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7장 22절 (납작한 존재) 210928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7장 22절 (납작한 존재) 210928a-이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 18절부터 하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방금 읽었던 18절부터 23절까지 내용을 한 문장으로 한번 크게 한번 쓰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을 주신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주신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주께서 말씀을 이렇게 주게 되면 내가 말씀 전하는 자로 자격이나 된 냥 그렇게 오해를 해요. 말씀을 주시는 분도 가치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나도 얼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아마 하나님께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에요. 이게 엄청난 오산이고 오해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되 네가 말씀 전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말씀은 누가 전하느냐? 예수님 한분으로 됐습니다. 끝났어요. 충족되었어요. 말씀 전하는 자는 주님이라는 것을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내가 말씀 전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나는 말씀 전하는 자로 자격이 미달이고 탈락이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내가 더 살아서 말씀을 전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이 말이죠. 나는 주님의 동업자가 아니에요. 동업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이거는 말씀뿐만 아니고 우리가 인생을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도 성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더 살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는 거에요. 성령 안 받으면 이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보내서 자기 쪽에서 점검을 해보는 것을 용납하라고 해주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나 너하고 말 안 해. 너하고 말 안 해.
만약에 세례 요한이 이미 주님한테 요청했잖아요. 요청을 한 것에 대해 예수님이 답변을 해버리면 세례 요한의 요청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뭔가 값어치가 있는 것처럼 오해될 여지가 있어요. 내가 질문하니까 답변하더라. 아 주님은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23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신은 당연히 복 있는 자로 그 모든 오해를 주님께서는 철폐해버리고요. 너는 복 받을 자격이 너한테 있다는 생각부터가 주님께서 찢어버리는 거에요.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복이라고 하는 것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것. 이 말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네가 기대한 것과 전혀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런 뜻이에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요. 주님께서는 나의 구원을 방해하면서 나를 구원해요. 우리 자신을 구원합니다. 사람들이 성령이 주는 기쁨이란 뭐냐 하면은 내 뜻대로 안 오게 하시는 기쁨, 여러분 아십니까?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는 기쁨.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만 느끼는 기쁨이에요.
분명히 양재역에서 18번 마을버스가 올 때가 됐는데 안 오는 거에요. 예를 들면. 안 오는데 가만 보니까 8자 말고 다른 숫자도 간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에 이것은 일단은 주님께서 내 뜻을 물리치잖아요. “네 뜻은 무엇이냐?” “8자 달린 마을버스 오는 것입니다.” “그래?! 그럼 절대 네 뜻대로 안 해줄게.”
주님께서 일하신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내 뜻을 거부하는데서 주님의 살아있음을 비로소 우리는 체험할 수 있는 거에요. 주님이 진짜 계신가 안계신가는 나를 그 맥주 빈 칸 밟을 때 와자작 하고 밟아 버릴 때 그 때,‘ 주여 진정 살아계신 것 맞군요’ 그 때 그 기쁨은요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요. 헤아릴 수가 없어요. 그 때 그 기쁨은 돈으로 살수가 없어요. 이처럼 살아 있는걸 바보처럼 그걸 몰랐을까. 이처럼 살아계신 계신데.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이렇게 항상 밟아버립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그래서 18절부터 20절까지 세례 요한 쪽에서 하는 말이 당신이 오시는 메시아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우리가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이렇게 할 때에 주님께서 22절에 “네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가서 전해라”
해서 가서 보고 들은 것이 뭐냐 하면은 21절에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셨거든요. 그 때에. 이렇게 결제 서류 올리듯이 세례 요한한테 갖다 바치는 게 아니고 너희들이 와서 보아라. 봤는데 둘이 와서 봤잖아요. 본 것을 22절에 요한에게 이야기합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이렇게 돼있거든요.
소경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은 ‘봄’이에요. 뒤에 나오는 봄이에요. 소경은 못 봄이거든요. 뒤에 봄이 나오거든요. 앉은뱅이의 뜻은 ‘못 걸음’이거든요. 그런데 앉은뱅이가 걷는 겁니다. 소경은 그 스스로가 뭐냐 하면은 이렇게 돼요. 못 보는 사람이에요. 못 보는 사람과 소경은 이퀄(=) 같이 됩니다. 못 보는 사람을 소경이라고 해요.
만약에 여기다가 보는 사람을 소경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퀄이 안 됩니다. 등식이 성립이 안되는 거에요. 세례 요한이 말하는 메시아, 내가 아는 메시아가 세례 요한은 등식이 이퀄이 되기를 원해요. 주님께서는 이퀄을 주님 쪽에서 거부해버리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거부하게 되면 세례 요한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그 순간부터 메시아와 한패가 되는 겁니다. 메시아 편에 선 사람이 돼요. 소경이 못 본다는 것이 인간들의 당연한 진리거든요. 인간의 진리는 못 보는 것을 소경이라고 했단 말이죠.
세례 요한은 소경은 못 보는 것이 당연하지 라고 했던 속에 여기 세례 요한 있었다면 주님께서 이 세례 요한을 어디로 불러내느냐 하면은 예수님 자기 쪽으로 불러내는 거에요. 자기 쪽으로. 그렇게 세례 요한이 그렇게 예수님께 요청을 했다 이 말이죠. 이 세례 요한 자리에다가 성도를 집어넣읍시다.
그러면 인간은 성도가 된다 또는 성도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래버리면 이것은 주님 생각이 아니에요. 인간은 성도가 아닌 거에요. 인간은 성도가 아니고 성도는 인간이 아닌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 입장에서 인간이라면 성도가 아닌 자를 인간이라고 해요. ‘성도가 아닌 자’.
다시 말해서 천국에 못가는 자가 인간이에요. 인간 중에 천국에 갈 사람 있다 못 갈 사람 있다가 아니라 아예 인간 자체가 천국에 못 갑니다. 여러분들이 이 점을 이해를 하셔야 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보통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용감한 사람이라고 이해해요.
세례 요한은 용감하다. 얼마나 용기가 있느냐. 용기 있는 사람 이렇게 하잖아요. 세례 요한은 용감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용감한 사람 필요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용감한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고 뭐냐 하면은 솔직한 사람이 필요해요.
성도는 용감한 사람이 아니고 솔직한 사람이에요. 목격자나 증인에게 필요한 것은 용감이 아니고 오지랖 떠는 게 아니에요. 뭐냐? 솔직한 거에요. 자기 자신에서 솔직하고 주님에게 솔직하고 세상에 대해서 솔직한 사람이 성도입니다.
솔직할려면 전에는 여기 있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이쪽으로 바뀌었다는 그 방향성을 자기가 내부에 그 방향적인 이동요소가 품고 있어야 돼요. 어떤 점에서 솔직해야 되는가? 모든 인간은 성도가 아니잖아요. 성도가 없는 거에요. 성도가 아니면서 하나님의 천국 백성 성도가 될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에게 뭐를 지향한다? 바라본다. 뭘 원하느냐 하면은 바로 행복 또는 기쁨, 희극. 인간들은 행복과 희극을 원하고 있어요. 잘 되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뭘로 바꿨느냐 하면은 비극의 화신 또는 비극적인 인물. 비극의 대표적 인물로 삼아버렸어요. 주님께서.
세례 요한의 그 말로가 어떻습니까? 이중에 세례 요한의 말로에 같이 동참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보세요 하면 아무도 없어요. 비극도 그런 비극이 없습니다. 세례 요한을 비극적 인물로 성경에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으로 하여금 천국과 이 세상은 끊어져 있다는 것을 세례 요한으로 보여주는 거에요.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선지자니까. 선지자니까.
선지자는요 예언을 해야 되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면 선지자에게 특히 구약을 지나서 신약에 온 선지자는 뭐냐 하면은 그 예언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재앙이 들어 있어요. 재앙. 비극. 이 세상의 재앙이 들어 있다고요. 사람들은 그 재앙에 대해서 재앙을 이야기하면 그걸 대비하면 되지 않겠느냐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성경 보는 사람들도.
그런데 이걸 알아야 돼요. 선지자가 재앙을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재앙을 피할려고 하지요. 재앙을 피하는 그 방식이 재앙을 앞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1980년도 우크라이나에 체르노빌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우크라이나에 그 원자핵로가 터져가지고 즉각적으로 그 현장에서 죽은 사람만 56명이고 나중에서 전부 다 이사갔지요. 그게 아주 무시무시한 원자력 발전소가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보여줬잖아요.
그런데 그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한 농장에 평범한 한 러시아 농장 사람은 이사를 안 갔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 눈에 보기에 방사선 보이지 않고 그냥 얼마 전까지 살았던 자기의 산과 들과 하늘과 바람 조금도 자기한테는 변함이 없는 거에요. 세상에서는 방사선 노출된 것이 재앙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은 방사선이 눈에 안 보이는데 무슨 재앙이냐 이렇게 해가지고 살아남았어요. 아무 탈 없이 지금도 잘 살고 있답니다.
세례 요한이 재앙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재앙을 받고 재앙에서 어떻게 모면해 볼까 노력을 할 때 그게 바로 재앙을 가중시키는 거에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졌다. 바이러스가 퍼졌다. 사람들 마스크 쓰고 살아볼라고 하지요. 그 마스크 하는 것은요 단지 안 죽는 것이 아니고 약간 일찍 죽느냐 늦게 죽느냐 그 차이뿐이에요.
이거 해서 오래 사느냐 이거 안 해서 그냥 일찍 죽느냐. 그래서 미국에 어떤 사람은 이거 안 해요. 왜냐 하면은 이왕 약간 차이 나는 것 마스크 쓰고 오래 가는 것보다도 벗고 화끈하게 짧고 굵게 한번 하고 싶은 대로 해변가에서 해수욕도 하고 죽고 싶다고 마스크 안 쓰는 겁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옴으로써 이 세상은 전부 다 처음부터 어떤 사람이냐? 전부 다 강박증에 눌려서 살아왔다는 게 티가 나버렸어요. 어떤 강박증이냐 하면은 죽음의 중압감. 죽음의 중압감이 이 지구상에 어느 한곳이라도 빠짐없이 다 누르고 있다는 마치 대기압처럼 누르고 있다는 게 티가 났어요. 강박증. 강박증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정신병입니다. 정신병.
코로나가 옴으로써 말미암아 평소에 일상 생활도 정신병으로 강박증으로 살아왔다는 게 티가 나버린 거에요. 그렇게 국가 말 안 듣더니만 코로나 터지니까 전부 마스크 다 쓰고. 죽음의 중압감에서 사람들이 뭐냐 하면은 이거는 둘로 나눠요. 하나는 뭐냐. 자체적으로 보호막을 보호막 형성에 평생을 여기에 매달립니다. 보호막.
이게 자체적 보호막인데 이걸 가지고 뭐냐. 고립적인 보호막. 모든 인간은 스스로 고립된 보호막을 생성합니다. 그것이 뭐냐 중압감을 요청했고 이게 강박증으로 이어지는 거에요. 자기만 달랑 보호하면 되는 거에요. 자기만. 캡슐처럼. 자기만 보호하면 인생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보호막을 쳤기 때문에 본인이 보호막을 찢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되지요. 보호막이 중압감을 주니까 이 보호막이 튼튼할까 안 튼튼할까, 매일 아침 그것만 점검하면서 하루 일과가 시작되거든요. 내가 지키는 보호막이. 그러니까 자기 보호막에 자기가 정신병 걸린 거에요. 그 안에 갇혀 사는 겁니다. 스스로.
이 보호막을 뭐라고 하느냐. 이 강박증을 유발하는 이 자체적인 스스로 고립적인 이 보호막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지고 환상이라고 합니다. 환상. 환상. 자, 환상은 자기를 지켜주는 유일한 보호막이고 이게 있어줘야 뭐냐 하면은 내가 장차 희망이 생겨요. 희망은 삶의 동력을 줘요. 삶의 동력을 준다고요.
여러분들이 할머니나 주부들이 고추 빻기 위해서 방앗간에 고추를 가지고 가잖아요. 그 빨간 마른 고추를 가지고 부피 이만한 것을 들고 가가지고 빻아주세요 하고 가지고 온다고요. 가져다 놓고 집에 그냥 갑니까? 방앗간에 기계가 막 돌아가면서 그걸 빻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다 집어넣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그릇 가지고 받아내야 되지 않습니까? 코 따갑다 하면서도 그걸 지켜봐야지요. 언젠가 내가 투자한 그것이 내가 기대한 결과로 나오는 것을 그 그릇이 있어야 돼. 그 그릇이 뭐냐? 미래의 나의 자아상이에요. ‘자아상’. 받아야 될게 아닙니까 이걸. 나 몰라라 하면 귀한 고춧가루 바닥에 다 떨어지는데 버려지는데. 버리는데. 그걸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평생을 했으면 뭔가 대가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보통 60 넘은 엄마들이 농담 삼아 진담 섞인 농담을 해요. 농담처럼 들리게 하지요. 안 들킬려고. 나 너 키운다고 고생 많이 했다. 이제는 네가 나 먹여 살려라. 웃으면서 웃음 뒤에 진심 있다고. 이게 뭐냐 하면은 딸이나 자식이 뭐냐 마른 고추거든요. 고추를 넣었으니까 이제는 자아가 빈 그릇이니까 그걸 받아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야 그동안 삶의 보람을 얻을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제가 주일 낮 설교하면서 인간은 파탄이라는 말을 했거든요. 파탄. 그 파탄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딸이 진심으로 엄마 조금만 기다려. 내가 성공해서 엄마 따박따박 생활비 다 보낼게. 이랬던 딸이 얼마 전에 엄마 나 남자 생겼어. 내가 돈 좀 벌었긴 벌었지만 이 돈 엄마 줄지 말지 남자친구하고 의논해야 돼.
이렇게 나온다면 그 낭패감. 그 절망감. 그 섭섭함. 아이고 자식은 소용 없어 소용 없어. 다 소용 없어. 키워줬더니만 남자한테 다 뺏기게 생겼네. 이게 뭐에요. 자기 애 낳으면 애 키워달라고 한 달에 30만원 주고 애 키워 달라고 분명히 또 올거고. 인간은 자기의 보호막, 자기의 희망과 환상에 이미 정신병이 되어있어요.
그래서 이 환상이 만들어 내는 환상의 구조를 뭐냐 하면은 이것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현실’. 현실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자기 희망도 들어 있는 현실이에요. 현실은 꿈꾸는 거에요. 꿈. 꿈에는 환상이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늘 딴 건 다 포기해도 포기 못하는 게 뭐냐. 환상을 포기 못해요. 인간은 절대로 환상을 포기 못합니다.
잘 될 거야 이렇게 노래하면서 늘 꿈과 환상을 포기를 못합니다. 그게 삶의 동력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희망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례 요한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행복과 희망의 인물입니까? 아니면 비극의 인물이에요? 비극의 인물로 만든 거에요. 세례 요한을.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딱 찝어서 사용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의 프레임이라고 하는데요. 프레임, 액자 또는 달리 이야기하면 박스. 내가 아는 환상이 만든 박스 있잖아요. 현실 박스. 박스 해봐야 70,80. 많이 해봐야 90,100. 백살 살면서 꾸려낸 내가 임의로 뽑아낸 나의 꽃다발 같은 환상이 있잖아요. 프레임. 그 프레임보다 더 큰 프레임. 더 큰 범주의 현실을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다가 실어서 보여준 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보여주는 현실이 네가 너무나 자체적인 보호막으로 네가 수집한 그 환상의 현실보다 더 월등하다는 겁니다. 더 월등하다. 고정된 고립적인 보호막과 그 하나의 대비 반대가 된다면 주님이 씌워준 프레임이라는 말이 어렵다면 박스, 상자. 씌워준 세계 현실의 범주, 이걸 주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출생의 비밀이 있어요. 세례 요한에게 출생의 비밀. 세례 요한의 출생의 비밀이 있는데 그건 아버지와 사가랴라는 제사장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비극의 인물이죠. 마지막에 비극의 인물이잖아요. 그럼 그 안에 비극이 내장되어 있어요. 내부에 장착되어 있다고요. 점점 더 비극이 커지게 되면 세례 요한의 종말이 되는 거에요. 세례 요한의 마지막 인생 모습이 되는 거에요.
그 비극적인 인물을 하나님께서 성령의 예고에 의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은 이 세상이 진정 들어야 될 진짜 현실은 희극이 아니고 행복이 아니고 뭐였다? 비극이 너의 처지에 딱 맞다는 거에요. 이 비극이.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선지자잖아요. 선지자라면 선지자 뒤에 누가 있습니까? 메시아 있지요. 메시아의 세계가 바로 세례 요한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서 메시아 삶을 대행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비극이 될려면 세례 요한의 인생을 통해서 세례 요한도 뭘 겪어야 되느냐 하면은 단절. 자기 생각을 하나님께서는 거역한다는 거부한다는 그러한 기회가 부여되어야 돼요. 세례 요한도. 내가 선지자다. 내 뜻대로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겠지. 이게 아니고 뭐라고 합니까?
19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지금 세례 요한이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모르겠다는 거에요. 그 모른다는 것. 그 모른다는 것을 경유해야 돼요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세례 요한 나름대로의 이 땅에 살면서 어떤 박스, 프레임이 있을 거 아닙니까. 내가 만든 모든 것들은 이건 참된 진짜 현실이 아니고 그냥 허구고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경우를 만나야 돼요. 누구하고?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예수님과 만난다는 것은 내가 주님 앞에 저 앞으로 잘 될까요? 못 될까요? 천당 갈까요? 지옥 갈까요? 라고 질문하는 그것조차 우리한테는 권한과 자격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돼요. 제가 주일날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절망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요. 우리가 절망할 자격 없습니다. 뭐를 절망해. 네가 절망 안 하기를 기대하는 그런 자격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여러분들이 킬빌이라는 영화를 혹시 본적 있습니까? ‘킬빌’. 여자 킬러가 이소룡 츄리닝 입고 설쳐대는. 자기 원수를 오야붕부터 전부 다 일본 칼로 전부 다 죽이는 그 영화. 그 영화가 유명해요. 킬빌. 아주 그 영화가 너무너무 인기 있었고 재미있어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한 여러분들한테는 보지도 않았겠지만.
거기에 끝 장면에 보면 뭐가 있느냐 하면은 이게 있어요. 오지심장파멸술. 이게 뭐냐 하면은 그 여자가 일본 무술을 했기 때문에 한꺼번에 5개의 신체의 맥을 급소를 한꺼번에 일격을 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그 얻어맞은 자가 가만있으면 건강하게 잘 있어요. 가만있으면. 그런데 5발자국을 걷게 되면 심장이 한꺼번에 파괴가 돼서 죽는 거에요.
얻어맞고 가만히 있으면 사는데 자기가 꼼지락 거리면서 자기 꿈을 위해 뭔가 움직이면 그다음부터는 이게 심장 자체가 다 파괴되는 거에요. 결정적파괴술. 이걸 주인공 여자가 이소룡 노란 줄무늬 츄리닝 입고 설쳐대는 겁니다.
인간은 환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잘 되는 환상이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자꾸 꼼지락 움직여요. 기도할까요? 헌금할까요? 자꾸 움직여. 그거 왜 움직입니까? 재앙을 안 당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거에요. 재앙을 안 당하기 위해서 움직이니까 주님께서는 이 오지심장파괴술을 했기 때문에 이미 너는 죽은 자로 타격을 줬거든요.
죽은 자로 타격을 줬는데 자기는 죽은 자 될 이유가 없다고 우기면서 자꾸 움직이는 거에요. 주께 영광 돌린다고. 그게 예언된 재앙이에요. 그러니까 찾아오는 거에요. 세례 요한의 의미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줌으로써 말씀을 못 전하게 한다는 거에요. 말씀을 줌으로써 말씀을 못 전하게 한다. 주께서는 말씀을 주시되 말씀을 못 전하도록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주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할 때 구원을 방해하면서 구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생각한 구원을 자꾸 그걸 비켜나가요. 거기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 이게 경기여고 교가에 나와요. 가사에.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 가락은 모르겠습니다만 가사에 그게 있어요.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지금 뭐를 놓치고 있느냐 하면은 자기가 죽음에 쫓기고 있는 정신병자라는 것을 지금 자기가 놓치고 있는 거에요. 정신병자는 자체적으로 고립적인 자기 보호막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계속 괜찮아 보이는 환상을 있는 대로 다 자기한테 끌어당겨요. 계속 수집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제가 4단계로 해가지고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1)인간은 환상 없이는 못산다. 아침에 눈만 뜨면 환상이 시작됩니다. 시작! 아침에 눈뜨면 환상 시작. (2)모든 환상은 세상이 제공해 준 것이다. 인간이 내가 원한다는 게 내가 원하는 게 아니고 세상이 미리 갖고 있는 그것을 내가 욕망해요.
아 저 옷 좋아 보인다. 옛날에 유명한 배우 오드리 햅번 있거든요. 그 오드리 햅번 머리 해 달라고 사람들 다 오거든요. 얼굴은 오드리 햅번이 아니고 무슨 오드리 햅번 스타일이 어울립니까. 그런데 그 이쁜 얼굴에 어울리는 오드리 햅번 헤어스타일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환상으로 돌아온 거에요. 그게 안 되면 밥맛이 없어지는 거에요. 왜? 사람은 환상 없이는 못 사니까요.
밥맛도 자기 환상에 자기 욕망에 맞춰줘야 이게 그 다음 밥맛이 생기는 거에요. 이 모든 게 세상에 기존에 이미 있는 거에요. 기존에 있는 것을 환상으로 끌어당겨서 그래서 (3)인간들은 세상 없이는 못산다. 이게 본능이에요. 못산다. 인간들은 세상이 진실이에요. 세상에서 태어났고 죽어도 세상 안으로 죽는 것을 당연시 여깁니다.
그러니까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이 환상의 세상은 태어나면서 이미 이 세상은 영안실이에요. 본인의 무덤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그런데 살아보니까 세상의 좋은 것은 자꾸 생기고 그걸 제 때 제 때 끌어 모으니까 여기서 4번째 중요해요.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4)눈물이 난다. 특히 가을철에. 흑흑. 눈물이 나요. 10월의 마지막 날에 부르면 눈물이 나요.
자기가 좋아했던 여자가 환상이에요. 자기가 좋아했던 남자도 환상이었습니다. 자산 100억대 말고 재산 100억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실제로 이 땅에 있으니까 재산 100억 있지 키 크지 잘생겼지 성격 좋아 보이지. 그런 사람 있잖아요. 이정재. 이정재는 재벌하고 사귄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이게 뭡니까. 눈물이 나는 거에요. 이정재 사귈 만큼 자기가 얼굴이 됩니까? 아니면 돈이 됩니까? 안되니까.
결혼하고 자기 옆에 누운 남편 보고 ‘인간아 인간아 너 누구야?’ 낯설어 보이는 거에요. ‘누구세요 아저씨’ 내 환상에 안 맞아요. 내 환상에.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깔끔 떨고 그야말로 백설공주, 오드리 햅번으로 여겼는데 결혼하자마자 자기 것도 아니고 남편 고등학교 츄리닝 입고 돌아다니고. 그것도 그냥 입는 게 아니고 한쪽은 걷어서 한쪽 다리는 또 걷네. 바쁜데 왜. 그냥 살자 되는 대로 살자. 이미 결혼했는데 뭐 무를 수도 없고. 둘 다 지금 환상에 불만족스러워요. 둘 다 강박증 둘 다 정신병자.
그래서 주님 보시기에 이러한 인간들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은 끝까지 어리석다. 인간은 중간에 어리석은 게 아니라 끝까지 어리석어요. 끝까지. 담배 피우는 사람은 담배꽁초 떨어지잖아요. 처리할 데 없어서. 담배 피우는 사람뿐만 아니고 인간 존재 자체가 쓰레기를 남깁니다. 쓰레기를 남긴다는 것은 인간 자체가 쓰레기라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을 비극으로 확정지었기 때문에 누굴 보내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을 보내요. 세례 요한이 뭐냐 하면은 쓰레받기, 쓰레기와 쓰레받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비슷하게. 쓰레기와 쓰레받기. 세례 요한은 남들 보기에는 비극적 인물이에요. 그런데 세례 요한이 주님을 알고부터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했습니다. 이익과 손실에 대해서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본인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익과 손해’.
자, 이익과 손해를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면 이걸 제목을 제가 이렇게 정해봤습니다. 5자로. ‘납작한 인간’. 안에 자기의 고유의 내용물이 전혀 들어있지 않아요. 자기만의 고유의 내용물이 들어있지 않아요. 납작한 거에요. 3차원이 있으면 안에 공간이 생기는데 공간이 없이. 대구의 유명한 만두가 뭐냐 하면은 납작 만두에요. 안에 내용물이 없어요. 그런데 맛있어요. 납작 만두가 납작해요. 납작한 존재.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앙꼬 없는 존재. 아예 앙꼬가 있을 필요가 없는 존재.
그러니까 나한테 이익이다 손해다 가 세례 요한한테는 사치에요. 그게 뭔데? 그게 뭐야? 이게 세례 요한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땅에 나타날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왜? 세례 요한의 엄마가 아이를 못 낳고 부부 간에 자식이 없는 거에요. 자식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에 없음이 세례 요한의 본래의 자기 자리가 돼요. 없음이.
환상의 세계가 없는 사람이 진짜 현실의 세계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아까 경기여고 교가 가사를 이야기했는데 다시 한번 불러 볼게요. ‘착하고 참되고 아름다워라’ 했잖아요.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 이렇게 되어버리면 기준이 뭐냐? 있음이 돼야 돼요. 있는 내가 참되고 있는 내가 착하고 있는 내가 아름다워야 될 그걸 강요받게 되는 겁니다.
그럼 안 참하고 안 착하고 안 아름다우면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은 바로 죽음이 주는 저주의 중압감을 우리가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거에요.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가 순수하지 않고요. 이래야 내 내용물, 내가 평생 이렇게 살았다 내 환상을 죽을 때까지 내 환상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자기 보호막을 환상으로 내 환상 속에 들어온 그 환상을 바깥에 있는 환상으로 프레임을 만들어가지고 그걸 지키고 싶은 거에요.
그게 안 되니까 아까 무엇이 흐른다 했어요.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요. 그 눈물이 흐르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보통 슬프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성경은 슬프다고 하지 않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악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자기 신세 우는 걸 가지고 악한 자로 봐요. 아 이거 고집 세네 이렇게 봐요. 야 이거 환상 이거 안 빼앗길려고 이거 봐라 이거. 애쓰는 거 봐라.
애들 그런 애들 있지요. 자기 뜻대로 안되면 찔찔 울면서 엄마 품에 안기지요. 누나가 안 줘. 막 이렇게 울지요. 누나 보기에 동생이 슬퍼 보입니까? 독하게 보입니까? 아 저거 쪼만한 게 저거 독하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 많이 보고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인데 그 사람들의 다 들으면서 자꾸 실망할 수밖에 없는 실망 자체도 안되지만 미흡한 게 하면은 왜 없음이 본래 자리라는 생각을 왜 안하는지. 내가 있는데 바르게 착하게 하고 싶다는 거에요.
내가 경기여고 다니지도 않으면서 착하고 참되고 아름답고 자꾸 그걸 추구하는 거에요. 이렇게 겸손하고 이렇게 나를 비웠습니다. 그거는 세례 요한의 자리가 아니야 하나님 편의 자리가 아니잖아요. 아까 다시 해볼까요? 소경은 어떤 자다? 눈 못 보는 자가 소경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에요. 소경은 보고 소경이 보는 자가 되는 거에요. 소경이 보는 순간 그 소경은 이제 이 세상에서 왕따 당합니다. 네 왜 봐? 너 안 봐야 되는데 왜 보는 거야? 우리의 환상의 세계에서는 소경은 못 보는데 네가 왜 봐?!
그때 소경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요한복음에 나오지요. 요한복음 9장에 나오잖아요. 나는 안 볼라 했는데 누구 때문에? 거기 예수님이 개입하잖아요. 예수님이 개입한다고요. 그러면 예수님하고 소경된 자하고 같이 뭐냐 하면은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세상 사람이 아니죠. 그러면 뭐냐? 없음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죠. ‘없음의 세계’. 없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거죠.
그래서 성경해석 할 때 없음의 세계인 것을 인지하는 식으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것은 납작 만두가 되고 앙꼬 없어도 괜찮고요. 자기 고유의 것이 없어버리면 이익이다 손해다가 결정할 수 있는 기준자체가 아예 없어요 이게. 바짝 말라있다니까요. 내게 있어야 뭐 아이고 손해봤다 이익봤다 하는데 이게 아예 없는데요.
우리가 자기 것을 갖는다는 것은 환상을 갖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 세례 요한아 네가 소경이라고 생각해봐라. 네가 절뚝발이라고 생각해봐라. 그리고 그 다음에 뭡니까? 쭉 나오지요. 그 다음에 네가 문둥병이라고 생각해봐라. 네가 귀머거리라고 생각해봐라. 네가 죽은 자라고 생각해봐라.
그러면 죽은 자, 귀머거리, 소경 그리고 절뚝발이, 가난한 자 전부 다 뭐냐 하면은 이 환상의 있음, 환상으로 가득 찬 세계, 환상의 있음에서 점차점차 무슨 흔적을 보여주냐 하면은 없음의 세계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이 사람이에요. 왜? 없음의 있음의 경계선에서 있는 것은 무조건 복이고 없는 것은 무조건 저주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이 세계에 경계선 바깥으로 저 변두리로 쫓겨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세례 요한도 마지막은 있음에서 뭐로 변했습니까? 그냥 죽지 않아요. 그냥 늙어 죽으면 조용하게 없어지잖아요. 확실하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권력적으로 있고 얼마나 예수님께 대들면서 있느냐를 보여주는 거에요.
반발은 짐승이 하는 게 아닙니다. 반발은 인간만이 할 수 있어요. 인간만이 신에게 반발해요. 다른 것은 악마 빼놓고 다른 것은 반발할 줄 몰라요. 인간만이 반발한다고요. 그 인간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이 자체가 위기거든요. 세상 없이는 못 산다고요. 틈만 나면 찔끔찔끔 눈물 흘리면서 아이고 여보 왜 먼저 갔어. 결국 왜 나 놔두고 먼저 가느냐. 나이 80넘은 분이 왜 남편 먼저 갔어. 결국 이것은 남편 욕하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 반발하는 거에요. 네가 뭔데 내 남편 데리고 갔느냐. 내 남편 나에게 환상이었다. 주님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환상인데 왜 그렇게 싸우고 바가지 긁었어?
우리 자신이 환상이라는 뜻이에요 우리 자신이. 왜? 우리 자신을 있음으로 이해하거든요.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앙꼬가 있는 내용물이 있는 평생에 나는 고춧가루를 받아 낼 빈 그릇으로 자기를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환상인 것을 우리 자신이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진짜 킬빌한테 한 대 진짜 오지심장파멸술을 한번 받아봐야 아 이미 내가 죽었구나.
말씀 전하고 까불면 까불수록 점점 나는 갑자기 환상을 쫓아가고 은혜 받아야 할 텐데 잘 되야 할 텐데 이상한 환상을 또 끄집어내는 거에요. 이 세상 모든 환상은요 성도한테는 이미 성도한테는 있음의 세계에요. 있음의 세계는 성도한테 성도가 되기 이전의 저쪽 세계에요. 그래서 첫째 시간 마지막을 이 단어로 마치겠습니다. 이쪽과 저쪽. 바로 성경 해석하는 사람은 이걸 구분을 못해요. 이쪽 저쪽을 구분을 못하고 이쪽 세계에서 잘 될려고 하는 거에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