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4a 울산강의-역대기상 1장 1절 : 발산
20210604a 울산강의-역대기상 1장 1절 : 발산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부터 역대상 하겠습니다. 1장 1절에 보면, “아담, 셋, 에노스”, 2절에 “게난, 마할랄렐, 야렛”, 3절에 “에녹, 므두셀라”, 4절에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 많이 생략돼있지요. 역대상을 보면서 성경책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전에 이스라엘 역사가 먼저 있습니다. 역대상을 이스라엘 역사를 반성하는 거예요. 어떻게 반성하느냐? 이렇게 반성합니다.
하나님은 없는 식으로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그동안 우리가 몰랐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나타날 때는 없다는 것을 굉장히 강조를 해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있다고 여기거든요. 사람들이, 인간들이. 하나님이 있을 거니까 하나님을 믿어야 된다는 생각을 인간들이 미리 전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하나님은 인간들의 그 의도를 비껴나가야 되겠지요. 하나님은 계시고 천지를 만들었으니까 우리가 믿자, 라고 생각하는 그 인간들이 실은 진짜 하나님이 아니고 본인이 만들어낸 하나님이 된 거예요, 그게. 인간이 하나님을 아예 안 믿을 것 같으면 하나님께서 찾아올 수 있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고자 하기 때문에 이게 화근이 된, 문제가 된 거예요.
하나님이 찾아오게 되면, 아아 우리 인간들에겐 애초부터 하나님이 없었구나, 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찾아오게 돼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인간들이 지어낸 만들어낸 거고 실제로 없다는 사실을 그동안 몰랐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가 뭐냐 하면 하나님 믿는다고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 도와주길 바라다가 망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전에 조그만 어렵고 힘들다 할 때 누굴 찾았습니까? 하나님 찾았잖아요. 그들이 하나님 찾을 때 하나님이 그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들어준다고 그렇게 더러운 버릇이 든 거예요. 그들이 요구한다고 하나님이 찾아온 게 아니었는데 그들은 아쉬울 때 하나님 찾으면 도와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동안 그냥 이스라엘만 있으면 그들은 버티고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이스라엘만 있으면” 이란 말을 달리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있으면, 쉬운 말로 뭐냐 하면 땅만 있으면 산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왔잖아요. 들어오고 난 뒤에 땅이 있단 말이죠. 땅이 있으니까 땅만 있으면 그들은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뭘 모르느냐 하면 오래 산다고 해서 본인들이 땅주인이 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상식적으로 우리 육신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믿잖아요. 그렇지요. 손과 발, 머리. 그러면 우리가 이 육신을 오랫동안 이 육신이 우리 것입니까? 여전히 우리 것 아니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육신에 오래 있고 땅에 오랫동안 있기 때문에 특히 육신 같은 경우에 내 육신은 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이 육신은 안 아파야 되고 육신은 오래 살아야 되고 육신은 행복해야 된다는 말도 안 되는 그런 생각들이 육신을 갖고 있으면 꾸역꾸역 속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합니다.
역대상 1장 1절에 보면 아담 있지요. 그 다음에 셋 있고, 에노스 있지요. 역대상 1장 1절이 아담, 두 번째 아담, 세 번째 아담. 2절에 게난. 마할랄렐으로 돼있는데 그렇게 돼있지 않고 2절 아담, 그 다음에 아담, 그 다음에 아담. 3절에 에녹, 므두셀라라고 돼있는데 이것이 므두셀라가 아니라 아담, 이렇게 돼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아담 다음에 셋이라는 다른 사람이 등장하지요. 그 다음에 에노스 등장하지요. 사람은 바뀌는데 뭐는 안 바뀝니까? 맨 그 땅은 여전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일단 이렇게 정리하면 오늘 쉽게 들어가는 겁니다. 하늘은 없다. 오직 땅 밖에 없어요. 하늘에다 하나님 사진 찍을 일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늘 아무리 쳐다봐도 하나님의 일이 없어요.
하나님의 일은 땅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는 아무리 천년 가까이 살아도 어느 누구도 이 땅에서 본인들이 그 땅을 천년만년 수만 년 그 땅을 점유해서 자기가 몽땅 소유해서 사는 위인이 한 명도 없어요. 살다가 죽고, 살다가 주고, 살다가 죽는 겁니다. 땅에서 나는 나라는 자체는 소멸되고 끊어지는 거예요.
그 끊어짐, 이 땅과 땅은 영원히 계속 가는데 아담도 죽고 셋도 죽고 에노스도 죽잖아요. 땅은 지속적으로 오래 긴데 인간은 짧지요. 인간은 짧고 죽는단 말이죠. 인간은 짧게 만들어버려요. 천년 동안 살고 천년이란 짧은 인생을 살면서, 천년이 우리 보기엔 길지만, 짧은 인생을 살면서 죽게 만드는 것, 이게 뭐냐 하면 하늘의 일이에요. 하나님의 일이라고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믿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내가 평소에 이 땅에 살다가 사라지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요, 그냥. 살다 죽어라. 죽을 때 죽더라도 죽는 이유는 알아야지. 그 죽는 이유가 하나님의 일이에요.
이 땅에서 건강하게 사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오늘 죽더라도, “아아 내가 죽을 만해서 죽는구나, 죽을 이유가 있어 죽는구나.” 그 죽을 이유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거예요.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요. 믿는다는 것도 구라고 거짓말이거든요. 그동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자체를 자기 것으로 삼고 싶은 겁니다.
자기는 소멸되어야 될 대상인데 그렇지 않고 자기가 살아 있으니까 자기가 계속 살아 있을 거라고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이 날아가 버리고 내 일이 하나님의 일이 돼버린 거예요. 그래놓고 하는 말이, 하나님 믿습니다, 라고 주장하게 된 겁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아닌데.
인간이 죽는 이유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일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네가 긍정적으로 간여할 수 없는 존재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이 땅에서 차례, 차례로 태어나서 죽고, 태어나서 죽고, 태어나서 죽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역대상 1장 1절에서 아담 끊어지고, 셋 끊어지고, 에노스 끊어지고, 게난 끊어지고, 마할랄렐 끊어지고, 야렛 끊어지고, 에녹 끊어지고, 므두셀라 계속 끊어지게 되는 겁니다.
나중에 온 분을 위해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없음을 분명히 밝히면서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인간세계에서 정상적인 것은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 없으니까 하나님 믿을 이유도 없지요. 그런데 인간세계가 얼마나 더럽고 수상한지 하나님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평소에 행동은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자꾸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하나님 믿습니다, 하고 있다 이 말이죠. 이 가증된 걸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하나님 없는 이유가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신약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네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터 잡고 본격적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내 안에 나는 죽고, 나는 죽었는데 왜 내가 살아 있다고 느낍니까? 그건 네가 사는 게 아니고 네 안에 그리스도가 살기 때문에 계속 사는 거예요.
하늘 쳐다보고 하나님 믿는다고 그게 하나님 일이 아니고 나를 없애는 게 하나님의 일이에요. 자꾸 네가 있다고 이야기하면 할수록 하나님은 너한테 없는 존재가 되는 거예요. 내가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 있든지 둘 중에 하나 해야 돼요. 나도 있고 하나님도 있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한 적이 없어요. 내가 없을 경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내가 만약에 있다면, 내가 있어서 구원받고 천당 간다면 그건 하나님이 없는 거예요. 나를 천당 보내는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이거든요. 왜? 내 있음이 우선이니까.
역대상 시작하면서 제가 뭐라고 했던가요? 역대상은 지난 이스라엘에 대해서 반성하는 책이라 했지요. 반성한다고 했지요. 뭘 반성하는 거예요? 지금 역대상에서 이야기하는 게 뭘 반성하는 겁니까? 우리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 믿지 않은 증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압니다, 하고 우기는 그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은 증거가 된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일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을 없애버리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를 없애버리는 게 하나님의 일이듯이, 나를 죽여 없애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듯이. 그래서 역대상에 나오는 족보들이 굉장히 급해요. 빨리 나가요. 생략된 게 많아요. 그냥 쭉 달려버려요. 역대상 1장 1절부터 8절까지 그냥 쭉 달려버려요. 이것은 역대상의 목적이 너무나도 강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관광하는 용도로 렌트해서 차타고 가다가 예를 들어서 제주도 가서 렌트 많이 하잖아요. 렌트해서 여행하는데 자기 어린 아들은 제주도 여러 번 와봤다고 호텔에서 그냥 쉴래, 하고 있고 나이 많은 부부끼리 차타고 여행하는 순간에 아버지 내가 다쳤어요, 3층에서 떨어졌어요, 라는 소릴 들으면 그 아버지, 엄마가 차를 몰고 여유롭게 관광 다하고 난 뒤에 그때 슬슬 호텔에 들어갑니까, 안 그러면 정신없이 호텔에 들어가는 거예요? 정신없이 신속하게 들어가지요. 왜? 목적이 있잖아요. 아들이 어떻게 됐는지, 얼마나 다쳤는지 알고 싶잖아요. 그때는 관광이고 뭐고 없지요.
역대상이 그런 거예요. 왜 다윗이어야 하느냐, 왜 다윗이 왕이어야 하느냐? 이 목적을 향하여 나머지 있는 족보들은 그냥 들여다볼 것도 없어. 그냥 빨리 통과, 통과해서 쫙쫙 가는 거예요. 다윗이 왕이 된다는 것은 이것 자체도 원래 이스라엘에게는 다윗이 왕이 된다는 이것 자체도 그 안에 이스라엘의 범죄가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왕이란 말은 다른 모든 민족에는 왕들이 있지만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의 차이, 차별성 때문에 의도적으로 왕이 없어요. 다른 민족은 왕이 지도력, 리더십을 발휘해서 그 나라를 버텨야 되거든요. 다른 나라한테 안 먹히기 위해서 버티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믿고 자시고 할 왕이 없어요. 이스라엘 왕은 뭐냐 하면 이게 왕이에요. 율법이 왕입니다.
자, 지금까지는 여러분들의 쉬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부터 왜 다윗이 왕이 되어야 하는 그 점을 설명할 순서가 되었어요. 이스라엘에 다윗이 왕이 된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구심점을 인격체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아까 제가 이스라엘은 뭐가 왕이라 했습니까? 율법이 왕이죠. 율법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했거든요. 율법은 그냥 문자지요. 그런데 나중에 다윗 때에 왕이 등장합니다. 다윗이 왕이 되거든요. 왕은 인격체지요. 그러면 율법이 어떻게 인격화되느냐? 이 점을 역대상, 역대하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떻게 율법이 인격화되느냐, 하는 그 문제.
구심점을 p라고 합시다. point인데 줄여서 p라고 합시다. p에서 에너지가 마구 튀어나오는 것, 이걸 수학에서 divergence라 해요. 발산. 발산 알지요. 튀어나오는 것. 특히 방향이 이렇게 되는 것을 양의 발산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대되는 음의 발산은 뭐냐 하면 화살표가 바깥으로 튀어나는 것이 아니고 안으로 수렴하는 것, 이게 음의 발산이 되지요.
예를 들면 욕조에서 물 빠질 때 나중에 마지막 물이 빠지면서 물이 욕조에서 다 빠지잖아요. 그러면 욕조의 물이 빠졌다는 말은 처음에 시작점과 마지막 점, 최후점이 p에서 시작해서 p로 되돌아가는 거예요. 모든 에너지가, 구심점이. 왜냐하면 여호와가 왕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기 뜻의 표현이거든요.
그러면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의 구심점이 어딥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의 구심점은 누구냐 하면 본인이에요. 본인을 살리기 위해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에너지를 회수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 메시아, 선지자 인용하면서 결국 구심점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자신이 구심점이 된 거예요. 요새 같으면 교회가 교회 자신이 구심점 노릇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역대상은 그게 엉터리 구심점이라는 거예요. p점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구심점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구심점으로 이스라엘로 인간으로 막혀버렸지요. 율법이 우선이 아니고 율법으로 내가 살겠다는 내가 구심점으로 하니까 율법은 그냥 나한테 이용물 밖에 안 되는 겁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율법을 말씀을 이용한 것밖에 안 돼요. 그래서 이스라엘 망한 겁니다. 적어볼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신다.” 이 말과 “이스라엘은 하나님 덕분에 산다.” 이게 같은 말입니까? 같은 말일까요, 아닐까요? 이게 같은 말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위한 건 맞아요.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구심점 됨을 나타나 연결돼있는 이스라엘일 때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그걸 알아듣느냐 하면 인간들이 이스라엘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하나님 덕분에 산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주객이 바뀐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 소중한 겁니까, 내가 소중한 겁니까, 라고 물을 때 참 얼른 답변 못해요.
에스더 4장 16절인가에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가 유대인이 하만에게 당했던 그 환경이 급변하게 되는 변곡점이라 하는데, 갑자기 사태가 변하게 되는 일종에 구심점의 위치에서 죽음이 등장한다고요. 그러니까 에스더에게서는 뭐냐 하면 내가 구심점이 아니고 내가 사는 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내가 죽는 게 하나님의 일인 것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동안 하나님의 일을 잘못 생각한 이유가, 우선적으로 내가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 앞에 아양을 떨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느냐 생각을 그렇게 가져간 거예요. 자신을 위해서 말씀이고 모든 신학이고 전부 다 그렇게 가져간 거예요. 나 구원받기 위해서 그렇게 가져간 거예요. 그게 이단이거든요. 온갖 신학 같은 것 다 동원하고 십자가, 언약 다 동원하고 구속사 다 동원해도 아무 소용없어요. 크게 쓰겠습니다.
구심점은 뜯겨져나간 뒷자리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일은 이 지상에 있는 인간들을 뜯어냅니다. 뜯어내는 그 자리가 구심점이에요.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이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마치 분수처럼 분출되는 거예요. 그걸 물리학이나 거기서 divergence발산하는 것, 뛰쳐나오는 겁니다.
그게 뛰쳐나오는데 인간들은 자기가 소중하기 때문에 큼직한 엉덩이로 그 구멍을 꽉 막고 있었던 거예요. 막고서 뭐하냐? 기도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이여 살려달라는. 자기가 그 구멍을 막고 있으면서. 모든 의도가 나보다 더 소중한 건 없다는 거예요. 성경을 천 독, 만 독 해도 소용없어요. 모든 의도가.
그래서 역대상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여기에 나오는 족보들은 하나하나가 주님께서 도마에다가 고기 토막 내잖아요. 토막 내서 다 끊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아담과 셋과 에노스, 게난 어떤 연결점은 그들이 살아 있는 한 연결점은 없어요. 쉽게 말해서 살아 있는 내가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뭘 하고 예배드리고 성경공부 이 모든 것은 의미 없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런데 살아 있는 것을 주께서 뜯어내면 어떻게 돼요? 주께서 살아 있으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뭘 했다가 되잖아요. 그런데 그걸 다 더럽다고 뜯어내면 어떻게 됩니까? 바닥에 판때기 나오지요. 그 뒷자리 나오지요. 그 판때기, 오늘 강의제목으로 할까. 판때기는 뭐냐 하면 영속성 또는 연속성,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거는 판때기가 같은 판때기에요.
이 판때기를 뭐라고 보느냐 하면 율법이 되는 거예요. 모내기 할 때 벼 모종을 물댄 논에다 꼽잖아요. 벼 모종 자체는 물기 없어도 물댄 논에다 심잖아요. 마치 머리카락 이식하듯이 머리 표면은 있잖아요. 표면에다가 뒤에 머리카락 앞머리에 심지요. 하나님이 모내기하신 거예요, 이렇게. 구심점에다 모내기하신 거예요.
그러니 인간이 살아 있으면 인간이 살아 있기 때문에 나오는 그 의식은 뭐냐 하면 나의 존재로 이게 종결돼요. 종점이에요. 버스종점처럼 모든 의미는 나에게 종결된다고. 인간이 살아 있으면. 아까 강의 다시 해봅시다.
인간은 땅이 있다 했지요. 인간은 땅의 주인이 아니지요. 그러면 땅이 판때기고 모판이라면 이스라엘은 진정한 땅의 주인으로 오시는 분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땅의 주인으로 왔을 때 땅과 땅의 주인이 만나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땅에 사는 인간들은 임시적이죠. 점유적이 아니고 임시적이에요. 그냥 짧은 한 순간 천년이고 오백이고 구백이고 간에 짧은 한 순간 빨리 니 역할하고 죽어라 이 말이죠. 사라지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심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제발 좀 이 땅에 잠간 살다가 치워라 이 말이에요. 사라지라 이 말이죠. 너 때문에 하나님의 모판이 안 보이잖아요. 보이질 않는다고요. 지한테 미쳐서. 자기 인생에 미쳐서 다 가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 말씀에 관심 없어요. 말씀이 돈 되느냐, 이러고 있는데요.
그 돈은 누굴 위한 돈입니까? 지금 살아 있는 나를 더 살게 만들기 위한 돈이잖아요. 자기를 죽이는 돈입니까? 돈 벌어서 술 먹고 한강에 빠져죽으려고 돈 번 겁니까? 그런 것 아니지요. 나를 죽이는데 필요한 게 돈이에요, 나를 살리는데 필요하다는 게 돈입니까? 둘 중에 어느 겁니까? 나를 살리기 위해서 돈을 모으잖아요. 빨리 모아서 죽으란다. 돈 모으지 말고 번개탄이나 모으지요. 안 그러면 농약이나 모으면 되지요. 내 취미가 농약수집이야. 왜? 오늘 반찬은 각가지 농약뷔페다. 이렇게 사는 사람 없잖아요.
그러니까 행동 하나하나, 생각 하나하나가 모든 의미가 자기로 종결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게 바로 인간이 망해야 될 하나님 없는 전형적인 인간 모습이 이 모습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 없다는 식으로 등장하는데, 그건 인간이 범죄 했기 때문에 그렇지요. 없다는 식으로 등장하는데 자꾸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왜 찾는 데요? 하나님 좋으라고 찾는 게 아니에요. 자기 좋으라고 하나님을 찾는 거예요.
하나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내가 살아 있는 의식 때문에 애당초 하나님은 없는 거예요. 내가 살아 있고 하나님 있고, 하나님 나라에 그런 건 없어요. 내가 없든지 하나님 없든지 둘 중에 하나에요.
그래서 역대기에 주제는, 왕이 제사직의 기강을 잡는 내용이에요. 이게 역대기의 주제입니다. 율법이 인격화된 왕이 뭘 잡는다? 제사장들을 잡는 거예요. 이거는 처음에 출애굽 할 때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에요. 출애굽 할 때는 이런 게 없었어요. 왕이 따로 없어요. 모세는 레위지파지요. 모세, 아론. 레위지파가 모든 지파를 대속했습니다. 대표지파에요.
기강을 잡는다는 말은 뭐냐? 본연의 네 일을 하란 말이죠. 레위지파의 본연의 일이 뭐냐? 레위지파의 본연의 일은 늘 죽음에 참여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제사거든요. 제사 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아, 죽음이 우리를 살린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무엇의 죽음이 우릴 살립니까, 어떤 독특한 죽음이, 어떤 특별한 죽음이 우리를 살립니까?
하나님의 죽음이 우리를 살린다. 이게 제사 직입니다. 너희들은 살고 싶어서 하나님 찾잖아.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를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진해서 죽는다. 그 하나님의 죽음이 우리를 살린다. 이게 율법이 발산되는 구심점, 포인트 p점이에요.
그러면 그동안 역대상, 다윗 오기 전에 이스라엘은 어떤 점에서 문제가 많았던가? 그들은 하나님의 죽음 대신에 어린양의 죽음으로 바꿔서 생각한 거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이여, 하나님 시키는 대로 어린양을 율법대로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양 드리고 절기 때마다 소 드리고 염소 드리겠습니다. 됐지요? 이러면 하나님, 우리를 계속 살려주시겠지요? 약속대로. 꼭꼭 약속하셨잖아요. 우리끼리 약속했잖아요. 율법대로 제사 드리면 우리를 살려주겠지요, 라고 이스라엘이 생각한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거예요.
율법을 대할 때 자기 딴에 순수하게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하지만 사실은 인간에게 순수함은 처음부터 범죄 한 인간으로선 순수함이 없어요. 어떤 율법을 대하든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든지 간에 항상 전제하는 건 뭐냐 하면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안 되겠다. 이래서 교회가 이단 아니에요? 교회 다녀도 이단이고 안 다녀도 이단이에요. 인간은 태어난 자체가 이단으로 태어난 거예요.
이단이 욕이 아닙니다. 자기의 본모습을 이야기한 거예요. 이단 아닌 게 이상하지요. 이단 아닌 게 좀 수상해. 이단스러운 것이 정상이에요. 왜? 태어날 때 죄 중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미 다윗을 통해서 그걸 알려주시는 거예요. 역대상은 다윗 중심이니까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역대상 주제가 뭐라고요. 다윗 왕이 무엇의 기강을 잡는다? 제사직의 기강을 잡는다. 레위인 위에 왕이 있는 겁니다. 레위지파 위에 유다지파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역대상 지나고 바로 유다족보가 나오는 거예요. 2장부터. 모든 짜임새가 그렇게 돼있어요.
지금 다급한 목적이 따로 있어요. 제주도 관광이 목적이 아닙니다. 쓰레기 같은 것들은 후딱 지나가. 그런 건 볼 것도 없어. 계속해서 진짜 목적을 향하여 신속하게 달려갑니다. 왜 유다지파에 나오는 왕이 없어야 되는데 왜 이스라엘에 인격체 왕이 다윗이란 이름으로 등장해야 되는가? 도대체 다윗이 말하는 하나님과 다윗 오기 전에 다윗이 왕이 되기 전에 알았던 하나님과 인간들 세계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걸 너희들이 알아라, 그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땅에 살면서 땅은 이미 자기가 살 권한 있다고 생각하고 하늘을 쳐다본 거예요. 하늘을 쳐다보면 안 돼요. 땅을 봐야 돼요. 과연 그 땅이 곱게 내 소유가 되는 것으로 허락이 되는지 하나님이 허락하실지, 감사하게도 이스라엘은 망함으로써 이스라엘은 복을 받습니다. 안 망했으면 큰 일 날 뻔했어요. 이스라엘이 망함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점에 이건 이스라엘의 특권이에요. 다른 민족은 이런 게 없습니다.
망한다는 말은 이제는 그동안 내 것이라고 여겼던 것은 다 소실하고 다 날아가 버렸다. 일종에 살아 있으면서 느끼는 죽음의 공포지요. 살아 있으면서 경험하는 나의 죽음을 일찍 감치 경험했다는,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어요? 사실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러한 하나님이 인간을 죽이는 그 체험은 레위지파와 제사장들이 아침저녁으로 매일같이 이스라엘 한 중앙 구심점에서 해야 했던 거예요.
제사 자체가 그만큼 무시무시한 겁니다. 죽음과 맞닥뜨리는 그 체험은 제사장들의 독특한 특권이에요. 매일같이 죽음과 만나는 것이 보통 축복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다른 지파들은 십일조 갖다 바쳤으니까 복 주시겠지, 희희낙락이고 사람 사는 살았으니까 즐거움을 누리자, 이런 식으로 계속 뻗치고 나간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나중에 안 한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의 욕망이 일단 돈 들어오면 더 챙기고 싶지, 이 정도면 됐습니다, 하고 자기 욕망을 정지시키는 브레이크가 인간에겐 없습니다. 내가 이 정도 가질 만해서 가졌다고 생각하지, 나는 거지돼야 마땅해, 건강한 것도 나한테 오버야, 나는 지금도 욥처럼 빌빌거리고 죽어야 돼, 이런 마음으로 이런 걸 그리워하면서 매일 살아가는 사람 있습니까? 없지요.
그러나 레위지파는 제사장들은 바로 그런 마음을 유지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안 해버리니까 그들은 땅이 없거든요. 의도적으로 땅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땅을 주질 않았습니다. 경작할 땅도 없지, 자기가 힘써 노동력을 발휘할 그런 땅이 없지요.
땅이 없다는 말은, 죽어있다는 뜻입니다. 그것도 앞에 이걸 붙여요. 땅이 없다는 말은 늘 죽어있는 거예요.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 땅이 내려왔지요. 이제 땅이 없이는 인간은 못 살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강의 초반에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땅에다 일을 벌입니다. 땅에 일을 벌이는 것을 이렇게 합시다. 사건입니다.
족보란 뭐냐? 족보란 사건의 연결 또는 사건의 배열, 사건의 이어짐. 그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건은 굳이 그 일이 일어날 이유를 그 사건 이전에는 찾을 길이 없는 게 사건이에요. 노아, 노아 이전에 노아라는 인간에게 인간들이 요청했던가요? 참 노아 같은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들이 기대했던가요? 예측했던가요? 인간사회는 예측의 사회거든요. 과학사회가 예측입니다. 방정식 세워서.
그런데 노아가 등장할 때 노아가 무슨 일을 할지 그때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까? 몰랐지요. 예수님 이 땅에 오실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뭘 할 것인지 제자들이 알았습니까, 그 당시 사람들이 알았습니까? 몰랐지요. 그게 사건인 거예요. 오늘날 그 사건에 해당되는 사람이 뭐냐 하면 이 사람들이 바로 성도에요, 성도. 성도는 본인 인생을 장악할 수 없습니다. 본인 인생에 대해서 자기가 감 잡을 수 없어요.
어제까지 이렇게 살았다고 해서 내일 어떻게 된다는 걸 예측하는 것은 성도답지 못해요. 성도는 어제까지 이렇게 살았지만 어제까지 산 모든 것도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신 사건이지 내가 그렇게 요청한 게 아니란 말이죠. 어제까지 살고 오늘은 그냥 사라져도 우리는 왜 죽이십니까, 할 수 있는 권한 없어요. 살아온 것도 사건인데 거기다가 왜 토를 달아요. 살아온 것도 끝났는데. 정리 한 번 들어갑시다.
자, 사건이다. 반대말이 존재거든요. 존재는 계속 연속성이에요. 나는 계속 살아 있어야 돼, 라고 고집부리는 게 존재입니다. “나는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돼.” 이게 존재에요. 사건은 성도고 존재는 불신자에요. 불신자의 사고방식이거든요. 하나님이고 예수님이고 나를 살려줄 때 좋은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걸 해줄 때 좋은 예수라는 겁니다. “나를 밟아도 괜찮아요.” 이런 것은 존재에 사는 사람들에겐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사건에 해당되는 것은 성도라 했습니다. 존재에 해당되는 것은 지옥 갈 불신자입니다. 차이점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건에서는 그냥 사건이 아니고 존재에서는 그냥 존재가 나오지요. 참 쉽지요. 존재에서는 어제 내가 이렇게 했기 때문에 오늘 내가 이렇게 살았다. 존재에선 존재가 연속적으로 이어지지만 사건은, 이건 본인이 놀래요.
“주여, 오늘 내가 왜 살아 있습니까? 오늘 죽어도 괜찮은데 왜 살아 있지요?” 자기의 현재 살아 있는 걸 의아해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겐 뭐가 나옵니까? 사건이 나오지요. 십자가 사건,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일이 나오고, 불신자한테는 인간의 일이 나오는 거예요. “하나님, 집은 내 집입니다. 이 땅은 내 땅입니다. 이것 버리고 나는 때려죽어도 지금 못 죽습니다. 이 돈 다 쓰고 죽어야 되겠습니다.”
사건이 나온다는 것은, 내가 있던 율법 판 자체가 인간이란 이름으로 율법 판 위에 올라설 수 없어요. 왜 ? 율법이 내뿜는 그 저주성과 그 무시무시한 심판성에서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에요. 이 율법 판에 말씀 판에. 오른손이 범죄 하거든 어떻게 하라고요? 찍어버려라. 어느 게 오른팔이고. 오른팔이 남아있는 게 착한 일 많이 해서 남아있는 게 아니에요. 덜렁덜렁 이미 죽은 팔이에요.
오른 눈이 범죄 하거든 빼버려라. 다들 보니까 애꾸는 아니잖아요. 여러분들 눈 박혀있는 게 여러분들이 이상스러워야 돼요. 주여 말씀에 비교해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졌네요. 내가 눈이 빼야 되는데, 눈이 빠져야 되거든요. 마음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한 것 맞지요. 마음속으로 간음했다는 건 뭘 봤다는 것 아닙니까.
집사님 좋아하는 손예진이라든지 하여튼 뭔가 예쁜 여자 봤고 간음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나쁜 짓한 게 아니고 원래 죽어야 될 인간이 죽을 짓을 육신을 통해서 지금 현재성으로 발산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매일 죽어야 마땅하지요, 매일. 매일 죽어야 마땅한데 멀쩡하게 있으니까 육신은 내 소유가 아니지요. 주님 소유가 되는 겁니다.
내 소유가 아니라면 내 것 없지요. 내 것 없다면 나의 존재성에 대해서 내가 집착하거나 거기에 아등바등 더 살려고 애를 쓸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이게 바로 다윗을 통해서 지난 이스라엘 역사를 다시 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선지자에요. 다시 보면서 장차오실 예수님이 생각해놓은 진짜 이스라엘을 다윗을 통해서 미리 이스라엘 역사와 족보를 다시 그걸 회상하면서 그게 무엇이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 스스로 죽게 만든 환경이 어떻게 해서 조성되는가,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참 되도 않은 인간이 아직도 성도란 이름으로 살아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주님이 죽어야 될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살아 있는 겁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나는 죽어야 될 마땅함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분출하고 발산하는 사건의 구심점 역할을 성도를 통해서 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릴 안 죽이고 아직 이 시간까지는 첫째 시간까지는 살려둔 겁니다. 10분 쉬고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