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학교 설교 / 이스라엘 / 211010
이스라엘 211010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열두 제자를, 여기 열두 제자 나오거든요. 12 제자를 예수님께서 뽑았어요. 뽑은 이유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인간들끼리 만든 게 아닙니다. 누가 만들었냐? 하나님이 만드셨다 이러거든요. 하나님이 만드셨다를 조금 더 보태세요. 하나님이 만드셨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하세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만드셨다. 왜?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 양의 피 바른, 피 발랐다는 거 있잖아요. 어린 양의 피. 어린 양을 타인으로 봅시다. 내 몸이 아니고 타인의 몸. 타인의 몸의 피 묻은 자들의 집합체. 이거 이스라엘이에요.
그러면 이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차이점이 뭐냐? 애굽 사람들은 못 빠져 나온 사람 물론 이방인 가운데 피 발라서 나온 사람이 있어요. 근데 애굽 사람들은 뭐가 없느냐 하면 단지 인물이 못 생긴 게 아니고 피가 없어요. 피는 이스라엘 자기 피가 아닙니다. 어린 양의 피거든요. 어린 양의 피가 감히 내 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양의 피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겁니다. 어린 양의 피가.
그러니까 내 인생은 내가 주도하는 거고 내가 주인공인데 이스라엘은 그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나한테 피를 적시게 한 그 분이 이스라엘의 주인공이 된 겁니다.
그런데 그러면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 하나님이 계시고 그럼 하나님 그냥 하나님이 피 발라 놓고 너희끼리 잘 먹고 잘 살라 하고 그냥 내 방치했느냐?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세가 한 이야기 있어요. 모세가 뭐냐 하면 모세가 그 점을 아뢰었어요. “하나님 아버지” 그때 아버지가 아니지.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두시면 안 되고요. 하나님이 동행해달라고 하니까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내가 동행할게. 내 이름을 가지고 동행할게.”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과 함께 있습니다. 문제는 이름이라고 했지 눈에 보이는 게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12 제자거든요. 예수님은 열두 지파 이스라엘 12지파의 눈에, 구약에는 눈에 안 보이는 분이 함께 있었는데 신약에는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 함께 있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 보기에 어떤 오해가 있느냐 하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이름이 함께 있는데 함께 계신 분이 안 보였는데 이 신약 때는 예수님이 보이네, 라고 생각하게 마련이죠.
이 보이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안 보이는 것처럼 봐야 되는데 보이니까 예수님이 함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중에 누가 있었냐? 가룟 유다가 있었어요. 가룟 유다가 12 제자인데 귀신 쫓아낸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파했어요. 가룟 유다가 노리는 것은 뭐냐 하면 눈에 보이는 예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이 열두 조합은 결국 천국에 간다. 하늘나라 간다. 왜? 예수님이 메시아니까. 그걸 가룟 유다가 믿었습니다. 믿었는데 그걸 인정했는데 가룟 유다가 뭘 보느냐 하면은 눈에 보이는 예수님이 있으니까 나는 눈에 보이니까 붙들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뭘 생각했냐 하면은 내가 생각한 그분이 아니었다는 것을 가룟 유다가 알고 의심을 하게 됐죠. 하나님이 보내신 분은 맞는데 스승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스승은 내 속까지는 들어오지 않죠. 학교 선생님이 네 속까지 들어오나? 아니지. 학교 선생님이 니 아버지는 아니잖아.
어떤 사람이 내 안에 들어온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서 어린 양의 피가 피는 묻었지만 어린 양이 이스라엘 속에 속속 스며들어야 되거든요. 신약에서 주님이 스며들어온다는 것은 이건 가룟 유다뿐만 아니고 모든 열두 제자는 결국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도망갔습니다. 스며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성령이 임할 때 비로소 바깥에 있던 예수님이 내 안으로 드디어 스며들어온 거예요. 사마리아 여인처럼. 물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물이 바깥에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주님의 우물이 내 안에 장착하고 만들어진 겁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은 그럴 때마다 출렁출렁하지. 자기 안에 우물이 있으니까. 계속 새로움이 나오니깐요. 너 아니고 나야. 너 아니고 나야. 뛸 때마다 너 아니고 나야. 아 이거 뭐 고민입니다. 너 아니고. 나야. 이 코로나가 언제 끝납니까? 니 일 아니고 내 일이야. 항상 너의 일 아니고 내 일이야가 계속 계속해서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12 제자를 뽑은 겁니다. 12 제자를 뽑아서 구약 이스라엘이 어떤 게 한계였는가를 그들은 눈에 보이면 믿겠다 했는데 그 눈에 보이는 주님이 이렇게 메시아가 눈에 보이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못 믿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인간이 넘을 수 없는 턱이에요. 문지방. 인간은 봄으로서 불신이구나. 안 보는 것도 불신이지만. 봄으로서 믿는다 하는 그 믿음 자체가 이게 믿음이 아니고 이게 불신의 연속이 바로 믿는다는 이야기구나. 이것은 인간이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의 마음이 들어와야 이게 바로 신자라 하는 것을 열두 제자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과거에 잘못한 것을 되풀이해 주는 의미에서 열두 제자를 뽑은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이제 일 터졌죠. 여기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데 여기 갈릴리 호숫가 근처에 넓은 빈터가 있어요. 무려 남자만 5천 명이 되는 그 모인 장소를 가봤습니다. 또 꼭 자랑질을 해야 또 속 시원하니. 거기에 오천 명 모였을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이 설교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밥 먹고 합시다.” 이렇게 된 거예요. 듣는 것도 밥 먹고 갑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에게 “너희 이 문제 뭐 하느냐? 너가 알아서 음식 해결해라.” 대략 난감. 헐! 오천 명을 어떻게 먹입니까? 가까운 제과점도 제과점 다 해도 오천 명이 뭡니까? 열두 식구들만 해도 모자랄 판인데 어떻게 빵을 만듭니까? 이게 너무 많다 이 말이죠.
5천 명에게 의도적으로 밥 먹을 걸 주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가 아무리 니가 우리가 니가 나를 따르고 제자다 할지라도 넘을 수 없는 한계가, 그 막이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너희들은 마치 내가 주님을 열심히 따르고 보고 따르면 주님 가신 나라에 같이 합세해서 갈 수 있다고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주제 파악이 안 된 거예요. 근데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그래서 제자들보고 하니까 안 되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게 이제 사람이 할 수 없을 때는 이거 반항 같은 게 그런 게 또 작용해요. 예를 들어서 초등학교 때 산수 시간에 선생님께서 미분 방정식 해놓고 “오늘 너희 중에서 풀 사람 아무도 없으면 넌 오늘 집에 못 간다.” 이래 나오면 애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안 됩니다. 선생님” 이럴 수도 있지만 어떤 애들은 “예. 제가 풀겠습니다.” 해놓고 꼬마 애가 나와 가지고 3 더하기 2는 5 “됐습니까? 이 정도 실력이면 됐습니까?” 하고 보리떡 다섯 개 플러스 물고기 두 마리 5 플러스 2. 7 됐습니까? 여러분. 5천 명 먹을 수 있겠죠? 있지요. 가루를 만들어서 하고 있겠죠. 배불리 먹을 수는 없다 이 말이죠.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규정하느냐 하는 남아 있는 자가 이스라엘 된다. 남아 있는 것. 그러니까 인간들이 한계가 왜 한계냐 하면 나만 배부르면 되는데 내 육적으로 배부른 거 말고 영으로, 육적으로 배부른 그것에 가로막혀 있는 뒤에 감추어져 있는 영의 세계가 진정한 이스라엘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배불리 먹게 하고 남은 광주리가 몇 광주리입니까? 열 두 광주리. 그렇게 주님께서 떡을 축복하시고 공장에서 생산할 때 공장이야 공장. 축복할 때 딱 숫자가 뭐냐 하면 12 광주리 남을 때까지만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딱 맞춰서 주문 제작도 그런 게 없어요. 완전히 딱 맞춰서 생산 해버린 거예요.
그러면 배불리 먹었죠. 배불리 먹었을 때 무슨 생각이 드냐? 열두 광주리 남아 있다는 거 왜 남아 있는지를 모르는 거예요. 왜? 인간은 나만 배부르면 되니까. 나만 행복하면 되니까요. 나만 천당 가면 되니까요. 저게 왜 남아 있는지를 알 수가 없죠. 배불렀잖아요. 배부르고 기분 좋았단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 가는데 무슨 이제 통밥이 무슨 계산 오냐 하면은 내가 힘들게 이 세상 살 필요 없이 예수님은 5천 명도 5천 명 더 되죠. 5천 명도 먹을 수 있다면 예수님한테는 넉넉함이 있다. 그러면 그 넉넉함이 있는 분을 두고 내가 다시 옛날처럼 쪼달리면서 겨우 겨우 살아가는 이런 짓은 안 하겠다. 예수 믿음으로서 내 평소에 힘든 생활까지 이참에 해결해 보겠다는 거죠.
흔히 말하는 게 뭐냐? 복음 믿고 아무 일 안 하는 거. 그걸 사자성어로 복음폐인, 복음폐인. 복음만 믿고 아무 일도 안 해요. 주께서 살려주시겠지. 그 나라 의를 구하는데 먹을 것 주시겠지 하고 아무것도 안 해요.
주께서 철공소에서 일하게 하신 것은 그 철공소 일이 아무것도 일이 아닌 걸 알기 위해서 철공소에서 일하게 하신 거예요. 철공소에서 일해 가지고 손가락 다치고 피 줄줄 나도 이게 필요한 게 아무것도 구원받는 것에 비하면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 철공소에서 일하게 하신 거예요.
그걸 이해를 못하고 집 밖에 나가지도 않으면서 지금 주께서 먹을 것 주시겠지. 복음만 십자가 복음만 아는데 뭐 다 채워주겠지. 이러고 있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알기 위해서 일을 찍싸게 시키는 거예요. 나의 한계, 나의 한계를 통해서 내가 짓밟고 있는 게 하늘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내가 내 생각만 우선하다 보니까 하늘나라를 모독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이제 예수님이 가니까 죽 따라 왔습니다. 주께서 휙 돌아봤어요. 그냥 돌아보는 게 아니라. “너희들 왜 내 따라와? 너희들 따라온 이유가 떡 먹고 좀 뭐 배불렀어?” “Yes. Sir! 충성하겠습니다.” “저리 가. 내가 주는 것은 떡이 아니고 니가 원하는 주지 않아. 너는 육이기 때문에 육이 원하는 것을 일체는 안 준다. 내가 주는 것은 나의 살과 피다.” 그러니까 그쪽 모인 사람들이 저희끼리 웅성웅성 “이거 뭐 우리가 잘못 골랐네. 살과 피 준데. 우리 그거 필요 없잖아.” “필요 없지 뭐.” “필요 없지. 가자.” “가자. 가자. 집에서 너무 늦게 왔다고 걱정하는데 빨리 가.” 다 가버렸어요. 썰물처럼 쫙 다 가버렸어요. 썰물처럼 쫙 빠져나왔어요.
탁 보니까 원해. 휑해요. 그 넓은 들판에. 아니 넓은 들판에 갔죠. 바다 건너 왔으니까. 12제자만 남았어요. 12제자만 남으니까 예수님 하신 말씀이 “너희들도 왜 가지? 왜? 가지.” 베드로가 나서서 “아닙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영생의 말씀이 뭔지도 몰라요. 지도 마찬가지로 몰라요. 그런데 “이상하게 선택했다는 그 의미가 있는 것 같아서 안 갑니다.” 하니까 “니가 나한테 지금 붙어 있는데 니가 붙어 있는 게 아니고 아버지께서 나한테 붙어 있도록 선택했다. 그러나 그중에 하나는 마귀니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내게 오게하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천국은 주께서 하나님이 보내지 않으면 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그 말은 더 줄이면 천국은 아무도 못 옵니다. 그 천국을 주께서 만드신 거예요. 만드시고 성령 주셔서 기존 인간은 못 들어오고 새로운 인간만 들어오게 하도록 그렇게 조치를, 성령을 주신 겁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먹고 마시는 것이 얼마나 급선무인지 살아가면서 또 확인되고 또 확인하고 또 체험하고 돈 없이 못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진실인지 늘 체험하는 가운데서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