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02a 울산강의-역대기상(2강) 1장 5절 : 있음과 없음
20210702a 울산강의-역대기상(2강) 1장 5절 : 있음과 없음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부터는 역대상 1장 1절부터 몇 절까지 10절까지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디밧과 도갈마요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다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더라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요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세상에 처음 영걸한 자며”
역대상 이름의 명단들이 나오는데 명단들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명단(사람 명단), 사람 이름이죠. 두 가지가 뭐냐 하면 그것은, “땅에서 생산된 거냐?” 아니면 “하늘에서 뿌려진 거냐?” 색종이 뿌리듯이 공중에서 뿌려진 거냐? 이 말은, “너 어디서 나왔어?”에요. 이 질문을 확대하면, “너 어디로 사라지는데?”라는 질문에 네가 답변을 해보란 겁니다. 너 어디서 나왔어? 네 출처가 어디냐? 같은 말로, 너 어디로 사라지는데?
그 답변이 사실은 성경 전체의 답변일 수 있어요. 성경 전체가 이야기해주고 있는 겁니다.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갔는지 인간은 알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경말씀이 없으면 알지 못해요. 마치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부는지 모르고 강물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것 같이 강물 자체가 바다로 흘러가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바람 자체가, 내가 만약에 바람이라면 이 바람은 왜 생겨났는지 바람이나 내가 왜 여기 있어서 이리저리 불어대야 되는 그런 팔자가 되고 그런 운명이 되는 왜 이런 입장이 돼야 되는지 전혀 해답이 없는 거죠.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되면 해답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전체적으로 해답이 없다는 말은 하루하루 삶 속에도 해답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 강의하면서 이걸 크게 쓰겠습니다. “없다.” 누가? 내가 없는 거예요. 내가 없는 겁니다. 내가 없는데 이상하게 어디로 가서 어디로 나가는지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반칙이 일어나는 거예요. 분명히 내가 없는데 어디로 왔는지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없는 거예요. 없는데 사람들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겁니다.
이걸 어렵게 말해서 나의 현재성과 나의 현지성. 현재성이란 시간적으로 내가 여기 있다는 것과 현지성, 이 장소에 내가 있잖아. 현재성과 현지성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겁니다. 이걸 합쳐서 내가 여기 있다고 할 수 있는 겁니다, 라고 세상 사람들은 주장해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네가 여기 있기 전에 네가 어디 있었는지 물으면, 모르겠다는 겁니다. “네가 있기 전에 어제 어디 있었는데?” “어제 거기 있었어.” 그럼 어제 이전에 하루 전에 어디 있었는데? 어디 있었는데, 어디 있었는데 계속 캐묻는 거예요. 네가 어디 있었는가, 계속 캐물으면 처음 출처가 어디 있지를 모르면서 인간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출처를 모르면서 산다는 말은 어디로 꺼져 가는지 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거예요. 시작도 모르고 끝도 사라지면서 모르는 겁니다. 나는 분명히 현재성과 현지성이기 때문에 안 사라졌잖아요. 그런데 백오십 년 전의 우리 선조 어디 갔습니까? 가지산에 올라가서 세종대왕 불러보면 나옵니까? 혹시 거기 이순신 장군 계셔요, 이순신 장군? 너 이순신 장군 혹시 아니냐? 이순신 장군 있어요, 없어요? 이순신 장군 죽은 지금 없는 거예요.
현재성이 보장받지 못하고 현지성이 보장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현재성과 현지성이 없어버리면 이거는 없는 게 돼요. 그런데 이순신 장군이 1592년 그 근처 시점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분명히 있었어요. 임진왜란 때 있었잖아요. 그때는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없다고 생각을 안 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이 여기 있다고 하는 순간 네가 없을 때가 있고 네가 죽을 때가 있다고 규정한 하나님이 내가 있다고 하는 순간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는 그런 세계 속에 인간은 현재성과 현지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있음을 대신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거예요. 하나님보다도 누가 더 다급하고 시급하냐 하면 내가 다급하고 시급해요. 내가 중요한 거예요.
그렇게 되면 출발점을 내가 없던 데서 출발점을 해야 되는데 이걸 반칙을 해서 반대로 해서 내가 여기 있음으로 출발점을 삼았어요. 여기 있는 내가 팥빙수 먹고 싶다. 여기 있는 내가 백화점 옷을 입고 싶다. 모든 시작을, 의미의 시작인데, 모든 의미의 시작이 나의 현재성과 현지성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출발을 이미 자기가 장악하고 있으니까 누가 없느냐 하면 하나님이 내 출발하는 노선에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어요. 하나님 비키라는 거예요. 비키고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내가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 있음도 내 있음에 귀찮고 방해된다는 겁니다. 지금 제가 해답을 아직 이야기 안 하고 있어요. 인간 어디서 왔고 어디로 사라지는지 전혀 제가 말씀을 안 드리고 있습니다. 아직 오실 분이 안 왔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어요. 이제는 이야기해야죠.
여기 보세요. 명단이 나오지요. 벌써 나왔어요, 명단. 명단 이게 뭐냐 하면 생명책입니다. 사람의 명단이에요. 이게 어떤 명단이냐 하면 없는 자의 명단이에요. 그러면 사람부터 시작해서 명단을 만들어버리면 이 명단은 있어도 사라져버립니다. 이순신 장군, 강감찬, 안중근, 지금 다 어디 있어요? 없지요, 없는 거예요. 명단 자체가 없어요. 동회에서 안중근 씨 이번에 백신 맞아야 되는데? 안중근 없어요. 윤봉길이 없어요. 을지문덕 없습니다. 연개소문 없어요. 김유신 장군 없어요. 백신 맞으라 했는데 명단에 없어요. 인간의 모든 명단은 없습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있는 것부터 이야기해야죠. 성경에 있는 것부터. 뭐가 있느냐? 생명책 있고 거기에 명단 있어요. 그러니까 인간보다 생명책이 우선되는 겁니다. 인간보다 책 차체가 우선돼요. 책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율법이 나와요. 말씀이 나온다고요. 다른 말로 하면 책에서 뭐가 나오느냐? 언약이 나옵니다.
책이 있고 그 다음에 책이 있다는 말은 뭐가 있다? 율법이 있는 거예요. 그 다음에 언약이 있는 겁니다. 언약이 있고 언약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 다음에 누가 있냐 하면 인간이 있는데 이 인간은 뭐냐? 생명책에 명단이 있는 인간들만 있음이 되는 거예요. 그것도 영원히. 영원히 있음이 되는 거예요.
영원히 있음을 다른 말로 하게 되면 현재성과 현지성만 있는 게 아니고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사람, 그것도 영원히. 창세전에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돼있고 창세전에 에서는 저주받기로 돼있어요. 그러면 우리 보기는 야곱이 영원부터 있었고 에서가 영원부터 있었다 하잖아요. 그러나 그리 이야기하면 안 되고 야곱은 사랑받는 대상으로 에서를 저주받는 대상으로 있게 한 하나님의 약속, 언약이 영원히 있다. 이렇게 하는 게 옳지요. 생명책에 명단이 영원히 있다. 이렇게 하는 게 옳은 거예요.
그래서 영원히 있는 분은 하나님, 주님, 성령 그분만이 영원히 있고 영원히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분들의 의도에 의해서 책이 만들어졌고 그 책의 영원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하늘에서 아담을 흙으로 만들어놓고, 제가 쉽게 하는 거니까, 하늘에서 아담의 흙을 분해해서 꽃가루 뿌리듯이 뿌렸다고 보세요. 아담의 몸을 몸체를 가루로 만들어서 뿌려버린 거예요. 그러면 그 가루가 나풀나풀 떨어지면서 이 지상 바닥에 떨어지겠지요.
그러면 떨어진 한 조각, 한 조각이 어디에 속하겠습니까? 아담의 조각물이 되겠지요. 아담의 부분이 되겠지요. 부분. 레고 있잖아요. 레고의 한 조각, 한 조각. 조각, 조각 떨어지는 거예요. 그걸 주워 모으면 뭐가 되느냐? 아담이 되는 겁니다. 아담의 몸체가 하나의 흙이 가루가 되어서 떨어지니까. 그러면 아담의 몸이 흙이 된다면 떨어진 그들도 뭐가 되느냐 하면 흙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흙에다 무엇이 주어지느냐? 흙과 여기에 언약 또는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 여기에 결합이 되게 되면 여기서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의 영원성, 약속의 영원성이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를 드러내는 그러한 징후를 보여주는 하나의 물질적 요소가 돼버려요. 징후를 보여주는.
지금 역대상 하고 있는데 아담 그리고 셋이 아니죠.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공중에서 지금 눈 싸라기 떨어지는 게 보이십니까? 공중에서 아담의 조각, 조각들이 눈송이처럼 꽃가루처럼 떨어지고 있는 거예요. 어디로? 지상으로. 그럼 지상에 누가 있느냐 하면 영원한 존재가 지상에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뱀에게 저주할 때 뱀의 저주의 특징이 뭐냐 하면 뱀의 특징은 지상적이에요. 뱀이 땅에 딱 달라붙어서 땅에서 기어 다니면서 거기서 네가 빌어먹고 사는 것, 그걸 하나님께선 저주라 하는 거예요. 땅과 가까울 때는 저주가 돼요. 하늘 쪽으로 가게 되면 이거는 복이 돼요. 그래서 제가 아까 공중에서 꽃가루가 뿌려진다는 말은 한 거예요.
아담의 몸 조각, 그러니까 흙 조각이 어디를 만나야 되느냐 하면 지상과 만나야 되는 거예요. 지상에 누가 대기하고 있는 겁니다. 지상은 누구의 세계냐 하면 뱀의 세계에요. 뱀의 세계에 인간들의 몸 조각이 여기에 같이 결합이 이뤄집니다. 결합이 이뤄지게 되면 무엇이 거기서 드러나느냐 하면 인간이 죄한테 또는 악한테 진 것이 분명하다는 게 드러나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3장 3절, 4절 보게 되면,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의 머리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인데 그 짐승이 용이죠. 그 용이,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그 다음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4절입니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그 다음에 나오는 말,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어느 인간이 자기의 지혜와 재주와 솜씨로 이 지상의 권력자 짐승과 용을 이길 재간이 있는 자가 누가 있느냐? 아무도 그의 지략과 뱀의 지략과 그 힘을 감당할 수 있는 그걸 벗어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라고 확정적입니다. 이게 확정된 거예요.
여기서 어렵게 가봅시다. 우리가 아까 현재성, 그 다음에 현지성 했지요. 울산 같으면 우리가 대구 안 삽니다. 울산이라는 이곳에 살지요. 여러분 보기에 그게 땅으로 보이는 거예요. 만약에 이걸 땅으로 본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데요. 왜냐하면 땅으로 본다면 땅이 있다는 이유를 땅 그 자체에서 끄집어낼 수 없어요. “땅아, 네가 언제부터 있었니.”라는 그 질문에 대해서 현재 있는 땅은 아무 대답을 할 게 없어요.
그리고 지금 땅에 있는 현지성, 거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이 땅에서 있으면서 눈에 보이는 게 이건 흙이야, 땅이야 이렇게 돼버리면 뭐가 알 수가 없느냐 하면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사라지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 자체로서는 알 길이 없어요. 아무도 땅은 해답을 줄 수 없습니다.
“그냥 단단한 땅에서 두 발 딛고 그냥 살아가. 밥 먹고 살아.” “어디로 가는데?” “그거는 나중 문제고 지금 생각하면 안 되지.” “어디서 태어났는데?” “그거는 태어났으니까 태어났겠지. 땅이 나를 생산했겠지.” 하는데 땅은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그냥 땅이 인간을 만들어내지 못해요.
땅은 인간을 있게 하지 못한다. 현재 있는 땅은 있는 인간을 만들어내지 못해요. 그러니까 땅도 없는 거예요. 땅도 없고 인간도 없습니다. 땅이나 인간이나 앞에도 없음, 뒤에도 없음, 없음 안에 한시적으로 나타난 거예요. 아까 그걸 뿌려진 것. 없는 거예요. 없어요. 교회 나오나 안 나오나 없어요. 교회 나온 사람도 없고 안 나온 사람도 없어요.
교회 나온 사람들 손들어 보세요. 여기 없는 사람 세 명 왔네요. 세 명 왔다 하면 안 돼요. 세 명 없어요. 세 명이 없는 거예요. 세 명이 있다고 하지 말고 없는 자가 세 명이라고 이야기해라. 이렇게 해야 없음과 없음으로 설명하는데 일단은 성공한 셈이 돼요. 여기 없는 세 명 있다.
없는 사람 네 명 있다. 집안에 아들딸이 있고 엄마, 아빠 있다. 그럼 없는 사람 네 명 있네요. 이래줘야 가족의 시작은 어디고 가족의 끝은 어딘가가 한꺼번에 표현이 되는 겁니다. “당신은 어디 있습니까?” “나?” “당신 울산에 살고 있다며?” “없는 나요? 없는 나는 울산에 살고 있습니다.” 이래야 말이 된다 이 말이죠. 말이야 막걸리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땅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애초부터 있던 게 땅이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계셨고 천사가 있었거든요. 땅이라는 것,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영적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서 설치된 무대 세트에요. 연극이 끝나면 세트장도 현장에서 주인공이 없으니까 없어지는 거예요. 세트장 없으면 뭐도 없어요? 나도 같이 없는 거예요.
인간은 악마는 없고 천사는 그것은 바로 주님에 의해서 생겨난 거예요. 그리고 주님에 의해서 이 지상에서 없어지는 겁니다.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영원히 생명책이죠. 하나님이 있다고 이야기한 영원한 생명책. 지옥 가도 지옥에 인간 있잖아요. 허나 성경에서 있다는 것은 지옥 간 사람을 있다고 쳐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 있을 때나 있다고 말을 붙일 수가 있어요. 다른 것은 용납이 안 됩니다.
그래서 근거를 대라. 근거가 뭐냐? 지상에서 뿌려진 흙들이 분명히 인간으로 뿌려졌다가 나중에 아담 때는 구백 살까지 살았잖아요. 구백 몇 년 살고 난 뒤에 그 아담 살던 자기 집에 아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들어가 보면 아담이 흙이 돼있다고요.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갈 것 아닙니까. 없는 거예요. 아담 자식 없는 겁니다.
모세가 어디 있느냐? 지금 모세 어디 있습니까? 모세가 울산에 동구 삽니까, 어디 삽니까? 없지요. 엘리야 없지요. 그런데 변화산에서 모세, 엘리야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지요. 그때 모세 있다, 엘리야 있다 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세, 엘리야기 때문에 그걸 간단하게 줄여서 예수님이 계시다고 이야기하면 된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생명책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모세 들어있고 엘리야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자기 있어야 된다고 걱정할 필요 없고 엘리야가 나는 꼭 있어야 된다고 걱정하지 말고 중요한 것은 예수님 있으면 그 안에 내가 들어있으면 그걸로 됐잖아요. 굳이 내가 꼭 있어야 됩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있는 건데요. 그러니까 모세, 엘리야는 이 땅에 오기 전에 먼저 나의 없음을 예수님의 있음과 언약으로, 언약입니다.
언약으로 엮여지기만 해도 나는 있게 되고 없어져도 나는 있게 되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있음으로써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있게 되는 것, 이게 바로 신약에 예수 안에서 구원받는 그 이야기잖아요. 예수 안에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역대기상하가 이렇게 연관돼있습니다. 인간의 족보 아닙니다. 인간의 족보는 줄줄이 사탕이 되잖아요. 소시지처럼 알알이 엮어지는 게 아니고 뿌려지는 거예요. 있음과 없음을 반복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임시로 편하게 이야기할게요. 모든 인간은 a군과 b군을 나눌게요. a군은 여자의 후손, b군은 뱀의 후손. 모든 인간을 a, b로 나눈 겁니다. 아담은 a, 그 다음에 셋 a, 이런 것으로 a, b 둘 중으로 나누는 거예요. 나눌 수가 있어요. 이걸 표현형으로 하고 그 안에 내장돼있는 것은 유전형이라고 멘델의 유전법칙에 나오는. 겉에 드러나는 유전적 속성과 유전형으로 나눠지는데 특징은 뭐냐? a 아니면 b, b 아니면 a라는 거예요.
한쪽은 예수님이 계시다, 또 한쪽은 예수님 안에 없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와 없는 자로 인간은 a형 인간, b형 인간 둘로 나눠질 뿐입니다. 역대상하가 그걸 이야기해요. 앞으로 여러분 물을 때 혈액형이 뭐예요? 그런 것 좀 묻지 말고 혈액형 A는 공손하고 어떻고 그것으로 점 치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하지 마시고요. 내가 점 한 번 쳐볼까요? a형과 b형 둘밖에 없다고.
a형은 있음, b형은 없음. 그럼 그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 b형은 기분 나빠요. 내가 여기 있는데 현재 있는데 없다 하느냐. 니가 그리스도 안에 없잖아. 그리스도만이 영원히 있음이에요. 생명책만이 영원히 있음입니다. 그 있음이 없으면 그거는 있어도 없는 거예요. 예를 한 번 들어볼까요.
다윗과 골리앗이 붙었지요. 다윗과 골리앗 붙고 난 뒤에 그 전쟁 끝나고 걸어 나온 것은 누구였습니까? 골리앗이었어요, 다윗이었어요? 다윗이었지요. 그럼 골리앗은 어디 갔습니까? 죽어서 흙이 됐지요. 없는 거예요. 골리앗과 다윗의 전쟁에서 오늘 강의 첫 번째 나오는 제일 중요한 건데요.
골리앗과 다윗에서 다윗이 뭐로 이겼느냐 하면 언약이, 할례 받은 쪽은 없어야 된다는 거고 할례 받아 있는 쪽 그러니까 이스라엘 쪽은 이게 어차피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있어야 될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고. 뭐 화개장터에요? 있을 것은 있고 없을 것은 없고. 하나님의 일이 그렇지 뭐. 하나님이 그런 거예요. 골리앗은 아까까지 있었는데 없어요. 그런데 소년다윗은 있지요.
처음에 붙을 때 둘 다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런데 소년다윗이 하는 말이, 이 전쟁은 인간이 하는 전쟁이 아니란 말이죠. 인간의 전쟁은 둘 다 있어요. 그러나 하나님의 전쟁은 여기에 할례언약이 개입돼버려요. 할례언약이 개입되면 골리앗은 있어도 없는 자도 되고 바로 죽었으니까 없잖아요. 모가지 없지요. 모가지 잘라버렸으니까. 다윗은 있잖아요.
이 할례언약의 완성이 뭐냐? 십자가입니다. 오늘 강의 끝났네. 십자가 앞에서 딱 두 가지밖에 없어요. 십자가 안에 있는 자와 십자가 안에 없는 자, 그 기능을 뭐가 한다? 십자가가 하는 거예요. 한 번 해볼게요.
“나는 예수를 믿는다.” 구원됩니까? 안 되지요. 나는 할 때 자기를 뭐로 봅니까? 없는 나로 봅니까, 있는 나로 봅니까? 나는 하니까 있는 나, 있는 나가 예수 믿으면 마지막에 뭐가 남느냐 하면 ‘나’가 남지요. 그러니까 이거는 나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거예요. “나는 나의 출처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좀 적으세요. 나는 나의 출처가 아닌 거예요. 나는 나의 시작점이 아니에요.
인간은 똑똑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은 인간의 무능함을 고발하기 때문에 그래요. 언약을 지킬 위인은 없습니다. 방금 없다는 이야기를 또 했지요. 언약을 지킬 위인이 없어요. 그러면 인간은 없는 거예요. 언약을 지킬 분은 누구만 있느냐? 예수님만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만 있으니까 예수 안에서만 인간은 있게 되고 영원히 있게 되고, 그 영원히 있다는 것은 본인이 구원받아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성도 안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의 영원성, 언약의 있음, 율법의 있음,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 그 있음을 전달하는 종지기, 종지기하면 어린아이들은 모르겠다. 작은 접시, 그걸 종지기라 한다. 중국집에서 군만두 찍어먹을 때 간장 담은 종지기.
인간은 언약의 종지기를 전달하는 전달자에요. 언약의 종지기에 담겨서 전달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컵 놓을 때 좀 운치 있고 품위 있는 집안에서는 컵을 함부로 안 놓습니다. 컵 밑에 컵받침을 놓지요. 색깔 맞춰서 담긴 티, 차의 색깔 조화되도록 놓아서 품격을 높입니다. 차 한 잔에도.
내가 있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언약이란 잔이 있다고. 언약의 컵을 놓는 받침대가 있어요. 그 받침대가 우리를 운반시키는 겁니다. 운반하는데 그 받침대는 감춰져 있지요. 안에 드러난 우리는 이름이 있지요. 아담, 셋, 에노스, 게난, 이런 이름 부를 때는 짧게 부를 때는 여기는 출석여부 대답하는, “아담?” “예.” “셋?” “예.” “에노스 왔어?” “게난 왔어?” 전부 다 똑같은 흙 조각들이에요. 없는 조각들이에요.
없는 조각들 지금도 살지 않고 사라진 이 지상에서 사라진 자들. 이 사라진 자들이 역대상에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 책에 왜 나옵니까? 그들은 있음에 해당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들이 있다가 아니라 그들 배후에 컵 잔 같은 하나님의 언약이, 인간은 사라져도 언약은 영원하다는 거예요. 인간의 모든 영광과 모든 자랑거리를 풀의 꽃같이 잠간 피었다가 없어지지만 풀은 마르고 쇠해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리라. 영원한 겁니다.
누가복음 10장 20절에 보면 제자들이 좋다고 하는 말이 70인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17절) 해서 자기가 여기에 현재성/현지성, 시간적으로 현재성, 공간적으로 현지성 있음을 자기가 좋게 있다고 했는데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 말은 뭐냐 하면 기록된, 너 보고 귀신이 항복한 게 아니다. 너의 있음을 보고 야 여기 대단한 재주 가진 사람인데. 재주 가진 사람한테 못 당하겠네. 너한테 지는 게 아니고 네가 속해 있는 그 책, 그 명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력, 그것만이 영원해야 되기 때문에 사탄이 자기 고유의 있음이 좌절되고 그게 비참하게 굴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있음이란 그냥 있음이 아니고 자랑스럽게 있다, 앞에 자랑스러움을 붙여버리면 있음의 의미가 확 오죠. 구질구질하게 있는 건 있음이 아니에요. 백수건달해서 나이 사십 넘도록 혼자서 빌어먹고 할 때 그 부모가 자취방에 청소도 안 한 모습을 볼 때 “아이고, 나가 죽어라, 인간아.” 너는 하여튼 나한테 하등에 보탬이 안 돼. 너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라 하잖아요. 그러니까 있어도 나는 없는 자식으로 간주하겠다.
사탄은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하늘나라에선 사탄을 뭐로 봅니까? 없는 피조물로.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고 영광스럽게 거룩하게 자랑스럽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그 있음의 조건에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있음의 범위, 그 범주에 들지 못하면 그거는 없음에서 오는 저주나 받아라 이 말이죠. 왜 있지 못하고 없느냐, 이래서 영원한 저주의 형벌을 받습니다. 없어지는 게 아니고 없어지라고 혹독하게 가해지는 유황불.
불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원래 그냥 불이 아니에요. 소멸시키는 불이에요.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거든요. 소멸 안 되면서 소멸의 고통을 영원히 겪게 하는 겁니다. 구더기도 타지 않고 하지만 모든 가진 것을 상실했음을 영원히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 그게 바로 지옥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역대상하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 해석하는 방법을 제가 간단하게 문장으로 나타내겠습니다. 보통 이 세상에서는 응시->이해->결론, 이렇게 하잖아요. 이걸 반대로 돌리면 이미 결론 났어요. 이걸 이해합니다. 그 다음에 뭐냐? 구체적은 증거를 확보하고 그걸 바라봅니다. 응시하는 거예요.
학교에서 개미 관찰하는 것 숙제 내게 되면 우선 개미가 있는 것을 응시하지요. 바라보죠. 바라보고 개미가 단체 생활하는구나. 이걸 이해하지요. 그 결론이 뭐냐? 개미는 협동하는 곤충이다, 라고 결론내리잖아요. 이게 인간들이 악마가 지배하는 이 지상에서 내리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그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아까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뭐라 했습니까? 누가 이기리요, 했지요. 이기지도 못할 무기를 왜 사용합니까?
방금 응시, 이해, 결론 이게 이 세상에서 하는 방법이에요. 그죠. 또 예를 들겠습니다. 교회 왔다. 교회 오니까 성경책이 많아요. 성경책에 보면 글자로 돼 있잖아요. 응시하잖아요. 응시하고 그 나오는 단어들 있잖아요. 그것도 한국어로 번역된 단어들 있잖아요. 영어로 해도 괜찮고. 그걸 응시하고 이해하지요.
이해할 때 인간들이 여기에 뭐가 작동하는지 생각 못합니다. 선 이해, 선입견을 내가 작동하는 것을 사람들은 고려를 안 해요. 이 선 이해, 선입견은 어디에서 시작하느냐 하면 내가 시작점이에요. 내가 시작점으로 이어지는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기억이란 게 있습니다. 이 기억은 나라는 유기체의, 잘 보세요. 생존에 유리하도록 남겨진 그런 기억이에요. 생존에 유리하도록 남겨진 기억이에요.
오늘 교회 갈까, 말까? 이 결정을 뭐로 합니까? 내가 오늘 교회 가는 게 유리할까, 아니면 교회 안 가는 게 유리할까? 교회 갔다 오면 땀나면 내가 불편해. 샤워해야 돼. 샤워하면 돈 나가. 돈 나가면 내가 더 사는데 약간에 돈이 모자라. 안 돼. 결론은 교회 안 간다. 나의 생존에 유리하느냐, 불리하느냐에요.
이게 두뇌작용에서 생겨서 뭐가 된다고요? 나의 기억이 되고 이 기억이 층층이 이게 누적이 돼있다니까요. 마이애미 아파트처럼, 12층인가. 누적이 돼있어요. 일곱 살 먹은 아이 머릿속에는 시진핑의 정치구상이 들어있지 않아요. 일곱 살 먹은 아이와 시진핑과 무슨 관계있습니까? 이준석이 국민의 힘 대표된 게 일곱 살 먹은 아이와 아무 관계없어요. 정치에 천재인 애면 몰라도.
아이의 기억은 엄마가 월급 탈 때 엄마가 떡갈비 해주겠다는 그 기억, 엄마가 기분 좋은 때 친구 만나고 올 때 떡볶이 해줬다는 그 기억이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엄마 들어올 때 가방 안에 장 보고 들어왔는지 마트에 갔다 왔는지 그걸 본다고요. 혹시 떡 사왔는지. 그게 선입관이에요, 선입견. 그게 현재성이고 현지성이에요.
인간은 자기의 기억에 의해서 주어진 모든 것을 재해석해서 그걸 끌어 모아서 그걸 자아라고 나의 진리 관으로 의미로 갖고 있다고요. 그래서 뭘 보느냐? 성경 보는 겁니다. 성경 봤다. 보고 난 결론이 뭡니까? 나의 있음으로 봐서 결론은 나의 있음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럼 시작은? 몰라. 어디로 가나? 몰라. 지금 내가 이 땅에 살면서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불편을 적게 얼마나 내가 원하는 것은 신이 나한테 제공하는가, 단순히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그 모르는 기억이 어디서 나왔는지 물으면 땅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뭐밖에 모르느냐 하면 여기 땅 있네. 그 다음에 뭘 아느냐? 여기 내가 있네. 아는 게 달랑 두 개밖에 없어요. 거기서 과학이 나오고 철학이 나오고 정치가 나오고 사회가 나오고 경제 다 나와요. 땅 있네, 현재성이죠. 여기 내가 있네, 현재성. 현재성과 현재성 이 두 가지밖에 몰라요.
땅은 누가 만들었는데? 몰라요. 내가 어디 있느냐? 그것 몰라요. 그걸 왜 모르느냐? 악마가 누가 악마의 위세를 이길 수 있습니까? 못 이기죠. 인간들이 이름을 붙이거든요. 평지에다 이름을 붙인다고. 미국 서부에 가면 산타마리아라고 있어요. 이름 좋잖아요. Santa, 聖거룩한. Maria,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Los Angeles, 천사들의 도시. 이름이 얼마나 고상하고 성스럽습니까.
그런데 미국 서부에 부는 산불은 그 이름 보고 산불이 주춤합니까? “야야야야 산불아, 여기 천사들의 도시래. 들어가면 안 돼. 우리 요까지 불태우고 돌아서자.” 이럽니까? 산불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들이 붙인 지명에 깜짝 놀라서 겁을 집어먹습니까? 인간은 없는 존재에요. 산타마리아 사는 주민들 없었고 로스앤젤레스 주민들 없어요.
애초부터 그들의 명단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는 모든 일은 인간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있음을 더욱 있음 되게 하기 위해서. 오직 이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까 있다는 말은 그냥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음을 만족스럽게 성취하는 그런 존재로서 있음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어요. 끝이에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의 끝은 그것뿐입니다.
나 여기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에스더가 금식하는 이유도 거기 있어요. 하나님, 나 없습니다. 다만 유대 약속만 있게 하옵소서. 약속 있고 나는 꺼져버리게 하옵소서. 약속 있음을 드러내는 조건으로 나는 하나의 접시가 되고 종지기가 되길 바랍니다. 언약이 여기 있네, 라고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나를 금식해서 없애도 나는 좋습니다, 이거에요.
여기에 역대상에 나오는 이름들 있지요. 이름에 나중에 뭐로 바뀌느냐 하면 지명으로 다 바뀌어요. 여기 도갈마, 야완, 디밧 이렇게 있는데, 고멜 있는데 고멜은 야벳의 아들입니다. 고멜은 갑바도기아, 현재 터키 그 지역이고. 마곡은 러시아 남쪽에 흑해와 카스피 해 그 사이에 있는 곡, 마곡 그 동네입니다. 지금 아르메니아 국가일 거예요. 다 그 동네에요. 마대는 지금 아라비아 반도, 야완은 그리스 해안지대, 두발은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에, 메섹도 마찬가지고. 디라스는 에게 해, 이스라엘 바닷가 연안, 도갈마는 아르메니아, 터키 지역. 여기 6절에 보면 쭉 나오거든요.
이 말은 뭐냐? 땅은 없었어요. 땅은 그냥 땅일 뿐이고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는데 땅이 있고 색종이처럼 뭐가 뿌려졌다? 아담의 후손들이 색종이처럼 위에서 뿌려준 거예요. 뿌려지니까 그들이 땅의 의미를 자기 있음 위주로 자기가 영원히 살겠다는 그런 강력한 생존의 의지를 가지고 땅의 지명을 일방적으로 아담의 자손들의 분할한 거예요. 나누기한 거예요. 그래서 지명들이 생긴 거예요.
아담의 자손들의 이런 분할에 대해서 하나님이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언약이 뭐 코로나가 언제 동사무소 무서워서 안 들어오고 그런 것 없잖아요. 아담에 의한 분할을 이뤘는데 아담에 의한 분할로 인하여 그들은 뭘 느꼈느냐 하면 나는 나와 너희들은 모두 이 땅에서 이 땅 위해서 살아 있다고 증명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땅 앞에 뭐가 빠졌지요. 너와 나는 모두 이 땅에서 살아 있다고 주장할 때 땅 앞에 뭐가 빠졌느냐 하면, 이 땅이 무슨 땅이냐 하면 저주받은 땅이잖아요.
지금 이 땅을 누가 장악하고 있습니까? 뱀이 장악했지요. 이 땅에서 자기 생존하겠다는 것은 전부 다 누구에요? 무엇의 후손입니까? 뱀의 후손=인류의 역사. 왜? 땅 없이는 못 사니까. 뱀이 땅 없이는 못 살 듯이 뱀의 속성을 가진 땅 없이는 못 사는 거예요. 땅이 왜 있는지는 모르고 누가 어둠의 세력이 땅을 장악했는지 그것도 모르고 야 땅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문제는 내가 살 수 있는, 그 다음에 내 땅이 필요한 거예요. 이 땅에서 내 땅이 있으면 그 다음부터 뭐가 되느냐 하면 나는 살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땅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땅은 뭐냐? 땅은 의미 판, 의미를 제공하는 판때기, 그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땅입니다. 땅은 의미 판, 인간에게 의미를 주기 위해서 있는 땅, 땅과 뱀의 후손과 관련돼있다면 인간이 갖고 있는 자기 의미도 이건 어느 세력을 못 이기는 의미입니까?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요건을 갖춘 의미에요.
아까 인간은 기억 속에 있다 했지요. 기억은 인간의 선입관을 만들지요. 그 선입관 속에 있는 모든 의미는 백날 노력하고 몸부림쳐봐야 뭘 못 이깁니까? 악마가 주는 그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러한 무지한 의미에 불과하죠. 무지몽매하죠. 어리석고. 그래서 인간의 똑똑함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땅은 필요 없는 거냐? 이 그림 그려놓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이게 땅이거든요. 그러면 이 땅의 의미는 뭐냐? 곡선, 언약의 곡선. 땅과 언약이 접합을 가져요. 접합을 가지면서 가지요. 그러면 이 코스는 뭐냐? a코스, 여기 있는 것은 b. b판에 b밖에 모르는 눈에 땅만 보이는 부동산중개사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땅밖에 모르는 인간에게 언약이 오지요.
그러면 이 땅에는 뭐냐? 영끌 투자의지가 강렬하지요. 돈 다 끌어 모아서 아파트 사라는 투자의지. 여기 a는 뭡니까? 십자가라는 새로운 새 하늘과 새 땅이 등장하는 겁니다. 언약의 땅, 언약을 받아야 할 땅 이 접선지역, 이건 구체적으로 10분 쉬고 두 번째 시간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