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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20211022b 요한복음 1장 14절(생명됨)-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광주강의20211022b 요한복음 1장 14절(생명됨)-이 근호 목사

주님께서 천사한테 일 시키듯이 언약으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몸으로 만든 이유는 나의 움직임을 통해서 주님의 움직임을 이 역사 속에서 생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자기 일에 바빠버리면 뭐가 생략되느냐 하면 자꾸 주님의 움직임을 놓치고 잊어버려요.

성도는 나의 움직임=주님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서 나의 움직임을 생략시켜버리고 중간에 삭제해버리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매개(媒介, intermediation)라 합니다. 매개라는 것은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끔 하는 게 매개에요. 보게끔 하고 또는 보도록, 믿도록 또는 못 믿도록 하는 그것이 중간의 매개에요.

하나님께서 자기 묵시세계를 매개로 할 때 몸으로 매개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된 거예요. 하나님을 자꾸 보이라 하는데 예수님은 답답한 거예요. 나를 본 자가 하나님을 본 것이다. 나를 봐라. 내 몸을 보라 이 말이죠.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게 세례요한의 주장이지, 아무리 예수님을 이렇게 봐도 이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들의 영광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성령받기 전까지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차에 치여 죽든 뭘 하든 그냥 인간은 자기 몸이 우선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활동과 움직임을, 그 몸을 생략해버린다는 거예요, 일상에서. 생략해버려요.

감자농사 짓고 닭 키우는 사람이 예수님 생각합니까? 아니죠. ‘내가 공들여 키운 닭값을 제대로 받아야 될 텐데’ 이거 생각한다고요. 시장에 가서 닭값을 왜 받아야 되는데? 물으면 닭값을 잘 받아야 내가 살지, 이렇게 하거든요. 당신 벌써 안 살았어? 그러면 아니, 나 곧 죽어가. 나 살아야 되겠어. 그게 바로 666이에요, 그게. 표 받은 거예요. 마귀로부터 선택받은 거예요.

예수님이 이마에 인을 박았다는 것과 똑같은 짓을 누가 하고 있어요? 악마가 예수님께 선택받지 않은 찌꺼기 나부랭이에 전부 인을 다 찍어놓은 거예요. “너 살고 싶지? 살고 싶지?” “살고 싶습니다!” “시키는 대로 해.” “옛썰!” 전부다. 살고 싶다는 자기의 욕망에 내가 나를 포기할 수 없는 거예요. 살고 싶은 나를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겁니다. 이게 요셉의 형들이에요. 그래서 요셉을 애굽의 노예 상인들한테 팔아먹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 이렇게 돼버리면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뭐가 빠진 거예요? 예수님 자신이 자기가 선택한 제자들에게 버림받았잖아요. 선택의 원형이 되시는 분이 자기 선택으로 말미암아 선택하신 분, 그 당사자가 버림받았습니다. 버림을 받아요.

사는 게 아니고 그 선택된 자로 인하여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어버리고 말아요. 그렇게 악마가 우리보고 죽으면 안 된다고 말리는 그 자리에 주께서는 가시는 겁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잖아요. 이 육신은 어디까지 내려갑니까? 육신이 죽음까지 내려가죠.

죽음이라는 것은 어떤 지점이 있는 게 아니고 죽음은 소실점이 돼요. 죽음은 하나의 빈 허공이에요, 허공. 그 허공을 사람들은 역사로 메꾸죠, 역사로. 나 죽거들랑 너희들 싸우지 말고 잘 살아야 된다. 난 죽어 없어지니까. 아버지, 어디로 가십니까? 몰라, 나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는데... 죽음 자체가 구멍이 뚫린 빈 공간이에요, 죽음 자체가. 미지의 세계, 모르는 일이거든요, 죽음은.

왜 죽음을 모르느냐 하면 죽음 직전까지 죽음 5초 전까지 자기로 꽉 차 있는 삶, 내가 살아야겠다는 자기 자신을 살리는 내용으로 꽉 채워져 있기 때문에 아는 게 나 사는 방식밖에는 몰라요. 그런데 갑자기든 서서히든 뭐가 닥쳐왔습니까? 죽음, 내가 없어지는 죽음이 왔죠. 내가 없어지는 것은 내가 이해하겠는데 나를 없애는 그 죽음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어요. 그 죽음의 세계가 뭐로 구성되어 있는지.

소실점, 텅 빈 지점입니다. 인간은 결국 깜깜한 블랙홀 같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곳으로 그냥 불나방처럼 불을 보고 달려드는 맹목적 인간인 것처럼 달려드는데 달려들 때 그 방향이 아이러니하게도 ‘살아야 돼, 살아야 돼, 암.’ 여기에 ‘암’을 붙여야 돼요. ‘암, 살아야 돼.’ 해놓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요.

그 인간은 주님의 묵시의 몸을 만질 수가 없습니다. 만지지마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만지지마라 했어요. 몸을 만질 수가 없다는 것, 이 말은 뭐냐 하면 진짜 몸을 만지지 못하잖아요. 주님의 몸을 만질 수 없다는 말은 관계가 끊어져있다는 거죠.

그러면 만진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만지는 손은 내 손이잖아요. 그럼 여기 내 몸, 이것을 현전(現前, presence)이라 하는데, 내 몸이 여기에 있죠. 내 몸이 있는데 손을 내밀어 주님을 못 만지잖아요. 그럼 주님의 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몸입니까, 내 몸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몸입니까? 내 몸은 하나님께서 버려야 될 몸이에요. 쓰레기에요. 쓰레기가 진짜 몸을 못 만진다는 말은 결국 이 몸은 주님 앞에서 소실되어야 될, 소멸되어야 될 몸이죠. 그러니까 내가 거울 보면 비취고 내가 만지면 만져지는 이 몸은 결국 현전의 반대말, 부재(不在, absence), 존재하지 않는 몸이 돼요, 내 몸은.

성만찬할 때 ‘이는 내 몸이요’ 하잖아죠. ‘이는 내 몸이요’ 했는데 왜 계속해서 그걸 먹고 있어요? 먹어봤자 나중에 똥 되는데 아무 것도 의미 없는데 또 먹고 또 성만찬하잖아요. 내 몸은 주의 몸과 동일시되지 못하는 것이 먹고 마실 때마다 확인되는 거죠.

어떤 애가 젖을 안 먹는 거예요. 거식증, 식사를 거부하는 증세를 보이는 아이가 있다 합시다. 젖을 먹어야 되는데 안 먹어요. 왜 갑자기 젖을 안 먹지? 하다가 엄마가 요렇게 사랑해주니까 그때부터 안심 놓고 젖을 먹는 거예요. 그 애는 젖을 갈망한 게 아니었어요. 엄마의 사랑을 갈망한 겁니다.

인간은 밥을 갈망한 게 아니고 ‘내 몸을 하나님께서 안 죽여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내 몸을 지켜주면 좋겠다.’ 이걸 갈망하는 거예요. 갈망하는데 갈망하려면 예수님 몸이 하나님께 부활한 몸 아닙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유일한 몸이 예수님 몸이죠. 그러면 내 몸은 만지지 못하니까 동일시가 돼요, 안돼요? 동일시가 안 되죠. 동일시 안 되니까 억지로 동일시되려고 믿음, 소망, 사랑 총동원해도 항상 결핍을 느낄 수밖에 없어요, 어떤 애를 써도.

예수 한 50년 믿고 교회 뭐 믿고 목사, 장로, 전도사, 집사 다 했는데 결국은 나중에 끝에 가서는 자포자기. 많이 했다, 나도 진짜. 하나님, 저보고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저는 봉사 많이 했습니다. 내 딴에 하나님 잘 믿으려고 신학, 십자가, 언약 다 믿고 성경공부 다 따라다녔는데 한 발짝 다가서면 한 발짝 더 멀어지고 또 한 발짝 다가서면 또 멀어지고. 만질 수가 없네, 만질 수가. 가면 또 두 발짝 멀어지고. 백지영 한번 불러야겠네. 백지영이 여기서 노래 한번 불러야 돼요.

왜 주님께서는 우리 손가락을 주님 몸에 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거예요? 이유가 뭡니까? 주님의 오신 이 몸이 죄의 육신의 몸이잖아요. 육신의 몸은 주님 안에서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쓰레기로 탈락시키고 소멸시켜야 될 몸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간은 감각이란 말이죠. 인간은 감각을 끌어 모아서 자기한테 유리하도록 조장하거든요. 난 예수님 얼굴 봤다든지, 예수님 손을 만졌다든지, 꿈속에서 예수님을 봤다. 그 꿈속에서 예수님을 본 것, 그게 자기 감각이죠. 여러분, 예수님을 꿈에 본 게 확실합니까, 안 그러면 성만찬 때 포도즙과 성만찬 떡을 먹는 게 감각적으로 더 확실합니까? 둘 다 뭐 아무 의미 없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본인이 예수님을 진짜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께 버림받는 것을 당연시해줘야 돼요.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어떤 아버지와 아들 둘이 나와요. 하나는 충실하게 아버지 옆에서 아버지에게 효성을 지극히 했는지 아니면 아버지 등에 들어붙어 사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를 떠나지 않는 아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 재산을 미리 빼돌려가지고 허랑방탕 다 날린 아들이 나오잖아요. 동생은 집 나갔고 형은 집을 안 나가고 있었잖아요.

나중을 한번 상상해봅시다. 두 형제가 서로 만났을 때 형이 동생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너는 아버지 마음을 왜 그렇게 상하게 했냐?” 막 나무라겠죠. 그때 동생이 뭐라고 이야기하겠습니까? “형은 가출해봤어? 형은 버림받음이 뭔 줄 알아?” 그럼 아버지가 형하고 동생, 이 둘을 링 중간에 세워놓고 “결승전! 동생 승!” 형 손은 팔 빠지도록 팍 내리고, “가라. 지옥으로.”하고, 동생 손을 확 올립니다. 동생 손을 들어버리죠. “네가 챔피언!” 왜냐하면 주님의 버림받음에 동참한 것으로 간주해주시기 때문에 그래요.

야곱이 분명히 사다리에 천사가 왔을 때 지는 땡잡았다고 여겼던 겁니다. 천사가 막 내려올 때 천사 손에 1등짜리 복권을 막 갖고 오는 줄 알았어요. 이라는 그 영화감독에게 물었어요. 왜 상금이 하필 456억입니까? 우리나라 복권 최고 상금이 400억이라는 거예요. 거기다가 부르기 쉽다고 5,6 붙여서 456억이라고 했대요. 천사가 내려올 때는 인생 복권 타는 것처럼 땡잡은 줄 알았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준다, 복 준다, 복 받는다는 그 야곱이 내려온 천사에 의해서 살해당해야 돼요. 인간의 역사적 몸이니까 그래요. 그러니까 반드시 역사적 몸을 경유해야 돼요. 묵시를 알기 전에 역사부터 먼저 알아야 돼요. 이 역사 속에 살면서 나는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왜냐하면 예수님이 바로 그 코스를 밟았거든요.

예수님께서 현실 속에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이 현실 속에 들어왔다 할 때 자, 이걸 한번 봅시다. 이스라엘은 12지파로 되어있죠. 이스라엘의 원조가 야곱입니다. 야곱에게 두 아내, 라헬이 있고 레아가 있잖아요.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이고자 하는 것은 야곱이 인간의 몸, 신약에서는 육이죠, 인간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양심, 최선의 노력은 다 해요.

특히 야곱이 라헬을 사랑할 때 이것은 지고지순한 사랑. ‘당신 같은 사람은 또 없습니다’에요. 이런 사랑 또 없습니다. 내 심장? 당신에게 떼어주겠다. 이 정도로 지고지순한 사랑이에요. 왜냐하면 자기가 라헬을 사랑했거든요. 사랑한 이유는 야곱의 본성대로... 말할 거 뭐 있어요? 말할 필요 없죠. 이쁘니까. 이뻤던 거예요. 전국 콘테스트 한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언니보다는 나았잖아요, 언니보다는. 언니는 요새 같으면 안경 썼어요, 두꺼운 안경.

그런데 인간들의 이 사랑, 이 사랑에 왜 그리 방해가 많은지.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서 무려 7년을 거의 무료봉사하듯이 일했어요. 7시간 아닙니다. 7개월 아니에요. 7년이에요. 군대생활 같으면 상사됐습니다. 상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사됐어요, 군대생활 같으면요. 진짜 이 정도했으면 자칫하면 박군 되겠다. 박군 그런 건 몰라도 되고요. 완전히 말뚝 박았죠, 거기에. 뭐 때문에? 남자로서 사랑하는 여자를 얻기 위한 자기 할 도리는 다 하겠다는 이것이 인간적으로서는 최상의 예의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희생적인 일이라고 생각해서 다 한 겁니다.

그런데 제발 내 인생에 태클 걸지 말라 하는데 여기서 첫날밤에 레아가 들어와가지고 7년+7년 총합해서 21년인가, 하여튼 14년을 여자 하나 얻기 위해서 진짜 이 악물고 일했습니다. 그런 야곱, 얼마나 순결합니까, 그 야곱을 하나님께서 죽여 버립니다. 야곱 죽을 때 14년, 21년 다 죽였어요. 아무짝도 하나님께서는 안 받아요. 지고지순한 사랑도 안 받아요. 순결한 사랑도 안 받습니다.

그렇다면 라헬, 레아, 열두 아들 전부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뀌듯이 이들도 야곱 따라서 다 바뀌어야 됩니다. 야곱이 바뀔 때 야곱은 죽고 이스라엘로 바뀌었죠. 여기 천사가 개입했잖아요. 천사가 개입함으로써 이 이스라엘이라는 몸은 천사가 해야 될 일이 그대로 확장된 겁니다. 자기 고유의 일은 없는 거예요.

자기 고유는 하나의 지층이 된다니까요. 딱딱한 암석이 돼요, 암석. 고정된 암석이 돼요. 암석도 나름대로 역사가 있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뼈대 있는 집안. 어디 천박한 것이 우리 집에 시집와가지고. 우리 집안 보통 집안 아니야. 어디 고졸 출신이 우리 며느리로 들어와가지고, 하는 거 있어요. 드라마, 고현정 나오는.

이게 층이에요. 층과 같은 말로 결정체. 다이아몬드같이 딱딱해져요, 갈수록. 일종의 변비죠. 아주 딱딱해져요. 아, 이거 깨지겠습니까, 안 깨지겠습니까? 안 깨집니다. 죽여 버려야 돼요, 이건. 악마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씨도 안 들어가요. 씨도 안 들어가죠.

여기서 계열이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딱딱한 그 층에는 자신의 나름대로의 역사가 흘러요. 오늘 강의가 역사 아닙니까? 역사라 하는 것은 자신의 수고와 희생과 노력과 정열과 여자 하나 얻기 위해서 14년을 고생한 그게 다 들어가 있어요. 그거 아까워서 못 버립니다. 그런데 그 아까운 걸 주께서 아예 죽여 버린다고요.

그래서 십자가의 영이 오게 되면 우리는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힌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우리는 죽고 천사 같은 존재가 되는 거예요. 지금 천사하고 누구하고 싸웠습니까? 이야기 잘 들어보세요. 야곱이 그냥 순순히 천사를 맞이했습니까, 싸웠습니까? 싸웠잖아요. 싸웠는데 결국 천사가 졌다 하지만 사실은 졌으면 야곱이 야곱으로 계속 자기 역사가 이어질 건데 야곱이 자기 역사를 못 잇는 거 보니까 결국은 천사가 이기고 야곱은 목숨 빼앗기고 죽은 거죠. 그래서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뜻이에요. 이름이 바뀌었으니까.

전에는 자기 역사이기 때문에 내 것, 나의 역사의 추가, 추가, 플러스, 추가해서 예수 믿기도 여기에다 객차 하나 붙이듯이 붙여놓은 거예요. 그런데 주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몽땅 다 날아가요, 이게. 몽땅 다 날아간다고요.

천사의 특징은 시작점이 역사가 아닙니다. 묵시로 시작하는 게 천사잖아요. 그러니 성도도 전에는 땅의 역사로부터 시작했던 인간이 성도가 되어버리면 하늘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에서 성도되는 방법은 인간에게 나올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올 수가 없죠. 그냥 예수 믿어봐야 자기 역사는 멀쩡하고 그 뒤에 객차 하나 덧붙이는 것으로 나 예수 믿었다, 그걸로 끝이기 때문에 이게 앞뒤가 연결이 안 된다 이 말이죠.

역사는 그냥 역사로 해서 망하는 겁니다. 우르르 다 망하고 묵시는 여기에 새로운 계열을 만들어서 안감으로 역사성을 이루는 거예요. 역사성의 내막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음의 연속이 되죠. 버림받을 수 있는 사람을 계속 생산해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선택하는 이유입니다. 그 역사성 안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갔던 그 과정 자체가 매일같이 되풀이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야곱의 열두 지파가 다 바뀌어야 되지 않습니까? 어디서 바뀌는가. 바로 유월절에서 바뀌어져야 돼요. 유월절 그날 밤. 밤이에요.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천사 만난 것이 낮이었어요, 밤이었어요? 밤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에서는 이 밤을 ‘여호와의 밤’이라 해요. 밤의 의미는 ‘다 죽었다’ 이 말이에요. 다 공동묘지에요, 전부다. 고요하죠. 다 죽었죠. 나이트클럽 빼놓고. 거기는 쌩쌩히 살아있지만 다 죽은 거예요.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걸 ‘어둡다’고 해요. 어두우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더라. (요한복음 1장 5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리고 에베소서 5장에, 잠자는 자여 깨어서 일어나라. (에베소서 5장 14절,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인간 같은 인간에서 천사 같은 인간으로 깨어나라. 천사 같은 인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생명을 얻을 필요 없이 이미 생명 된 것이에요, 생명된 것.

아까 요셉이야기 했잖아요. 요셉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요셉 안에 꿈이 움직이는 거예요, 어두운 애굽 나라에 꿈이 움직이는 거예요. 성도가 움직이는 게 아니고 생명이 움직이는 거예요. 생명이 움직이니까 멀쩡했던 아무 일 없던 이 역사가 천사 같은 자에 대해서 학대와 핍박을 하겠죠. 여기서 버림받음이 성사되는 겁니다.

유월절 밤에 일어난 일, 핵심이 뭐냐. 그 핵심을 파란 걸로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이건 지난 수요일에 했는데요. 유월절 밤의 핵심은 ‘너는 너로부터 떠나라.’ 역사적 너로부터 네가 떠나라, 역사적 너로부터. 왜냐하면 죽음이라 하는 것은 더 이상 역사가 진행될 필요가 없고 그리고 지나온 모든 것은 그 소실점으로 전부다 빠져 들어가니까. 거기서 다시 나를 끄집어낼 건덕지가 없어요. 국물도 없어, 다 빠져버렸으니까.

죽고 난 뒤에 나머지 옷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건 세일할 때 산 건데... 필요 없어요. 백화점에서 산 건데... 다 필요 없어요. 다 태워버리죠. 몸 태우죠. 옷 태우죠. 안 타는 가락지는 알아서 챙기고 타던 차는 명의 변경해서 타고 다니고, 그건 또 비싸니까. 그렇지 않고 집에 있는 가구, 하여튼 고인의 냄새나는 것은 그 냄새를 싹 지우죠. 그런데 만약에 죽은 줄 알았는데 한 24시간 뒤에 살아나게 되면 얼마나 미안스럽겠어요.

어째든 간에 너는 너로부터 떼어내기 위해서 여기에 죽음 사건을 우리 속에 개입합니다. 이것은 마치 야곱에게 밤중에 단독적으로 천사가 오는 것과 같죠. 야곱에게 온 천사가 열두 지파로 갈라졌고 열두 지파가 또 열둘로 갈라질 때 이것을 가지고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갈라질 때마다 뭐가 작용하느냐 하면 바로 선택이 작용하는 거예요. 언약이 작용하는 거예요. 이게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십사만 사천.

계속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즉 묵시가 역사를 때린다는 그 절차를 계속 삽입시키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에게도 매일같이 삽입시켜요. ‘죽어라’가 아니라 ‘이미 생명이 살았잖아’ 그걸 확인시켜주는 거예요. 네가 살았잖아. 살았는데 뭘 밥 먹고 살기 위해서 살아야 된다는 그런 것은 하지 말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이미 살아있는 생명을 가졌을 때 그 직장에서 현장에서 ‘왜 세상은 666이냐’는 거예요. 짐승에 속한 자들이 이렇게 우글거리느냐를 봐야 돼요.

그렇게 되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우리 성도를 통해서 성령이 인도하는 우리를 통해서 ‘주님의 일이 생략되지 아니한다.’가 성립되는 거예요. 정작 살아계신 분은 누구냐. 역사는 흐른다가 아니라 묵시가 역사성을 가지고 흐르죠. 묵시가 마지막 때까지 흐르는 거예요.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요셉이 애굽 나라에서 설쳐대는 것처럼 요셉 같은 성도가 이 땅에서 제대로 이 땅의 의미를 제공하면서 설쳐대는 거예요.

그렇다고 해서 요셉이 내가 잘했다고 하면 안 되고 꿈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까 요셉 본인도 되어가는 일에 의아해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요셉은 꿈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신약적으로 하면 이미 우리는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다음 일이 뭐가 준비됐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신경 쓸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신경 안 써도 생명 얻었는데요, 뭐.

예수님의 일하심 자체가 생명이에요. 그걸 내 생각으로 가로막을 자격이 우리한테 없는 겁니다. ‘비켜라, 이놈아.’ 하는 거예요.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래요. 이미 우리 육은 죽고 천사의 몸으로 또는 예수님의 몸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시 무덤에서 외출한 심정. 외출. 잠시 조퇴한 거예요. 잠시 무덤에서, 여기 부사 하나 집어넣으면 ‘빼꼼히’, 무덤에서 관 열고 빼꼼히 나오는 거예요. 무덤에 관이 있다면 관 문을 열고 빼꼼히 이렇게 웃는 얼굴로... 세상이 뭐지? 어? 손흥민이 또 한골 넣었네. 뭘 즐겨도 괜찮아요. 이 집 뷔페 맛이 괜찮네. 뭘 즐겨도 괜찮아요. 아이고, 저 사람을 남편이라고 부르는구나. 어? 아이가 셋인데. 아, 저 애가 큰 애 아들이고 딸 둘이 있네. 어떻게? 빼꼼히.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할까? 빼꼼히. 어? 늙은 사람이 있는데... 아, 시어머니구나. 시어머니 있구나. 이쪽에는 또 친정어머니 있는데 친정어머니는 요양병원 가있네. 기저귀 갈아 넣으라 하네, 이런 거. 빼꼼히. 아이 둘은 젖 달라고 하는데 쟤가 나보고 젖 달라고 하네.

잠시 무덤에서 외출한 심정이죠. 이게 요한계시록입니다.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인 맞은 자에게는 이 세상 어떤 악마의 권세도 손대지 못하게 막아줘요. 왜냐하면 자기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의 생명을 생명 아닌 것에게 양보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생명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빼꼼히 하니까 불신자들이, 악마들이 ‘관 닫아라!’ 이렇게 하거든요. 이걸 핍박이라 하는 거예요. 이걸 고난이라 해요. 저거 잘라버려. 직장에서 잘라버려. 이걸 핍박과 고난이라 하는 거예요. 뭐 잘려봤자... 잘리면 빼꼼히 웃다가 찡그린 얼굴 되는 거예요. 이게 생명이에요. 이게 생명이라고요.

그러니까 내가 하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한 행위에 대해서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고유성은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나의 고유성, 나의 층, 단단한 수정같이 다이아몬드같이 암석같이 단단한 나는 천조각으로 만든 인형처럼 생각해서 이미 날아가 버렸기 때문에.

유월절이라는 것은 양을 보는 거예요,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양 죽을 때 너도 같이 죽었다는 겁니다. 너의 고유성은 내가 묻거나 따지거나 신경 쓰지도 않는 거예요. 양이 죽음으로써 양 죽음이 내 죽음을 대신해서 피를 발라놨다 이 말이죠. 피가 발린 거예요. 그러면 양의 죽음 안에 들어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사자 앞에서 이미 죽은 가족이 되어버려요, 죽은 가족. 전부다 좀비처럼 이미 죽은 가족이 되고 말아요.

아까 그랬잖아요. 인간이 죽으면 모른다고 했죠. 그런데 유월절을 통해서 아는 것은 죽음 다음에 본 내용이 뭐냐. 역사적으로 봐서는 내가 죽고 난 뒤에 어떻게 된지 몰라요. 인간은 살아있을 때 방식만 고집하고 그것만 기억하기 때문에 몰라요. 그런데 죽고 난 뒤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심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사자가 애굽에 있는 맏이들을 다 죽이잖아요. 애굽 사람들 다 죽이잖아요, 맏이들을. 아, 이 동네가 이게 역사적 동네가 아니고 묵시의 동네구나. 죽이는 동네구나. 생명이 아닌 것은 다 죽이는 동네. 우리는 거기에 19xx년도에 태어났습니다. 주민등록 보면 나오죠? 죽음의 동네에서 태어난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십자가의 의미를 최후의 만찬이라 흔히 부르는 그 식사시간에 제자들에게 알려줬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분해해버려요. 떡을 주면서 그 떡과 자기 몸을 일치시키고 그 포도주와 자기의 피를 일치시켜요. 그러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제자들아, 내 몸과 동일시되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내 언약 속에 못 들어온다. 나처럼 묵시적 존재의 몸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안 받아준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째든 간에 자기 택한 백성을 더도 덜도 말고 예수님 몸만 같아라. 핍박 받는 몸, 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버림받은 몸. 그 몸만 같아라, 에요. 그게 바로 212페이지에 나옵니다. p.212 밑에서 8번째 줄에, “‘인자’라는 묵시적 몸에 의한 전 역사로 소급해서 적용되는 계기가 된다.”

인자라는 몸의 전 역사로 소급하니까 묵시에 의한 역사성이라 보면 되죠, 역사성이 소급하여 적용되는 계기가 된다. “땅의 세계는 ‘색출의 현장’이 되고 영적 전쟁” 천사들, 마하나임, 하나님의 군대죠. 마하나임이 하나님의 군대라면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거예요. 천사의 기능과 역할을 이스라엘, 성도가 인수인계 받은 겁니다. 묵시적 존재가 되었으니까.

“영적 전쟁의 주력들은 각기 자기 사람들을 호출해내면서” 짐승의 표와 어린양의 표가 서로 식별되죠. 식별된다. 판명되면서 이 판명이 명석으로 이어져요. ‘아, 저 사람은 짐승의 표를 받았구나. 666이구나. 그럼 나는 아니다.’ 이것이 살아가면서 명석,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드러나죠. 우리는 이 기능을 받은 거예요. 이것은 역사가 아니고 역사성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역사가 없어요. 묵시가 우리에게 허락한 역사성이죠, 역사성.

역사성인데 역사라는 말은 그럼 왜 하느냐. 역사 속에 포함된 안감이기 때문에. 역사에 포함된 내재면. 묵시세계와 역사의 경계면인 내재면 또는 안감이기 때문에 역사라는 말을 붙일 수밖에 없어요.

요셉이 실제로 국무총리 되었잖아요. 우리 보기에는 역사성이지만 세상 보기에는 역사잖아요. 예수님이 실제로 이 땅에 왔죠. 사람들이 보기에는 역사지만 우리 보기에는 역사성이죠. 예수님이 죽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죽은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이해하는 겁니다.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죽은 걸로 봤어요. 하지만 스데반 집사 본인은 뭡니까? 죽기 전에도 자기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묵시적 존재에요. 사도 바울이 로마 가서 순교당하잖아요. 그러면 사도 바울 자기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자기가 죽는 것은 원래부터 십자가 못 박혔기 때문에 그 못 박힌 것이, 성도로 판명 난 것이 보다 명확하게 되는 그러한 순간이 왔을 뿐이에요, 죽는 순간이. 이미 판명 난 것이, 결론 난 것이 명석, 명확하게 될 뿐이라니까요. 또렷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 차이점이에요.

그래서 p.212 제일 밑에 봅시다. “구약의 종말 예언과 사람들의 시간 인식 사이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리는 이유는,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안목에서는 종말 자체가 철저하게 핍박을 받기 때문이다.” 인간의 몸에서 종말이 나온다는 것은 역사에서 나오는 종말 개념이 또 따로 있어요. 지층에서 나오는 종말 개념.

아까 후딱 설명했는데 다시 한번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으니까 역사로 딱 다지잖아요. 그러면 지층이 되겠죠. 단단한 층이 되겠죠. 남들은 또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가 있잖아요. 전부다 역사 있잖아요. 그러니 이 세상은 역사가 층층이 자기 층, 자기 층,... 지층의 지질대를 이루는 거예요. 너는 나한테 간섭하지 말고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이렇게 가는 겁니다.

가는데 역사가 지층으로 가면서 나중에 점선으로 미래를 표시해서 마지막 때가 되면 나는 천국에 간다, 라고 했을 때, 이 점선으로 사이에 뭐가 없어졌습니까? 주님한테는 있는데 인간한테는 없는 게 뭐에요? 내가 나한테 버림받은 것이 없죠.

지난 수요설교가 뭡니까? 이 더러운 세상에서 나 혼자 벗어나서 구원받는 게 구원이 아니고 누구로부터 구원받아야 돼요? 나로부터 구원받아야 돼요, 나로부터. 그게 나라호. (누리호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나’라는 호. ‘나’라는 이 우주선. 이거 궤도에 못 올리고 그냥 떨어진 거예요. 아이고, 적합하게 또 일이 벌어졌네. 나라는 호, 이 우주선은 궤도에 올리지를 못했어요. 천국에 못 올라가요. 그냥 희망사항이에요. 돈 2조나 퍼들여가면서 했는데.

뭐 달에 올라가면 뭐합니까? 달에 올라간 인간이 맨 역사적 인간인데. 천국을 가야지, 달에 가는 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달에 가서 늙어 죽을려고 하는 거예요? 달에 가서 늙어 죽으나 목성에 가서 늙어 죽으나 지구에서 늙어 죽으나 삼풍백화점 아래에서 깔려 죽으나 자기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는 거예요, 자기로부터.

아까 자기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가 있으면 자기 주위에 바로 가족들, 남편, 손자, 아들, 모두 못 벗어나요. 벗어나지를 못해요. 여기다가 아까 지고지순한 사랑, 온 사랑을 다 가족에게 해주는 거예요, 가족에게. 가족은 나의 행복. 내가 몸 바칠 곳은 내 가족밖에 없다.

이게 바로 나와 나의 동일시에요. 나와 나를 같이 생각하는 거예요. 내 몸과 나를 일치시키는데 일치가 안 돼요. 이게 결핍이 생기거든요. 내 몸이 나하고 일치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몸은 다른 분이 다루기 때문에 일치가 안 돼요. 마음 같으면 머리 새로 났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안 나요. 동영상 보면 훤한데 안 난다고요.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나의 살아있음을 증거 할 이유는 없습니다. 주님의 몸으로 살아있으려면 나는 항상 내가 이 땅에서 주님처럼 버림받는 모습으로 보여져야 돼요.

이야기를 계속해봅시다.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 지층에서 나온 종말 있죠, 종말. 이 종말은 버림받음이 없기 때문에 십자가가 빠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종말을 종교적 감수성으로 보는 거예요. 이건 아무 의미 없어요.

책 편집하시면서 앞에 있는 그 시 보셨죠? 종교적 감수성으로 나대는데 사람들은 나보고 신앙 좋다고 말들을 한다. 종교적 감수성, 이게 신앙 좋은 겁니까? 실제로 누가 버림받았는데요? 내가 왜 나를 요리하고 레시피에 집어넣고 하는 겁니까? 내가 왜 코팅하고 난리에요? 난 아무것도 아닌데 난 버림받아야 되는데 왜 나한테 그렇게 정성을 쏟고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애쓰는 거예요?

천국의 언약적 계열이 와요, 언약적 계열. 야곱에게 있었던 경험, 이삭에게 있었던 경험, 아브라함에게 있었던 경험들 있잖아요. 그 경험들이 한 계열을 이뤄요. 탕자 계열, 불의한 청지기 계열. 세리와 창기의 계열. 지난 강남강의 때 했잖아요, 세리와 창기의 계열. 더 이상 상처받을 일이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의 계열. 더 이상 망할 자리가 없는 사람들. 그런 계열.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오게 되면 이미 어린 양의 경험에 따르는 새로운 진짜 완료된 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그 자체가 생명이에요. 우리는 생명의 결정체입니다, 우리 성도는. 여러분들도 (자기 자신을 가리키면서) 한번 해보세요. 부끄러워서 못합니까? 앞으로 이거 해놓고 버림받아야 돼요. 함부로 이거 하면 안돼요. 버림받아야 돼요, 세상으로부터.

생명의 결정체. 추가될 필요 없어요. 착한 일 할 이유가 없어요. 착한 일할 당사자가 죽어버렸는데. 착한 일 할 게 없어요. 천사가 착합니까? 천사는 착하다 하지 않죠. 착하고 나쁜 것은 선악체제에서 나온 것이고 천사는 착한 게 아니에요. 그냥 주의 일을 할 뿐이죠. 천사가 천사의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주의 일을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도였어요. 자꾸 사도 바울 보지 말고 ‘예수님’을 크게 쓰고 ‘사도’는 아주 작게 써야 돼요. 예수님의 끄트머리, 예수님이 함께 들어있는 인형. 속에 예수님이 들어계신 분.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움직일 때마다 주와 함께 움직이는 주의 일이 되는 거예요. 주의 일은 절대로 이 땅에서 생략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내 일에, 내 구원에 신경써버리면 누가 가리워집니까? 생명이 생명도 아닌 것에 가리워지고 감추어지니까 생명이 가만히 있겠어요? 뒤통수 쳐버리죠. “주여, 제가 뭐 잘못되었습니까?” 이렇게 주님께 대들면 “너는 ‘잘했다, 잘못했다’라고 이야기할 잽도 아니야. 너는 그럴 필요조차 없는데 왜 자꾸 잘했다, 못했다를 네가 왜 그걸... 따지냐, 지금?!” 따질 필요도 없는 걸 왜 따져요.

그래서 여기 보면 종말은 인간이 기다리는 게 아니고 인자(人子)의 몸과 관련된다. (p.213 3번째 줄, “이는 종말이 십자가 지신 인자의 몸과 관련지어지는 것이지 결코 인간의 몸과 관련지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자의 몸에 의해서 종말과 관련지어지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이야기해봅시다. 인간들의 역사, 유대 역사,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종말론과 예수님 자신의 오심, 다 이루어진 생명 자체의 종말론 사이에 결국 누가 옳은, 바른 종말론이냐. 어느 계열이 진짜 하나님이 원하는 계열이냐. 그 투쟁현장에 스데반 집사나 사도 바울이나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들을 거기다가 투입시키는 겁니다. 야곱에게 찾아온 하나의 천사처럼. 우리도 미끄럼틀 한번 탈까요? 우리 몸에 성령이 그냥 미끄럼틀 타고 내려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래서 우리 있는 어떤 몸이든 어떤 형편이든 간에 그냥 주님한테 양도해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건 하나의 계열이 돼요. 층이 아니고 계열. 그래서 여기 p.213 위에서 5번째 줄에, “이스라엘 회복과 메시아의 출현 사이에 계시적 연결은, 시간적인 계기로 가능하지 않다.” 시간적 계기는 역사죠. 역사로 가능합니까, 가능하지 않습니까? 역사로 가능하지 않죠. 과거의 기억과 관련이 없어요. 오늘 이 시간이 새로운 시간. 항상 주께서 새롭게 일하고 계시고 주님이 지금도 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몸을 통해서 주께서는 확인시켜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지금도 활동하고 있음을 우리 자신의 일만 생각하다보니 잊어버리고 놓쳐버렸습니다. 이제는 딱딱한 내 것 고집하지 말고 이제는 열심히 천사처럼 주께서 선택한 대로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나타낼 수 있는 이미 생명됨 그 자체인 것을 우리가 감사하면서 이 땅에서 자유롭게 우리 일을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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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9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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