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10625a 누가복음 6장 32절(예상)-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10625a 누가복음 6장 32절(예상)-이 근호 목사
오늘은 209페이지 다니엘 70이레의 비역사적 해석, 209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인간의 주체성은 명목상 ‘역사’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그렇게 되어 있죠. “인간의 주체성은 명목상 ’역사‘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여기서 인간,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가 주체성, 그 다음에 역사, 역사라는 개념. 만약 인간이 없다면 주체성 없게 되고, 역사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를 다 없애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하실 일이에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인간 없애고, 인간 없애면 주체성 없고, 주체성 없으면 역사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거 다 없애는 거에요. 인간, 주체성, 역사 다 없애는 겁니다. 없앤다는 말은, 이 세 가지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게 자아에서 나왔거든요. 자아, 나. 나에서 나왔다. 내가 나를 보면서 인간이라고 하고, 인간이 만들어졌으니까 나는 어떻게 하느냐, 나는 어떤 존재냐 하는 주체성, 그리고 그 주체성이 역사를 만들 때 여기에 뭐가 들어가냐 하면 노동을, 일을 하게 되어 있어요.
노동이 힘든 이유는 일이 힘든 것이 아니고, 반드시 여기 뭐가 들어가서 인간을, 자아를 힘들게 하느냐하면 예상을 하기 때문에 힘든 거에요. 인간이 노동하면서 예상 없이 노동하는 거 봤습니까? 반드시 요거 하게 되면 요거 얻을 수 있다, 라고 생각하죠. 예상하는 것이 사람을 힘들게 하는 거에요. 예상한다는 것은 과거에 내가 이렇게 기대했는데. 자, 과거 나오죠. 지금은 현재고, 미래는 내가 여기에다가 노동을 투입했으니까 투입한 성과만큼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예상하고 인간은 일을 하는 겁니다.
노동이 일이죠. 주께서 이거 다 없애죠. 주체성, 노동, 이거 다 없앱니다. 역사도 예상하니까 다 없애버려요, 허구죠 허구.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건 자아를 없애면 한꺼번에 다 없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신, 자아가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을 못해요. 생각을 못하고 일단은 내가 여기 있으니까 여기 있는 나가 예상을 하는 거에요. 내 노동, 노동이라고 표현했는데, 행함 또는 행동, 일 다 같은 말입니다.
자, 내가 노동을 하고 이렇게 예상하게 되면 하나님을 위해서 내가 노동하게 되면 그 결과를 예상하기는 천국 간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걸 없애는 방법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언약, 즉 약속이죠. 약속을 이 땅에 보내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성경을 보면서 제일 신기했던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이 땅에 들어왔다는 게 참 신기했어요.
하나님이 이 땅에 들어와서 지하철 탄다고 생각해보세요. 하나님이 이 땅에 와서 백신 주사 맞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거리에 두리번거리고 구경 다니고, 하나님이 식사 같이 하고, 잠 오면 밤 되면 주무시고 이게 얼마나 신기한 일이에요? 하나님인데, 그냥 하늘에 계시면 되는데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오신 거에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섞였다고만 생각하지, 오셔서 어떤 변화, 바꿔치기 하는 거, 어떤 일으키는 변화가 뭔 줄을 모르는 겁니다.
그것은 없애는 겁니다. 오셔서 하시는 일이 자아 없애고 이거 다 없애버리는 거에요. 주님께서 어슬렁어슬렁 거리는 거, 그게 전부 다 이걸 없애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럴 때 언약이 언약대로 구현된다, 또는 성취된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문지영이라는 여자 분이 있는데, 나이가 서른 됐나 모르겠어요. 이 사람이 피아니스트에요. 잘 못 들어봤죠? 조성진, 임동혁, 임동민 이 사람들은 유명하죠? 문지영, 이 사람은 잘 못 들어봤을 거에요. 아버지, 엄마가 1급, 2급 장애인이에요. 굉장히 가난해요. 한 달에 80만원 최저생계비 받고 살아가는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사람이 2015년도 busoni 스위스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콩쿨에서 15년 동안 우승이 없었어요. 그 콩쿨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1등할 만한 사람이 없으면 1등은 안뽑고 2등만 뽑는 그 대회에서 15년 동안 비어있던 1등을 동양인 최초로 우승한 사람이에요. 거기 말고도 유명한 콩쿨에서 우승했는데, 어릴 때 일곱 살 때 집에 피아노가 없었어요. 그래서 교회나 근처 학원에 가서 아이가 사정을 하는 겁니다.
처음에 피아노 알 때는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은데, 자기 집에는 피아노가 없으니까 건반을 그림으로 그리고, 휘파람을 속으로 불면서 손가락으로는 치고 이렇게 피아노를 자습하는 거에요. 나중에는 커서 교회 같은데 부탁해서 하루 6시간씩 연습했는데, 이때 이 사람 별명이 참 중요해요. 별명이 뭐냐 하면,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 피아니스트가 집에 피아노가 없어요.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
인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있어요. 그러면 유대인은 뭐냐, 하나님이 있는 유대인이 돼요. 하나님이 있는 유대인. 그 하나님이 있는 유대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인간이 있고, 그 인간이 있으니까 자기 주체성과 역사를 접지를 못하잖아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있으면 뭐가 둘러싸느냐 하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시간과 공간의식 속에 인간이 둘러싸여 있는 거에요. 하나의 캡슐처럼, 풍선 안에 들어오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 시간이 역사죠. 공간이라는 것은 자기의 출신, 내가 어디 출신이다, 이걸 갖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야 인간의 자아가 구성이 되고, 유지가 되니까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 없는 하나님으로 오신 거에요.
하나님 없는 하나님. 하나님 없는 하나님에다가 뭐 하나를 또 추가하느냐 하면, 인간 없는 인간을 또 추가해요. 그렇다면 예수님은 바로 인간과 하나님 모두를 인간의 주체과 객체 모두를 예수님 하나에 다같이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할을 다 하고 있다는 말이죠. 이 말은 이 땅에 인간도 없을뿐더러 자아도 없고, 역시 하나님도 없는 셈이에요.
하나님이 없는데 인간들이 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요청하는 겁니다. 요청하는 거에요. 내가 있기 때문에 나는 질문할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아 하나님께서 만드셨구나. 내가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설정할 수밖에 없어요, 나를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인간과 하나님이 되셔서 기존의 하나님도 없애고, 인간 자체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인간 같은 인간 없고 하나님 같은 하나님 없다, 이렇게 설명이 되거든요.
물줄기를 한번 상정해 보겠습니다. 위에서 처음에 물이 가득한 데서 물줄기가 흐르면 내려오면서 물이 퍼지겠죠. 물줄기가 퍼진단 말이죠. 그렇다면 처음에 내려오는 한 물줄기가 아무리 가짓수가 벌어져도 전부다 한 줄기에서 나왔죠. 이거 굉장히 쉬운 말이죠. 어렵지 않잖아요. 하늘에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하나님을 가지고 물줄기 삼아서 지상으로 내려 보내 버리면 이게 언약이 돼요. 언약.
언약 안에는 진짜 인간, 진짜 하나님이 다 들어있는 거에요. 진짜 인간, 인간이니까 다른 말로 하면 자아죠, 자아. 그래서 진짜 인간은 예수님밖에 없다면, 진짜 자아도 예수님이라는 그 분, 그 참된 인간의 자아만 하나님께서 인정합니다. 그러면 지상에 있는 여러 가지 자아들이 있잖아요. 온갖 우리를 포함한 자아들, 이 자아들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그들의 자아를 인정하고, 긍정하면서 신, 곧 하나님이죠. 하나님과 기어이 만나려고 애를 쓰는 거에요.
하나님께 잘해보려고 여러 가지 말씀으로 애를 쓰겠죠. 그런데 여기에 예수님을 검다고 합시다. 예수님의 검은 자아가 위에서 내려와 버려요, 위에서 내려와 버리면 이 자아와 이 자아가 충돌이 되지요. 이 예수님의 자아가 우리 자아를 문제 삼는다, 또는 시비 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문제 삼는 거에요. 우리에게 시비를 거는 겁니다. 네가 말한 자아는 원래 없는데 너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지? 너 어디서 나온 거야? 라고 질문을 던지는 거에요, 하나님의 언약으로.
예를 들겠습니다. 누가복음 6장 32,33절에 보면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라고 되어 있죠. 여기에 누가 나오느냐하면 너희가 나와요 너희. 우리 인간 보고, 자아들 보고 너희라 합니다.
너희, 자아들. 자아+자아+자아들이 되겠죠. 자아들에게 뭐라 하느냐하면 '너희들아 내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약속으로 한번 너희에게 문제 삼는다' 문제 삼는 거에요, 약속으로. 너희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면, 이것은 죄인들도 그렇게 한다는 거에요. 죄인들도 그 정도 수준이라는 거에요. 그러면 실컷 저희들끼리 좋다, 좋다 했는데. 죄인들이니까, 죄인들은 죽으면 어디 갑니까? 지옥가죠. 지옥 가는 사람들도 그 정도는 할 줄 안다, 이 말이거든요.
그러면 너희 유대사회의 자아들이 하나님 만나서 천국에 가겠다 하는 사람들은 뭘 해야 하느냐 하면, 죄인들도 할 수 있는 그것보다 더 많이 해야 되겠죠. 저 사람이 내게 안잘해줘도 내가 잘해주는 그 정도까지 나가야된다, 이 말이죠. 그렇죠? 그러면 저 사람이 나한테 잘한다, 못한다 판정을 누가 합니까? 자아가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누가복음 6장, 산상설교 등 말씀을 가지고 이 자아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판정하는 그 기준, 자아가 만든 기준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옳다, 그르다를 판정하는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거에요, 시비거시는 거에요. 저 사람이 내게 못해줘도 나는 누가복음 6장 32절처럼 잘해줄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죠. 인간의 생각으로써. 그런데 잘해줬다, 못해줬다는 기준이 뭡니까? 못해줬다 잘해줬다 기준을 누가 정했어요? 본인이 정한 거에요, 본인이. 본인이 정한 거라고요.
그래서 계속해서 제가 정한 그 기준이 잘했다 못했다 기준인데, 내가 제대로 기준 정해서 한번 따져볼까 이렇게 나왔을 때는 아무리 자기를 죽이는 원수를 사랑해도 무엇의 한계를 못벗어난다? 자아의 판정이라는 한계를 자아가 벗어날 수가 없는 거에요. 제가 정한 한계를 제가 벗어날 수가 없는 거에요. 주님께서 이걸 문제 삼는 거에요. 시비 거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 당신은 우리에게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가?
자아? 내가 할게. 하나님? 내가 할게. 내가 하려면 시비 걸어서 인간의 한계가 ‘아, 나는 자아 노릇도 제대로 못하는구나.’ 자아 노릇 못하면 아까 세 가지 얘기했죠. 내가 인간이라는 것도 인간이 아니올시다, 그 다음에 주체성, 이것도 아니고, 거기서 나온 나의 예상, 나의 노동력의 효과, 결과, 기대 이런 것도 하나의 뭐냐 하면 다 허빵이고 허구에 불과한 거에요,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다 허구에 불과한 거에요.
주님께서는 내가 알아서 할게. 왜? 너희들 생각하기에 나는 뭐냐 하면 피아노 없는 피아니스트니까. 따라서 너희들이 말하는 인간도 없고, 너희들이 말하는 자아는 없고 너희들이 말하는 하나님도 나한텐 없다 이 말이에요. 오직 예수님 자체가 말씀이 육신이 된 겁니다. 문제가 곧 답이 돼 버렸어요. 문제 풀어라가 아니라 문제 자체가 곧 답이에요. 그 앞에서 풀 생각해선 안돼고요.
옛날에 초등학교 때 많이 했잖아요. 머리 좋아진다고 암산. 75492전이요, 42359전이요 플러스 얼마 하잖아요. 그러면 수판 들고 계산하잖아요. 그 계산 하지마! 그러면 뭐하느냐? ‘75492’ 그게 답이에요.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가 답이 되는 거에요. 그 플러스에서 어떤 값을 내는 거, 그 값에서 인간은 탈락이란 말이죠. 인간은 값을 내면 안돼요. 인간은 내가 뭘 한다는 그 자체가 있지도 않은 자아가 그 짓한, 허구적인 것이 허구적인 결과를 냈다, 그게 답이에요.
주욱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는 없다, 이게 답이에요. 나는 아무것도 없어요. 역사고 뭐고 나는 나 자체가 없어요. 그래서 언약은 죽은 데서 살리고, 없는 데서 있게 하잖아요. 나는 없어요. 없음으로 가게 만들고 죽음으로 가게 만드는 거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인간은.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이게 별로 어려운 말은 아니에요. 자, 인간은 자아가 있죠. 인간이 자아라 우기는 게 있죠. 자아라는 말이 어려우면 그냥 쉽게 ‘나’ 라 합시다. 나를 표현할 때 나는 남자냐 여자냐, 노인이냐 소년이냐 이렇게 구분한단 말이죠. 또 나는 이 나라 국민이냐, 이방인이냐 구분되는 거에요. 잘산다, 못산다 이렇게 구분될 수 있고, 여러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이러한 구분, 남녀, 노소, 건강하다 아프다 이런 게 있더라도 이런 것들이 나에게 색깔을 입히는 거에요. 왜 색깔을 입히냐 하면 내가 나답게 나의 정체성, 주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내가 여자인데 남자 옷 입고, 남자인데 여자 옷 입으면 자기 정체성이 남들 보기에 혼란을 일으키잖아요. 내가 누구라는 것을 남에게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그 사회가 요청하는 나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 색깔을 입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색깔을 한번 지워보세요. 남자, 여자라는 이걸 한번 지워보잔 말이죠. 지워버리고 내가 나이가 뭐 스물다섯 살 먹은 애가 1급 공무원이라고 하죠? 그러면 또 ‘나이가 정치합니까? 20대는 정치하지 말란 말입니까?’ 이렇게 나오죠. 전부다 나이문제잖아요. 나이도 없애버리세요. 몸이 건강하다 아프다 이것도 없애버리세요. 육체에 관한, 키가 몇 센티냐, 키가 2미터 10센티냐 그런 것도 없애버리세요.
색깔을 지워버리면 남는 게 뭐냐? 남는 걸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순두부가 색깔이 하얘요. 만지면 고체인지 액체인지 구분 안되게 물컹 들어가는 거에요. 고정형태가 없이 무너지는 거, 저는 존재하지 않는 자아를 표현할 때 이게 적절하다고 봐요. 고체도 아닌 것이, 액체도 아닌 것이 뭔가 이상한데 이게 사회적인 요거 하나 색깔 입혀놓으니까 뭐인 것 같아요. 치마 입으니까 여자 같애. 그런데 여성에서 여성성을 빼보잔 말이죠. 나이 36살이다, 56이다. 56을 빼보자 말이죠.
장로님 나이 70 떼버리시면 뭐가 남습니까? 나이 70얼마 떼버리면 남는 게 뭡니까? 지금 장로님 70초반이잖아요. 남는 것은 뭐냐 하면, 나만 남아요. 아무것도 없는데 나만 남는다고요. 아무것도 없는데 이거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괴물이 왔냐, 유령이 어디서 튀어 나왔냔 말이죠. 이걸 문제 삼고 지적해 들어가는 거에요. 나가 없어야 되는데 이게 왜 생겼냔 말이죠, 나가 없어야 되는데. 주님께서는 이게 수상하다는 겁니다.
손에 쥐면 물컹한 순두부에 불과한 이것이 갑자기 옷 입고 학교 교육받고, 나는 뭐 고등교육 받았다 하니까 갑자기 뭔가 사람인양 대우받아야 되는 것처럼 그렇게 행세들을 하고 있는 거에요. 도대체 나라는 게 없는데 나라는 게 어디서 나오느냐? 이것을 주님께서 규명을 하시는 겁니다.
이걸 여기 논문에서는 짐승이라 하죠, 악마에요. 악마, 짐승입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노동이 서글픈 것은 예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열심히 한다고 해서 서글픔이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요. 몸 피곤한 건 기본이고, ‘그래, 힘들지만 나중에 월급날 돈 나오잖아.’ 예상합니다. ‘참아야지 뭐. 서글퍼도 참아야지.’
그런데 자아라는 게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주님께서는 이걸 없애려고 하는데, 주님께서 이 자아들을 가마솥에 다 집어넣어버리는 거에요. 자아들, 복수를 '자아' 하나로 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A4용지를 하나 준비했는데요. 화살표를 길게 그렸습니다. 이걸 화살표 처음지점과 끝 지점이 맞닿게 동그랗게 말아볼게요. 그러면 시작한 것이 어디로 갑니까? 결국 시작한 처음 지점으로 오지요.
인간이 처음에 없었어요. 처음에는 누구밖에 없었습니까? 나 스스로 있는 자, 하나님밖에 없었죠. 그걸로 됐잖아요, 충분하잖아요. 처음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잠시 있다가 없어질 그러한 존재로만 인간이 태어난 겁니다. 자아가 영원할 수가 없어요. 여러분, 학교 선생님들은 알지만 인간의 자아들이 어떠냐? 자아들이 오글오글거리고 굉장히 시끄러워요.
예를 들어, 옛날 국민학교에 애들이 많아서 복도가 길어서 4학년 복도가 12반까지 있었다면, 선생님들이 쉬는 시간에 한번 가보세요. 가보면 막 떠들거든요. 4학년 11반에서 10반 갈 때, 그때는 조용해요. 다시 10반 가면 또 떠들어요. 많은 미꾸라지 같은 오물오물한 자아들이 저희들끼리 서로 잘났다고 그 쉬는 시간에 막 이야기한다고요, 제가 잘났다고.
그리고 통성기도 할 때 한번 보세요. 웬 자아들이 그렇게 들끓는지 ‘주여 믿습니다.어쩌고..’ 되게 시끄러워요. 시끄럽다가 목사한테 마이크가 있으니까, 그게 권위 아닙니까. 마이크 있잖아요. '주여, 할렐루야' 하면 다 조용해져요. 자기가 마무리 기도하면 되죠. 자기가 유일한 자아이기 때문에. '다른 자아들 죽어, 너희들. 꿇어, 다른 자아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것은 우리 자아를 문제 삼기 위해서 오시는 겁니다. 꼴좋다. 잘 노네. 네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너희들 예상 많이 했지, 그렇지? 내가 너희들 자아가 어디서 왔는가, 수상한데서 왔다. 따라서 내가 너희를 너희들답게 심판해줄게. 저주해줄게 하고 주님께서 이 땅을 어슬렁거리죠. 죽죽 다니시는 거에요.
그래서 이 논문의 210페이지 봅시다. 210페이지 밑에서 열한 째줄. ‘천국에서 추방된 공동체'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에서 추방된 공동체,’ 우리는 천국에서 쫓겨난 공동체‘ 라는 것을 그 유대 공동체가 스스로 자기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 안되지요. 이게 인간 자아의 한계입니다. 자기를 자기가 증명하지도 못하면서, 근원적으로 증명 못하면서 그저 우기기만 하는 거에요.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으니까 하나님, 구원을 보장해주세요, 이런 식이에요. 여기 있는 게 뭐 자랑인가? 자기가 이 땅에 태어난 걸 큰 자랑으로 여기는 거 같애. 뭐 벼슬 했습니까? 내가 여기 있다는 게? 내 구원을 보장해 달라 또 예상하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행함이죠, 노동이고.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구원해달라. 또 예상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상은 이미 끝났어요. 이 화살표는 이미 오신 대로 가버립니다. 주님께서 와서 어디로 갑니까? 주님께서 관통해서 그냥 주님께서 일을 쫙 하고 전람회, 미술관가서 관람하고 그냥 집에 가요. 한번 둘러보시고. 끝났어요. 주로부터 말미암아 주로 시작해서 주께로 돌아가요, 끝났어요. 주님만이 자아고 그 외에는 자아가 될 수 없습니다. 그건 자아가 아니고 허빵이에요, 허빵. 허구란 말도 아깝다. 허빵이에요, 허빵.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은 기껏해야 나를 둘러싼 사회성, 이것만 자꾸 만들어내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네가 만들어내는 것과 내가 준 것하고의 차이를 알라는 거에요. 네가 만들어 낸 것, 자꾸 만들려고 하니까 주님께서 아까 누가복음 6장 보셨잖아요. 원수를 사랑하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너한테 잘해주는 사람한테만 잘해주게 되면 그건 누구도 그 짓한다? 죄인들도 그 짓하죠.
그러니 네 실력으로 내가 죄인이라 규정하는 규정에서 네가 벗어날 재주 있거든 네가 한번 몸부림쳐봐라. 벗어날 재주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주님께서 죄인으로 규정하는 그 규정에서 인간은 벗어날 재간이 없습니다. 못 벗어납니다. 이미 율법 자체가 죄인은 이렇다고 규정했으면, 그 죄인 규정에 해당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해도 우리는 주님이 정한 규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재료나 어떤 능력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도구가 없어요.
자, 여러분들이 잠시 예수님이라 칩시다. 여기 논이 있고 방금 모내기 끝내서 논에 물이 많아요. 논두렁이 있잖아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이 되어서 한 번 걸어봅시다. 여기에 개구리가 울겠죠. 특히 밤 되면 더 울죠. 개굴개굴 시끄러워요. 이쪽에 가면 이 쪽 나라에서 개굴개굴 일본. 이쪽 미국에 가면 개굴개굴, 아파트 무너졌다고 개굴. 러시아 가면, 북한 가면, 온 천지에 자아들의 개구리 우는 소리, 자아가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그런 사회성 가지고 다투는 개구리의 울음은 주께서는 듣고 그냥 가버립니다.
다시 209페이지 봅시다. “인간의 주체성은 명목상 ‘역사’라는 개념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인간의 ‘세상 관’ 정립이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을 구성하면서 결국 자기 존재 가치를 향한 주체적 의미로 귀착되기 때문에, 이것이 왜곡된 해석의 원인이 되었다. 이런 인간의 역사관을 공격하고 늘 위기와 종말로 몰아세우는 묵시적 작용의 중심에 하나님께서 '인자(人子)'라고 불리는 메시아를 세워놓으셨는데, 그 분의 ‘인자로서의 기능’을 다니엘에게 주어진 70이레의 계시와 관련지어 파악해 본다.”이게 바로 한글 초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에 현장에 앉아있던 교수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을 거에요. 그래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그들의 말을, 그때는 놀리는 걸로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 몰라서 그랬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를 가지고 인간을 개조하려 하거든요. 지금 안좋은 인간을 그들은 신학자니까, 또는 목사니까 인간개조에 나서는 거에요, 인간개조.
아까 우리가 공부한 거 한번 봅시다. 정리하면 인간은 자아가 중심에 있는데 그걸 뭘로 둘러쌌다 했습니까? 사회성으로 둘러싸여 있죠. 인간은 사회성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면 둘러싸여 있는 안을 자아라 하고, 바깥에 둘러싼 것을 주체성이라 합니다. 안에는 자아성이고, 자아성을 주체성으로 둘러싸는 거에요.
주체성은 뭐가 있어야 돼요?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이게 나와야 되죠. 나는 남자입니다, 나는 여자입니다, 나는 나이가 적습니다, 나는 늙었습니다, 나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안가졌습니다, 나는 건강합니다, 아픕니다, 나는 직장이 뭡니다. 이게 전부 다 사회성이고 주체성이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짓을 했단 말이죠. 그러면 신학교 교수나 목사들이 그 사람이 교회 왔다 하면 이 목사가 뭘 해야 되냐 하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주체성이 질이 떨어지니깐 질 나쁜 주체죠. 남한테 해코지하는 주체성이니깐, 이걸 남에게 도움 주는 성경말씀, 산상설교 같은 거 그 시대에 옮겨가지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 인간개조에 나선단 말이죠, 인간개조에.
그 신학자나 목사들이 교회에서 그렇게 하죠. 교회가 그거 말고 다른 노림수 있습니까? 없잖아요. 인간개조 해줬다고 고맙다고 돈 받고 하잖아요, 커미션 받고. 그런데 주님이 와서 이 주체성을 건드려 버리면 전부 다 암반층이 나타나요. 그 사람이 분명히 개과천선해서 술 끊고 담배 끊었는데, 결국 모든 자아성을 위에서 이렇게 언약으로 건드리니깐 어디에 닿아도 뭔가 딱딱한 암반층이 나와요, 암석처럼.
이게 뭐냐 하면 자아 자체가 수상한 거, 문제가 있는 거에요, 자아자체가. 인간개조 했는데 뭐는 안 뚫렸어요? 자아는 드릴로 뚫리질 않는 거에요. 자아는. 어떤 경우라도 자아만큼은 인간개조, 인간성, 신학 같은 거 ,철학 같은 거, 윤리, 도덕이 전혀 먹히질 않는 거에요.
선생님들 학교에서 많이 경험한 거죠? 아버지한테 얻어터지고 학교 가면, '너희 아버지 나쁘나?'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술만 안먹으면 착해요' 그러죠. 술 먹는다, 안먹는다, 사회성이죠. 사회성을 제껴 버리면 어떻다? 그 바탕은? 착하다는 겁니다. 착하다는 말은 제발 사람이라고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 자신이 유일한 사람이기 때문에 일체 인정할 마음이 없어요.
누가복음 6장 32절에 지금 기준이 다르거든요? 내가 저 사람에게 잘해준다는 기준과, 주님이 보시기에 잘해준다는 기준이 달라요. 모든 율법, 모든 이웃사랑, 모든 원수를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의 기준이 달라요.
여기 인간이 있습니다. 보통 인간들, 인간들이라고 하지만 오늘은 '자아들'이라고 하죠. 인간의 자아들과 그리고 주님이 보시기에 잘 대해주었다, 누구에게? 원수에게, 또는 타인에게 잘 대해 주었다는 기준이 주님이 원수에게 잘 대해주는 것과 인간이 잘 대해주는 게 달라요. 주님은 뭐냐 하면 십자가입니다. 이게 모든 율법의 완성이에요. 내 살과 내 피를 마셔라. 이것보다 인간에게 잘 해줄 수 있는 건 없어요. 이게 제일 잘하는 거에요.
그러나 인간의 사회성에서 인간들은 인간이 자아가 있고, 사회성으로 둘러쌌다 했죠. 기억하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잘해줬다, 못해줬다는 것은 내 사회성을 키워주면 잘한 거고, 내 사회성에 흠집을 내면, 이건 못해준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이런 공식이 나옵니다. 이 사회에서는 저런 사람이 최고입니다. 사람은 속아도 돈은 속지 않습니다.
아휴, 당신 좋아해요, 사랑해요 이거는 거짓말입니다. 그런데 돈을 봉투에 넣어서 ‘사랑해요’ 이거는 찐찐찐짜에요. 돈은 안속아요, 사람의 말은 다 속아도. 그래서 특히 회사에서 사람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그 사람만이 진짜 그 직장에서 원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순수하게 복음 아는 사람이 취직 못합니다. 했다가도 뛰쳐나와요, 뛰쳐나옵니다. 이 사회는 나의 개조를 원하는데, 어떤 개조냐 하면 '너도 부자처럼 인간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달라질 수 있느냐? 그럼 널 채용할게. 너를 취직 시켜줄게' 그걸 요청하는 사회에요, 이 사회가.
이게 더럽다고 해서 피해 다니죠. 우리 아는 사람도 그랬는데. 취직 하라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계속 안하는 거에요. 그리고 집에서 술만 드시는 거에요, 우리 아는 가까운 분 중에. 이 회사는 이래서 인간성 더럽고, 저 회사는 저래서 근로환경 안좋고, 저래서 안좋고 이래서 안좋고. 세상은 나를 알아주지 않아. 내가 너무 일찍 태어났다는 거에요. 나는 이 세상은 이해 못할 만큼 너무 정의롭고 진실해서 세상이 나를 못 알아준다. 지금부터 50년 후에만 태어나도 내가 이런 수모를 안당할텐데, 하면서 계속 술만 잡수셨어요. 내가 목격자니까요, 우리 집안사람이니까.
술만 맨날 마시면서 세상 탓 하는 거에요. 그것도 신문 보고 이거 죽여야 돼, 이러면서. 어디 좀 취직하라 하면, 한 사흘 일하면 코피 나서 못한다 하고. 코피는 물만 마시면 채워집니다. 헤모글로빈이 있기 때문에 물만 마시면 채워지거든요. 상사, 과장이 꼴 보기 싫어서 못가겠다, 나를 갈군다는 거에요. 왜? 일을 못하니 갈구지요, 일을 못하니까.
직장에 직원이 백 명이 있는데 99명은 오늘도 돈을 위해서 달려가자 이러고 있는데, 이 사람은 오늘도 자아를 어떻게 빛낼 것인가, 이렇게 자기 생각만 하니 맞을 리가 있어요? 안맞으니 직장 못다니죠. 자기에게 색을 칠하는 그 색칠이 싫다 한다면 결국 남아있는 것은 물컹한 순두부만 남아있어요, 자아라는 게. 이 자아가 그렇게 제대로 된 색깔을 못 만난다면, 자아 자체가 도대체 이 괴물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건 알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걸 자꾸 정당화 할 생각하지 말고, 나는 옳다고 우기지 말고.
그래서 210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 다시 한 번 봅시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8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아브라함 자손이라 하지 말라 너희들은 지옥 갈 사람이라'고 이렇게 규정을 했잖아요. 그러면 유대사회는 천국에서 추방된 공동체입니다. 근데 그 공동체가 뭐가 문제냐 하면 자기가 주님한테 지옥 간다는 그런 소리를 들을 만한 근거를 본인이 찾아내지를 못하고 있는 거에요. 남이 나를 안 알아준다고 자꾸 사회 보고 불평하지 말고 안 알아줄 만 해서 안 알아주거든요. 그만한 정당성을 나에게서 찾아내야 되는데, 그걸 찾아내는 안목이 결함이 생긴 거에요. 이건 문제가 있는 거에요.
그렇다면 마태복음 8장에서 로마의 중대장, 백부장 나오죠. 그 백부장은 반대로 이야기해요. 백부장은 어디 가느냐? 너희 본자식들은 지옥 가고 그 빈자리를 그 백부장 같은 믿는 자가 채운다 할 때, 도대체 백부장의 자아는 기존의 유대사회의 자아들과, 개구리들과 어떤 차이가 납니까? 어떤 차이가 있었어요? 백부장이 하는 일이 있죠.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그러니까 얹혀서, 본인이 본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니고, 화살표 되신 주님, 주님한테 얹혀있는 거에요. 자기가 주인공이 아니고. 전에는 바탕이 악마로부터 온 이상한 바탕이었죠, 주님 만나기 전에는. 이 세상의 짐승에 뿌리를 두고 있던 거에요. 근데 주님 만나고 바탕이 어떻게 됩니까? 짐승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그걸 알기 때문에 자기 자신 쪽으로 모든 의미가 마감되는 게 아니고, 자꾸 누구를 겨냥하느냐, 누구를 가리키느냐 하면 주님을 가리키는 거에요.
주께서 가라하면 가고 주께서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걸 한마디로 이야기할게요. 이 말은 내가 하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내 노동이 없으니까 뭐가 없어요? 내가 예상한다는 게 성립 됩니까, 안됩니까? 성립이 안돼요. 내가 예상한다는 게 성립이 안돼요.
나의 노동은 없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를 놀지 못하게 한다.' 나를 그냥 이 땅에 놀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내 시간과 내게 주어진 공간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다룰 수 있는 시간 공간이 아니고, 이거 누구 겁니까? 주님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시간과 공간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내가 논다, 또는 내가 놀고 싶다가 성립이 안 되는 거에요. 집에서 그냥 있다고 노는 게 아니에요. 회사 가도 내가 놀겠다는 심정으로 회사 가면 노는 게 되거든요. 어쨌든 간에 나를 놀지 않도록 그렇게 주께서 나를 받치고 있는 겁니다. ‘나의 노동은 없다.’에요.
그러면 그게 없으면 주님의 노동밖에 없고, 그러면 그 결과는 내가 예상할 필요 없이 주님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답이기 때문에, 주님이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기 때문에 내가 그 결과에 대해서 예상할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종이 건방지게 예상할 필요가 없지요. 주님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이미 도착지점에 와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내가 장래에 대해서 아무리 어떻게 된다 한들 그 현장이 뭡니까? 그 현장이 주와 함께 있는 시간이고, 주와 함께 있는 공간이 되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영국을 가든, 한국에 있든 그건 전혀 상관할 바 없어요. 왜?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죠? 그 자체가 답이거든요, 그 자체가.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