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10a 부산강의 : [시편]38(23편)-양의 출처
20210510a 부산강의 : [시편]38(23편)-양의 출처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시편 23편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 목자 나오지요. 목자가 나온다는 말은 여기에 반대편에 점선으로 뭐가 있느냐? 양이 생겨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목자가 없으면 양이 생겨나지 않지요. 상당히 시편 23편은 우리 보기에는 목가적이다, 평화롭다는 그런 인상을 주잖아요. 그런데 목가적이지 않고 살벌해요. 대단히 살벌합니다. 양의 출현이.
왜 그러냐 하면 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양은 없습니다. 성경에서의 개념은, 성경에 여러 가지 개념이 있잖아요. 천국이고 율법이고 양이고 목자고 이 모든 개념은 나와 성경개념과 연결시킬 때에 나가 박살나야 돼요. 내가 기대하는 개념을 성경에서 끄집어내면 이건 반칙입니다. 이건 백 프로 엉터리에요.
성경에서 목자가 나오고 양이 등장하니까 인간들은 자기 자신을 양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을 또는 하나님을 목자로 주장하고 싶은 거예요. 이래서 망한 나라가 무슨 나라냐 하면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이 예수님 당시에 그러니까 목자가 등장했던 예수님 당시에 뭐가 돼있냐 하면 이들의 권세는 무슨 권세가 되느냐? 뱀의 권세가 돼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은 뭐로 보느냐 하면 양으로 보고 자기를 지켜주는 하나님을 뭐로 이해하느냐 하면 시편 23편에 나오는 목자로 이해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에 나오는 개념을 나 개념과 직결시킨 것이 이게 화근이 되고 문제가 되는 겁니다. 이렇게 직결시킬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가 알다시피 약속이고, 약속은 어떤 전제가 있는데 그 전제가 뭐냐 하면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의 전제가 되는 겁니다. 거기 보면 뱀 나오고 여자의 후손 나오거든요. 여자의 후손도 인간들 입장에서는 없고요, 물론 뱀도 없어요. 인간에게선 인간밖에 없어요. 인간들은 인간만 만납니다. 인간만 만나도록 서로서로 납득이 되고 이해돼요. 인간은 인간과 사귀는 것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지 인간 외에 귀신 만나는 것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국가라는 것, 사회라는 것, 공동체라는 것, 가정이라는 것은 전부 다 조사해보면, 조사할 것도 없이 딱 보기만 하면 전부 다 인간 대 인간의 쪽수에요. 숫자란 말이죠. “식구 몇 식구에요?” “네 식구.” 쪽수가 돼요. 쪽수가 된다는 말은, 어려운 말로 카운트가 되는 대상이다, 헤아림이 되는 대상이에요. “집에 식구 몇입니까?” “네 명입니다.” “아빠, 엄마 말고 또 누구 있습니까?” “고양이 한 마리와 개 한 마리.”
이렇게 카운트가 된다는 것은 비록 대상이 고양이고 개라도 내가 카운트하겠다는 것은 내가 납득이 되고 이해되는 내 식구 안에 바운더리boundary 안에, 범주 안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살고 있고 정당하고 살만한 가치를 지니고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방식, 이 방식을 아주 공고하죠. 아주 굉장히 영어로 하면 concrete, 단단해하는 거예요.
단단하니까 뭐가 없는 거예요? 나가 우선이니까 뭐가 없는 겁니까?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이런 게 없는 겁니다. 물론 양이란 것도 없고 목자도 없어요. 그건 내가 나의 공고함, 나 자신을 단단히 하기 위해서 성경에서 차용하고 빌려오고 가져온 겁니다. 뒤에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설명할게요.
성경에서 나오는 개념, 오늘 시편 23편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 그 대목이에요. 성경에서의 개념은 나라는 개념과 연결이 안 된다는 이야기했습니다. 목자, 양 개념 우리 인간에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기를 양이라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고요.
자, 그렇다면 목자, 양이란 개념은 어디서 나오는가? 약속에서 나와요. 약속에서 목자 개념 나오고 양 개념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걸 반칙해서 나로부터 목자 개념을 억지로 연결시키지 마세요. 나는 양이고 주님은 목자라고 그렇게 우기지 마세요. 본인이 뭐 김 양, 최 양입니까? 양 아니에요. 성경에서 양이라 하는 것은 살벌합니다. 성경에서 양은 뱀에게 상처받아야 양이 돼요.
뱀에게 상처받지 않는 양은 양이 아닙니다. 양 되려고 상처받을 수도 없어요. 왜냐하면 뱀이라는 이 출현, 등장은 여자의 후손의 경우에만 출현하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관여할 수 없어요. 세상에 보면 그런 영화들 많잖아요. 귀신아 나오라고. 귀신은 인간과 싸울 대상도 아닙니다. 자기 부하와 왜 싸웁니까? 자기 사람인데요. 바둑 9단인 줄 모르고 바둑 15급이 나랑 한 판 붙읍시다, 하면 바쁘니까 그냥 가세요. 상대할 가치도 없는 걸 왜 해요.
뱀은 하나님과 상대합니다. 욥기에 나오지요. 스가랴에도 나오지요. 뱀은 하나님께 직고합니다. 여호수아 더럽다고. 또는 욥이 하나님 믿는 것은 받아 챙긴 게 있기 때문에 믿는다고 항상 마귀는 하나님과 상대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께서 양을 생산한다면 그때부터 양은 뱀의 노림수가 돼버려요.
양은 없어야 되거든요. 만약에 양이 이 땅에 생겨나버리면 이 땅에 목자가 등장해버려요. 목자가 기능이 뭐냐 하면 마태복음 25장 33절에 나옵니다. 목자가 기능이 뭐냐 하면 모든 것을 자기 심판대 앞에 두고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마에 속한 인간들은 염소에 해당되거든요.
그러니 본인들이 염소가 안 되기 위한 조건은 뭐냐? 목자를 제거해버리면 되는 거예요. 심판주를 없애버리면 자기가 염소가 안 되잖아요. 염소가 아니고 염소와 양의 구분 자체가 소실되니까 없으니까 어쨌든 간에 이 악마는 성경에 나오는 양을 나 자신과 결부하도록 그냥 방치해버리는 거예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액자 해서 예수 믿는 사람 집의 현관에 붙여놓거든요. 그것 몇 만원 하거든요. 이사할 때 선물로 받고. 액자에 여호와는 나의 목사시니 부족함이 없다, 이 말이에요.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은 그건 굉장히 중요한 대목 아닙니까. 사업하는 사람들이라든지 영업사원들한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시작은 미약은 나중은 창대하리라, 이런 구절들 표구사나 기독교서점에서 많이 팔잖아요. 중요한 것은 본인이 중요하기 때문에 본인이 깨진다든지 상처받는 것을 굉장히 거부합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여기 뱀이 여자의 후손과의 관계에서 뭐가 발생되는가? 상처가 발생됩니다. 이 상처에서 양이 나와요. 그러니까 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은 없어요. 액자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백날 그려도 소용없습니다. 그것 안 먹힙니다. 상처에서 양이 나왔기 때문에 목자가 가진 그 상처와 공히 공통된 상처를 가졌을 경우에만 그 사람이 양이에요. 그 사람에게 주님의 적이 곧 양의 적이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21장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와서 이런 말씀하시죠. 베드로야 저 사람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이야기를 했죠. 세 번 이야기하면서 항상 세 번 질문할 때마다 끝자리에 뭐가 있느냐 하면, “내 양을 먹이라”라는 겁니다. 이 말은 양 중에서 목자가 나와요. 양 중에서 목자가 나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목자이면서도 이 땅에서는 상처받은 양으로 먼저 오는 절차와 과정을 예수님의 자기 일대기에 담아버린 거예요.
왜 그랬느냐? 그래야 뱀의 정체가 노출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야 목자가 양과 염소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게 됩니다. 당한 게 있어야 보복이 성립되잖아요. 당한 게 있어야. 평생토록 아무 일없이 직장생활 잘하고 퇴직까지 했는데 거 뭐 양이 있겠어요. 연금 받고 사시는데. 뭔가 인생을 살면서 지독하게 설움 받는다든지 당한 구석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같은 인간에게 치인 게 있어야 돼요.
사람들과 교체가 되려면 내가 사람인데 양은 없거든요. 양과 목자는 없어요. 그런데 사람은 없어요. 있음이 없음으로 가려면 여기에 교체되는 transformer라 하지요. 변압기. 교체되는 장치가 시스템이 가동돼야 됩니다. 그 시스템을 이스라엘 초반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유월절의 어린양이라 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5장 6절에 보면 이 어린양을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일찍 죽음을 당한 어린양”이에요. ‘일찍’이란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미리’, 미리 죽음을 당한 어린양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있음이 계속 유지가 되는 겁니다. 양은 없는 거고 인간은 버젓이 우리는 살아 있잖아요. 살아 있는 인간은 성경이라는 약속세계 속에 들어가질 못해요.
그렇다면 성경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게 전부 다 남의 말이에요. 우리한테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에요. 우리가 양도 아닌데 목자가 의미가 없지요. 그래서 다시 설명하면 목자의 기능은 이 땅을 둘로 분류를 시키는 겁니다. 하나는 염소, 하나는 양. 분류 작업이 바로 심판 작업이고, 이 분류 작업의 근거는 여자의 후손 메시아가 발뒤꿈치가 물렸다는 겁니다. 물린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과 동일한 상처를 갖고 있는 양은, 나 양이다, 할 일 없다가 아니라 주님과 동일한 사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그 사명이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양한테는 뱀과 전갈을 그 다음에 어떻게 한다고 했어요? 밟지요. 그러니까 이게 내가 이런 예를 몇 번 들어서 지겹기도 하겠지만 또 이야기하겠습니다. 미국의 어떤 도시에서 백인 경찰이 마약한 흑인을 모가지를 5분 동안 밟았잖아요. 그래서 흑인 폭동 났지요. 그 모습, 그러한 밟는 권세를 주는 거예요. 일종에 양이 이 땅에 경찰관 역할 하는 거예요.
어딜 마약을 하고 도둑질해서 차 트렁크 조사하니까 마약 나왔단 말이죠. 이런 범죄자는 용서가 안 돼. 꽉 밟았지요. 5분 동안. 살려달라고 하는 거예요. 이 정도하면 내 입장에서 살 것 같아, 죽일 생각 없고 그냥 살려달라고 해서 발 떼보니까 죽었어. 바로 그러한 기능을 양이 하는 거예요. 뱀과 전갈을.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하기를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쪽수 전쟁이 아니에요. 우리 편 몇 명인지 이게 중요하지 않아요. 공중 권세 잡은 영들과의 싸움이다. 그러면 우리에게 무기가 있어야 되잖아요. 무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나 양 공히 무기가 있어요. 무기는 이겁니다. 없음이에요. 공백. 아무 것도 없다는 의식이 무기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걸 영어로 하면 nothing 난 아무 것도 아니다가 유일한 무기에요. 이걸 사도 바울 편지에 보면 나는 죄인이다. 이게 무기가 되는 겁니다. 왜? 모든 인간은 이 영토에 이 영역에 들어올 수 없어요. 인간은 잘난 맛에 살아가잖아요.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것을 로마서 10장에선 자기 의로 살아간다. 같은 말이에요. 모든 인간은 자기 의로 살아가요. 존재감이 거기서 나오니까.
여러분 우리 자신을 알아야 돼요. 우리 자신은 어떻게 구성돼있냐 하면 이걸로 구성돼있습니다. 날 무시하지 말라가 토대가 되어서 나오는 것은 뭐냐 하면 승부욕이에요. 오직 승부욕 하나 외에는 없습니다. 아무리 순해빠진 인간도 건드리면 와락 달려들지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양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어떤 특징이냐 하면 순종이란 게 있어요. 이걸 토속적으로 하면 배알도 없어요. 자존심도 없고 빙신인가, 바보야.
독자적으로 나는 이것 하나 유지하면서 이 맛에 살아간다는 게 없어요. 누가? 양은. 그래서 양은 없어요. 이 세상에 양이 없다니까요. 양이 없으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뭐로 하냐 하면 계속해서 우리가 돌아서면 인간존재, 날 무시하지 말라, 승부욕 이것을 성령이 개입해버리면 이게 뭐냐 하면 사건이 개입하면 일시적으로 뭐가 되느냐 하면 양이 돼버려요. 순한 양이 된다고요.
그래서 악마를 누르는 양의 기능을 악마의 모가지를 밟는 기능을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모가지 밟는 경찰관을 주님이 우리 모가지를 밟아버려요. 그러면 이것은 내가 승부욕, 내가 저 악마를 이기고자 하는 그 생각이 악마적 사고방식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겁니다. 내가 누굴 이기고 지고 이게 주의 일이 갑자기 내 쪽에 와서 내가 존재해버리면 주의 일이 안 되고 누구 일이 되냐 하면 나의 자존심과 관련된 일이 돼버려요. 자존심은 소유, 쪽수 이런 것이 막 발생됩니다. 남한테 안 지려고 안 밀리려고.
그래서 베드로전서 5장에 보면 베드로에게 이야기하기를 목자장이 올 때 너는 내 양을 칠 때 충성된다는 소릴 듣는다. 겸손히 하라. 다시 요한복음 21장 이야기에 돌아가서 너는 이 사람보다 더 사랑하느냐,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저는 모르겠고요. 왜냐하면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신임할 수 없어요. 언제 후다닥 지금 상황에서는 예수님 사랑하지만 어떤 다른 상황에서는 자기가 장담을 못해요.
주께서 사랑하신다는 데, 사랑이 뭔지 알아야 돼요. 사랑이란 자세히 보는 것,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들 다 해보셨으니까 잘 알겠지요. 자세히 보는 것. 앞에 뭐가 있어요. 자기 것을 자세히 보는 게 사랑입니다. 이게 성경에 보면 아가에 나오지요. 아가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조목조목 다 따져서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름답고 흐흠 냄새도 맡아요. 무슨 이런 향기가 나느냐, 도대체 화장품 뭘 발랐어요? 조목조목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그렇게 살펴보는 거예요. 자기 거니까.
그런데 거기에 술람미 여인도 솔로몬과 똑같이 하는 거예요. 개도 아닌데 맡아가면서 이렇게 향기로울 수가. 그러니까 아가서에 나와서 서로가 탐색의 대상이 되면서 그러한 아름다움과 향기로움의 원천을 뭐로 보느냐 하면 사랑이라 보고요. 그 사랑은 뭐보다 크냐 하면 이게 하나님의 진노, 죽음보다 세다고 나와 있어요. 아가서에요.
그러니까 이거는 둘이 서로 사랑하는 순간 죽음의 공포가 날아가 버린 겁니다. 죽음의 공포가 날아가 버렸다는 말은 그 원천이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은 뭐보다 세다 했습니까? 죽음보다 세지요. 마치 질투와 같다 했는데 죽음보다 세다 이 말이죠. 죽음보다 세다면 사랑을 확인하는 방법은 무엇과 맞닥뜨리고 무엇과 만나야 돼요? 늘 죽음과 만나야 돼요.
그래서 죽음의 세계가 바로 오늘날 인간들이 말하는 이 세상입니다. 죽음의 세계. 다 죽는다는 그것도 맞지만 다 죽는 정도가 아니고 죽음으로 협박하고 겁박하는 세계, 죽음으로 우리를 밀어붙이는 그 세계 속에 주님이 오신 거예요. 유월절 어린양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은 그냥 양 한 마리 존재한다고 카운트된다고 어린양이 되는 게 아니에요. 어린양이 되려면 죽음을 당해야 어린양이 돼요.
그러면 여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마련돼 있어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애굽의 권세잖아요. 애굽의 권세가 바로 오늘날 이 세상이잖아요.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그러면 양도 이 땅은 그냥 다녀가는 처지에 있어요. 왔다가 다녀가는 거예요. 오뎅 뜨거운 물에 빼서 먹는 거예요. 주님께서 자기 양식이니까 집어넣었다가.
안 집어넣으면 맛이 없어요. 푹 익어야 돼요. 주님이 흘리신 그 피 속에 우리가 푹 익어줘야 돼요. 피가 스펀지처럼 우리의 속속들이 스며들어 배겨야 돼요. 이게 무기에요. 전신갑주라니까. 악마를 이기는 전신갑주는 해결했다는 겁니다.
악마가 우리에게 겁박을 주기 위해서 죽기 무섭지. 내 말 들어. 네가 소멸하게 되면 하나님이고 예수고 소용없어. 너는 너 자체를 지탱해야 돼. 그게 너한테 최종적인 의미야, 라고 그렇게 거짓말했던 이 세상에서 나 죽을래. 나 그냥 다녀갈래, 라는 식으로 올 때 고린도전서 15장의 말씀처럼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표적지를 잃어버린 거예요.
사격장에서 돈 주고 사격하려하니까 바람이 불어서 표적이 날아가 버렸어요. 쏠 게 없어요. 그래서 양은 공백입니다. 양은 빈자리에요. 나라는 육신은 멀쩡하게 있지만 표적지가 뭐냐 하면 이미 죽은 자라는 표적지를 갖자 붙이는 겁니다. 표적지를 붙이면 세상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각자 자기 의로 장착돼있지요.
그러면 나는 이러한 의로움이 있고 잘남이 있는데 너는 각자 갖고 있는 잘남과 의로움은 어떤 게 있는가, 내놓고 누가 더 잘났고 누가 더 의로운지 선한지 한 번 배를battle 해보자고 나오지요. 그런데 율법이 쏘는 것은 사망이란 말이죠. 법으로 따지는 거예요. 누가 잘났는지 누가 법을 많이 지키고 누가 성경대로 사는지 해보자는 거예요. 개뿔도 없어요.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가요. 없어요. 강도가 천국 간다고요.
거기에 대한 무기는 뭐냐? 없다. 여기에 대한 유명한 사자성어? “영구 없다” 영구 없다, 까꿍. 없어요. 사람은 있지만 내세울 게 없다니까. “네가 이렇게 하면 죽어. 이렇게 하면 너는 사람한테 비난받는 거야. 이러면 이 세상에 퇴출이야.” 라고 협박을 하는데 협박이 먹힐 사람한테나 먹히지 먹히질 않는 거예요. 내세울 게 것은 오직 십자가 피만 자랑하는데 그 앞에 먹힐 게 뭐가 있어요, 먹힐 것이.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멋있게 이기는 것은 나중 문제고요. 이러한 마귀로부터의 다툼과 충돌은 늘 주님 앞에서 양 되는 우리 안에서 주님과 세상과의 충돌현상이 매일같이 우리 안에서 벌어져야 돼요. 매일같이. 그래서 어느 강의에서 그랬지요. 매일우유라고요. 아침 되면 늘 현관 앞에 배달되는 우유 있잖아요.
매일같이 주님께서 현관 앞에 내 마음 앞에다 예수님의 유월절로 인한 피를 배달시키는 겁니다. 오늘도 세상에 나갈 때 이 마음 가지고 가라고. 배달 안 되면 나의 양됨으로 무가 삼으려 하는 거예요. 덤벼라, 이런 식으로. 이건 승부욕이죠. 나 양인데 덤벼라. 아무나 붙자. 이단들아 나와라. 여호와증인, 신천지 나와라.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만 신천지 나오라 하니까 주님께서 손가락으로 우리 대가리 밀어요. “니나 잘하세요, 니나. 니가 이단인데 뭘 또 이단이야. 니나 잘하세요, 니나. 신천지 걱정하지 말고. 왜 괜찮은 사람 따로 모아서 새로운 영토 만들라고? 우리는 다 거듭난 사람이다. 그것 만들려했지? 니나 잘하세요.”
자기 것으로 인하여 주께서 자세히 보는 거예요. 그것을 위해서 성경에 이런 아주 결정적 단어가 나오는데 우리는 그 단어를 잘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무슨 단어냐 하면 “친히” ‘친히’란 말로 인하여 양은 철저하게 수동적 존재입니다. 능동이 없어요. 친히는 누구 담당이냐 하면 주님은 주님 담당이에요. 여호수아에 나오는데 한 번 볼까요. 여호수아 24장 17절 누가 읽어보세요.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됐습니다. 여긴 ‘친히’란 단어는 안 나오지만 어떤 구절에 보면 이 단어가 나오고요. 그리고 성경의 많은 대목에서 많이 나와요.
이것은 시작을 누가 개시했느냐 하면 주님이 개시한 거예요. 왜? 양이 없으니까. 그리고 주님이 목자가 되려면 아무도 주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야 돼요. 그래야 주도권을 베드로가 못 뒤고 사도 요한 쥘 수가 없어요. 친히 되시는 목자가 쥐는 거예요. 철저하게 양은 목자에 종속돼야 돼요. 수동적으로.
그래서 베드로도 요한도 목자를 치니 그 다음에 뭡니까?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지잖아요. 그러니까 양이 자기 자신을 내세울 게 없는 이유가 뭐냐? 양의 주특기가 뭐냐 하면 흩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이사야 53장에 보면 양의 특기, 양이 하는 본성이 뭐냐 하면 제 갈 길을 알지 못하는 것.
제 갈 길을 알지 못하니까 기다렸다는 듯이 창녀처럼 온 이리 떼들은 양이 오는 길목을 기다려서 전부 다 뜯어먹고 잡아먹기 위해서 길목마다 자기 의로움이라든지 소유를 장려시키고 그걸 키워주겠다는 상품을 걸고, 쉽게 말해서 복 받겠다. 쉬운 말로 하겠습니다. 복 받게 해줄게요. 천당 가게 해줄게요. 그런 식으로 길목을 지켜서 사람들을 유인하는 거죠. 유인하는 사람도 나쁘지만 문제는 유인당하는 사람도 나빠요.
뭐 때문에 그래요? 소유성 때문에. 인간의 소유성, 내 것 있다. 내 것이 있어서 주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사랑이 자기 사랑밖에 없으니까 누가 누구를 살핍니까? 내가 내 것을 자세히 살피면서 그것 사수하는 데 일생의 모든 정력을 거기다 다 소비하는 거예요. 내 것. 특히 연세 많은 분은 내 연금. 아 참, 연금이 주님이에요. 나 이것 없이 못 산다, 죽는다는.
따라서 지금까지 한 강의의 흐름으로 봐서 양과 그리고 목자의 등장에 있어서 뱀의 역할은 필수적이다. 뱀이 원하는 세상은 뱀이 발견되지 않는 세상을 원해요. 뱀의 역할이 전혀 없는 세상. 그러니까 이게 목가적이고 평화롭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시편 23편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굉장히 정갈하고 안정돼있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갑자기 위로가 확 밀려오고 치열한 전쟁이란 생각은 없고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느낌, 사랑 못 줘서 환장했다는 느낌, 그럼 나는 그냥 나의 것을 견지하면 그게 만사 오케이란 느낌을 팍 줘요. 시편 23편을 좀 더 나가보면 거기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오지요.
이것을 시편 23편을 누구 입을 통해서 이 예언이 나오게 했습니까? 다윗이죠. 그래서 뱀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기 때문에 다윗시대의 뱀은, 뱀은 하나지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윗에게 뭘 주느냐 하면 상처를 줍니다. 여기서 오늘 양의 핵심이 나옵니다. 양이 양 되기 전에는 보통 인간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개입해버리면 양은 아무 연고 없이 이유도 모르는 채, 참 이게 중요한데요. 이게 하나의 복음이고 영적 무기입니다.
“이유도 모르는 채” 이유를 몰라요. 내가 왜 인생 이렇게 살아야 되지, 이유를 아무리 찾아내도, “저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난 왜 이렇게 살아야 돼. 왜 내 몸 아파야 되고 저 사람은 멀쩡하고.” 그 이유를 인간의 입장에선 알아낼 재간이 없어요. 이걸 만약에 알려주게 되면 분명히 수상한 사람이에요.
내가 왜 사는지 이런 것은 어떤 경우냐 하면 상처를 받을 때 비로소 자기를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거든요. 그런데 내가 왜 상처받아야 되느냐, 그 이유는 없어요. 마치 욥이 고난 받을 때 욥이 그렇게 알고 있는 신학지식과 모든 상식과 교양과 품성과 품격을 다 고안해서 하나 얻고자 하는 것은, “주님이여, 제가 왜 고난 받아야 됩니까?” 문제만 던지지요. 전혀 해답은 없어요.
이런 것은 김호중 씨가 불렀던 란 노래 가사에 나옵니다. 나는 상대방에게 정성을 다했는데 상대는 나에게 뭐만 준다고 했습니까? 상처만 주네. 내가 이 세상을 잘 몰랐나 보다. 나는 진심을 다했는데 상처의 반대말이 그 사람한테는 뭐가 돼요? 진심을 다하면 뭐가 안 온다? 설마 상처가 오겠냐고 생각한 게 착각이었습니다. 진심을 다하면 상처할 때 상처가 이게 내가 몰랐던 정답이에요. 이게 진심이에요. 이게 진리에요.
우리는 상처받아야 됩니다. 왜? 상처를 받고 거기에 대해서 왜 상처받지 않고 의문과 질문이 나오는 순간 우리는 처음부터 죄인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거든요. 나는 죄인인 줄 모르고 최선을 다하여 그나마도 남보다는 더 성실하게 바르게 살려고 애썼는데 이게 뭐가 죄가 되느냐고 버텼지만 주님이 뱀에게 물린 그 상처를 공동체험으로 우리에게 줄 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 안으로 초청받은 것을 축하드립니다. congratulation! 축하드립니다.
질문에 내가 뭐뭐 라고 시작했던 질문, 나는 무엇이다, 나는 뭐가 될까요? 했던 것은 이제는 이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겁니다. “상처는 나에게 어떤 식으로 장착되고 나의 본질입니까?” 질문의 주어가 상처가 돼야 돼요. “주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나를 활용하고 어떻게 다루십니까?” 이게 정답이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사랑을 언급할 때 나는 나를 모르니까 아시는 분이 주님이, 자기가 고기 잡으러 갔잖아요, 주님 부활하고 난 뒤에. 찾아왔다는 말은 뭐예요? 주님이 요한복음 13장인가 자기 사람을 끝까지 사랑한다 했거든요. 사랑은 자기 것을 자세히 살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도권가 베드로가 주님께 넘겨버려요. 사랑은 주님 쪽에서 했기 때문에 주님이 아실 거예요, 하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내 양을 먹이라.”
양을 먹이는 방법이 뭐냐? “네 뜻대로 되지 않는 코스로 인생을 마감할 것이다. 네가 띠 띠고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간다는 것은, 이 말이 주님의 길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 베드로가 양을 먹이는 목자의 기능을 하려면, 목자의 기능입니다. 목자는 주님 밖에 없어요. 목자의 기능을 할 때는 항상 누구하고만 의논해야 된다? 사랑하시는 분만 생각해야 돼요.
근데 베드로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원치 않는다 하니까 살짝 손해 본 느낌 들어서 옆에 보니까 누가 있느냐 하면 사도 요한이 있거든요. “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저 사람이 오든 말든 니가 왜 신경 쓰느냐? 너의 책임자는 나야, 나. 나라고.” 사도 요한과 견주거나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말란 말이죠. 나라는 거예요, 나.
이 사상은 이 생각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비슷한 이야기했지요. 고넬료 파가 어떻고 베드로 파가 어떻고 바울 파, 예수 파 있는데 사도 바울은 분명히 했어요.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 졌느냐?”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말은 목자는 따로 있기 때문에 나는 같은 양의 입장이기 때문에 양이 양을 위해서 십자가 질 수 없다는 조건 하에서 양이 되고 목자가 돼야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나는 너를 구원하는데 있어서 어떤 기여가 전혀 없었다는 조간 하에 목자가 돼요. 한시적으로. 나 당신을 위해서 심방 가고 새벽마다 얼마나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얼마나 고생하고 당신 교회 안 나올까봐 열 번 더 찾아간 것 아시지요. 당신 자식 공납금 없을 때 공납금 대주고. 이래도 교회 안 나오고 다른 교회 갑니까, 이런 의식 이건 뭐 장사지요, 장사. 자기 존재감 드러내기 위해서 주의 종 맞는지 확인차원에서 사업한 거예요. 사업 벌인 거예요.
출발점을 내가 또는 나는 무엇이다가 되면 이 자체가 안 된다니까요. 나는 주의 종이다, 나는 목자다, 나는 양 이 자체가 성경자체의 개념과는 연결이 안 돼요. 상처가 나를 어떻게 사용하고 이용하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지요. 제자는 주님한테 농락당하는 거예요. 가룟 유다도.
가룟 유다 보고 하시는 말씀이,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그럼 왜 태어나게 하셨어요? 본인이 태어나게 해놓고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했다? 그럼 그 입장에선 너무 억울한 거예요. 주님이 가룟 유다 있으면 억울하냐, 억울해? 피조물 주제에 뭘. 피조물 주제는 자기를 억울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러한 권한 자격이 없어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거둬가는 것도 하나님인데 우리가 악마한테 교육을 너무 잘 받아서 따지는 것만 교육받은 거예요.
우리는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까 최선만 생각하는 거예요. 최선을 다했는데 뭔가 얻어내는 국물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교육받은 것이 그 사고방식이에요. 얻어걸린 게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주께서 “그것 가지고 뭐 할래?” “독자적으로 살렵니다.” 그게 바로 마귀에요. 독자적으로 사는 것. 나는 나 있음 그 자체, 그걸 증명하기 위해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든 어디든 세상이든 안 위험한 곳이 없어요. 다 시험의 장소에요. 테스트 받는 장소입니다.
자, 이번에 생각할 것은 뭐냐? 뱀의 역할이에요. 뱀의 역할은 무는 역할이에요. 이것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창세기 49장 17절 보게 되면,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는 거죠. 무는데 의도가 있어요. 물어서 땅과 멀어진 존재를 땅과 밀접한 존재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쉬운 예를 진화론 과학이죠. 영적 것을 뭐로 해석하느냐 하면 영적 같은 소리하고 있네. 모든 것을 과학으로 다 풀어버리는 거예요.
땅에 딱 밀착된, 저는 그걸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스티커에요. 잘 안 떨어져. 스티커 또는 바퀴벌레. 이걸 어느 강의에서 인간은 표면적 존재다. 만날 하는 게 기어다는 것밖에 안 해요. 표면을 기어 다녀요. 캐나다 이민 갈까? 한국에 기어 다니다가 캐나다 거기 가서 기고 있는 거예요. 온갖 허드렛일 다하면서. 여기 미국 다녀온 사람 없으니 마음 놓고 이야기한다만 맨 거기 가서 기는 거예요. 표면적 존재에요.
너는 땅을 벗어나서 못 살아. 땅이 너를 인간으로 대우해주는 거야. 만약에 땅이 대우 안 하면 대우할 데가 없어. 그게 뭐냐 하면 양의 배후에는, 양의 배후 또는 양은 뱀과 더불어 나타나니까 목자, 양의 배후, 뱀의 배후는 이게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이것이 바로 영토적으로 해석해야 되는 거예요.
개인의 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고 네 자리, 원래 있던 자리와 자리의 지형적 충돌이에요. 그래서 지진이 일어나는 거예요. 대륙판과 해양판이 지구 내부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맨틀 위에서 충돌이 일어나면 땅이 갈라지잖아요. 그래서 양은 충돌에서 나오는 거예요. 목자도 충돌에서 나오는 거예요. 충돌이 없으면 그거는 너무 목가적이에요.
그래서 다윗은 끊임없이 사울로부터 뭘 당합니까? 애매한 이유도 없는 충돌당하는 겁니다. 다윗이 사울 죽이려고 따라 다닌 게 아니에요. 반대에요. 사울은 이유가 없어요. 사울은 이상한 사람이에요. 다윗 만나면 미안하다 하고 헤어지면 죽이고. 연예인 씹는 유튜버 사람들 같아. 당사자한테 미안하다 하고 돌아서서 또 쳐서 이런 인간이었다, 인간도 아니었다. 만나서 미안합니다, 하고 이게 뭐예요?
자, 가인도 마찬가지고 아벨도 마찬가지로 어릴 때부터 정이 없고 싸웠다. 이런 것 없어요. 그냥 가인과 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지요. 형이 먼저 하나님께 제사 드렸는데 안 받고 그 다음에 동생 제사는 받았잖아요. 그것 때문에 동생 입장에서는 아무 연고도 없이 죽었어요.
그러니까 어제 설교한 것처럼 인간에게 죽음 세계라 하는 것은 목숨 붙어있는 것과 없는 세계를 대등한 대립세계로 보는 거예요. 하지만 죽음이 삶의 일부고 삶이 죽음의 일부가 된다는 식으로 세뇌하고 가르치고 그걸 납득시키는 세계, 이게 바로 과학의 세계고 인간 초등학문의 세계, 철학의 세계입니다. 둘 다 표면이에요.
중첩되지 않아요. 지금 함께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중첩된 현실관이 없어요. 살다 죽으면 천당 가겠지. 아니에요. 이미 하늘나라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죽어도 지옥 갑니다. 이미 성령 안에 있는 사람, 그러니까 하늘나라 미리 와있지 아니하면 가도 소용없어요.
10분 쉬어야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