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설교
수요설교 들었다 치고 요약해 드리면 세 가지 점을 연결했습니다. 하나는 원래 원형은 멜기세덱 제사장이에요. 이 멜기세덱은 이 땅에 족보가 없습니다. 이 땅의 인물이 아니에요. 이 땅의 인물이 아닌 자라고 내세우시면서 이 땅에 인물을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셨지요.
그래서 그게 뭐냐 원형이라는 말은 왜 인간은 제사장이 될 수 없는가, 이게 원형이에요. 왜 인간은 제사장이 될 수 없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아픔을 온전히 담아낼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아픔을 온전히 담아내야, 인간들은 철이 없어서 내가 한 짓이 하나님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를 몰라요.
그냥 변명만 해요. “뭐 살다보니 그럴 수 있잖아요.” 계속 변명이에요. “뭐 더는 어쩌란 말입니까? 이 만한 것도 나름대로 지금 희생한다고 희생하는데 더는 못하지요. 제가. 할 일도 있고.” 여러 가지 변명을 하는 거예요. 온전한 아픔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제시한 분만 온전히 아픔을 아버지 아픔을 담당한다는 것을 하기 위해서 왜 인간은 탈락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속에 인간 제사장을 내세운 겁니다. 한시적이지요.
그러면 제사장 하는 일이 뭐냐, 그건 도피성에서 나타나요. 그 어떤 사람이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살인을 범했습니다. 의도한 사람은 도피성에 올 수 없어요. 그래서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는데 살인자 됐고 살인한 친척이 자기를 죽이겠다고 따라 올 때에 피해야 되는데 이 살인자는 약간 억울하지요. 약간이 아니고 많이 억울하지요.
그래서 재도피성이라는 곳이 46군데가 있는데, 그 도피성에다가 피해버립니다. 피하고 난 뒤에 거기에 제사장이 있다는 걸 알아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나, 억울합니다. 쫓기고 있습니다. 저를 보호해주세요.” 할 때, 제사장이 “그건 너는 너의 억울함만 알지. 이 제사장이 있는 위치가 지금 이 이스라엘 전체 백성의 억울함을 내가 다 품고 있는 위치다.” 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은 하나님과 살 수가 없어요. 어제 수요 설교에 나온 내용입니다. 인간은 너무나 태어날 때부터 더럽고 하나님은 너무나 깨끗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함께 할 수가 없어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 나중에 하나님 나라에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함께 할 수는 없고 백성은 되어야 되겠고, 따라서 함께 할 수 없는 자를 함께 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 거예요.
그걸 어제는 폐기물 처리 장치라 했는데. 폐기물 처리하는 장치가 필요한 겁니다. 그러면 그 억울하게 살인하게 된 사람은 자기 생각만 하면 안 되고 제사장이 어떤 본질을 갖고 있기에 죄인마저도 이게 죄가 처리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이 제사장이 죽게 되면 그 살인한 사람은 떳떳하게 그 지역에 어디에 가도 무죄한 자로 풀려나올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말은 본인이 나는 의도 없이 사람 죽였다. 내 의사 없이 사람 죽였다. 자기 철저함, 자기 정당성에 있는 게 아니고 옆에 있는 제사장의 죽음으로 이 죄가 이 억울함이 해소가 된 거예요. 그래서 제사직은 바로 도피성에 있는 제사장의 죽음으로서 그 실체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도피성의 제사장의 죽음으로서 이렇게 억울한 살인자가 다시 원상복귀 할 수 있다면 그럼 사람들이 제사 지낼 때, 양 잡고, 소 잡고 염소 잡고 하잖아요. 이건 하나의 오늘날 교회 예배드리는 것처럼 형식적이에요. 그냥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 양 잡으라 해서 양 잡았고, 소 잡으라 해서 소 잡았으니까 하나님 우리 별 일 없겠지요. 맨 날 이런 식이에요.
그런데 그 양 잡고, 소 잡고, 염소 잡는 그 자리에 직접 사람이 등장해 버리면 이게 내가 양 잡고, 소 잡는 이 행위로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들통 납니다. 나에게서 나오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서는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이 못 되는 거예요.
그래서 소위 교회에서 하는 종교생활, 신앙생활은 다 헛수고입니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아무 소용없는 짓이에요. 그럼 소용 있는 짓은 무엇이냐, 이사야53장5절에 그 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 거예요. 이것만이 하나님께서 소용 있는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애초부터 이방민족은 살려고 왕을 섬기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 놓고 죽은 자인데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서 제사직을 거기다가 꽂아 넣은 거거든요.
그 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다면 그 다음부터는 그 사실을 우리가 받는다면 나의 사적인 나의 약점이나 단점 같은 거 그런 것은 나한테 문제거리가 되지를 않는 겁니다. 나에 대한 관심사는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보고 구원하지 않기 때문에. 채찍에 맞으신 분보고, 채찍은 그 분이 맞고 낫기는 우리가 나았다는 말은 그 때부터는 꾸준하게 나를 위해서 누가 무슨 일을 했는가에 그게 핵심이에요.
내가 하나님한테 뭘 했느냐는 전혀 핵심에 집어넣으면 안돼요. 이건 항상 살아가면서 마이너스 빼어야 돼요. 내가 뭘 했는걸 다 딜리트 삭제시켜줘야 된다고요. 만약에 내가 내 의미를 줘버리면 어떤 의미가 죽어버리느냐 하면 그 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멀뚱하니 내가 영원한 천국에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이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 이게 훼손이 되어버려요.
그래서 마귀는 자꾸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 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어제 수요 설교에 압축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