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7강-요엘 2장 4-11절(공포없음)211103-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엘

7강-요엘 2장 4-11절(공포없음)2111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엘 2장 4-11절입니다.

요엘 2:4-11

“그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들의 산 꼭대기에서 뛰는 소리가 병거 소리와도 같고 불꽃이 초개를 사르는 소리와도 같으며 강한 군사가 항오를 벌이고 싸우는 것 같으니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그들이 용사 같이 달리며 무사 같이 성을 더위잡고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되 그 항오를 어기지 아니하며 피차에 부딪히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며 병기를 충돌하고 나아가나 상치 아니하며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더위잡고 오르며 도적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 그 진은 심히 크고 그 명령을 행하는 자는 강하니 여호와의 날이 크고 심히 두렵도다 당할 자가 누구이랴.”

감당이 되지를 않는 겁니다.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는 그런 날, 그런 날이 여호와의 날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여호와의 날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호와의 날이 만약에 지금이 아니라고 여기고,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재주를 피우고 각자 자기의 능력과 실력으로 이 세상에 소박하나마 행복하게 살 권한이 있다고 여기면서 열심히 살 겁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면서 이렇게 노력해서 이루어낸 작은 나의 세계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기 마련이지요. 방금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경우에 그러냐? 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을 경우에, 여호와의 날이 없다고 여길 경우에는 사람들은 작은 행복이라고 여기지만 거기에 삶의 보람을 느끼고 살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없다면.

그런데 성경에는 이렇게 요엘선지자를 통해서 여호와의 날이 온다고 미리 통보했습니다. 그 여호와의 날이 오게 되면 특징은,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아무 손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날이 온다고 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그냥 손쓸 수가 없이 하루하루 살면 되는 겁니다. 자기에게 손을 안 쓰면 돼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다지 큰 기대를 안 하면 되는 겁니다. 손 안 쓰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손 놓고 산다고 이야기하지요. 하루하루를 자기 인생에 대해서 손을 놓고 사는 거예요. 그냥 놔버리는 거예요. 왜? 어차피 여호와의 날이 오게 되면 아무 소용 없기 때문에 그렇지요.

라는 영화 보면 주인공이 오토바이 타는데 핸들을 잡아야 되는데 눈 감고 손 놔버려요. 그냥 달려요. 사람들은 ‘저 청년은 저대로 가면 곧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요. 여호와의 날을 미리 알게 되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차이가 없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냥 방치하듯이 손 놓고 산다는 겁니다.

이게 진정 소박한 행복이 아닐까요? 이게 세상을 제대로 파악하는 사람이 아닐까요? 그러면 손 놓고 살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뭐냐 하면, 그러면 무질서하게 사는 거냐? 혼돈스럽게 그냥 제멋대로 사는거냐, 라고 생각할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면 안 됩니다. 여기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어떤 존재들이 있어요. 그 존재들은 본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지만 그러나 그들의 살아가는 것은 질서정연하고 일사불란하게 살아갔습니다.

그 대목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4절에 “그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그들의 산꼭대기에서 뛰는 소리가 병거 소리와도 같고……” 죽 나오지요. 어느 정도로 절도 있는 생활들을 하고 있느냐 하면, 7, 8절에 보면 “그들이 용사 같이 달리며 무사 같이 성을 더위잡고 오르며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되 그 항오(세로줄과 가로줄)를 어기지 아니하며 피차에 부딪히지 아니하고 각기 자기의 길로 행하며(이렇게 정돈되어서) 병기를 충돌하고 나아가나 상치 아니하며”

즉 병거를 들고 가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지 아니하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면서 자기 목숨을 다해요. 9절에 “성중에 뛰어 들어가며 성 위에 달리며 집에 더위잡고 오르며 도적 같이 창으로 들어가니” 이 모든 것은 뭐냐 하면, 기존의 질서파괴를 위해서 그들은 너무나 각 잡힌, 질서 잡힌 그러한 존재자들이 출현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의 대장은 누구냐? 그들을 질서 잡히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누가 명령하느냐? 놀랍게도 1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군대 앞에서 소리를 발하시고”라고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을 두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이 본문이 도대체 메뚜기에 관한 이야기야, 안 그러면 도대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앗수르, 그 난폭하기 짝이 없던 앗수르 군대 이야기야?’ 우리는 거기서 혼란이 일어나게 될 겁니다. 그것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혼란이 일어나지만 관심없는 사람은 이것도 저것도 없지만.

여기 앗수르 군대가 온다.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는데 요엘에 보면 황충, 메뚜기 이야기가 계속 나와요. 메뚜기 이야기를 먼저 거론하고 나중에 “메뚜기가 덮치는 것 봤지? 똑같이 너희 덮칠거야” 그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우리가 요엘 1장 이미 봤습니다만 다시 보게 되면 1장 4절에 “팟종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늣이 먹고 늣이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

팟종이, 메뚜기, 늣, 황충, 다 같은 종류거든요. 이렇게 메뚜기 이야기가 나와요. 자연재해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계속 메뚜기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는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여기 6절에 보면 “한 이족” 한 이방민족이 나오는데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그 이방민족이 누구땅에 왔느냐 하면 내 땅에 왔어요. “한 이족이 내 땅에 올라왔음이로다”

이 내 땅이 누구 땅이냐 하면 여호와의 땅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땅이 이스라엘 자기 땅인 줄 알았어요. 오늘날 우리가 아파트에 살면 아파트가 내 집인 줄 알아요. 주택 2층에 살면 그 2층이 우리 집인 줄 알고요. 빌라 201동에 살면 그 집에 내 집인 줄 알고 있어요.

또다시 말씀드릴게요. 인간이 여호와의 날을 감안을 안 합니다. 자기가 평생 애써서 일구어낸 그러한 보금자리 그 하나를 안식처 삼아서 보람있게 살거든요. 소확행(小確幸), 해가지고 욕심내지 않는 행복, 그래서 애들하고 같이 오순도순 사는 것, 큰 야망 품지 않고, 야망 품어야 재주도 없으니까 품으나 마나지만, 있는 대로 열심히 살았던 것, ‘이게 행복이지 뭐가 행복이야? 제발 이 행복만 유지되게 하옵소서.’ 해서 ‘대통령 새로 뽑을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 대통령님은, 여호와라는 왕은 그런 꼴을 못 보시는 거예요. 소확행도 안돼요. 작은 나만의 행복도 용서를 안 해주는 겁니다. 우리 왕을 지금 착각하지 마세요.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내 땅에 올라왔다’고 되어 있잖아요.

분명히 이것은 여호와의 땅이에요. 이스라엘 땅이 아닙니다. 출발점을 나부터 출발하면 안 돼요. 여호와의 땅이다.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면 여호와의 땅에 왜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민족을 거기에 들여놓는가? 이거예요. 이스라엘이 사람의 땅으로 만든 거예요. 원래 여호와의 땅인데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겨서 하나님이 사는 동네가 아니고 사람, 자기들이 사는 동네로 만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걸 용납하지 아니하고 다시 사람이 사는 땅, 여호와께서 본인이 거주하는 거주지로 바꾸시는 거예요. 내가 사는 아파트나 주택에 주님 오시옵소서, 가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접수를 해요. 아파트고 주택이고 이것은 내가 살아야 되겠다, 라고 먼저 접수하시고 거기에 네가 와서 살아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테리어는 내가 하고, 옥상에는 빨래 널고……,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하지만 도대체 이 집이 누구 집이냐 그 말이지요. 요한복음 1장 11절에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바로 이 상황, 이 상황을 인간들은 모릅니다. 인간들은 행복하면 하나님이 함께 있는 줄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요엘보면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게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네가 너한테 손을 떼라는 거예요. 네가 너한테 손을 떼도 너의 인생은 여호와에 의해서 일사불란하고 질서정연하게 하나님이 원하는 바를 다 할 수 있다, 라는 것을 아무 이성도 없고 감정도 없고 배운 것도 없는 메뚜기도 그렇게 해낸다는 겁니다.

잠언서 30장 27절에 보면 메뚜기에 대해서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임군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메뚜기라는 말 앞에 뭔가 긴 서술어가 붙어요. ‘메뚜기? 그거 볶아먹으면 맛있는 것’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도시락 반찬, 그것이 아니고, 메뚜기를 볼 때 그런 의미로 보지 말고 메뚜기는 임금이 분명히 보이지 않는데 분명히 임금이 있기에 임금 따라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그러한 군집,

저는 이것을 두고 상당히 이런 용어를 쓰고 싶습니다. 단일신체. 약간 더 폭을 넓힌다면 거대한 단일신체. 우리 주님의 신체. 메뚜기 하나하나는 개체지만 그 개체는 자기 개체의 의미가 없습니다. 왜? 단일신체가 되어버리면 그 임금의 자리, 머리의 자리, 지도부의 자리, 통제하는 통제부의 자리, 그 자리에서 모든 지체에다 지시와 명령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도록 자기의 군집에다 다 내리거든요. 그래서 그 많은 메뚜기가 빈틈없이 움직이는 겁니다.

그러나 그 움직이는 메뚜기를 보고 MBC TV에서 인터뷰 한다고 “바쁘신데 실례합니다. 뭐 때문에 당신은 이렇게 나서서 남의 농작물을 물어 뜯습니까?” 한다면 메뚜기가 말을 못합니다만 한다고 치고요, 입을 오물오물해가면서 이야기한다 치고 “나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나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와 함께 있는 친 백성, 진짜 백성은 자기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굉장히 다행스럽게 여기는 군집이 되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단일신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 머리가 되고 우리는 그 지체가 되는 것, 분명히 여러 사람의 개체가 보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단일신체에 해당되는 겁니다.

이 단일신체를,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자기 백성이 우상을 섬겨 가지고 이 단일신체를 방해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땅이 자기 땅이기 때문에 자기 땅에 주님께서 메뚜기처럼 부리는 이방 민족의 군대를 불러냅니다.

그런데 이방 민족의 군대는 물론 앗수르 나라에도 총사령관이 있고 임금이 있더라도 주님께서는 그걸 완전히 무시하고 메뚜기를 주님 맘대로 다루고 조종하는 것과 똑같이 그 앗수르 군대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파견시켜서 메뚜기하고 똑같이 행동하게 만들었어요. 인정사정 보지 말고, 메뚜기가 인정사정 안 보잖아요, 싹쓸이하도록.

그 앗수르 군대가 쳐들어왔던 그 모습을 4절에 보면 “그 모양은 말 같고 그 달리는 것은 기병 같으며” 이렇게 의미 없는 메뚜기가 결국 그 활동 자체가 모든 단일의미로, 여호와의 날에 여호와에게 모든 것이 환원되도록 여호와께서 뭔가 뜻이 있어서 실시한 일인 것을 깨닫게 되도록 메뚜기가 했던 그것을 그대로 이번에는 앗수르라는 대제국이 거칠 것 없이 이스라엘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고 유린해 버립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

그래서 여기 10절에 보면 “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일월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라고 되어 있고 6절에 보면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여기 송구라는 말은 단지 미안스럽다, 그게 아니고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아무 대책이 없으니까 본인 보기에 본인이 본인한테 미안스러운 거예요. 감당이 안 되니까. 이 사태에 대해서. 인정사정 보지 않는 적군이 와서 내가 일구어놓은 모든 내 삶의 터전을 완전히 박살 내놓으니까 내가 나한테 미안한 거예요. 송구스럽고.

그리고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하얘졌어요. 바들바들 떨 뿐이지요. 주님께서 왜 이렇게 하시는가? 이것은 소위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내 나라다, 라고 우겼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너희들이 여호와를 너무 우습게 봤다.” 경상도 말로 새피하게 봤다는 겁니다. 우습게 얕잡아 본 거예요. ‘우리끼리 행복하고 잘살면 되지.’ 터 하나 잡아서 2층집으로 올려서 개 한 두마리 키우고, 채소밭 만들고, 잔디도 깔아놓고, 우리의 인생계획은 그렇게 낭만적이에요.

‘남한테 해코지 않고 남을 힘들게 하지 않고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해서 그렇게 살면 그게 얼마나 행복하냐?’ 지금 이러한 낭만적 생각에 뭐가 빠져 있느냐 하면, 여호와가 빠졌어요. 그래서 빠진 여호와 집어넣으려 하니까 여호와를 불러왔는데 어떻게 불러왔느냐 하면 ‘하나님, 제가 나름대로 평생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하나님도 좀 도와주이소.’ 이래요.

이래서 내가 여기 먼저 살고 있고 내가 사는데 후원해 달라는 취지로서 여호와에게 도움 얻고자 교회 가서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빌고, 기도하고, 그저 때리기 전에 사전에 예방조치로서 아양을 떨고 아부를 떠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여호와께서는 그러한 작당을 한 그런 식으로 인생을 낭만적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뭘 주느냐 하면, 공포를 주는 거예요. 공포가 생기는 이유가 뭐냐 하면, 공포를 느끼는 나에게 평소에 내가 의미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공포가 오는 거예요. 의미로 가득 차 있는 나에게 무의미가 와버리면 공포를 느끼는 겁니다.

잘사는 부잣집에 딩동, 하고 누가 초인종을 누르는데 누구십니까, 문 열어주니까 허름한 행색에 땟거리도 제대로 없는 듯한 노숙자 같은 차림을 하고 누가 왔어요. 보니까 자기하고 얼굴이 좀 닮았거든요.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그래서 “누군데?” “언니! 나 몰라? 쌍둥이 동생 춘자 아닙니까. 그때 고아원에서 바뀌어서 언니는 부잣집으로 가고 나는 가난한 집으로 가서 이렇게 됐잖아요.”

그 때 그 부자 언니는 반가운 게 아니에요. 뭘 느끼느냐 하면, 공포를 느끼는 겁니다. 왜? 자기는 지금껏 살아온 것이 하루하루 의미를 안 챙겨 본 적이 없거든요. 매일같이 의미와 의미, 의미라는 말은, 매일같이 가치와 가치, 또는 ‘나는 소중해. 나는 소중해.’ 소중한 것들을 모으고, 모으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건 뭐 거지처럼 동생이 들이닥쳐 버리면 오늘 본문처럼 언니의 낯빛이 하얘지는 겁니다.

낯빛이 하얘지고 이걸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아줌마, 누구세요? 가세요.” 이래야 될지 “아줌마, 누구세요? 나는 아줌마 처음 보는데. 나한테 무슨 쌍둥이 동생이 있습니까?” 허름한 그 아줌마가 “그럴 줄 알았지.” 하면서 서류 한 장 꺼내는데 유전자검사지에요. 혈족관계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떼와서 “언니, 너무 이러지 마. 내가 못산다고 밀어내지 마.” “아이고, 그동안 뭐 했어?” 하면 그 아줌마가 혼자 온 것이 아니에요. “얘들아, 이리 오너라” 애 셋 데리고 왔어요.

기가 막히지요. 낯빛이 하얘지지요. 허옇게 잘생긴 그 부잣집, 재벌집 남편은 마침 그때 골프채 들고 골프 치러 갔다가 들어오면서 “누군데?” 했을 때에 야~, 이 드라마 앞으로 재밌데이. 공포라 하는 것은 내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이 쳐들어왔을 때 우리는 공포를 느끼는 데 내게 도움이 된다는 말은 우리는 그냥 살지 않고 나는 의미 있다, 나는 가치 있다, 나는 보람 있어야 돼, 나는 행복해야 돼, 나는 잘 살아야 돼, 이걸 계속 사수하고 유지하면서 나는 나만 잘되면 돼, 나만 잘되면 되는 거야, 이런 식으로 버티고 온 거예요. 거기에 무슨 여호와가 있습니까. 여호와 날이 없어요, 거기에는.

자기가 신인데 무슨 여호와가 있어요? 이스라엘이 바로 그러고 싶었던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살아온 것은 바로 그런 식으로 살아온 거예요. 하나님의 땅인데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한 거예요. 도대체 얼마나 반대로 살았으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어깃장 나게 살았으면 메시아가 와도 메시아를 못 알아보잖아요.

헤롯왕은 아기 예수 죽이려고 했고요. 우리가 세상을 볼 때 나 중심으로 보니까 요엘 이런 이야기가 전혀 안 들어오고 자꾸 겉모습만 보고 심층을 못 봐요.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에 담긴 심층을 못 봅니다. 예언의 말씀의 기본은 뭐냐 하면, 너는 내 앞에서, 인간은 내 앞에서 그냥 인생에 대해서 의미 찾지 말고 가치 찾지 말고 손 놔버리라는 거예요. 손 놔버리라는 말은, 지금 네가 사는 방식대로 사는 것은 그것은 여호와를 감안하지 않는 삶이에요.

주님과 함께 산다는 그것도 인간 사는 게 아니에요. 주님이 사시고 거기에 합류하는 인생이 성도에요. 함께 산다 해서 말만 함께 살지 전부 자기 맘대로 하는데 그게 사는 거겠어요? 메뚜기 이야기 다시 하겠습니다. 메뚜기는 한 마리 한 마리는 의미 없습니다. 왜 내가 이렇게 움직이는지 몰라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메뚜기의 특징은 이렇게 보면 됩니다.

2001년도에 있었던 911사태. 뉴욕에 있는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비행기 두 대가 들이박아서 빌딩 두 개가 다 무너졌잖아요. 그 무역센터를 공격한 그 사람들의 특징은 뭐냐? 자해특공대였습니다. 2차대전 때 태평양 전쟁의 일본의 가미가재 특공대. 비행기에 기름을 넣되 미드웨이 항공모함까지 가는 기름만 주고 돌아올 수 있는 기름은 주지 않아요. 그러면 그 가미가재 특공대 그 조종사들은 폭탄을 싣고 가는 것이 아니고 본인이 폭탄이에요.

나이 스무 살에서 서른 초반까지의 그 청춘. 40대에 뭘 하고 50대에 뭘 하고……, 얼마나 계획이 많고 꿈들이 많이 있고 희망, 나름대로의 자기의 의미가 있었잖아요. 의미가! 그런데 그 의미가 군대 가서 다 끝났어요. 군대를 안 가든지, 군대를 아예 없애든지, 월급제로 하든지 해야 돼요.

이제 막 졸업해서 머리 좀 길러볼까, 하는데 통지서 날아와서 머리 홀랑 깎고 훈련소에서 언뜻 보니까 고향 가는 길이 저기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편지를 쓰는데 거기서 나온 노래가 에요. 발뒤꿈치 들면 내 고향이 보일까. 평소에 집에 있으면서 그렇게 말도 안 듣더니 군대 가니까 내 고향이 보일까, 이러고 있다고요.

왜 고향이 보고 싶으냐? 내 의미는 바로 내 가치와 의미를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리 군대가 좋아도 병한테는 달력에 가위표 쳐가면서 빨리 제대해서 이 무의미한 단체에서 의미 단체로 회귀하고 싶은 겁니다. 돌아가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요 원래 고향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고향이에요. 하나님 거주지에 합류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약속의 땅의 의미입니다. 그 의미에 들어갔는데 그들은 룰루랄라 휘파람 불면서 이렇게 같이 참석하면 되는 줄로만 알았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여호와를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걸 수정하려고 하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이 함께 하는 백성은 어떤 백성이어야 되느냐? 그걸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원하는 백성은 이런 백성이다, 하고 예언서 안에서 진짜 백성의 본 모습을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가수 뽑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TV조선에서 하는 라는 프로가 있는데 제가 잘 안 보지만 지나가다 휙 보니까 굉장히 복음적인 단어가 거기 나왔어요. 복음적인 단어. 너무나 복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어가 어떤 단어냐? 거기에 직장부, 대학부, 어린이부, 이런식으로 죽 나오는데 ‘무명부’가 있어요. 무명부.

무명부 알죠? 무명인사, 이름 없이 죽은 사람들. 이름 없이 죽어서 별로 새겨지는 위령탑, 무명용사의 탑,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죽었는데 아무도 안 알아주는 것. 국정원의 위령탑 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 있어요. 이름이 무명부에요. 이름을 없는 존재로 보면서 일은 시키는 사람들 이름 없는 사람들. 그 사람은 본인의 이름으로, 본인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환원될 수 없어요. 모든 인생이.

아무리 인생 50, 60을 살아도 내 인생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사람. 이름이 없으니까. 그것이 뭐냐?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명부’에 해당됩니다. 무명부에.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신약에서 성도들은 구약에서 이미 망해버린 이스라엘을 알고 주님에 의해서 새롭게 이스라엘로 조합된 사람들이 성도들이거든요.

사도행전 16장 2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사도바울과 실라가 복음 전하다가 옥에 갇혔어요. 방금 제가 말씀을 죽 드린 것에 대해서 이걸 실제 응용문제로 내보자는 그 말이지요. 사도바울은 성령에 의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기에 아~, 사도바울은 오늘 요엘서에 의해서 여기다가 딱 적용을 시켜보게 되면 사도바울은 그냥 메뚜기에요. 메뚜기.

사도바울은 자기 위신과 체면과 의미를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에요. 성령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사도바울은 터키 북쪽으로 선교하고 싶었지만 주님의 영이 그걸 막아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그리스 쪽으로, 지금의 터키 말고 그 맞은편에 있는 그리스 쪽으로, 유럽 쪽으로 가도록 그렇게 조치를 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메뚜기하고 똑같은 거예요. 메뚜기 하니까 유재석이 생각이 나네요. 그렇다면 진짜 이 사도바울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따로 챙기는지, 내 인생은 어디서 찾나, 내 인생이 어떻게 행복하고, 내 인생이 얼마나 귀한 의미인지, 그걸 과연 찾는지 안 찾는지 성경에서 찾아보자 그 말입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에서 바울과 실라가 복음 전하다가 옥에 갇혔어요. 옥에 갇혔는데 발에는 착고가 채였습니다. 발도 꼼짝 못하게 해놨어요.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바울과 실라 빼놓고 나머지는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겁니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자 공포를 느끼는 경우는 어떤 경우라고 했습니까? 공포를 느끼는 것은 어떤 경우? 공포는, 나는 의미가 있는데 무의미가 찾아왔을 때, 내가 지금까지 쌓아놓고 가꾸어놓은 이 의미가 훼손되고 손상이 가고 이게 무너질 때 인간은 공포를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런 게 어려운데요.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자기 몸에게 자기가 시키고 부리는 그 메뚜기들을 또는 메뚜기가 같은 앗수르를, 이방 민족이 자기 땅에 왔다고 했으니까, 하나님의 땅, 자기 몸에다, 단일신체에다 그 적들을 부딪히게 만드는 거예요. 911사태처럼. 2001년도. 적들로 하여금 주님의 몸에 부딪히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남느냐 하면, 사람의 고난이 아니고 주님께 당했던 그 차원의 고난을 하나님부터 먼저 자기체험을 갖게 됩니다. 나는 이 땅에 너희들 보기에 의도적으로 의미 없는 그런 존재로 등장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분이 메시아인데, 오신 하나님의 구원자인데 아무도 못 알아들었어요. 왜? 사람들은 각자 자기 의미 챙기는 데 온 평생을 다 거기에 쏟아부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도움이 안 되고 자기를 맘 편하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자기를 공격하는 자로 간주해서 까이기 전에 먼저 깐다는 원리에 의해서 주님을 먼저 까버렸어요. 먼저 죽여버렸습니다.

‘아이고, 속 시원하다. 아이고, 귀찮게 굴더니만 단판에 잘 갔다.’ 그 당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리고 백성들은 일심으로 마음을 합해서 “살인강도 바라바를 살려낼래, 아니면 예수님을 살려낼래?” 하니까 전부 다 “바라바를 살려내세요.” “예수님은?” “끽!” 나의 의미에 하등 보탬이 안된다. 끽! 그렇게 되는 거예요.

바라바라는 살인강도는 살려주면요, 우리한테 도움이 돼요. 왜? 우리보다 못난 자고, 우리보다 못한 자고, 우리보다 인생 망가진 자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위로 받을 수 있는 재료가 돼요. 바라바는.

만약에 어떤 학교에서 자기가 전교 2등을 한다.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너희 학교 학생 중에서 내가 오늘 한 명을 죽여야 하겠다. 둘 중 하나다. 1등 하는 애 죽일까, 꼴찌 하는 애 죽일까?” 하면 “1등 하는 애요.” 왜? 그래야 내가 1등 하니까. 1등이라는 목표가 나의 의미였고 1등 될 때 내 가치가 빛이 나니까. 광채가 나니까. 사는 보람이 있으니까. 1등이 죽든지 아니면 전학 가든지.

그래서 사람들에게, 인간에게는, 그걸 의미의 군집이라 하는데 인간들은 각자의 의미, 자기 의미와 동일한 의미의 집단을 만들어요. 수산업협회라든지 촌에 가면 작목반, 그걸 더 크게 하면 종교계, 의료계, 정치계, 스포츠계, 연예계, 이 계라는 말이 같은 의미의 군집이에요. 군집, 영어로 하면 그룹(group)이에요, 그룹. 그 그룹 안에 속해 있을 때 나의 의미는 단단하게 오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의료계, 스카이캐슬, 공부 잘하는 애들끼리의 강남 애들, 그리고 그 애들의 학부형들의 모임.

연예계가 많은 국민들에게 오늘도 주목을 받고 관심을 받는 이유가, 연예계는 이혼도 많이 하고 인기 있다고 까불다가 말아먹기도 하고요. 다른 사람들은 고소해 죽어요. 고소해 죽는다고. ‘그렇지.’ 저 맛에 사는 거예요. 뒷담화해서 씹을 수 있는 자를 연예계가 대표해서 다 보여주는 거예요.

왜?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 사정을 모르니까. 연예인들은 자기 사정을 알려서 그걸 인기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니까 다 까발리는 거예요. 저 사람 집에 개 몇 마리 있다는 그것까지 다 아니까요. 아침에 눈만 뜨면 시작해서 저녁때까지 연예계 이야기에요. 왜? 상대적으로 내가 참 행복하다는 것을 이렇게 부스러기라도 긁어모아서 ‘나는 이 정도라도 행복하잖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연예인들이 있는데 그 안에 왜 여호와의 날은 없느냐, 그 말이에요. 여호와의 날. 왜 주님은 없느냐 그 말입니다. 그래놓고 뭐 하나님 믿는다고? 주님은요 바로 그러한, 이 땅에서 진정한 메시아의 의미는 멀쩡한 메시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살해당한 메시아, 그 의미를 찾기 위해서 사람들이 적으로, 자기를 완전히 911테러처럼 죽이도록 그렇게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가룟유다보고 “가룟유다야. 네 할 일 해야지.” 다 알아요. 압니다. “내가 네 할 일 하라고 날 팔아먹으라고 나는 너를 선택했다.” 팔아먹으라고. “인자는 고난받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된다.” 이미 고난받을 것을 다 알아요. 문제는 인간들이 자기 의미 고수하다 보니까 자기 의미 흔들리면 그때부터 자기가 한고생 하고, 자기는 뭐 천하에 불행한 사람이라고 울고불고 난리인데 주님께서는 네 고난 말고 주님의 고난에 참여케 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아느냐? 성령이 오게 되면 아까 바울과 실라처럼 남들은 공포스러운데 바울과 실라는 의미가 없어요. 왜? 죽어도 진즉 죽어야 했으니까. 주님께서 바울보고 하는 소리 “너는 나를 핍박하는 자로다.” 이미 자기본질은 주님에 의해서 따로 확실하게 규정되었습니다. 너는 나를 핍박하는 죄인. 끝.

그러니까 뭐 이미 주님을 핍박한 자가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주섬주섬해서 ‘나 이렇게 잘났어요.’ 이런 의미를 모을 수 있어요? 모을 자격 없어요. 주님 죽였다고 그걸 또 의미로 끌어당깁니까? 그렇지 않지요.

고린도후서 11장에 보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11장 22절에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는데 내가 일꾼이다. 왜? 나는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왜 40대를 이야기하느냐? 계산하기 쉬우라고. 40 곱하기 5는 200, 200에서 5 빼면 195대. 195대를 맞고 25절에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하여튼 기억력도 좋아요.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이래도 이게 하등 공포스럽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주님이 주신 고난이기 때문에. 주님이 얻어맞은, 주님의 구멍 난 “내 몸의 창 자국을 만져봐라. 내 손의 못 자국을 만져봐라.” 그 못 자국 안에서, 안에서 생산된 자가 바로 사도바울이에요. 왜? 성령이 거기서 나오니까. 십자가에서 나오니까.

십자가에서 나온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주님의 창 자국, 못 자국을 이제 내게 새기는 거예요. 내게 장착하는 겁니다. 이게 진짜 하나님의 땅에 같이 동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의미 안 가져도 주께서, 성령께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어떤 공포에도 끄떡없도록. 이제는 더 이상 무서운 것 없이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적이 올 때 나의 적인 줄 알았습니다. 우리 자신이 주님의 적인 것을 까마득히 몰랐습니다. 주님이 햇빛 주시고, 공기 주시고, 목숨 주시고, 이게 다 나 잘되라고 주신 줄 착각했습니다. 주님이 친히 백성 만드는 작업에 주께서 우리에게 자기의 고난에 참여하라는 그러한 은혜인 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94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8,817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세례받으신 예수님 / 211114 - 최고관리자 21-11-14
18,816 묻고답하기 흠없는 상태 - 최고관리자 21-11-14
18,815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11111b 베드로후서1장 13절(망상처리)-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최고관리자 21-11-14
18,814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11111a 베드로후서1장 13절(망상처리)-이 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최고관리자 21-11-14
18,813 자유게시판 8강-요엘 2장 12-14절(마음을 찢으라)211110-이 근호 목사 요엘 최고관리자 21-11-11
18,812 자유게시판 수련회 교재 - 최고관리자 21-11-10
18,811 자유게시판 겨울수련회 안내 - 최고관리자 21-11-10
18,810 자유게시판 20211108b 부산강의 : [시편]43(27:10)-십자가 소리 시편 최고관리자 21-11-10
18,809 자유게시판 20211108a 부산강의 : [시편]43(27:10)-십자가 소리 시편 최고관리자 21-11-10
18,808 자유게시판 20211105b 울산강의-역대기상(5강) 3장 4절 : 주의 기억 - 최고관리자 21-11-08
18,807 자유게시판 20211105a 울산강의-역대기상(5강) 3장 4절 : 주의 기억 역대상 최고관리자 21-11-08
18,806 자유게시판 108강-욥기 32장 6~10절(내면의 세계)211107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1-11-07
18,805 자유게시판 11강-데살로니가전서 3장 1-5(시험)211107 - 이 근호 목사 데살로니가전서 최고관리자 21-11-07
18,804 자유게시판 내일 11월 부산 성경공부 모임 안내 - 최고관리자 21-11-07
18,803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탄생과 관련된 것 / 211107 - 최고관리자 21-11-07
18,802 묻고답하기 얼굴 보자 데살로니가전서 최고관리자 21-11-07
18,801 강의 [21 대구강의] '창세기'속의 그리스도 37 - 주님의 환경 창세기 최고관리자 21-11-05
열람 ➜ 자유게시판 7강-요엘 2장 4-11절(공포없음)211103-이 근호 목사 요엘 최고관리자 21-11-04
18,799 자유게시판 371강-YouTube강의(원형 요한복음 1:5)20211102-이 근호 목사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1-11-03
18,798 자유게시판 370강-YouTube강의(배경 출애굽기 13:21)20211102-이 근호 목사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21-11-03
18,797 강의 유튜브강의(370강,371강). 배경, 원형 211102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21-11-02
18,796 자유게시판 107강-욥기 32장 1~5절(처음으로)211031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1-10-31
18,795 자유게시판 10강-데살로니가전서 2장 17-20절(강림)211031 - 이 근호 목사 데살로니가전서 최고관리자 21-10-31
18,794 묻고답하기 시험하는 자 - 최고관리자 21-10-31
18,793 묻고답하기 잃어버린 모자 - 최고관리자 21-10-30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