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1a 울산강의-역대기상(4강) 2장 3절 : 죄의 송유관
20211001a 울산강의-역대기상(4강) 2장 3절 : 죄의 송유관
(강의:이근호 목사)
역대상 2장 3절부터, “유다의 아들은 에르와 오난과 셀라니 이 세 사람은 가나안 사람 수아의 딸이 유다로 말미암아 낳은 자요 유다의 맏아들 에르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죽이셨고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유다로 말미암아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으니 유다의 아들이 모두 다섯이더라”
여기에 가나안 사람이 돼있어요. 약속의 땅이 되기 전에 땅, 약속의 땅의 되기 이전에 살던 원주민들이 누구와 혼인했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유다와 혼인을 했는데 그 중에 맏아들 에르가 여호와 보시기에 죽었다고 돼있어요. 에르만 죽은 게 아니고 여기에 오난도 죽었습니다.
방금 역대상 2장 3절 한 절만 봐도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사람이 비 약속, 약속되지 않은 여자와 혼인을 했는데 거기서 나오는 현상이 무슨 현상이냐 하면 죽었더라. 누가? 자식들이 죽었더라.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걸 보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이 있게 되면 거기서 반드시 무슨 사건이 난다?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걸 말을 달리 바꿔보면 사람이 죽는 것은 그게 하나님의 약속을 약속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사람은 태어나서 얼마 정도 살다가 죽었더라, 죽었더라가 연속돼야 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얼마나 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죽는 이유를 알아야 그게 제대로 된 삶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게 기적이 아니고 살아 있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 죽는다는 것이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다. 살아봤자 죽잖아요. 살았다 하는 것은 중간과정이고 죽었다 하는 것은 결국 최종적으로 드러날 것 다 드러난 거예요.
제가 어릴 때 어머니께서 바느질할 때 이불호청 할 때 굵은 바늘을 집어넣는다 말이죠. 바늘을 집어넣을 때 깊은 솜 속에 들어가서 바늘이 없어요. 그런데 바늘을 저 뒤쪽에서 잡아당기니까 바늘이 있었는데 없어졌네. 어, 바늘이 나왔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들어가는 바늘과 나오는 바늘과 무엇이 연결돼있겠습니까? 실이 연결돼있겠지요. 그 실을 약속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탄생이라고 들어갔는데 보니까 죽음으로 기어 나올 때 처음에 있는 탄생된 것이 결국은 죽음화, 사망화 되어야 될 그 목숨이 이 세상에 진입한 거예요. 솜 속에 바늘에 쑥 들어갔다가 바늘이 툭 튀어나오는 것처럼 처음에 들어간 것도 바늘이었고 나중에 나온 것도 바늘이었고. 애초부터 우리는 죽음덩어리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이 얻고자 하는 건 뭐냐?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지금도 생생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인간에게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삶을 그렇게 허용하신 거예요. 방금 한 것을 이렇게 적어보겠습니다. 서로 연결된 일련의 내용들, 이걸 비유로 이야기하면 이 전체를 한 자로 이야기하면 이건 바로 ‘실’이 돼요. 실을 풀이하면 서로 연결된 일련의 내용들이에요.
지금 역대상 2장하고 있는데 그 내용들이 한 내용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죠. 연결, 연결, 연결, 연결, 계속 연결돼있는 거예요. 뭐로? 하나님의 실로 연결돼있어요. 지금까지 이야기한 걸 정리하게 되면 하나님의 약속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 내부에 잠복돼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바닷물 속이 고요해서 물속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잠망경 낀 해녀가 불쑥 튀어나오는 그런 경우 있잖아요. 해녀라든지 스쿠버다이버라든지. “어, 당신 그 안에 들어있었어?” 이러고 놀래잖아요. 해삼, 멍게 잡아 수면 위로 올라오지요. 약속이라 하는 것은 인간이 예상한 현실 거기에 있는 게 아니라 역사라는 현실 안에 잠복돼있어요.
잠복돼있을 것을 우리가 왜 못 알아보느냐? 우리는 실과 연결돼있는 게 아니고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겠다고 이어졌거든요. 그러면 여러분들 머리 있는 사람은 생각할 거예요. 아, 실이 두 종류구나. 하나는 살아 있으니까 계속 살자는 그런 조류로 가는 사람, 시작이 내가 살아 있으니까 오늘도 살아 있으니까 내일 살고, 모레 살고, 팔십, 구십 살자. 그것만 아는. 그러면 뭡니까? 그것은 서로 연결된 일련의 내용들이 어느 쪽으로 간다? 사는 쪽으로 간다. 이래 살면 잘 사는 거지.
그래서 불신자들이 궁극적으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고백은 뭐냐 하면 이거에요. “참 멋진 인생이었어!” 참 멋진 죽음이었다고 안 하지요. 멋진 삶이었어. 나는 사는 것은 나한테 너무 당연한 거야. 암 나는 살아야지. 나는 길게, 길게 살아야지. 그게 인간이 자기가 태어난 걸 시작점으로 하는 실이에요, 실. 참 멋진 인생이었어.
그에 비해서 신자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주님의 죽음에 참여되었음, 이게 신자에요. 실이 다르지요. 이쪽에 참 멋진 인생이었다 할 때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지요. 이 나는 죽은 나를 염두에 두는 겁니까, 멀쩡히 살아 있는 나를 염두에 두는 거예요? 멀쩡히 살아 있지요. 멀쩡히 살아 있으니까 일련의 연결된 내용들을 계속 만들어가는 거예요. 살아 있는 나가 계속 또 살면서 목적은 뭐냐 하면 참 멋진 인생이었어를 증명하듯이 살아가는 거예요. 나는 참 멋진 인생이었어.
내가 참 멋진 인생이었다. 이걸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지요.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요. 자기 자신을 믿는데. 입만 떼면, 눈만 뜨면, 행동을 하면 막 쏟아지는 모든 것들이 뭐냐 하면 나는 참 멋진 인생인 것을 나는 내 앞에서 증명하고 싶다.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호응 좀 해줘. 잘한다, 잘한다고 호응 좀 해줘.
높이뛰기 선수, 우리나라 이번에 올림픽 나간 높이뛰기 선수가 자기 딴에 자기 기록을 경신하기 위해서 높이뛰기 준비하거든요. 그냥 하면 힘이 안 나니까 일본관중들 보고 호응을 원하는 거예요. 박수 막 치고, 그러니까 박수 쳐주는 거예요. 힘내서 자기가 목표한 2미터 35센티를 넘었어요. 타인의 호응은 방향이 누구한테 쏟아지는 거죠? 나한테 쏟아지는 거예요.
나한테 죽으라고 박수 치는 거예요, 안 그러면 당신이 이제까지 높이뛰기 선수로 왔기 때문에 높이뛰기 선수로 온 그 청춘을 보상받기 위해서 빛내기 위해서 서로 연결된 일련의 내용들로 연결시켜 보겠다는 거예요. 목걸이를 같이 종류로 연결시키듯이. 그래서 목걸이로 보면 거기에 어느 하나를 건드리면 건드릴 수 없어요. 왜? 서로 연결돼있기 때문에. 나의 과거를 건드리면 오늘날 나를 건드린 게 돼요. 서로 연결돼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설명한 참 난 멋진 인생이었어, 이게 약속이 없는 거예요. 이걸 아까 역대상 2장 3절에서 가나안 여인 또는 가나안 사람들 또는 하나님의 언약, 약속이 없는 이방민족이에요. 약속의 땅이 아니에요. 약속의 땅 되기 전에 살던 사람들의 풍속 또는 문화, 문명, 좀 고상하게 말해서 그들의 이념이 이거거든요. 자기 잘 되기 위해서.
이걸 요즘으로 바꾸면 네 자가 돼요. 이걸 ‘민주주의’라 하는 거예요. 민주주의란 이념의 특징은 자기 부정이 없습니다. 자기 부인이 없어요. 그냥 서로가 서로에게 박수를 유도하는 거예요. 호응을 유도하는 거예요. 힘을 합쳐서 잘 되자는 겁니다. 이번 추석날 여러분들이 친정이나 또는 시가집이나 처갓집이나 가봤지요. 오랜만에 가까운 일가친척 모여서 얼굴 봤습니다.
자, 가서 하는 일들의 방향성은 뭐였든가요? “우리 다 같이 손잡고 죽자.” 이랬습니까? 아니지요. 뭐였어요? 호응해주는 거죠. “수고했다, 잘했다, 잘 될 수 있다. 지금은 마음에 안 차지만 걔 성공할 거야. 내 장담할게.” 서로가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지요. 그게 뭐냐 하면 약속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게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2장 3절에서 유다가 누구와 결혼했습니까? 유다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이, 아브라함의 손자요, 야곱의 아들이죠. 야곱의 아들이 누구와 결혼했어요?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지요. 여기서 뭐가 나왔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에서 뭐가 나왔어요? 애 둘이 첫째 아들, 둘째 아들 죽었지요. 죽음이 나왔지요. 죽음이 나왔다고. 자식이 죽어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유다가 이 가나안 여자와 결혼할 때 자기 딴에 하나님 믿지요. 유다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또는 인정한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를 하나님은 뭐로 바꾸느냐 하면 나는 나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라는 식으로 유다에게 작용한 겁니다. 가나안 여인과 혼인함으로써 유다가 얼마나 구원받느냐, 안 받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약속과 비 약속이 만나면 거기서 필히 뭐가 발생된다? 죽음의 발생되는 거예요.
죽음이 발생됨으로 말미암아 서로 살았다고 여겨서 혼인했을 것 아닙니까. 어디 죽은 시체 붙들고 결혼 한 게 아니잖아요. 둘 다 살아 있으면 그 자식을 낳겠어요, 안 낳겠어요? 자식을 낳겠지요. 그때까지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둘 다 살아 있다고 여겼는데 자식을 낳았는데 자식 둘 다 죽었어요. 셋째도 위기가 왔어요. 죽을 뻔했어요. 다 죽었어요.
자, 이 대목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사람마다 원수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적이 있다 이 말이죠. 저 사람이 나의 원수라 하는 건 다른 사람은 못 알아봐도 나는 알아봐요. 사람마다 원수를 규정하는 그런 본능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나의 원수라 하면 그 다음에 저 사람은 나의 원수가 아니라고 되겠지요.
그러면 원수와 결혼하는 사람 없잖아요. 그럼 누구와 합니까? 일부러 원수와 결혼한 사람 없지요. 원수가 아니라는 조건 하에 그 사람과 결혼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둘 다 결혼할 때 둘 다 살아 있는 거예요.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자식이 나온 겁니다. 우리 자식 낳고 자식 죽이자. 이런 게 결혼 아니잖아요.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되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 자체가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쉽게 해도 못 알아보니까 그냥 어렵게 하겠습니다. 제가 문제 내겠어요. 인절미가 하나 있습니다. 한 개는 너무 커서 못 먹어요. 젓가락으로 두 조각냈어요. 각 조각을 A와 B라 한다면 끊어진 상태니까 A는 B가 아니고 B는 A가 아니고. 그러면 저 사람이 적이다, 아니다, 라는 것을 누가 판정하느냐? 내가 A가 B를 그렇게 결정하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인간들은 이렇게 살아가요.
그런데 이게 갈라졌을 때 여기서 미지의 것이 올라오면서 A도 가짜고 B도 가짜고 진짜는 갈라진 틈 안에서 올라오게 돼있어요. 하나님 믿는 나도 가짜고, 전에 하나님 안 믿는다고 너는 우리 집안을 박살내었어. 이 나쁜 가나안 여자야, 하는 저쪽도 가짜고. 내가 저 여자와 결혼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진짜 신앙인과 결혼했으면 우리 애들 안 죽었는데, 라는 나도 가짜고.
가짜냐, 진짜냐의 결정은 내가 했는데 저 사람은 진짜다, 가짜다 결정하는 내가 갈라져서 비로소 등장하는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가짜가 되고 원수가 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언약의 원리입니다.
1953년도 왓슨과 크릭이라는 두 화학자가 뭘 규명했느냐 하면 왜 인간은 닮았느냐? 그걸 규정하는 데 성공했어요. 저희들끼리 성공했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그냥 철학적으로 심리적으로 닮았다 하는 것을 닮았다 하는 게 너무 모호하고 너무 희미하고 심리적 개념이고 구체적이 아니잖아요. 왜 닮았는지 닮게 하는 요소가 뭔지를 1953년도에 그걸 발견했다니까요.
그게 디옥시리보핵산, DNA를 발견한 거예요. DNA, 이 유전물질을 발견하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성격이니 인격이니 감정이니 이것은 전부 다 DNA의 원자구조의 서열, 순서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이미 확정이 된 거예요. 쉽게 말해서 자기 아버지 성질 더럽고, 엄마 성질 더럽다. 그러면 분명히 이건 백 프로 DNA 얻기 전까지는 그래도 뭔가 좋은 환경이 좋다면 성격 좋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DNA가 등장하고 난 뒤에는 애가 태어나기 전에 미리 엄마 배를 갈라서 아빠, 엄마의 못된 DNA 부분을 싹둑 잘라서 끄집어내고 거기에 좋은 DNA, 착하고 점잖고 훌륭하고 인격적인 DNA를 배양해서 그걸 부속품 교체해버리면 아버지, 엄마가 성질이 더럽든지 간에 그 애는 성질 착하게 나오는 거예요. 왜냐하면 착하다 하는 것은 교육을 잘 시키고 사랑을 받아서가 아니라 뭐로 규정된다? DNA 디옥시리보핵산이 결정하는 거예요.
DNA가 구조를 살펴보니까 꽈배기처럼 이중나선구조로 돼있어요. 그러니까 유다가 구원받았느냐, 뭐 자식은 어떻게 가나안 여자는 유다 때문에 구원받았느냐? 어떤 특정인을 겨냥해서 당신은 구원받았느냐, 라고 이젠 더 이상 물으면 안 돼요. 당신은 누구와 이중나선구조로 얽혔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되는 거예요.
당신과 당신의 원수로 여겼던 그 자를,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당신과 같이 이중나선구조로 만들어서 저쪽도 가짜고 너도 가짜라는 언약적 혜택을 언제, 어떻게 이뤘습니까? 그게 질문이 되는 거예요. 뭐, 나 예수 믿습니다, 해도 기분 좋을 때 술 한 잔 들어갔을 때 할 수 있거든요. 감정이니 나는 기분 업 됐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것도 감정이에요. 감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구조가 중요해요. 언약과 비 언약이, 말조심해야 된다.
언약과 비 언약이 결합되는 게 아니고 언약이라고 규정된 형식과 비 언약이라고 규정된 형식이 두 마리가 똬리를 트는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형식이에요, 형식. 폼 내는 거예요, 폼. 그럴 듯 하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폼 내는 사람과 교회 안 다니는 폼 내는 사람 둘이 결혼해서 있는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성령이 와버리니까 교회 다니는 것도 가짜고 안 다니는 것도 물론 가짜고 둘 다 싸울 필요도 없다. 둘 다 가짠 데 뭘 싸워.
그 가짜가 가짜로 드러나는 것은 뭐냐 하면 나의 삶도 주께서 인정하지 않고 당신의 삶도 인정하지 않고 둘 다 죽을 대상인 것을 확정짓는 제삼의 갈라짐의 새로운 원리가 여기서 분출돼야 돼요. 그 분출되는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죽음 사건이에요. 분출된다는 것은 젓가락으로 하나라고 여겼던 우리 식구라는 걸 떼어놓는 거예요.
성경에서는 가나안 여인과 유다가 결혼한 것으로 돼있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이게 더 복잡해요. 뭐냐 하면 남과 나와 결합한 게 아니고 신약은 나하고, 나하고 이중나선구조가 돼있어요. 진짜라고 여기는 쉽게 말해서, “나는 이렇게 잘난 나야, 나는 훌륭해.”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이 없을 때 인간은 뭐가 목표로 하느냐? 나는 참 멋진 인생이었어, 라는 그것과 그런데 왜 현실적으로 나는 이렇게 내 마음에 들지 않은 그러한 고된 인생을 망가져버린 인생을 나 왜 이렇게 사는 거야, 라고 이게 이중나선구조로 돼있는 거예요.
어느 게 진짜로 생각합니까? 사람들은 지가 잘 되는 걸 진짜라고 생각해요. 못 되는 것은 재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후딱 빨리 재수 없는 나의 약점을 뭐로 바꾼다? 지금 내가 괜찮게 여기는 나로 빨리 모양새를 바꾸는 그렇게 되는 하나 되려고 인간은 아등바등 애를 씁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실제 내 모습과 이게 너무 괴리되지 않도록 합치되도록 내가 봐도 내가 참 멋진 인생이다. 참 멋지기까진 너무하지만 뭐 A학점은 아니지만 B학점 정도는 줄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딱 맞춤은 아니지만 견딜 만하기는 하다, 라는 쪽으로 이해하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자기에 대해서 얼추 자기 자신을 용납하는 모든 근거에는 뭐냐 하면 계속해서 실이 어떤 실이라 합니까? 계속해서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어, 실수했네.” “실수했지만 다시 만회했다.” 그러니까 일련의 사태들이 연결해서 하나의 이야기, 내가 주인공이 되는 소설을 만들어나가는 겁니다. 거기에 죽음도 없고 이중나선구조도 없고 그렇지요. 그래놓고 인간들은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못해요. 내가 살아 있기 때문 산다는 게 뭐가 이상하냐.
셜록 홈즈 탐정에 보면 조수와 이런 대화가 있어요. 탐정이 조수에게, “그 집을 어제 지켜보라 했지?” “예. 지켜봤습니다.” “지켜보니까 무슨 일이 있었어?” “탐정님, 아무 일 없었어요. 개도 짖지 않고 아무 일 없었습니다.” 그때 탐정이, “개가 짖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거야.” 이 말은 뭐냐? 범인은 평소에 개와 잘 아는 사이라. 사건은 터졌는데 아무 일 없었다, 단서가 없다? 이건 뭐냐“ 내부 인물이란 뜻이에요.
지금 우리 인생, 십자가 모르고 교회 별로 좀 빠져도 아무 문제없지요. 그 범인은 누굽니까? “이만하면 선방한 인생인데 이만하면 평온한 만족스럽진 않지만 견딜 만한 인생이잖아. 그냥 이대로 살지, 뭐.” 그냥 넘어가려 할 때 그 범인이 누구에요?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 얼마나 무서운 줄 모르고 그냥 설렁설렁 넘어가려는 범인이 누구에요? 내부 인생이 누굽니까? 본인이에요. 본인이 문제에요.
자기 사는데 만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요. 누가 예수님에 대해서 험담하면 뭐 쉽게 참습니다. 하지만 나에 대해서 험담하면 못 참아요. 자기가 예수님보디 더 소중해졌어요. 우리의 일상생활이. 처음엔 예수님 생각하다가 이제는 그것도 예수님 생각하나 안 하나 태평인데 뭐. 아무 일 없는 데 뭐. 아무 일 없으니까 용기가 나는 거예요. 누가 주님을 욕하든 말든 내 일 아니지만 나에 대해서 조금만 하게 되면, “너, 오늘 죽었어.” 자기한테 굉장히 예민하고 민감하고 그렇습니다.
집에서 개를 오랫동안 키워본 사람은 개라도 의리가 있거든요. 자기 주인이 약간 안 좋은 눈치를 하면 짖는 거예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와서 집안에 함부로 해도 개가 짖지 않는다는 그것은 개가 사료만 지 배만 채운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사야 1장에 뭐라고 돼있습니까?
이사야 1장에 보면 소도 주인을 알고 짐승도 알거만은 너희들은 너희가 주인이 되었으니까, 내가 주인인데 나한테 문제 삼지 않으면 세상 아무 문제없어요. 세상이 예수님을 욕하든 그것 나하고 무슨 상관있습니까? 아무 상관없어요. 나만 멀쩡히 살아 있으면 되잖아요. 그리고 내 자식이나 내 가정만 잘 건사하면 더는 소원 없어, 참 멋진 인생이었어,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유다 가정에서는 하나님께서 너무 사랑하셔서 유다 가정의 자식 둘이나 죽여 버렸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처음에 선악과 따먹을 때 분명히 하나님께서 무슨 원리를 집어넣었습니까? “네가 인간이냐?” “예.” “그러면 너는 필히 죽는다.” 이게 원리입니다. 이거는 인간의 운명이에요.
저는 이걸 인간이 독약 마셨다 하는데 독약 마시자마자 죽는 사람도 있겠지만 독약 마시고 그 약이 잠복기 지나서 온 몸에 퍼져버리면 결국은 죽잖아요. 사람들은 그걸 늙어죽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늙어죽은 게 아니고 그게 독약 마셔 죽은 거예요. 먹지 않을 약을 먹은 거예요. 자기가 잘못된 약을 먹었다는 걸 알아야 뭐 해독제를 구하든지 말든지 하지 자기는 정상인데 해독제 필요합니까? 필요 없지요. 해독제가 중요한 게 아니지요. 그저 가을에 놀러가는 게 중요하지 해독제가 뭐 중요하겠어요.
아까 무슨 떡이라 했습니까? 인절미. 쭉쭉 늘어나는 인절미. 인절미 떡이 하나에서 두 개 되었을 때에 둘로 떨어졌을 때 A란 사람과 B라는 사람은 뭘 모르느냐 하면 하나님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떡만 보이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A떡, 너는 B떡, 다른 사람은 C떡, 또 다른 사람은 D떡, 눈에 보이는 인간들만 보이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 되는 거예요. 왜? 보이는 것에 가려져 있으니까.
인간세계에 하나님은 안 보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에 의해서 그분의 약속에 의해서 유다 가정에 어떤 사건이 터지지요. 그게 아들 에르과 두 번째 오난이 둘 다 죽었다는 사건.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세요. 인간은 늙어 죽든 젊어 죽든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뜻이에요. 그냥 살아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내 인생에 내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침입해서 내 몸과 내 모든 인생에 하나님 자기의 원리를 적용시키고 있는 것으로 받아주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요. 보이지 않으니까 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빼고 보이는 것들만 이렇게 ABCD 보이는 인간들만 웃고 희희덕거리며 살아요. 어서 오이소, 손님 청하고 어서 가이소, 하고 싸우고 이러지요. 이 보이는 것들의 집합이 될 때 보이지 않는 분이 이 안에 섞이기 때문에 인간들의 영역에는 탈출구가 없다. 탈출구가 없어요. 탈출구가 없다? 이게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살아 있는 것들이 백날 뭉쳐봐야 꽃다발처럼 뭉쳐봐야 그들은 탈출구가 없어요.
그러면 죽음이란 우리는 재수 없다고 여기잖아요. 아이고, 안 됐다고 이러잖아요. 죽음이 무슨 역할을 하느냐 하면 아까 처음에 강의할 때 누비이불에 두꺼운 이불에 바늘이 들어왔다가 없는데 뽑혀 나오잖아요. 그 죽음의 바로 뭐냐 하면 탈출구 없는 곳에 탈출 구멍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유다 가정에 일어났던 며느리 다말의 행위입니다. 다말의 행위는 며느리가 창녀기 때문에 유다 말 그대로 그 며느리는 가정의 가문을 생각해서 죽어야 돼요.
여기 창세기 38장에 보게 되면 24절에, “석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자, 불살라 죽이라고 명령을 누가 합니까? 시아버지가 하고 명령은 누가 받아요? 며느리가 죽임을 당해야 되지요. 일종의 명예살인이에요.
명예살인이란 뭐냐 하면 이슬람 나라에서 여자가 나대면 그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자기 일가친척이나 집안 가운데 설쳐댄 여자를 죽여도 그거는 살인죄로 처벌하지 않는 법, 이게 명예로운 살인이라는 겁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 방송국 여자 앵커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명예살인을 당했어요. 누가 죽였느냐? 친오빠가 죽였어요. 왜 죽였는지 물어보니까 그 여자가 영어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똑똑해서 카불 방송국의 앵커가 됐다 이 말이죠. 앵커가 돼서 남자 진행자와 같이 나오는 걸 보고 카불에 있는 시민들이 그 집안의 부모와 오빠한테 압력을 가한 거예요.
우리나라의 전통을 네 동생이 그렇게 하는 데도 가만히 보고 있느냐? 정말 진짜 당신의 가문을 중시한다면 우리가 하기 전에 너희 집안 손으로 죽여 버리면 당신을 다시 옛날처럼 위대한 가문으로 존중해줄게. 그래서 죽였어요. 그래서 당국에서 살인한 오빠와 공모한 아버지를 한 달간 구금했는데, 구금도 아니고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하다가 풀어줬어요. 그리고 그 가문은 역시 대단한 가문이에요, 대단해요. 이렇게 된 거예요.
유다의 가정이 그와 비슷한 거예요. 유다가 자기 며느리가 임신했다 하니까 뭘 생각합니까?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데 보통 뼈대 있는 집안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집안이잖아요. 우리 집안에 이런 여자 들어오면 누구의 명예를 먹칠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먹칠하는 거예요. 자, 묻습니까? 유다가 가짜에요, 가짜 아니에요? 가짜지요. 하나님 믿는 유다가 가짜인 거예요. 하나님 믿는 자가 가짜란 말이죠. 그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언약의 작업이에요. 네가 가짜야, 네가.
더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너 하나님 믿는 이유가 뭐냐? 뭘 노리고 믿어? 그 질문에 답해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 믿으면 죽어서 천당 가고요. 하나님 믿으면 나쁜 짓 안 해서 칭찬받고요. 죽 들어보면 하나님을 결국은 뭐냐 하면 내가 살되 내가 원하는 값어치 있는 훌륭한 나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이용한 것밖에 더 됩니까?
지옥 있다하니까 살살 비는 겁니다. 어린애가 학생이 선생이 때리니까 안 맞으려고 잘못했습니다. 잘못한 게 잘못한 게 아니에요. 안 맞기 위해서 잘못한 거예요. 지옥 있다니까 지옥 안 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왜 가짜냐 하면 지옥에 안 가겠다는 가짜이기 때문에 나오는 본심이에요.
“지옥에 나는 안 갈래.” 그러면 이것은 무슨 원리를 어기느냐 하면 창세기 2장의 원리,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3장에 보면 진짜 따먹었잖아요. 그러면 따먹기는 해놓고 지옥에는 안 간다? 배후에 누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부업에 대항하게 만듭니까? 보나마나 악마가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예수님 빼놓고요 지옥에 안 갈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음부에 내려갔잖아요. 초대교회 사도신경에 보면 예수님이 지옥에 갔다는 문구가 있어요. 지금은 음부라고 그냥 넘어갔지만. 아버지로부터 저주를 받았으니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낸 것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어느 누구도 구원될 희망이나 자격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담의 자손 치고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 의인이 어디 있어요.
의인이 없는데 천당 갈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어요. 본인이 의가 있는지 없는지 그건 돌아봐야 돼요. 의도 없으면서 천당 가려하고. 무슨 그런 횡포입니까? 교회는 좋다고 또 한 건수 걸려들었어, 하고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사기 쳐서 그렇게 끌어당기고.
인간은 할 수 있는 게 구원도 그렇고 천국도 그렇지만 자기 세계 만드는 것 외에는 일련에 연결된 자기 세계 있잖아요. 자기 내용,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스스로 탈출구를 못 만들어요. 나로부터의 탈출이 점점 더 안 돼요. 뭐 그전부터도 안 됐지만. 그냥 자기 안으로 응축되는 겁니다. “건드리기만 해봐라.” 맨날 외부에 대해선 그런 소리나 하고.
유다의 가정에 애 둘이 죽었다는 말은 이거는 죽음의 이유들의 아빠, 엄마한테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식들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그 부모한테 나왔잖아요. 만약에 손등에 점이 있다면 점을 보면, “이 나쁜 점아.” 이러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이 점은 어느 영역에 있어요? 손이라는 영역에 점이 찍힌 거예요.
자식이 점이라면 그 손등은 뭡니까? 부모에요. 그 부모는 더 넓은 의미에서 그 부모의 부모, 부모의, 부모의 부모. 어떤 점이라는 안 좋은 일이 발생되게 되면 그건 걔만 닦달내지 마시고요 이미 그걸 잉태한 모든 환경과 모든 육적인 조건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탈출구로 보여준 거예요.
뭐 매 맞는다, 장사 안 된다. 이런 게 아니에요. 장사 안 되면 열심히 겸손하게 살면 되고 매 안 맞으려면 나쁜 짓 안 하면 되지만 이게 아니고 죽었다는 말은, 애초부터 너한테 아무것도 기대를 안 하는데 너는 왜 자꾸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 저 기대해주세요. 제가 하나님 말씀대로 잘할 수 있습니다.” 왜 네 주제파악도 안 되고 네 자신을 몰라도 그렇게 모르는 그런 소리만 해대느냐 이 말이죠.
서당집 개가 한 삼 면 배웠다 칩시다. 누가 속담을 듣고 서당집 개는 풍월을 읊는 다해서 도그, 도그, 도그 녹음기 들고 가서, “풍월 시작, 풍월 읊어 봐. 시조 한 번 읊어 봐.” 하면 개가 뭐라 합니까? 웡~ 이것 개소리 아닙니까. 인간이 찬양을 하고 무슨 설교를 하고 강의를 해도 주님 보시기에 웡~ 개소리에요. 강의해서 구원받아요, 설교해서 구원받습니까? 기도한다고 그것으로 구원됩니까?
하나님께서 자식을 죽일 때 그 삶의 영역에 탈출구가 생겼다 했잖아요. 구멍이 생긴 거예요. 그 구멍 속으로 뭐가 들어왔느냐 하면 하나님의 바늘이 들어온 거예요. 그 바늘 뒤에 실이 있고. 언약이 유다 가정에 꽂이고 드디어 잠복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거예요. 그 들어올 때에 유다는 처음에 아들 죽고 난 뒤에 겁났어요. 우리 집안 거덜 난다고 죽었다고 대가 끊어진다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유다가 다말이 변장해서 창녀가 됐다는 그 내력을 듣고 난 뒤에 창세기 38장 26절에 보면,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다시 말해서 내 며느리가 나보다 옳다. 그런데 그 전에 유다는 며느리는 자기 집안의 원수로 생각했잖아요. 너는 나의 원수라고 판정내린 그 판정이 틀려먹었다 이 말입니다.
내 쪽에서 나를 본 거에요. 이중나선구조에서 기어이 나는 내 것을 지키려고 한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죽음으로 돌출된 주님의 언약의 입장에서 그게 뭐냐? 하나님의 적이 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된 겁니다.
지금 몇 분 됐습니까? 그만해야 되겠지요. 그만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