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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양20210513A슥6장12절(뭐지?)-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스가랴

안양20210513A슥6장12절(뭐지?)-이 근호 목사

오늘은 스가랴6장9절을 하겠습니다. 9절부터 15절까지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사로잡힌 자 중 바벨론에서부터 돌아온 헬대와 도비야와 여다야가 스바냐의 아들 요시아의 집에 들어갔나니 너는 이 날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에게서 취하되 은과 금을 취하여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고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보라 순이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우선 여기까지 보겠습니다. 무슨 말인지 전혀 몰라요. 성경 자체가 그래요. 성경 자체가 한글은 읽을 수는 있잖아요. 의도가 뭔지, 왜 이 글을 굳이 인간에게 꼭 하셔야 되는지, 그 의도가 뭔지를 몰라요.

의도가 파악되지 않으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우리는 알아먹지를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미군 부대에 가본 적이 있습니까. 어릴 때에 대구에 주둔 많이 했거든요. 미군부대에 철조망이 쫙 쳐져있다 말이죠. 그러니 미군 부대에 애들이 과외도 없고 학원도 없고 학교 마치면 미군부대에 근처에 이제 외국사람 구경하러 자주 놀러 가면 무엇이 그리 궁금하냐 하면 그 철조망 안에 미군부대가 굉장히 궁금해요. 그런데 들어갈 수가 없어요. 철조망을 쳐놨으니까.

성경은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철조망을 쳐놓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이 들어올 수 없는 세계에요. 성경이라는 세계는 철조망을 쳐놨어요. 성경책은 있는데, 알아먹을 수가 없습니다. 왜 알아먹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들이 이 성경을 알아먹지 못해야 그 다음부터는 인간들이 자기 속에 있는 자기의 본심이 있잖아요. 본심. 본심을 두 자로 바꿔 써서 이야기하면 구라지요.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을 끄집어놓기 시작하는 거예요. 성경 속에는 못 들어가고 성경에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걸 끄집어내서, 끄집어 낼 때 무엇이 튀어나온다? 본심이 노출되고, 본심이 노출되어서 이 노출된 본심은 인간들마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 공통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의 본심과 다른 사람의 본심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 이게 구라가, 거짓말이 되는 거죠. 이 거짓말로 만들어낸 게 뭐냐 하면 교회라 하는 겁니다. 교회, 종교, 전부다 거짓말입니다. 신이라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인간이 만들어낸 거예요. 신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신을 알도록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니까 인간들은 절대적인 존재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그 절대적인 존재가 있어줘야 인간은 평정심을 가질 수가 있어요. 의존하고 믿고 기도하고 충성을 다할 때 그 고정된 변동이 없는 확실한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을 때 거기에 대한 보상과 이익은 누가 보겠어요? 그 하나님을 믿는 내가 마음에 안정을 얻겠지요. 그 안정을 얻으면 그게 행복이지요. 행복하기 위해서 뭐를 요청하게 된다? 신의 존재가 필수적으로 요청 하게 되어있어요.

이게 교회가 상품으로 팔아먹는 내용입니다. 그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만나본적이 없기 때문에 그 구라를 거짓말을 펼칠 수 있습니다. 그 목사가 만약에 김씨라면 김구라. 궁극적인 존재가 존재하지 아니하면 자기의 존재가 허망해지고 허무해져요. 그러면 인간의 본심은 뭐냐 안 허무해지려고 애쓰는 게 인간의 본심입니다.

자, 인간의 본심이란 나만은 안 허무하고 싶다. “이렇게 살 수는 없는 거야.” 뭐 이런 거 있잖아요. 이렇게 내가 망가지거나 무너질 수는 없는 거야. 나는 버텨야 돼. 나는 다시 일어서야 돼. 용기를 가져야 돼. 왜 인간은 용기를 가져야 될까요? 왜 다시 일어서야 될까요? 본인이 그러고 싶어서 일어서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싶지요. 실은 그게 아니고 나에게 기대를 걸고 주목하여 보는 눈들이 많아요. 내가 무너지게 되면 남들이 실망하잖아요. 나한테 기대 걸던 사람. 저 사람이 저럴 사람이 아닌데. 주시하는 사람이 많이 있잖아요.

그래서 부부가 나이 연로한 사람이 돌아가시게 되면 한 사람도 곧장 자기를 주시할 사람이 사라졌잖아요. 그럼 자기가 살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내가 없지요. 내가 없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두뇌의 시스템 자체가 인간의 두뇌는 아까 쉬는 시간에 이야기했지만 이 양식 먹이고 밥 먹인다고 계속 유지되는 게 아니에요.

두뇌의 활동은 외부환경과 끊임없이 주고받고, 주고받고, 이게 끊어지게 되면 이게 주저앉게 되어있어요. 이게. 무너지게 되어있다고요. 그걸 두뇌를 연구하는 그 두뇌 신경 과학사들이 실험을 많이 합니다. 대화하는 상대가 없을 때 인간이 두뇌를 명석하게 만드는 신경전달물질은 얼마나 그 활동성이 떨어지는가를 데이터로 만들어요. 대화하는 사람이 없을 때는 그 두뇌세포가 이게 함몰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기저기서 함몰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처음에는 남편이 일찍 죽고 난 뒤에 아내가 남편 이름을 부르지요. 그럴 때 자식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이고, 어머니. 제가 자식이 여기 있잖아요. 돌아가신 아버지 찾지 말고 우리가 잘해줄게요.” 이렇게 하는데 그거는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래요. “너무 오지 마라. 너희 힘들다. 내 혼자서 잘 산다.” 그건 그냥 안 무너지려고 애쓰는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맨날 여보! 하다가 요양병원 들어가는 거죠. 그 다음부터는 여보! 다 잊어버리고 그냥 연명. 연명시간에 돌입하지요. 연명하는 것. 연명은 사는 게 아니에요. 그냥 단백질, 탄수화물 공급하는 거지, 산다고 볼 수 없어요. 산다는 것은 대화 상대가 없을 때는 그게 사는 게 아니고 죽은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실 때는 하나님하고 대화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고 난 뒤에는 진짜 대화해야 될 하나님과의 대화상대가 끊어졌잖아요. 끊어졌으니까 그 때부터 하나님의 스케줄은 뭐냐, “살다 그냥 죽어.” 이리 되는 거예요. “니가 살고 싶어도 내가 죽여줄게.” 그래서 인간은 그냥 살다 죽으면 되는데, 그래서 모든 인간은 죽잖아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의 공통점은 뭐냐 하면 ’죽는다!‘ 에요. 죽는 이유가 이미 죽어있기에 죽는 거예요. 죽어있다는 규정 하에 그 나타난 결과는 죽는다, 입니다.

어느 인간도 여기서 예외가 없어요. 공통점은. 그런데 죽을 때 그럼 그냥 죽으면 죽지. 그러잖아요. 문제는 이게 죽어야 되는데 안 죽는 게 있어요. 인간에게. 이게 악마와 만나가지고 인간에게 발생된 건데, 이건 죽여도 안 죽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나’에요. 나. 나는 심지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자살하잖아요. 나의 가치, 나의 의미, 나의 자존감, 나의 명예, 이름, 그거 살리기 위해서 자살하는 거예요.

주로 서울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관악산에 많이 가요. 검찰청에 한 번 갔다 오고 그 다음날 죽고. 검찰청 사진 한 번 찍고 그 다음 한 주 내에 죽고. 적어도 나는 이렇게 이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억울해. 이러면 죽거든요. 억울하다고 죽거든요. 연예인들이나 이런 사람들 자살하는 사람. SNS 거기에 뭐 안 좋은 게 있으면 젊은 20대 애들이 괴로워하면서 죽는다고요.

자, 괴로워할 때 누가 옆에서 지켜가지고 찌르던가요? 바늘로 찌르던가요? 아니지요. 그 넓은 아파트에 지 혼자 사는데 뭐. 자기하고 개하고 사는데 뭘 찔러요. 아무도 안 찔러도 자진해서 자기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누가 그렇게 했겠어요? 자살이라는 말을 흔히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말 자체는 스스로 죽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자살하는 사람 물어보세요. “당신은 왜 자살을 기도했습니까?” 하면 남들이 나를 죽였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가 자살 안 해도 얼마나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완전히 드러나는 거예요.

우리는 남들의 기분 맞춰 사는 거예요. 남들의.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나는 ( )다. 나는 타인의 몸종이다. 타인의 몸종. 참, 이건 모든 인간이 고질병이고 정신병이에요. 지금. 나는 해놓고 이거 보세요. 말 자체를 보세요. 재미있잖아요. 나 해놓고 타인 나오지요. 나하고 타인하고 누가 우세합니까? 남이 우세한 거예요. 타인이 우세한 거예요.

그러니까 몸종이지요. 몸종.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었던 거예요. 내가 나의 주인이. 그러니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을 부러워할 필요 없어요. 어떤 사람이 인기 얻는 걸 부러워하지 마세요. 그 사람은 100명한테 유명하면 그 사람은 100명의 몸종입니다. 1000명에게 인기 있으면 1000명의 몸종이고. 어떤 60 중반 된 아저씨가 직장에서 마음에 드는 결혼 안한 아가씨하고 장난치고 사귀자고 했다 합시다. 직장에서. 조그만 중소기업에서. 저도 중소기업 다녀봤지만 대기업은 성희롱 이런 게 있지만, 중소기업은 말하지 마세요. 이건 개판입니다. 특히 현장직에서는 개판이에요. 이건. 보상하고 그런 식으로 못 따져요. 돈이 중요하지. 무엇이 중한디. 돈이 중요하지. 직장에서 농담 듣는 건 그건요, 예사입니다. 비일비재한 거예요.

조그만 중소기업에서 아가씨 그래가지고 “과장님, 이러지 마세요. 나는 당신 안 좋아합니다.” 이 소리 들었다 해가지고 과장이 관악산 가가지고 자살합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박원순은 왜 자살했습니까? 박원순 서울시장은 왜 자살합니까? 존재의 무게는 타인의 무게에요. 남의 시선의 무게가 자기 존재의 무게에요. 이건 망상입니다. 이건. 언제 타인이 나한테 밥 준 적 있어요? 뭐 해준 적이 있습니까? 왜 내가 돈 벌어서 밥 먹고 사는데 왜 남들 의식을 합니까? 앞뒤가 안 맞잖아요. 이게 원인이 뭐냐, 나, 이게 문제거리입니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몸종이라는 말도 되지만, 나는 성경은 이렇게 봅니다. 쫓겨난 존재. 누구로부터. 하나님의 대화 상대로부터 쫓겨난 존재. 이게 바로 창세기 3장24절입니다. 나는 원래 같은 인간하고만 대화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하고 주고받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우리 인간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지 말래. 니 내있는 곳에 들어오지 말래. 창세기3장24절 누가 한 번 읽어볼까요.

자, 하나님을 알려면 그거 알면 하나님 거의 반 이상을 아신 게 돼요. 이런 거 보고 제가 질문하겠습니다. 과연 알았었는지. 질문해드리겠습니다.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3장24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자, 하나님께서 누구를 쫓아냈지요? 인간을 쫓아냈지요. 자,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답변은 인간을 쫓아내시는 분. 이분이 하나님이에요.

하나님께 헌금 바치고 기도하고, 충성하고, 전도하면 흔쾌히 받는 하나님은 그건 교회가 만든 가짜 하나님이고, 진짜 하나님은 인간을 쫓아내시는 분이에요. 인간을 안 만나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게 성경에 있는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제가 처음에 강의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여러분 오늘 본문 읽어봤는데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몰라요. 무슨 뜻인지 몰라요. 당연한 거예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이 성경책을 줬지만, 우리는 못 알아본다는 말은 바로 그거부터 시작을 출발을 해야 돼요. ‘아! 도대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나는 도대체 못 알아듣는구나! 그게 나구나.’ 못 알아들어요. 뭐 천당을 가던 뭐 구원을 받던 알아들어먹어야 천당을 가던 구원을 받는데 애초부터 알아듣지도 못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믿을 것도 없지요.

뭘 알아야 믿지요. 그래서 가짜 하나님을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교회에서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내요. 하나님은 이런 걸 원하시고,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시고, 이런 믿기를 원합니다. 믿으십니까? 아이구, 구원받았습니다. 천당 갑니다. 계속해서 교회는 그런 식으로 사업을 해나가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옛날에 김병조라는 사람이 유명한 멘트를 한 게 있어요. 김병조개그맨. “나가 놀아라.” 하는 말 있잖아요. 그 말이 창세기3장24절 말씀과 딱 맞아요. 나가라! 이 말입니다. 나가라. 오지 마라, 이 말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쫓아내십니다. 반기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헌금가지고 왔습니다. 하면 니나 맛있는 거 사먹고 니나 하라. 돈 받쳤다고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아니 근원적으로 내쫓았는데 뭘. 우리가 돌아올까 싶어서 누가 지킵니까? 창세기3장24절 누가 지킵니까? 거기에 보안요원 있지요. 보안요원. 경비원 있지요. 누굽니까? 천사지요. 두루 도는 천사가 불 칼을 들고 근처도 못 오게 만들었어요. “나가! 너희는 나가! 죽어라!” 그래서 모든 인간의 공통점은 죽습니다. 죽고 이게 곧 저주지요.

저주하는데, 이게 나라는 생각이 없어지고 죽어버리면 괜찮은데 나라는 이런 집착, 나에 대한 숭배, 나에 대한 집념, 이걸 가지면서 죽으니까 몸은 죽어도 나는 건지고 싶은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하면 분열, 더 노골적으로 찢어짐. 나와 내가 사이에 찢어짐이 일어나요. 그래서 인생사는 게 아파요. 세상만사가 내 맘대로 안 되니까. 나는 여기 있는데 내 맘대로 되어야 된다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보통 세상은 나는 누구냐 하지요. 나는 누구냐? 요 질문하지 마시고 이렇게 하면 돼요. 이것은 무엇이냐? 나는 누구냐? 하지 마시고요, 이것은 무엇이냐? 고 하세요. 나는 누구냐, 에서는 나는 살아 있잖아요. 이것이 무엇이냐, 할 때는요, 어떤 물건, 또는 사물, 어떤 현상, 이리 있을 때는 그 순간만큼은 이 질문을 한 순간만큼은 누구를 잊어버립니까? 나를 없앨 수가 있어요. 나를 없애버립니다.

그래서 사람이 일을 해야 돼요. 사람이 일을 할 때 나가 사라져요. 나가 사라지게 되면 모든 불만과 근심, 걱정도 같이 사라져요. 사람이 개 키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요. 이것이 무엇이냐, 이게 성경에 나옵니다. 출애굽기16장15절,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이것이 무엇이냐?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하고 그 다음에 뭐가 나옵니까? 알지 못한다. 바로 이것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자, 신앙은 이것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져줄 때 이건 기존의 인간세계에서는 없는 거예요. 인간세계에 없다는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이 예상한 것 아니에요. 인간이 예상한 것도 아니고 더 중요한 말은 인간이 가능한 게 아니에요. 인간이 공장에서 만들어낸다든지 이렇게 예상해서 설계도 만들어서 찍어낸다든지 시장에 상품화되어 나온 게 아니고 전혀 생각도 못한 것. 그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려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 하면 이것이 무엇이냐, 가 되지요. 갑자기 뭘 잊어버려요. 나를 잊어버리지요. 그리고 그 무엇이냐는 이름이 없는 거예요. 이름을 안 지었다는 말은 생소하다는 뜻이거든요. 기존의 인간들 속에 흔히 봤던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더 어렵게 이야기할까요.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인간들이 여러 명이 있는데 인간들이 하나의 새끼, 짚으로 만든 새끼, 새끼 꼬잖아요. 그 하나의 전부 다 새끼라면 이들이 뭉쳐버리면 뭐가 되지요? 새끼줄이 되지요. 새끼줄은 뭘 만드느냐 하면 경계선을 장식합니다. 그러니 나가 사라지고 하나의 줄. 하나의 선이 되는 것이 성도의 입지에요.

꼬아가지고 독립적으로 자존적으로 살면 힘들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이걸 혼자서 살지 못하고 꼬아가지고 새끼줄을 만들어버려요. 새끼줄을 만들면 나중에 선이 되지요. 그러면 이 새끼줄이 어디에 이렇게 배배꼬여가지고 이리 있다면 이 선으로 인하여 두 영역이 발생됩니다. 한쪽은 A라는 지역, 한 쪽은 B라는 지역이 생기겠지요. 이게 성도의 역할이에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이스라엘백성의 특징은 뭐냐 하면 바로 이것이 무엇이냐에 마음을 빼앗기게 만들어가지고 이스라엘 자체가 이 세상과 하나님의 계신 곳과 분리시키는 역할과 기능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아까 봤던 창세기3장24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계신 곳과 인간 있는 곳을 구분 지었지요. 오지 마라 했잖아요. 거기에 보초 선 사람이 누구지요? 천사들이지요. 그 천사의 기능을 이스라엘이 한다 말이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 스가랴에서는 이스라엘 망해버려요. 망해 버리고 망한 그들에게 새로운 이스라엘을 드러내면 그들은 천사가 했던 그 역할을 누가 인수인계 받는가, 새로운 이스라엘이 인수인계 받습니다.

하나님나라에 속한 이 새끼줄. 오늘 제목을 새끼줄로 할까. 하나님과 백성들과 함께 있는 쪽에 이쪽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새끼줄이기 때문에 경계선 역할을 하기 때문에, 보초기 때문에, 보초는 자리가 없잖아요. 보초는 이쪽영역을 지키고 이쪽영역을 감시하는 역할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 영토 말고, 이 앞의 영토는 뭐냐, 경계선이 아니니까 새끼줄이 아니니까. 그냥 새끼니까. 개별자니까 그냥 나라는 그 존재의 무게에 쫓기면서 살아가고 있지요.

다시 한 번 아까 강의에서 돌아보면 나는 뭘 해야 되느냐? 나는 어떻게 살아야지? 라는 질문을 하지 마시고 “이것이 무엇이냐?” 주님께서 이스라엘 광야에 새벽에 생전 처음 보는, 옛날에 어떤 성에서 드롭프스라 해요. 사탕종류. 사탕종류와 비슷한 열매가 맺히는 사탕종류가 하늘에서 우루루 떨어지는, 우박 떨어지듯이 떨어지는 거예요. 새벽에. 새벽에 하얀 가시같이 되어있는데. 그 당시에는 표현할 수가 없지요. 인간세계에 없던 거니까. 그냥 식물성이 아니에요. 동물성도 아니고. 제3의 항이라니까요. 참 이런 단어를 쓰는 게 여러분에게 죄송합니다만.

제3의 항이에요. 제3의 항. 제1도 아니고 제2도 아니고 제3의 항. 인간의 세계에서는요, 1과 2. 이게 전부에요. 디지털에서는 0과 1. 이게 전부고. 물리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우주의 모든 구성은 0과 1로 되어있다, 했어요. 0과 1. 73%의 암흑에너지와 23%의 다크메럴, 암흑물질과 4%의 눈에 보이는 별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게 우주라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안드로메다 있잖아요. 백날 다 더해봐야 4%밖에 안돼요. 나머지는 뭐냐 암흑에너지, 암흑에너지에서 나온 다크 메럴, 암흑물질. 이런 게 하나의 변수로서 수식에다가 집어넣어줘야 중력활동이 해명이 되니까 물리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암흑물질이란 암흑 그것은 아무 본 사람 없어요. 어두워서. 없지만 그게 요런 항목에 딱 집어넣어줘야 이 아귀가 맞는다고 해서 이런 가설을 내세우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어두우니까 존재하니까 1. 0과 1로 되어 있잖아요. 0과 1. 나 1. 그 다음에 나 아닌 것을 2. 너라든지 또는 물건이라든지 2가 되겠지요. 여기에 바로 만나. 제3항이 등장해요. 제3항이.

그래서 하는 말이 “이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만나라는 이름 자체가 이것이 무엇인가가 압축되어서 그 드롭프스 사탕처럼 생긴 이름이 뭐냐 이것이 무엇이냐, 그래서 만나에요. 만나를 영어로 하면 What? 뭐지? 이게 뭐지?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것. 이것이 뭐냐 이스라엘의 뭐가 되느냐 양식이 되는 거예요.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양식이 먹던 이스라엘은 기존에 알던 이스라엘이 아니고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이스라엘이 되고 그 이스라엘 속에 있는 그 백성들은 기존에 알던 나가 아니라 내가 이름 부를 수 없는 다른 제3의 나가 내 안에 침투하고 들어온 겁니다. 이래서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신은 계시다. 나는 인간이다.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찬미하자. 이거 아니에요. 그것은 자기를 나를 어떻게든 안정성 지탱하고 내가 안정성을 얻기 위해서 남들이 보는 시선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이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볼 것이라는 자기 자신을 견뎌내기 위해서 이렇게 함수를 변수대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이 종교라는 것은 그런 거거든요.

알 수 없는 당신에게 기도합니다. 하늘에 보기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전부다 이게 뭐냐 하면 하늘이라는 것은 그냥 추상명사로서 내가 견디기 위해서 힘든 것을 견디기 위해서 설정한 가상적인 대상이란 말이죠. 그건 가짜지요. 왜? 뭐가 가짜냐. 내가 죽는 이유를 찾아낼 수 없잖아요. 내가 죽는 이유를. 그럼 가짜지요. 내가 나를 살리는 방법 중에 하나가 교회 나와서 하나님 믿는 것. 이건 구라지요. 그게 바로 거짓말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이러한 제3의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그 기능을 제가 아까 했지요. 이게 누구의 기능이냐, 천사의 기능입니다. 그래서 스가랴6장1절부터 죽 보게 되면 거기에 지난시간에 했지만 이게 누구의 이야기에요? 말들이 나오잖아요. 이 말들은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천사들이야기죠. 천사들. 내용은 천사고 표현형은 말들이고.

따라서 말이 천사라 하면 안 되고 그 기능. 그 기능은 천사가 말 같은 기능을 한다. 이 말은 앞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은 천사와 같은 기능을 맡아야 될 자들이다, 라는 거예요. 사람이 아니고 천사에요. 그러면 천사의 일이 뭡니까? 하면 보초지요. 보초. 또는 시편83편에 나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문지기로 있다는 것은 뭐냐, 경비원 보초 아닙니까. 내가 세상의 천날보다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로 있는 게 좋사오니. 참새도 성전 안에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저게 나의 소망입니다. 주님.

이게 내가 구원받는 게 아니고 내가 모르는 내가 구원받는 거예요. 제3의항의 나. 내가 아는 나도 아니고, 남이 아는 나도 아니고, 1항도 아니고 2항도 아니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나. 내가 끄집어내지도 못할 상상도 못한 나가 새롭게 발생된 겁니다. 천사와 같이 그렇게 된 거예요. 기존의 나는 죽는 게 무서워서 벌벌 떨었지만, 제3의 나는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고 나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내가 나를 볼 때에 이게 뭐지? 야! 너 누구야? 물을 정도로 변해버린 내가 낯설어. 신기해요.

저는 이걸 다 지우고 방금 요것을 요 말로 표현하겠습니다. 요걸 다 지우겠습니다. 요걸로 이야기하겠습니다. 4자입니다. ‘불가능성’ 이거 뭐 기도해도 안 되고요, 헌금해도 안 되고, 교회가도 이건 안돼요. 이건. 교회 가서 천당 갈 거 같으면 안돼요. 그냥 불가능성. 진짜 하나님의 사랑 받고 있는 사람은 불가능성을 그 다음에 견지, 유지해야 돼요. 그 불가능성을 유지해야 돼요.

세상에 내가 여기 존재하다니. 전에는 내가 여기 사는 것은 지나간 기억에 의하면 너무나 익숙한 거고 당연히 살아야 될 것처럼 느껴졌는데 이렇게 제3의 인물이 되고 제3의 내가 되고 난 뒤에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내가 여기 살아있다는 것이 왠 기적이지? 여보! 내가 왜 살아있지?” “당신은 뭐 어제 숨이 안 끊어졌으니까 살아있지.” “그거 말고.” 이게 하루, 하루 내가 살아있는 거, 숟가락 들고 음식 먹는 것도 신기하고, 앞에 있는 아내나 남편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 “아저씨, 누구세요?” “어디 뭐, 당신 머리 부딪혔어? 기억상실증 걸리고 교통사고 난 적 있어?” 이게 교통사고 나서 제3의 나 같으면 얼마든지 교통사고 박아서라도 천당 가겠는데. 그것도 안돼요.

교통사고 나도 구원 못 받아요. 그냥 불가능성이에요. 내가 나를 설명할 수가 없어요. 내가 나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이렇게 달라질 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예상도 못한 겁니다. 이것이 뭐냐 “나는 □이다.” “나는 What이다.” 이게 바로 만나를 먹게 하신 취지입니다. “이스라엘아! 뭔지 모르겠지?”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걸 먹어야 돼. 니 아는 것 자장면, 짬뽕, 탕수육, 시키지 말고 니가 애굽에서 먹던 음식 말고 이 광야에서는 생전 보지도 못한 음식을 먹어라. 그래야 니가 생전 알지도 못한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그게 천국이에요.

그게 천국입니다. 천국에 가면 잔디밭에 분수 있고 그런 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이 땅에 모든 것과 공통성이 하나도 없는 나라. 예상을 할 수가 없어요. 이 땅은 내가 어떻게 행복하게 편하게 사느냐가 목적이잖아요. 이 땅에서는. 그러나 천국은 뭐냐 왜 저를 하나님의 아들 만들었습니까? 라는 거기에 관심 있어요. 저같이 농땡이고 저같이 나밖에 모르는 천하에 내가 돛대인 줄 알고 내가 최고인 줄 알고 우선 나부터 챙길 수밖에 없는 이기주의를 왜 이렇게 영원한 영생을 주십니까? 성경에 보니까 못 간다는데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았는데, 생명나무는 못 따먹잖아요. 못 따먹는 그 과실을 왜 따먹도록 이렇게 허용을 하셨습니까? 주님.

그럼 주님이 “싫어? 다시 보낼까?”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고요, 주님 제 말 무슨 뜻인 줄 아시잖아요? 다시 쫓겨나가라는 뜻은 아니고요, 너무 황공스러워서 하시는 말씀을. 에이~ 주님 아시면서 왜 그러세요. 또 심불부리시기를. 아시잖아요.” 이게 너무 좋아서 하는 이야기인줄을. 그동안 천당 가려고 얼마나 교회에 돈을 갖다 댔습니까. 십일조니, 감사헌금이니, 선교헌금이니 얼마나 갖다 부었어요. 얼마나 헛짓했습니까? 다 쓸데없는 헛짓한 거예요.

가스펠송에 나오잖아요. 돈 없이도 가는 나라 무슨 나라? 노래는 그렇게 불러놓고. 봉사를 했습니까, 충성을 했습니까, 착한 일을 했습니까, 돈을 갖다 바쳤어요? 뭘 했습니까?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걸. 결국 아무것도 한 것도 없다는 말은 무엇이 그 사람 안에 유지가 된다? 불가능성이 생생하게 살아 있잖아요. 불가능성이.

주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거예요. 이 불가능성.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이건 하나님께서 저를 건졌습니다. 맨날 나는 어떻게 할까요? 하는 그 질문하다가 내가 주님의 안목으로 다시 나를 보게 한 거예요. 이 덩어리는 뭐야? 이 덩어리는 뭐야?

바로 이 불가능성. 이 불가능성을 하나님께서는 천사의 역할을 맡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존재가 아니라 경계선을 치게 해요. 하나의 새끼줄을 만들어놔요. 경계선. 새끼줄로서 활용시키는 겁니다. 그럼 그렇게 새끼줄로 만들었을 때에 여기에 그러면 오늘 본문에 의해서 그 새끼줄로 온 사람들은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슨 조치를 해가지고 하나님의 살아있음을 증거 하는 증거자가 되었는가.

여기에 오늘 본문 6장10절에 보면, 10절 제일 앞에 무슨 말 나오지요? 사로잡힌 자. 사로잡혔다는 것은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었거든요. 히브리 사람들이 애굽에 그들은 사로잡혔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들이 살 곳은 싫으나 좋으나 노예가 되든지 힘들던지 아니면 편함과 관계없이 내 나라는 이 애굽 나라밖에 없다. 내가 몸 둘 곳은 이 애굽나라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며 살았던 거예요. 그냥 견딘 겁니다. 다만, 하나님이여, 힘드니까 완화시켜 달라고 바로왕의 폭정을 좀 완화시켜가지고 우리 임금님이 좀 마음을 순하게 해가지고 나한테 너무 억한 감정 안 갖기를 그 정도로 기도했을 뿐이에요. 너무 고통이 많았으니까. 어디 나가자는 생각은 아예 없어요.

아까도 했잖아요. 인간은 예상한대로만 예상해요. 자기가 힘드니까 신을 찾은 거예요. 공식이니까 한 번 찾아봅시다. 힘드니까 교회 간 거예요. 힘드니까. 힘드니까 기독교 신자로 행세하는 겁니다. 교인되고 하는 겁니다. 힘드니까. 누가 힘들어요? 나지요. 나니까 여전히 나를 놨어요? 못 놨어요? 나를 놓지를 못하는 거예요. 힘드니까 하나님이여, 좀 도와달라고 새벽기도, 철야기도 한 겁니다. 나를 포기하려고 하나님, 저를 포기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하지를 않아요. 도와달라고 하지. help me. 도와달라고 하는 거예요. 기도나 그런 것은.

절에 가도 마찬가지고, 교회가도 마찬가지고 종교라 하는 것은 그저 비나이다. 비나이다. 삼신할머니한테 비나이다. 새벽4시에 일어나가지고 우리 옛날 할머니 맨날 새벽4시에 일어나가지고 딸그닥 거리지요. 잠자다보면 뭔가 딸그닥 소리가 나요. 누가 존재한다는 뜻이고 활동한다는 뜻이거든요. 일어나서 보면 할머니가 종이 태우면서 빌고 있는 겁니다. 힘드니까.

히브리인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여기서 뭐가 나오는가. 나가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누가? 모세와 아론이 나가자. 이건 도발이에요. 이건. 나가긴 어딜 나갑니까? 갈 데가 있어야지요. 없잖아요. 어디로 갑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가자. 이 세상 존재하지 않는 곳으로. 이게 말이 돼요?

어디로 갑니까?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다시 말해서 내가 친히 심판해서 작살내는 곳으로 너희들을 집어넣겠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심판하고 작살나는 그 민족만 나쁜 게 아니고 니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동질시해주기 위해서 가는 거예요.

쫓겨난 사람은 쫓겨 가되 히브리인들도 쫓겨난 사람과 똑같은 쫓겨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지저분한 존재에요. 그런데 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히브리인들이 그 땅에 가게 되면 그들은 자기 분수를 알고 자기 주제를 알기 때문에 누구 공로만 돌리겠습니까? 하나님만 은혜에 감사하겠지요.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이에요. 처음에 애굽에 있었던 히브리인들은 나오면서 비로소 그들은 무엇을 느꼈느냐 하면 내가 사로잡혔다는 의식을 최초로 갖게 됩니다. 아! 우리가 빠져나올 수가 없다면 사로잡힘도 없어요. 죽던지 살겠는데 갈수가 있다면, 만약 그런 출구가 보인다면 여기 있다는 것은 결국은 사로잡힘 바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사로잡힌 존재라는 자각을 갖게 됩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는 제대해야 될 곳이에요. 남자들은 압니다. 제대하는 날 그 사람들이 후배, 후임병들이 제대하는 날 선임 앞두고 그 베옷을 입고 검은 복으로 정장을 갖추어서 아이고~ 아이고~ 하고 웁니까? 제대하는 날. 선임병 보고 울어요? 이제가면 언제 오나. 아이고~ 아니고~ 웁니까? 축하한다 하지요. 왜? 사로잡혔거든요. 이게 징병제거든요. 강제로 징집했기 때문에 징집당한 그 장정은 남자는, 군에 가본 사람은 압니다만 간 그날부터 오로지 제대날짜만 바라보면서 모든 역경과 시련을 그 더러운 것을 언젠간 국방부 시간은 흘러간다. 그 하나 믿고 버티는 거예요. 해방의 그날.

그걸 가지고 성경에서는 구원이라고 하는 거예요. 구원. 이 세상을 이제는 떠나는구나! 더럽다 세상아! 아예 뒤도 보지 말아라 했어요. 그래서 뒤 돌아보는 자는 안 되잖아요. 쟁기 들고 뒤 돌아보는 자는 안 된다고요. 마태복음2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는데 제가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24장40절, 41절에 보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같은 일을 했지요. 같은 일을 했을 때, 그들은 사로잡혔다든지 여기는 남의 땅이라는 생각이 의식이 전혀 없어요.

그런데 주께서 오셔서 한 사람을 딱 데려가니까 남아있는 사람은 뭐가 되어버렸어요? 졸지에. 한 사람을 데려가니까 남아있는 사람은 그냥 평소처럼 살아도 ‘나는 잘렸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요. 나는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지요. 신자가 발생되어야 불신자가 성립돼요. 신자가 없으면 불신자가 없어요. 그냥 인간들이에요. 그냥 보통 균형 가는 보통적인 인간들인데 한 사람이 구원이 되어버리면 한 사람은 그때부터는 구원 안 된 존재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이 성경 복음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밉상을 받는 겁니다. 불교는 밉상을 안 받아요. 유교는 밉상을 안 받습니다. 바르게 살아서 인류에게 공헌하자. 인간은 돈만 아는 이 더러운 세상에 종교 가져가지고 개과천선해가지고 남을 희생하고 봉사하는 그런 착한 되어가지고 사회에 구석구석 봉사하게 되면 우리 사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천국 같은 세상이 되느냐, 종교는 참 좋은 것이야. 라는 것이 이 세상 사람들이 갖고 있는 종교관이에요.

그런데 성경은 완전히 그걸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이 데려감을 당하지 못한 인간들아! 저주받아라.” 이거에요. 그래서 교회는 뭐 좋지만, 복음은 싫다는 거예요. 이 세상이. 교회마다 이런 이야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처럼 착한 사람되어가지고 남한테 봉사하고 희생하고 양보하는 사람이 되어라. 배려할 줄 아는 인격적인 사람이 되어라. 그거만 이야기해야 되지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놔두는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세상이 애굽이에요. 애굽. 납득이 되고 인간이 가능한 것만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불가능성을 그 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견지하라. 유지하라. 불가능성을 유지해야 돼요. 불가능성.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간다. 이게 왜 엉터리냐 하면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나의 가능성이기 때문에 이건 엉터리에요.

그거 잘못된 겁니다. 내가 예수 믿고 천당 가는 방법은 없어요. 하여튼 방법은 없어요. 구원받는 방법은 없습니다. 자꾸 하나님, 예수 이런 거 조작 만들지 마세요. 가능한 대상으로 믿을 대상으로 조작해 내면 안돼요. 친숙한 사람으로 우리가 언제든지 마음만 결심 먹으면 마음만 낮춰서 착하게 먹으면 믿을 수 있는 그런 훌륭한 분. 그런 예수는 없어요. 그런 예수는 인간이 만들어 낸 거고 교회가 만들어낸 거예요. 그런 예수는 없어요.

어쨌든 구원받을 가능성은 없어요. 제로에요. 없어요. 왜냐하면 모든 시작은 내가 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시작은 내가 하지 내가 아닌 남이 나를 강제로 납치하는 경우는 우리는 상상도 못하잖아요. 그런데 구원은 납치에요. 니가 어떤 행동도 안 받겠다는 거예요. 니가.

착합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겸손합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그 죄인도 이젠 지겨워. 그런 소리 그만해. 하지 마. 하지 마. 그냥 데려가. 그냥. 니 딱 집었어. 너, 가! 끝났어. 끝난 거예요. 쓸데없이 폼 내지 말고요, 아무것도 받지를 않습니다. 아무것도 안 받아요. 주께서.

다음부터 예수 믿고 바르게 살겠습니다, 바르게 살지도 마. 그것도 짜증나. 바르게 산다고 구원이 취소되는 법은 없어요. 그냥 무엇인가, 너는 이제 너가 아니고 내가 보기에 무엇인가, 내가 너에게 다루고 너를 다른 인간으로 내가 친히 제조해 낼 거야. 만들어낼 거야. 어디? 천국에 합당한 존재로.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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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0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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