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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여수특강 성경과 한국교회(요 1:14) 210830A - 이 근호목사자유게시판요한복음

여수특강 성경과 한국교회(요 1:14) 210830A - 이 근호목사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의 교재는 이 책은 1996년도에 초판이 나왔고요. 이 책은 대장간에서 나온 것인데 그 전에 등불출판사에서 나온 이것이 먼저입니다. 이 책이 1987년도에 나왔어요. 그 내용을 그대로 다시 낸 거예요.

뒤에서 본 한국교회를 강의하면서 두 가지를 제 나름대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첫째는 이 책이 1987년도에 쓴 내용인데 지금도 동일한가, 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나온 그 이야기를 지금도 동의할 만한가, 그 문제와 두 번째는 이 내용대로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가.

이게 1987년도니까 거의 몇 년 전입니까? 거의 35년 정도가 되었지요. 35년 전에 이 내용을 책으로 냈습니다. 추천사에 보면 “총신대학원 철학박사 신성종” 이런 것도 들어 있고 그래요. 추천하신 분에 대해서는 별로 ‘아, 큰일 날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오늘 이 책을 다 보면서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 갈 겁니다.

281쪽에 ‘집필후기’라는 것이 있지요. 제일 끝에 있는 대목부터 제가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관한 싸움이다. ‘어떤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냐’는 문제이다. 인간들의 머릿속에 미리 들어가 있는 하나님은 악마가 넘겨준 신이다.”

악마가 이미지를 만든 그 신이지요

“하지만…”

인간들 속에 보편적으로 들어 있는 하나님과 이 땅을 직접 방문하신 그 하나님과의 대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린 거예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터졌다는 말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직접 이 땅을 방문하신 하나님이 결코 갖지 않았었었다. 그걸 말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집필 후기에 보면,

“하지만 이 땅을 직접 방문하신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다. 이 땅에 오신 그분이 바로 참 하나님이시다. 그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본질도 제대로 정립이 된다. 외형적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섬기고 찬양하고 선교에 열중한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 모여 있는 구성원들의 정신구조가 중요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 자체만을 생각하는 자들의 모임은 교회가 아니라 종교 클럽에 불과하다. 오직 그리스도만 생각하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교회가 교회를 생각하게 되면 이것은 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만 생각하면 교회고, 그런 뜻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교회라는 명칭의 종교 클럽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현 세상의 죄성을 더욱더 노출시킨다.”

주님께서 종교 클럽으로부터 소외당했지요.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의 죄성을 더욱더 노출시킨다. 이 말은 뭐냐하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죄를 피해서 선한 것, 착한 것, 정의로운 것, 전부 다 악한 데서 도피해서 선한 것을 추구한 그 집합체가 그 당시의 최고의 하나님을 섬기는 단체였잖아요. 유대인의 회당이 그렇잖아요. 그렇지요.

악을 피해서 선한 것들은 다 집결한 곳 그게 그 당시 회당이었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십자가 사건, 살해당한 사건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그 죄의 마지막 모든 죄성은 다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라 그 말이지요. 그래서 교회에서 온갖 종교적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지요.

“인간은 자신이 지닌 종교욕에서 온갖 종교적 아이디어를 늘 방출해 낸다. 예수님은 이런 것들을 일체 저주한다. 하지만 종교시장은 이런 종교인들만 생존하도록 허용한다. 즉 기독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종교인들을 찾고 또한 그들을 통해 신과 메시아를 배우려 하는 것이다. 직업 종교인들은 인간들이 원하는 종교 취향과 분위기와 맞아 떨어지는 쇼를 늘 생각해 내고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이런 종교가들의 가식적인 쇼와 더불어 황혼을 맞이할 것이다.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다. 하지만 종교적 활동만이 이 허무함의 최후를 화려한 낙조로 바꾸어 준다.”

여기 뭐로 바꾸나요? 화려한 낙조로 바꾸지요. 화려한 낙조, 여수 밤바다, 저녁노을이라든지 목포 낙조가 아주 아름답지요.

“서글픔의 극치이다. 지옥에 가까이 다가선 신비 체험을 마치 천국에 가까이 다가선 신비체험인양 바꾸어 준다.”

거의 지옥에 다 왔는데 자기는 교인들은 거의 천국에 다 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직업 종교인들은 이것이 인류에게 할 수 있는 최후의 봉사로 알고 있다. 연극은 끝나간다. 그동안 쭉 인류를 속여온 종교극 무대장치도 이제는 철거 되어야 될 순간이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끝나요.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은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그 내용입니다. 끝을 먼저 이렇게 보고 그다음에 11페이지에 ‘1. 교회의 본질과 시대의 위치’가 나오지요. 12, 13페이지에, 인간들이 하나님이면 하나님 예수님이면 예수님을 쳐다본다는 거예요.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쳐다봤잖아요. 당신은 누군가, 하고 쳐다봤지요.

그런데 쳐다보는 그 인간을 누가 쳐다보느냐 하면, 주님이 쳐다봅니다. 13페이지에 나옵니다. 여섯 번째 줄에 “그냥 웬일인가 하고 구경만 한다. 그 광경이 현재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최종 판결이다. 그 정도로 인간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인물들이다.”

처음에 책을 지을 때 그냥 서술형이라서 반말 형태로 했거든요. 그래서 이것도 반말로 되어 있어요. 이것은 다른 강의나 수련회에서 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주님을 분석하기 위해서 쳐다보는데 그렇게 쳐다보면서 주님으로부터 인간들은 판결을 받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주님이 왜 오셨는지, 주님이 판결하러 오셨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저분이 과연 믿을만한 분인가? 내 인생에 과연 도움이 될만한 분인가? 내가 저분 믿게 되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를 생각하잖아요. 생각하는 그 생각 자체가 주님의 판결 대상이 된다 그 말입니다.

“네가 나를 보고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그거 보고 내가 너 심판할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주님을 쳐다볼 때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가 천국 가는 특별통로가 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을 보면서 ‘아, 저분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생각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판결받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많은 무리들이 소문 듣고 예수님에게 왔잖아요.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을 평가하는데 자기가 평가하면서 자기들이 예수님을 평가하는 그 평가에 대해서 주님께서 평가한다는 생각을 그들은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가 택한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그들이 원치 않는 것을 집어 넣습니다. 예를 들면 중풍병자가 주님 찾아왔을 때 병 고치러 왔는데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뭐라고 했지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이렇게 했지요. 이것은 전혀 예상 못한 거예요.

그래서 택한 백성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한 주님을 주님 쪽에서 교정해 주셨다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생각할 때 이런 식으로 주님과 좋은 관계 유지하면 되겠다 하는 그 생각을 주님 쪽에서 그걸 바꿔주신 거예요.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것은 네 일방적인 사고방식이야. 그게 바로 죄야.” 그렇게 교정시켜 주는 거예요.

14페이지에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라” “하지 말라”를 제가 언급을 했는데요. “하라, 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이 역사안에서 그 지향하는 바가 어디를 목표로 하고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 말라, 는 것은 인간의 무능력과 오해의 범죄의 기반이 어디서부터 도출된 것인지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주님께서 하라, 하지 말라, 하심으로 말미암아 너의 모든 출발은 하나님 보시기에 해서는 안 된다, 부터 출발을 했다. 출발을 했고, 주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그런 목표 있잖아요. 그 목표를 주께서 제시하는 겁니다. 하라, 도 달성하지 못하고 하지 말라, 는 그것도 자체적으로 인간은 수정하거나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은 없고 결국은 인간의 무능력성을 그대로 붕 뜨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15페이지 중간에 나옵니다. “제대로 가르치자면 이렇다. ‘여러분은 이제 예수를 믿게 되면 자신의 원초적인 죄가 다 드러납니다다. 그리고 그 배후에 악마가 여러분을 항상 조종하려고 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바로 이러한 존재인 것을 날마다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고 회개할 생각을 하면 안 돼요. 반성할 생각하지 말고 다 드러내야 돼요. 사람들이 직장생활 처음 하는 사람이라든지 또는 개인적으로 교육을 받는 어떤 관계에 있어서, 만약에 영어 과외나 수학 과외를 할 때 우리 선생님이 얼마나 화를 잘 내는지를 알아서 선생님이 묻게 되면 애가 답변을 이런 식으로 하잖아요.

애가 먼저 짐작을 해서 “제가 이런 답을 하지만 선생님 보시기에 이것도 틀린 답이겠지요? 선생님, 공부 너무 못해서 죄송해요.” 라고 잔소리 듣기 전에 먼저 자신을 낮추고 들어가잖아요. 그런 짓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죄를 들춰내는 것이지 반성하라고 주께서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에요. 반성한다는 이것은 일종의 자기 의를 포기 못 하겠다는 인간의 본성이지요.

지금 주님은 반성을 원하고 회개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찾아내지 못한 네 원초적인 죄를 내가 찾아줄 테니 그냥 고맙소, 그냥 고맙게 여기면서 여기서 사시면 되는 거예요. 매사에. 자꾸 주님의 마음을 맞춰드린다는 생각을 그런 주제넘은 짓을 하면 안 된다 그 말이지요. 주님의 마음을 맞추려고 시도하는 이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훌륭하냐, 하는 것을 과시하는 용도로서 그런 식으로 타인을 다루잖아요.

그 태도를 감히 하나님 앞에 가지면 안 됩니다. 18페이지 보면, “교회란 무엇인가?” 19페이지, 사도행전 7장 38절의 말씀이 있는데 거기에 무슨 용어가 나오느냐 하면 ‘광야교회’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구약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구약에 교회가 없는 이유가, 교회는 모든 인간은 구원될 수 없음이 확정되고 난 뒤에 그때 나타나는 것이 교회거든요. 교회는 그냥 부르심을 입었다. 그렇게 보면 돼요. 원어가 어떻고 그런 식으로들 하는데 그냥 쉽게 말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호출하는 거예요.

호출할 때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호출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었다고 규정된 사람을 호출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호출할 때는 나는 이미 죽은 자로 규정되었다, 라는 사실은 호출받아야 알 수 있는 사실이에요. 호출받지 아니하면 ‘뭐 가능성을 보고, 나의 탤런트 보고 했겠지’ 자꾸 이런 생각을 해요.

그게 천주교의 교리거든요. 천주교의 교리가, “인간은 타락했지만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래도 거룩고 의와 성품의 씨앗은 남아 있다.” 그게 천주교 교리입니다. 그래서 천주교가, 불신자도 천당 간다, 하는 이야기를 자꾸 하는 이유가, 본인이 아직 몰라서 그렇지 나중에 연옥에 빠지면 그때 정신 차려서 ‘아이고, 잘못됐습니다.’ 하고 회개할 때 그래도 얼추 착한 사람들은 천국으로 보내준다는 거예요. 그러니 천주교는 천국이 뭔지 몰라요.

천주교는 뭐냐 하면, 지옥 갈 인간들이 구상해 낸 천국을 천주교는 천국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지옥 갈 인간들이 지옥을 생각하니 너무 암담하잖아요. 그래서 지옥에서 빠져나와서 착한 사람들끼리 모인 단체를 염두에 두는 거예요. 그것을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부를 필요도 없지요. 자기가 알아서 양심 가지고 성당 나오면 되니까.

그러면 천주교 말고 기독교는 뭐냐? 기독교도 똑같지요. 똑같은 거예요. 기독교가 성경대로 하는 것, 복음대로 하는 것을 왜 무서워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불러준 사람이 몇 명 안될까 봐 걱정이 되는 거지요. 만약에 어떤 교회 교인이 천 명이 된다면 그중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진짜 성령 줘서 불러낸 사람이 두 명이라면 결국은 계산해보면 998명을 다 돌려보내야 되잖아요. 그 일을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거 해버리면 돈 내서 지은 예배당 이 큰 것이 텅텅 비게 되니까요. 이것은 자동적으로 비대면 예배가 되어버리지요. 목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도 택한 백성만으로 해서는 안 되고 택하지 않은 사람들도 복음을 전하면 혹시 아느냐, 택해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는 그 자체가, 그 사고방식 자체가 본인이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들통 낸 겁니다. ‘아, 내가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설명하고 싶은 것은 광야교회라는 것, 스데반 집사가 광야교회라고 했는데 스데반집사님이 그 이야기할 때 근거가 19페이지에 보면 사도행전 7장 51, 52절에 나와 있어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그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선지자나 의인들을 죽였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 내에 하나님의 진짜 신약에서 말하는 성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들은 오히려 이스라엘한테 죽임을 당한 식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전개되었다는 거예요. 그 이스라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 의인들을 가지고 광야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스데반집사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런 설교를 한 것은 그들에게 회개하고 구원받으라고 설교한 것이 아니고요. 교회는 주님의 손에 달렸지 인간들이 땅에서 어떤 형식을 갖춘다고 교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데반집사는 명확하게 이야기한 거예요.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아주 적절한 조치를 당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최후의 설교에요. 광야교회 이야기하고 돌아가신 겁니다. 돌아가셨다는 말보다는 이 땅에서 떠난 겁니다. 떠날 때 뭐라고 했겠어요?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떠나겠지요. ‘그래 내 말대로 그대로 됐네.’ 하고 떠난 거지요.

광야교회의 의미는 뭐냐 하면, 19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나오지만 예수님이 살해당했다는 그 사실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일시적 흥분의 발로가 아니라 이것은 주님께서 교회 되게 한 주님의 원칙, 주님께서 거기에 집어 넣어준 필연적 원리원칙이 되는 거예요. 일시적인 흥분의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인 유대인들도 일시적인 감정의 흥분의 발로가 아니고 그래야만 한다는 거예요. 성도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수모를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시간적으로 거꾸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게 20페이지에 나옵니다. 위에서 네 번째 줄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었다는 입장에서 구약을 시간적으로 거꾸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보니 다음의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즉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당한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러 선지자가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행 7:1-53).”겁니다.

그래서 20페이지 중간에 “스데반은 이것을 통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자기와 자기 동료들의 무리라고 규정하고 구약의 이스라엘을 광야교회라 불렀던 것이다.” 이걸 광야교회라 했다는 말이지요. 이걸 몇 년도에 썼다고요? 1987년도 5월.

그러니까 20페이지에서 광야교회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이 다 끝났을 때 교회 이름이 광야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핍박을 받고 목숨을 잃은 자의 무리. 스데반집사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이나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를 지칭하는 것이나 어떻습니까? 똑같잖아요. 다 어디서 나왔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똑같은 운명, 똑같은 처지에 오늘날 성도들이 놓여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성도들이 뭘 하고 안 하고 전혀 상관없이 구원받은 거예요. 착하고 안착하고, 그것은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구원에 착하고 안 착하고 그것은 전혀 상관없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할까, 하고 천국 백성 되는 것하고 아무 상관 없는 거예요. 그냥 너 있는 자리에서 주님이 당한 핍박이나 맞아라, 그거예요.

그래서 21페이지에 보면 출애굽기 19장 4절에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를 업어내었다. 이 독수리 날개로 업었다는 것은 독수리 날갯죽지에 얹혀서 구원된 거예요. 독수리 날개는 요새 말로 하면 드론쯤 되겠지요. 드론에 얹혀서 구원된 거예요.

그렇다면 구원의 주체자가 성도 본인이 아니지요. 본인의 행실 이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거지요. 드론에 얹혔으니까. 드론은 오늘날 같으면 성령이지요. 드론에 얹혀서 구원된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을 성령이라 합니다.

22페이지에 밑에서 열째 줄,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뽑아 세우시고 법궤와 통해 그들과 함께 고난의 길로 나서시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떨기나무와 불꽃, 시내산의 뇌성과 번개, 모세의 십계명, 불기둥과 구름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손수 동원하시거나 또는 그 피조물의 형태로 자기를 표현하시는 방식이 되시니……” 천사를 보낸 거지요.

“……보이지 않고 영원하신 분이 시간적이고 제한적이며 유한한 것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이게 바로 광야교회의 구성환경입니다. 광야교회가 독수리 날개를 타고 구원받는다 해서 성도 어깻죽지에 갑자기 천사의 날개가 돋아나서 추석 명절에 집에 가다가 차가 막히니까 날개 펴서 ‘불신자들 고생해라. 나는 천사처럼 날아서 고향에 갈래.’ 이런 식은 없어요.

만원 버스에서 같이 고생하고 심지어 차표도 못 구해서 발 동동 구르고요. 이 피조세계의 혹독한 삶에 그냥 갇힌 채로 자신의 광야교회 됨을 다 드러내는 겁니다. 특별혜택은 일체 없습니다. 특별혜택은 없어요. 봐주는 것도 없습니다. 이게 광야교회에요. 그러니 교회가 굉장히 광야스러워요. 황폐한 모습이지요.

23페이지에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사실 안식일은 인간이 범죄 한 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체제로 재정비되어 계약의 형태로 십계명 속에 주어진 것이다.” 시간이 계명 속에 들어온 겁니다. 시간이 계명 속에 들어오게 되면 모든 시간은 계명과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율법을 위한 시간의 흐름’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23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 “안식일의 취지는 제7일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전 날에 다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제 7일을 쉼으로써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 상대에 놓여 있음을 확인하고 자기를 위한 삶에서 해방된다. 결국 예배도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6일의 노동 가운데서 인간의 연약과 죄 때문에 자신들은 새 창조의 과업을 수행하지 못했음을 안다.”

날마다 매일같이 6일 동안 일하면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는 것이 결코 나의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6일 동안 체험을 하라, 그 말입니다. 그리고 7일에 희망을 두고. 안식일의 그 시간이 나중에 신약에 오게 되면 그 모든 율법을 누가 이루십니까? 예수님이 이루었지요.

예수님은 안식일을 이뤘잖아요. 그러면 안식은 언제냐, 가 아니라 안식일은 누구십니까, 에요.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나를 구원할 수 없는, 오히려 구원을 훼방질하고 방해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아셔야 되는 겁니다.

그게 23, 24페이지 이야기에요. 그다음에 28페이지에 보게 되면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예수님은 3년 동안 열두 제자를 철저하게 데리고 다니셨는데……3년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신 것은 제자들의 자질에 기대를 걸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인간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자격자가 못됨을 선택을 통해서 만방에 알리기 위함이다.”

제자들이 자기들이 예수님의 최측근이라 했지만 그게 구원받는데 아무 소용없었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자들을 옆에다 두고 계신 것이었어요. 34페이지, 진도 나가는 즐거움이 있어야지요. 위에서 네 번째 줄, “성령론적 창조론은 이제 기독론적 성령론으로 성령께서 인간 역사에 직접 관여하는 바탕이 된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독론적 성령론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중심의 성령론을 말하거든요. 성령론적 창조론은 뭐냐 하면,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 창조세계가 성령님의 주관하에 있었다는 것이 성령론적 창조론이에요.

창조를 이야기할 때 예수님 이전에는 성신을 집어 넣어서 설명을 해야 된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게 시편 104편 31절의 말씀,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찌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찌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성신의, 성령의 활동인데 그 성령의 활동을 영광의 보증금 또는 선불금, 먼저 값을 치렀다는 거예요, 값을 치르고 그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주가 되게 하심으로서 먼저 성령을 받은, 보증금을 받은 자만이 그리스도 중심으로서 새로운 세계로 만들어진다. 그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 교회에만 주께서 일하는 곳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도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렇게 해서 35페이지에 새로운 피조물이 나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그냥 해방자에요, 해방자.

어떤 해방이냐? 밑에서 네 번째 줄에 “죄로부터 해방”이에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 6:11) 죄로부터 해방이라는 이 사실을 우리가 전파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거예요. 죄로부터 해방을 이야기 안 하면 핍박을 받을 일이 없잖아요.

“죄로부터 해방이며,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자유함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 이미 죽었어, 하고 같은 말이에요. “마귀로부터의 해방이며” 마귀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마귀를 편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집 살 때 귀신들린 집을 헐게 사세요. with a 귀신, 이제는 귀신과 함께 사는 삶. 여기도 각 방마다 귀신들이 많이 살고 있지요. with a 귀신. with a evil, 악마와 더불어 사는 삶. 아주 해방감으로 살 수 있는 거예요. 직장 가면 귀신들이 많잖아요. 직장상사부터 해서 전부 다 귀신들이잖아요.

그걸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상사가 무슨 이야기 하거든 ‘아멘 믿습니다.’ 이렇게. 그다음에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귀신, 마귀들은 세상 문제 가지고 우리를 쫄게 만들지요. 주눅 들게 만들고 ‘너는 이제 큰일 났어. 너 이제 인생 망쳤어.’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그런 이야기와 더불어 즐기면서 살 수 있어야 돼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애 키우는데 “엄마, 성적이 또 내려간 것 같아.”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즐겁게 들을 수 있어야 돼요 . “학생회장 떨어졌어.” “잘 떨어졌어.” 그런 이야기를 즐겁게 듣고 할 수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모든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가 자유인이고 해방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벌어진 일이에요.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멀리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러니까 이런 정신이 갖추어져 있다면 구태여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선교사로 갈 필요도 없고 국경 없는 의사회 그런 일 안 해도 상관없습니다. 왜? 가까운데도 다 마귀 일인데 굳이 마귀를 찾겠다고 멀리 남수단까지 가서 톤즈 보고 울지 말라고 할 필요도 없고요. 그렇잖아요. 꼭 밀림에 들어가야 마귀를 만나요? 밀림에 있는 마귀는 진짜 토속종교에서 말하는 귀신이에요.

토속종교에서는 주로 밀림에 귀신들,마귀들이 많아요. 밤에 들짐승 우우우우~ 하고 우는 소리 들리지요. 귀신은 바로 가까이에 있어요. 귀신과 결혼했고 귀신과 함께 자식을 낳았고 귀신과 함께 직장생활하고, 그 모든 곳에서 전부 다 귀신들과 함께 살잖아요. 친밀한 귀신, 오늘 강의제목을 친밀한 귀신이라고 할까?

41페이지에 보면 초대교회는 뭐냐? 열한번째 줄에 “초대 교회에서 떡 떼는 일이나 주의 만찬은 같은 의의를 지닌다. 예수님께서 처음 한 덩이의 떡에서 조금씩 12조각을 떼어서 제자와 함께 식사를 한 것은(마 26:26) 이로써 우리 모두는 원래 하나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보여주신 행위인 것처럼 초대교회는 이 만찬의 예식을 행하므로 우리는 모두 교회라는 한 덩어리의 떡에서 나누어진 한 뿌리의 형제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초대교회에서 주의 만찬은 예수님께서 처음 한 덩어리의 떡에서 조금씩 열두 쪽을 떼어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한 거예요. 이로써 우리 모두는 원래부터 하나에서 출발한 겁니다. 따라서 단독적으로 자기를 떼 내면 안돼요. 떼 내서 나는 해방되었다,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진짜 귀신들이 와서 막 팹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채로 마귀로부터의 해방, 귀신으로부터 해방, 죄로부터 해방이지 단독으로 내가 떼어져 나와서 덤벼라, 이런 식으로 싸우면 진짜 덤빕니다. 자기만 얻어맞지요. 단독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연결된 상태에서 마귀로부터의 해방,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너무 기분에, 감정에 취하면 안 됩니다. 사실이 중요한 거지요.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

45페이지 아홉째 줄에 “고난이 깊으면 깊을수록 주님을 더욱더 잘 알 수 있다.또한 하나임을 인식한다(행 7:54-60).” 고난, 세상과의 차이 남을 고난이라 합니다. 고난은 고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몸 아프고, 힘들고, 생활비 없고, 그게 고난이 아니라 세상과의 깊은 마음이 통하지 않는 상태, 말은 주고받는데 각자 자기 말하는 상태, 그런 상태입니다. 모닥불 피워놓고 새벽까지 이야기하는데 각자 자기 이야기하고 나중에 쓰러져 자는 상태,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그게 고난이에요.

그래서 수십억 재산 가져도 고난 받을 수 있어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0절이지요. 사도바울이 이런 말 하니까 자기가 고난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이걸 조선일보에 한번 내 볼까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불교의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해가 되지만 이런 이야기는 교회 다니는 사람도 이해 못해요. 예수 믿는 사람은 이해하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은 이해 못 한다니까요. 교회 다니는 사람은 “등록하시면 천당 갑니다.” 그런 것은 이해해요. “성만찬 하시고 세례받으시면 천당 갑니다.” 그런 것은 이해하는데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이것은 딱 봐도 뭡니까? 신내림이잖아요, 신내림. 이거 신내림이에요.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뭐 진짜 등짝에 누가 붙은 것 같아요. 성령이 붙어 있잖아요.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뭐 우리 몸에 기껏 나타나 봐야 알레르기 반응 같은 것, 두드러기,이런 것 나잖아요. 종기. 그런데 그것 말고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생활 합니까?” 또 이렇게 아까 강의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 까먹어 버리고 “그러면 우리는 이 생활을 어떻게 실천에 옮깁니까?” 이렇게 하는데 제가 분명히 하라, 하지 말라, 하는 그것을 하지 말라 했지요.

이것을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라, 하지 말라, 그것은 구약식이고요. 이것은 구약이 아니고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각오하라, 이 말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날 때 기뻐하고 좋아해라, 춤춰라, 그 말입니다.

53페이지 드디어 ‘1. 창세기와 한국교회’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물입니까 굉장히 맛이 오묘하네요. 주의 생명이 같이 있는 생명수에요? 열한번째 줄 “첫번 안식일은 하나님의 하신 일에 하등의 하자나 잘못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날이다. 만약 이후에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인간의 책임임을 아울러 말해준다.”

첫 번 안식일, 첫 번째 안식일이 생긴 이유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들어놨기 때문에 만약 그 이후에 조금이라도 창조에 잘못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은 인간책임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인간을 마지막에 만든 거예요. 왜냐하면 만약에 인간이 잘못을 해버리면 마지막 창조된 모든 것이 와르르 다 무너집니다.

게임에 보면 카드쌓기 하는 게임 있지요. 카드를 쌓는데 위는 건드려도 괜찮지만 밑에 있는 것을 빼버리면 와르르 다 무너지잖아요.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하는 것은, 이 세상은 인간과 더불어 소멸되어야 될 세상이다. 인간이 자기가 잘못해놓고 이 세상 환경이 어떻고, 온난화가 문제가 되고, 탄소발생률이 문제가 되고, 이런 식으로 자꾸 자기가 이 세상에 대해서 책임져야될 것 같은 생각을 하는 자체, 수습이 안 되는데도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허겁지겁 수습하자, 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예요. 수습하자.

54페이지, ‘창세기와 한국교회’ 이런 식으로 제목을 붙인 이유가요, 이 책 제목이 ‘성경과 한국교회’잖아요. 원래 제목이. 이게 뭐냐 하면, 창세기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한국교회는 이렇게 간다. 서로 대비하기 위해서 해놓고 본론에 들어가면 ‘1. 창세기와 한국교회’ ‘2. 출애굽기와 한국교회’ 해서 마지막 요한계시록까지 ‘요한계시록과 한국교회’ 이렇게 설정한 겁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볼 때 성경을 먼저 보고 봐야 된다. 그 말입니다. 54페이지 중간에 보면 “생명나무는 먹을 수 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선악과를 알게 되면 창조행위가 흙으로 돌아가서 무효가 된다는 거예요. “먹으면 흙으로 돌아가 창조행위가 무효가 되고 만다.” 그러니까 선악지식에 대한 금지만 부각이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게 하시는가 하면 마귀를 잡기 위함입니다.

모든 것을 허용하되 선악지식만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부각함으로 말미암아 마귀를 잡아버리는 거예요. 왜 마귀는 선악지식을 아니까요. 거기에 도전했으니까요. 그래서 마귀는 인간을 인질로 잡아버렸어요. 선악과를 알게 해서 하나님이 날 치고 싶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만든 인간을 치는 꼴이 되니까 이래도 좋으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꺼번에 다 잡습니다. 악마와 그리고 그 추종하는 인간들을 다 잡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왕이 되게 하고 그 왕을 잡는 새로운 왕이 등장함으로써 그때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왕국이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는 나라가 등장하는 거예요. 마귀가 그 짓 안 했으면 하나님 나라, 라는 것은 없지요.

마귀가 그 짓 했기 때문에 마귀 나라 왕국을 치는 요건 하에 생긴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요. 하늘나라라고 다 하늘나라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 되는 바탕이 인간이 범죄해야 된다는 것이 하나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때부터 창세기에 죽 나오는 것이 뭐냐?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거예요.

56페이지 제일 위에 언약이 등장하는데 너는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라는 겁니다. 왜? 인간적인 핏줄이나 출생이 아닌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할례 언약이 등장하는 거예요.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인간의 핏줄과 무관한 자만이 은혜의 땅에서 번성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7이라는 창조 너머에 있는 추가적인 하루 1, 2, 3, 4, 5, 6, 7을 부정해버리는 그다음의 하루 그게 8일, 그 8일은 육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핏줄, 인간의 남성 생식기의 껍데기를 잘라버리니까요. 인간의 핏줄을 부정함으로서 생겨나는 나라, 할례받는 자만이 가능한 나라 그게 하늘나라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라든지 모든 이야기가 항상 부정한 것을 더불어 이야기해요.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아먹었다. 부정이지요. 부정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그 부정한 자에게 추가적인 은혜,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서 자기 아버지 어머니와 형제들을 다 살렸더라. 항상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세상 나라를 뭉개고 천국이 오는 거예요. 천국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뭉개는 작업을 통해서 천국이 생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나라라는 것이 꼭 필요한 거예요. 우리 육이라는 게, 육의 품성이 꼭 필요한 거예요. 그다음에 63페이지 ‘2. 출애굽기와 한국교회’ 오늘 강의를 들으시는 여러분은 오늘 이 두 시간을 통해서 성경 다 떼는 거예요.

63페이지 중간에 보면 노예를 만들어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노예를 만듭니다. 노예를 만드니까 히브리인들의 특징은 이 세상에 주인공이 아닌 자가 되어버렸어요. 이 세상에 종속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어요. 이게 의미가 굉장히 깊은 건데요. 이 세상 주인이 따로 있고 억지로 그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 될 노예가 또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느 쪽을 구원하느냐 하면, 그 노예를 주인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 주인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자를 새로운 나라로 만들어버리면 새로운 나라를 통해서 이 세상을 유일한 세상으로 간주했던 자에 대해서 공격이 가능해져 버려요. 그들에 대한 심판이 가능해지지요. 그래서 언약 맨,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립니다. 노예의 특징은 뭐냐? 이미 주인에게 시달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냥 언약의 하나님만 쳐다볼 수밖에 없어요. 자기 힘으로 사는게 아니지요.

64페이지 밑에서 아홉째 줄에 “하나님께서 히브리민족을 끄집어낸 것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차원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3장 1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히브리민족을 끄집어낸 이유가 그들 구원 위주가 아니고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것은 자기가 지성으로 이성으로 깨달은 그 하나님이 아니고요. 실제로 자기가 이 세상에서 처참하게 망가지고 눌리는 그 체험을 의도적으로 유발하신 그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겁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이렇게 고생하게 하신 그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요. 이것은 웬수잖아요, 웬수. 자기를 망하게 하고, 자기 자신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살 희망과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린 그자를 자신의 구원자로 섬기는 겁니다. 마치 다윗이 밧세바를 만나고 난 뒤에 ‘밧세바 네가 없었으면 나의 구원은 없다’는 식으로. 내 아들 솔로몬도 없었다, 하는 식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65페이지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위에서 두 번째 줄에 봅시다. 제가 책을 구성하면서 성경과 한국교회라고 했지요. 성경 이야기하고 그 뒷부분에 한국교회는 이 성경과 완전히 다른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대비시켜서 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노예같이 힘든 경제구조에서 돈의 압력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을 이용하려 든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면 여호와를 다시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짓을 교회 교인들도 그대로 하고 있는 겁니다. 십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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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9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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