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존강의20210513b 베드로전서5장 8절(악마추격자)-이 근호 목사
서울의존강의20210513b 베드로전서5장 8절(악마추격자)-이 근호 목사
자,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첫 번째 시간 끝에 시간, 역사가 의미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데 그것은 인간의 역사를 만드는 그 주도권자 또는 역사의 주인공, 인간들의 자기 의지와 개혁적이고 발전하겠다는 그 지혜의 통합, 지혜를 모으는 것, 그것이 역사를 좋은 쪽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게 되면 역사의 발전은 반성에서 오는 거예요. 반성,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실제로 해보고 현실에 더 적당한 것은 없는가, 더 나은 게 없는가를 자체 검증을 통해서 오류를 최소화시키는 방향으로 역사는 발전한다고 보는 거예요. 발전, 또는 진화.
역사가 진화, 발전한다는 것은 역사의 주인공은 역시 인간이고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기를 되돌아볼 수 있는 자리가 있고 그 되돌아보는 계기는 실제 일어난 현실과 부합되는지 안 되는지를 검증해보는 거예요. 검증해서 오류가 발생되면 오류를 없애는 방향으로 또 새로운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자질이 인간에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인류의 역사는 진보되는 쪽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자화자찬 또는 인간, 인류의 자기 숭배 같은 게 있죠. 거창하게 인류의 문명까지 이야기했지만 거창한 인류 문명 말고 여기에 개인 인생사를 적용시켜 보세요, 인생사를. 개인 인생사를 집어넣으면 항상 인간은 지금의 자기 자신을 과거보다 더 나은 존재라고 그렇게 자부하고 싶어요. 과거보다 못하다는 생각보다도 더 나아졌고 더 시건 났고 더 지혜롭고. 그래서 과거보다 훨씬 더 우수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역사 안에 무엇이 작용한다 했어요? 바로 악마가 작용하죠. 그래서 다니엘 7장에 나오는 국가, 짐승은 다른 짐승으로 바통을 이어서 계속 교체가 돼요. 그리고 인간 역사의 모순점이 이것인데 기존의 국가보다 더 강한 국가가 와서 기존의 국가를 무너뜨릴 때 발전이라는 게 성립이 되잖아요. 그렇죠?
이세돌이라는 바둑 두는 사람 압니까? 바둑 둘 때 인공지능이 한 판 졌잖아요. 졌는데 인공지능이 스스로 자기 개발해가지고는 어떤 인간도 한 판도 인공지능을 그 뒤에 이긴 사람이 없어요. 인간이 쫓아가지 못할 정도로 빨리 발전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오류를 수정하고 더욱더 수를 넓혔기 때문에. 지금은 인공지능이 같은 인공지능하고 싸움하고 있어요. 만들어낸 인공지능끼리 시합을 하는 겁니다. 중국에서 만든 인공지능, 한국에서 만든 돌바람 뭐 있고 미국에서 만든 그런 것들끼리 서로 또 경쟁하고 있죠.
오류를 발견하고 그걸 개선하고 더 완벽한 내용을 채우고. 그런데 성경에서는 날이 갈수록 인류의 국가 문명은 발전이 아니고 질이 떨어진다는 겁니다. 느부갓네살 왕 때 다니엘 2장에 보면 처음에는 금이었는데 어느새 은으로 바뀌고 어느새 놋으로 바뀌고 그 다음에 철로 바뀌었다가 잡것들, 철과 진흙이 혼재되어 있는 그런 국가 체제로 가다가 조그마한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도 넘어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금신상이 단일 금신상이거든요.
그러니까 인류 역사라 하는 것은 느부갓네살 왕이 봤던 그 바벨론 국가의 범위에서 한 치도 벗어난 국가는 존재하지 않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게 요한계시록의 18장, 19장에 나오죠. 큰 성 바벨론. 화로다 너희가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인류의 모든 국가를 단일 국가로 쳐버리는 거예요. 단일 국가를 찾아내지 마세요. 언제 또 단일국가해서 유럽연합 만들었다, 그런 거 따지지 말고 그냥 있어도 그게 단일국가에요, 그냥 있어도.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오늘 강의에서 처음으로 어려운 게 나옵니다. 그럼 마귀를 어떻게 찾는가? 역사가 이렇게 과거로부터 현재, 미래로 계속 이어진다고 하는 거예요. 역사 안에 악마가 들어 있는 게 아니고 역사를 가지고 악마가 활동해요. 인간은 악마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어디 활동 안에서 만나요.
주님이 여기 역사 속에 끼어들면 악마가 마중을 나옵니다. 그래서 십자가 사건이 터지잖아요. 악마는 역사 없이는 일 못해요. 악마는 숨어있는 것을 찾아낼 수는 없지만 유인할 수는 있어요. 성도가 만약에 여기 역사 속에 들어가게 되면 필히 악마가 반응을 나타내게 되어 있어요.
어떤 집에 개가 있는지 없는지를 개가 있다, 없다 살펴봐도 몰라요. 가까이 대문 앞에 가게 되면 멍멍 짖게 되죠. 아, 개 있구나. 접근해보니 대번 아네. 아, 개 키우는구나, 알 수 있듯이 악마가 싫어하는 것은 선악지식에 구멍 난 사람을 제일 싫어하거든요.
다시 첫째 시간 강의를 간단히 반복하게 되면 선악지식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자기에게 의미가 있고 자기는 더 나아질 수 있고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했죠. 그러나 선악지식을 갖고 있으면 지금보다 더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악마에 속한 인간들의 주장이고 하나님의 뜻은 뭡니까? 선악지식을 알게 된 그 자체가 죽음이다, 이 말입니다. 그게 죄이고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거예요.
바르게 살아라가 아닙니다. 너는 선악을 알았으니까 이왕 안 것, 선을 추구하고 악을 멀리하라가 아니고 그 자체가 이미 죽은 거예요. 그래서 악마가 감당 못하는 사람은 누구냐. 인간은 이미 아담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선악을 못 버려요. 못 버리기 때문에 선악을 아는 것 자체가 나는 이미 죽은 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은 악마가 더는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살겠다 해야 겁박을 하든지 유인을 하든지 매혹을 할 수 있는데 아니 죽겠다잖아요.
“여보, 당신 우리가 함께 행복한 가정을 만드세. 나도 돕고 당신도 돕고 애들도 같이 해서 행복한 가정으로 한번 살아보세.” 하면 복음을 아는 여자가 “난 죽었어” 이렇게 하는데 무슨 이야기가 됩니까? 나 죽었다는데 뭐. “나 죽었으니까 당신도 죽어. 그게 행복한 가정이야. 당신이 행복한 가정 안 되는 것은 당신이 지금 멀쩡하게 잘난 척 하니까, 자기 의가 안 죽으니까 행복한 가정이 아니야.” 그럼 남편이 화내면서 “그 성경공부 하지 마!” 그럼 아내가 있다가 “거 봐. 당신 마귀 본색 드러났잖아, 봐.” 살고자 하는 자는 악마에게서 못 벗어납니다. 이렇게 살다 그냥 죽을래. 내비 둬. 내비 둬. 그냥 살다 죽을래.
그럼 이제 뜸들이지 말고 들어갑시다, 어려운 것.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이 흘러가잖아요. 여기에 들어와 버리면 중간을 끊어버려요. 끊어버리면 무엇이 개입되느냐 하면 무(無)시간적 존재에요. 묵시적 안목을 갖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면 골로새서 3장 3절에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죠. 이게 말씀이죠. 그 말씀이 작용하는 존재, 성도죠, 성도가 역사 안에서 골로새서 3장 3절을 외쳐버리면 이 과거 시간은 허구가 되어 버려요. 실재하지 않아요. 없어요. 세상이 없다는 게 아니고 애초부터 시간 자체가 이것은 속임수였던 겁니다. 과거가 있고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다는 시간 자체가 속임수였어요.
앞으로 2개월 뒤에 돼보세요. 가보면 이것은 미래였었어. 안 갑니다. 맨 오늘이죠. 6월 1일 동네 병원에서 아스트라젠인가 백신 맞게 되어 있거든요, 제가. 어제 예약했습니다. 이거 맞는 것은 미래야. 안 가죠, 그냥. 오늘 할 일이죠. 오늘 주사 맞는다. 오늘 할 일이에요. 그러니까 ‘현재 뭘 하느냐’가 되어 버리면 이것은 성도 같으면 ‘주께서 ‘주사 맞으라’‘가 되는 거예요, 주께서.
역사의 주도권은 누구입니까? 인간은 수동적이죠. 주사 맞게 하는 것은 주님이 주관하시는 그러한 순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사건이라 하죠. 그냥 주사 맞는 사건에 참여하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뭐 미래에는...... 미래까지 생각하지 마. 내일 일을 네가 알지 못한다. 그것으로 끝났어요. 내일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는데 내일 뭐 할고 하지 마라. 그건 다 어리석은 것이다. 다만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한다.
주님이 이것 하라 하면 이것 하면 되고 저것 하라 하면 저것 하면 돼요. 그 뭐 고민이 돼가지고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중국집 들어가면서도 계속 생각해. 뭐 시키겠습니까? 가만있어 보세요. 짬뽕 할까 안 그러면 짬짜면 시킬까. 할 때 그냥 아무거나 먹자. 그 순간 아무거나 먹는 게 주의 뜻이다.
그것 때문에 벌써 4시간 전부터 고민했다는 것이 꼬리 자르기. 과거에 고민한 것은 뭐였습니까? 자기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죄였지요. 자기가 주도권을 쥐어버리면 오늘 내가 짜장면 먹기로 한 나의 결정은 잘했어. 하고 의미가 생겨버려요. 의미가 생겨버리면 그 의미를 갖고 있는 나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버려요.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리면 거기서 나는 살아야 될 이유가 생겨버립니다. 왜? 나는 짬뽕 먹기 위해서 살아야 될 이유가 생겨버려요.
죽겠다는 게 아니고 살아야 될 이유를 확보한 게 되어버리면 거기에 일곱 귀신 다 달려듭니다. 다음엔 짜장면 먹어야지. 다음엔 맛있는 거 더 먹어야지. 달려들어요. 그래, 나 내일까지 살아야 돼. 왜? 내일은 탕수육 먹을 거야. 뭐 이런 식으로. 어느새 벌써 역사가 형성된 거예요. 주님, 재림하지 마세요. 왜? 다음 달에 딸 결혼식 할 때 손잡으러 갈 사람 없어가지고. 이거하고 똑같은 거거든요. 오늘 재림해버리면 딸내미 결혼식 할 때 손잡고 갈 아버지가 없이 되니까. 딸은 땅에 있는데 아버지 혼자 올라가면 손 뻗어서?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역사 자체 속에 무(無)-역사를 개입해버려요. 무-역사는 어떻게 들어오는가? 역사로 들어오는 방법이 이렇습니다.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가 역사적입니다. 역사적이라 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에 준해서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있어요, 기억에 준해서. 이렇게 기계적으로 하는 것을 습관이라고 합니다, 습관. 습관은 친숙한 거예요. 고민할 거리가 없어요. 친숙한 겁니다. 친숙하다는 것은 기억의 바탕 위에 그 행동이 나온다는 뜻이에요, 기억의 바탕 위에.
그래서 기억의 바탕 위에 습관이 나와 버리면 이 습관의 문제점은 이 습관에서 자신의 죄성을 발굴 해내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발굴 해내지를 못해요. 그러면 주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십자가의 성령으로 반복케 하죠. 반복을 할 때, 이게 진짜 진리이고 현실 그 자체인데요.
왜 그러느냐 하면 수박을 먹는데 여기 수박이 원, 투, 쓰리, 포 네 개 있잖아요. 네 개 있을 때 얼른 보면 첫 번째 수박 먹을 때 반복적인 근육조직의 기억에 의해서, 전전두엽 피질(prefrontal cortex)에 기억되어 있는 지역의 기억에 의해서 근육이 움직여 먹었다 이 말이죠. a조각을 먹었습니다. 또 b조각 먹고 c조각, d조각 네 개 다 먹었어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똑같은 행동을 네 번 한 걸로 보이죠.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같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은 어떤 순간도 동일한 인간은 없어요. 똑같은 행동을 인간은 해낼 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행동을. 남녀 간에 서로 사랑하면서 연애할 때 문자 보내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트 팡팡 날리잖아요. 그 다음에 또 ‘사랑합니다♡♡’ 팡팡 날리면 여자 쪽에서는 왜 저번에 두 개 했는데 이번에도 두 갠고? 삐쳐버리는 거예요. 이번엔 세 개 해야지. 그 다음날 돈 주고 산 하트 더 멋진 걸로 날리면 이제 좀 내 마음에 든다. 그 다음에 또 날리니까 왜 저번에는 돈 주고 날리고, 이번에는 하나 더 얹어야 될 게 아니냐.
인간의 욕망은 멈출 수가 없어요. 인간은 같은 것을 거부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이미 확보된 기억은 욕망의 달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 외에 추가적으로 드러나는 욕망은 미흡한 욕망이 되어버려요. “엄마, 이번에 우리 반에서 5등 했어.” “그래, 잘했어. 다음에는 4등 해라.” 다음에 애가 4등을 해야 되는데 이 아이가 눈치가 없어가지고 1등을 해버렸네. 그 다음부터는 “1등 유지해라.” 하는데 어떻게 1등을 유지합니까? 그것도 우연히 1등 되었는데. 엄마의 욕망은 이미 지평이 달라졌어요. 1등 아니면 내 자식 아니야. 이미 달라졌다 이 말이죠. 달라졌어요.
뿐만 아닙니다. 오뎅집에 가서 오뎅을 먹어도 오뎅이 그 맛인가? 벌써 입맛이 달라졌어. 주인이, 똑같은 국물에다가 똑같이 했는데? 아니야 맛이 좀 다른데. 아저씨 집안에 부부싸움 했죠? 맞네, 부부싸움 했어요.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나는 집중한다고 하지만 그 일에 이르기까지 발걸음부터 해서 심장 뛰는 거, 교감, 부교감 신경, 차분히 calm down하는 부교감, 뭔가 열정적인 건 교감 신경이라 하거든요. 그렇게 행동하는 모든 것에 수천 가지, 수만 가지 변수가 다 주입됩니다.
상해에서 나비 하나의 날갯짓이 뉴욕의 폭풍우를 일으킨다는 butterfly effect, 나비효과처럼 수많은 변수가 다 투입되게 되어 있어요, 인간에게는. 누가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한 순간도 같은 경우를 만들어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습관상 어제의 내가 지금의 나라고 우깁니다. 자기가 얼마나 달라진 걸 몰라요.
사진 찍어보면 알죠. 귀신이라. 꿈에서는 분명히 내가 젊었는데 사진 찍어보니 이건 ‘안 죽고 왜 살아있나?’ 할 정도로 완전히 귀신이에요. 그래서 노인네들은 주민등록사진도 안 찍으려 해요. 내 사진을 내가 못 봐요. 앞에 부사 하나 붙일까요? 차마 못 봐요, 차마. 차마 볼 수가 없어요. 심지어 아가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씨들이 사진 찍을 때 같은 옷을 안 입습니다. 전보다 훨씬 더 젊게 보이는 어떤 장치 또는 옷차림, 태도, 좀 과격한 행동, 이런 것들을 해서 더 돋보이게 하면서, 신경 써가면서 사진을 찍죠. 그러다가 애 놓고 배 불룩하니 뱃살 나오고 하면 사진 끝났습니다. 찍지 마라.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귀는 인간에게 역사를 줍니다. 너는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너라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은 한 번도 우리를 동일한 나로 되게 한 적이 없습니다. 매일 죽이고 매일 살리니까. 동일한 게 아니에요.
언제 죽어도 우린 할 말이 없고, 더 살려낸다 할지라도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좋아하지 마세요.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이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말은 오늘 밤 죽인다는 말이 아니고 그동안 살려준 것도 네가 원해서 살려준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주의 뜻 때문에 살려준 거예요.
그런데 마귀는, 오늘 여러 번 나옵니다만, 선과 악의 지식을 끝까지 고수하고 싶은 겁니다. 이왕 따먹은 거 계속 밀어붙여라. 선과 악을 안다는 것, 하나님만이 아는 걸 알았으니까 너는 신과 같은 존재다. 그 존재를 너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밀어붙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인간은 생명나무를 못 따먹어요. 못 따먹는 동네가 무슨 동네입니까? 지옥이죠. 지옥의 특징은 생명나무가 없다는 거예요. 없어요. 결핍되어 있어요. 지옥 가서 죽으면 좋죠. 지옥 가서 안 죽으니까 문제인 거예요. 지옥 가서 안 죽어요. 영원한 저주를 받습니다.
선악을 아는 자가 영원한 저주를 받는 근거가 어디 있냐? 당신 근거 대 봐라. 하면 바로 예수님이 영원한 저주, 십자가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중에서 저주에 해당되는 그 속성이 이 세상을 규정하고 있어요. 이 세상에서 악마를 탈출하지 못하는 자는 십자가 저주와 동일한 저주를 영원히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행전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10장 38절,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마귀에게 눌려있는 모든 자를 고쳤다는 것은 마귀에게 눌려있는 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예수님의 성령과 능력 외에는 없죠.
그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럼 이 뜻을 알아야 돼요. 성령과 능력이 와야 비로소 우리는 지금껏 인류가 마귀한테 모가지 눌려 살아 왔다는 것이, 성령이 와야 비로소 소급해서 밝혀지는 사항, 진실입니다.
마귀 들린 인간들은 제가 어제 수요일에 설교한 것처럼 돼지를 실험실 쥐처럼 사용해가지고 한번 귀신을 넣어보니까 그 돼지가 자기가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무조건 마귀가 시키는 대로 죽음의 길로 질주하죠. 비탈길로 내려가 갈릴리 바다에 다 빠져죽죠. 똑같은 현상이 인류의 현상입니다. 그것을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는 ‘악마에게 눌렸다’고 하죠.
악마에게 눌렸다는 이 사실은 누구만 아느냐 하면 성령,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만 알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은 슬그머니 자기 목 부분을 만져보는 거예요. 미국의 경찰관이 어느 대목에서 신발로 밟았는지. 마귀가 그동안 나를 밟고 있었던 겁니다.
마귀가 그동안 나를 밟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자가 벌써 마귀로부터 풀려나온 사람이에요. 그 사람만이 마귀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마귀에 눌렸다는 말은 인간의 품위라든지 자질, 성격, 지위 그리고 착함과 선함, 그것이 마귀한테는 통하고 싶어도 통할 수 없는 아무 영향력 없는 짓이구나. 마귀야 물러가라, 마늘 던지고 십자가 던져 봐도 이것은 주의 성령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마귀에게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성령을 받아봐야 이것을 알죠.
그러니 얼마나 감사하겠어요. 억만금 주고도 살 수 없는 마귀한테서의 해방을 주께서 성령을 거저 주심으로써 해방되었으니 그때부터 우리는 철저하게 오로지 자기 일만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자기 일에만 충성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나는 뭘 해도 의미 없다는 사실, 이 사람만이 마귀를 대적할 수가 있습니다.
자, 그럼 그 다음에요. 시간 속에 침투했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연속적으로 있는데 이 시간을 끊어버려요. 끊어버리니까 역사가 과거로부터 계속 이어진다는 것은 거짓말, 구라였습니다. 역사는 사건의 연속이었지, 인간의 노력의 연속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인간들은 의미를 유지하기위해서라도 지금 존재의 의미를 주기 위해서라도 지금 내 인생의 의미를 주기 위해서라도 어제, 한 달 전과 지금을 억지로 잇는 거예요, 자꾸 강제로. 이을 수 없는데. 계속 잇고 싶은 거예요, 그냥. 그래야 나라는 덩치가 지금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을 했는지 그 가치가 빛이 나기 때문에 지금의 나를 부정하기 싫은 거예요.
‘지금 나는 어제 죽어야 되는데 주께서 살렸습니다.’ 라는 말을 하기 싫은 거예요. 그러면 나만의 고유 의미가 없잖아요. 그럼 내가 뭘 시도할 때 나의 기억과 습관은 나 잘난 맛에 하고 있는데 내가 애초부터 잘난 게 없다면 무슨 맛으로 일하겠습니까?
직장생활 하는 간부가 아침에 출근해서 모아놓고 “하.면. 된.다! 하.면. 된.다! 이길 수 있.다! 실적 올립시다. 파이팅! 밖에 나가세요, 전부 다. 코카콜라 오늘도 200만원 파세요. 계약 맺고 오세요.” 이렇게 해서 보내거든요. 코카콜라 영업사원이 자살하고 그러잖아요, 실적 못 올려가지고. 안 그러면 무슨 정수기 파는 것, 영업사원들이 다른 기술 없으니까 그거라도 해야 될 게 아니겠습니까. 하자. 파이팅. 이러고 있는데 어떤 사원이 딱 들어와서 “여기가 어디에요?” 이러면 갑자기 과거와 연결이 안 되죠. 연결될 수가 없죠. 물론 그런 소리는 불신자한테 할 필요도 없고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역사를 강제로 이을 때 여기에 주인공이 들어와 있다는 거예요. 이게 짐승이죠. 이건 어려운 건 아닙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 보면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그 다음에 잘 보세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불신자들이 또는 왼쪽에 있는 염소가 어디를 가느냐 하면, 그들을 벌하기 위한 곳은 없어요. 없고 누구의 사주를 받았고 악마로부터 결탁되었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오야봉, 그 대장을 처벌하기 위해서 만든 곳에 가요. 그게 “악마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천사죠, 반역자, 배신한 자, 데모한 자, “악마와 그 천사들을 위해서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거예요.
왜 이 말을 강조하느냐 하면 우리가 악마하고 싸우는 게 아니에요. 악마는 누구와 싸우느냐 하면 주님이 악마하고 싸우는데 그 대전쟁에 각자에 소속된 인간들이 동원되는 겁니다. 그런데 악마에 속한 인간은 악마의 싸움을 하는 게 아니고 자기 싸움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고 주님 쪽에 있는 사람은 그 착각이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인생 하루 사는 것은 결코 내 인생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하루 사는 것이 나의 일이 아니고 누구의 일이냐 하면 나의 주인 되시는 주님의 뜻이 있어서 나를 살게 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 게임 끝났어요. 게임 끝났다고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백부장이 그런 믿음을 가질 때 괜히 심술 나서 백부장보고 욕하고 하면 안돼요. 백부장은 서양 사람들이 좀 당황스러울 때 하는 표정 있잖아요, 어깨를 슬쩍 올리면서. 내가 뭐? 주님이 하라 했어. 왜 나보고 닦달 내? 나한테 책임 묻지 마, 책임 묻지 마. 난 몰라. 내 목숨 붙어 있는 것도 주님 뜻인데 내가 뭐 이것저것, 아이고 내가 생각해도 주제 넘는다. 난 몰라.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끝나는 거예요.
그런데 불신자에 속한 사람은, 악마에 속한 사람은 악착같이 자기 자신의 가치를 지키려고 합니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불신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권력’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권세입니다, 권세. 이 권세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이 나옵니다. ‘고난’이 나오는 거예요.
이 권세, 권력이라 할 때 세상에 많은 권세가 있지만 주님께서 십자가 사건을 일으킬 때 여기 필히 누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권력 단체, 권세가들이 예수님을 마중 나와 줘야 돼요. 본디오 빌라도부터 해서 그 당시 바리새인들, 마중을 나와야 돼요. 그런데 사실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본디오 빌라도, 마귀는 사실은 주님한테 유인당한 겁니다. 이용당한 거예요.
그들은 모든 권세를 악마의 권세로 보지 않고 인간이 결합했고 단합했고 인간이 지혜를 끄집어 낸, 끝까지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권세라고 우기고 싶었는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권세라면 나올 수 없는 초과적인 영적 힘을 주님에 의해서 끄집어내는 거예요. 주님에 의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나는 순수하게 같은 인간들끼리 동창회 한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 고등학교 동창생들을 만나는 것으로 보지만, 성도의 입장, 주님의 입장에서는 뭐냐 하면 마귀가 그들을 불러 모았다 또는 마귀가 거기에 권세로서 관여하고 있다는 것이 성도의 눈에는 보이죠.
지금 강의 내용이 뭐냐 하면 성도만이 악마를 포착할 수 있죠. 성도가 악마의 추격자죠. 그리고 지목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냥 평범한 동호회고 동창회죠. 너도 같은 고등학교 나왔으니까 참석해라. 참석할 수 있어요. 참석해서 보니까 성도의 눈에만 뭐가 비치느냐 하면 마귀가 그들을 주도하고 있고 마귀의 통솔을 받고 있다는 것이 성도의 눈에만 보이는 겁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의 모임 속에 반드시 안개처럼 악마의 권세와 권력이 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가 아니면 그게 안 보이죠. 쉽게 예를 들어서 성도가 오랜만에 동창생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교회 다니는지는 모르죠. 자기도 그냥 친구라고 만나가지고 카페에서 커피 마시며 30분 정도만 이야기해도 그 사람이 복음을 아는지 대번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 십자가 달리면서 무엇을 유도했습니까? 땅의 권세의 실체를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드러낸 거예요. 이 권세가 어디 가겠어요? 안 가죠. 그냥 먹구름처럼 계속 끼어 있잖아요. 그럼 동창생을 만났습니다 또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무슨 이야기 나옵니까? 세상 권세 이야기가 나온다고요. 자기는 그냥 정치 이야기하고 뭐 우리 사장님 좋은 사장님이라고 그 얘기하고 있는데 성도 입장에서는 네가 바로 예수 죽인 인간이다.
나도 전에 그 세계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 너무 잘 알지. 나도 저렇게 사는 게 인간 사는 거라고 생각하고 살았기 때문에 대번 확 파악이 되죠. 파악이 되면서 이야기하다보면, 30분 지나면 저쪽 불신자가 마귀의 권세가 있기 때문에 벌써 낌새를 느껴요. 너 이상한 교회 다니지? 뭐 선을 봐도 그렇고. 너 이상한 교회 다니지? 딱 낌새를 알아차립니다.
흔히 무당이 예수 믿는 사람을 알아본다는 가짜 뉴스 비슷한 게 있지만 성도가 아니고 불신자, 악마에 속한 사람은 반드시 자기의 발전과 혁신, 개혁, 나의 인생설계, 인간은 더 나아지고 진보한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그들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힘을 모아야 되고 힘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이 인간성이 좋아야 되고 겸손해야 되고 착하게 살고 바르게 살면 많은 사람이 너를 도와준다는 그런 충성어린 조언까지 막 듣게 돼요. 듣게 됩니다.
그럼 이 사람과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을까요, 곧 깨지겠습니까? 여지없이 깨지죠. 그러니까 불신자 남편이나 불신자 아내하고 사는 집이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그쪽에서 헤어지자는 말하기 전까지는 헤어지지 말라고 할 정도로 사도바울은 위로하는 것인지 약 올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혼자 사는 게 낫다는 이야기를, 위로처럼 들리지는 않는데 이상하게 ‘그냥 혼인에 매이지 말고 주를 위해서 혼자 사는 게 낫다’ 라는 너무 가혹한 말씀을 했어요.
이 전체를 가지고 ‘고난’이라고 하는 겁니다. 주님이 당했던 그 권세 세계 안에서 성도는 어디를 가더라도 고난 받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봅시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이걸 공통체험이라 했죠. 예수님과 동일한 체험을 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구절이 나와요. 제가 말씀드리면 여러분들이 아마 기억날 겁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같이 버려두지 아니한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18절에 보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이게 동일체험, 예수님이 갖고 있던 고난을 그대로 체험하는 것이지, 지 돈벌이하다가 사기 당한 것은 고난 아닙니다, 그건 고생이지. 고난이라 하는 것은 반드시 악마의 세력과 권세가 발각되는 그런 상황을 두고 고난이라고 해요. 그냥 내가 고생한 게 고난이 아니고 ‘거봐, 세상은 그럴 줄 알았어. 세상 별 거 있어? 예수님 죽였던 그 성깔 어디 가겠어?’ 가 눈에 띄고 그게 느껴질 때 ‘주여, 감사합니다’ 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지 잘난 체하고 자기 의 자랑하고 지 과거 자랑할 때 너도 좀 자랑해봐라. 뭘 자랑해? 개뿔도 내가 무의미한데. 하는 것마다 죄인데 뭘 자랑해. 그럼 저쪽에서 그런 이야기하면 우리 사이에 대화가 안 되지. 굳이 대화가 되어야 될 이유가 있나? 너는 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사는 그게 부부야. 알려줘? 한 수 가르쳐 줘? 자식은 그냥 사는 거야.
아까 안양강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자식을 자식이라 생각하지 말고 그냥 친구라 생각하세요. 괜히 자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쓸데없는 기대감 때문에 실망이 더 큽니다. 웬 친구하나 생겼다 하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떤 분은 저한테 그런 이야기했어요. 내가 딸하고 날마다 통화하는데 세상에 이렇게 좋은 신앙적 친구가 또 있는지 몰랐다는 거예요. 자식이 신앙적 친구에요. 엄마가 가르친 게 아니고 본인이 삶 속에서 느꼈던 그거나 엄마가 느끼는 경우나 어떻게 그리 똑같은지. 그럼 뭘 느꼈다는 말인가. 뭐가 똑같다는 말인가. 무슨 일이라도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의미 없음을, 그 기쁜 체험을 놀랍게도 엄마나 딸이나 같이 느낀다는 겁니다. 세상에, 그런 모녀지간도 있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19절에 보면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무슨 뜻입니까?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주님께 속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런 뜻이에요. “세상에 속했으면 자기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여러분 세상의 미움을 받습니까? 안 받고 있죠. 세상의 힘을 얻기 위해 지금 분투노력하고 있는데 세상이 안 알아줄까봐 오히려 걱정이 늘어지고 세상이 나한테 돈 안줄까봐 걱정하고 있는데 무슨 미움을 받아요.
그러나 성령께서 말씀대로 진행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 말씀이 그대로 오게 되게 되면 그 순간 우리는 무(無)시간이 되어버려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하는 과거의 짓거리는 쓰레기통에 집어넣어버리면 우리 시간이 싹뚝 잘라져버리죠. 그러면 지금 이 순간~ 지금 여기에 마법의 시간이 주어지는 거예요.
이 순간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여기 있고 나는 그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껍데기, 아무 쓸모 짝도 없는 그냥 헝겊조각으로 주님의 바람이 나부끼는 대로 그냥 주께서 인도하는 대로 나풀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그게 얼마나 사도바울적인 삶입니까? 사도가 그런 길을 갔잖아요. 내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고. 이러한 인생이 여러분들 보기에 어떻습니까? 무겁습니까, 쉽습니까? 이게 가볍죠. 그러니까 역사를 인정하세요. 인정하시고 바깥에서 다른 말로 위에서 관찰하며 사세요. 역사를 관찰하면서.
그리고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성도의 행동은 뭘 해도 아예 죄가 되는 그런 지점을 떠나지 마세요. 그 자리가 성도의 자리입니다. 뭘 해도 죄가 되는 자리.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이 세상은 악마가 지배한다는 것이 유일하게 보이는 지점이라 그래요. 그들은 자기를 조작하고 위장하거든요. 자기가 잘났다고 이걸 자꾸 꾸미고 있어요.
그럼 우리는 안 꾸미나? 우리도 육신이 있으니 꾸미는데 꾸미되 이미 결론 나 있어요. 뭘 해도 나는 죄인이라고. 그런데 불신자들은 뭘 해도 비겁하고 구차한 변명, 맨날 변명과 핑계와 그래도 나는 아직 망가지지는 않았다고 우기고 아직은 나에게 뭔가 약간은 남아있다는 거예요.
언젠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죠. 주님이 가루를 만들어주니까 허겁지겁 떨어진 가루를 주워 와서 그것도 딴에 조합해가지고 자아, 셀프라고 떡하니 만들어 놨다가 또 성령이 때려 부수면 혼나다가 가루 몇 개 건져가지고 아이고 요게 바로 내 자식아, 이건 내 조각인데 하고 그것도 과거 기억에 준해서 그걸 또 조립하네.
자 이제 진짜 결론입니다. 성도는 역사 안에 있으면서 역사의 속성, 지 잘난 맛에 사는 속성에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십자가로 때려버리면 부서지기는 하지만 역사의 영향을 받아서 허겁지겁 또 자아를 구성해요. 그러면 성령께서 또 때리죠.
그게 역사 속에서 성도가 팔딱거리는 모습이에요. 이 특이성. 팔딱거릴 때마다 자기 인생의 그 특이성 또는 초과성, 내가 역사로서 인간으로서 해명될 수 없는 그 여분의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이 악마의 세계고 이 역사는 이미 망하는 세계, 죽음으로 지옥으로 치닫는 그런 세계인 것을 증명하는 증거물로서 성도를 아직도 이 땅에 떠나게 하지 않고 남겨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 없는 줄 알아야 될 텐데 우리는 항상 내 것 어떻게 지키고 키우느냐에 정신 팔려 있는 이 모습이 천하에 살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죄인 것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러한 모습이지만 이 모습을 통해서 악마가 이 세상을, 인간들을 어떻게 지배하고 그들이 어떻게 멸망하는지를 십자가를 근거해서 증거 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