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1b 부산강의 : [시편]42(26:2)-악의 온전함
20211011b 부산강의 : [시편]42(26:2)-악의 온전함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다말은 필히 버림받아야 돼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서글프지요. 이게 우연히 또는 마침 그때에 이걸 보편화시켜버리면 인간세계가 돼버려요. 다말이 암논이라는 배다른 오빠를 좋아한 적이 없어요. 폭력이거든요. 강간이란 말이죠. 없는데 다말은 나름대로의 자기 연속성이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남자 만나서 행복한 가정하겠다는 자기 연속성, 그게 나를 위한 인간으로서 그러한 포부나 기대나 희망 있는데 그 희망은 어디서 가져오는가?
바로 본인이 살고 있는 인간세계에서 나 저런 남자와 살아보고 싶어. 나는 저렇게 인생을 여성으로서 저런 가정생활이 소원이겠어. 나름대로 뭔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 암논이 침입한 거죠. 이 침입을 다말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어요? 다말은 착하고 암논은 악하다고 하면 안 돼요.
지금 다윗이 하나님의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깨달은 것은 뭐냐? 바로 큰 나를 위해서 살아가면서 생겼던 판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공정과 불공정 이 모든 것이 다 깨져버린 거예요. 나는 그 속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밧세바 남편 우리아 보세요. 우리아가 죽는 이유는 뭐냐? 여호와께 충성해서 그래요.
언약궤가 암몬과의 전쟁에서 전쟁터가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는 거예요. 그걸 생각하게 되면 사적인 그야말로 나를 위해서 사적으로 아내와 휴가 즐기고, 그런 여유가 없어요. 하나님의 지시가 우선이고 내가 얼마나 행복하냐는 그건 나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기에 너무나도 우리아가 충실했습니다. 인간세계에서 보면 바보등신 같아요. 바보등신 같이 미쳐도 여호와께 그렇게 미쳤냐.
주님께서는 우리아 장군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세계에선 착해 보이지요. 착한 우리아를 기어이 죽이십니다. 심지어 화살이 날아올 때 이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 모든 에너지를 주관하시는 주께서 우리아 장군에게 화살이 날아와도 우리아 장군 곁에 떨어지게 하고 우리아 장군한테는 안 맞도록 해야 되는데 정통으로 마치 하나님께서 죽어라 인간아, 이게 네 역할이야 하는 것처럼 그냥 우리아 장군 전사하도록 기획하시고 철저하게 프로그램화시킨 거예요.
하나님께 충성한 자의 모습으로 다윗 왕의 농락에 의해서 다윗과 상사 요압의 정치적인 꼼수에 의해서 기어이 죽어버리도록 우리아 장군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습니다. 이게 우리아 장군의 개인적인 신상의 연속성에 있어서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우린 막 따지고 싶은 거예요. 불쌍하다 우리아, 안 됐다 우리아 뭐 이렇게 우리가 기념회를 세우자 하는데 막상 가해자 다윗은 신이 났어요. 그쪽 세계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서.
이 뻔뻔함, 이건 하늘을 찌르는 뻔뻔함이에요. 간음죄에다 살인죄까지 지어놓고 자기는 제대로 된 이스라엘 왕이라고 우기는 이 뻔뻔함, 어떻게 감당해야 돼요? 어떻게 인간세계에서 해석해야 됩니까? 그게 단절성 때문에, 끊어짐.
인간의 해석은 전부 다 나에 유리함,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어쨌든 간에 나를 위한 그러한 방향성과 목적성을 가지고 모든 사물을 내가 보고 싶은 대로 해석한 거예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성경에 숨어있는 주인공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고 성경을 들여다보고 관찰하고 있는 내가 유리한 쪽으로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해버린 겁니다.
그림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인간세계가 1이고 숨어있는 세계가 2라면 1도 아니고 2도 아니고 제3의 영역이 제3의 공간이 만들어져요. 그래서 1의 세계에서는 종교가 어떠냐 하면 나 죽어서 천국 갈래. 천국 갈래, 지옥은 안 갈래 하잖아요. 그러나 막상 이쪽 세계에서 주님의 세계로 오게 되면 천국도 중요치 않고 지옥도 중요하지 않고 주님의 희생의 나라가 중요한 거예요. 주님의 희생하심을 위해서 나는 이 땅에 우연히 태어났다. 몇 년, 몇 월, 몇 시에 우연히 태어난 거예요.
여러분 주민등록 다 갖고 있지요. 저는 유월되면 제 생일 알까 싶어 너무 걱정하고 있어요. 혹시 또 내 생일 알아채서 남방 하나 줄까 싶어서. 그런데 페이스 북에 보면 다 나와 있는데. 생일 축하합니다. 아무개 씨. 이렇게 할 때 어떤 사람은 천구백 몇 년 칠월에 태어나겠지요. 이 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이 땅에 차이가 없는 이유는 어차피 목적은 뭐냐? 있음에서 없음으로 소실되기 때문에 둘 사이에 태어난 그런 경쟁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 없어요.
지금 육십 대 주부들은 아주 억울해합니다. 자기는 낀 세대에 속했다고.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시어머니가 며느리 생일상 차려주는데 한 상을 차려줘서 각종 온갖 해물로 차린 사진을 찍었어요. 나 며느리에게 이렇게 충성을 다한다. 며느리는 얻어먹기만 하는 거예요. 이 세대가 육십 대 세대에요.
이건 누가 누구한테 생일상 차렸는지 분간이 안 돼요. 며느리님 삐치면 안 돼요. 가정이 안 돼요. 다 며느님 위주로. 굉장히 억울하거든요. 하지만 그 시대가 어떤 시댄지 모든 시대는 바로 없음으로 소실돼야 될 그냥 우연히 태어난 거예요. 서로가 우연히 태어난 거예요. 거기에는 진실이란 건 없습니다. 희생된 분의 희생의 여정은 희생의 씨앗으로부터 그 여정을 밟아나가는 거죠. 이 인생이 뭐냐 하면 바로 다윗의 인생이에요.
두 번째 시간에서 여러분들은 이것만 알면 돼요. 다윗은 반드시 악한 체험을 해야 된다는 것 그래야 이 코스를 밟을 수 있어요. 다윗뿐만 아니고 저와 여러분, 에브리바디 성도라면 죽을 때까지 무슨 체험을 해야 되느냐 하면 악한 체험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악한 체험을 해야 돼요. 어떤 선한 것도 내게는 나올 수 없음을 절감, 절감하면서 매일같이 살아가야 돼요. 그리고 그걸 이런 악한 체험을 하게 해주신 주님에게 고맙고 감사의 마음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는 뭐냐? 어떻게 동행과 감사가 병행될 수 있는가? 여기에 관한 이야기에요. 시편 26편이. 어떻게 동행함과 감사가 이어져 나올 수 있나? 그냥 동행해버리면 감사가 나오는 게 아니고 나의 철저함과 나의 온전함과 나의 완전함이 튀어나와버려요. 이건 백 프로 사탄의 시험입니다. 시편 26편에 봐라.
시편 26편에 뭐라 돼있어요? 이것 눈 있는 사람은 다 압니다. 글 아는 사람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이걸 보는 사람은 자기의 목표가 되고 말았어요. 방주 안에는 목표가 없고 목적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없는데 시편 26편에,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이 대목 딱 나오는 순간부터, “아하 우리 딸애가 이번에 성적이 내려간 이유가 내가 그동안 세상에 너무 나쁜 짓을 많이 했구나.”
그렇다면 애 성적을 높이는 방법은 내가 세상에 나가거나 교회에 나가서 희생봉사하고 충성을 다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구나, 라고 생각한 거예요. 출발점이 뭐냐 하면 우연이 아니고 필연을 노리고 오는 겁니다. 나한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성경은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지 감안을 하는 거예요. 완전히 이건 유대교가 바리새인들이 했던 그 행세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겁니다. 제3의 영역은 없어요.
무엇이 온전하냐? 이 말 처음 들어보면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모를 거예요. 내가 악함에 빠져나오지 않는 이 조건의 완전함에 내가 행하였사오니. 너무 간 것 아닙니까, 혹시? 너무 심하게 이야기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사람을 열댓 명 죽여야 되고 곤란해요. 내 악함에서 빠져나오지 않은 그 조건과 요건의 온전함 속에서 나는 행하였사오니.
왜 그렇게 해야 되느냐? 그래야 동행이 뭐로 이어집니까? 감사로 이어져요. 고마움으로 감사로 이어져요. 감사라 하는 것은 누구 대상이 있는 거예요. 지한테 감사하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감사하는 것은 저를 나에게서 빼내주신 분에 대한 감사, 그분의 안목과 그분의 시선으로서 나를 보게 하신 것에 감사에요.
언젠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성령 받았다는 것은 주님의 콘택트렌즈, 주님의 눈동자와 딱 붙어있는 렌즈를 끼고 세상을 다시 보자. 그럼 뭐가 보이느냐? 세상 안에 희생, 십자가가 보이지요. 희생하신 분의 여정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볼 수 있다는 것은 1이 아니고 2가 아니고 제3의 희생하신 분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다윗은 자기가 죄 속에서 태어나서 죄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이 온전함 체험, 요건을 충족시켜주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충족케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사무엘하 마지막 24장에 보게 되면 다윗이 밧세바와의 관계, 그리고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다윗의 가문, 그 끝부분에 인구 조사하는 대목이 나올 거예요. 그 인구조사를 할 때 역대상에 보면 인구조사를 누가 시켜서 하느냐 하면 이게 악마가 시켜서 해요. 사탄이 다윗으로 하여금 격동케 해서, 또는 사탄이 이스라엘을 격동케 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시키는 겁니다.
인구조사를 시킬 때 다윗을 인구조사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니고 주께서 다루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나도 뭔가 하고 싶은 것은 멈출 수가 없어요. 스톱! 스탑을 시키는 것은 인간은 연속성을 계속 나가기 때문에 한 번 연속성은 가속도, 뉴턴의 관성의 법칙이 있거든요. 한 번 치면 멈출 때까지 계속 간다는 거예요. 인간이 연속성이거든요. 계속 가기 때문에 스탑은 내 소관이 아닙니다. 중간에 누가 스탑을 해줘야 돼요.
내가 연속적으로 살다가 멈췄다하는 그런 나를 좋아하고 그걸 반길 것이 아니고 스탑을 할 때 스탑하는 그 기제, 메커니즘, 방식이 뭐냐 하면 제가 주일 낮 설교에 했잖아요. 이게 바로 제사 직이에요. 누가 희생을 해서 제사를 하게 되는 거예요. 제사가 내 인생을, 막 가는 인생을 막아준 겁니다. 제사는 뭐가 필요하냐? 희생물이 필요해요.
희생물 되시는 그분이 전에 내가 차지했던 내 자리를 차고 들어오신 거예요. 이게 주인공 바꿔치기가 일어난 겁니다. 희생하신 십자가 지신 주님이 이제는 전에 내가 있던 주인공 자리를 차고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성도가 없는 거예요. 성도는 새로운 세계에서 원이 겹쳐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주인공이고 그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받은 우리가 이쪽 세상, 인간 세상에 하나에 이쪽 세상 사람인 것처럼, 마치 그것인 것처럼, 마치 이 세상 사람인 것처럼 충실하게 사셔야 돼요. 도 닦지 말고, 할렐루야 기도원에 가지 마시고. 지독하게 이 세상 속에 사는 것처럼 살면서 이게 악하고 자기를 위해서 사는 내 모습을 도대체 인생을 몇 년 살아야 다 닳아서 없어지는가, 그런 것을 우리가 기대 못해요. 왜? 육신이 있는 한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것은 나를 위해서예요.
이 몸이 주께서 사용하는 효용을 아끼지 마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껏 악의 온전함 코스에 거기에 온전하게 충실해주기 바랍니다. 내가 부탁할 사항이 아니고 다들 그렇게 살고 있어요.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밖에 모른다고요. 남의 나라 코로나 되던 우리나라만 잘 되면 그만이고. 전부 다 나 중심이에요. 서울이야 몇 백 명 되든 말든 부산만 안 오면 되고. 전부 다 내 중심이라, 내 중심.
남의 집 내려가도 우리 아파트 값 올라가면 그만이고요. 남의 자식 어떻게 되든지 간에 내 자식 안 아프고 공부 잘하면 되고. 전부 다 내 중심이에요. 여기에 충실해주세요, 라고 부탁하는 내 입이 나빠. 할 수 있는 게 우리가 하는 재주가 나를 위해서 사는 재주밖에 없는데 뭐 다른 재주가 있겠어요. 그 재주를 주께서 이용하신다니까요. 네 재주를 마음껏 펴내놔 봐라.
그렇게 해서 중간에 삼각형 코스를 밟아가면서 이쪽 세계와 천국과 지옥이 어떻게 양분되어 가는가를 이걸 보면서 너는 나에게 뭐하라? 감사하라. 이 양분된 제3의 지점을 오늘 본문에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제단이라고 합니다. 어디 나오느냐 하면, 8절에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나오지요. 6절에,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이걸 다른 번역엔 ‘제단’이라고 돼있어요.
주의 단을 어슬렁거리는 거예요, 지금. 주의 단을 거닐 수 있는 거예요.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악은 악대로 저지르면서 다윗은 말하기를 나는 무슨 죄다? 무죄하다는 거예요. 이게 어떻게 자기를 위한 겁니까? 철저하게 나를 위하지 않는 규정이라는 것, 하나님의 해석이란 사실을 마음껏 지금 다윗을 통해서 발현되고 있는 거예요.
이게 온전함이에요. 제단에 거닐 수 있는 인간이 등장한다?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은 인간세계엔 존재하지 않는다고 제가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세계는 온전하고 완전한 인간은 없어요. 없는데 다윗은 말하기를 여기 있잖아, 하고 자기를 내세우는 거예요. 여기 누구냐 하면, 악에 찌든 내가 있잖아.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방주 이야기했지요. 지금부터 좀 어려운데요. 방주가 그 의미가 확장이 됩니다. 방주 의미가 확장이 될 때 방주가 방주다운 것은 거기에 정결한 짐승이 있었기 때문이고 정결한 짐승을 위에서 누가 쳐다보느냐 하면 무지개가 바로 직결해서 쳐다보고 있습니다. 정결한 이 말은, 무지개가 쳐다보고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해서 여기 정결한 피 있잖아요. 피가 하늘에 표현되면 무지개가 되는 거예요.
무지개가 피를 바라보고 있다는 말은, 피가 이 지상에 인간세계에 없는 새로운 의미를 발휘하고 있다는 것은 무지개고 무지개를 보여주는 겁니다. 무지개는 막이에요. 이 세상을 둘러친 궁창 같은 막이에요. 창조 때 없던 언약이 개입되면서 새로 생긴 새로운 제2의 창조라 할 수 있어요. 그 창조를 하나님이 물로써 심판하는 것을 막아주는 겁니다.
막아줄 때 근거가 뭐냐? 지상에 정결한 피가 흘렸기 때문에 너희들은 지금 계절이 주어졌고 너희들은 저주가 막혀져있다는, 저주가 유보돼있다는 겁니다. 이걸 노아언약이라 하는데 노아언약의 특징은 악인이나 선인이나 거기에 대해서 일체 묻지 않고 뭘 준다? 은혜를 주시는 거예요. 김정은도 살 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 악인, 선인, 이슬람이고 유대교 관계없이 전부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이 법칙은 인간세계에 나오는 법칙이 아니고 인간세계는 나쁜 짓하면 벌 받아야 돼요. 그러나 언약의 법칙, 무지개 법칙은 선인이고 악인을 묻지를 않는 거예요. 선과 악, 선악체제 자체를 묻지를 않는 겁니다. 제가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지만 신세는 주님한테 신세를 져요. 햇빛과 공기, 목숨 전부 다 신세를 지면서 차가 굴렀는데 차사고 난 지점에 마침 5분 후에 지나가서 아무 일 없다는 이런 식으로 해놓고, 주님은 발걸음을 세신다 했어요.
신세는 주님한테 져놓고 늘 인상 그리면서 있는 인상이 가관이라.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도대체 인간이 하는 갈망은 끝이 없어라. 계속 주면 그것 말고 이것, 저것 말고 이것. 그건 있는 거고 더 주셔야 되죠. 인간의 욕망을 한도 끝도 없이 늘 인상 찌푸리고 있어요. 왜 나는 저 사람에 있는 게 나한테는 없는가, 이런 식으로. 신세는 지고 있으면서.
교회 안 다니는 사람은 이렇게 돼요. 교회 다니면서 무슨 생각으로 다니는지 모르겠어요. 뭐가 불만인데요? 공기 줬다고 불만입니까, 햇빛 줘서 불만이에요? 어젯밤 자고 오늘 아침에 이 땅에 태어나게 해줘서 그게 그렇게 그게 불만이에요? 예수님 죽이고 싶어요? “어제 죽어서 천당 가고 싶었는데 오늘 왜 살립니까?” 그게 그렇게 불만이에요?
방주 안에, 노아언약이거든요. 노아 그 다음에 언약이거든요. 노아언약이니까 노아 지워버리고 언약의 원칙이 온전해요. 완전하고 온전하잖아요. 여기서 노아 다음에 아브라함을 붙이든 이삭을 붙이든 야곱을 붙이든 오늘 시편 26편에서 누굴 붙입니까? 다윗을 붙이든 언약의 원칙은 이거는 이미 확고하고 완전합니다.
언약의 원칙은 뭐냐? 악함으로써 내가 은혜를 준다. 중요한 것은 뭐냐? 요건, 조건은 너 아니고 흠 없는 제물의 피 흘림에 근거해서 이렇게 은혜를 준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에서 이삭과 야곱 이 사람들과 보통 사람이 다른 점이 뭐냐?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을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둘로 프리즘으로 갈라져요. 천국과 지옥으로.
그러면 언약을 모르는 다른 사람은 뭐냐? 그냥 인간세계 그게 전부에요. 과학의 세계 그게 전부입니다. 인간 뭐 그렇고 그렇지. 끝났어요. 인간은 어떻게 죽는지 그건 알 필요 없고 살아 있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느냐, 얼마나 출세하느냐가 중요하지 죽고 난 뒤에는 종교문제지 그거는 시급한 다급한 오늘 내 문제는 아니다. 오늘 손님 만나서 한 건수 올리는 게 중요하지 지옥이 뭐 중요하겠어요.
사람이 만약에 휴대폰을 가지고 예배 참석하잖아요. 코로나 부산에 몇 명 왔습니다. 그것 듣고 예배시간에 뛰어나가고 그런 일은 없어요. “아이고, 지겹다, 지겨워, 정말.” 하지요. 그런데 “누구 부모 되십니까? 애가 교통사고 났는데……” 이러면 지금 예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휴대폰 열고 그 내용을 진의를 파악하고 후딱 성경책 들고(성경책 놔두고 다니는 사람도 많지만) 다시 보따리 싸고 그날 예배는 끝났어요.
애가 아프다든지, “주차하신 차번호 주인 맞습니까? 제가 박았습니다.” 이런 거나 후딱 나가버려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이 십자가를 알고 복음을 알아도 이건 내가 안다는 주님의 우연이 용납이 안 돼요. 안다가 돼버리면 온전한 게 아니에요. 이게 우연으로 완전히 산산조각 내버려야 돼요.
구원받는 내가 매일같이 산산조각 나버려야 돼요. 나는 굳게 믿습니다. 확실하게 믿습니다. 하는 것은 하나님 믿는 게 아니고 하나님 믿는 나를 믿는 거예요. 그 나는 완전히 파쇄 돼야 돼요. 종이 파쇄기 알지요. 날마다 이게 깨어져야 돼요. 깨어져야 다시 나 위함이 아니고 주님 위함으로 바뀌어 지는 겁니다. 그런 사건들 주께서 프로그램화해서 다 준비해놨어요.
이 말은 뭐냐? 예배 참석하는 것이, 내가 결정해서 오늘 난 어떤 예배 참석한다는 결심해서 예배 참석하는 것이 아니고 예배를 참석을 못할 만큼 다른 사태가 주께서 안 일으켰기 때문에 지금 그 시간을 예배당에서 보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 참석하는 게 우연이에요. 나의 결심의 결과가 아니고. 할 일이 없어 예배해요. 그렇게 시급한 일이 없기 때문에 예배 참석하고 있는 겁니다. 결정의 순위가 내가 결정할 수 없어요, 인간은.
회사 상사가 직원들 회식하면서 아주 짠돌이 상사가 이야기합니다. 오늘 점심 내가 낸다. 짬뽕, 짜장면 둘 중에 하나만 해라. 그런데 그보다 더 높은 사장님 오셔서 탕수육 추가 됩니다, 할 때 전부 다 탕수육으로 다 가버리는 거예요. 제3의 요소를 제공한다는 것은 뭐가 넓어지느냐 하면 가치의 범주, 오늘 제목을 이걸로 해야 되겠다. 가치의 범주를 주께서 넓혀주는 겁니다.
초등학교, 갖고 놀지 않았지. 유치원 애들, 유치원도 3학년 되면 어르신네라는 표현을 해요. 곧 졸업반이에요. 유치원 신입이 구슬치기한다든지 딱지 놀이할 때 그들의 재산은 뭐냐? 그들의 재산은 딱지고 구슬이에요. 제가 몇 번 이야기해서 지겹지요. 다이소 가면 천 원 주고 사는 것, 오백 그램에. 그들의 범주의 가치는 이거에요. 구슬이고 딱지에요.
이런 여자, 이런 남자아이들이 나이 오십이 넘으면 뭐가 가치냐 하면 부동산, 아파트, 땅이 이게 가치가 범주가 확대돼버립니다. 철없는 이십대, 삼십대는 뭐냐? 차에요. 빨리 돈 벌어서 차 바꾸려고 이것 하다가 가치가 점점 더 늘어나는 거예요. 역시 나이 칠십 되면 부동산만한 것 없다. 부동산이 최고다. 집, 이십 년 되면 날아가서 소용없어요. 역시 뭐냐? 토지, 땅이 최고다. 돈 벌어 무조건 땅 사놔야 돼. 맹지든 길이 있든 없든 간에. 맹지는 누구한테 갖다 주게 되면 개발해서 화천대윤가 뭔가 수천 억 되기 때문에 하여튼 그런 건 나중 문제고 무조건 부동산.
인간은 가치의 범주가 전체를, 전에 그런 강의했는데 다시 해보면, 전체 가치가 뭐냐 하면 이십대, 삼십대 점점 세상을 알면서 그들은 가치의 범주를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돈이 인생에 전부라는 것을 그거는 이론이 아니고 몸소 실감하게 돼요. 교인들의 헌금할 때도 처음에는 순진무구해서(순진하지도 않지만) 헌금하는 줄 알지만 나중에 한 5년만 되도 헌금은 어떤 경우냐 하면 내가 헌금했을 때 그 헌금의 액수 이상으로 주께서 되돌려줄 경우에만 헌금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 그러면 헌금은 그냥 낭비하는 거니까요. 나한테 손해 보는 거잖아요. 표정들이 왜 그래요.
그걸 헌금 통박이라 하는데 이걸 했을 때 나한테 손해 보지 않을 다시 채워준다는 보장이 있을 경우에만 투자하듯이, 30배, 60배, 백배 투자하듯이 그냥 해보고 안 하면 이게 낭비가 돼버리는 거예요. 빙신바보 같이 나만 손해인 거예요. 왜? 인간은 만남에서 자기를 규정하거든요. 교인들 아무도 헌금 안 하는데 내가 미쳤다고 헌금해. 교인은 만남이잖아요. “얼마 벌었어요?” “없던데.” “그럼 나도 안 해.”
돈인데 나중에 더 영특해지면 돈이 인간을 잡아먹는 게 아니고 자본이 결정한다는 거예요. 돈과 자본을 구분하게 됩니다. 자본에는 이게 희망이 있지만 돈은 쓰고 버리는 거예요. 돈은 교환용이지만 희망은 자본은 저축용이에요. 저장용이에요. 그러면 나는 죽더라도 내가 모은 자본 안에는 나는 영원히 살아 있는 겁니다.
자식들한테 제사 지내자하지 말고 자식들에게 남겨줄 때 자식들은 내가 남긴 유산 속에서 아버지는 훌륭하셨어, 아버지는 멋진 아버지였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에서 그냥 만나는 게 아니고 옆에 보따리들이 다 있어요. 형님, 할 때 그냥 형님이 옆에 돈 줄 형님, 아버지는 돈 있는 아버지가 아버지에요. 자식도 돈 있는 자식만이 자식이 되고, 목사도 내 돈 벌어주는 목사가 목사고요, 교인들도 돈 없는 교인은 교인이 아니에요. 돈 있는 돈 낼 수 있는 교인이 교인입니다.
이게 가치가 뭐냐? 돈의 가치, 자본의 가치인데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이걸 하나님과 견주어버리죠.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희들이 태생이 돈을 결국은 하나님, 예수님 백날 불러 봐도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은 돈 벌어서 달라고, 돈 벌기 힘드니까 힘든 나를, 내가 목적이 있다 했어요. 방주 안에는 목적이 없는데 목적이 있지요. 목적은 뭐냐? 나를 살리는 방식에 협조해주시면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 식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걸 왜 다윗 때 이야기하느냐? 다윗이란 이 사람 옆에 모든 신하들, 자식들 많지요. 이들이 다윗과 단절돼있어요. 이들은 뭘 원하느냐? 다윗이 가진 걸 원해요. 이게 권력입니다. 권세입니다. 다윗은 이미 알아버렸어요. 바로 권세와 권력, 금력, 재력 이 모든 것이 바로 이게 연속성을 추구하는 죄의 세계란 것을 다윗은 알았어요.
다윗은 알았는데 다윗 주변에 있는 신하들, 요압이라든지 신하들은 그걸 모르고 있어요. 전에 다윗은 어디 있었는가? 밧세바 만나기 전에는, 밧세바가 정말 잔 다르크에요. 밧세바 만나기전에 다윗은 자기가 이쪽 세계, 다시 말해서 현재 신하들이 추구하는 권력세계에 있었던 겁니다. 자기가 거기서 최고의 권력을 가진 왕이라고 여겼던 거예요, 왕. 자기가 왕이라고 여겼던 이 왕, 한자 王 알지요. 누가 손바닥에 쓴 왕.
왕이라고 여겼던 이것이 죄 짓고 난 뒤에는 뭐냐? 제대로 여호와가 왕이라는 조건을 아울러서 내가 전에 세상에 있거나 지금 주님한테 있거나 모든 것을 왕이 왕답게 드러나기 위해서 프로그램화 확정된 상황이라는 것을 느긋한 마음으로 그걸 알아버린 거예요. 까불어라. 내가 옛날에 좋아했던 것 마음대로 해.
나는 뭐냐? 다윗언약 속에 다윗이 되는 겁니다. 다윗언약 속의 주인공은 희생자고 이것은 바로 다윗 본인을 살리기 위해서 누가 죽입니까? 우리아 장군을 죽이죠. 우리아 장군과 그의 아들, 우리아 장군의 아내의 아들이니까 우리아 장군의 아들이죠. 여자의 아들은 남편의 아들이 돼요. 그러면 비록 관계는 다윗과 관계했지만 아내가 밧세바가 우리아의 아내기 때문에 우리아의 억울한 죽음에 의한 아들이 억울하게 다윗 앞에서 죽습니다.
이 점을 좀 더 규명해봅시다. 아직 어린아이가 있는데 어린아이가 죽었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데 다윗의 아들이 죽었어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 이걸 연결시킬 때는 반드시 다윗 자신을 주께서 끌고 가는 거예요. 바로 죄인의 괴수, 죄인의 자리로 끌고 가야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같은 연계돼있음을 자기가 파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날마다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게 해요. 문제는 십자가가 이게 이천 년 전 사건이 되어 지금 안 보인다는 거예요. 목걸이는 맨날 차 다닐 때마다 목걸이 십자가 있는데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떤 설교에서 이걸 이렇게 했습니다. 형태와 또는 형식과 내용이 이게 달라요. 다른데 이게 그냥 다르다고 하면 안 되고 별개의 것, 합하지 못하고 두 쪽으로 나눠진 거예요.
그래서 천주교는 형식을 강조하잖아요. 지금은 감리교도 마찬가지고. 감리교도 무당 다 됐어요, 목사들이. 복장도 이상하게 로만칼라 비슷하게 입고. 왜 그런 짓을 하냐 하면 교단에서 연금을 줘요. 역시 뭡니까? 인간은 돈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럼 연금 안 받는다고 착한 사람이냐? 그냥 주는 것과 내가 끌어 모은 것과 그거나 그것이나 똑같지요. 누가 주는 것과 내가 돈에 미쳐서 사는 것과 그게 그거지 뭐. 역시 돈 때문에 사는 건 똑같은 거지요.
형식과 내용에서 별개의 것인데 천주교가 성만찬하면서 이 떡은, 그리고 이 잔은 예수님의 살이요 그것은 예수님의 피라고 형식을 함으로써 거기서 자동적으로 내용을 끄집어내는 것을 종교의 제도로 만들었습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걸 화체설이라 하는데 어떤 예수님의 몸이 化, 변한다. 體가 예수님의 몸이 변해서 실제로 임재한다, 화체설이라 하는 거예요. 루터교도 마찬가지고 개혁주의도 마찬가지고 전부 다 마찬가지에요.
이게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떡이 살이 되고, 포도주 잔이 피가 된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이걸 따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걸 믿으라, 하는 거예요. 믿으라하거든요. 인간의 믿음은 다 믿을만해서 믿기 때문에 믿음이 아니고 이건 지식이에요.
떡과 살, 잔과 피, 네 가지 모두 다 이게 사물입니다. 사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두 번째 시간 어려우니까 참아내셔야 돼요. 인간은 자기를 대상화할 때 대상화란 말을 쉽게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나는 저런 사람이 부러운데 나는 저런 사람이 되고 싶어, 라고 꿈꾸는 것 그럴 때 되게 되면 나라는 것은 이건 보이지 않고요.
나는 뭐가 상상 되느냐 하면 괜찮아 보이는 내가 저게 나라고 되고 대상화될 때 이게 사물화 되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내가 저 사람처럼 되고 싶어, 라고 할 때 이미 그는 내가 하나의 대상을 삼을 때 이건 반드시 사물이 되고 나는 그 자체를 하나의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이걸 일치시키는 겁니다.
가만히 표정 보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는 것 같은데, 인간이 주변을 다 살피잖아요. 살필 때 아담이 창세기 2장에서 이름을 짓지요. 그 이름 속에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이름 지었다가 포함이 돼있어요. 따라서 비록 멍멍이, 송아지, 뻐꾸기 이름이 있더라도 그 송아지가 음매 지가 지은 게 아니에요. 뻐꾸기가 지가 뻐꾸기라고 지은 게 아니에요. 종속되는 겁니다.
이름 지은 분이 너는 내게 속한 사물이 되기 위해서 이름을 짓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뒤에 내 이름이 없어진 이유가 거기 있어요. 주의 이름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굳이 내 이름을 가질 이유가 없다니까요. 그래서 기도할 때 무슨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종속되었다는 걸 기도를 통해서 확인하는 거예요.
뭐 유튜브 보고 복음 알고 난 뒤에 맨날 질문이 기도 안 해도 됩니까, 해도 됩니까, 이런 질문인데 기도라는 것은 혼자 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저를 사용해 달라는 거예요, 계속해서. 그러면 기도 안 하면 사용 안 하나? 기도를 하나 안 하나 간에 이것이 기도는 감사로 나오기 때문에 이게 원인을 제공하는 게 아니고 결과에 대해서 그걸 확인 차 기도하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이게 뭐냐 하면 그 안의 기도내용이 위에 있는 예수님이 하강해서 돌아가는 절차를 이야기하거든요.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할 때 그 아버지는 예수님만 부를 수 있는 아버지지 우리 아버지는 아니에요.
그러나 그걸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시면서 그게 나의 아버지가 뭐로 바뀌느냐? 우리 아버지로 바뀐다고요. 그들에게만 예수님이 내려오셔서 하신 공로, 일대기가 계속해서 유효하게 효과를 내는 관계가 성도의 관계에요. 주기도문하면서 내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주기도문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는 것이 나한테 어떠한 결과를 남기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게 주기도문이에요.
이걸 했는데 이게 함축해서 이야기해버리면 어려운데 시간 가더라도 이건 봅시다. 에베소서 3장 봅시다. 항상 나를 위해서가 집어넣어버리면 성경해석이 엉터리에요. 에베소서 3장 14절, 제가 읽어볼게요.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다음에 뭡니까? 기도하지요.
기도내용이 뭐냐 하면 다 긴 것 지나가고요. 18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거잖아요. 이 기도내용과 마태복음 6장에 나오는 주기도문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봐야 돼요.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도에요. 사도기 때문에 예수님의 주기도문의 결과가 사도 바울을 낳았고 사도 바울이 하는 그 기도는 예수님의 주기도문의 연장이에요. 연속입니다. 새로운 세계의 연속이에요. 불연속이 아니고 연속되는 거예요. 그러면 주기도문의 내용은 누가 이뤘습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었지요.
아버지하고 아들 관계는 창세전의 관계에요. 창세전의 관계가 온전해요. 그게 설계도니까. 그 온전함이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심으로써 그 온전함이 연속성을 유지를 해서 지상에도 온전해져버린 거예요. 그 온전함을 사도 바울은 기도를 통해서 얼마나 온전하면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얼마나 온전한지 저들로 에베소 교인들로 알게 하옵소서. 이게 기도에요.
그래서 기도는 언제 기도가 되느냐 하면 나를 위해서가 잠시 중단이 될 때 기도가 돼버려요. 나를 위해서 하는 그거는 주문 외우는 거고 하나의 염불이고요. 나를 위해서가 중단이 되는 계기가 왔을 때 주님이여 내가 딸이 아프지만 그러나 딸이 아픈 이걸 통해서 다시 말해서 내 딸이 아니고 주님의 딸인 것을 깨닫는 순간 아프게 하신 주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깨닫게 하옵소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걸 쉽게 말해서 주님의 때리기입니다. 주님이 때려줘야 나의 연속성이 끊어져요. 근데 때려주셔야 되는데 우리는 뭐냐 하면, ①도와주소서, ②때려주소서. 어느 쪽입니까? ‘도와주소서’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날 위해서 사니까요. 또 이 조건에서 이 요건에서 우리가 변하지 말라 했지요.
‘도와주소서’에서 뭐로 바뀝니까? ‘때려주소서’로 바뀔 때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희생에 대한 감사가 나오고 그 감사의 자리에서 희생된 자리가 뭐냐? 이게 제단, 아까 6절에 어느 집에 어슬렁거린다? 이미 온전하게 우리는 주님의 완전한 주의 집에 어떤 자로? 죄 있는 자가 아니라 무죄한 자로 어슬렁거릴 수 있기 때문에 주의 집에 어슬렁거리기 때문에 바깥쪽에 뭐가 보여요? 세상의 악한 것들, 불법의 집회가 다 보이는 거예요.
여기 26편 3절에 보게 되면,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그 다음에 뭐 나오지요? 동행하지 않는 사람. 그 다음에 “행악자의 집회” 여호와의 증인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뿐만 아니고. 9절에 봅시다.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결국 이건 뭐냐 하면 내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다윗의 고백을 빙자해서 숨어 계신 분, 누구? 예수님의 자기 고백을 미리 앞당겨서 다윗을 마이크로 사용해서 구약 때 언약된 자 이름을 통해서 미리 발설하고 있는, 예수님이 그 시대에 미리 발언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무죄한 자와 함께 있지 않고, 이게 뭐냐?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신 거예요. 예수님의 행적을 말합니다.
아까 제목을 뭐라고 한다고 하고 잊어버렸어요. 가치의 범주. 그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가치가 이제는 폭이 커진 거예요. 왜? 넓이와 높이가 커진 거예요. 커져서 죄 많은 나를 사용해주시는 이유가 이제는 무죄는 상태에 개입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의 희생이 십자가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나를 사용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이 주인공이 되게 되면 나는 뭐냐? 주인공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으니까 나는 이 땅에 뭐가 돼요? 하나의 사물이 되지요. 하나의 물체가 되지요. 노골적으로 기계가 돼요. 기계가 되니까 죽이든 살리든 볶든 뭐하든 간에 사물이고 기계니까 사물, 기계는 처음부터 죽은 자에요. 죽은 자를 생명이 나오도록 사용하는데 있어서 우리가 거기서 이의가 없어야 돼요. 볶아먹고 삶아먹고 뭘 하든지 간에 그저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만 그리스도의 향기만 드러내면 그만이다 이 말이죠. 신약에 와서.
그런 현상이 우리에게 계속 일어나는 이유가, 아까 악인들이 있는 그 세계와 온전한 세계를 계속 이렇게 그 괴리를 분류시키고 벌어지게 하는데 전에 죄인이었던 우리를 활용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땅 끝까지 이르러 우리가 누구의 증인된다? 바로 나의 증인이 아니고 예수님의 증인 되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사용해주시는 거예요.
매일같이 느껴지는 그 체험, 그 체험이 이제는 소소한 시시한 그런 일들에 더 이상 심각할 필요 없어요. 의사가, “아이고, 젊은 나이에 6개월 사시면 많이 사는 겁니다.” 그러면 온 교회 와서 통성기도하고 이렇게 하지요. 시시한 이야기. 나의 부속품이 처음부터 부속품인 사물, 물체가 이게 처음부터 죽었는데 죽는다고 새삼스럽게 무슨 심각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까.
5분만 더 살게 아니 두 달만 살게 하시면 주를 위해서 바치겠습니다. 그따위 그런 생각 마시고요 그동안 살려준 것만 해도 쓸 가치도 없는 걸 많이 써먹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식으로 고백하면서 부르실 때 가져가야 돼요. 만약에 진짜 잘못하게 되면 히스기야처럼 살려줘 버리면 지옥에서 고생 더 하는 수가 있습니다. 제대 받아놨는데 갑자기 북한에서 간첩 내려와서 제대 6개월 연기되고 혼자 손해 본다고요. 쓸데없는 생각마세요. 가치를 천국에서 내려다보는 그런 입장에서 살아갑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란 말이 하나의 지식으로 다가오지 않고 우리가 그 삶을 체험을 하고 있는 중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세상 보는 눈이 주님 보는 거로 볼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