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요나 1장 1-2절(심판과 봉사)210630-이 근호 목사
1강-요나 1장 1-2절(심판과 봉사)2106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요나 1장 1-2절입니다.
요나 1:1-2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지난 수요일까지 오바댜를 했습니다. 오바댜에 있어서의 야곱의 적은 에서였습니다. 에돔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건지시고 야곱이 아닌 민족 이방 민족, 에돔을 비롯해서 모든 민족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그런 식으로 이해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요나에 들어오게 되면 이방 민족은 멸망 당하고 이스라엘만 건진다, 가 아니라 이방 민족도 하나님께서 건지시고 이스라엘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신다. 이렇게 바뀌게 됩니다. 오바댜에서 이방 민족과 에돔이 심판받는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심판받았습니다.
그런데 요나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심판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 요나가 니느웨를 위해서 준 책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준 책이라는 생각을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이 요나가 누구 선지자냐 하면, 이방 민족을 위한 선지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실 때 다른 사람에게 계시를 주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에게 주고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파급되도록, 퍼지도록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사용하시거든요.
그러면 선지자를 먼저 하나님께서 다루시고 하나님이 선지자를 다루는 그 꼭 같은 방식으로 선지자가 포함된 이스라엘을 다루신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선지자는 기름 부은 자기 때문에 그 당시에 메시아 노릇을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이야기하면서 니느웨로 가라, 할 때 여기서 요나가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내 근무지가 이스라엘을 위한 근무지거든요. 이스라엘에서 근무해야 돼요. 이스라엘을 위해서 뭘 하라 하면 선지자는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저 큰 성 니느웨로 가서 그걸 외치라. 그러면 니느웨성에 갈 이유가 뒤에 나오지요. 2절에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즉 “니느웨성의 아주 지독한 악이 하나님 앞에 도달되었다. 그러니까 니느웨성에 가서 전하라.”라고 하는 겁니다.
뭘 전하라 하느냐 하면, 바로 “너희 여호와 이스라엘 하나님이 딱 보니까 니느웨 성 당신들이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서 니느웨성을 심판하기로 했습니다.” 이걸 전하라, 라고 지시를 내린 거예요.
그런데 이 사실을 왜 아무 연관도 없는,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 되어 있는 이스라엘 선지자보고 전하라 했는가? 이것이 요나 선지자가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요나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요.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다면 하물며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뭔가 잘못 알고 있다 하는 점을 요나부터 시작해서 우리에게 그냥 전달하려고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뜻을 일단 본인이 받고 그 하나님의 뜻을 받은 것을 통해서 ‘아, 내가 뭔가 잘못 알고 있었구나.’ 하는 그 점을 먼저 깨닫고 그다음에 그 요나 선지자의 안목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에게 ‘나도 잘못했듯이 너희들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뭔가 잘못 오해하고 있다.’라고 전하는 사명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요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인간들은 어떻게 잘못되었는가? 그다음에 그 잘못된 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수정하는가? 이 두 가지 점을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인간의 선입감이 뭐냐 하면, 하나님하고 우리하고는 막역한 사이고 잘 아는 사이기 때문에 심판에서 면제해 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은 아주 치명적인 큰 과오입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심판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심판은 이스라엘에게서 나오는 겁니다. 사람들은 심판이 하나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그냥 하늘만 쳐다보고 하나님 보시기에 그냥 바르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굳이 이스라엘을 택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이방 나라를 심판할 때 하나님께서 그냥 이방 나라를 심판했습니까? 아닙니다. 누굴 보냈느냐 하면,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 민족을 심판했어요. 하나님과 함께 있는 민족과 그렇지 않은 민족을 전쟁을 하게 해서 말입니다. 여리고성에 있던 기생 라합이 하나님의 계시 받아서 여리고성에서 나왔습니까, 아니면 누굴 만났습니까?
이스라엘 정탐꾼을 만난 거예요. 이스라엘 정탐군은 어디 소속이냐 하면, 이스라엘 소속이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들에게 너희들이 심판받는다는 소식을 전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 점이 기존의 이방인들 또 인간들이 기존에 생각했던, 신이 심판한다는 이 선입감을 완전히 부숴 버리지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네 생각이라는 겁니다.
신약에 오게 되면 제가 한 이야기가 이상한 이야기가 아닌 이유가,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것,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호와의 무서움 같은 것은 다 알고 있거든요. 그러나 정작 그들은 누구를 무서워하지 않았느냐 하면, 예수님을 안 무서워 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 나를 믿지 않는 것은 곧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과 직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예수님은 하나의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그때나 지금이나 영원토록 걸림돌이 되는 이유가, 자기가 하나님하고 직통으로 바로 상대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는 선과 악에 대해서 지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선하면 하나님께 칭찬받고 악하면 벌 받는다. 따라서 이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내가 굳이 의도적으로 하나님한테 범죄할 이유가 없다. 바르게 살자. 그러면 칭찬, 칭찬, 칭찬이 있을 것이고 덩달아 복, 복, 복이 있을 것이다.’ 이게 인간들의 타고난 인식이에요.
이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인간들이 알아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담의 자손들은 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그렇게 나와요. 그 자동을 엎어버리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나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심판한다는 그 사실을 누구도 몰랐느냐 하면 이스라엘 본인들도 몰랐어요. 그들은 자기네들이 하나님의 사랑받아서, 택함 받아서 구원받으면 그걸로 okay, thank you, 그걸로 끝나는 줄 알았습니다. 그걸로 이제는 하나님과 우리가 좋은 사이가 되었기 때문에 저 이방 민족이야 죽든 말든 우리하고 상관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심판하면서 그 이방 민족와 이스라엘이 전혀 차이가 없다는 사실, 그것을 이스라엘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는 똑같은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사람들은 받아들이기 곤란해 했어요. 참 힘들어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내에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궤라는 것이 있거든요.
이스라엘이라는 존재가 참 신기하고 또 기이한 이유가 이스라엘 내에 언약궤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해 보세요. 이 우주에, 이 세상에 하나님의 저주가 내려지고 또는 복이 내려지고, 심판이 주어지는, 그 심판이 이 세상의 어떤 특정, 하수구 같은 어떤 특정 장소, 좁은 한 장소에서 그 심판과 저주가, 이 세상을 삼킬만한 가공할 만한 저주가 나온다는 것을 감히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습니까? 어떤 한 특정 장소에서.
그 지점을 다른 민족은 갖고 있지 않아요. 이스라엘만 갖고 있어요. 그게 바로 언약궤입니다. 길이가 120센티, 폭과 높이가 60센티짜리 아카시아 나무상자, 그냥 쉽게 해서 통, 그 통 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내릴 수 있는 모든 저주와 심판이 거기에서 다 터져 나오는 거예요. 맨홀 구멍도 그런 구멍이 없어요. 맨홀 구멍 같아요. 거기서 모든 저주가 다 쏟아지는 겁니다.
이 세상 지구가 그렇게 넓잖아요. 그렇게 넓어도 오직 한 지점에서만 저주가 나오는 거예요. 한 지점에서 심판이 나오고. 그래서 심판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등장하는데 그 장소가 언약궤입니다. 따라서 이미 그 심판을 이스라엘이 어떤 행위로도 어떤 행동으로도 그 심판과 저주를 커버할 수 있는 인간의 태도나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담의 후손에게 있어서 심판은 기정사실이기 때문에. 인간의 어떤 행위를 한다 할지라도 심판이 터져 나오고 저주가 터져 나오는 언약궤가 있는 이상 터져 나오는 멈출 수 없는 그 심판과 저주에 대해서 더 이상 달라질 게 전혀 없습니다.
이 말은, 나의 행동이 나의 운명을 바꾸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미 인간은 이스라엘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그 언약궤에서 터져 나오는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라는 이것은 확고합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갖고 있으면서도 하나님 앞에 멀쩡하다는 그 멀쩡함,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누구보다 가까이 있으면서 멀쩡하다 할 때 그 멀쩡함에 대해서 크게 그들이 오해를 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 태도와 행동 때문에 그 저주와 심판이 우리 이스라엘에게 임하지 않는다, 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구약으로 돌아가서 만약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여기 있다 합시다. 우리는 “아이고, 무서워라. 다 피하라.” 시한폭탄이라면서 피해도, 지구 끝에 가도 못 피해요. 우주 끝에 가도 이 저주와 심판이 덮치게 되어 있어요.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은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 땅에 태어났다는 그 이유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에서 피할 자가 없다, 라는 사실을 아는 그것이 이스라엘만의 특권이에요. 이스라엘만의 복이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아무도 심판을 변경하거나 그걸 지연시키거나 중지할 수 있는 인간의 어떤 행동이나 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거 명확해야 돼요. 분명히 해야 됩니다. 잘났다고 심판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그 이스라엘 이전에 노아홍수도 마찬가지고요. 노아홍수 일어날 때 제가 방금 명칭을 노아홍수라 했지만 그 당시에 홍수심판을 받은 사람에게는 노아홍수가 아니고 그냥 홍수였습니다. 그냥 비가 많이 와서 모든 육지가 물에 잠기는 그 자연재해였습니다. 그들이 그 자연재해를 보고 느끼는 것은, 노아가 아니라 누구도 살아날 자가 없다는 것을 물에 잠기는 사람은 다 알아요. 물에 잠기는 사람, 인간이라면 다 알아요.
그리고 그 사실을 누가 아느냐? 노아 본인도 알아요. 내가 잘난 게 없다는 것을, 내가 훌륭해서 노아 집 앞까지만, 그러니까 노아 집에는 물이 안 들어오고 나머지는 물이 차는 그런 법이 없다는 것, 내가 살던 정든 고향 복사꽃 피는 고향까지 물에 다 잠겨버려요. 특정 인간은 훌륭하다, 특정 인간은 악하다, 가 아담의 후손에게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노래대회에 심사위원들 있잖아요. 노래 끝나자마자 즉석에서 자기 점수를 자기만 알도록 심사를 해줘요. 해주고 난 뒤에 그다음에 노래 끝낸 가수한테서 인생에 대해서 사연을 들어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가수는 자기가 트로트 가수가 되기 전까지 조실부모하고 그동안 나쁜 사람 만나서 안가야 될 곳에 갔다가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개과천선해서, 새사람 되어서 그래도 이제 병든 어머니 모시고 내가 이제 할 줄 아는 것은 노래밖에 없어서, 노래 잘 불러서 하루 열 몇 시간 택배기사 하면서 틈틈이 트로트 노래해서 오늘 5승째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야기에요.
그것 듣고 있던 심사위원이 막 눈물 흘리면서 ‘세상에 인생 저렇게 어렵게 사는 사람이 있구나’ 백날 울어도 이미 점수는 줬어요. 그런 사연 있다고 해서 동정표 받아서 점수가 변경되는 법은 없습니다. 인간은 이미 심판이에요. 그게 언약궤의 존재 이유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 모두 죄인밖에 없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이 저주 내려야 될 대상이에요.
거기에다 인간이 자기 동정, 나 이렇게 바르게 살았잖아요, 착하게 살았잖아요, 백날 해봤자 하나님이 절 사랑했잖아요, 백날 해봤자 언약궤가 없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인생을 사는데 아무 이유가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심판이 기정사실이기 때문에 그래요.
심판 아래서 노아홍수, 물에 빠진 그 사람이 물에 빠져서 허우적대면서 보니까 옆집도 같이 허우적대거든요. 물속에서 1분 동안 숨 쉬면서 둘이 반갑다, 손잡고 인간이 사는 이유가 뭐냐, 물속에서 그런 이야기한 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의미 없어요.
참 인간이 어리석은 것이 이 세상 자체가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로 인하여 심판을 이미 내렸다고 결정했으면 인간의 어떤 태도로도 그게 철회 안 되거든요. 인간이 뭘 한다고 해서 사정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 행동만 현장에 일어날 뿐이에요.
이게 무슨 뜻이냐? 이런 뜻입니다. 만약에 부부가 이야기하면서 남편이 아내보고 난 당신을 사랑해, 라고 했다 그 말이지요. 남편이 아내보고 난 당신을 사랑해, 라고 했을 때 그 현장에서 남편이라는 작자가 아내한테 나는 당신을 사랑해, 라고 말했다는 그 일만 남아 있어요. 그 일만 남아 있고 아내에게 사랑은 생기지 않습니다.
이게 인간의 일이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뭐라고 오해를 하느냐 하면, 내가 당신을 사랑해, 라는 말을 함으로 말미암아 남편에 대한 사랑이 없던 아내에게 사랑이 생길 것을 은근히 독촉하고 고대하고 예측하고 기대하고 있어요. 그것은 잘못이에요. 왜냐하면 세상은 심판 아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추가적인 행동을 한다고 해서 그 심판받는 상황은 달라지지를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몸부림치고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심판은 기정사실이에요. 이미 가수의 그 점수는 끝났어요. 점수 바꾸려고 온갖 아양을 떨고 찬양을 해봐야 그것은 소용없는 일이에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심판하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이스라엘 하나님의 특징입니다. 다른 신과 달라요.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한다니까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심판한다고 경고성 멘트 날린 줄 알고 이 심판에서 모면하기 위해서 제가 뭘 해야 됩니까, 라고 회개할까요, 금식할까요, 이렇게 나온다는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상상은 선악과의 체계에 임한 악마의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심판의 하나님의 개념이 그런 개념으로 나오는 거예요.
“내가 심판하러 간다. 정신 차려라. 회개해야지. 빨리 수습해라.” 허겁지겁. 이것은 군대 간 남자들은 알아요. 군대 가서 조용하게 밥이나 축내면서 대충 보초 서고 대충 시간만 때우면서 지내는데 갑자기 사단장 온다 해보세요. 사단장 온다는 그 기간만큼이 군대 생활 3년에서 제일 혹독한 기간입니다.
사단장 온다고 하면 오는 길목부터 싸리비로 청소 다 해야 돼요. 대대장은 지금 대령으로 진급하냐 못하냐 그게 심각한 문제거든요. 나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진급 생각하기 때문에 병사들 막 족치지요. 구석구석 살피면서 사단장 비서한테 전화해서 몇 시에 도착하는지 알아보느라 바쁘지요. 그래서 오후 2시에 오기로 되어 있는데 오후 1시 50분에, 사단장이 군단장 회의 때문에 바빠서 다음에 온대.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한두 번이. 학교에서도 쌤 온다 하면 갑자기 애들 조용해지잖아요.
하나님이 심판한다는 것은 네가 정신 차리고 바르게 살게 되면 너 심판 사정 바뀌게 해줄 게. 그런 심판은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자기 살고 싶어서 배후에서 마귀가 조장한 거짓된 심판의 하나님이에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만약 그런 하나님이라면 요나 태도가 맞습니다.
왜냐하면 악독이 하나님께 상달되었기 때문에,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내가 간들 안 간들 나는 어디까지나 이스라엘 선지자에요. 그리고 이스라엘 선지자에게 확실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곳은 무조건 멸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에 무조건 구원받게 되어 있고요.
이것을 오바댜에서 확실히 봤습니다. 에서는 저주받게 되어 있고 야곱은 복 받게 되어 있고. 끝. 이게 하나님의 약속. 여기에 무슨 다른 혜택이 들어갈 틈이 없지요. 다른 틈이 없는 겁니다. 이점을 알아야 돼요. 니느웨 사람들이 그들만 악독을 행해서 심판받는 게 아니에요. 악독은 온 인류가 다 악독이에요.
하나님의 기준에 충족되지 못하면. 니느웨 사람이 심판을 받아야 되고 요나가 거기 가야 될 이유는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심판을 통해서 자신들이 은혜 입은 자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요나가 거기에 가야 하는 겁니다.
동의하지 않는다는 눈빛들이신데요. 이스라엘이 자기 이스라엘 본연의 위치를 잊어버렸어요. 이스라엘 속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저주와 심판이 나오는 구멍이에요. 이것은 말릴 수가 없어요. 계속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이스라엘이 언약궤와 더불어서 함께 일상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언약궤를 커버하는 것이 인간의 행함이 아니고 회개가 아니에요. 바로 소와 염소의 피입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그 저주와 심판을 하나님 몸으로 덮어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의 살과 피로 덮어버리는 겁니다.
옛날 월남 파병할 때 육군 훈련소에서 신입병이 수류탄을 잘못 던졌잖아요. 그런데 대위 하나가 자기 몸을 던져서, 하도 오래전 이야기가 되어서 이름도 잘……, 강재구 소령이지요, 그 사람이 죽고 나서 진급해서 소령이 되었지만요. 그 사람이 자기 몸을 덮어서 파편이 안 튀게 만든 거예요.
하나님이 심판 내리시고 하나님이 그걸 덮어버리는 겁니다. 그걸 누가 알아야 되느냐? 니느웨 사람이 문제가 아니에요. 누가 알아야 되는가? 이스라엘이 알아야 돼요. 특히 이스라엘 선지자가 알아야 돼요. 요나가 알아야 돼요. 요나는 지금 내빼기 바빠요. 남의 나라 심판받는데 내가 왜 가야 됩니까? 나는 이스라엘 선지자인데.
아직도 요나의 사고방식은 뭐냐? 요나의 사고방식이 그 당시 이스라엘 사고방식하고 똑같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켜준다는 거예요.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심판에서 면제된다는 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우리 교회가 여기 있잖아요. 여기서 한 10킬로쯤 떨어진 곳에 동화사가 있잖아요. 우리 교회 지옥 가고 동화사 중들이 천당 가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는 막 복음 전하고 복음만 생각했는데 목탁만 두들기는 저 인간들이 천국 가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 선지자로서는 납득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너는 가서 동화사 중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것을 전해라. 동화사 중들에게 그게 먹혀들 필요도 없고 먹혀들 가능성도 없는데, 안 그래도 우리 교회도 바쁜데 동화사 왜 가야 됩니까?
놀라운 사실은 그 니느웨 사람들이요, 요나 선지자에게 호의적인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전하는 그 소식만 빼먹고 막상 소식 전한 요나는 내쳤어요. “아이고, 선교사님! 여기까지 일부러 오셨습니까? 고래 타고 오셨습니까? 우리가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를 대접할 생각이 들 수가 없습니다.
만약 니느웨 사람이 요나를 대접했다면 이는 ‘심판 받지만 심판에서 면제할 방법도 하나님이 주셨구나. 우리에게 심판소식을 전한 요나선지자를 잘 대해주면 저분은 하나님의 종이고 선지자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심판을 취소시킬 가능성이 있다.’ 하고 잘해줬을 것인데 요나서에는 그게 없어요. 알맹이만 빼먹어요. 우린 끝났다. 끝났어요.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요나가 전한 소식 심판 소식, 멸망 소식이 더 중요한 거예요.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이 늘 우리는 마땅히 심판 받아야 되는 것을 하나님의 본 자손 되는 이스라엘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살고 니느웨 사람들은 우리가 심판받아야 마땅함을 요나가 전하니까 그제야 그게 실제상황이라는 것을 확 받아들인 거예요.
더 쉽게 가겠습니다. 이게 아주 쉬운 거예요. 뭐냐하면 니느웨 사람들은 줄곧 자기 생각만 하다가 요나가 심판 소식을 전하니까 그때부터 자기 생각을 접어버리고 하나님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생각은 원래 누가 해야 되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해야 돼요, 이스라엘이! 요나가 해야 돼요, 요나가!
하나님 생각해야 될 선지자가 자기 생각만 해서 도망칠 생각하잖아요. 하나님하고 나하고 다 아는 사이고 막역한 사이인데 서로 좋은데 좋지 않습니까, 이런 식이에요. 그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 소식을 들었을 때 더 이상 나를 위해 남겨진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나를 위해 남겨진 세월은 이제는 없습니다. 없는 거예요. 내 생활이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곧 멸망 받을 게 아니라 이미 그 소식 자체가 그들에게는 나를 없애는 심판 그 자체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축도 사료 다 끊겼고요. 갓난애들 젖도 못 줘요. 어른은 물론이고요, 온 나라가 금식해 버렸어요. 가축조차도.
밥을 안 먹었다 그 말은 나 위주로 사는 것은 오늘로 끝났다 그 말입니다. 이제 우리가 기다릴 것은 하나님의 심판만 기다리면 돼요. 니느웨 사람들은. 그런데 그 니느웨 사람들의 그 모습 자체가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통해서 저주와 심판이 그 상자에서 나오게 했을 때 하나님이 인간세계에서 원래 원했던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것을 원했던 바에요.
실제로 역사적 사실로서 이스라엘은 출애굽했잖아요. 출애굽 시절로 이스라엘은 늘 돌아가 있어야 돼요. 원위치. 괘종시계를 보세요. 아무리 진자가 흔들려서 위로 올라가더라도 항상 제자리에 오잖아요. 아무리 가더라도 제자리에 옵니다. 그 제자리가 뭐냐?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시작했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주께로 가는 그 자리에요.
그런데 요나는 지금 시계추가 저 위로 가 있어요. ‘심판은 주님께서 알아서 하시고요. 나는 좀 쉴게요.’ 가버리는 거예요. 마치 이게 뭐와 같으냐 하면, 수술실 의사가 아주 비장한 마음으로 긴장 바짝 해서 준비합니다. 수술복 입고 간호사 의사 대동하고서. 재벌 회장 수술이라서 이 수술만 잘하면 병원 잘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라서 긴장 바짝 하고 수술 시작합니다.
“메스!” 아는 게 메스밖에 없어서, 하여간 그렇게 수술 들어갔는데 한 간호사가 자기 일도 아니라고 여기고 심심하니까 재미없다고 놀러 가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수술에 지장 되지요. 그 간호사가 요나입니다. 놀러 간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심판은 그다음에 우리에게 뭘 하느냐? 봉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맡깁니다. 봉사.
심판을 제대로 안다면 그다음에 심판에서 봉사로 나와야 돼요. 나 뭐 십자가 피 믿고 구원받았는데……, 이렇게 주장한다면 “실례지만 어느 병원 간호사이십니까? 허병원 간호사세요?” 자기가 주인공 아니라고, 심심하다고 자기는 자기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니느웨 사람은 자기 생각을 끊어버렸는데.
이게 고린도후서 11장 23-28절 제가 읽어볼게요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왜 이렇게 합니까? 심지어 여러 번 굶었어요. 일용할 양식도 없어서 그냥 굶었어요. 주기도문 못 외었어요? 그런 것 아니에요. 굶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왜 이렇게 고생을 많이 합니까? 이것은 자기가 죽는 것이 자기에게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일에 간호사로 봉사한다는 이 봉사가 나 죽는 것, 나 다치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 쉽게 말해서 내가 아픈 것이, 내 몸이 아픈 것이 내가 아픈 게 아니라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생각이 없어요. 이게 내가 사는 것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금식할 때 이것이 자기 일이 아니에요. 이렇게 하게 되면 살려줄 것이라는 통박을 굴리고 꼼수를 쓰는 게 아닙니다.
그냥 현장이에요. 하나님의 심판이 그냥 우박처럼 내린 거예요. 마치 노아홍수 밑에 빠져 죽은 사람들처럼 그냥 심판 앞에 다들 빠져 죽은 거예요. 봉사라는 것은 심판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고 심판 안에서의 구원이기 때문에 날마다 주의 심판을 받아야 돼요. 백신만 맞지 말고 심판을 늘 받아야 돼요.
늘 받을 때 사는 게 신기해야 되고 멀쩡한 게 이상해야 돼요. 날마다 금식해도 마땅한데 날마다 김밥 먹고 낮에 라면 끓여 먹고, 이게 이상해.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새벽 1시고 2시고 잠이 안와야 됩니다. 주님의 심판의 대상, 의가 하나도 없는 것 같으면 마땅히 심판받지요.
그런데 새벽 1시 2시가 뭡니까? 저녁 8시만 되어도 잠만 잘 오더라. 푹 자요. 푹 자. 잠만 잘 자요.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멀리 선교 안가도 그게 선교에요 이게 선교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 ‘주여, 너무 봐주는 게 아닙니까?’
뭐 자기 인생에 대해서 저주하고 남보다 더 처참한 인생 살았다고, “택배기사 하면서 짬짬이 노래해서 5승 했습니다.” 그래서 내 운명 바뀝니까? 무슨……, 인간의 운명이라 하는 것은요, 마귀가 지어내면 몰라도 주님한테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봉사를 했다 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봉사를 통해서 원하는 것이 뭐냐? 대체 무엇을 원하느냐?
누가복음 11장 29-30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요나의 표적이 뭐냐 하면, 니느웨 사람들도 심판받고 요나도 심판받고 이스라엘도 심판받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위치는 요나가 배에서 떨어져서, 물론 자발적이지만 배에서 떨어져서 물속에, 바다 속에, 시퍼런 파도 속에 빠지는 것, 그것이 이스라엘의 자기 자리에요. 원래 이스라엘의 자리가 그 자리에요. 그리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그 자리가 이스라엘 원래 위치해야 될 그 자리에요.
그걸 이스라엘이 모르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이 가장 큰 나라였으니까요. 여로보암 2세 때지요. 나라가 커지니까 교만한 거예요. 심지어 선지자까지 그 모양이에요. 요나까지 그 모양이에요 요나로 하여금 원래 이스라엘 자리 집어넣는데 그 이스라엘 자리가 뭐냐? 요나가 성전 쪽으로 바라본 것은, 하나님 일에 관심 있는 것은 바로 물고기 뱃속이었어요. 거기서 성전을 향하여, 성전이 어느 쪽인지 나침반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뭐라고 기도했느냐? 요나 2장에 나오지요. “하나님이여, 이제야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한 것을 이제는 믿겠습니다.” 죽음에서 구원해요. 구원이라는 말은 그냥 하면 안 돼요. 구원이라는 말을 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 받을 것이다, 가 아니라 심판 속에 이미 들어온 사람으로서 지옥에 있으면서 지옥에 있을 때만 가장 천국이 좋아 보여요. 감사해 보이고 좋아 보이고 귀해 보이고 감격스럽지요. ‘아, 내가 뭐했다고 천 국갑니까?’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심판받는데 이유 없습니다. 괜히 호들갑 떨면서 자기변호하고 자기변명 하지 마세요. 인간이 변호하고 변명한다는 것은 지금 본인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나 인간이, 우리가 심판받는 것은 내가 잘못해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고 심판하고자 하는 주의 일에 참여했기 때문에 심판받는 거예요.
남보다 성질이 더 더러워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고, 니느웨가 악독이 있다는 것은 니느웨만 악독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샘플이거든요. 샘플 아시지요. 조그마한 화장품 샘플. 그 조그마한 니느웨, 하나님께서 니느웨 회개했다고 구원할 때 그다음에 나중에 앗수르나라 멸망시켜 버려요. 왜냐? 하나의 시범이니까, 샘플이니까.
이스라엘을 위한 선지자에요. 이스라엘이 뭐가 잘못되었는가? 이스라엘 본인이 자기 위치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자로 하여금, 니느웨에 요나로 하여금 가게 하시는 거예요. 출장 보낸 거지요. 아무것도 아닌 그저 하나님께서 너 심판한다, 무심코 던진, 무심코는 아니지요, 귀찮아하면서 쏟아버린 그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니느웨 사람들은 이것은 불가능할 정도로 한꺼번에 왁, 하고 다 무너진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자기 생각만 하다가 심판하시는 하나님 생각만 하는 순간 그들은 그 자체로 이미 회개가 되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바깥에서 보면 은혜 받았지만 그 안에는 뭐냐?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하나님의 심판성은 내게 정당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 그걸 바깥에서 보면 구원받은 것이고 은혜받은 거예요.
바로 요나는 예수님처럼 이 땅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예수님처럼 심판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심판이 나온다는 사실, 너희가 아는 하나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예수님을 통해서, 제대로 진짜 심판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줬듯이 그 당시에는 요나를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오늘날 우리를 통해서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하신 일을 나 좋으라고, 나 잘되라고 일방적으로 끌어당기지 말게 하옵소서. 그것이 어리석은 이스라엘의 태도였고 불신앙인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아서 다시 십자가, 날마다 본래의 우리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이끌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