나님이 시편을 통해서 미리 이야기한 예언을 그걸 그대로 현실화시키는 분은 주께서 따로 한 몸을 준비해서 투입시키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 빼놓고 다른 몸들은 시편 27편의 나에 해당이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되지요. 그들은 뭐냐? 버림받아야 돼요.

새로운 몸이 등장함으로 기존의 몸은 시편 27편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버림받아야 돼요. 사울보고 욕하면 안 돼요. 사울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라니까요. 인간은 태어나면서 모친에 부모로부터 같은 한 통속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사울의 본성을 그대로 죽을 때까지 유지해나갑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전부에요. 하나님이든 예수든 중요한 나에게 뭔가 해줘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왜? 나니까. 딴 이유가 필요 없어요. 나니까 나는 내가 지키겠다는데 거기서 무슨 이유가 필요해요. 우리는 일치를 원하지 생산을 원하지 않습니다. 새로 만들어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기존의 내가 괜찮아지기를 구원받기를 원해요.

그 인간을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죽여 버립니다. 성전을 통해서 기존의 인간들을 죽이고 거기서 죽은 자리에서 새로운 성전, 다시 하나님께서 받아주는 새로운 사람으로 생산하는 그 작업을 다윗과 그리고 다윗 주변의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걸 시편 27편처럼 진행해나가는 겁니다. 어떻게 진행해 가는지 그거는 10분 쉬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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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9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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