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1a 부산강의 : [시편]42(26:2)-악의 온전함
20211011a 부산강의 : [시편]42(26:2)-악의 온전함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시편 26편,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요동치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 그렇게 시작하지요.
성경에 나와 있는 시편에 나와 있는 ‘나’란 것은 다윗의 시로 돼있습니다만 성경의 인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 세상에 없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다윗이라는 사람이 있더라도 다윗 뒤에 이렇게 숨어 계시는 분이 있어요. 숨어 계시는 분이 다윗을 역사 표면에 밀어내는 거예요. 밀어내게 되면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나왔던 그 내용은 다윗이 아니고 다윗을 뒤에 조종하신 분의 자기 정체를 다윗을 통해서 드러내는 겁니다.
다윗이란 역사적 실존적 인물 속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을 밀어내면서 여기서 무엇을 유발시키느냐 하면 다툼, 또는 전쟁, 심판 이런 것은 다 괴리, 괴리는 것은 벌어지는 거예요. 인간세계와 하나님이 원하는 세계가 벌어져있다, 간격 져있다, 좁힐 수 없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개의 세계가 상존한다, 같이 있다 이 사실을 드러내는 거예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 이 세상에 속한 다윗을 통해서 바깥으로 이 세상의 인물로 나타나게 되면 그 의도는 뭐냐? 다툼과 전쟁과 심판과 저주고 괴리현상, 벌어지는 현상을 또렷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 분이 뭐냐 하면 여기서 숨어 계시는 분이에요. 숨어 있다. 인간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면 성경이니까 지금 우리가 하는 게 시편 26편이잖아요. 시편 26편뿐만 아니고 모든 성경이 다 그래요.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어떤 편지를 받게 되는데 이 편지가 일곱 개로 봉인돼있어요. 일곱 개로 봉인돼있다는 말은 쉽게 말해서 자물쇠를 일곱 개로 채워져 있는 거예요. 한두 개 같으면 용접기로 끊을 수 있을 텐데 자물쇠 일곱 개는 도저히 그 내막을 풀어낼 수가 없는 겁니다.
편지 내용은 감추어져 있고 그것은 봉인돼있고 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요한계시록 5장에 보면 사도 요한이 엉엉 웁니다. 이 세상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편지 내용을 몰라서 그렇고, 첫째는 편지 내용을 모른다. 두 번째, 무서운 것은 그 편지가 내용대로 도착한다는 거예요, 이 땅에. 편지가 모르면 그냥 편지 준 하늘나라에 돌아가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보내진 편지는 반드시 여기 도착을 한다는 거예요. 도착은 하는데 내용도 모르고 도착해놓으면 마지막에 멸망. 그러니까 이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사도 요한이 편지 내용이 울었다는 것은, 사도 요한은 눈에 보이는 세계가 지금 궁금한 게 아니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보다 더 궁금한 거예요. 사도 요한이 울었다. 이것은 뭐냐 하면 단절, 끊어짐. 이 지상에서 얻어지는 인간의 모든 지혜와 편지 안의 내용과 끊어져있다. 연결이 안 돼요. 봉인된 자물쇠로 채워져 있으니까요. 인간의 모든 온갖 지혜를 다 동원해도 그 내용에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지만 성경 전체가 다 그래요. 또 한 가지 성경에 나오는 예를 들면, 요한복음 8장 21절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 죽겠고” 너희 바리새인, 유대인들이 나, 나가 누굽니까? 예수님을 만만하게 보고 같은 시대에 같은 인물로 보고 나를 쉽게 파악이 가능하다, 라고 찾다가는 중간에 죄 가운데 완전히 함몰되어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과 인간세계에 속한 자 사이에서 괴리현상, 어떤 계곡이 있고 건널 수 없는 골짜기가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예수님은 어느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일하냐 하면 인간세계에 속하지 않는 분으로서 이 땅에 등장한 겁니다. 근데 이 계곡을 그냥 계곡이라 하지 않고 뭐라고 보냐 하면 죄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그러면 이 죄는 인간세계 전체가 어디에 지금 함몰돼있다? 주님을 알 수 없도록 작동하고 있는 어떤 위력, 세력 속에 인간세계가 놓여있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15장도 마찬가지인데요. 요한복음 15장 22절에도 이렇게 있습니다. 너희들끼리 있을 때는 너희들이 아무 문제없다고 여겼다. 왜? 모두가 그렇고 그런 다 아는 사이이고 인간이란 뻔하니까 아는 사이인데 내가 너희에게 오지 않았더라면 아무 문제없었다. 그러나 내가 너희 속에 합류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은 비로소 죄가 되었다는 거예요. 이게 요한복음 15장 22절이에요. 그런 말씀 있습니까, 하지 마세요. 그런 말씀 있어요.
마태복음 10장은 여러분 잘 아는 말씀인데 예를 들어볼게요. 마태복음 10장에서 열두 제자를 보내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1절, 12절에 보면, 너희가 어떤 집에 가서 평안하기를 빌라, 평안이 복음이거든요. 복음을 전할 때에 합당치 않거든 군말하지 않고 돌아서서 먼지를 떨어버려라. 이건 뭐냐 하면 너희는 복음의 세계로부터 먼지 털듯이 떨어진 대상이다, 라는 티를 꼭 내야 된다는 겁니다. 열두 제자에게.
열두 제자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속한 세계와 인간세계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리는 역할을 전도자가 하는 거예요. 사람들 꼬여서 부흥시키는 게 일이 아니고 그냥 단절, 갭을 분명히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 그러냐? 인간세계가 뭐가 문제냐 하면, 인간세계는 어디서부터 출발하는가? 창세기 2장, 3장에서 출발하거든요.
창세기 2장, 3장에서 악마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인간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어요. 이렇게 해서 인간은 독립적 존재로 살게 됩니다. 독립적 존재를 알기 쉬게 하면 ‘나를 위해서’에요.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살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나를 위해서 살게 되면 그 다음부터 나를 위해서 사는 게 뭔가를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데 그 뒤에 창세기 2장, 3장 뒤에 나오는 게 창세기 4장이죠.
창세기 4장에 보면 누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가인이 나와요. 가인이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에요. 나를 위하여. 근데 나를 위한 이것이 인간세계에선 하나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자기를 규정하고 자기를 정립하는 것은 사람 대 사람의 만남에서 정립이 돼요. 만나보면 전부 다 각자, 각자도생, 각자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만 모였단 말이죠.
질문을 하나 던질게요. 나를 위하여 복음을 믿겠다. 또 나의 구원을 복음을 믿겠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어느 쪽입니까? 가인 쪽입니까, 아벨 쪽입니까? 이게 가인 쪽이죠. 이 교회는 너무나 신앙이 잘됐는지 훈련이 잘됐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내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나를 위해서 예수를 믿겠다는 이것은 전부 다 이거는 악한 쪽에 속하는 거예요.
왜? 나를 위해서가 성경 공부한다고 이게 깨지질 않아요. 바다는 깨져서 인간의 나를 위해서는 깨지질 않습니다. 홍해 보면서 기적이다. 그걸 기적이라고 한 사람들 다 죽었어요. 기적을 해도 제대로 기적을 알아야지. 자연현상이 달라지고 물 위를 걷는다고 기적이 아니에요. 기적은 뭐냐 하면 ‘나를 위해서’에서 다시 ‘주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라고 말을 해도 되고, 그걸 달리 하겠습니다.
나를 위하지 않는 쪽으로 변해야 돼요. 주를 위해서는 개나 소나 다 이야기해요. 교회 가면. 그게 아니고 나를 위하지 않는 주, 나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는 주, 주님.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 그런 주님이 왜 그런 활동을 해야 되는가? 어떤 식으로라도 나를 위해서라고 되돌아오지 않도록 주께서 마음이 있는 우리 자신을 주님의 최종적인 기적의 장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돈 10억 벌었다고 갑자기 주를 위해서가 생겨나지 않습니다. 나를 버린다고 백날 도 닦아봐야 그건 불교신자지 기독교신자가 아니에요.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버리고, 자기를 버려봤자 남는 게 있어야지. 남는 건 역시 나를 버린 나, 도로 또 나, 버렸던 내가 언제 돌아왔습니까? 이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림을 하나 그리겠어요. 두 개를 그리는데 두 개를 그릴 때 이 세상이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세상1이 하나 있고, 여기 세상2가 하나 있어요. 그러나 세상2에 인간들이 살고, 이건 각자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면서 자기를 정립합니다. 만남이 나를 정립해요. 그래서 형제가 있는 애들과 혼자 있는 애가 다르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비교할 수 있는 다른 형제가 있으면 내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이 되는데 혼자 살게 되면 부모가 해달라는 데로 다 해줘버리면 자기가 재벌도 아닌데 재벌2세인 줄 착각한다니까요. 자기 정립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사람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을 정립하는데 정립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타인 흉내 내기. 타인을 모방하고 타인을 흉내 냄으로써 그게 곧 얼추 나답다고 그동안 꾸준히 세월이 가고 나이를 먹어도 마찬가지에요. 전부 다 새로운 것을 만남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자기를 그냥 변신하고 수용해나갈 뿐이지 나를 위해서는 변함이 없이 꾸준하게 가는 거예요. 나 안에서만 단절이 없어요. 죽을 때까지 단절이 없어요. 나 안에서만.
뭐 고생했다, 어려웠다 하지만 그래도 가느다란 선을 이어졌잖아요. 사우디 가서 죽을 고생했다. 사우디 가서 죽을 고생했지만 살아 있잖아요. 고생은 시껍했지만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느 경우라도 나를 위해서가 완전히 작살나는 그런 지점, 그걸 불연속성이라 하는데 그런 지점은 이게 없는 겁니다.
불연속성을 제가 수학적으로 표현하겠는데 여러분들이 어릴 때 수학시간에 공부했던 것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f(x)=x+1의 함수는 그래프를 그리면 여기 x고 y축일 때 0이 되거든요. 그러면 그래프 선이 이렇게 돼요. 왜냐하면 여기 x가 0일 때 y는 1이 되고, x가 1이 될 때 y는 2가 된다고요. 그런데 이 함수의 특징은 뭐냐 하면 여기 x가 어떤 숫자, 천이 되던 만이 되던 간에 여기가 끊어짐이 없어요.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이걸 수학에서 연속성을 유지한다.
그런데 다른 함수, G(x)= 이 그래프를 그려보는 거예요. 이 그래프가 복잡하게 보이지요. 그런데 여기 x²-1을 풀이하면, G(x)=이 돼서 분모, 분자의 (x-1)을 지우면 똑같이 되는 거예요. 그럼 그래프가 똑같이 돼야 맞는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쭉 가게 되면 여기 x가 1이 되는 곳에 y가 2가 되면서 이 지점에서 이게 불연속성이 돼요. 이 밑의 그래프는 불연속성이 된다고요.
똑같이 아까처럼 약분하게 되면 똑같이 x+1 되는데 왜 이 그래프는 불연속성이 되는가? 그것은 뭐냐 하면 1에다 집어넣으면 이게 뭐냐? 0이 돼버려요. 이 된다고요. x-1에서 x에 1 집어넣으면 0되잖아요. 이렇게 될 경우에 이게 왜 불연속적이냐 하면 =? 이 값이 무엇이냐 하는 거예요.
수학에서 은 뭐냐 하면 0에다가 무엇을 곱해야 1이 되느냐는 이야기에요. 이건 말이 안 되지요. 이걸 불능이라 해요. 은 부정이라 하는데 어떤 수를 곱해도 0이 되는 것은 이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서 부정하는데 이건 불능이에요. 불능이 불연속성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다윗을 밀어붙이면서 하나님께선 연속적인 것, 연속이란 나를 위함, 이거는 어떤 기적이라도 이건 연속적이에요. 죽는 순간에도 나는 잘 살았다, 멋졌다, 나는 최선을 다했노라, 이렇게. 묘비에도 그걸 써놨어요. 참 멋진 인생이었다. Beautiful my life, 브라보. 이런 것 있잖아요. 끝까지 연속성을 유지해요.
난 교회도 다니고 교회 목사가 되어 복음도 전하고. 무슨 시답지 않는 소릴 하느냐 하면 결국 전부 다 나를 위함이에요. 이렇게 살았으니까 나에게 생명의 면류관, 어디서 들은 건 있어서. 본인이 끊어진 것도 없는데 무슨 자길 위해서 생명……. 그 사람은 창세기 3장 이후에 악마의 사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악마는 죄거든요. 죄의 권세에서 못 벗어난 채 구원은 또 얻고 싶은 거예요. 왜? 교회 가면 구원받은 사람 많다하니까 그걸 모방해서. 교회 나와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 저 사람처럼 될래가 돼버리면 이 자아가 정립이 돼버린다니까. 그게 마치 나인 것처럼, 나도 그처럼 얼추 같이 가는 것처럼 본인이 그렇게 자기를 위장하고 조장해버린다고요. 조장해버리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는 도대체가 달라질 수가 없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이 불연속을 어떻게 하는가? 그림을 두 개 아까 그렸지요. 세상1이 있고 세상2가 있는데 인간은 세상1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2만 인정하지요. 여기서 두 점을 해서 삼각형을 해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시작점이 되고 이게 끝점이 되면서 방향이 이렇게 바뀌어요. 그럼 이걸 끝까지 내리면 삼각형을 키우면 여기 밑바닥이 이게 최종점이 됩니다. 그러면 이 꼭짓점에서 밑바닥까지 최종점으로 삼각형이 내려오면서 이게 성도의 인생 여정이 됩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성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가 아닌 나가 존재해야 된다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렇지요. 나를 위하지 않는 그런 멋진 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나가 바로 앞의 말을 부정해버리는 거예요.
나를 위하지 않는 내가 왜 또 지 걱정을 슬금슬금 계산하느냐 말이죠. 내가 있지 않으면 나를 잊어버려야지요. “나를 위하지 않는 존재는 멋진 나가 나됐으면 좋겠습니다.” 그걸 왜 노리냐 말이죠. 앞뒤가 안 맞게.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것이, 주의 영광이라 하는 주만 나를 대체해서 들어갔기 때문에 주의 영광은 주님이 알아서 할 문제지 내가 거기서 주의 영광에 가담한 나는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어요.
전부 다 어디서 들은 게 있어서 들은 것으로 자기를 속이는 데 바빠요. 전부 다 자기를 조장한다고요. 성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인물이 나중에 등장해요. 그러면 이 삼각형의 특징이 뭐냐 하면 둘 사이를 이쪽은 뭐냐? 나를 위하지 않는 세상, 천국이죠. 이쪽은 나를 위한 세상, 아담의 후손들입니다. 나를 위한 세상은 주님께서 오셔야 그들이 죄인인 것을 드러내듯이 주님께서 여기서 이 세상에다 뭔가 쑤시고 들어와 버린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희생이라고 합니다. 희생.
오늘 본문 봅시다. 여기 다윗의 시라고 돼 있잖아요. 여기 내용은 나는 온전하고, 나는 악하지 않는다고 돼 있어요.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4,5절)
이 시편에 나오는 주인공은 자기만은 악하지 않다고 돼 있잖아요. 이걸 누가 지었다고요? 다윗이 지었다고 했지요. 사무엘하 11장 26절에 보면 이렇게 돼 있어요.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하니라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 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하는 행위가, 그 다음에 뭐라고 돼있어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악하다고 돼있어요.
누가 개입했어요? 여호와가 개입한 다윗은 악해야만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다윗은 인간들 세계, 악한 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넘어올 수 없어야 돼요. 주님의 세계, 나를 위하지 않는 세계가 등장함으로써 이쪽 세계는 비로소 뭐냐? 연속적인 세상이 아니고 불연속적인 세상이라는 것이 노출되는 겁니다. 그게 들통 나버리는 거예요. 이 세상은 어디 포위된 거예요.
여러분 잘 알다시피 방주, 방주를 만들 때 방주의 의미에서 지옥은 뭐냐? 방주가 떠나고 난 뒤에 그 나머지 모든 것이 바로 지옥이 되는 거예요. 방주 만들라는 하나님 언약의 개입이 없었으면 이 세상은 지옥이 아니에요. 그렇고 그런 세상, 다들 그렇게 사는 세상, 다들 각자 자기를 위해서 사는 것이 뭐가 나쁜데? 각자 어느 신을 믿던 그건 니 자유고 나는 내 자유고 간섭하지 말고 각자 자기 길 가자.
그것이 상식화된 세계고 그 논리 외에는 다른 논리를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세상이 바로 방주 이전의 세계였어요.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하니까 방주가 등장하니까 졸지에 정상적이라고 여겼던 이 세상, 그리고 천년만년 갈 것 같은 이 세상에 졸지에 지옥이 돼버린 거예요. 홍수에 전부 다 잠겨버린 겁니다.
그러면 방주의 안의 세계는 어떤 세계냐? 바로 나를 위하지 않는 세계고요, 나를 위하지 않는 세계를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나를 위하지 않는 세계는 바로 내가 할 게 없는 세계였어요. 왜냐하면 내가 뭔가 한다는 것은 반드시 나를 위해서 동반해야 되기 때문에. 이 세계, 인간세계는 나를 위해서 애썼기 때문에 실적과 업적을 얼추 건졌던 세계가 인간세계에요.
나를 위해서 뭔가 꼼지락했더니만 내가 원했던 결과가 나왔던 세계가 나를 위한 세계에요. 그게 뭐냐? 나의 연속성이에요. 역시 나는 안 죽었어. 안 죽었다고. 역시 나는 가치 있어. 내가 왜 죽어? 그것을 각자 전부 다 주장하는 세계에요. 이 세계 외에는 없습니다. 너, 교회 나가? 나도 교회 나가. 너, 복음 알아? 나도 복음 알아. 안 죽었어, 나. 나도 복음 믿는다고, 안다고. 안 죽었다고.
이 세계가 뭐냐 하면 지옥세계에요. 저주받은 세계입니다. 그래서 여기는 할 게 많아요. 기도도 하고 전도도 하고 되게 할 게 많아요. 그러나 여기는 나를 위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내가 할 게 없어요. 없는데 우리는 본성이 나를 위해서 살던 본성이기 때문에 꾸역꾸역 뭘 해요. 이 땅에서. 이럴 때 마주침이 뭐냐 하면 바로 나는 단절되기 싫고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단절을 하고자 하시고 여기에 희생이 들어가는데 창세기 4장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아벨이란 인물이 들어가는 거예요.
아벨은 남들 보기에 뭘 한 것처럼 보이지요. 제사를 드렸잖아요. 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벨 한 그 행위가 무슨 행위냐 하면 행위를 했던 그 아벨을 죽임으로 말미암아 아벨은 자기를 위해서 한 행위가 아니고 나는 주님 나라에 단절돼야 마땅함을 보여주는 행위를 하나님께서 아벨을 통해서 밀어붙인 거예요.
아벨 배후에 계신 분이 아벨에게 일어난 현상과 동질의 똑같은 일을 하시는 분이 아벨을 앞장세워서 숨어있는 분으로써 나타나신 거예요. 역사 속에. 나는 죽으러 왔다는 거예요. 내가 죽지 아니하면 이 세상은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예요.
y=x+1에서 단절이 일어나버립니다. 그럼 이렇게 밑에서 쳐오는 이 단절, x가 1되는 지점, 여기서 밑에는 올라와있고 위에서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오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계속 살려두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두시는 이유가 열심히 하면 건너올 수가 있다는 게 아니라 이 단절의 지점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사용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용하신 거예요. 이 단절의 지점, 끊어진 지점을.
이게 기적입니다. 끊어진 지점을 어떻게 건너와서 기적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사는 내가 주의 나라에 끊어졌음을 아는 그 자체가 이미 나를 위해서가 소멸된 상태에요. 소멸되고 소멸된 채 멍청하게 돼버리면 또 나를 위하지 않는 나가 또 성립되니까 소멸된 것을 이 삼각형에다 집어넣어버려요. 그러면 내게 없던 새로운 인간이 등장합니다. 누구냐? 성도가 돼버려요. 내가 성도라는 낯선 존재가 되고 말아요.
성도의 여정은 주님이 했던 여정을 그대로 답습하게 돼있어요. 내려가는 겁니다. 성도의 여정, 성도의 갈 길은 뭐냐 하면 이 둘 사이를 주님의 희생에 참여해서 늘 벌어지게 하는 그 경계선상을 지나가는 그러한 세월, 이게 성도의 세월입니다. 어떻게 신나지 않습니까? 바짓가랑이를 벌어지게 하는 자크 역할. 자크 쭉 내리면 신나요. 하나로 여겼던 것이 쭉 갈라지죠.
하나의 바다가 갈라지잖아요. 그 가운데 우리가 지나간다? 이스라엘이 지나가는 거예요. 홍해가 갈라지는 이유는 단지 하나에요. 이스라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이 세상 밑에 숨어 계신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앞장세워서 밀어붙여서 배후에서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표현케 하신 거예요.
자, 그렇다면 다윗의 시니까 다윗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가? 일단은 사무엘하 11장 27절 말씀처럼 다윗은 악합니다. 제가 악하다 한 게 아니고 성경에 나오니까요. 다윗은 악합니다. 악한 다윗은 나단 선지자가 오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자기는 연속성을 주장했어요. 자기는 알고 있어요. 자기는 알고 있는데 우리야 장군에게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신한 아이가 죽고 난 뒤에 그 모친 되는 밧세바에 대해서 남자로서 책임성 있는 행동을 보이고 싶어 해요.
누구처럼 암논처럼 다말을, 암논이라는 다윗이 낳은 첫 번째 아들이 배다른 자기 누이동생 다말을 그렇게 연모하고 사모했잖아요. 도대체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시름시름 아파요. 짝사랑도 그런 짝사랑이 없습니다. 짝사랑해본 사람은 다 알겠지만 어떤 땐 화가 나요. “니가 뭔데 너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느냐. 뭐냐, 네 존재가? 니 존재 때문에 왜 내가 잠을 못 이뤄?” 그리워 미치는 거예요.
그렇게 다말을 그리워하면서 암논은 자기가 균열돼야 된다는 사실을 다말을 사랑하는 것조차, “나는 당신 없이는, 나는 당신 때문에 삽니다.” 백날 무슨 이야기해도 자기 자신을 그조차도 나를 위함이라는 것은 한시도 사라지지 않았어요. 어떤 여인을 사모하고 어떤 남자를 사랑해도 그 바탕에는 뭐냐? 그것조차도 나를 위함이에요.
암논을 다말을 좋아할 때는 저 여자만 주신다면 어떤 죄도 감수하겠습니다, 라는 임재범의 란 노래 가사처럼 말이죠. 그대만 주신다면 제가 어떤 죄도 감수하겠습니다. 그게 사나이 중에 사나이인양 이렇게 하는데, 그러나 성경에서는 암논을 통해서 다말을 하고 난 뒤에는 가차 없이 전에 사모했던 그 이상으로 다말을 바퀴벌레보다 더 심하게, “흉측하게 어디 달라붙어가지고. 저리 가. 넌 일생에 도움이 안 돼. 내가 미쳤지. 어떻게 너 같은 걸 보고 반했지?” 하고 떼어냄을 극복했지요.
요 암논과 다말, 이 두 사람 모두 다 누구 몸에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다윗의 몸에서 나왔죠. 다윗은 외부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했지요. 그런데 그 사랑이란 단어가 자기가 보기엔 하나님 말씀대로 잘 된다고 생각했지만 무엇을 놓쳐버렸느냐 하면 내 몸이 어떤 몸인지는 본인도 몰라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용하실 때 철저하게 사용합니다. cubit이란 게 있거든요. 큐빗이 뭐냐 하면 치수 재는 거예요. 치수 잴 때 하나의 룰, 다시 말해서 ‘자’에요.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를 1큐빗이라 해요. 뭐 로마에서는 43cm, 또 52cm, 여러 가지 있는데 쉽게 말해서 그냥 평균해서 50cm 보면 돼요. 여기서 다시 손가락 네 개, 이걸 palm. 그 팜을 4분의 1로 해서 digit. 이런 식으로 치수를 재거든요.
인간이 세상을 측정하는 자 노릇을 한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인간은 세상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탐구하고 측정할 때 무엇을 동원하는 거예요? 자기의 신체를 동원하는 겁니다. 자기의 신체가 뭐냐 하면 이게 표준 자가 돼요. 근데 표준 자는 절대로 문제 있으면 되겠다, 안 되겠다? 될 수가 없지요. 이게 왔다 갔다 하면 안 되지요. 그래서 다윗은 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말고 내가 가장 신뢰하고 가장 믿음직한 것은 나 외에는 없는 거예요. 모든 인간에게.
주님의 마음 하지만 내 마음이 주님의 마음보다 더 정확하고 제일 신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아담의 죄성입니다. 모든 인간의 죄성이에요. 믿을 놈은 나밖에 없는 거예요. 지금 암논이 다말을 사랑할 때 저 여인만 주신다면 난 아무래도 괜찮다, 내 인생 어떻게 망가지고 깨져도 괜찮다 할 때는 다말을 차지하기 이전이에요.
참 여러분들의 이것 하나만 알면 오늘 강의는 끝이에요. 물론 약장수도 만날 그런 소리하지만. 방주의 특징은 이게 목적지가 없습니다. 목적지가 없고 내 원대로 방향을 조정할 수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나를 부정시키는 공간이 방주라는 공간이에요. 여러분들이 예수 안에 산다, 또는 성령 안 산다는 더 이상 내 의도, 내 목적, 내 방향은 전부 다 거부됩니다. 내 뜻이 거부돼요. 내 뜻이 이 안에서.
주는 대로 처먹으라하는 데 차마 여기서 설교시간에 못하고 그냥 주는 대로 먹어, 사는 대로 살아. 십년을 살던 이십년을 살던 사는 대로 살아버려. 네가 주제넘게, 만약에 내가 목적과 방형을 정해버리면 나를 위함이 돼요. 그래서 방주는 그냥 목적이 어디로 가는지 공간은 있는데 이 공간이 시간이 얼마나 흘러야 되는지는 주도권이 이미 방주를 만드신 하나님께 일임돼있어요. 철저하게 너를 위함이 여기서 제거가 되는 겁니다.
암논이 다말을 자기가 목적을 갖고 있었어요. 잠자리를 같이 해서 동침을 하겠다. 그러면 뭐가 되느냐 하면 소유가 돼요. 나를 위함이 이게 실제가 되려면, 표현을 영어로 하면 reality가 되는데 실제가 되려면 끌어 모아야 될 소유물들이 옆에 있어줘야 돼요. 개뿔도 아무것도 없는 게 나는 나다 하면 누가 안 알아주거든요.
어릴 때 딱지 놀이했거든요. 딱지 놀이할 때 우선 문방구에서 돈 주고 사야 돼요. 딱지를 펼쳐서 “너는 뭐고? 대령이가? 나는 장군이다. 줘.” 뺏는 거예요. 남의 것을 뺏는 그것이 어릴 때부터 어린아이부터 인간의 본성에 맞습니다. 너라는 인간이 내 딱지 게임에 참여한 것은 내가 456억을 얻기 위해서 내 것을 내 주변에 나를 위한 것들로 차곡차곡 채워질 때 이게 벌써 나의 정당성, 나의 존재는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재료들의 풍부해지는 겁니다.
암논은 자기밖에 모르고 암논은 내게 없는 게 저 여자한테 있는 거예요. 그게 아름다움이에요. 그래서 여자를 다말을 차지하고 보니까 이게 기존에 자기가 끌어 모은 것과 이게 방해가 된다, 조화가 안 된다, 어울리지 않는다 할 때는 후딱 내보내야 기존의 것이라도 유지해서 나를 위해서 연속성을 지속시킬 수가 있는 겁니다.
어떤 분이 어제 식사하면서 그런 말했거든요. 남자가 뭡니까? 창세기 3장에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게 돼있지만 절대로 남자는 여자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소유하고 다루고자 하지요. 마치 여자한테 다 준 것처럼 위장하면서. 남자는 여자를 사모하지 않습니다. 갖고 놀지요. 사모하지 않지요. 사모하는 것은 여자가 미쳐서 사모하는 거예요. 이건 저 보고 욕하지 마세요. 창세기 3장 보고 이야기하세요.
여자는 남자를 사모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린다는 말은 줬다, 뺏었다, 놨다, 쥐었다 조종 대상이에요. 목걸이 사주고 프라다니 좋아하는 것 해주고 좋아하면 할수록 자기로 함부로 대하고 함부로 부릴 수 있는 대상으로 이게 전환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이 굉장히 나쁘게 들리겠지만 가장 중심 되는 안에 뭐냐? 나를 위하여가 여기 포진돼있습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나를 위하여’를 버린 적이 없어요.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남자에게 사모하지만 사모하는 목적이 나를 위하여 여자 자신을 위해서지요. 늙은 남자 뭐 좋다고 사귀겠어요. 저게 계속 돈이 나오느냐, 빼먹을 게 나오느냐. 강의 전에 했잖아요. 잘 나가는 남자 옆에 여자는 망하고 있다고요.
자신에게 어떤 단절이 있어줘야 된다는 그러한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는 겁니다. 남들 보기에 이 세상에서는 더 잘나고 있습니다. 목적지가 없고 방향을 전부다 delete삭제시켜놨어요. 그러면 인간은 우왕좌왕하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어떤 끌어 모으기, 소유하기, 실적 얻음 이것이 이게 절망적이 돼버리는 거예요. 낭패에요. 더 이상 옛날 나를 위해서 살던 게 차단되고 마는 거예요.
나단 선지가 왔을 때 다윗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합니다. “당신은 악합니다.” 악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게 선지자가 와서 악하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다윗이 그때 성신을 요새 성령을 받아서 내가 악한 것이 아니라 내가 평생 속해왔던 세상 자체가 악하고 나는 악한 데서 출생했다는 사실을 외부인물,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말을 하는 선지자가 왔을 때 비로소 이게 간파가 돼버린 거예요. 눈치 챈 거예요.
그동안 나를 위해서 살았다는 이 자체가 내가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 자체가 나는 나를 위해서 살도록 그렇게 조작했구나, 그걸 강요했구나, 거기에 나는 휩싸였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그 나단 선지자 앞에서 다윗은 결코 죄인의 모습이 아니에요. 죄인의 모습이 아니고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에요.
더 이상 나를 위해서라는 도대체 끊어지지 않는 연속성이 있는 나로부터 나를 끄집어내준 친구에게 감사합니다. “아이고, 이 밧세바야. 진짜 밧세바 고마워. 그때 목욕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난 영원히 지옥 갈 뻔했어.” 그때 상황을 오늘 제목으로 삼겠습니다. 이게 성경에 나오는 거거든요.
열왕기상 22장 34절에 나오는 말씀, 그걸 오늘 제목으로 하겠습니다. “우연히” 이게 아합 왕이 지 살려고 갑옷을 바꿔 입었어요. 아람 나라와 전쟁할 때. 이게 뭐냐? 나를 위해서, 에요. 성경에 나오는 모든 행동부터 아담의 후손들은 무조건 나를 위해서부터 시작하면 해석이 다 돼요. 보통 사람은 그걸 생각 안 하는데 성도는 그것으로 보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보다가 어떻게 나를 위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느냐? 그 절차가 성도만이 코스를 밟거든요.
나를 위해서 갑옷을 바꿨어요. 어떤 이등병한테 한 거예요. 그걸 가케무샤, 그림자 무사라 해요. 갑옷의 주인공도 아닌데 왕을 살리기 위해서 장군이 그 옷을 입고 죽은 사람이 우리 동네에 있어요. 신숭겸이라고. 왕건이 살리기 위해서 갑옷 입었다가 진짜 죽어 버렸어요. 왕건이 충신이라 해서 지묘동 근처에다 뭐 세우고 했는데.
그때 아람 나라가 와보니까 아합 왕인 줄 알고 보니까 왕이 아닌 거예요. “어, 아니네?” 그걸 보고 아합 왕은 그때 갑옷 안 바꿨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다행스럽다고 했는데 그때 나온 단어가 뭐냐 하면 우연이가 불렀던 우연히,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저거 죽이라가 아니라 그냥 활을 쐈어요.
이 세상은 불연속 속에 있는 주님의 우연적인 사태로 만들어진 세계가 이 세상입니다. 밥 먹는 것,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우연의, 우연의 연속, 단절과 단절의 연속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불연속적으로 계속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우연히 당신을 만났고 우연히 당신과 헤어졌고. 모든 게 우연이에요.
우리는 그런데 뭐라고 해석하느냐 하면 자기를 위해서 살던 그 본성 때문에 모든 것을 우연을 가지고 억지로 원인과 결과로 연결시키는 거예요. 당신을 만난 것은 당신이 예뻐서 그렇다니. 그 동네 예쁜이는 그밖에 없는가, 다른 데 많이 있는데. 전부 다 우연이에요. 우리는 우연한 존재에요.
그걸 야고보서 4장에서 안개 같은. 안개의 특징은 있다가 없어지는 것, 있음에다 마음 두고 살지 말라는 뜻이에요. 있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살아라. 없음이 있음을 공격한다고 생각하고 심판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야 돼요. 그러니까 내가 있음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없음에다 내 몸을 맡겨버려야 돼요. 안개 같은 존재니까.
이걸 다른 성경에서는 ‘마침’이라고 돼있어요. 이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사무엘상 17장 20절에 소년 다윗이 형에게 도시락 주러 갔다가 마침 그때에 골리앗이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걸 봤어요. 우연히, 마침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10분 쉬는 것도 주의 개입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