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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서울의존강의20210610b 베드로전서5장 10절(낯선 배치)-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베드로전서

서울의존강의20210610b 베드로전서5장 10절(낯선 배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은 좀 난해할 겁니다. 어떤 점에서 난해하냐 하면 고난을 설명할 때 사도행전이라는 것이 우리한테 있다는 말은, 예수님이 고난 받을 때는 누구도 예수님 개인의 고난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 개인의 고난에 예수님만 계시면 예수님만 구원 받아요.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이 그 제자들에게 파급이 되어서 그들이 만들어 내는 지평, 새로운 영역이 사도행전이에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나 야고보나 사도바울이 가는 그 행적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던 그 행적과 유사점이 굉장히 많습니다. 기적을 베풀었다고 소문 났는데 그들이 사도행전 마지막에, 은근히 기적 받을 때는 좋았는데 나중에 말씀을 전하니까 다 가버렸어요.

그렇다면 이제부터 왜 어려우냐 하면 말로 전부다 응집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의 능력이 병 고치고 뭐가 있더라도 최종적으로는 말로 응집이 돼요. 이게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0장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구원은 말씀을 들음으로 오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거예요. 사도바울이 예수님 부활 후에 만났잖아요. 나도 그렇게 만나고 싶어요. 사울아, 사울아. 뭐 그런 것 좀 보고 싶은 거예요, 영광스럽게. 갑자기 눈이 막 장님 되고 누가 와서 안수하니까 눈 뜨고. 그런 롤러코스터 같은 짜릿한 체험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말은 너무 밋밋해요. 말 듣다가 졸 수가 있거든요. 실제로 사도바울이 설교하는 중에 3층에서 떨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죽었죠. 죽었는데 사도바울이 또 살려줬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하는 그 모든 육신의 것이 보조적이에요. 핵심은 죽었다가 살아나도 인간은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이렇게 눈으로 보고 듣고 기적을 바라는 이유가 기적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인간의 몸에 대한 집착에서 나온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말씀을 주시거든요. 몸이 아니고 말씀. 말씀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보이지 않는 주님의 몸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이 주님의 몸 안에 있다는 말은 나에 대해서 일체 미련을 끊어야 하는 겁니다. 내 몸이 행복하다든지 내가 잘 될 생각을 가지고 오면 안돼요. 나에 대한 미련을 끊어야 돼요. 내 몸이 있으면 내 자아는 내 몸 안에 있어요.

그런데 아까 어렵다는 말이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오늘 본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부르심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영생 주기로 작정된 자.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를 때, 우리 이름을 가지고 “아무개야~” 떨리듯이 부르는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사도바울이 전한 것은 복음입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이 십자가 복음은 가는 가운데 김영순! 이철환! 너 판에 불렀어. 이렇게 이름을 불러주면 되는데 그게 아니고 특정 개별적 이름을 부른 게 아니고 그냥 예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다고 이야기해버려요. 그러면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주께서 자기 존재, 자기 이름이라는 특정된 내 존재를 개무시하는 거예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요. 주님의 존재에서 나오는 말씀에 의해서 새롭게 지음 받으면 그만이지, 굳이 내 존재가 구원이 되어야 됩니까, 안 되어야 됩니까? 그걸 확인할 필요조차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구원을 하나님께 원하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주님 자신의 말씀이 담기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래요. 구원론 아닙니다. 말씀론입니다. 구원론은 없고 말씀론밖에 없어요. 인간의 육체는 풀 같아서 없어지거든요.

제가 언젠가 설교시간에 그런 예를 든 적이 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곧이 곧대로 하는 신입사원이 와서 사내 분위기 딱 보니까 우리 부장님이 돈을 좋아한다고 해가지고 그 다음날 퇴근해서 집에 A4용지 사다가 열심히 돈, 돈, 돈, 만원도 아니에요, 그냥 글자로 돈, 써가지고 가위로 오려서 그걸 또 봉투에 넣어 가지고 두껍게 해서 딱 줬죠. 부장님 이거, 좋아하시는 거 신입으로서 내가 예의인데 돈 좋아하신다고 해서 돈 가지고 왔습니다. 아이고, 얘 이거 사회생활 할 줄 아네. 신입인데 신입 아닌 거 같애. 얘가 주제파악 하네, 집에 가서 마누라한테 자랑한다고 돈 꺼내보니까 진짜 돈 나왔어요. A4용지, 저 같으면 이면지 사용합니다만. 우리가 구원 좋아한다면 주님께서 구원, 구원, 구원 해가지고 가끔 십원 써서 딱 줬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죄 사함을 얻는다 할 때는 이미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의 특징이 뭐냐.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구원해주기 바라는 그것이 죄인이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죄의 한 모습이에요. 그것을 일체 개무시하듯이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네가 복음을 전했어? 주의 이름으로 기적을 베풀고? 내가 묻는 것은 네 안에 나 있느냐를 묻지, 네가 뭘 했느냐를 묻지 않습니다.

네가 열심히 나를 위해 뭘 했는가, 나는 그거 더러워서 안 받아, 더러워서. 구약에 보면 창녀가 들고 온 돈은 성전에 들어갈 수 없죠, 더러운 것. 그 창녀나 오늘날 월급 타려고 스크루지 밑에서 일하는 집사님이나 다 같이 창녀죠, 뭐. 돈보고 일하는데. 사랑으로 할까요? 돈보고 하는데. 사랑이라 하는 것은 개코도 돈 나올 데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게 사랑이지 돈 있는데 그걸 사랑한다면 누가 믿겠어요? 재벌 3세보고 나 당신 사랑해. 그런 여자가 한 두명이겠습니까?

누가 주님을 사랑해요? 주님 뭐 볼 거 있다고요. 주님이 우리에게 현찰을 뿌렸습니까, 뭘 줬어요? 너는 너 자신을 미워하라. 그 말씀 외에는 없잖아요. 멀쩡한 내 몸을 미워하라고 하니까 가당치도 않는 이야기죠. 열두제자 중에서 돈 깨나 있는 사람 누가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이미 세상에서 난 이미 죽었다, 하고 살아간 사람이 열두제자였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아니 자기 목숨을 주께서 사용하시기 때문에. 네 목숨은 내 손에 있으니까 네가 관리하지 마라. 이미 목숨이 주님 쪽으로 넘어갔어요.

그래서 사도바울, 모든 사도들이 말하기를 사나 죽으나 너희는 주의 것인 것을 네가 인정하지? 인정 안 한다고? 그럼 내 사람 아니지. 나는 설교할게. 사나 죽으나 나는 내 것이 아니라는 자에게만 먹히도록 내가 설교할게. 그게 로마서고 갈라디아서고 에베소서에요. 그러니 제 말은 우리가 ‘우리에게 필요한 걸 주세요’ 가 성립 안 되고 그냥 말만 해요, 말만. 그냥 말씀만 한다고요.

로마서 10장을 잠시 보겠습니다,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10장 14절,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러니까 듣고 믿고 구원받고. 딱 그겁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한 유명한 말이 있죠. 내가 너희에게 말을 전하는데 영생을 못 받은 자들은 그것을 사도바울 본인의 말로 아는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안 믿는 자들은 네가 네 철학을 전하고 네 사상과 네 신학을 전한다 그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그런데 사도바울은 엄청난 이야기를 합니다. 다 그렇게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겠는데 너희들은 상당히 독특하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너희들은 내 말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말씀 말고 믿는 믿음이 너희 안에 말씀과 더불어 같이 어플리케이션처럼 작동하도록 주께서 말씀 전할 때 성령의 은사도 같이 줬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하는 나도 네 구원에 관여한 바 없고 구원받은 너도 네 구원받은 데 있어서 너도 네 구원에 전혀 관여한 바가 없는 식으로만 주께서 일하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인간이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는 원칙이 전혀 통하지 않는 세계, 그게 고난의 세계에요. 그러니까 고난의 세계가 고생의 세계가 아니라 어리둥절한 세계고 낯선 세계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 구별되었다는 점에서 이상하게 기분이 좋고 자유함이 치밀어오는데 말릴 수가 없네, 이 자유 만끽함을. 어떻게 내가 조절이 안돼요. 여러분도 그렇죠.

아직 어려운 게 많이 남아있어요.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전에 강남강의에서 에발 산과 그리심 산 이야기를 했죠. 그 때 신명기 27장을 제가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그 대목을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테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는 이 산에 있고 저 사람은 저 산에 있는데 저 사람쪽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축복을 받을지어다” 축복을 날릴 때 이쪽에서 주저없이 “아멘” 하겠죠? “진실로 그러해야 됩니다.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마땅한 일입니다.” 라고 하겠죠. 그런데 뭐라뭐라 하는데 바람이 날려서 잘 안 들리고 뭐라뭐라 해놓고 끝에 이런 말을 들었어요. “저주를 받을지어다” 만 귀에 들려왔어요, 지나가는 바람 때문에 놓쳐서. 그 때 “아멘” 됩니까? 저주 미사일 막 날아오는데.

“저주받을 만하면 저주를 내려주시옵소서. 내가 저주받는 것이 저한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주님이 주님답게 일한 것이 합당합니다. 아멘” 이럴 수 있는 사람 있어요? 좋은 소리하면 달려가서 맨발로 영접하겠는데 “너 지옥 가”할 때 “아멘. 지옥 보내주시옵소서” 하고 ‘반갑다 친구야’ 하면서 마중 나올 사람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그러니까 이게 인간들의 시공간에서 인간들이 하는 행세는 천국에서 먹히지 않는 겁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제가 믿겠나이다.” 하는 믿음은, 인간들의 시공간에서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면서 믿었던 믿음을 가지고서는 그 어플리케이션에 안 맞아요. 작동원리와 안 맞는 겁니다. 소켓이 달라 맞지를 않아. 부속이 달라요, 부속이. 그러면 진짜 성령 받은 믿는 사람은 웃으면서 기쁨으로 “내 믿음은 부속이 안 맞네.” 이렇게 여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이제부터는 굳이 내 믿음을 가지고 주님 마중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아주 다행스럽다는 듯이 주님 앞에 고백할 수 있어야 돼요.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 저는 그것을 주님 영접하는데 활용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가짜이기 때문에. 내가 가짜거든요. 내 존재가 가짜, 내가 가짜거든요. 가짜인데 살았다는 것은 진짜 주님께서 지금껏 살려주신 거예요. 집에 강아지까지 다 살려주셨는데.

그러니 저주를 반길 줄 알아야 돼요. 한번 적어볼게요. ‘저주를 반길 줄 알아야 한다.’ 저주를 반길 줄 알아야 돼요, 저주를. 길 가던 과객이 우리 집 들여다보면서 하는 말이, “이 집안 벼락 맞아라” 할 때 “아멘”. 시므이가 다윗 보고 “개 같은 이새의 아들, 저주 받아라.” 하니까 다윗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멘” 했죠 (사무엘하 16장). 세상이 저주를 해도 주께서 복으로 바꿔 주시는 분이다.

이 말은 진짜 복된 사람은 복을 주는 데 가서는 복된 사람 티가 안나요. 저주를 퍼붓는 곳에 갈 때 주께서 거저 주신 복이 얼마나 소중한가 새삼 그것을 만끽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직도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거예요. 전부 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 만나기 싫은 사람들이에요.

학교 다닐 때도 그날 시간표 보면 기분 나쁜 선생님들 있을 때는 학교 등굣길이 괴롭죠. 직장 생활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직장 상사 출장 안 가나? 속으로, 제발 너는 내 눈에 띄지 마. 간절히 소원한다. 제발 내 눈에 띄지 마. 속으로만, 안 그러면 잘리니까. 퇴직하고 너 만나면 죽일 거야. 내가 돈 때문에 있는데 퇴직하고 나면 죽일 거야. 남자들은 이걸 느껴요. 군대생활 해봤기 때문에. 정말 그냥 하면 탈영이 되기 때문에 차마 내 인생 청춘을 여기서 망칠 수 없기 때문에 참지. 특히 군에 늦게 간 사람은 나이 저보다 10살 동생뻘인 사람이 까부는 거 보면 제대하고 한번 보자. 그러는 거예요. 실제로 우리 아는 사람은 하도 고참이 괴롭히니까 몰래 만나가지고 혼내줬어요. 너 까불다 죽는다. 입 다물고 있어. 예, 알았어요. 그 다음에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상병님~그렇게 하고. 할 수 없어요. 돈으로 꽁꽁 묶였기 때문에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이 저주를 반길 줄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쁜 짓해서 저주를 받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 태어난 자체가 죄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저주 아닌 게 없어요. 죄 사함이 복이지 그 외에는 부자 되고 부동산을 몇 개 가지고 뭘 해도 승진하고 합격하고 그것은 전부 다 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우수함을 자랑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어제 수요일에 이야기한 것처럼 나를 괴롭히는 고문 기구로 돌변됩니다.

늘 얘기하지만 서울 시장이 서울 시장이 아니고 9급 공무원 같으면 자살 안했어요. 자기가 자랑질하고 가문의 영광이었던 서울 시장이었기 때문에 관악산에 가서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이거 또 말도 조심해야 돼. 자살했다는 소문. 하도 음모론이 많아가지고 스웨덴 대사한테 맞아죽었다든지 하도 음모론이 많아서 그냥 자살했다는 소문이 있어요. 어째든 자살이라 친다면 그거 왜 죽어요? 자기가 가상적인 자기한테 농락당한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저기서 ‘시장님’ 하니까 지가 뭐 대단한 줄 알고 있어요.

개 이뻐하면 침대에 올라오는 것하고 똑같은 거예요. 참, 개 이뻐하면 침대에 올라온다고요. 나중에 보면 개가 은근히 주인을 발로 찬다니까요, 내려가서 자라고. 안 그렇습니까? 지는 맛있는 거만 먹을라 해. 버릇 더럽게 들여놔가지고. 인간도 마찬가지에요. 주위에서 으싸으싸 잘한다 하면 그것이 자기를 지옥 보낼 저주라는 건 모르고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감사헌금하고 난리도 아니라. 자기가 속을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이 나라는 인간이.

그 다음에 어려운 게 나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해줘야 그 다음에 어려운 이야기가 돼요. 한번 적어볼게요,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혼자 있을 때는 의미가 없어요. 항상 과연 내가 신자냐 신자 아니냐, 성도냐 성도 아니냐를 확인하는 길은 주님께서 누구를 만나도 어떤 경우를 만나도 만나게 해줘요. 주님께서 만나게 해줘요. 그래서 사도행전입니다. 사도가 저 산에 올라가서 임금님 벌거벗었다고 말하는 그런 식이 아니에요. 가장 저주를 할 만한 것들이 있는 곳에 사도바울이 간 게 아니고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성령께서 주님께서 가게 하시죠.

마치 광야에서 예수님을 마귀가 기다리는 그곳으로 보낸 것같이 그 같은 코스의 반복이에요. 어차피 천국 갈 거 살아 생전에 지옥에서 들을 욕을 한번 배부르게 먹어보라는 거예요. 어차피 천국 갈 거, 지옥에 안 갈 거, 지옥에서 들을 수 있는 욕은 욕대로 다 들어먹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들었던 욕설이고 예수님에 대한 모멸감이죠. 욕도 욕이고 모멸감, 이것도 기분 나쁘지만 더 기분 나쁜 것은 이거에요. ‘냉소적’인 것. 차갑게 아예 안 들을려고 하는 것이 우리를 더 힘들고 외롭게 만들어요. 많이 들었다, 많이 묵었다 고마 해라. 이거 있잖아요.

그래서 사도행전이나 어떤 성경 전체를 볼 때에 꼭 사이, 차이에서 복음이 나옵니다. 창세기 4장에 아벨이 혼자서 도 닦는다고 복음이 나오는 게 아니고 누구를 만나냐 하면 형을 만나서 맞아죽죠. 그 아벨과 형 사이에서 피 복음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 게 어려운 거예요. 그러나 지식은 혼자 있어도 지식이에요. 어디까지나 그것은 지식이고 나의 잘남으로 되돌아오거든요.

나를 떠나게 만들고 이 의미가 나에게 도로 회수되는 일이 없고 주님께로 회수되려면 다윗이 사울에게 계속해서 쫓기는 겁니다. 그걸 제가 대전에선가 이야기했어요. 다윗이 쫓기는 것을 세 자로 표현했습니다. ‘자기장’이라고. 자기장 알죠? 자석의 필드(field). 자석의 필드가 어떤 선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자석에 쇳가루를 뿌리면 자석 주위에 선을 형성해요. 쇳가루 뿌리기 전까지는 여기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무것도 없고 그냥 못이 딸려 온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해보니까 파동처럼 어떤 장(場)이 형성되어 있었어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눈에 보이는 쇳가루를 뿌리니까 그렇게 된 거예요.

이 쇳가루가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과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쇳가루로 사용하는 거예요. 주님의 장(場)이 이 현실을 덮고 있다는 사실을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 쇳가루 사이사이에 예수님을 핍박하고 모독했던 흑암의 권세가 계속해서 이 사이사이에 핍박을 하겠죠. 그렇다면 복음은 차이 또는 사이에서 출몰한다는 원칙이 되는 겁니다. 홀로 도 닦는다고 신학 연구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만나야 돼요, 원치 않는 자를. 자기가 도 닦고 스스로 자기를 부정할 수가 없어요.

전에도 그런 예를 들었는데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오늘 이거 백 번 외우기.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외우고 나는 이미 죽었다. 십자가 피로 하고 나는 주님 앞에 쓰레기야, 쓰레기야. 나는 나쁜 인간이야. 나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해도 항상 범사에 기뻐해, 감사해. 하다가 자기 집 가까이 와서 보니까 차가 딱 긁혔어요. 누구야? 누가 이 짓했어? 건드리니까 자아가 등장하는 거예요. 안 건드릴 때는 주님만 등장하다가 자아는 없는 줄 알았죠. 딱 건드리니까 죽여 버릴래. 당장 죽여 버릴 거야. 걸리기만 해봐라. 뭐 이런 거.

한국에 천만 성도라 했잖아요. 거짓말인지 모르겠지만 한 때 천만 성도. 이승만 대통령이 조성한 복음적 분위기에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이 크리스마스를 공휴일로 만들었다고요, 부처님 오신 날 없을 때, 그 정도로 많이 호응을 해줬어요. 그래서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 교회에 가서 이 각박한 서울 생활에서 견디도록 부흥회도 많이 열고 교회가 많이 생겼어요. 기독교가 천만, 더 구라치는 사람은 천오백만 이렇게까지 거짓말했단 말이죠. 자기들은 신자인줄 알았죠. 늘 만나는 사람, 기독교 신자만 만나고 김사장 박사장보다 더 흔한 게 김집사 박집사였어요. 다방보다 교회가 많다는 소리 나오고.

그런데 코로나 딱 터지니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먹었지? 그 많던 성도들은 다 어디로 갔죠? 그 많던 낙엽들이 다 어디로 갔지? 없어요. 자기 살려고 예수 믿은 거예요. 복음이 목숨보다 귀하다고 잘 배웠어요. 그런데 코로나 오니까 내 목숨이 귀하네. 내 목숨이 주님 목숨보다 더 귀해. 죄 사함이 날라가 버렸어요. 내 목숨 지키기 급급한 거예요, 내 목숨 지키기에.

그걸 사자성어로 ‘살고보자’는 거예요. 이랬든 저랬든 간에 복잡한 거 싫고 내 안에 남아있는 것은 살고보자. 여기서 살고보자를 여섯 자로 늘이면? 나만 살고보자. 틀림없습니다. 건드려보니까. 내 안에 예수 믿는 나만 있었지 예수님은 안 계셨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베드로전서 5장에 나오는 예수 안이 아니었고 열심 내는 내 안에서, 주님께서 부르심이 아니라 불러줄 것을 은근히 노리면서 열심히 간절히 간곡하게 정성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주님께 충성하고 싶었던 겁니다.

누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것을 두 자로 우상이라고 합니다, 우상.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성령이었어요. 코로나 터지니까 더 살고 싶어. 그것도 여섯 자로 늘이면 나만 살고 싶어. 마누라? 아니 끝났어. 걸리든 말든 나만 살고 싶어. 나만, 나만 살고 싶어. 이거 어쩔 거예요? 이 사태, 어쩔 겁니까? 그동안 공들인 거 한방에 다 날아갔는데.

코로나라는 그 타인을 만났어요. 혼자 있을 때는 천하의 신앙인이 코로나 딱 걸리니까 코로나와 더불어 있을 때 자기의 본색이 다 노출된 겁니다. 그것은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 온 것이 아니고 죽은 말씀을 내가 살겠다는 의도로 내가 일방적으로 해석해버린 거예요. 해석하니까 지식이 나오고 그 지식을 소지하니까 나는 복음을 안다고 우겼던 겁니다.

이런 사람의 대표적인 자들이 신학교수들이에요. 신학교수들의 공통점은 개척교회하기 싫다는 거예요. 개척교회하면 굶어죽거든요. 교수는 따박따박 월급 나오잖아요. 개척교회하는 사람들한테 신학 가르쳐주는 것으로 자기 밥벌이를 할 수 있지만 진짜 개척교회하면 밥벌이가 안돼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는 친척들을 막 불러 모으죠. 그걸 청호 정수기라 하죠. 아는 친척들에게 다 팔아먹어요. 그럼 끝났어, 이제.

그럼 이 난감한 사태를 어떻게 할 건데요. 여기에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나만 살고 싶다. 이렇게 되겠죠. 이 본성이 우리가 어떤 경우라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해석하고 말씀을 이해해서 구원받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목적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나만 천당 가고 나만 살고 싶고. 같이 가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나 나는 무조건 가야 돼, 무조건. 이 본성은 인간의 힘으로 지워지지 않아요. 그래서 아무리 신앙해도 누굴 만나게 되면 없다고 생각했던 내 본성이, 나만 챙기는 우상적인 본성이 탁 튀어나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 이미 말씀으로 완성되어 있죠. 완성된 그 말씀을 사도행전이나 성경 전체에서 자기 택한 백성들을 어떻게 건지는가. 바로 이겁니다. ‘배치’를 하는 거예요. 개개인을 부수는 것이 아니고 그 개인주의를 적재적소에 배치를 해서 새로운 관계를 엮어버려요.

그러면 이 배치에서 나는 나만 살겠다는 이것이 전체의 배치도에서 구도 속에서 무엇으로써 귀한 재료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되는 거예요. 내가 나를 구원할 것 같으면 이것은 아무런 가치 없어요. 그냥 이기주의고 나를 섬기는 우상숭배이고 그런 거예요. 그런데 이 우상숭배자가 전체 판에서 배치가 되어버리면 이건 죄인이 되어서 주님의 자기 일을 하는데 꼭 필요한 부속품이 됩니다.

그게 누가복음 15장, 16장에 나옵니다. 자, 15장부터 나오는 세 개와 16장에 나오는 한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여기에 합당한 것이 세 개있어요. 하나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 두 번째 잃어버린 보잘것없는 동전 한 닢. 그리고 15장에서 유명한, 잃어버린 집 나간 탕자. 16장에서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가 필요한 거예요. 왜? 주님만 의인되기 위해서.

사람은 천국가기 위해서는 자기가 의인되어야 간다는 그 상식에 의해서 자기가 복음을 지식으로 구입해가지고 스스로 알고 있는 죄를 스스로 알고 있는 피 가지고 스스로 그것을 믿는다 해서 스스로 자기가 씻어서 내가 기대하는 의인으로 탈바꿈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 시도는 나만 산다는 그 본성에서 당연히 나오죠. 그런데 그 모든 시도를 통해서 나는 이제 구원받았다. 성령까지 주셔서 감사합니다. 찐찐 진짜 성령, 가짜 성령 말고 찐 성령 주셔서 감사합니다. 했는데 꼴 보기 싫은 사람 딱 만나는 순간, 나가 죽어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해서 온갖 거 다 동원해서 너 사탄이지? 하고. 나만 살기 위해서 발악을 하는 본성이죠.

그래서 주님이 새로 짜주시는 환경이 그만큼 중요한 겁니다. 배치에요. 그 다음엔 더 어렵죠. 여기까지는 여러분들 이해되시죠? 한번 적어볼게요. ‘달라진 배치가 주는 의미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달라진’, ‘이미’, ‘포함’되어 있다. 달라진 배치는 아까 말씀드렸고 달라진 배치가 주는 의미 속에. 그러니까 배치가 아니면 총괄적인 의미는 없는 거예요. 사적인 의미는 의미로 인정 안 합니다.

달라진 배치가 주는 의미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세 자로 이야기하면 ‘장기알’이에요, 장기알. 우리는 장기알이에요. 내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장기 두는 사람 따로 있어요. 갑자기 한숨 놓이죠. 충분히 죄인 되어야 돼요. 어느 정도로 죄인이냐. 나만 챙기는 죄인 되어야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평생가도 달라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사도바울이 성령 안에서 이야기합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성령 안에서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마귀도 알아주는, 귀신도 알아주는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의를 행하지 못하고 나는 원치 않게 죄만 짓는 그러한 죄가 우세한, 내 안에서 죄가 오히려 의를 이기는 그런 존재가 나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다.

그런데 내 입에서 결국은 찬양하리로다. 나오거든요. 오늘 본문 베드로전서 5장 11절 누가 읽어보세요.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권력이 어디 있습니까? 나한테 있습니까, 그 분에게 있습니까? 그 분에게 있죠. 그러면 그 분이 장기 두는 분이에요. 권력이 그분에게 있으니까.

그럼 권력이 그분한테 있다는 말은 이 땅에서 고난 받으신 그 분에게 권력이 있다는 말은 그 고난의 의미 속에 아픔의 의미 속에 내가 얼마나 골칫덩어리였다는 것이 담겨있죠. 골칫덩어리가 주님의 권능에 의해서 주님 자신의 영광과 그 죄 사함의 능력을 위해서 우리가 장기알로 배치가 됩니다.

자, 그다음에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거예요. 어제의 배치는 어제로 끝났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어제의 의미를 오늘로 당기지 마세요. 어제는 어제의 배치에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거예요. 과거의 일로 사과하지 마세요. 그 때는 사과하세요. 그러나 지나간 것을 지금 사과하지 마세요. 배치가 달라요.

여러분들이 바둑에 관심이 없겠지만 바둑을 둘 때, 같은 지점에 바둑돌이 있더라도 9단이 두는 것하고 9급이 두는 것하고 의미가 달라요. 그 근처 배석되어 있는 다른 놓여진 돌들과 어떻게 연결이 되어있는가를 생각해서 한 수를 딱 둬요. 현재 세계에서 제일 잘 두는 사람이 신진서 9단이거든요. 신진서 9단, 그다음에 박정환. 중국에서는 커제가 유명한데 그 사람이 한판 두는데 1억 딴답니다, 한 판 하는데. 그러니까 둘 때 온갖 생각을 다 하는데 심지어 신진서 이 사람은 인공지능한테도 이겨요. 기계한테 이겨요. 이세돌을 이겼다는 인공지능을 이겼다니까요. 얼마나 생각을 많이 하겠어요. 한창 젊으니까 스물세 살인가 하여튼 젊으니까 된다고요. 그런데 잘 못 두는 사람이 딱 두고 나니까 그게 악수라. 상대방에게 다 잡히는 거예요. 꼭 뒤늦게 노래방 차리고 뒤늦게 비트코인 한다든지 뒤늦게 주식에 맛들여서 주식하는 사람들 다 떨어 먹잖아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어설픈 무당이 사람 잡아요, 재주도 없는 게.

그래서 주님은 우리 성도로 하여금 더욱 더 날이 가면 갈수록 죄인 되게 하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사랑이 커지기 때문에. 전에는 이 주스 먹는 게 죄 아닌 줄 알았죠. 그러나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자기 배치가 있잖아요. 자기 자존심,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한 배치를 시공간에서 계속해서 스스로 자기에게 단련시켰어요. 지금 동영상 찍는데 이 주스 먹는 태도가 허접스럽게 먹을 때 얼마나 욕하겠는가. 이것은 평소에 자기가 행동을 그런 것들을 감안해서 한 수, 한 수 바둑 둔 거예요. 자기 인생에 수를 두고 바둑을 둔 거예요. 그런데 그 하나하나가 다 죄가 된 거예요.

제가 전에 설교할 때 다윗 이야기했잖아요.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남편을 미필적 고의에 의해서 죽였다 했죠. 그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다윗은 자기 일에 ‘충실’했다고 했죠, 충실. 자기 일에 충실한 거예요. 자기 일에 충실한 겁니다. 어떻게 충실했습니까? 자기 죄를 안 들키기 위해서 충실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걸 원했어요. 왜? 이스라엘의 왕이니까. 이스라엘 왕은 모든 이스라엘의 죄인 됨에 모델이 되는 죄를 지어야 돼요. 그래야 이스라엘 왕이거든요. 그래야 하나님만이 죄 사함 하시는 진정한 왕이 되시기 때문에. 너 같은 허접한 인간들을 구원하니까 이것이 바로 진짜 천국에서 원하는, 장차 오실 메시아가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죄인을 구원하는 것.

다시 말해서 아까 사도행전에 나온 것처럼 나는 죄 사함을 주는 능력이 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런 것 좀 액자 좀 하세요. 액자에 걸어놔야 돼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게 바리새인들을 자극시켰습니다. 에라이, 죽어라. 인간이 되었으면 하나님 말씀 지켜서 하나님 형상을 본받도록 해야지, 성화론을 해야지, 왜 그 반대소리를 하느냐. 유대인들도 주장했고 바리새인들도 주장했어요. 구원받는 것은 믿음으로 그리고 행함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이게 바리새인 신학입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한국의 신학교에서 들어본 이야기 아닙니까? 그게 바리새인 신학이에요.

그들이 말하는 구원은 오직 기적으로 돼요. 그러나 기적 다음에 뭡니까? 기적 받았으면 그걸로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놀면 안 되죠. 기적 받았으니까 보답을 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말씀대로 착실하게 살 능력을 받았으니까 능력대로 살아서 영광 돌리는 것이 우리 몫이다. 이게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이고 이것이 불교 교리에요. 돈오돈수(頓悟頓修)가 아니고 돈오점수(頓悟漸修)에요. 이게 불교교리에 나온다고요. 구원받은 것은 깨달음이고 깨닫고 난 뒤에는 성화해야 된다는 이것이 돈오점수거든요, 점수. 수행을 쌓는다는, 점차 수행을 쌓는 것이다. 돈오돈수는 한꺼번에 깨닫고 한꺼번에 수행도 끝났다. 믿음으로 의롭다. 이것은 성철스님이고.

인간의 아이디어가 신학하고 똑같아요. 이유가 뭔지 알아요? 모든 신학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거예요, 인간을 위해서. 자기를 미워하기 위해서 저주에 아멘 하는 게 아니고 복에만 아멘 하도록 방법론을 가르쳐준 것이 이천년 교회 신학이었습니다. 보이스피싱이 따로 없어요. 그게 사기꾼들이에요.

사람한테 좋게 하면 교인들 쪽수 늘어나겠지. 이게 목회 아닙니까? 그거 3년 동안 배울 거 뭐있어요? 이거 하나인데요. 사람을 기쁘게 하면 쪽수 채워진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안 찾아서 그런 겁니다. 우리 교회 와서 찾으세요. 복 주나 안 주나 테스트해보세요. 창고에 넘치도록 복을 주죠. 물론 창고가 조그마하지만. 창고가 그릇만한데 복 받았네, 벌써 넘쳤으니까.

십일조하면 창고에 넘친다하는 것을 테스트해볼 때 테스트하는 그것이 혹시 안 될까 싶어서 욕심을 줄여버려요. 십일조 할테니까 이번 달 수입이 오천원 늘어나든지 아니면 오천원 절약되게 하옵소서. 그러면 십일조를 줄곧 지켜봤다고 제가 믿겠습니다. 했더니만 시장가서 참외 사는데 오천원 헐게 샀어요. 주여, 믿습니다. 아멘. 이게 복 받은 거예요? 이게 복 받은 겁니까? 지가 조작을 해요. 자기가 조작한다고요. 자기가 자기를 속이고 있는 거예요.

속이지 마세요. 어차피 죄인이잖아요. 그러니까 죄인이 될 경우만 죄 사함이 부각이 됩니다, 죄 사함이. 베드로가 배신을 해줘야 제자다워요. 제자들이 도망을 쳐야 진정 그들을 통해서 주님이 주님답게 등장을 하는 겁니다.

호세아 같은 경우는 아내가 결혼하기 전에 알던 남자를 찾아가 결혼하고 난 뒤에 떠나버렸어요. 가버렸다고요. 이미 그럼 결혼이 무효가 되잖아요. 호세아는 무효를 시키지 않고 자기 부인을 찾아가가지고 멱살 쥐고 머리채잡고 끌고 오지 않습니다. 뭐냐 하면 그 바람난 남자에게 여자 데리고 산다고 한 달 생활비 얼마 나왔습니까? 2년 살았습니까? 한 번 보자, 한 달에 150 잡고 2년 계산해서 값을 다 치뤘어요. 값 치르고 데려왔습니다, 그 간음한 여인을.

그 간음한 여인이 한 범죄에서 우리는 평생 충실하게 벗어나지 마세요, 충실하게. 내 죄에 충실하세요. 내 죄에서 벗어날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타고났습니다. 새삼스럽게 이건 제가 지시, 명령하는 게 아닙니다. 본성을 살리라는 이야기에요. 잠재되어 있는 본성 있죠. 나밖에 모르는 거, 그거 죽이면 안 됩니다.

살려주시면 주께서 적절할 때 배치를 합니다. 어떻게 배치를 하는가. 만나기 싫은 인간들 만나서 나로 하여금 내가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늘 까발리도록 하나님이고 뭐고 내가 신자라고 하지만 내가 나를 신으로 신봉했다는 것을 까발려줄 때 그것이 바로 죄 사함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는 겁니다. 주께서는 배치라는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 고난 안에 있다는 거예요.

그 곳이 낯선 공간이에요. 결국 제목은 마지막 이 말에 있습니다. 낯선 공간. 이래놓고 두 시간 뒤에 또 배치가 달라질지 모르겠습니다만, 낯선 공간. 이 세상에서 내가 의롭다고 자랑질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 낯선 공간. 이미 주님만 의롭기에 그 주님의 의로우심에서 나오는 죄 사함만이 이 죄 많은 나를 의롭게 함으로써 내가 의롭다가 아니라 그렇게 하게 하시는 주님만이 의롭다는 것을 증거 하는 그 안이 바로 성령 안이고 십자가 안이고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을 설명하는데 이렇게 복잡해요. 벌써 배치가 달라져서 제목을 바꿔야겠다. 낯선 배치. 배치하는 것, 할당하는 것 알죠? 할당한다는 말은 내 마음대로 어디에 못 살아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꽉 짜여진 주님의 스케쥴에 따라서 만나기 싫어도 누구를 만나야 되고 안 아파도 아파야 되고 아파도 안 아파야 되고. 이것은 일방적으로 죄인을 더욱 더 죄인 되게 해서 주님이 용서했다는 그 결과물로써 우리를 다루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기존의 잘남의 의미가 순간순간 새롭게 달라진 배치 속에서 또다시 우리가 죄인으로 드러나게 해주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로운 작업에, 일어난 모든 일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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