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10513B슥6장12절(뭐지?)-이 근호 목사
안양20210513B슥6장12절(뭐지?)-이 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 끝에 제가 그런 말씀드렸지요. “이제부터 친히 내가 너를 만들어줄게. 친히. 니가 너를 만들 생각하지 마라. 내가 친히 너를 만들어줄게. 어디에 부합되도록? 천국사람 되도록 내가 만들어줄게.” 라고 나서는 겁니다. 그 만들어주는 그 방식은 오늘 스가랴6장10절 초반에 나옵니다. 사로잡힌 자 가운데서 바벨론,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니까 어제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했습니다만. 한 번 적어볼게요. “하나님이 만드신 또는 구상하신 생각해 놓은 현실은 이스라엘”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이스라엘 역사를 하나의 거울로 봅시다. 거울. 거울이라 본다면 요 안에 이스라엘 역사가 나오잖아요. 이스라엘 역사가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어떤 역사였습니까? 나오고 싶지도 않았는데 강제로 누가 끄집어냈습니까? 하나님께서 끄집어내어가지고 가나안땅,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 심어놓고 그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을 강제로 추방시켰지요. 이게 왠일이에요?
집어넣으신 분이 하나님이고, 그 다음엔 강제로 쫓겨난 것도 하나님이고, 그러면 아! 내가 하나님과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착각해서 들어왔는데 막상 살아보니까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살수 없는 사람이란 걸로 드디어 탄로가 난 겁니다. ‘아! 이게 안 되는구나!’ 하나님께서 같이 해줘도 나는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한 번 적어볼게요. 참, 이런 이야기는 정말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도 나는 구원된다? 안 된다? 구원이 안 되는 존재에요. 천하에 하나님이 오셔도 구원이 안 될 정도로 우리는 망가졌어요. 망가졌다는 겁니다. 망가진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얼마나 그것을 자랑을 하고 자긍심을 느꼈습니까. 지금도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다고 해가지고 미사일을 막 쏘아대잖아요. 어제 뉴스에. 하마스기지에다가. 가자지역에. 한 번 가봐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이스라엘을 한 번 가봐야 돼요. 가자지역이 어디인지. 스완지역이 어디인지. 다윗과 솔로몬이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 가보면 좋은데 지금 코로나 때문에 지금 못 가고 있는데.
하나님이 함께 있어도 구원이 안돼요. 그 정도로 우리는 구원이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있는 이유가 뭡니까? 우리의 자신의 나라는 것을 제대로 아는 방법은 하나님이 함께 있어야 나를 알아요. 나는 천국을 갈 수가 없고 지옥을 가는 게 마땅한 존재인 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비로소 우리가 아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이거 해야 되지요. 전적인 구원을 포기하는 겁니다. 이거 뭐 교회 다녀도 안 되고, 장로, 목사 되어도 구원이 안 되고, 집사도 물론 안 되고. 목사도 안 되는데 집사가 될 리가 있습니까. 백날 교회에서 구라를 쳐도 구원이 안 됩니다. 왜? 내게 그만한 문제가 있어서 그래요. 내게 그만한 문제가 있습니다.
천국에 그 깨끗하고 거룩한 나라에 부합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우리의 심성은 지저분하고 더러워요.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생각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그건 핑계에 불과하고 하나님을 이용해 먹을 생각이 먼저 앞서기 때문에 안돼요. 이게. 하나님 앞에 모든 걸 헌신해 놓고는 그 헌신한 대가와 보상과 내 망가진 인생을 만회해 달라고 압력을 가하는 사채업자 같은 존재가 우리거든요. 받아먹었으면 우리에게도 뭐 주는 게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줄 거주고 받을 거 받읍시다. 하는 조폭처럼 그런 사고방식으로 마인드로 돌아가는 게 우리이기 때문에 이게 안돼요.
사실은 노동의 대가없이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전부 다. 예수 믿는 것도 노동인데, 노동의 대가없는데 내가 삐지기 마련이지요. 삐지면 그게 더럽고 지저분한 우리의 본성이 이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하면 돼요? 포기하면 되는 거예요. 이 포기된 사람이 바로 구원된 사람이에요. 이 포기된 사람이 구원돼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거예요.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나 안 돼! 나 안되는 게 맞아.” 뭔가 구원 되겠다 하는 것도 예상이잖아요. 기대잖아요. 일종의 자기의 요령, 수완 그런 거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추방을 시켰어요. 그러면 이 과정을 통해서 숨겨진 것이 나타나요. 들어가고 빠져나온 과정에 숨겨진 것. 그 숨겨진 것이 뭐냐 하면 내가 구원받을 적절한 존재가 아님이 여기서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내가 구원받지 않는 이유가 나중에 신약에 나오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주님은 누구만 구원하느냐 하면 예수님만 구원해요. 이 사실.
예수님과 우리를 비교해 보세요. 이게 게임이 됩니까? 안되지요. 자, 예수님과 우리의 차이점은 하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연세계를 움직입니다. 우리 기도는 헛방이에요. 벌써 안 되잖아요.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할 수 있습니까? 물위를 걸을 수 있어요? 병든 자를 낫게 할 수 있습니까?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습니까? 안되잖아요. 안되니까 협박인 거예요. 이게 원래 되어야 되는데 안 되잖아요. 이건.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안 들어줍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기도를 안 들어준다는 게 기쁘게 들립니까? 섭섭하게 들립니까? 이게 기쁘게 들려야 돼요. 내가 뭘 요청해도 하나님은 안 들어준다는 것을 굉장히 감사히 여겨야 됩니다. 왜? 기도를 안 듣는다는 말은 시편에 보면 죄 지은 자의 기도는 안 듣는다고 했거든요. 기도를 안 듣는 걸로 봐서 나는 이미 내 죄를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없는 그러한 존재인 것을 안다는 것. 이게 얼마나 기쁨니까. 자기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지를 아는 게 그렇게 감사하지요. 그러니까 살아있는 것도 밥 먹는 것도 감사히 여리라 말이지요. 기적이에요. 살 수도 없어요. 지금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살려내는 것은 여분의 것이고 낯설고 생소하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 사실을 알고 자기 자신을 알고 난 뒤에 그 다음 내가 왜 살아있지? 안 살아도 되는데. 숨을 왜 쉬지? 지금쯤 코로나 한 바퀴 들어와 가지고 가슴이 심장이 숨도 못 쉬어야 되는데 내가 왜 아직까지 멀쩡하지? 왜 이러지 내가? 주여 너무 과분한 거 아니에요. 지금.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겸손하게 자장면 하나 시켰는데 그것도 사천원짜리 헌데 가서 동네 중국집 가서 사천원짜리 하나 시켰는데 뭐 팔보채에다가 유슬기 새우튀긴 것 해가지고 탕수육, 그것도 해물짬뽕해가지고 직원들이 제복입고 줄줄이 양손에 들고 와가지고 하는데 제발 그 앞에서 이거 다 얼마에요? 이런 객기부리지 마세요. 그냥 받으세요. 과분합니다. 하고 그냥 받으세요. 내가 돈 낼게. 지갑 꺼내지 마시고요. 되지도 않는 폼 내지 말고. 살려주시거든 그냥 감사히 사세요. 사는데 보답을 하겠습니다. 보답하지 마! 보답하지 마! 보답하지 마세요. 주제 넘는 자기 또 의로움입니다. 행세께나 하는 짓이에요. 그거 더러워서 안 받아요. 주께서는.
그냥 넙죽 염치 불구하고 하루, 하루 삶을 고맙다 여기면서 감사히 사시기 바랍니다.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아요. 착한 짓을 해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떤 짓을 해도 살려주시는 것이고. 착한 짓을 한다고 더 살려주는 게 아니에요. 사람이 갑자기 죽을 수 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어떤 짓을 해도 내 살고 죽는 거하고는 무관한 겁니다. 무관한 이야기에요.
지금껏 우리는 살아온 것이 내가 한 행동과 관계없었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관계있다고 오해를 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 현실을 유일한 거울이라 했지요. 우리는 가짜 거울을 들고 이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교육시키는 대로 학교에서 교육받는 대로 그게 현실인줄 알았어요. 그러나 진짜 현실은 진짜 하나님과 만났던 이스라엘만이 진짜 현실이에요. 그 현실에 비춰보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보여주기 위해서 집어넣었다가 빼더라 이 말입니다.
“여기 니 방이야. 여기가 니 집이야.” “아이고,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그 다음 날, “방 빼!”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돼요? 방 빼라는 게. 왜요? 니는 살 자격이 없어. 그러면 처음부터 왜 넣었습니까? 니가 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애굽에 나올 때 그들은 애굽에 포로 됐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약속의 땅에 나오고 난 뒤에 인간은 누구한테 포로 되었는가. ‘나는 나에게 포로 된 존재이다.’
나는 나에게 포로 되었어요. 내 가오와 내 자존심과 내 위신과 내 체면과 내 이름과 내 명예와 내 지식과 나의 과거의 이력과 내 기억의 포로가 된 거예요. 내 기억에. 과거 체험과. 주님께서 오늘 아침에 살려줬으면 지난 과거는요, 여러분, 다 잊어버리세요. 지난 과거는.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스가랴6장12절,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순. 본문에는 싹이라 되어있는데 순은 뭐냐 하면 새로 싹트는 걸 순이라 하지요. 새로 올라오는 거예요. 새로 올라온다. 날마다 새순이 되는 거예요. 날마다. 새순.)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그래서 어느 교회에 가면 교회 이름이 새순교회 있어요. 날마다 새순이 돋아요. 새순이 돋아오는 거예요. 파릇 파릇. 날마다 봄이에요. 새순 돋아오는 거예요.
주께서는 봄이라 하는데 우리는 우중충한 겨울이라. 우리의 자아가 나를 뭉개버리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세상에서 요구하는 자아가 무거운 존재의 무게가 주께서 주신 진짜 현실. 새순같이 파릇, 파릇해야 될 나를 기존의 나의 어두운 과거가 나를 확 밟고 누루고 힘들게 한 거예요. 세상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마음고생, 육체고생 얼마나 고생을 많이 하며 살았습니까. 이제는 거기서 졸업할 때 됐잖아요. 이제는 그 헛된 망상에서 벗어날 때 됐잖아요.
뭐 안하면 벌 받고, 뭐 안하면 저주받는다 했는데 군대생활은 백날 편하게 살아도요, 군대생활 자체가 저주에요. 맞지요? 예! 군대생활 자체가 저주라. 자체가. 휴가 나올 필요 없어요. 빨리 집에만 보내 달라. 영원히 제대만 해줘. 집에 안가도 좋으니까. 고참들은 술만 먹으면 패고요. 이건 완전 미친 것도 아니에요. 술 먹었으니까 미쳤지요. 그러면 그 맞는 인간은 니 나가고 보자. 후배들 패자. 그 팰 준비하고 있어요. 이거 뭐 병영자체가 미친 자들의 집합체 같아. 누구 하나 정신 제대로 박힌 사람이 없어요. 내가 당한 만큼 당해라. 이런 보복의 현장이에요. 보복의 현장. 그게 무슨 살만한 곳이에요. 탈출 제대 날만 기다리죠.
시편 137편 한 번 봅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이거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바벨론 강가에서. 1970년대에 미국의 유명한 보컬그룹이 있었어요. 바벨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흑인그룹이지요. 보니 엠의 라는 노래가 있어요. 여기서 후회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약속의 땅에 있다가 이 남의 나라에 일제 압제에 잡힌 거예요. 일제 압제에. 36년 동안 일본의 통치기에 놓여있는 거예요.
그래서 바벨론에 잡혀와 가지고 그때가 좋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럼 무슨 말이냐 하면 그냥 무상으로 주던 걸 선물로 살 때가 좋았다는 거예요. 내 노동으로 사는 게 아니고 내 수고로 내 자족하며 사는 게 아니라 살 가치도 없는 것에게 그냥 무상으로 무엇이냐? 만나를 주시면서 살았던 만나 같은 모든 것이 만나같이 그렇게 느껴졌던 그 시절이 좋았다는 겁니다. 만나는 물론 광야를 마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 만나는 그치지만, 먼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만나를 준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더라도 만나의 취지로 너에게 모든 농산물 생산물이 만나라는 같은 맥락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알라는 말이지요. 모든 것을.
자식이 애먹인다고 불평하지 마시고요, 자식도 주님의 사람 되고 나면 자식도 만나에요. 뭐 요런 게 내 몸에서 나왔나? 요런 게 생겼어? 입에 밥 먹는 것도 그렇게 이쁘고, 귀엽고, 모든 게. 문 잠가놓고 인터넷 게임하는 것도 귀엽고. 부모가 자식을 너무 닦달 내는 것은 자식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거든요. 니 잘못되면 우리 집안에 기대 거는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할까, 이런 압박감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루를 살더라도 편하게 살 수가 없어요. 이게 뭐냐 세상에 포로된 거예요. 포로 돼서 그래요.
자, 그렇다면 시편137편에 나오는 5절에 보면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여기서 예루살렘 나오지요. 자, 여기서 무엇과 무엇이 비교되느냐 하면 현재 살고 있는 것은 바벨론 포로 잡힘. 잡힘이니까 노예지요. 노예. 노예로 시작해서 노예로 끝나버리는 거예요.
바벨론과 여기서 뭐가 대비가 되느냐 하면, 예루살렘. 바벨론은 세상에 포로 잡힘. 잡혀 있음. 갇혀 있음. 그러니까 갇혀 있는 꼴. 예루살렘은 모든 게 선물. 그러니까 예루살렘이라 해서 지금 뭐 성지순례 그거 갈 필요 없어요. 우리가 어느 공간, 어느 시간에 있던지 간에 바벨론 생활하다가 뭐로 전환되면 돼요? 예루살렘 생활하면 되는 거예요. 이게 어딘지 어떤지 서울인지, 대구인지 관계없어요. 선물로 여기면 돼요. 식구 하나, 하나가 저 화초 하나, 하나가.
이걸 어려운 말로 부분대상이라 하거든요. 부분 대상. 부분대상이 뭐냐 하면 나중에 수련회 때 설명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부분대상이라 하는 것은 내 입술, 입, 코, 손가락, 발가락, 전부 다 하나, 하나가 부분대상이에요. 다 고마운 대상, 선물이다 말이죠. 손가락하나 이거 손톱 갈라져 보세요. 아프지요. 멀쩡하게 있든 없든 관계없이 이 자아에 붙어있는 몸통. 헤드, 머리, 사지, 지체, 이 모든 것이 선물로 다가오는 거예요. 선물로. 이거 멀쩡해서 감사합니다. 이거 멀쩡해서 감사합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연세가 많이 가면 갈수록 날이 가면 갈수록 그 선물의 강도가 더 좋아야 돼요. 이거 다쳤다 생각하지 말고 이거 안 다친 거 있잖아요. 발가락은 안 다쳤잖아요. 온 몸은 망가졌어도 머리는 아직 말짱하잖아요. 코는 멀쩡하잖아요. 냄새 맡을 수 있지요. 들을 수 있잖아요. 눈 보이고, 갈수록 점점 더 기계가 고장이 납니다.
부분대상이라 하는 것은 자신을 하나의 기계로 보는 거예요. 기계라 하는 것은 나쁜 의미가 아니고 기능적 존재로 보는 거예요. 기능적 존재. 기능적. 하나님이 일한 자기 솜씨를 보는 거예요. 작품, 작품으로 보는 거예요. 예술가가 그림 그리는 것도 예술이지만, 요새는 설치예술해가지고 꼭 기계 만드는 것처럼 작동하는 로봇처럼, 작동하는 기계도 예술작품이 되거든요. 주님께서 친히 나를 제작한 예술작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필요에 의해서 손가락이 부러지면 알아서 부러지게 하신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멀쩡하게 보존하는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멀쩡하게 해줬기 때문에 멀쩡하지 사람이 잠시 약간 현기증이 나서 비틀거리고 뭐 하나 집다보면 팔 나갑니다. 어지러워서 하다 보면. 저도 며칠 전에 가끔 자꾸 어지러워요. 어지러워서 화장실에 갔다가 변기에 물을 내린다고 하다가 어지러워서 일어서다가 변기를 잡는데 변기에 뚜껑이 있거든요. 뚜껑. 놓쳐가지고 뚜껑이 둘로 조각이 났어요. 예상 못했습니다. 불가능성이에요. 내가 의도하지 않았어요. 얼마나 감사해요. 그러니까 깨져야 깨지기 전에 멀쩡한 게 내 뜻이 아니라는 것을 깨져봐야 아는 거예요.
‘야~ 이게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구나! 그런데 나는 억지를 부려서 왜 내 몸이 내 몸이라고 누가 나를 속여서 나를 이렇게 살아왔는고.’ 앞으로 조심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지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불러 모읍니다. 이제는 가나안 땅이 아니고 예루살렘으로 와요. 예루살렘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주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가가 있어요. 하나님의 본가. 하나님의 본가를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12절 끝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보라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그 다음에 뭘 건축하리라? 여호와의 전. 야~ 여기서 여러분들이 유념해야 됩니다. 나의 전 아닙니다. 나 살기 좋아라고 만든 인테리어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나님답게 살기 좋은 곳이 천국이에요. 내 살기 좋아라고 내 욕망과 내 의도와 내 기대로 인테리어로 스며드는 게 아닙니다.
“나 이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가 전혀 반영되지 않는 곳이 천국이에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천국가신다면 여러분들이 이 땅에 살면서 여러분을 괴롭히고 정말 지긋지긋하게 여러분들을 미워한 사람이 거기서 천국에서 만난다면 여러분들은 거기서 다시 지옥 갈 겁니까? 어떻게 할 거예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좋은 곳을?” 어? 보니까. 어디서 본 기억이 있어요. 웬수에요. 내 돈 2억5천만원 떼어먹고 돈 안 갚은 인간 등장했습니다. 그것보다 더 심한 거 있지요. 바람피워서 다른 여자하고 살림한 남편을 만났을 때 진작에 이혼하고 갔는데 천국에서 만났네. 저거 목 잘라버릴까. 천국에서 갑자기 살인사건이 일어나요.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이게 천국의 인테리어가 우리 마음에 맞도록 인테리어 된 게 아니고 주님이 맞추도록 그렇게 한 거예요. 그래서 주인공 이름이 뭐냐 하면 순이에요. 순. 그 천국 주인공이.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로 되어있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아들의 나라에요. 아들의 나라. 이리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를 정리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서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 분명해졌어요. 구원은 누가 구원되는가, 어떤 메시아가 오는데 구원자 그분이 구원되는 거예요. 그분이 아버지에 의해서 구원됐다는 증거가 뭐냐,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이 딱 그 분뿐이에요. 석가모니도 아니고 소크라테스도 아니고. 오직 그 분만이 죽은지 사흘만에 된 것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인정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죽어야 되지만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일어난 유일한 죽음의 힘을 뚫고 일어난 유일한 존재가 그 분입니다. 이걸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부활을 ‘존재의 역류’. 주님의 죽었던 생명이 물이 역류, 물이 맨홀 뚜껑이 팍! 올라오잖아요. 죽었다가 다시 산 그 힘이 맨홀 뚜껑을 재켜 버리고 뛰쳐 올라와서 튀겼지요. 물이 튀면 사방으로 흩어지겠지요. 그 부활의 능력이 물방울이 튄 사람이 바로 예상 밖으로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의 사적인 예수님의 개인의 일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의 효과가 혜택이 엉뚱한 저와 여러분에게 혜택이 튀어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다가 날벼락 맞는다고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죽어도 사는 거예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이 생명의 방정식이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돌아올 혜택이 주어질 여분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일단 죽었다가 그 다음에 살아나시게 되면 구약에 있었던 이스라엘과 함께 있다는 모든 말씀이 예언이 됩니다. 예언. 예언은 누군가 약속과 예언은 누군가 필히 이루어져야 된다는 거예요. 그 이루어질 당사자가 안 나타나서 문제였는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분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죽어도 살수 있다는 이 능력으로 이 말씀을 적용시키는 대상자들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 바로 오늘날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진짜배기 교회들이에요. 진짜 교회들이에요. 그냥 선물을 선물로 이해하는 사람. 뭘 지키는 게 아니고 그걸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법은 날아가 버리고 그냥 뭐든지 예뻐 보이고 사랑스러운 대상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의 자식이 갓난애일 때 갓난애보고 한 살 먹은 애보고 니 밥 먹을 때 단백질 영양분 고려해서 가려먹지 말고 다 먹어. 7개월 된 애보고 그렇게 명령할 수 있습니까. 아직 걷지도 못하는데, “똑바로 걸어! 똑바로! 왜 오줌을 싸!”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성경에는 뭐냐 하면 어린아이같이 되지 않으면 그러니까 맨날 챙겨주지 아니하면 못사는 존재가 되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를 갈 수가 없어요. 이겁니다. 이거에요. 교회에 속지 마세요. 그들은 업소에요. 업소. 인간의 불안한 미래를 담보로 해서 돈을 빼먹는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교회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어떤 사람은 화를 내겠지만, 화내는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왜냐하면 돈 끊어보세요. 화 더 내지. 돈 끊으면 화 더 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살 수 있습니까? 못 삽니다. 모든 게 돈으로 환원돼요. 얼마나 착하나, 의롭냐, 전부 다 돈과 관련되어있어요. 돈 있는 사람이 착한 사람이에요. 돈 없는 사람은 아무리 착해도 나쁜 사람이에요. 남에게 부담을 줘요. 돈 없으면 부담을 줍니다.
잠언서에 나오지요. 가난할 때는 친구도 다 떠나버린다고요. 이 말은 친구가 친구가 아니고 뭐가 친구였다? 돈이 친구였다는 뜻이에요. 이게 사회입니다. 그 남 욕하지만, 우리는 바로 그거와 한 통속이에요. 전부 다 균등해요. 고만 고만해요. 전부 다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서 이게 왜 구원이 안 되는지를 우리는 이제는 알아요. 난 알아요. 내가 왜 구원이 안 되는지를. 내가 왜 시름 시름 앓는지. 알아요. 난.
하나님과 함께 있어보니까, 아, 구원이 욕심이라는 거. 천당 간다는 자체가 이게 어마어마한 욕심이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게 바로 자기부인이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존재의 역류. 부활의 영. 성령이 부활의 영입니다. 부활하신 분의 능력이 임하게 되면 내가 누군지를 알아요. 내가 누군지를 압니다.
그래서 이 사실이 너무 좋아가지고 여기에 사로잡힌 자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갔지요. 가가지고 뭘 만들었습니까? 은과 금을 받아가지고 뭘 만들었어요? 면류관을 만들어가지고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워버린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여호수아 예수잖아요. 예수. 같은 이름이거든요. 장차 대제사장으로 오실 분에게 머리에 금을 씌워버리는 거예요. 금. 금이라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금속 중에서 가장 귀한 거거든요. 금 같은 분. 금 같은 분이 우리의 할 일을 대신, 대역을 해주시는 거예요.
왜? 나는 아니니까. 나는 기도, 헌금 백날해도 나는 아니거든요. 내가 행해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걸 내가 너무 잘 알거든요. 여러분 자신이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어떤 희생과 봉사와 선교사 백날해도 이건 아니에요. 안 받습니다. 받을 분은 예수님이 행한 것만 받아요. 그래서 우리는 뭐냐 그 당시에 구약이기 때문에 하나의 모형이기 때문에 그냥 숟가락 하나 걸치는 거예요. 그 분이 등장하고 난 뒤에 이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더 이상 이 존재의 무게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자기가 건사한다든지 자기를 지탱한다든지 하는 그런 부질없는 짓은 하지 않는 거예요.
무엇을, 그 나라 의지요. “오늘은 주님을 위해서 제가 뭘 하면 됩니까?” “오늘 뭘 할까요?” “청소나 해라.” 지지직~~ “오늘 뭘 하면 됩니까?”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이미 주인공이 넘어갔어요. 주님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오늘 놀지 말고 이거 해라. 그거 하면 되는 거죠. 살고 죽는 것은 내 소관이 아니니까. 자,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에서 그 분의 이름이 나오는데 12절에 보면 순이라는 이름이 있다. 순이라는 이름이니까 순은 기능이지요.
구약 때 보면 이름 지을 때 반드시 그 사람의 앞일의 일어날 일을 전제로 해서 이름을 짓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고. 아브라함도 마찬가지고 그렇지요. 이름이 순이다 말이죠. 순이니까 여러분들이 이건 쉬울 거예요. 순이라 하는 것은 어떤 거냐, 없는 데서 새로 생긴 기능. 없는 데서 새로 생기는 기능이지요. 그러면 주님과 함께 있으면 우리 자신은 반복적으로 매일같이 순이 되는 겁니다. 새싹이 되는 겁니다.
이 새싹은 뭘 세운다?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지요. 여호와의 전을 건축, 여호와의 건물. 아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거주지라 했지요. 거주지라 하고 또는 본가. 하나님이 최종적으로 거주하시는 본가가 됩니다. 본가가 되는데.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골치 아프더라도 성경구절 몇 구절을 찾아봐야 돼요. 하나님의 성전이 무엇인가를 아셔야 됩니다. 자,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거에요. 성전 안에 뭐가 있느냐, 여러분들이 어떤 건물 안에 바깥에서 건물을 보게 되면 그 다음에 궁금한 게 저 건물 안에는 누가 살고 건물 안에는 어떤 시설이 되어 있을까. 괜히 은근히 궁금하지요.
제가 아까 첫 번째 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미군 부대 철조망 쳤지요. 제 어릴 때 미군부대는 미군들이 나오게 되면 초콜렛, 껌 같은 것 그냥 줬어요. 리즈크래커 있잖아요. 그냥 줬다고요.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거죠. 그 얻어먹은 맛을. 도대체 저 철조망 안에는 미군부대에는 뭐가 있기에 맛있는 게 나오느냐 말이지요. 그리고 체크무늬 남방 있잖아요. 얼마나 이쁘다고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게 많은 모양이라. 그걸 입고 청바지 입고 그 남아있는 물품들이 막 시중에 PX로 해가지고 불법 납품되어 청바지 유행했잖아요. 그러니까 그 안에 뭐로 되어있는지, 무엇으로 되어있기에 저런 풍성함이 나오는지 굉장히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금해요? 성전 안에 뭐가 있느냐, 도대체 성전 안에 어떤 장치가 있어서 그게 생명이 나오느냐, 죽은 나를 살릴 수 있는 그런 모든 그 장치가 어떤 장치로 되어있기에 진짜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 같은 내가 어떻게 죄도 씻어지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막 영원한 영생을 얻고 오지 말라는 그 생명나무를 함부로 따먹을 수 있는 넉넉하게 따먹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됐나, 어떤 장치가 가동되고 있나, 그게 궁금하겠지요. 그게 3가지 장치입니다.
첫 번째 장치, 두 번째 장치, 세 번째 장치 있어요. 첫 번째 장치는 출애굽기40장20절, 두 번째 장치는 민수기17장4절과 7절, 세 번째 장치는 출애굽기16장 34절, 이리 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출애굽기40장부터 해봅시다. 어떤 장치가 있기에, “또 증거판을 궤 속에 넣고 채를 궤에 꿰고 속죄소를 궤위에 두고” 이리 되어있지요. 속죄소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짐작했겠지요. 속죄소라 하는 것은 죄를 그냥 씻어주는 것이 아니에요. 죄를 그냥 씻는 게 아니고 죄를 값을 받고 씻어주는 곳이 속죄소에요. 값을 받고.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받을 것 다 받고 당신은 이제 나한테 빚 진 거 없습니다. 당신은 나한테 부담 느끼지 마세요. 값은 다 치뤘습니다. 하는 그게 바로 속함이 돼요. 값을 치룸이 되지요. 이자까지 다 쳤으니까. 만약에 값을 안 치루게 되면 졸지에 뭐가 돼요? 채무자가 되지요. 그 채무자를 가지고 죄인이라고 합니다. 죄인. 죄인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요구하는 그 레벨,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할 때 우리는 심적인 부담을 느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율법을 줘가지고 우리에게 심적인 부담을 가중시키는 겁니다. 이거 했나? 저거 했나? 천하 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 이런 식으로 막 쏘아붙이니까 우리는 감당 못하지요.
사람이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음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다. 그러니까 니는 돈을 사랑하지 말고 그냥 있는 걸로 족한 줄 알아라. 이게 얼마나 우리의 심적인 부담이 돼요.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에 사는 사람인데 많은 돈을 여분의 돈을 저축해야 우리가 미래를 대비하는 심적인 안정을 얻는 게 우리의 살아온 우리의 기억이거든요. 기억이 우리의 습관을 낳고 습관이 우리의 본성이 된다 말이지요. 두달치, 세달치 그러한 양식이 없으면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입니다. 비축해 놓은 게 없으면 진짜 자살할 한강 다리 가운데 스물 몇 개 다리가운데 어느 다리가 제일 물이 따뜻한가 뭐 그거 찾아다닐 거예요. 왜? 암담하니까. 참담하니까. 소망이 없고 미래가 없으면 사람은 못 살아요. 뭔가 여유가 있어야 살 수가 있다 말이죠. 여유가 있어야.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냐 하면 니 나한테 부담가질 필요 없어. 누가 값을 다 치뤘다는 거예요. 속죄소 무슨 값을 치뤘느냐, 얼마나 나를 위해서, 그럼 돈을 누구한테 그만큼 돈을 드렸습니까? 아니야. 돈은 안 받았어. 그럼 얼마나 봉사를 했습니까? 봉사 안 받았어. 얼마나 뭘 했습니까? 뭐 하지도 않았어. 그럼 뭘 받았어요? 피를 받은 거예요.
속죄소+피=죄사함. 요 장치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역류해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혜택으로, 선물로 주어진 선물이 무슨 선물이냐 하면, “더 이상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값을 치를 필요가 없데!” 라는 해방의 소식이에요. 이걸 기쁜 소식이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뭐 더해야 될 게 있다? 없다? 전혀 남아있지 않아요. 왜? 벌써 니가 치루기 전에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새치기 해가지고 이미 입장료를 다 치뤘어요. 주님께서 여기 144,000, 숫자로 꼭144,000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144,000 여기 모든 입장료는 다 치뤘어요. 값으로 다 치룬 거예요. 그럼 우리가 주목할 것은 뭐냐, “누구야? 누구야?” 그러니까 우리가 찾을 것은 “누구야? 누구야?”만 찾으면 돼요.
아까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무엇이냐? 했지요. 누구냐? 를 찾을 때 나를 잊어버려요. 꿍하고 내 인생에 몰두하지 말고 누구십니까? 내 대신 모든 값을 치러서 지금 죽더라도 천국에 도착하게 만든 분이 누구십니까? 찾게 만드는 거예요. 누구십니까?
그 누구십니까, 가 누구지요? 여기는 그냥 예수님이 아니고 순. 새싹 순으로 되어있어요. 순. 순이란 이름이 그 성전에 임한다는 거예요. 순. 예수님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신은 있다? 없다? 신은 없어요. 신은 없는데 이 땅에서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연관된 아버지가 진짜 하나님이에요. 그러니 예수님이 안 등장하면 신은 없어요. 예수님이 등장하면 비로소 하나님은 계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제키고 하나님을 찾아가지 마세요. 그런 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어요. 나를 믿는 자만이 아버지가 있어요. 예수님 안 믿으면 하나님 없어요.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 모든 것은 이건 자기 마음평정을 위해서 뭐 하나 상상해서 믿는 신에 불과한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사도행전16장31절에서 간수가 어떻게 할꼬 할 때, 하나님을 믿어라 하지 않지요. 뭘 믿어라 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 간수가 어떤 지경에 있습니까? 옛날에는 간수가 죄수를 놓쳐버리면 지가 죽어야 될 판이에요. 그러니까 자기 인생은 끝장이에요. 끝장이니까 자기 거 끄집어낼 게 있어요? 없어요? 더는 없어요. 뭐 돈을 드리면 돈도 없어요.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어요.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마치 세리와 창기와 같은 수준이에요. 강도와 같은 수준이에요. 아무것도 없으니까 뭐만 크게 다가오느냐 하면 선물이 선물답게 다가오는 거예요. 선물이 선물답게.
시골에 사는 시어머니가 이름도 모르는 영어로 된 이상한 이름 촌에서 온 시어머니가 김장 한통 해가지고 아들집에 김치 준다고 떡 가져왔지요. 며느리는 직장도 없는 사람이 바쁘잖아요. 원래 직장 없는 사람이 바빠요. 과로사 한다는 말이 있는데. 굉장히 바빠요. 어머니 내가 지금은 집에 없고요, 밖에 나가있습니다. 지금 요가 한다고 바빠요. 살 뺀다고 바빠요. 놔두고 가세요. 놔두고 갔다 말이죠. 놔두고 가가지고 이제 자기 시어머니는 다시 촌으로 돌아갔지요. 한 일주일 뒤에 전화해. “야, 야, 너 김치 잘 먹고 있나?” 아들한테 전화하니까 아들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일주일 전에 김치 줬잖아. 언제요? 줬잖아. 어데요? 안 받았어요. 안 받은 거예요. 며느리가 쓰레기통에 갔다 버려서. 갔다 버렸지요. 그 노친네 자기 물건이나 하지 쓸데없이 이렇게 해가지고 나중에 쓰러지면 또 우리보고 짐 지울까. 이런 식으로 해서 버렸지요.
바로 지금도 우리를 하나님께서 김정은이 부터해가지고 먹여 살리십니다. 다 은혜에요. 은혜인데, 은혜를 은혜답게 아는 사람은 누구겠어요? 인간은 지 노력으로 살았다 하지 공짜로 살았다는 생각은 못 갖잖아요. 그런데 어떤 경우입니까? 자기가 인간도 아니고 나는 망가져야 된다는 사람에게 비로소 은혜가 선물이 선물답게 다가오겠지요.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하고 의논도 없이 우리 죄를 위하여 모든 합당한 조치를 다 해놨어요. 갈 수 없는 그 천국, 그 생명나무 있는 곳에 아까 제가 분명히 못 간다고 했지요. 없는 곳에 주님 빽으로 갈수 있는 길을 터놨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나는 진리요, 나는 곧 생명이다. 인간으로서는 무슨 말인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말을 그냥 던지는 거예요. 던지고 난 뒤에 십자가 부활하고 난 뒤에 성령이 오니까 ‘아, 그 말이 그말이었구나!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행함도 아무것도 들고 오지 말고 그냥 와도 되는 곳이구나!’ 왜? 나는 너무나 허접스러운 죄인이기 때문에,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미 구약 때부터 성전 안에 모형으로 그걸 만들어놨어요. 주께서. 친절도 하셔라. 그걸 속죄소라는 상자에다 만들어 놓고 피를 뿌리는 거예요. 그 피가 장차 메시아가 해서 마지막에 마무리 다 이루었다 할 때 나오는 그 피를 앞당겨서 모형으로 시범조로 미리 뿌려준 거예요. 그게 바로 성전 안에 언약궤가 있는 겁니다.
두 번째 민수기17장4절, 이건 뭐냐 하면 바로 아론의 싹 난 지팡이에요. 아론의. 고라 자손이 모세한테 대들었습니다. 우리 똑같이 나올 때 민주주의로 하자. 똑같이 나올 때. 그냥 같은 자격으로 나왔잖아. 라고 대들 때 모세가 하는 말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너희하고 모세하고 차이점이 모세가 하나님과 직통으로 계시 받는 그 노선에 있거든요. 똑같은 게 아니에요. 모세가 더 높다는 뜻이 아니고 모세가 받은 계시를 분화구처럼 마그마처럼 퍼트릴 때 그 오는 출처가 고라도 아니고 아론도 아니고 뭐냐 하면 모세가정의 모세에요.
그러니 모세한테 와서 퍼지는 거예요. 이건 뭘 뜻하느냐 예수도 인간이고 우리도 인간인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다. 안돼요. 모든 출처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와서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피를 안다는 조건하에 복음이 되는 겁니다. 복음 안에는 그리스도가 하잘 것 없는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이 담긴 체 이게 설교가 되어야 되고 이게 강의가 되어야 되고 복음이 전파되어야 돼요.
교회를 키웁시다. 하는 건 복음이 아닙니다. 그건 요령이에요. 그건 다른 회사에서 다 하는 거예요. 교회는 그게 아니고 피만 있으면 한명이라도 좋고 두 명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예수와 피가 전파되는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있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예수그리스도만이 바로 모세의 가족에 지팡이 가운데, 아론의 지팡이에서만 싹이 나거든요. 얼마나 기적입니까. 싹이 나온다고요. 그러니까 죽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싹이 새순이 여기서 싹이 나는 거예요.
그게 우리로서는 불가능하고 낯설지요. 우리가 혼자 살고 개하고 살아도 되는데 주님의 존재를 느끼며 산다는 게 이게 우리가 처리할 수 없는 What? 이게 뭐냐? 이거에요. 이게 뭐냐? 내가 생각도 못한 내가 된 거예요. 전에는 나 혼자 살았는데 이제는 주님을 이해하면서 주님을 알아보면서 사는 게 What? 이게 무슨 왠 기적이냐, 말이죠. 그 여분의 것을 여러분들이 얼마나 귀한지 본문에서는 금으로 만들어요. 금보다 더 귀한 보배 믿음이지요.
세 번째가 뭐냐 하면 바로 여기 출애굽기16장34절, 만나입니다. 만나. 지팡이도 성전에 들어가고요, 만나도 성전에 들어가거든요. 만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 빵 달라고 자기가 먹던 빵, 옛날 알던 식량 달라고 원망했을 때, 대들었거든요. 백성들이 대들게 유도해 놓고 대들었다는 말은 하나님보다 뭐가 우선이다? 자기 생존이 더 급하다는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한 거예요.
하나님이고 뭐고 간에 내 밥 먹여주면 그 누가되더라도 나는 믿겠습니다. 라는 이 자기 위주로 신을 선택하고 고르겠다는 거예요. 내 행복하게 해주고, 내 잘되게 해주면 그게 어떤 신이라도 알라신이든 부처든 나 믿겠습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중요한 것은 내 육신이 중요하고, 내 생존이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살았던 겁니다.
그걸 언제 알았느냐 하면 바로 모든 양식이 끊어질 때 알게 된 거예요.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사실. 극단적인 이기주의에요. 가족이고 뭐고 나는 내가 최고다! 라는 것. 이건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어요. 아까 나라 하는 것은 이건 뭐 나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까지 할 정도에요. 그 정도로 고집이 센 거예요.
그런데 그런 고집을 유발시켜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뭘 줬습니까? What? 이게 뭐냐? 만나를 줬거든요. 그 만나의 요소가 하나님의 요소가 아닙니까. 그걸 하나님의 성전. 성전에서부터 나왔다고요. 이 죄 용서를 아무 대가도 없이 죄 용서를 했다는 것. 그 예수님의 피로 용서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전이 이것이 구심점이에요. 핵심부분이 되어가지고 그 죽었던 예수님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서 빛내기 위해서 천국이 만들어진 거예요.
천국은 구석, 구석 예수님의 공로만 나타나고 우리는 그냥 공짜로 얻었다는 그 기쁨으로 참여하는 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이 알 수 없는 성경의 세계로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나밖에 모르는 존재를 깨닫게 해주시고 지금도 그 점에 변치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하면서 오직 주님의 용서에 대한 고마움만 남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