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특강 210824a 로마서 8장 1절(당첨) - 이 근호목사
세종특강 210824a 로마서 8장 1절(당첨) - 이 근호목사
오늘은 , 이 책을 가지고 두 시간동안 다 하겠습니다. 제목이 ‘정죄함이 없다’인데,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결코 저주가 없다, 더 이상 심판이 없다는 말이에요. 어떻게 심판이 없는가? 결코. 결단코.
한번 적어볼게요, 책들이 없다니까. 결코, 결단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단언하건대’, 하나님께서 확정짓기를 결단코 ‘정죄함이 없나니’. ‘저주가 없나니’, ‘심판하지 않으니’ 또는 ‘지옥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라는 뜻이에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이게 로마서 8장 1절에 나온 말씀이죠. 이것을 가지고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거예요, 기쁜 소식. 인류가 또는 인간이 이 세상을 살면서 유일하게 기쁜 소식이 뭐냐 하면 죽고 난 뒤에 결코 너희를 지옥에 보내지 아니하리니 또는 네가 이 땅에서 무슨 짓을 했던 간에, 어떤 우사를 당하고 어떻게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고 네가 교도소를 몇 번 들락거리던 일체 묻지 않고 이 하나님은 너를 죄 있다 하지 않으리니.
이게 무슨 소식이라 했습니까? 이게 바로 기쁜 소식이에요. 그리고 이야기하기를 ‘나는 결단코 정죄하지 않으리니’ 이것을 믿어라. 이걸 믿어라 이 말인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단언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단언하기를 “결코 죄에 대해서 묻지 않겠다고 내가 단언하노니 너는 그것을 믿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 이 기쁜 소식이 왜 사람들에게 안 먹히고 안 받아들여지는가. 왜 이게 안 믿어지는가. 누가 안 믿느냐 하면 본인들이 안 믿어요. 하나님은 너를 지옥 안 보낸다고 이야기하는데 인간들이 이 사실을 안 믿어요. 왜 안 믿느냐 하면 ‘이렇게 나쁜 짓했는데 나쁜 짓한 내가 염치도 없지. 어떻게 천국을 갈 수가 있겠어.’ 하고 본인이 안 믿어요.
하나님은 약속했는데 본인은 안 믿는 이유가 인간들이 평소에 어떻게 사느냐 하면 자기가 약속한 것만 믿어왔던 버릇이 있어서 그래요. 내가 나한테 이야기한 것만 믿고 남이 한 것은 때려죽어도 안 믿는 버릇이 있어가지고 하나님이 이야기해도 ‘나는 내가 생각한 것만 믿어.’ 하는 버릇 때문에 이 로마서 8장 1절, 그것도 말로 한 것이 아니고 문자로 로마서 8장 1절에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거부합니다.
그래서 ‘내가 안 믿는다.’를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내가 안 믿는다’ 안에는 나한테 ‘자기 잘난 맛’이 있어요. 내가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 버릇이 있어가지고 나는 어찌됐든 간에 다소 착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 했다, 라는 이러한 시도의 가치를 나는 쥐고 싶다는 이런 것이 있거든요.
인류의 조상 아담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지 마라 했는데 선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었어요. 선악을 아는 지식은 네가 가질 필요가 없다 했는데 그것을 따먹었고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오다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묻지 않겠다는 이것을 믿지 못하는 겁니다. 이미 자기가 선악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문제가 뭐냐 하면 결국 이것을 믿어야 되는데 내가 안 믿잖아요. 그리고 스스로 나를 안 믿고 주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위인들은 아담의 후손 논리에 의하면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아담 자체가, 인류의 조상이 선과 악을 알아서 스스로 자체적으로 선한 사람 되어서 천국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 후손들이거든요, 그 후손들.
내가 완벽하게 살아서 완벽하게 산만큼 내가 잘났다는 사실을 나는 포기 못하겠다는 그런 성질은 아담의 후손들이 다 갖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야기한, 하나님이 이야기한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가 먹히지 않는 거예요. 이것이 먹혀들어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강의한 것을 이야기하면, ‘결단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것을 믿으라고 하지만 이것을 믿을 위인은 인간치고는 있다, 없다? 아무도 없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안 믿습니다.
이 말은 “다시는 너에게 어떤 질책이나 잔소리라든지 네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다.”라고 아무리 하나님이 이야기해도 인간은 “좀 따져 주세요, 왜?” 이런 식이에요. 좀 따져주세요. 나 자신 있어요. 나는 착실하고 바르게 살았다는 그 점에 대해서 누구한테 진짜 지고 싶은 마음 없습니다.
나는 내가 보기에 완벽하지는 않지만 노력은 다 했다는 사실 하나는 하나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거래합시다. 그 거래해서 저울에 답시다. 나쁜 일 한 것과 좋은 일 한 것을 저울에 달아서 나쁜 일이 내려가는지, 좋은 일이 내려가는지. 저는 자신 있습니다, 하는 식으로 선과 악.
나쁜 일은 악이거든요. 선은 좋은 일이잖아요. 이미 인간들이 선과 악을 알다 보니까 이걸 자꾸 밸런스를 맞추려고 하는 거예요, 밸런스를. 이 밸런스를 맞추면 나는 선하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이런 생각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이 착실하게 살았다는 것을 믿게 되지, 이런 주님의 약속은 안 믿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아무도 없다.’ 주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이 그 누구도,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로마서 8장 1절에 보면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되어 있죠. 여기 하나 드디어 추가 들어갑니다. 아무도 없거든요. 인간으로 태어나서 주님께서 아무리 배려를 해줘도 그걸 받아들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조건이 뭐냐 하면 ‘예수 안’.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럼 ‘예수 안에 있는 자’가 뭐냐. 교재 있으신 분은 p.10를 한번 보세요. 10페이지 제일 밑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오늘 교재대로 하겠습니다. 성경은 거의 안 볼 거예요. 교재대로 할 거예요. p.10 제일 밑에 뭐라고 되어 있던가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겁니다.’ 그겁니다.
한번 적어볼게요.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다. 그럼 그 전에는 뭐냐 하면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것은 가짜입니다. 이런 일은 없어요. 인간이 예수 믿는다는 것은 그냥 남들 보기에 믿는 척하고 있는 것이고 그건 신앙인 ‘코스프레’라 하죠, 흉내 내기, 모방하기. 교회 다녔으니까 믿는 사람이어야 신앙인이라고 간주해주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의식해가지고 “나 예수 믿어요.” 이런 이야기를 서슴없이 해요. 그러니 예수 믿는다 해도 예수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거 속아 넘어가시면 안 됩니다. 갑자기 조용해져버렸는데.
제가 분명히 얘기했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 아무도 없다 했죠. 아무도 없는데 교회 가면 사람들이 “나 예수 믿는다.”고 하죠. 그것은 예수 믿는 것 아니에요. 예수는 못 믿게 되어 있어요. 못 믿게 되어 있으면 “나 예수 못 믿어요.”해야 이게 신앙인이에요.
“나는 믿으려 해도 도저히 안 믿어집니다.”해야 이게 신앙인이지, 예수 믿는다 하는 것은 허세 부리는 겁니다. 남들이 나를 볼 때 어떻게 보겠는가를 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서 구라치는 거예요. 거짓말하는 거예요. 인간은 못 믿게 되어 있는데...... 주님께서 ‘예수 믿으라’는 말은 네가 못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 믿으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 안에서 예수를 믿는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고안한 겁니다. 보세요. 아무도 못 믿잖아요. 아무도 못 믿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뭐가 없다? 정죄함이, 다시는 죄에 대해서 묻지 않는 사람만이 어디 갑니까? 천국 가거든요.
하나님이 “나는 너희에게 죄에 대해서는, 네가 무슨 짓을 했던 간에 난 모르겠다. 묻지 않겠다.”는 그 약속은 약속대로 살아 있어야 되고 인간이 이 사실을 믿을 위인은 이 세상에 없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정죄함이 없다는 말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없는 데서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인간보고 닦달 내는 것이 아니고 예수 안에서 예수님을 믿는 것만 성사되기를 주께서 조치하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내 힘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를 자인하는 사람입니다. 인정하는 겁니다. 아, 내 힘으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가능한 게 아니구나, 인간은. 인간은 왜 예수를 안 믿는다 했습니까? 누가 잘난 맛에 산다? 나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심지어 나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교회 가서 목사님이 “예수 믿습니까?” 하면 “예! 믿습니다.” 하거든요. 예수 믿는 것도 어디에 포함돼요? 나 이렇게 잘났잖아요. 날 무시하지 마세요. 나는 예수 믿으라 하면 예수 믿고 하나님 믿으라 하면 하나님 다 믿고 하라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라고 결국은 자기 자랑하는 거예요.
오늘 마음 같으면 교재 하나씩 다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분명히 제가 언급을 했고 광고에도 라고 했는데 이게 강의 제목인 줄 알았지, 교재인 줄은 몰랐죠. 여기 p.10에 적어놨어요. 예수 안에는 ‘정죄함이 없다’ 너무 기니까 예수 안에는 그냥 ‘천국이다’. 천국에는 일체 우리의 행함을 묻지 않습니다. 네가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아요. 그냥 받아들여요.
그럼 ‘예수 안’이 있으면 반대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밖’이 있겠죠. 예수 밖에는 지옥이 되는 겁니다. 정죄함이 있어요, 예수 밖에는. 무엇을 정죄하느냐? 아까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따먹지 말라 했으니까 선과 악 가지고 저울질해서 선이고 악이고 따지는 모든 인간은 지옥 가는 거예요. 천국에 못 들어가니까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가는 사람 중에서 착한 사람이 많겠어요, 안 많겠어요? 많은 정도가 아니라 다에요, 다. 모든 착한 사람은 다 지옥 갑니다. 왜냐하면 어떤 깡패도 자기 자신을 나쁘다고 봅니까, 아니면 자기를 착하게 봐요? 깡패가 되든 어떤 인간이든 할 말이 많아요. 내가 이렇게 깡패된 것은 사회적 책임이 많다, 이런 식으로. 부모 잘못 만나 이렇다. 할 말이 많다니까요. 어떤 경우라도 핑계 없는 것 없고요. 변명 없는 게 없어요.
그래서 착한 사람만 지옥 간다고 보시면 돼요. 그리고 천국 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만 천국 갑니까? 자기가 착한 게 없음을 아는 사람. 한번 적어볼게요. 천국 가는 사람은 자기에게 착함이 없고 죄 밖에 없다. 그 죄가 뭐냐 하면 ‘나는 나 잘난 맛에 살아갔다.’는 이것이 죄에 포함되는 겁니다. “나는 눈만 뜨면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 그런 죄밖에 지은 게 없습니다.” 할 때 그 사람은 이미 천국에 온 사람입니다.
죄 밖에 없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가 가능한 겁니다. 아까 식사할 때 설거지거리가 한가득 나왔죠. 그러면 ‘설거지’라는 이 작업이 왜 필요할까요? 음식쓰레기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음식쓰레기가 있기 때문에 음식쓰레기가 있음, 있다는 이 의미가 ‘설거지 했다’와 결부되면서 ‘설거지가 필요하다’가 드러나겠죠.
주님께서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 죄가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있었다’ 이 말이에요. 죄가 있었다 이 말이에요. 아예 죄 안 지은 게 아니고 죄밖에 없었는데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따진다, 안 따진다? 일체 쉿! 일체 따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일체 따지지 않겠다. 그게 ‘예수 안’에서만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고 싶은데 예수 안에 있고 싶으려면 예수 밖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돼요. 예수 밖에 있다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이것이 이번 탈레반 사건에서 잘 나와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항공기 바깥에서 두 명 떨어졌죠. 그 사람들은 분명히 비행기 탔는데 날개에 탔어요. 시속 1000km 달려버리니까 그 기압과 온도, 속도감 등에 의해서 자기의 완력으로 그 날개를 붙들 수 없어요.
두 사람이 올라탔는데 두 사람이 떨어졌죠. 그럼 그 사람은 항공기 안에 있었던 거예요, 바깥에 있었던 거예요? 분명히 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땅을 떠난 것처럼 보이는데 가만히 보니까 그것은 항공기 바깥에 있었거든요.
교회는 나왔는데 교회 와서 장로, 목사는 다 하는데 교회 50년 다니고 교회에서 하는 헌금, 전도 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날개에 붙었어요. 예수 안이 아니고 바깥에, 바깥에 있었던 거예요.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천국과 안 통하는 창구에 바글바글하다. 은행 창구든 뭐 창구가 있을 것 아닙니까, 표 파는 데가 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고 난리도 아니에요. 뭐 세일하는 것도 아니고 바글바글 거기에 모여 있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나 보니까 그건 천국과 안 통해요.
방금 우리 강의한 내용에 의하면 천국은 결코 뭐가 없다? 정죄함이 없는 곳이 천국과 통하거든요. 그런데 천국과 통한다고 소문난 그 교회에 교인들이 굉장히 많은데 보니까 그 교회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르게 살면 천국 간다는 거예요. 이 성경 말씀대로 살면 천당 간다는 창구에요. 어떻게 됩니까? 그거 뭐 항공기 날개 위에 올라간 거죠.
비행기 안에 못 들어가고 비행기 날개 죽지에 전부다 붙어 있는 거예요, 그것도 빡세게. 십일조 했습니다, 뭐 이런 것 가지고 붙어있고요. 3대째 유아세례 받았습니다, 뭐 그런 거 가지고 붙들고 있는 거예요. 우리 할아버지 5대째 기독교 가정이다, 이런 거요.
그래서 p.10 밑에서 7번째 줄에 보면 “기독교 냄새가 물씬 풍기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 이것은 바로 기독교죠. 신앙이 아니고 기독교라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는 것. 제가 지금 분명히 몇 번째 이야기합니다. 내가 예수 믿을 수 있다, 없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여러분, 예수 믿습니까? 묻고, 믿는다면 여러분 로마서 말씀대로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외치는 창구. 그거 천국과 안 통합니다. 그 창구 막혀있어요.
그런데 막혀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왜 그리 거기 교인들이 많습니까? 이것은 평소에 예수 믿는 것을 자기가 악한 일로 보지 않고 무슨 일로 봅니까? 선한 일 하나 추가하는 걸로 보는 겁니다. 평소에도 착한데 거기다가 예수까지 믿어주니 이 얼마나 스스로 보기에도 대견스러워요. 아, 이 나이에 예수 믿어주는 게 어디야? 내가 봐도 되게 착해.
여러분, 목사 치고 나쁜 사람 봤습니까, 인상이? 거의 없죠. 교인들이 목사를 뽑을 때 인상부터가 점잖고 인자한 얼굴. 부처같이 생긴 얼굴, 인자한 얼굴, 그런 사람들을 뽑아요. 개척교회 말고요. 기존 교회, 이미 자본이 탄탄한 데, 전통 있는 교회에서는 뽑을 때 인자한 인상보고 그 사람 인품 보고 뽑는다고요. 거기다가 유학 갔다 왔는지 보고 뽑거든요. 그런데 그래놓고 자기들이 목사 잘 뽑았다 하는데 목사 잘 뽑는 것도 자기의 선행에, 자기 저울의 선함 재료로 추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카불 공항에 두 사람 떨어졌죠, 그러한 항공기 또는 수송기, 사람을 수송기에 실었잖아요, 그 수송기가 예수라면 수송기 안에 들어가는 사람과 비행기 날개 죽지에 붙어 있다가 결국은 떨어지는 사람, 이렇게 구분하고 있는데 안과 바깥은 결코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 안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겠죠. 그럼 예수 안이 어디에 있느냐. 이게 예수 안을 찾을 수가 없어요. 왜 찾지를 못하느냐 하면 한 쪽이 사라지게 되면 다른 한쪽도 같이 소멸되어 버립니다. 양말이나 장갑이나 한쪽 구멍 나면 다른 쪽은 어떻게 됩니까? 쓰레기통에 버려야죠, 멀쩡해도. 버려야 된다고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버림을 받았어요, 예수님께서. 그러면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납득이 안 되는, 이해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죠. 자, 다시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이해하고 납득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인간을 조상으로 둔 이상은 어떤 이야기만 이해가 됩니까? 지금까지 이야기에 의하면 어떤 이야기만 인간 세계에서 통합니까? 노력하고 바르게 살면 결국은 천국 간다는 이야기만 O.K.가 돼요, 오케이.
교회 와서 듣는 이야기는 이거에요. 예수 믿었으면 농땡이 부리지 말고 그 다음에 뭐하느냐. 예수 믿었으면 말씀대로, 말씀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말씀대로 그 다음부터는 빛과 소금이 되어서 착하게 살아라, 나오죠. 이게 인간들에게는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된다고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한 분이고 인간은 자기가 보기에도 추잡스러우니까 예수 믿으면 개과천선할거고 개과천선한다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뭐냐? 전에는 네가 개판같이 살았지만 예수 믿고 난 뒤에는 사회에서 지탄받지 않는, 그렇게 바르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수긍할까요, 안 할까요? 모든 인간들이,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모든 인간들이? 수긍이 되죠.
심지어 교회 안 다니는 사람까지도 저 사람 예수 믿고 난 뒤에 술 끊고 담배 끊고 전에는 돈밖에 모르더니만 이제는 남에게 희생하고 마을 일을 도와주고 야, 역시 예수님의 위력이 세긴 세다. 인간, 새 사람 됐네. 이런 이야기가 통하는 이야기에요. 이게 사람 대 사람끼리 통하는 이야기에요. 이런 게 통한다고요, 이런 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안 통했는데 무슨 희한한 일이,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말을 한다? 이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존경받았으면 예수 믿는 사람도 존경받는 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안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미워했을까요, 안 미워했을까요, 마지막에? 배신했죠. 제자들한테도 배신당했다는 말은 제자들한테도 예수님은 도무지 이해 안 되시는 분이에요.
어떤 분이 절에 아주 열심인 사람인데 제 유튜브 설교를 들었어요. 제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고 제 아내 친구이기도 하고, 같은 동창생이니까. 불교에 열심인 사람이에요. 불교에 심취한 사람인데 자기가 알아서 선배님이 목사니까 설교 어떻게 하는가 들어봤어요. 들어보고 난 뒤에 이런 반응을 해서 제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 후배는 불교에 아주 심취한 사람이에요. 이거였어요. ‘예수보다 더 심하다.’ 그런 평은 처음 들었어요. 예수보다 더 심하다. 그러니까 이 후배가 원하는 것은, 예수는 마음만 먹으면 존경해서 예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있는 분으로서의 예수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제 유튜브를 들어보니까 이거는 그런 여지 자체가 없어요. 예수 믿을 여지가 전혀 없거든요. 예수 안과 밖이 이렇게 다른 겁니다.
p.12 보겠습니다. 교재가 있든 말든 나는 그냥 진도 나갈 거예요. 12페이지 6번째 줄에 보면 거기에 ‘브라운 운동’이라는 게 나와요. 물리학에 나오는데 아인슈타인의 발견에 기초가 되는 겁니다. 브라운 운동이라는 것은 꽃가루의 움직임을 통해 분자의 흐름을 포착해내는 물리학 실험입니다. 이걸 가지고 p.12 중간에 보면 ‘과학적 사고’라는 말이 나와요.
p.13 넘어가서 중간에 보면 ‘번개는 왜 칠까?’, ‘온도가 0도 이하로 내려가면 왜 물이 얼까?’ 이걸 물리학에서는 상전이(相轉移)라 하는 겁니다. 이런 호기심을 누구도 금지할 수가 없다고 되어 있죠. 이 말을 여기다 왜 썼느냐 하면 과학적 사고란 눈으로 보는 걸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해내는 게 과학적 사고라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교회에서도 간증 집회하잖아요, 간증 집회. 간증 집회라 하는 것은 예수 믿으면 이런 이득을 얻으니까 여러분, 예수 믿으면 손해 안 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예수 믿는 게 당신한테 이익입니다. 그게 간증 집회라는 거예요. 그 사람은 모르지만 그게 과학적 사고에요.
그런데 p.14 보겠습니다. 오늘 2시간 만에 내가 진도 다 나간다 했죠. 중간에 보면 (16번째 줄) 율법이 신에 대한 탐구를 금지해요. 이것은 정말 어려운 말인데 하나님이 주신 그 율법이 무엇의 탐구를 금지한다고요? 신에 대한 탐구, 신이 어떤 분이냐는 이 자체를 하나님께서 금지시켜버립니다.
“하나님 알아서 뭐할 건데?” “믿으려고요.” “네가 알아서 믿는 신은 신이 아니야. 신이 뭔데 너한테 포착이 돼? 이건 말도 안 되지. 신이 그렇게 만만하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만해요? 인간이 소주 3병 까먹고 신이시여~ 이러면 신이 막 나타나고, 하나님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는 거예요? 쫄병이 부른다고 왔다갔다 하는 그런 하나님입니까? 아니에요.
인간이 신을 탐구할 수 있는 어떤 자격이나 권한은 없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먹고 싸고 하면 돼요, 그냥. 그냥 하나님께서 살게 해주시면 그걸로 누리고 살면 되지, 신하고 거래한다든지 흥정할 생각하면 안돼요.
“하나님이 이런 걸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그럼 그거 안 주면 날 싫어할 거야?” 이렇게 나오면 뭐라고 이야기할 거예요? “하나님,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럼 아프고 발목 부러지게 하면 나한테 달려들 기세 같은데? 나한테 한바탕 해보겠다는 거야?” 이렇게 나올 때 여러분 뭐라고 이야기하겠어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p.16 위에서 2번째 줄에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요, 내가 이미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거예요. 내가 이미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이러면 믿을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죠.
자기 애가 있는데 엄마가 바로 옆에 있거든요. 그런데 그 아들이 하는 말이 “아줌마가 엄마인 것을 증명해보세요.” 뭐 이런 거. 아들이 있다가 “아줌마가 내 엄마가 되어야 될 10가지를 증명해보세요. 나는 지금 엄마를 탐구하는 사람인데 증명해보세요.” 이러면 “너 오늘부터 밥 없다. 너 혼자 살아라. 나 집에 안 들어간다.” 이렇게 나오면 “엄마, 그러지 마.”하고 울 게 아니겠어요, 분명히. 책 보는 거 다 뺏어버린다고 하면. 엄마, 잘못했어요, 이럴 거예요.
이미 엄마가 누구냐를 묻는 게 아닙니다. 엄마를 이미 알고 있는 입장에서는 굳이 ‘엄마가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이 안 나오죠. 그 관계가 믿음 관계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따질 필요 없어요.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p.16 14번째 줄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고 무용수가 그냥 춤추는 것이죠.’ 이게 또 무슨 이상한 말이에요.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고 무용수가 그냥 춤추는 거예요. 무용수라는 이 인물이 이제부터 춤이라는 것을 한번 춰볼까? 이래서 춤이 나오는 게 아니고 무용수가 그냥 몸짓을 하게 되면 그걸 춤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머리 나쁜 사람은 이해 안 돼도 할 수 없고요.
뭘 달성하고 따내는 게 아니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게 믿음이라니까요, 살아가는 게. 꽃게탕 먹고 잡채 먹고 이게 믿음이에요, 이게. 뭘 따져요? ‘믿습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예수님 믿습니다.’라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니까요.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지금 누구를 믿고 있다? ‘나는 안 믿고 있는데 예수 믿으려고 한번 애써볼게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너는 지금 누구를 믿고 있냐고 묻죠. 그럼 나는 나를 믿죠. 자기가 자기를 믿으면 그것은 예수 안에서 믿는 믿음이 아니고 그건 자기 자신을 믿는 거예요. 자기 자신의 잘남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p.16 밑에서 9번째 줄에 ‘믿는다고 할 때 그냥 믿음을 따로 분리시켜서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p.16 제일 마지막에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데 사도 바울이 하나님 만나기 전에는 내가 여호와를 믿는다, 하나님을 섬긴다, 이렇게 했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을 딱 만나고 난 뒤에는 내가 믿는다는 말 자체가 이게 말도 안 되는, 그것은 성립이 안 되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았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 안에 있다가 예수님 나타나니까 내가 예수 믿는다, 이러고 싶었는데 이게 아니고 이미 그전부터 자기는 예수 안에 있었던 거예요. 항공기 안에 있었던 거예요. 수송기 안에 있었던 거예요. 소급해서 전부다 소급해서. 태어날 때부터 아니 디모데후서에 의하면 창세 전부터 이미 택정함을 입은 거예요, 창세 전부터.
그러니까 인간에게 믿음이라는 것은 ‘믿지 말라’가 아니라 믿음 자체가 필요가 없어요. 믿음 자체가 필요 없으니까 신앙생활이 필요치 않은 겁니다. 왜 기존 교회가 천국과 안 통하는 창구인줄 이제 아시겠지요?
이런 곳에 사람들 많이 모였어요. 복 받으세요, 뭐 기도해서 응답받으세요. 아픕니까? 아플 때는 하나님 뜻이니까 기도하면 응답받는다는 온갖 그런 구호들, 1+1 상품, 그런 선전들 쭉 나와가지고 사람들은 자기한테 이익 있을까 싶어서 기도하면 효과 볼까 싶어서 난리도 아니죠. 그러나 백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그곳은 천국과 통하지 않습니다.
성경들은 다 갖고 있으니까 누가복음 2장 29절 누가 한번 찾아서 읽어보세요.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됐습니다. 읽으실 때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그다음에 “평안히” 했잖아요. 평안~~~~~히, 그걸 좀 한 7초 정도 평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평안~~~히.
그러니 복음을 아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내가 예수 믿기 전부터 예수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모든 것이 평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비행기 탈 때 덜컥덜컥 착륙하는 게 아니고 연착륙(soft landing), 조용~~~하게, 벌써 착륙했나? 안 했나? 보면 벌써 인천공항의 풍경이 쫙 보이죠. 그냥 활주로에 미끄러져 가는 거예요.
벌써 천국에 도착해가지고 그냥 천국에 도착해놓고 비행기는 아직까지 멈추지 않고 달릴 때 그게 바로 성도의 일생이에요, 성도의 일생. 성도의 일생은 이미 예수 안에서 연착륙했어요. 착륙해서 평안~~~히 가고 있는데 날짜가 8월 24일이라, 21년도. 그러니까 그 시간이라는 것은 별 의미 없죠. 내일 되도 25일 되도 마찬가지고 26일 되도 별 의미 없어요. 그냥 연착륙. 평안~~~히 그냥 맡기신 대로 그냥 착륙된 대로 가면 돼요.
한번 적어볼게요. 이게 누가복음 2장 29절, ‘종을’ 해놓고 그다음에 ‘평안~~~~~~히’ 그 다음에 ‘놓아 주시잖아요.’ 그동안 어디 묶여져 있었습니까? 그동안 어디에 묶였었어요? 나의 잘남, 나의 완벽함, 나의 철저함, 나의 위대함,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여기에 매여 있었던 거예요. 내가 나한테 매여 있었던 거예요.
죽어서 어디 갈지도 모르면서 개뿔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나를 포기 못 하고 살아갔던 거예요. 그런데 이제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예수님 알고 난 뒤에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군요. 언제까지요? 죽을 때까지요. 죽을 때까지 평안~~~히 그냥 쭉~ 가는 거예요.
마치 이 집 에어컨처럼. 에어컨 조용하잖아요. 지금 평안~~~~히 시원한 바람만 내놓고 있잖아요, 편안~~하게. 에어컨 문제 있으면 발로 막 차고 그럴 텐데 그렇지 않고 시원한 바람 주듯이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 시원한 바람처럼 계속 뿜어내면서 하나의 기계로서 예수님의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만 계속해서 뿜어내면서.
이 시원한 공기에다 말씀을 입혀보세요. 이 시원한 공기에다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를 실어가지고 이 가정을 계속해서 순환하면서 환기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생각만 해도...... 이곳이 뭡니까? ‘예수 안’이죠. 항공기 안이잖아요.
다시 p.16 중간에 보면,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고 무용수가 그냥 춤추는 것이죠.’ 이걸 말로 할 때는 이렇게 해야 돼요.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게 아니고 무용수가 그냥 ‘춤추는’ 동사죠. 그냥 움직이는 동사죠. 내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게 신앙이에요, 살아가는 자체가. ‘신앙생활 하자’가 아니라 신앙생활 하자고 덤벼드는 게 아니고 그냥 살아가는 자체가 신앙생활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안 믿는데 그 자체가 믿음이 돼요. 내가 굳이 안 믿어도 믿음이 되어버려요. 세상에 이런 편안~~함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p.17 7번째 줄에 보면, 두 살이나 세 살쯤 된 아이 엄마가 “이 컵 누가 깼어?”라고 추궁하면 “내가 안 깼어요.” 이렇게 나오죠. ‘누가?’라고 추궁하게 되면 갑자기 자기 방어가 딱 나와요. '내'가 안 깼어요.
p.18에 보면 중간에 로마서에 나오는 말씀인데요. ‘믿지 않고 행한 것이 죄이다.’ 그러니 죄라는 말은 나쁜 짓한 게 죄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이렇게 이끌고 가는 것이 안 믿어지면 그 전체가 죄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죄가 되었을 때, 예수님을 안 믿을 때 인간이 말하는 ‘의(義)’가 어디서 나오는가. 의는 스스로 만들어요. 이게 바로 죄입니다. 모든 의로움은 내가 정신 바짝 차려가지고 나쁜 짓 안 하겠다고 결심 먹었기 때문에 나오는 의로움이다, 착함이고 정의로움이고 선이고. 의는 스스로 내가 만든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따먹지 말아야 될 것을 따먹은 선악과의 후유증입니다.
그다음 p.21에, 어떤 스무 살 먹은 애가 화가 나서 순간적으로 칼 들고 사람을 찔러 죽였다. 야, 거참 나쁜 놈이다. 어떻게 사람을 살인 하냐? 그런 인간은 잡아서 지도 사형시켜야 돼. 온 사회가 분개하겠죠. 그런데 나이가 97세 된 할아버지가 화가 난다. 그런데 부엌에 칼이 있다. 경상도말로 정지칼, 표준말로 부엌칼, 97세 된 할아버지가 부엌에 있는 칼을 보고, 옛날에는 연상 여인이 많았습니다, 98세 된 자기 부인을 ‘네가 이렇게 남편을 무시하다니!’ 찔러 죽일 때 이 할아버지가 살인을 저지르겠습니까, 못 저지르겠습니까? 칼 들 힘이 없어요.
그래서 살인도 힘이 있을 때나 하는 짓이에요. 힘 빠지면 죄 짓고 싶어도 못 지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죄 지으나 안 지으나 상관없이 이미 마음속으로 화가 나고 분노하게 되면 성경대로 예수님 말씀대로 이미 살인죄에요. 주위에 쥘 게 없어서 살인 안 저질렀다 뿐이지, 살인자입니다. 힘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여건이 안 돼서 그런 겁니다.
그래서 어떤 철학자는 인간을 신인(神人)이라고 합니다. 신 같은 존재. 신인(神人)이란 뜻은 새로 등장하는 새로운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고 사람 인(人) 앞에 뭐가 붙었습니까? 사람 앞에 뭐가 붙어 있어요? 신(神)이 있죠. 인간이 인간을 볼 때 뭐로 본다? 신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이 신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안 믿죠.
다시 묻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뭐라고 봅니까? 작은 신이죠. 이미 자기를 믿는다는 말은 내가 신이잖아요. 내가 신인데 어느 신을 믿어요? 신을 이용하지. 그렇죠? 그러니까 누구를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그 자체가 인간에게는 없어요. 누굴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것은 인간에게 없고요. 스스로 구원하고자 하는 의지만 인간에게 있어요.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자기가 자기에게 노력을 하고 절제와 관리를 철저히 해가지고 그래서 내 힘으로 따내기를 원해요. 누가 그냥 공짜로 주는 것은 본인들이 싫어해요, 본인들이. 자존심이 있어가지고.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말은요. 얼핏 들으면 굉장히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들리지만 따지고 보면 인간을 근원적으로 개무시하는 거예요, 인간을. 네가 어떤 노력을 해도 나는 너한테 책임을 안 묻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p.25에 아까 예수님 이야기 다시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밉상을 받고 죽으셨잖아요. 첫째시간 5분 남았는데... ‘예수 안’이라 하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바로 ‘죽음 안’이라는 뜻이에요. 예수님 자체가 사람에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죽음 안에 있는 자는 무엇을 얻는다? 영생을 얻는다, 죽음 안에서.
죽음 안에 있는 자는, 내가 이미 죽었다고 여긴 사람에게는 내가 일체 묻지 않겠다. 죽음 안에서, 십자가 죽음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일체 내가 너에게 어떤 죄도 묻지 않겠다. ‘십자가를 믿습니까?’가 아니라 네가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을 네가 그것을 알도록 내가 해주겠다, 십자가 안에 있다는 것을.
그럼 이 죽음 안에 들어가야 되는데 죽음 안에는 무슨 수로 들어갑니까? 산 사람이 죽음 안에는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여기서 p.26에 무슨 단어가 나오느냐 하면 ‘당첨’입니다. 당첨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안에 있음이 당첨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예수님 죽음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에 대해서 p.27에 나옵니다. 여기 보면 들창코 문제가 나오는데요. 자신이 들창코냐 아니냐에 대해서 고민하는 아들이 있다 칩시다. 그래서 그 아들이 엄마한테 물어요. “엄마, 나 친구들이 들창코라 하는데 들창코 맞아?”라고 물을 때 엄마의 정답은 “너 들창코 아니야.” 또는 “약간 들창코야.”라는 것이 정답이 아니고 “너는 이미 죽었어.” 이게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저씨는 한 달 수입이 얼마에요? 500만원 됩니까, 안 그러면 그 밑입니까?” 그럼 그 답변은 “나 죽었어요.” 이게 정답이에요. 영생 얻는 기준, 천국 가는 기준이 예수님의 죽음,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 안 되게끔 죽었다는 그 사실을 내가 알게 되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예수님의 죽음 속에 함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죄 사함이 되거든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신앙인에게 유일하게 유효한 기준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뭐냐 하면 내가 얼마나 수입이 좋으냐, 얼마나 착하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나대신 죽었다는 그 기준이 신앙인에게 절대적인 기준이에요. 그 기준 말고 다른 것은 문제 삼을 필요가 없어요.
내 성적이 안 좋았다든지 당구 원래 300 치는데 50밖에 못 쳤다는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할 필요 없어요. 땅을 하나 샀는데 땅값이 내려간다든지 전혀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 기준 때문에 내가 존재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자기의 죽음 사건을 우리에게 전한다는 이야기를 했고요.
그 다음 이야기가 옛날 구약의 사울과 다윗 이야기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이야기, p.32에 있어요. 사울도 왕이고 다윗도 왕이 되잖아요. 그런데 차이점이 뭐냐 하면 사울에게는 약속이 없어요. 약속이 없고 다윗에게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 차이점이에요.
그래서 사울은 어떤 행동을 해도 버려져야 되고 다윗은 어떤 행동을 해도 그것이 용서가 되어야 돼요. 똑같이 나쁜 짓을 하고 그보다 더 나쁜 짓을 하더라도 한쪽은 그냥 내치고 한쪽은 무슨 짓을 해도 그냥 받아줘요. 왜냐하면 다윗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다윗은 약속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다윗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