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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10712b 부산강의 : [시편]40(24편)-판 바뀜자유게시판시편

20210712b 부산강의 : [시편]40(24편)-판 바뀜
(강의:이근호 목사)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개입을 유도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 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꼭 필요해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시편 24편에서 모든 만물은 자기 것이라 하는 거예요. 자기 안에서 내부적으로 순환되는 겁니다. 내 것이니까 내 안에 내 것으로만 순환시켜 버리는 거예요. 나의 요소만, 하나님의 요소만.

그러니까 천국에는 인간의 것이 없고 전부 다 누구 것이 되겠어요? 생명나무 것, 주님의 것으로 순환되게 만드는 것, 그걸로 유지되는 게 천국이죠. 거기선 철저하게 인간의 것들은 왜 천국에 올 수 없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 이야기할 때 포도원비유 나오지요. 인간의 것을 언급하는 거예요.

인간의 것은 일찍 노동했다고 해서 남보다 품삯을 더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것, 그렇게 되면 품삯을 인간의 노동의 양에 따라서 품삯이 그만큼 차등이 진다는 그것은 무슨 요소가 살아 있느냐 하면 인간의 행함의 요소가 살아 있지요. 그거는 외부에서 주는 게 아니고 그냥 무상으로 주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기회를 부여한 것밖에 안 돼요.

니가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기회 부여하고 거기서 실력 발휘하고 실력 발휘한 만큼 상급을 더 받는다든지 구원이 된다든지 너에게 특별한 보상을 주든지 그런 식의 계산은 이것은 바로 가짜에요. 원형이 원판이 아니에요. 주님의 뜻이 아닌 거예요. 원형은 하늘에서 땅에 내려왔습니다. 원형과 가짜의 대비, 철저하게 원형과 가짜를 대비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대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자로서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셔야 되겠지요. 그걸 함축해서 한 문장으로 표현할게요. “율법의 탄생과 소멸”이에요. 탄생, 소멸. 탄생하는 건 다 소멸하는 거예요. 태어난 것은 다 죽어요. 이것은 인간이 죄를 품을 때나 일어날 일입니다. 근데 여기에 누가 끼어듭니까? 하나님이 끼어들지요. 끼어든 그분이 원형이에요. 하나님이 원형입니다.

그래서 시편 24편의 내용의 완성은 하나님이 끼어듦으로서 판을 바꾸는 겁니다. 이게 오늘 강의의 핵심이에요. 판을 바꾸면 뭐가 등장하느냐? 여기에 우상이 등장하는 거예요. 우상의 특징은 소멸을 거부하는 거예요. 소멸되지 않는 하나님을 그들은 인간들은 믿고 싶어요. 하나님 좋아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가 소멸되지 않기 위해서 소멸되지 않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죽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그래서 니체가 신은 죽었다 할 때 본인은 정신없이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지만 그게 복음이에요. 신이 죽었다는 게 복음이에요. 죽은 신이 진짜 신입니다. 죽지 않는 신은 가짜에요. 죽지 않는 신은 무조건 인간이 만들어냈다고 지어냈다고 보면 돼요. 자기의 이상적인 모델로서 하나의 라이벌로 여겼다 보면 돼요. 인간에게 신을 라이벌이에요.

당신이 갖고 있는 것 나도 갖고 싶다. 이 욕망, 이 욕심을 신에 의해서 자극받은 겁니다. 그 자극 없으면 무슨 기도하겠어요. 그 자극 없으면 무슨 교회 나오겠습니까. 사람이 자기가 신이라는 방향 쪽으로 나갈 수 있는 그런 여지가 희망이 보일 때 그것에 자기 교회 나오는 노동력을 보태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수고의 대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수고 싶은 겁니다.

죽으려고 교회 오는 사람, 망하려고 교회 오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주여 저주케 하옵소서. 할렐루야 하고 교회 나오는 사람 없지요. 주님은 저주받았어요. 아버지한테. 그런데 인간은 딴 마음을 갖고 교회 나온다 이 말이죠. 판을 바꾸는 겁니다. 판을 바꿔야 여호와, 신, 예수 이 전체가 이게 바로 인간 판에 새겨진 우상적인 개념이란 겁니다.

인간 판단은 개념의 종합입니다. 개념은 어디서 생기는가? 움직임에서 생겨요. 뭐 움직이면 개념 다 집어넣는 거예요. 의미 다 주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를 고정시키고 판단자고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현상에 대해서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종합하게 되면 자신의 판단으로 정리가 되죠.

이 인간들의 논리의 순환에서 자기 부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는 죽어 마땅해, 이게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안 나오지요. 나올 수가 없어요. 이스라엘 백성에서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뜻을 전하니까 다른 말로 율법을 주니까 이스라엘은 그 율법으로 자기 존재와 하나님의 이름,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니까 일치되고 결합되기를 원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판단으로 펼쳐진 이 체험의 평지, 지평에서 인간이 체험하지 못한 것을 겪게 하십니다. 이게 이스라엘 역사에요. 이게 오늘날 성도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예상 못한 이리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고마운 줄 알아야 돼요. 감사한 줄 알아야 됩니다.

인간이 예상한 것은 달성하게 되면 거기에 허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게 고작 이거야? 고작 이것 하려고?” 광고에 홈쇼핑에 에어프라이기 나오면, “그래 저거 갖고 있으면 튀김도 팔팔하게 살아 있고 좋겠어.” 그런데 막상 해보면 에게 이거야? 결국 이거에 내 목숨, 목숨까지 건 건 없습니다만 삶의 보람을 여기 걸었어? 모든 것이 허무와 실망으로 느끼죠.

그것은 일어난 일이 잘못이 아니고 그 일어난 일을 자기 임의대로 판단자 된 내가 잘못 판단하고 있었던 겁니다. 내 판단에 내 평가에 오류가 있었던 거예요. 오류가. 그것은 뭐냐 하면 분명히 자기가 이 땅에 탄생했잖아요. 탄생이 거창합니까, 그럼 출생으로 바꿉시다. 출생했잖아요. 출생한 것은 필연적으로 어디 가야 돼요? 출생을 무효화해야 돼요. 무효화 되는 그 과정 속에서 뭐냐? 언약이 나오게 돼있거든요.

그런데 인간은 탄생한 것도 살리고 언약을 지켜서 자기의 소멸과 죽음을 이게 나에게 해당사항이 없게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냥 살고, 영원히 살고 또 살고, 또 살고, 또 살고, 살고 싶어 온 거예요. 주님이 가는 방향과 다릅니다. 달라요. 주님은 자기 십자가, 다시 말해서 자기 죽음을 가지고 자기 죽음 관을 짊어지고 장고처럼, 장고 알지요. 장~고 지 관 질질 끌고 가는 사람 있잖아요. 저 뒤에 뭐 끌고 가. 보니까 자기 관이라. 항시 대기, 자기 개인용 택시를 항시 대기.

죄가 있어야 피의 실력이 발휘됩니다. 죄가 없는데 피만 믿으려고 하는 자체가 가짜에요. 그러면 우리는 관람자가 아니거든요. 저건 죄고, 이건 피다 하면 안 되고 죄의 자리에 우리가 들어가야 돼요. 죄가 뭐냐 하면 나를 살리는 것, 좀 어렵게 이야기할까요? 나의 이름을 유지하는 것, 나의 존재를 지켜내는 것 이 일을 우리가 주께서 하도록 이 땅에서 출생케 한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우리가 아담의 족속, 아담의 후손이잖아요. 아담의 후손 이것이 뭐냐? 판이에요. 이 판을 뒤집어버린 거예요. 뒤집기 위해서 아담의 후손으로 오셔서 빠져나가는 게 있어야 돼요. 아담의 후손이지만 아니었다. 그게 사도행전에서 사도가 전한 복음은 시편 24편과 관련돼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부활’ 우리가 교회 다니면서 평생 들었고 또 듣게 되는 이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깔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관람하듯이 취득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이 십자가와 부활이 펼쳐지는 한 마당, 그 새로운 판에 우리가 끼어들게 되면 바로 우상이라는 것, 신이죠. 신이라는 것이 죄악 된 신을 우리가 평소에 선택했고 사모하는 식으로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걸 알 수 있어요. 내가 원하는 신, 하나님은 전부 다 우상적이란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이 신을 믿음으로서 나의 탄생을 계속 지켜내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은 소멸하신 하나님과 다른 방향성이기 때문에 이게 우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우상을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신약성경이기 때문에 굉장히 함축적으로 이야기했어요. 탐심이 곧 우상이다. 그럼 탐심의 주인공이 어딥니까? 내가 탐심의 주인공이죠. 그러면 탐심을 유도하는 환경은 판, 오늘 제목을 한 자로 ‘판’으로 할까?

판, 이 세상 자체가 내가 나에게 미혹거리고 나를 홀리게 만들어요. 눈에 보이는 것, 신상, 신상. 만날 신상. 시즌 끝납니다. 80% 세일, 한 개 더 줍니다. 모든 우리 주변에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 다 나로 하여금 유혹거리고 미혹거리에요.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에 보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것이 없나니, 했어요. 이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아요. 왜? 이 세상에는 아버지 것이 없어요. 하나님 것이 없습니다. 그만큼 좋아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대로 하게 되면 누가 하나님의 성산에 오를 것인가, 누가 거룩할 것인가? 같은 이야기에요. 현재 우리 처지와 형편을 제대로 지적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는 것들에 탐심을 갖고 있다 이 말이죠. 탐심을 갖고 있으면서 문제는 어떤 게 우상스럽느냐 하면 탐심이 있잖아요.

있는데 이것을 뭐로 위장을 하느냐 하면 거룩으로 하나님의 고상한 것을 포장을 하는 거예요. 누가? 내가 판단하면서 계속 의미 주면서 그다지 나쁘지 않았어. 그래도 신앙에 선방했잖아,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 보세요.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도 많은데 자기 아이 굶겨 죽인 부모도 있는데 나는 애 하나 잘 키웠잖아.

하여튼 본인이 율법의 주인공 돼버렸어요. 율법을 새로 만드는 거예요. 어떻게 하느냐? 판을 뒤엎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상과 거짓 신과 결탁돼있는 채로 율법에 대해 잘못 판단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이 땅에 대조적으로 이스라엘 유대사회 속에 하나님께서 같이 끼어들어 같이 이 땅에 합류시켜버린 거예요. 그만큼 무시무시한 겁니다.

시험 치고 있는데 시험문제 낸 사람이 같이 옆자리에 앉아 시험 치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지는 시험문제에 대해서 커닝해보니까 주님 답변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어. 왜 저런 답변이 나오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사시면서 주님 사신 행적 자체가 뭐냐 하면 율법이에요. 새로운 율법입니다. 그 행적 자체가.

모세는 간음하면 간음죄다 이렇게 되잖아요. 예수님의 새로운 출제는 뭐냐? 마음속으로 간음해도 간음죄가 되는 거예요. 율법에는 네가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이런 내용이 없어요. 율법에 그런 내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주님이 안에서 문제 내는 거예요. 네가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찍어버려라. 그 다음 문제 보니까 더 센 문제가 나와요.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버려라. 이것 빼고 저것 빼고 알맹이 다 빼버리면……

그래놓고 마지막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이미 죽은 자 좀 뺀들 어때? 이미 죽은 자 눈알 좀 뺀들, 눈알 두 개밖에 없지만 그것 좀 뺀들 이미 죽은 자가 그것 뺀다고 더 죽는 것도 아니란 말이죠. 니 몸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라. 그걸 다른 말로 코로나 현상, 이래 보면 돼요. 코로나 두려워하지 말고 백신을 두려워하지 말고. 백신 맞아도 죽고 안 맞아도 죽은 잔데 이왕이면 꼭 맞으세요. 그래야 유도되니까. 내 죄가 유도되는 거예요. 참 오늘 좋은 것 배웠습니다.

내 죄가 있어줘야 피의 실력이 주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것이 확 올라오는 거예요. 드러나는 거예요. 사이다를 그냥 마시지 말고요. 사이다 맛을 알려면 한우를 구워줘야 사이다 맛이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용이 좀 더 들어요. 사이다 한 병은 천오백 원이면 되는데 한우는 200그램에 오만 오천 원.

진짜 존재는 탄생할 수 없다. 시편 24편 초반에 세상의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것이라 했잖아요. 그런데 그 여호와, 주의 이름인데 여호와가 탄생이란 경우를 겪을 것이란 것을 이스라엘 어느 누구도 상상도 못했어요. 어떻게 하나님이 태어납니까? 말도 안 되지요. 태어났다는 말은 없을 때가 있다는 말이거든요. 이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신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존하시는 그 하나님의 규정과 이게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지금 이스라엘과 동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이 아니고.

그러면 하나님은 이사야 45장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계속해서 감춰진 분이에요. 감춰진 그분을 사도바울은 이걸 비밀이라고 했어요. 영원 전부터 감춰진 그분이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너희들 가운데 하나님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뜻이에요. 내가 너희들이 아는 신학 실력 나도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 그것 다 배웠다는 거예요. 인간이 배웠던 신학 가운데 조직신학 가운데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거예요. 인간의 판단이 그래요. 인간은 뭘 보게 되면 그냥 받아들이는 게 아니고 판단을 통해서 받아들입니다. 자기의 선입견을 통해서 받아들여요.

지금 제일 난해한 것은 뭐냐 하면 이 십자가와 부활이 어느 인간도 예수님만 겪었지 다른 사람은 겪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에요. 겪은 적이 없는데 사도 바울은 뭐냐 하면 성령을 통해서 겪었다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지신 주님 안 보이지요. 부활 안 보이지요. 성령 안 보이지요. 그럼 보이는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겪었다고 이야기하는 사도 바울만 그 시대에 보이는 겁니다. 사도 바울만.

그러니까 일반인들이 구원받는 길은 예수님 당시나 그 이후나 구약 당시나 어떤 경우라도 다 막혀있는 거예요.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그럼 막혀있는 거예요. 구원은 막혀있는 겁니다. 막혀있으니까 답답하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안 막히도록 조작해내야지요. 가짜가 가짜를 만들어야지요. 조직신학, 성경신학 이런 걸 통해서 만들어내야지요.

그러면 오늘날 성령이 안 보이잖아요. 사도 바울은 자꾸 보이지 않는 것을 들이미는 거예요. 아까 강의한 것, 사람은 또는 사람의 이름은 어렵게 이야기하면 사람은 타인과 합치될 수 있는 그런 가지는 없어요. 방법은 없습니다. 그냥 타인에게 나의 주장을 강요하는 것 외에는 없어요.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부부도 마찬가지고 강요하는 거예요.

복종하면 내가 복종하는 것보다 더 내놓고 사랑하면 사랑을 내놔라, 이거지 뭐든지 내 행동을 항상 강요해요. 내 앞 길 막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지 말라는 거예요. 막지 말라면 헤어져야지. 그럼 또 손해니까 협조하라고. 막지 말고 협조하라. 내가 너한테 복종할 테니까 나의 나 됨에 대해서 당신 남편 된 자가 나한테 좀 협조하라.

그럼 따지고 보면 누가 누구한테 복종하는 거예요? 내가 너한테 복종할 테니까 네가 알아서 복종하라 이 말이에요. 어느 인간도 내가 있는 이상은 타인과 합치될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인간에게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우상이기 때문에. 기존의 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봅시다. 문제가 되겠지요.

여기에 시편 24편 4절 보겠습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가 성산에 이르지요. 거룩한 산에 오르지요. 거룩한 곳에 설 자가 이런 자지요. 그러면 여기에 마음에 청결하다는 판단을 누가 내립니까? 자기 마음 청결한 것을 본인 판단이 여기서 끼어들까요, 안 끼어들까요? 필연적으로 끼어들지요. 내가 끼어든다고요.

뜻을 허탄한 곳에 두지 아니한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내가 남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항상 나는 나를 껴안고 가야 돼요. 내가 나를 버리면 나는 안 돼요. 몰라요. 왜 안 되는지 모르겠지만 무조건 나는 심지어 지옥 가도 내가 나를 격려해야 돼요. “걱정 마. 요샌 그다지 뜨겁지 안 데, 지옥 불이.” 스스로 자기를 위로하는 것, 그걸 쉬지도 않고 계속 내뱉는 겁니다. “그만하면 청결한 거야. 뜻이 허탄한 데 두지 않은 거야.” 계속해서 이 율법을 자기와 연결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중간에 뭐가 들어가야 돼요? 십자가와 부활이 들어가야 하는데 십자가와 부활을 집어넣지 않고 내가 바로 이 율법과 시편 24편과 직결시키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점을 여러분이 아신다면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뭔지 알겠지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현재 내가 하는 그 짓거리, 율법과 나를 직거래한 것에 대해서 그걸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거예요.

율법은 네가 나서서 될 문제가 아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나의 구원이 아니고, 나의 구원이란 율법 구원이에요. 나의 구원이 아니라 피의 의미, 피의 가치, 하나님의 언약, 새 언약의 완성을 구원하는 겁니다. 여기다 자꾸 나의 구원을 집어넣으면 안 돼요. 이걸 잘라내야 돼요. 피만이 피의 효과만이 나에게서 튀어나올 때 그 사람이 바로 구원된 사람입니다. 피가 나올 그 발언에 대해서 지 구원이 나오면 안 돼요.

물론 이게 사실은 모든 교회와 기독교가 전부 다 구원파에요. 구원파 아닌 기독교가 없고 교회가 없어요. 이래야 이게 상품적 가치가 되기 때문에. 돈 받고 팔릴 교환, 상품적 가치가 있거든요. 소비자는 자기 소비에 만족하기 위해서 돈을 지불하잖아요. 교회도 마찬가지잖아요. 그렇게 돼버리면 주님은 상품가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다버린 것이고 그 내다버린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십자가에요. 그걸 베드로전서에선 뭐냐? 건축자의 버린 돌이에요. 그 버린 돌을 내가 찾아가서 가져오는 게 아니고 같이 눕겠다는 거예요. 주께서 누운 자리에 같이 누워 지내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미 탄생돼있지만 앞당겨 소멸 체험을 주와 더불어서 주께서 하게 하시는 겁니다. 말씀 앞에서 나를 소멸시키는 체험에 가담하는 거예요. 교회 왔는데 잘리고 교회 왔는데 왕따 당하고 교회 왔는데 무시당하고 집안에 말 한 마디 뗐는데 와르르 달려들고 직장 갔는데 직장에서 좀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고. 그럼 우리는 화가 나서 이 미친 것들, 하고 욕인 듯 욕 아닌 욕과 같은 미친 것들이라고 하지만 제가 어제 오후설교에 했잖아요.

남 보고 미쳤다하지 말고 네가 더 미쳤다는 것을 알아라. 더 미치고 살게 되면 세상 미친 것은 별 미친 것도 아니에요. 본인이 생각해도 남이 나를 그렇게 미쳤다고 하는 게 과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진짜 미친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인생을 살고 있는 거예요. 이게 사도 바울이고 선지자잖아요.

사랑과 성령은 누가 감당되지 않는다? 세상의 어떤 판단도 감당할 수 없어요.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요. 나는 너를 이렇다고 규정하고 싶어. 그 규정에 안 맞는 거예요. 규정지을 수 없어요. 성도를 규정지을 수 있는 인간의 준비된 기호는 언어는 없습니다. 남들이, 너 왜 인생 그렇게 사느냐고 묻거들랑 나도 모르겠다고 답변하면 돼요. 나도 몰라. 거기다가 한 마디 더 붙일 필요 없지만 혹시 복음 좀 아는 사람은 붙이세요. “주께서 아시겠지.” 그러면 상대방이, “또 주, 제발 좀. 주님 이야기 그만해라. 듣기 싫다.” 그게 복음전파입니다.

판을 바꿔나갈 때 율법은 주의 이름과 관련돼있고요 주의 이름에 율법을 준 것은 율법적 민족, 율법적 국가를 세우기 위함이에요.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으로 세우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한, 출애굽기 19장에 나오는 거룩한 민족이다. 명제가 하나 걸쳐놨어요. 이 명제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게 자기인 줄 알고 착각한 거예요. 주님의 명제거든요.

그 명제는 주님에 의해서 움직여나가는 겁니다. 그들이 겪지 못한 것을 겪게 하는 겁니다. 그들이 겪었던 것은 처절한 생존의 시도에요. 생존하기 위한 시도입니다. 복음, 복음해도 돈만 한 게 없다는 것, 이건 평생을 살면서 절실하게 느끼게 해요. 복음 잠시 잊어도 견딜 만 하지만 돈 없으면 못 견딥니다. 돈 없어봐야 아는데.

그 정도로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과 내가 모르는 실제 내 모습은 차이가 나요. 내가 세상과 완전히 한 통속이라는 것을 늘 나는 그것을 애써 감추지만 주께서는 애써 파헤치는 거예요. 특히 돈 없이는 살아도 자식 아픈 것, 자식 마음 아픈 것, 이것 못 견딥니다. “내가 대신 유치장 갈게.” 이건 서슴없이 나와요. 그 음주 운전 내가 했다고 할게. 팔십 넘은 할머니가 음주 운전했다고. 오십 넘은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음주 운전했다고 해. 주님 앞에선 그렇게 당당하다가 자식 앞에선 왜 그리 작아지는지. 그거는 DNA가 오십 퍼센트 할당돼있어서 생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착각은 뭐냐 하면 율법을 지킨 나가 곧 율법의 실현태, 실제라고 본 거예요. 내 안에 율법 들어있으니까 내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고 율법이라고 본 겁니다. 여기 자기부정이나 자기파괴란 있을 수 없어요. 그런데 주님은 홀연히 뭐하느냐 하면 이별했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 땅에 온 것은 사람과 이별하기 위해 온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와버리면 주님의 마음이, 성령이 주님의 마음이거든요. 고린도전서 2장. 주님의 마음이기 때문에 그것도 그냥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깊은 마음, 어떤 인간도 찾아내지 못한 깊은 마음이 성령이 우리 안에 와버리면 우리는 뭐가 없느냐 하면 주님과의 이별이 없습니다. 이별이 없음을 성도는 평생 동안 이걸 체험하는 거예요. 돈이 없어도 이별이 아니고 자식이 아파도 이별이 아니에요. 주님과 결별이 아닙니다.

내가 흔히 말하는 죄를 지어도 결별이 아니에요. 벌써 천국 생활이에요. 천국, 지옥을 내가 골라잡는 게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거예요. 열두 제자가 말씀 듣고 지키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러나 어디까지나 실습은 실습이고 실전은 달라요. 실습 백날 해봐도 실전, 다시 말해서 영원한 이별, 모든 인간과의 이별, 그 사건이 세 자로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 모든 인간과 이별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과 단절이죠. 빠이빠이 잘 있어라, 가버렸어요.

따라서 만약에 성경이 소설이라면 인간이 작위적으로 지어낸 거라면 예수님 떠나고 난 뒤에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 구원된 사람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구원은 뭐냐 하면 결국은 너와 나 사이 이별 없음이에요. 이별 없음을 이야기에서 먼저 전제조건이 내가 나와 이별해야 돼요. 내가 나를 포기해야 돼요. 포기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4절 보겠습니다.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이게 나와 결별해야 될 요건, 이유가 거기 있어요. 왜냐하면 이 말씀을 우리는 미련 없이 포기하지 않고 이걸 잡거든요. 잡아서 여기서 유사적인 율법 성취성을 내가 변명조로 내놔요.

이 정도하면 마음이 허탄한 것 아니죠, 하나님. 이 정도하면 청결 속에 속하죠. 이 정도하면 내가 거짓 맹세치 아니했지요. 계속해서 자기의 변명의 변명을 꼬리 물고 하는 이유가, 5절에 보면 그러니까 저는 하나님께 복 받지요. 저쪽은 저주받았지만 나는 복 받아야 마땅하지요. 자 복 어디 있는가, 헤아려보자.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자신을 수호하고 지키는 쪽으로 나간다 이 말이에요.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그런데 이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예수님 보고 이야기,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인 것을 누가 알겠어요. 모든 인간과의 이별이에요. 우리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13장 1절 같이 보고 난 뒤에 질문을 하나 던지겠어요. 성경이 어렵다, 어렵다 하지만 어느 정도 어려운지 여러분 실습해보세요.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제가 잘못 읽은 것 아니지요. 맞지요. 끝까지 사랑하지요. 질문 들어갑니다. 뭐를 믿고 끝까지 사랑하는 걸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뭘 믿고? 말 뿐인데. 끝까지 사랑한다, 그런 말 누가 못해요. 결혼하기 전에 남자가 이야기할 때, “내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를 지키고 너와 결혼할게.” 결혼 전에 말이죠. “끝까지 사랑할게.” 어디서 멘트는 들어서 끝까지 사랑할게. 요한복음 13장 동원해가면서.

그럴 때 믿습니까? 속으로 “이 인간아. 니가 돼봐야 알지. 말로 하지 말고 실제로 실천에 옮길 때 그때 인정해줄게. 그때까지 내가 살아 있으면 인정해줄게.” 끝까지 사랑한다 해놓고 죽어버리면 안 되잖아요. 자 제가 질문이 뭐냐? 끝까지 사랑하는 걸 뭐로 증명할 것이냐? 끝까지 사랑함을 어떤 방법으로 증명됩니까? 나 너와 이별 없어. 뭐라고 증명할 거예요? 나도 그래 말하겠다. 이러면 끝나는 겁니까? 이런 게 어려운 거예요.

성경말씀이 나와 있는 건 인정하는데 믿고 싶어서 믿습니다, 라는 말을 해요. 그런데 믿습니다하는 것이 뭐냐? 평생 내가 겪었던 그 토대 위에 나오는 남발된 가짜거든요. 내 토대된 내가 경험했던 것 중에서. 그런데 항상 주님의 말씀은 내가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체험을 경험케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러면 끝까지 사랑한다는 이 말은 결국 두 가지입니다. 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 좋으라고 주님 자신에게 주신 약속이란 말이죠. 끝까지 사랑한다. 그러면 나 좋으라고 할 때 우리가 이 말씀을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러면 주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의 일에 방해물이 되는 나를 죽이는 쪽으로 가야 되지요. 다시 말해서 나를 믿지 못하는 것만 튀어나오는 괴물로 몰아세워야 되겠지요.

내가 주님의 끝까지 사랑함을 못 믿게 만드는 요인이 있어요, 원인이 있어요. 내 안에 있는 악마가 그 짓하는 거예요. 너는 네 자신을 믿어야 돼. 이게 자꾸 격려인지 나를 파괴시키는 건지 분간도 안 되지만 계속해서 내 안에서 내 육신이 너는 너만 챙겨야 돼. 너만 챙기면 인생 성공이야.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뭔가 마귀가 우리를 격려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해결책이, 이건 우리에게는 최후의 난제입니다. 마지막 남은 난제에요. 어렵게 말해서 인식론이란 어려운 단어가 있지만 맨 그 말이나 그 말 어려운 말이고요. 그러면 그 결론을 여러분 조바심 낼 게 아니고 미리 말씀드리겠어요. 주님은 뭘 통하느냐 하면 전쟁을 통해야 돼요.

주의 이름은 그냥 곱게 말 몇 마디 주고받고, 주고받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이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는 위험하니까. 전쟁 같은 사랑을 집어넣는데 전쟁 없는 사랑은 없다는 거예요. 주님은 우리로 전쟁을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시범을 보여주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다루는 똑같은 방식으로 신약의 내 백성 창출하겠다, 만들어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 탄생하고 소멸되지요. 그럼 우리가 무슨 판입니까? 아담의 판에서 태어났다가 죽고하지요. 이 판을 뭐로 옮깁니까? 주님의 판으로 옮기는 거예요. 그러면 나의 죽음을 아담에서는 아직까지 죽을 때 안 됐잖아요. 이걸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당겨서 죽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노선변경이 일어나요. 판이 바뀌는 거예요. 나는 죽고 날마다 사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와 더불어 있는 것은 부활이잖아요. 주님의 사건이 이 아담 판에 그냥 무능력하게 놓여있는 우리에게 십자가 죽고 다시 삶을 계속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 삶을 끄집어낼 때 뭐가 되느냐? 말씀이 날마다 새롭게 다가오게 만드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내 안에 뭐가 주인공이다? 말씀 자체가 주인공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 체험인 거예요.

그 전쟁을 할 때 여기 시편 24편 7절, 8절 보세요.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성문이죠. 전쟁할 때 성과 성이 전쟁하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공격을 해대지요. 이제는 문들이 열려야 돼요. 왜? 여기 강하고 능한 여호와, 뭡니까? 전쟁하시는 하나님이죠. 전쟁하시는 하나님이 어디 들어온다고요? 강함이 어디 들어와요? 내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이거는 지식도 아니고 그냥 지식이 아니에요. 나를 위해 마련한 모든 판이 다 엎어지는 겁니다. 이거는 내 자식이고 이건 내 돈이고 모든 것을 하는데 주께서 그것 여호와의 것이야. 네 것 아니야.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것이야. 언약을 이루기 위한 여호와의 것이야. 네 머리카락, 네 옷, 모든 것은 주의 것이야, 하고 선전포고 없이 그냥 마구 밀고 들어와서 내 인생 자체를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효과로 다 뒤집어엎는 거예요.

그렇게 일이 벌어진 사람을 들 수 있지만 제가 이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은 누구냐 하면 들어나 봤습니까? 세례요한. 세례요한이 끝에 어떻게 죽었습니까? 여자의 말 듣고 지 모가지 날아갔어요. 그런 고문도 그런 고문 없고 그 말로가 누가 봐도 처참하고 비참하지요. 성령의 예언에 의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말로가 뭡니까? 쟁반 모가지 날아갔지요.

왜 그렇게 합니까? 쟁반에 모가지가 아니라 난도질 쳐도 주님의 십자가 위력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흠집이 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듣기만 해도 겁나지요. 네가 아무리 망가져도 이미 시작된 그리스도의 판은 언약의 완성은 그 판은 훼손되지 않는다. 그 천국의 생명을 흠집 하나 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생명의 위력입니다. 제3의 위력이고 피의 위력이에요.

교회하다 망했잖아요. 그게 복음이잖아요. 주님이 망하게 한 거기다 네가 왜 인상 찌그리고 앉아있냐 말이죠. 몸이 아파요. 네 몸이냐? 코로나 그것도 알파가 아니고 델타, 베타에 걸렸습니다. 이중 삼중. 네 몸이냐, 내 몸이지. 왜 겪게 하십니까? 내가 예상 못한 걸 겪게 하신 이유는 그래도 십자가의 용서의 위력이 요만큼도 손상되는 게 아니고 오히려 더 위력을 발휘하는 거예요.

그래야 마귀를 이긴다고요. 그게 승리입니다. 이스라엘의 궁극적 승리에요. 세상에 닫힌 문들 다 열려버려라. 다 꿇어, 꿇어앉아. 궁극적 승리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의 파괴에요. 이스라엘이 파괴됨으로써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승리하듯이 그 겪지 못한 체험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겪게 하시는 거예요. 네가 성도란 이름으로 나의 승리를 가로막지 말라는 겁니다. 네가 교회란 이름으로 내 승리를 십자가 다 이루심을 훼손하지 말라는 거예요. 주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딱 그 이야기에요.

여기 9절에 보면,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문들이 한두 문이 아니에요. 전쟁할 게 한둘이 아닙니다. 적들이 치면 또 올라오고, 치면 또 올라오고. 주께서 십자가 이야기하면 내 속에서 또 십자가 반대되는 내 은밀한 탐심과 욕심과 세상에 홀린 어떤 희망사항이 또 올라오고, 그 기대가 좌절되게 되면 또 올라오고. 올라온 이유가 남은 좋은 것 주고 나는 이것밖에 안 줍니까, 라든지 내 희망사항은 기도 빡세게 하고 금식해도 안 들어줍니까? 이런 게 계속해서 올라오지요.

우리는 이미 주님의 십자가 안에 우리의 죽음과 새로운 탄생이 들어있어요. 그 십자가 안에 들어있는, 그거는 사도 바울이 고백했잖아요. 나는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내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식의 그러한 내 이름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 주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사되는 이유가, 주의 이름은 결합능력이 나옵니다. 자기가 하시는 모든 공로에 대해서 다른 죄인을 집어넣어 결합시키는 결합능력이 나와요. 성령께서.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낚시하신 게 아니고 이 땅에서 실제로 자기 백성의 죄에 대해선 다 해결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미 죄에 대해서 해결했음을 우리한테 집어넣는 일을 반복하는 거예요. 네가 육신을 갖고 있는 죄에 대해서 해결되었음을 우리에게 반복해서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되느냐?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바로 성령이 오신 이유는, 나 잘났다가 아니라 주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연결된 관계망으로 주께서 우리를 불러내신 거예요. 이 죄악 된 세상에서. 그걸 네 자로 뭐냐? 이스라엘이고. 그 이스라엘의 궁극적 승리는 곧 주님의 승리에요. 나의 승리가 아니고 우리 왕이신 주님의 승리에요.

10절에 보면,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다시 한 번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성전은 원래 하나님의 관계는 영원한 자리는 하늘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의 엘리베이터가 내려올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그냥 위에서 올라가면 우리가 연속적으로 율법 지키면 올라갈 줄 알았지요. 성전이 직접 더 몰락해서 이 낮은 곳까지 내려올 줄을 누가 상상했겠어요?

율법에서 말하는 그라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이에요. 가슴 치며 돌아섰던 내가 그 사람이에요. 갑자기 백지영이 왜 튀어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차마 못했지만 당신이 사랑한 사람, 내가 그 사람이야. 율법이 말한 내가, 이 하나님이 율법의 주인공이었다는. 내가 지켜서 너를 구원하지 네가 지켜서 구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것 설명하는데 예수님 애먹었어요, 이 땅에서. 말귀 못 알아듣는 인간들 상대로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그냥 비유로. 그런데 그 비유가 항상 인간을 치는 비유에요. 인간은 자기의 노력을 알아줘야 살 보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주님이 치었어요. 배척받았다고. 그런데 십자가 끝이 아니고 십자가 다시 부활했단 말이죠. 끝까지 사랑하기 때문에 주께서는 성령을 주셨던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 아니고 주님의 자기 일의 연속이에요. 주님 자기 일하려고 우리를 불러 세웠기 때문에 주님은 이미 승리했다는 거예요. 죄로부터 악마로부터 율법으로부터 우리를 빼내는데 승리했어요. 이제 판이 달라졌어요. 노선변경이 일어난 겁니다. 우리가 찾아가는 노선이 아니고 마중 나와 주신 노선, 그게 바로 성령의 오심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내가 펄떡펄떡 살아 있지 말고 늘 매일같이 말씀이 살아 있게 하옵시고 그 말씀 속에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이 반복됨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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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0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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