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10712a 부산강의 : [시편]40(24편)-판 바뀜자유게시판시편

20210712a 부산강의 : [시편]40(24편)-판 바뀜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4편,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그렇게 돼있지요.

세상의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고 1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같은 말로 나의 것은 없다. 나의 것은 따로 있을 수가 없겠지요.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은 나의 것은 없다는 쪽으로 계속 공격하고 압박이 들어오게 돼있습니다. 나라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나의 것이 없다가 돼야 되는데 어느 인간도 내가 여기 없다,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근거를 가진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죽기 전까지 있다, 있다 하다가 나 없다 하고 죽지요.

내가 여기 없다는 것은 주님께서 공격이 들어오는 거예요. 공격이 들어오는 게 3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라고 묻습니다. 없다는 얘기에요. 그 다음에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모든 것은 여호와의 것이라고 하면서도 여기에 조건을 걸었어요. 성산에 합류할 자, 그 다음에 거룩에 합류할 자가 있겠느냐,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뭔 뜻이냐 하면 모든 만들어진 것은 마땅히 성산에 가고 마땅히 거룩에 올라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마땅히 사는 것 자체가 거룩한 것이고 사는 것 자체가 성산에 오를 것 같으면 물을 이유가 없잖아요. 있겠느냐, 하는 것은 곧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것이라 하는 것은 소위 나의 것들로 있는 것 중에서 젖힌다 할까요, 추린다 할까요, 계속 추리는 작업을 실시하는 겁니다. 추리고, 추리고 해서 성산에 합류하고 추리고, 추리고 해서 거룩에 합류하는 거예요.

이 작업을 어디서 했는가? 여호와거든요. 항상 여호와라 할 때는 언약의 하나님, 그 다음에 3절에서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냐 하는 이것은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니까 언약의 하나님의 외침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오늘 시편 24편을 여러분 이해하시려면 이렇게 하면 한꺼번에 이해된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외친다. 누구에게? 자기 자신에게. 본인에게 외치는 겁니다. 본인을 자랑하는 겁니다. 성산에 오를 자, 나 빼놓고 누가 있겠느냐? 거룩한 자가 나 빼놓고 누가 있겠느냐? 이렇게 자랑하시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제시하는 모든 요건과 요소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을 조건과 요소로서 제시한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요건과 요소를 여호와 자신에게 이야기했잖아요. 중간과정에 하나 집어넣읍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한다는 건 신약의 최종성이고 중간에 뭘 집어넣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외치신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왜 외치느냐 하면 이스라엘 안에 언약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이스라엘은 인간이니까 아까 한 대로 없지요. 없는데 없는 것 속에 언약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약을 만드신 언약자가 언약을 이룰 상대를 향하여 외치신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언약의 민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외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논리에 입각해서 이스라엘은 하나 둘씩 젖혀지기 시작한 거예요. 내부적으로 파괴되기 시작하고 제거되기 시작한 겁니다.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의 엑기스만 뽑아낼 때까지. 이스라엘 속에 아브라함의 씨만 뽑아낼 때까지. 아브라함에게 준 하나님의 언약만 뽑아낼 때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계속 진척됩니다. 젖히고 젖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거룩, 거룩으로 젖히게 되지요.

거룩이란 뭐냐 하면 율법을 주신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에 그렇지요. 율법을 줘놓고 율법을 지켰다고 하는 자에게 내가 보니 그게 아니야, 라고 젖혀버리는 겁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객관식 문제가 아니고 주관식 문제거든요. 아무리 자기가 정답이라 해도 채점자 자신의 주관이 이것은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니야, 라고 젖혀버리는 겁니다.

그걸 통해서 이스라엘은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언약과 인간은 합치되지 않는 것을 아셔야 돼요. 이걸 아까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자기를 규정하는데 늘 실패한다.” 이게 날까, 하다가 그것도 상황 바뀌면 내가 아니에요. 20대들이 하는 것이 자기가 젊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20대들이 하는 오해 중에 하나가 이 탱탱한 피부는 절대로 쭈그러지지 않을 것이라는 어떤 자신감 같은 게 있어요.

아무리 밤샘하고 세 시간밖에 못 자도 이 피부가 저 할머니의 피부처럼 쭈그러들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전기로에 통닭 기름기 쫙 빼보세요. 나이 따라 세월 따라 젊은 쭉 빠졌습니다. 갑자기 바지 입고 돌아다녀요. 다리 못 내놔요. 양말 신어야 돼. 발만 내놔도 전체 주름살이 그 발등에 다 함축돼있어요. 부분이 전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건 젊음인데 그게 피부가 쭈글쭈글해질 때 왜 그래야 되는가? 왜 나는 그래야 되는가? 그것은 인간이, 이런 게 좀 어려운데요. 인간이 분명히 내가 있잖아요. 분명히 내가 있다고요. 있음에서 없음으로 가는 과정 속에서 여기서 언약이 나와요. 시편 24편이 나옵니다. 언약은, 그러니까 시편 24편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내가 지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내가 몰락할 때 허물어질 때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여기 3절에 보면,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라고 돼있지요. 성산입니다. 거룩한 곳, 거룩한 산, 또는 성전이 있는 곳. 성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냐, 라고 이렇게 해놓았습니다. 자,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강의가.

시편 24편에 의하면 성산은 고정적이에요. 높은 곳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올라가는 거예요. 고정적 성산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언약을 따라서 이 성산이 이스라엘 속에 내려오는 겁니다. 원래 원형이죠. 오늘 강의에 제일 어려운 대목에 도달했습니다. 원형은 미지의 수인데 뭐밖에 없느냐 하면 이거는 복사판밖에 없어요. 모방물, 복제물밖에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원형은 따로 있는데. 원형이 어디 있는 줄 몰라요.

사람과 사람이 운집해 있으면 그 중에 어느 것을 사람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어요. 각자 내가 사람답다고 우기는데. 아니지요. 그러니까 전부 다 복제판, 복제물이에요. 전부 다 모방한 거예요. 모방의 원판도 어딘지 몰라요. 원형을 모른다니까요. 성전? 성전의 원형이 어디 있습니까? 성전이라고 해보게 되면 이 복제판, 모방, 쉽게 말해서 이건 가짜에요. 가짜를 복수로 하면 가짜들, 전부 다 짜가들, 가짜들밖에 없어요. 전부다 가짜에요. 가짜가 천 명을 만 명을 모아도 전부 다 가짜들이지 거기서 진짜가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가짜가 내가 가짜인 것을 규정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인간의 한계인데 내가 가짜이면서도 가짜인 것을 알 수 있는 그 요소, 또는 그 사실, 팩트가 우리한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짜 인간이 여기서 내뱉어지는 모든 것은 가짜만 남발합니다.

이렇게 봅시다. 원형이 있고 어떤 복사물이 있다면 이 복사물의 복사품. 아담이 원형이라면 아담의 아들은 복사물이죠. 그 아담의 아들의 아들은 뭡니까? 전부다 복사물의 복제가 되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기존에 있는 기성세대를 베끼지 아니하면 내 것이 없어요. 나의 것을 따져보면 전부 다 참조한 거예요. 전부 다 참고한 거예요.

이것이 진짜 원초적인 원래 원형이라고 할 게 없어요. 베낀 것 베끼고, 베낀 것 베끼고 전부 다 논문 복사하듯이 베낀 거예요. 원래 논문 저자가 없어요. 왜? 저자 그것도 베꼈기 때문에. 그래서 논문에서는 나 여기서 베꼈다는 그 이야기하면 논문 통관데 베껴놓고 안 베꼈다 하면, 이건 문제 되는 거예요. 너 왜 베껴놓고 안 베꼈다 하느냐?

그래서 이 세상에는 어떤 것도 인간이 만든 건 없습니다. 다 여호와의 것이에요. 여호와께서 원형인데 그 원형은 다른 나라에는 없고 이스라엘에게만 그 원형이 주어진 겁니다. 그런데 언약이 주어졌는데 인간들이 그 원형과 자기가 이미 괴리돼있고 분할돼있거든요. 이것도 참 어렵다.

분절과 분할이 달라요. 분절은 연속성을 가지고 이렇게 딱 분지르면 분절되지만 분할이라 하는 것은 이것 따로 있고, 이것 따로 있고, 따로 따로 돼있는 게 분할이에요. 분할은 그 사이에 무가 들어가요. 없음이 들어가요. 이것과 이것 사이에 없음이 들어가서 따로 존재하는 게 분할이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가짜입니다. 진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도 몰라요. 모르는데 그 안에 박혀있는 들어가 있는 언약이 이스라엘을 진짜로 이끕니다. 끌어당기거든요. 끌어당길 때 가짜가 곱게 가짜가 아니고 진짜를 핍박해요. 여러분 신약성경 생각하면 금방 쉬울 거예요. 진짜를 공격해요. 개코 인간도 아닌데 인간을 공격해요. 이미 범죄 한 아담이 죄 없는 아담을 공격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뭐냐 하면 신이시여 신앙 있습니다, 믿음 있습니다, 소망 있습니다, 사랑 있습니다. 이런 소리하는 거예요. 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전부 다 가짜만 남발할 뿐인데. 믿음, 소망, 사랑. 그렇게 내게서 내는 게 다 가짜라면 진짜 내가 되도록 노력하면 되지 않겠느냐 하면 진짜 나란 원형을 몰라요.

사람들이 말하는 진짜 나, 또는 진짜라는 것은 그 안에 반드시 하나의 쪼가리처럼 들어있지만 나 자신을 거기다 집어넣는 겁니다. 뭐 일곱 번 고난 받았다. 하지만 여덟 번 일어설게. 일어서는 당사자가 누굽니까? 쪼가리, 다 깨지고 쪼가리 그거잖아요. 나 부도를 일곱 번 맞았다. 집에 돈도 없다. 집에 보니까 쌀 한 되밖에 없었다. 쌀 한 되가 쪼가리 아닙니까. 그것 딛고 일어서잖아요. 동전 한 닢밖에 없다. 기타 하나 동전 한 닢, 그것으로 자기가 일어서잖아요. 그 안에 자기의 모든 것을 담잖아요. 쪼가리라고 아무리 겸손 떨어도 그 쪼가리 안에 자기가 집약돼있다 이 말이죠. 지독해요, 인간은.

근원적으로 나를 치워버릴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어요. 인간은 어떻게 가난하든지 어떻게 인생이 완전히 쪼가리나 짜개지든지 간에 인간의 행복은 한 결 같아요. 내가 노력한 것을 남이 알아주면 나는 행복하겠다. 이 소망 말고 다른 소망 있습니까? 뭐 부자 되게 해달라는 것보다 거창하게 물론 부자 되면 좋지만,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할지라도 그 노력 하나 가상히 여겨서 누가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인정해준다면 비록 가난하지만 사람이 살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24편 보니까 살맛이 없잖아요. 백날 해도 성선에 오르지도 못하고 백날 해야 거룩을 이루지 못하는데. 자기도취에 빠졌어요. 자기 즐거움에 빠졌어요.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지 최선을 다한다고 성산에 참여될 수 있습니까? 무슨 율법에 최선을 다라는 그런 율법이 어디 있어요? 율법을 주관식 시험 친다면 율법의 정신은 최선 다하라는 겁니다. 땡. 그건 니 생각이고.

마태복음 7장 중간 쯤 보게 되면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은 네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서 이제는 알았다고, 그렇지 이제는 알았어.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내가 지금 칼국수를 먹고 싶다면 먼저 내가 남한테 아내한테 칼국수를 해주는 거예요. 해주면 지가 눈치가 있다면 칼국수 해줄 줄 모르고 그냥 도마에 칼 얹고 해서 호박 썰고 다시물 내서 칼국수 해주겠지. 이렇게 할 때 이 나가 가짜거든요. 가짜에서 가짜 율법해석밖에 안 나옵니다.

나는 없습니다.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나는 아니다=나는 있음이 아니다=나는 없음’이 돼요, 논리가. 나는 아니다, 라는 이 말은 네가 이다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이다만 고집하는 하나님의 진리체제에 의해서 이다 원형 바깥에 존재하는 거예요. 복사물이에요. 가짜란 말이죠. 복사물은 가짜에요. 아무리 유사하고 아무리 비슷해도 주께선 인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의로 구원받지 유사한 나의 의로 주님의 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어요.

어제 낮에서 그런 비슷한 내용을 했습니다만 이걸 다시 정리하면 사랑과 성령은 인간세계에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인간세계에서 감당할 수 없는 걸 로마서 14장 7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게 아니라 했어요. 이 말은 인간나라는 뭐만 한다, 뭐가 주류다? 먹고 마시고 있는 그것으로 표출되는 것이 인간나라에서 모든 의미와 가치, 최종적인 궁극적 의미를 표시하는 방법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이 말은 하나님 나라를 표시할 때 인간이 해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는데 그게 먹는 것, 입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먹어야 되고 이것은 안 먹어야 되고. 이런 거란 말이죠.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로마서 14장 17절.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뭐냐? 들어가자 아니라 너는 가짜란 뜻이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가짜라고 구박 들어오고 공격 들어오고 지적이 될 때 지적하는 그 실체가 하늘나라에요.

여러분들이 예수님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설명할 때 하늘나라가 어떻게 등장하던가요? 인간나라가 없으면 하늘나라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인간나라를 지적하면서 그때 등장하는 것이 하늘나라입니다. 천국입니다. 여기 있다 따로 천국 가고 이런 것 없어요. 그냥 인간나라를 지적하고 나를 지적하는 거예요. 네가 해낼 수 있는 것은 전부 다 하늘나라에 부합되는 게 아니다. 거짓이고 오류다 이 말이에요.

오류, 잘못이죠. 오류가 있으려면 오류 없는 원형이 있어야 되겠지요. 이걸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참 된 것, 오류가 없는 것. 그런데 인간은 본인의 오류를 통해서, 참 말이 중요한데, 연속적으로 오류를 줄여나가는 방법을 사용해서 참회에 이르려고 하는 거예요. 원형에 이르려고 하는 거예요. 율법을 주니까 율법을 계단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제자훈련 1단계, 2단계, 3단계 쭉. 백날 단계 올라가봐야 부도 한 방 몰락됩니다. 모든 것도 이혼 한 방에 다 날아가요. 연속성이 분할되는……

원형과 인간의 복사물 사이에는 무, 없음이 들어가요. 있음을 없음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왜? 쪼가리지만 계속 있어줘야, 주인공이 있어줘야 드라마가 되잖아요. 드라마 시작하자마자 1회에 주인공 죽어버리면 그 뒤는 볼 것 없어요. 항상 주인공은 살아 있어야 돼요. 있어야 돼요. 주인공이 없으면 남의 세계가 돼요. 나의 세계가 아니고.

근데 인간은 자기가 진짜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주인공으로 생각해서 타인을 만나는데 문제는 내가 진짜기 때문에 남을 만나도 결합할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어요. “너 내 말에 꿇어.” 이 이야기만 있지 의견통합이 될 리가 없습니다. 내 인생 따로 있고 네 인생 따로 있는데 의견통합이 되겠어요. 어떤 사람은 뭐 부부가 한 몸이라고요? 부부가 한 몸이면 왜 식당에 갈 때 체온 따로 잽니까? 하나 재서 곱하기 2하면 되지.

구원의 조건 나왔으니까 구원의 조건은 둘이 아니고 하나 됨이에요. 네가 날 찾아오라가 아니라 내가 네 속에 들어가지 아니하면 너는 이 성산에 오를 자 없고 거룩에 설 자가 없습니다. 인간은 가짜이면서도 계속 진리 찾기에 나서면서 결합의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쪼가리지만 멀쩡하다고 여지는 나에게 타인의 것으로 자꾸 결합을 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실패로 끝남에도 불구하고 나한테 주섬주섬 주워 모으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1이 되되 이 1의 주인공은 뭐냐? 나를 핵심으로 해서 1이 되려고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번 수련회에 사무엘하 하겠지만,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는 게 왜 죄가 되느냐 하면 그 왕 속에 본인들을 잃어버리지 않아요. 그래서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왕 달라 했지? 너희들의 통합체로서 왕을 구하지? 오히려 왕이 너희들을 내칠 것이라고 주의사항을 이야기합니다. 왕이 있음으로 왕만 있고 너희들은 잃어버린 자가 될 것이다, 그래도 좋으냐? 그래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너희 말대로 왕 제도 굳히기에 들어갈게. 들어가면서 그 다음에 뭐냐 하면 왕 자신의 운명이 자기 행위에 자기 태도에 전혀 근거가 토대가 없어졌어요.

왕이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이거는 난데없이 재앙이 덮치게 돼있어요. 사울은 내가 아니잖아요.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됨으로 말미암아 사울 왕이 하는 행패 때문에 백성들의 죽을 고생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인간세계는 자꾸 어떤 통합적인 궁극적인 참, 참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어야 되니까 둘되면 거기서 마지막 결승전을 해야 되거든요. 그러니까 최종적인 하나를 위해서 다 몸 바쳐서 그렇게 매달리는 겁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할 때 남자는 이미 본인이 최종적인 하나로 보는 거예요. 그런데 여자가 범죄 하고 난 뒤에는 하나에 붙어야 내가 산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남자는 그것이 귀찮아. 굉장히 귀찮아요. 들어붙어야 돼요. 여기서 신약에서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어떻게 하느냐 하면 여자는 지향성을 갖고 있어요. 남자를 바라보게 돼있어요.

그게 복종하는 형태로 바라보게 되는데, 문제는 여자가 복종한다고 해서 남자가 복종시키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여자가 남자한테 복종한다고 해서 얼씨구나 하고 남자가, 그래 네게 명령내릴 테니 시키는 대로 해라, 하고 할 자격이 남자한테 없습니다. 그럼 남자는 뭐냐 하면 희생해야 돼요. 참 이상하죠. 복종하는 자는 있는데 복종시키는 자는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사랑하는 자는 있는데 사랑을 아는 자는 없어요. 이게 방향성이 핀트 안 맞아서 그래요. 두 개의 방향. 오늘 제목을 ‘두 개의 방향’으로 할까요? 두 개의 방향이 서로 핀트가 어긋나서 가는 겁니다. 성산은 뭐냐? 주의 이름이 있는 곳이에요. 그럼 성산은 엘리베이터에요. 주의 이름이 내려오면 성산도 성전도 같이 내려오게 돼있어요. 위에 있는 성산이 아래로 내려오는 겁니다. 원형이 내려오는 거예요.

내려오고 율법을 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의 상대자, 파트너니까 율법에 대해서 현재 기존에 인간세계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줘야 될 의무가 있어요. 그들은 성산은 뭐냐? 올라가는 거예요. 양방향이 틀려요. 인간은 자꾸 오르려 하고 성산은 내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시편 24편에 거룩에 이룰 자가 누구며 성산에 오를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주신 모든 말씀이 최종 마무리 지어질 때 그냥 처음 있던 성산이 아니고 처음 있던 성전이 아니라 올라갔다 내려온 그 경로가 포함된 최종적 성전이고 성산인 거예요.

인간은 그냥 율법에 오를 자 하니까 올라가면 되는 줄 알아요. 시온 산이 약간 높으니까. 별로 높지도 않아요. 가보니까. 성산에 오를 자 누구냐? 높은 곳에 진리가 거기 있다고 생각하고 자꾸 올라가는 거예요. 올라가면서 두 방향 사이에 의견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이죠. 내려온 쪽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선지자, 올라가는 쪽을 이야기한 것은 아까 왕 제도, 바로 이스라엘 나라, 왕 중심의 이스라엘 백성들, 선지자의 말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왜 이해 못하느냐? 올라감으로 말미암아 목적성이 있는 방향에 대한 어떤 취지를 그들은 버릴 수 없어요. 인간의 모든 행위는 방향을 보여주고 있고요 그 방향은 내가 갖고 있던 나의 성격과 성질, 속성 그것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엄마와 갓난아이보다 돌 좀 지난 아이가 있으면 엄마가 장바구니 들게 되면, “엄마, 어디 가?”라고 방향을 이야기해요. 그러면 엄마는 어디 안 간다는 거예요. 그럼 장바구니는 왜 드느냐? 치우려고 하는 거야. 엄마가 장바구니에 들면 장에 간다는, 그러니까 엄마가 하는 모든 행동은 방향성을 갖고 있다고 어린아이들이 간파하게 됩니다. 간파성이 있거든요. 어른들이니까.

인간이 어떤 말을 내뱉는다든지 어떤 행동을 할 때 방향성이 있어요. 그 방향성은 나의 완성형이에요. 나는 아무리 봐도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아. 미흡해요. 하지만 내가 하는 방향은 미흡을 조금이라도 없애버리는 쪽으로 채우고 보충해서 보다 완전 형에 가까운 쪽으로 인간은 행동하게 돼있단 말이죠. 그런데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추려낸다 했지요. 추려내는 거예요. 잘라내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위에서 내려오고 주의 이름 자체가 내려오고 여기서는 올라가고. 인간들은 자기 이름이 있고 주님은 이름이 두 개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두 개에요. 하나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이고 하나의 이름은 주의 이름이에요. 하나님이 인간의 이름으로도 오셨고 주의 이름으로도 오셨습니다.

인간의 이름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인자, 사람의 아들이에요. 주님이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기존에 사람의 아들과 비교해보자 이 말이죠. 누가 원형인지. 같은 사람이고 같은 사람의 아들임에도 달라도 왜 그리 다르냐 말이죠. 주님의 말을 전혀 못 알아듣는 거예요. 이게 극단적인 단절이에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니까 단절된 줄 몰랐어요.

하늘나라가 세상나라가 감당 못할 정도로 내려앉아버린 거예요. 아까 했지요. 사랑과 성령은 세상의 어떤 형식과 제도로 그걸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담아낼 수가 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기호로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될 건데 눈물이 입을 가려 말을 못했어. 나중에 돌아가고 난 뒤에 같은 하늘 어느 곳에 있더라도 날 잊지 마. 날 잊지 말라는 말을 진즉 하지 눈물이 입을 가려서 말을 못한 거예요. 말을 하려는데 입이 굳어서 말을 못한 거예요.

그런데 감히 주님 앞에 잊지 말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세 개 있을 때 구원받은 강도는 뭐냐 하면 진짜 대단한 일을 했어요. 어느 곳에 가든지 날 잊지 말아다오. 빚쟁이 이야기한 것과 똑같죠.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나를 기억해주세요. 이 말은 주님의 기억 속에 저 있잖아요. 내 기억 말고 주님의 기억에 들어있는 나이기를 원합니다, 라는 뜻이에요.

주님의 기억 속에, 주님의 원형 속에 내가 들어있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의 언약이 내 안에 있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내 안에 내 것이 아닌 게 들어와 있습니다, 란 뜻이에요. 그러니까 자기가 강도된 것에 대해서 피해자에게 미안합니다, 그딴 것 마스크 쓰고 기자 앞에서 피해자에게 죄송합니다, 그런 소리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남에게 피해주든 말든 그건 내 일이 아니에요. 원형이 하신 일이지. 참 무책임한 비겁한 변명일수도 있는데. 내가 하는 모든 것에 있어서 주님의 기억 속에 있던 것들이었습니다. 주여 그걸 내가 이젠 알게 되었습니다. 내 속에 있는 언약이 발현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은 두 가지 이름이에요. 하나는 존재의 이름이고 하나는 기능의 이름이에요. 이 기능은 바로 마태복음 1장 21절에 나옵니다. 이름은 그냥 간단히 예수지만, 예수는 주의 이름입니다. 사람으로 있을 때는 인자고요. 남들이 부를 땐 인자고. 벌써 막혀있거든요. 인간들은 예수님을 뭔 뜻인지 몰라요. 예수는 너무나 흔한 이름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란 이름.

설명이 더 길어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 몇 자입니까? 12자. 이름이 너무 길잖아요. 이걸 함축시키면 예수에요. 삼천갑자 동방삭이라 해서 코미디에 나오는 이름 있잖아요. 길게. 옛날에는 이름 길게 지으면 명 길다고 안 죽는다고. 예수님은 예수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걸 허용한 적도 없고요. 왜냐하면 이 기능은 예수님 본인만이 할 수 있는 기능이지 다른 외부인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어요.

그러면 예수 이름의 기능이라면 존재의 이름은 뭐냐? 존재의 이름은 없어요. 없는데 내용은 임마누엘이에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있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원형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원형은 성취될 수 없어요. 그래서 이름 자체가 뭐냐 하면 전부 다 존재와 기능이에요. 어떤 기능을 하기 위해서 어떤 분이 계셨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분이 뭐냐? 언약자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누구 보고 이야기했다? 언약자 보고 이야기했으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 보고 이야기한 거예요. 성부께서 성자에게 이야기하신 그 관계가 언약입니다. 인간은 들어갔다간 튕겨져 나오지요. 튕겨져 나올 때 튕겨져 나옴을 아는 것, 그게 바로 날 잊지 마오, 에요.

마땅히 튕겨져 나오는 그 일조차도 누구 일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하실 일임을 감사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기 때문에.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부정과 없음이 꼭 필요한 거예요. 없다, 아니다, 죽는다, 나의 죽음을 하나님의 귀한 소재로 자기 언약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소재입니다. 피부가 쭈글쭈글한 이런 것,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는 것 주께서 필요해서 일으킨 일들이에요.

자 이렇게 되게 되면 인간이 남들과의 관계라든지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기의 미지의 자아상의 관계도 전부 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인간이 남들과 비교한다든지 너는 잘 살고 나는 불행하다. 비교한다든지 너는 잘 피고 나는 만날 롤러코스트 타는, 롤러코스트면 다행인 줄 알아요. 롤러코스트보다 더 심한 게 이거에요.

심장박동측정기 57, 58 하다가 제로. 주님은 이걸 보고 있는데 우리는 롤러코스트 탔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그건 롤러코스트 아닙니다. 그냥 계속 죽어있어요. 이래 가만있으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요래 돼있지만 외부에선 그냥 간 거예요. 그냥 쭉 가는 거예요. 처음부터 죽었고 계속 죽은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 뭐냐? 상상세계 속에 내가 되고 싶은 나에 대한 뭐다? 방향성을 인간은 자꾸 모색하지요. 인간이 행동하는데 의미 없는 건 없어요. 지금보다 낫고 온전하고 완전하고 흔히 말하는 더 성숙하고 더 성화된 모습을 지향하면서 나아가고자 하는 겁니다. 그 모델은 내가 여기 살아 있으면 우리는 그 모델을 내가 한 방향성으로 더 거룩한 걸 찾고 있잖아요.

그러나 주님은, 내게 보이지 않는 원형이 내 뒤에 있어요. 절대로 우리는 주님을 본받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짜 주님을 본받고자 하지요. 나를 죽이지 않는 나를 부정하지 않는 가짜 예수님을 나의 예수님으로 모시고자 하자 나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 내가 소멸되잖아요.

아까 인간의 본성은 무엇의 행복이라 했습니까? 내가 노력한 걸 남이 인정해주는 것, 남에는 하나님마저 포함되지요.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면 가장 행복하다 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돼버리면 내가 소멸해버리면 뭐가 없습니까? 내가 행복할 이유 자체가 근원적으로 다 날아가 버리죠.

왜냐하면 내가 소멸하면 노력한 모든 것이 나를 뭐했다? 계속 소멸케 했기 때문에. 그러면 내가 노력하고 애쓰는 게 의미가 없잖아요. 의미 없으면 하는 소리가 왜 사냐 하는 거예요. 주님 뭐라 합니까? “왜 사냐? 니 벌써 죽었어. 죽었는데 뭘 왜 살아가 있냐.” 어떻게 죽느냐가 남아있지 어떻게 사느냐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가짜라고 하면서도 기어이 가짜라는 말을 내뱉는다고 해서 그게 진짜로 변화되는 게 아니에요. 주여 저 가짜라고 한다고 구원받습니까? 아니에요. 아까 강도처럼 날 기억해주세요,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거든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기능이에요. 따라서 주님의 기능은 죄에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내는 거잖아요. 아까 했지요. 그러면 인간은 죄를 몰라요. 자기 백성도 몰라요.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요.

따라서 여기서 주님께서 뭘 하느냐 하면 통합되지 않는 아무리 인간이 손을 내밀어도 예수님은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통합될 수 없는 쪽에 언약을 심어놓고 그 언약을 찾아가는 식으로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버립니다. 그 주님의 손이 뭐냐? 성령이에요. 그래서 그 성령의 형식이 뭐냐 하면 율법이 아니고 사랑으로 온다는 거예요. 사랑과 성령은 세상이 그리고 우리 본인이 감당이 안 됩니다. 내가 사랑을 소유할 수가 없어요. 왜? 소유하면 이미 감당한다는 뜻인데 소유할 수 없을 정도로 그냥 넘치는 거예요. 감당하지 못함.

그러면 이러한 우리에게 찾아오는 그 기능에 대해서 항상 여기에 가시가 있고 장애물이 있지요. 장애물이 뭐냐 하면 우리 자신의 방향성이죠. 우리 자신이 어떤 의도하는 것, 시도하는 것. 하나님 보시기에 죽이려고 환장했는데 우리는 그걸 살려고 환장한 모습으로 우린 생각합니다. 이것이 꼭 필요해요. 우리가 살려고 애쓰는 게 꼭 필요합니다. 갑자기 기쁘죠. 아등바등 애쓰는 게 꼭 필요해요. 그것이 어떻게 주님의 성령에 의해서 사랑에 의해서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나기 전까지 필요한 재료가 되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것도, 복음 안다고 구원받는 거 아니거든요. 그래서 복음 아는 것은 다 필요한 거예요. 약속도 없고 올 리도 없는데 복음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 많아요. 약속한 바도 없고 주님께서 너 데려온다는 약속도 없고 주님이 재림한다 하는데 한두 해지 벌써 몇 번 속았어요. 그저 올 리도 없는데 복음에 취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이것은 무슨 추억이냐 하면 갈색추억이 아니고 복음추억이에요.

모방이죠, 모방. 어떤 믿음 좋은 사람의 모방, 또 내가 상상한 그 상상을 도로 또 우리가 모방하고. 어떤 경지에 이르면 난 행복할 거야. 그런 도달한 경지에 여러분 한두 번 속았습니까? 그 지점에 가면 신기루 같아요. 분명히 뭐 있던데 하고 가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그때까지 살아온 만큼 그 세월만큼 늙은 내 모습만 보이고요.

월남에 갔다 온 김 상사가 어떤 사람으로 변했습니까? 그냥 늙었어요. 월남에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월남 모습 있더라도 돌아오면 이미 병장에서 상사된 늙은 나밖에 없어요. 그 나밖에 없는 이것이 주님한테 다 쓸모가 있다 이 말이죠. 주께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네 쓸모없다는 사실을 날마다 부각하는 그것이 감당할 수 없는 그냥 불쌍히 여김, 그냥 사랑이에요.

사랑을 우리 행함으로 계속 가리고 있든 말든 간에 주님께서 우리 행함을 늘 이렇게 그때그때마다 성령으로 부정해서 네가 나한테 애 안 써도 돼, 라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우리는 애써요, 주님을 위해서. 희생합니다. 우리는 헌금한 것, 돈 만 원 한 것을 일주일 내내 아니 한 달 내내 잊지를 못해요. 그 교회 지분 얼마 냈는지 주식 얼마 샀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도 돈 낸 나는 기억해요. 나는 나를 잊지 못합니다. 이것을 바로 하나님께선 율법을 통해서 죄를 생산해내는 이 부지런한 주님의 작업에 우리가 참여해야 돼요.

10분 쉽시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01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18,642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10715b 베드로전서5장 11절(아멘)-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21-07-19
18,641 자유게시판 서울의존강의20210715a 베드로전서5장 11절(아멘)-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최고관리자 21-07-19
18,640 자유게시판 37강-골 3장 20-21절(부모와 자식)210718 - 이 근호 목사 골로새서 최고관리자 21-07-18
18,639 자유게시판 92강-욥기 28장 1~11절(이방인의 지혜)210718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1-07-18
18,638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열 두 제자 / 210718 - 최고관리자 21-07-18
18,637 묻고답하기 종과 상전 - 최고관리자 21-07-18
18,636 묻고답하기 [행복한 나짜로] 평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1-07-17
18,635 묻고답하기 [행복한 나짜로] 영화평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21-07-17
18,634 자유게시판 3강-요나 1장 4-7절(초과적질서)210714-이 근호 목사 요나 최고관리자 21-07-15
18,633 자유게시판 20210712b 부산강의 : [시편]40(24편)-판 바뀜 시편 최고관리자 21-07-14
열람 ➜ 자유게시판 20210712a 부산강의 : [시편]40(24편)-판 바뀜 시편 최고관리자 21-07-14
18,631 자유게시판 91강-욥기 27장 20~23절(차이없는 인생)210711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1-07-11
18,630 자유게시판 36강-골 3장 18-19절(우리의 신랑)210711 - 이 근호 목사 골로새서 최고관리자 21-07-11
18,629 자유게시판 7월 부산 성경공부 모임 안내 - 최고관리자 21-07-11
18,628 자유게시판 주일학교 설교 / 물세례 / 210711 - 최고관리자 21-07-11
18,627 묻고답하기 자녀와 부모 골로새서 최고관리자 21-07-11
18,626 자유게시판 2강-요나 1장 3절(낯을 피함)210707-이 근호 목사 요나 최고관리자 21-07-08
18,625 자유게시판 359강-YouTube강의(슬픔 마태복음 26:42)20210706-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21-07-07
18,624 자유게시판 358강-YouTube강의(열림 시편 136:10)20210706-이 근호 목사 시편 최고관리자 21-07-07
18,623 강의 유튜브강의(358강, 359강). 열림, 슬픔 210706 - 최고관리자 21-07-06
18,622 자유게시판 20210702b 울산강의-역대기상(2강) 1장 5절 : 있음과 없음 - 최고관리자 21-07-05
18,621 자유게시판 20210702a 울산강의-역대기상(2강) 1장 5절 : 있음과 없음 역대상 최고관리자 21-07-05
18,620 자유게시판 90강-욥기 27장 13~19절(중심점 찾기)210704 이근호 목사 욥기 최고관리자 21-07-04
18,619 자유게시판 35강-골 3장 16-17절(영적대화)210704 - 이 근호 목사 골로새서 최고관리자 21-07-04
18,618 묻고답하기 [슬기로운 지옥생활] -송민선 성도님의 글 - 최고관리자 21-07-04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