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14a 부산강의 : [시편]39(23편)-마음의 기호
20210614a 부산강의 : [시편]39(23편)-마음의 기호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3편 시작하겠습니다. 시편23편 3절에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이렇게 돼있지요. 여기 소생시킨다는 말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나를 어디로 집어넣느냐 하면 죽음으로 집어넣고 죽음에서 소생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신됨을 드러내는 거예요. 우리를 죽음으로 집어넣고 죽음에서 건져내는 식으로 기존의 신과 다른 하나님을 소개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시편 23편을 보면서 우리는 따져봐야 된다. 뭘 따지느냐 하면, 첫 번째 나오는 중요한 건데, 뭘 따지느냐 하면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함께 있음, 이 자체를 따져봐야 돼요, 가능한지. 이게 가능합니까? 인간은 나와 같이 노는 거예요. 하나님과 감히 함께 있다는 것은 인간으로선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것이 시편부터 해서 성경에 많이 나오거든요. 우리는 뭐부터 출발해야 되느냐 하면 이거는 한 마디로 말해서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것이 거짓말이에요. 거짓말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거짓말하는 주특기를 갖고 있는데 그 거짓말 중에서 최고의 구라는 자기가 하나님께 함께 있다는 거다.
왜? 인간은 완전하고 싶고 완벽하고 싶은 그러한 욕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시한 인간과 같이 돌아다니는 것, 그거는 별로에요. 같이 있으려면 적어도 하나님과 함께 있어줘야 그게 함께 있는 중에서는 최고의 함께 있음이죠.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 백 프로 구라입니다.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이걸 따져봐야 돼요.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이걸 거짓말인 것을 드러내는 증거가 많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가 많을까요? 어느 증거가 많을까요? 우리의 평소는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그 증거가 더 많아 쏟아져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 기분에 울고 기분에 살고 기분에 웃고 있거든요. 그러니 하나님이란 것은 자기 기분 좋기 위해서 자기가 조작해내는 어떤 관념 같은 것이라는 것이 그런 증거가 더 많아요.
그래서 시편 23편은 한 마디로 뭐냐 하면 거짓말인데 다윗은 지금 거짓말하고 있다. 다윗은 거짓말쟁이다. 그런데 다윗은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더라도 본인의 입장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것은 하나의 실험이다. 인생은 실험이다. 어떤 대담한 실험이냐 하면 과연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할 수 있는가? 이거는 하나님은 너무 거룩하기 때문에 인간과 함께 할 수 없어요. 그건 기정사실이에요.
그냥 하나님을 추구한다,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어라, 하나님이 도와주면 좋겠다. 수시로 도와주면 좋겠다는 건 누구나 갖고 있는데 그거는 함께 하는 게 아니에요. 이 차이를 알아야 돼요. 여러분들이 돈 많은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새롭게 시작한 신혼 자식들을 수시로 도와주면 참 고맙지요. 그러나 수시로 도와주는 것과 한 집에 함께 사는 것과는 완전히 엄청난 차이입니다.
시부모가 와서 돈 좀 주고 할 때 빈 말이라도 그렇게 하지요. “나는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살고 싶어요.” 그러면 시어머니가, “제발 거짓말 좀 하지 마라.” 도와줄 때 그냥 예의상 고맙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좋은데 함께 있다는 것은 백 프로 거짓말이에요. 인간은 돈만 있으면 혼자 살고 싶지, 이게 인간입니다. 돈 있으면 혼자 살고 싶지 같이 살고 싶지 않아요.
제가 서울강의에서 들어보면 알겠지만 부부는 동업이라 했잖아요. 처음에는 사랑으로 했는데 나중에 사랑이 돈으로 변해요. 돈 없는 사랑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돈 없는 사랑이. 참. 돈 있는 사랑은 귀하지요. 그거는 사랑 때문에 돈 때문에 귀하지요. 사람은 혼자 살고 싶은 겁니다. 이거는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본인도 본인을 말릴 수가 없어요.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런데 시편 23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는 이 말은, 이거는 인간의 본성을 넘어서는 거예요. 인간의 본질과는 너무 차이 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는 건 고맙지만, 지금 다윗의 시편 23편에서 하는 건 도와주는 차원이 아니고 떠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함께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누구와 정이 들어서 아주 깊이 사랑이 넘칠 때는 그럴 수가 있어요. 이별은 두렵지 않고 눈물은 참을 수 있지만 그러나 과연 하지만 홀로 된다는 것은 나를 너무 슬프게 한다.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홀로 있다는 것은 조금 전까지 같이 있다는 것이 그것이 자기가 같이 있을 때 얼마나 내 행복이 업그레이드되는가를 늘 시험하고 측정해 온 거예요. 같이 있고 싶다는 것은 자기한테 행복이 될 경우에는 그 상황을 본인은 놓치고 싶지 않은 거예요.
어쨌거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냥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구지요. 고대사항이지 모든 인간의 본질은 혼자 있는 게 편합니다. 물론 돈 있고 난 뒤에 편하지요. 그렇다면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가 빠져버리면 나는 부족하다.
홀로 있다는 것은 나한테 힘들다, 어렵다, 하나님 없이 혼자 있는 것은 괴롭다, 슬프다, 라고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는 그 출발점이 인간에서 출발한 게 아니에요. 다윗의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닙니다. 출발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상처로부터 출발해요. 이게 기존에 시편 23편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시작점이에요. 하나님의 상처로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상처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신은 죽었다. 하나님의 죽음부터 해석을 해야 시편 23편이 풀립니다. 신이 죽은 거예요. 신이 죽었다는 것은 악마가 원했던 거고 모든 인간들이 내심 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내세워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내가 없다는 것보다 더 아파하는 그러한 새로운 존재의 출현이 등장하는 겁니다. 다윗을 통해서.
내가 죽고 내가 없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고 대수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이 아픈 것은 내가 참을 수 없다는 것, 이런 존재 자체가 특이한 겁니다. 나를 소생하는 것, 나를 죽음 가운데 살리는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소생,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그 사건이 다시 발생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코 혼자 있다는 다윗이란 다윗에겐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윗이라는 다윗의 하나님이 되게 하는 그 하나님과 함께 있을 경우에만 비로소 다윗은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거는 보통 인간 아니지요. 일반적인 인간으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월요일이잖아요. 어제가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복음 들었던 그 날이잖아요. 어제의 복음이 오늘까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날이 주어지면 우리는 바닥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은혜 받은 것은 오늘에 와서 다시 의심해야 돼요. 이거는 거짓말이다. 내 본성을 내가 아는데 나는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고 싶은 나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싶어 한다는 말은, 나로 인하여 즐겁다는 말은 나에게는 인생 상처가 없어야 된다. 아픔이 없어야 된다는. 나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상처 없는 나로부터 오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싶은 거예요.
상처 없이 출발한다는 것은 모든 시편과 모든 성경말씀 다 포함되는데 시편 23편과 우리는 동떨어진 거예요. 아무 상관이 없는 겁니다. 성경 백날 해봐야 인간들은 무슨 실험에 나서냐 하면 나는 뭐든지 잘 돼야 한다는 그걸 증명하는 쪽으로 실험하게 돼요. 나는 안 다쳐야 되고 나는 상처 없어야 되고 나는 늘 행복해야 되고 나는 살아남아야 되고.
그러한 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싶어 해서 성경말씀을 또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원래 성경말씀과 전혀 동떨어진 내 잘났음을 다시 한 번 성경을 통해서 확인하는 것밖에 안 돼요. 그건 나르시시즘이죠. 너무 미남이 시냇물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면서 비춰볼 때마다 자아도취에 빠져서 또 자기의 미모에 스스로 감탄하는 재미로 하루를 일과를 시작하는 거예요. 큐티가 그거잖아요. “역시 나는 잘났다. 나는 복 받아야 돼. 당연하지.”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나 시편 23편은 출발이 뭐부터 했습니까? 하나님의 상처로부터 출발해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부터 미움 받는 거예요. 미움 받는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다윗의 존재를 통해서 실험에 나서는 겁니다. 다윗을 포위한 것은, 다윗을 주변에서 압박을 하거든요. 포위하면 여기 힘의 필드가 작용해요. 인간의 개인은 무능합니다. 인생이라 하는 것은 힘에 눌려 살아요. 우리가 세상에 산다는 것은 세상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의 역설, 또는 힘에 의해서 우리가 후달리면서 내몰리면서 살아가는 게 인생입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런 예가 열왕기 2장에 나오지요. 엘리야가 하늘에 올라갈 때 불 수레와 불 말을 타고 올라가잖아요. 그러면 불 수레, 불 말은 엘리야가 이 땅에서 일을 끝내고 죽을 때 불 수레와 불 말로 갔다면 죽기 전에 엘리야에 일어났던 모든 일은 불 수레와 불 말이 주는 그 힘의 장에 의해서 활동한 겁니다. 남들에겐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점은, 불신자는 내가 어떤 힘을 가졌다, 소유된 힘을 증명한다면 하나님이 성도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함으로써 네 잘남이 아니라 네 재주가 아니라 네 속에 너를 둘러싼 그 힘의 본성과 성격이 얼마나 하나님과 대조가 되고 하나님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의 상처를 안고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거예요. 이게 바로 다윗이 본인이 원치 않는 인생길을 가는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탈락이냐 하면 내 신앙, 이것이 탈락이에요. 내 신앙이란 존재할 필요도 없고 있어서도 안 돼요. 내 소망, 내 사랑, 이런 것은 탈락입니다. 내 신앙, 내 소망 이것은 신앙을 통해서 내게 갖고 있는 상처를 내 신앙으로 보상 받으려는 의식이 강해요. 그러면 내 신앙 말고 뭘 집어넣어야 되지요. 상처받은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 내 소망 대신 하나님의 소망, 내 사랑 대신 주님의 사랑이 하나에 성도를 둘러싼 장으로서 여기서 형성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거예요. 본인 자체를 본인이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둘러싼 영역 자체가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한 다른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놀아나고 휩쓸렸다는 그 자체에서 비로소 다윗은 성도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내가 내 인생을 제조하거나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특이한 환경이잖아요. 하나님이 찾아와서 하나님이 하나님 됨을 드러내는 그 영역에 다윗은 무작위로 초대받은 거예요. 초청받은 거예요. 이 동네가 무슨 동네지? 초대받은 겁니다.
기존의 동네, 기존에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동네와 전혀 외부의 장, 필드가 영역이 성격이 완전히 다른 성격 속에 들어온 겁니다. 따돌림 받고 쫓김 당하고. 기존의 영역은 무슨 영역이냐 하면 바로 사울의 영역이에요. 사울을 성경에선 하나님의 원수의 힘이 작용하는 겁니다. 시편 5편 8절 봅시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등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주의 의의 길로 갈 수도 없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할 수도 없어요. 우리는 스스로 찾아갈 수 없습니다. 주의 원수가 발생돼야 되고 주의 원수에 휘둘려야 되고 쫓겨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주의 원수가 주의 길을 곧게 한다는 말은, 이미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게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주님 드러내기로 설정된 그 길에 우리가 접어들게 돼있다 이 말이에요.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길이 두 가지 밖에 없어요. 보통 사람들은 좁은 길, 넓은 길 하지요. 그걸 달리 하겠습니다. 인간이 가는 길과 하나님이 가는 길, 그 두 가지 길이에요. 하나님이 가는 길은 인간은 모르게 돼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신 길 그것을 주님이 그대로 가는 길이 하나님이 가는 길이고 그걸 예수님께선 좁은 길이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공통점이 있고 그 공통점 때문에 인간들은 절대로 공통점과 이탈되는 다른 길은 인간들이 선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넓은 길, 멸망의 길은 모든 사람이 흔쾌히 동의하는 길, 충분하게 그게 진리답고, 그리고 그게 옳은 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증명이 된 그 길이 멸망의 길입니다.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인간의 지혜로 증명이 된 모든 교회가 다 이야기하는 그 길, 그게 바로 지옥으로 가는 길, 멸망의 길이에요. 왜? 동의가 되니까.
인간은 자기 자신이 거짓말로 시작한다는 그것을 인간은 본성상 우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거짓말쟁이가 돼야 돼요. 왜냐? 주님의 원수 안에 우리가 처음부터 포함이 돼있기 때문에. 나는 주님의 원수거든요. 로마서 5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의롭게 하시거든요.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에 이미 포함이 된 거예요.
내가 좋아하고 내가 그리워하는 예수는 이거는 백 프로 가짜에요. 그것은 나의 행복을 나의 미래를 스스로 보장받기 위해서 내가 지어낸 기존의 나의 장, 기존에 세상적으로 나를 만들어낸 내가 창조한 그 어두움의 세계에서 동조되고 있는 입장에서 생각해낸 그 길은 아무리 아프가니스탄 가서 선교사로 고난 받아도 에티오피아 가서 고난 받아도 그건 넓은 길입니다. 좁은 길은 없습니다. 넓은 길만 우리에게 허용돼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시편 23편 3절에 보면, 주께서 나를 소생한다. 죽음에서 살리는 그런 계기가 주어지지 아니하면 살아 있는 내가 계속 어떤 방식으로 내가 살리는 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 고생을 더 할까요, 더 헌신할까요, 나를 비우고 또 비울까요? 온갖 요령들을 다 끄집어내요. 왜 그런 짓하느냐? 살아 있는 나를 더욱 더 살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끄집어내는 방식은 예수님 고난 받는 길을 흉내 내고 코스프레 하는 그 일 외엔 없습니다.
뭐 지가 알아서 자기를 때리고 부족하다고 하고, 스스로 금식하고, 재산을 다 바쳐서 가난한 자에게 다 주고, 별 쓸데없는 짓을 다해요. 누가 굶으라 했어요, 남 주라고 했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다 끄집어내요. 남들 보기에 헌신해 보이고 남들 보기에 낮아져 보이고 대단히 자기를 낮춰 보이는 그런 모든 짓은 그거는 우리가 속해 있는 넓은 길에서 반영한 하나의 메아리, 종교적 메아리에 불과해요.
신앙의 역사 가운데 위대한 신앙인이라고 소문난 사람 있잖아요. 그걸 저는 가짜뉴스라고 보는데 한경직이 어떻고 주기철이 어떻고 잔느 기용이 어떻고 캘빈이 어떻고 루터가 어떻고, 전부 가짜뉴스거든요. 그 사람들 죄인이에요. 인간을 모방하면 안 됩니다. 인간을 따라가면 안 돼요.
왜 그러냐 하면 그건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너도 했는데 내가 못할 게 뭐 있느냐. 그거는 카레이스 하는 거예요. 분노의 질주입니다. 그냥 너 속도 밟으면 나도 속도 낼 수 있는 거예요. 따라붙을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이거는 신앙도 아니고 배틀하는 거예요. 자존심 경쟁이에요.
이런 교회는 없지만 기존 교회는 기도 좀 하게 되면 악을 써서라도 그 사람 기도보다 더 힘차게 더 길게 더 유창하게 말 빠르게 말이 너무 빨라서 자기 말도 자기가 조절 못해서 방언 터져버려요. 단어와 단어가 연결이 안 돼서 방언이 터져버렸어요. 지도 지 혀를 조종하지 못해서. 할렐루야 해야 되는데 알렐루야, 알렐루야 빨리 열 몇 번 해보세요. 지가 방언해서 자아도취에 빠져버려요. 저는 그걸 분노의 질주라고 생각합니다. 제7탄까지 나왔어요. 카레이스 하는 것. 안에 분노가 있어요. 너한테 질 줄 아느냐, 하는 분노. 이거는 여전히 자기가 살아 있는 겁니다.
인간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원수기 때문에 원수가 노리는 것은 신을 죽임으로써 신이 되는 대안, 그 대안 외에 인간에겐 나올 수 없어요. 왜냐? 본인이 신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신이라고 여기는 것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내가 신이면 타인은 나 말고 또 다른 신이 되겠지요. 그래서 타인이란 이름의 신을 죽임으로써 내가 신 됨을 증명하는 것, 이게 바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인생실험입니다.
성경에서 인생실험을 뭐로 바뀌느냐? 인생시험이에요. 테스트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험하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마나 우리의 가슴 급소를 손가락으로 밀어요. 니가 문제야, 니가 문제야? 그러니까 네가 문제라는 것은 너를 놓치면 안 돼요. “내가 문제니까 전 포기하겠습니다.” “하지 마. 나는 너다움을 마음껏 발휘해.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성질과 속성을 죽이지 말고 그걸 발휘하라고.” 이런 뜻이에요. 발휘하란 겁니다.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성도는 죄를 도망가면 안 돼요. 죄를 도망가는 것은 비겁한 겁니다. 죄를 도망한다고 자유가 아니에요. 자유는 뭐냐? 죄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나의 죄 속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태어난 자체가 이것이 나의 죽음인 것을 본인이 그걸 확인해야 돼요. 사람이 살아 있는 경우를 스스로 자기를 죽일 순 없습니다. 자기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자기 이름은 못 죽여요.
그래서 주님께서 의의 길이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죽였던 그 지점까지 가는 그 길이 바로 의의 길이에요. 이건 인간이 못합니다. 이거는 원수가 해줘야 돼요. 주님의 이름이 짓밟히는 그 지점까지 가줘야 거기에 그쪽에서 하나님의 의가 등장하는 거예요. 사무엘상 12장 9절에 보게 되면,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정리하게 되면
인간은 본인이 스스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항상 나는 천하에 거짓말쟁이로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오늘이 월요일이잖아요. 월요일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내일 화요일이면 화요일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나 거짓말쟁이다. 내가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 함께 있고 싶다는 그것보다 더 큰 거짓말은 없다. 나는 혼자 있고 싶다. 그 혼자 있는 내가 하나님보다 더 귀하다. 그것부터 그 바닥부터 새로 시작해야 돼요.
그래야 말씀이 새로워져요. 어제 아는 것 계속 강제로 끌고 가지 마세요. 그러면 어제 하나님이 필요하지 오늘은 안 필요한 게 돼요. 오늘 나의 지식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여전히 어제 하나님 은혜 받았으면 오늘 동일한 그 하나님이 어제 은혜 받은 것을 거짓으로 증명할 거예요. 네가 꾸며낸 것이란 걸 증명할 겁니다. 내일 되면 오늘 은혜 받은 게 거짓임을 증명할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계속 살아 있어줘야 함께 있는 취지가 살아나요. 하나님의 원수 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 취지를 우리가 무시하지 맙시다. 모독하지 맙시다. 주님의 의로움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아담의 본성을 우리가 죽여서는 안 돼요. 그걸 감추면 안 돼요. 그걸 오히려 들춰내는 겁니다. 무엇으로? 말씀으로 들춰내는 겁니다.
그것이 사무엘상 12장 9절에 나옵니다. 이것도 중요한데 누가 읽어보실까요. “그들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붙이셨더니 그들이 치매” 제가 읽을게요. “그들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잊은지라” 잊은지라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전에 성경 볼 때는 왜 여호와를 잊어, 하는데 너도 월요일 돼서 벌써 잊었잖아. 인간이 잊는 거는 너무나 당연한 거거든요. 못났으니까 잊지요.
인간이 잊지 만 하나님이 함께 할 거라는 엉뚱한 발상을 자꾸 자기 잊을 걸 교묘하게 감추기 위해서 어제 하나님 잘 믿었잖아,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오늘 자기를 포장을 한다니까. 인간은 하나님 잊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건데, 당연한 거예요. 그것이 마치 안 당연한 것은, 그것은 조작된 허구적인 내 모습이에요. 그거는 허상이라니까요, 환상이고.
하나님 잊었지요. “여호와께서 그들을 하솔 군장 시스라의 손과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압 왕의 손에 붙이셨더니” 여기 붙인다는 말이 나와요. 붙인다는 이 말을 통해서만 뭐냐?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 전쟁 어렵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 일이 드러나요. 붙인다는 것을 우리말로 쉽게 하면 넘긴다는 것, 넘긴다. 나의 원수를 너한테 넘겨볼게.
“이스라엘아, 너보다 막강한 힘을 가진 그 민족 있지?” “아이고, 무섭습니다.” “무섭지. 너보다 숫자가 어때?” “숫자가 더 많습니다.” “무기는?” “그들 무기체제가 강력합니다. 도저히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오케이. 이길 수 없지. 그러니까 나중에 승리해도 네가 이겼다는 소리 안 하겠지?” “못하지요.” 그러니까 넘겨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쪽수로 이기고 가진 에너지로 이겼다는 말은 우리 인간으로선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환경 외에는 다른 환경으로는 이해를 안 해요. 누가 나보다 강하느냐, 누가 돈이 많으냐, 누구보다도 지혜가 더 많으냐, 지식이 많으냐, 기도를 늘 열심히 했고 헌금을 많이 했냐. 그런 식으로만 인간의 본연의 가치와 위치를 정하려고 해요. 나는 서열상 몇 등할까, 이 교회에서 몇 등할까? 우리나라 교회 전체에서 전체 순위로 나는 우리 교회에선 믿음 제일 좋지만 다른 교회와 붙었을 때 나는 몇 등할까? 1%에 들어갔을까? 수능 1%에.
자꾸 그런 식으로 하거든요. 그럴 때 더 센 것, 더 강한 것, 더 헌신적인 사람을 대했을 때 우리는 엄매 기 죽어, 되는 거예요. 저쪽은 엄매 기 살아. 눈썹 일자로 딱 붙여놓고 순악질 여사 있지요. 우리가 무서워하고 내 힘은 저 사람한테는 안 된다, 끝났다, 라는 자를 우리에게 붙여줌으로써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우리가 나의 길, 그러니까 내가 잘 되는 나의 길을 제거해버리고 나의 길을 뭐로 바꾸느냐? 주님의 길에 동참하도록 하는 방식은 이 방식 밖에 없어요.
나의 길이 작살났을 때 여기는 뭐가 작살나느냐? 나의 의도 작살나고 나의 자존심도 작살나고 내가 생각했던 나의 천국도 이게 다 헛방이라는 사실을 작살내고 그 다음에 주님이 생각했던 주님의 천국, 주님의 나라, 주님의 의, 주님의 평안함과 온전함으로 우리를 강제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 과정에서 작살나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래서 작살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만만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느냐가 아니라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러한 사태가 바다에 떠있는 파도가 밀려오듯이 이것은 끊임없이 사건이, 사건이 계속 밀려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마감되지 않는 사건의 파도에 휩싸여있다. 마감되지 않는 사건이에요.
이러한 다윗의 형편이나 오늘날 우리의 형편이나 똑같아요. 마감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도 목숨이 붙어있다는 거예요. 다윗의 목숨이 안 끊어졌어요. 안 끊어졌으니까 육신이 있으니까 마감되지 않은 사건이에요. 왜냐하면 내일 사건은 내가 아직 안 만났으니까. 내일 되면 내일 사건 또 있을 거예요. 마감되지 않아요. 마감되지 않았지만 그 중심에는 이미 마감이 돼있어요. 인간은 모르는 확정된 마감된 사건에 다윗은 아직 미진한 모습으로 거기에 풍덩 사건의 소용돌이에 뛰어든 겁니다.
아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하나의 예를 들겠어요. 신앙생활 잘하고 신앙 있다고 소문난 그 사람이 있다면 내가 물어보고 싶지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지옥에 처박는다면 영원히 못 빠져나오도록 지옥 불에 들어간다면 그때 당신은 그렇게 결정한 주님에 대해서 감사하겠습니까, 미워하겠습니까? 정답은 알아요. 그것마저 주께서 하신다면 그러한 주님의 조치에 대해서는 저는 기분 째지겠습니다. 너무너무 찬양 드리겠습니다. 이게 정답이에요. 로마서 9장에 나오는 말씀, 내가 그리스도에서 끊어질지라도.
그런데 그게 정답인데 이미 마감된 사건의 정답인데 실제로 우리 육신은 뭐냐 하면 이상하게 기분이 썩 좋지 않아요. 정답과 괴리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 육신과. 그 괴리현상은 우리 육신은 소멸돼줘야 돼요. 내 힘으론 안 돼요. 우리 육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그게 정답이고 따라서 주님께서 나를 지옥에 처박도록 하신 주님의 조치는 어떤 조치라도 주님의 선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선택을 내 선택보다 존중합니다, 라는 말을 했기 때문에 좀 나를 봐주면 안 되겠습니까?
이 정도 알 정도면 어떻게 좀 빼내, 이 정도까지 아는데 섭섭하게 하시면 곤란하지요. 바로 이걸 테스트하는 거예요. 세상과 더불어 계속 테스트하고 실험에 나서는 겁니다. 남은 속여도 주님은 속여도 본인만큼은 본인이 속일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어요.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는 마지막 눈길에서 외면하시는 사람이 이제는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오는 거기서 울 때 이미 버려진 내 가슴에 어찌 사랑이 남으리오. 한 번 떠나간 사랑은 내 마음에 없어요. 이 문 밖에 있는 여자야.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 만날 이런 식이에요. 그때 돌아오라고 눈길 줬지만 그녀는 차갑게 돌아섰다고요.
박강성이 불렀던 의 가사지요. 그 여자가 좀 잘 돼서 오면 얼마나 좋아요.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와요. 돈 보고 온 거예요. 초라한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지금 어떻게 당신을 받아들이겠다고. 건강한 모습이면 혹시나 뭐 하겠는데 이건 아픈 몸으로 돌아오면 미치는 거예요. 짐탱이 짊어지란 말인가. 어쩌란 말이고, 지금. 내 몸도 아파서 지금 건강사탕 먹고 있는데. 지나간 당신 와 가지고.
그래서 우리의 육신은 건강한 하나님을 원하지 상처 난 아무 빼먹을 게 없는 하나님은 우리 육신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식으로 땜질하고 싶어요. 나 하나님에 대해서 압니다. 이런 하나님 맞지요, 라고 계속 내가 갖고 있는 소유된 지식으로 하고자 합니다. 주님께선 그 지식을 피해가 버립니다. 지식 말고 현실을 다시 보라. 네 생각과 현실이 맞아 들어가더냐. 절대로 안 맞아 들어가지요. 절대로 맞아 들어가지 않아요.
복음을 많이 안다고 해서 조그만 내 소망이 이뤄지던가요? 세상은 내 소망은 복음 안다는 밑천으로 얻고자 하는 모든 행운은 전부 다 비껴가버립니다. “주님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뭐라 하느냐? “기도하지 마, 기도하지 마!” 언제 기도하라 했느냐 말이죠. “백날 기도해야 네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그 엉터리 기도하지 마. 누가 하라 해?”
가만있으면 우리의 원수 갖다 붙여줘요. 내 인생에 저런 인간 안 찾아왔으면 하는 그런 사태가 자꾸 일어난다고요. 뭘 막았는데 예상 밖의 뭐가 또 터져요. 이것 막으니까 저것 터져요. 자꾸 인생에 빵꾸가 나요.
그것은 바로 아까 시편, 소생이라는 것, 소생 다음에 부활이죠. 죽음 다음에 부활입니다. 죽음, ‘소생=부활’이니까 늘 주님 가신 길은 바로 나의 원수가 아닙니다. 아까 시편 5장 8절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이것이 다윗의 예언이 신약에 오게 되면 진짜 말씀의 원천이 다윗이 아니고 예수님이란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적도 없어요. 하나님은 인간과 함께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해요. 하나님의 이름은 주에요. 그래서 구약부터 신약까지 주께서 함께 하시죠. 인간과 함께 할 수 있는 하나님을 따로 주의 이름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그게 주의 이름이 돼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 한복판에 주의 이름이 함께 있고 임재 했다는 그 증거를 갖고 있어요.
그 지점이 뭐냐? 그 지점은 이동하는 지점인데 그 지점은 바로 언약궤가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를 볼 때 뭘 보느냐? 언약궤가 어떻게 이동하는가를 보게 되면 이리고 가면 주르르 따라가요. 요리 가면 주르르 따라가야 돼요. 그런데 언약궤가 이스라엘 손에 잡히지 않아요. 언약궤가 이스라엘과 따로 떨어져서 따로 가버려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화들짝 놀래서 우르르 가는 겁니다.
다윗이란 인물은 언약궤가 있는 곳을 알려주는 그런 가이드 역할을 하는 거예요. 사무엘하(이번 수련회할 때 사무엘하 할 거예요) 6장에 보면 다윗이 왕 되고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언약궤를 모시는 겁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거죠. 시편 23편에 나오는 주인공이 내가 아니고 바로 하나님도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게 된 겁니다. 들어오시는 거예요. 고난 받는 하나님, 상처받은 하나님, 사람한테 짓밟히는 하나님 그것이 주의 이름입니다.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까지만 알 수 있어요. 왜? 인간과 동행해서 인간한테 온갖 서러움을 다 받으면서 비로소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죽는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주의 이름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 때부터 하는 거예요. 상처받은 하나님. 주의 이름이 이 세상을 긁고 지나간다. 이것이 바로 주의 이름에 상처가 되는 겁니다. 동시에 이 세상은 주의 이름이 받은 상처에 근거해서 의의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다시 오늘 강의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이 믿는 하나님은 다 거짓말입니다. 가짜에요. 나를 상처 안 되기 위해서 도입된 관념이에요. 나 긁지 말라고. 나 다치면 긁히면 아프다고. 자기 아픈 것이 우선이에요. 안 아파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의 출처, 근원 난 그 딴 것 모르겠고 지금 내가 마음이 안 아파야 된다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했습니다, 미리. 마음의 기호. 다윗은 주님의 마음의 기호입니다. 특이해요. 주님의 마음의 기호에요. 다윗은 억울하게도 계속 억울해요. 억울 안 할 수가 계속 억울하면서 난데없는 인간들로 인하여 계속 추방을 당하니까 다윗 본인도 답답해요. 다윗의 심정을 이해하세요.
그들이 나쁘다고 해서 나는 의롭다고 하는 게 다윗이 아니고요. 그거는 우리가 너무나 상식적인 거고. “네가 감히 나를 쳐. 나는 너에게 분노할 거야.” 이게 아니고 나를 치는 그들이 이해가 된다는 거예요, 다윗이. 같은 편인데 나를 치니까 그 점이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같은 편인데 나를 치는 거예요.
시집 간 여자 분들은 다 알 수 있을 거예요. 동서들끼리 잘해보라고 하는데 큰동서가 이유도 없이 나를 미워해. 뭐 달래보려고 명품 사주고, 소용이 없어요. 그쪽에서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어요. 뭐 시아버지 재산 노리는가, 왜 그래? 그게 다윗의 심정이에요. 너 이해한다니까. 네 마음, 심정 알아줘. 그런데 나를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야. 사울에게 다윗이 물었어요. “왜 당신은 나를 싫어합니까?” 사울이 하는 말이, “나도 내 마음 몰라.” 이게 마음의 기호에요.
이게 왜냐 하면 다윗을 미워하는 기능 때문에 사울 왕은 무엇이 들렸단 말인가? 악신 들렸다고 표현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울은 본인이 악신 들렸다는 표현을 못해요. 왜냐? 자기는 정당하니까. “동서는 왜 나를 미워해?” “나 악신 들렸거든.” 그런 소리 안 합니다. “나 너 안 미워해. 그런데 자꾸 미운 마음이 드는데 나도 내 마음대로 안 돼. 미안하다.” 미안하다 해놓고 돌아서면 마찬가지.
이상하게 이유도 없이 미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이유도 없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막상 함께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미워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쪽에다 물어보세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미워했다고. 절대로 그들은 하나님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하나님을 찾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의 기호로서 나타난 다윗은 그들에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은 좋아하면서도 다윗은 미워한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느 편에 서있는가? 지금 다윗과 함께 있는 겁니다.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시편 23편은 그 당시 하나님의 계시에요. 이유 없이 미워하는 것, 그것은 네가 좋아하는 하나님은 가짜고 진짜 하나님은 네가 미워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있다.
그러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마찬가지인 나를 주께서 시범조로 나를 죽음에서 소생시키는 그 작업이 다윗을 드러나는 진짜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주의 이름이죠. 주의 이름의 표현형, 이것이 바로 다윗. 이것이 바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표현형, 예수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로 다윗처럼 다뤄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싫어할 수 없어요. 왜? 지 사는 거나 나 사는 거나 진배가 없고 똑같기 때문에. 똑같은데 이상하게 하나님께서 달리 다루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살아가면서 이 특이 사건을 우리 성도를 통해서 그걸 증명하게 하시고 그걸 시험하시는 거예요. 이미 마감된 사건은 십자가 사건이에요.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어요. 끝났어요. 끝났는데 그 죄 사함보다 내가 안 다치고 내가 남한테 인기 얻는 게 더 좋아진다면 여전히 우리는 다윗처럼 더 얻어맞을 게 아직 많이 남아있는 것을 우린 시편 23편을 통해서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가는 것이 생명의 길인 것을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