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10415B슥6장1절(징후적 해석)-이 근호 목사
안양20210415B슥6장1절(징후적 해석)-이 근호 목사
자, 이 문장을 제가 쓸 테니까 이게 왜 차이가 나는지 잘 보세요. 첫째 시간을 잘 들었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는 것’ 이건 아니지요. ‘죽음이 나를 이용해서 살아있음을 증명하고자 한다.’ 자, 여기서 이게 맞는 말인데, 왜냐하면 내가 하는 자체가 이게 실체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실체가 없다는 말은, 징후적이라는 말은 실체는 따로 있는 거예요. 실체는 따로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육신이지요. 그러니 육신이 죽는다는 말은 이건 동어반복 하나마나한 이야기입니다. 내 육신은 죽는다. 이건 뭐 미장원 옆에 식당 있고 식당 어디 있나? 미장원 옆에 있다. 이건 같은 말 반복에 지나지 않아요. 그런데 문제는 육신이 죽는다고 보지 않고 사람들은 뭐로 봅니까? 내가 죽는다고 보거든요.
내 육신이 밥을 달라고 하는 말과 내가 배가 고프다는 말과 같은 말이 아니거든요. 육신을 내가 대표해 버리면 이건 징후가 안 되고 내 육체의 징후가 아니고 이게 나라는 존재의 세계에 들어가 버려요. 나라는 존재가 따로 수립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육신을 지키는 게 아니고 허구적인 나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도 감행해버린다고요. 이건 바보 같은 짓이거든요. 있지도 않은 나를 왜 지키려합니까. 이 바보 같은 짓을 악마가 강요해서 영악해가지고 이미 성립된 이 자아에 대해서 자꾸 니가 집착하라고 우리한테 강요를 하는 겁니다. 부끄럽지? 부끄럽지? 이런 식으로요.
처음에 인간에게 뱀이 되고 난 뒤에 제일 먼저 생긴 감정이 뭐냐 부끄러움이에요. 숨었고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나뭇잎으로 가리고 이 모습이 하나님이 만든 그 인간의 모습은 절대 아닙니다. 뭔가 변질됐어요. 이건 뭔가 안 좋은 존재하고 같이 결탁이 되었어요. 그게 뭐냐, 악마지요. 그래서 이 부끄러움을 해소하는 방법은 악마 쪽에서 제시한 아까 3가지 이야기했습니다. 일단 배부르면 되고 그 다음에 내가 신처럼 아주 놀라운 능력을 행세해서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사면, 인정을 받으면, 이 부끄러움도 해소되고 세 번째는 거기서 머물지 않고 모든 걸 다가지는 것. 그리고 남을 통치하는 것. 이게 악마의 본인 심정이에요. 본인 마음이에요.
그 본인 마음이 그대로 인간에게 그대로 주어진 겁니다. 이걸 죄가 왕 노릇 한다는 뜻인데 로마서5장에 나와요. 죄가 이 마음을 우리에게 준 거고, 우리는 이 자아가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라도 여기서 탈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밥이나 주고 집에나 있어버리면 사람은 미칩니다. 코로나 1단계해서 일체 밖에 나가라하면 사람이 미쳐버리지요. 왜 그러느냐 하면 사람이 왜 밖에 나가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하는 이유가 강아지가 아닌 게 밖에 나가는 게 힘드느냐, 인정받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남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타인이 없으면 내가 없거든요. 뭔가 말을 주고받는 사람이 있어야 되지 집에서 혼자 거울보고 이야기하면 그건 죽은 존재지 산 존재인지 분간이 안돼요. 정신병 걸린다고요.
최초의 정신병자 악마거든요. 완전히 미친 거예요. 피조물이면서도 신의 흉내를 내는 거. 그게 미친 존재 아닙니까. 미친 거 그대로 누가 본 받았어요? 인간이 본받았지요. 집착하는 거. 편집증환자. 내가 신이라고 우기는 거. 분열증 환자. 정신 분열증 아니면 집착증 둘 중에 빠지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정답은 뭐냐 하면 나를 징후로 보는 겁니다. 안 좋은 징후로 보는 겁니다. 안 좋은 상태의 징후로 보게 되면 죽음이 나를 이용해서 죽음 또는 죄, 저주, 심판, 이것이 살아있음을 증거,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걸 허용을 한 겁니다. 인간에게 허용을 한 거예요.
그렇게 되게 되면 그 다음에 자, 오늘 두 번째 시간에 할 것은 이렇게 첫 째 시간에 기초를 단단히 해줘야 돼요. 안 그러면 두 번째 시간을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두 번째 시간 첫째 시간에 연관해서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아까 스가랴6장5절, 주 앞에서 뭐가 죽 나왔다 했지요. 누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말들이 나왔습니다. 말들이. 말들이 나왔는데 이 말들이 누구냐 하면 천사들이에요. 천사들.
지금 주님도 안보이고 말도 안 보이고 말은 제주도 가면 보이지만, 그 말은 그 말이 아니잖아요. 천사들 안보이지요. 안보이니까 인간세계에서 관찰되지 아니하면 어디에 있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존재의 세계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관찰되지 아니하면. 현미경이든 망원경이든 전자 현미경이든 봐가지고 뭔가 있어야 돼요.
코로나라는 이 전염병을 일으킨 것이 누구냐 하는 거예요. 전염병을 일으킨 것이 누구냐. 그러면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코로나 바이러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다른 이야기하거든요. 요한계시록6장8절에, 조금 길지만 요한계시록6장1절부터 긴데 8절까지 제가 후딱 빨리 읽어볼게요. 시간관계상.
“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의 하나를 떼시는데 그 때에 내가 들으니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우렛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2.이에 내가 보니 흰 말이 있는데 그 탄 자가 활을 가졌고 면류관을 받고 나아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
3.둘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둘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니
4.이에 다른 붉은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이거 전쟁입니다.
5.셋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들으니 셋째 생물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내가 보니 검은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가 손에 저울을 가졌더라
6.내가 네 생물 사이로부터 나는 듯한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이건 경제적인 파탄, 가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또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지 말라 하더라
7.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8.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다시 말합니다. 코로나 누가 일으켰습니까? 바깥은 없어요. 왜냐하면 네 말이 사방으로 나오거든요. 스가랴6장에 보면 사방 동서남북 다 간다고요. 동서남북으로.
다 가게 되면 동서남북은 이 세상에 전부를 피조세계 전부를 말하는 겁니다. 그럼 피조세계 전부를 누가 이렇게 모퉁이마다 지키고 있느냐 하면 네 명의 천사가 선점해가지고 모퉁이를 지키고 있어요. 이게 사각의 링이에요. 사각의 링. 권투선수는 그 바깥에 못 나갑니다. 그러나 존재의 세계에서 코로나 누가 일으켰느냐 할 때, 세밀하게 전자현미경 들어다보고 누가 일으켰느냐 하면 바이러스 RNA 바이러스에 해당되는 그런 계열의 바이러스가 일으켰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존재의 세계에서 거기서 질문이 멈춤니까? 아니지요. 더 들어가야 되지요. RNA 그 다음에 전에는 바이러스는 DNA. 그럼 DNA, RNA는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가, 디오신리보핵산. 그게 뭔데? 분자구조. 그럼 분자구조는 뭐로 되어있는데? 원자. 그럼 원자는 또 뭔데? 원자와 전자핵. 전자핵은 뭔데? 중성자, 양성자, 중간자. 중간자는 뭐로 되어있는데? 쿠커. 쿠커는 또 뭔데? 몰라. 쿠커는 언제 생겼는데? 빅뱅 할 때. 빅뱅이후에 3분 내에. 누가 그 이야기합니까? 인간들이.
실체가 실체에게. 실체가 실체에게 하니까 이거 또 무슨 제목 같은데. 어른이 어른에게. 엄마가 신부에게. 이게 비슷하지요. 실체가 실체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면 머리 좋은 여러분은 이렇게 나와야 돼요. 코로나 19는 이건 실체가 아니고 징후입니다. 이렇게 해야 돼요. 징후. 징후에요. 뭔가 낌새. 낌새.
존재의 세계에서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사건의 세계에서 일으킨 징후가 돼요. 그럼 그 사건은 무슨 사건이냐, 여기서 요한계시록6장에 보면, 누구 앞에서 누가 나왔지요. 여기 스가랴6장에서는 여기에서 본즉 네 병거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6장1절에 두산 사이에서 나왔지요. 그런데 그 산 이름이 뭐냐, 놋 산. 놋은 앞에 5장에 보면 뭐냐 하면 바로 무겁다, 라는 뜻이거든요. 무거운 물질이거든요. 이건 바로 저주의 무거움이에요. 저주의 무거움은 납이나 놋이나 다 마찬가지에요. 놋은 무겁다는 뜻이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 그 민수기나 출애굽기에 보면 성막 만들잖아요. 그 제단을 놋으로 만들었어요. 심판의 무거움. 놋이란 무겁기 때문에 유동적입니까? 고정적입니까? 고정적이고 확정적이에요. 확정적입니다.
따라서 확정적이라는 말은 인간은 태어난 자체가 죄고 죽을 때까지 죄에서 벗어난다, 못 벗어난다? 못 벗어나요. 그러니까 고스란히 저주를 다 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수요 설교할 때 이야기했지요. 수요설교나 아니면 부산강의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것은 일체 받지 않는데 그러면 구약의 민수기,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는 왜 제물은 왜 받느냐, 거기에 뭐가 묻혔다 했습니까? 피가 묻혀있지요. 더러운 피가 아닙니다. 정결한 피.
하나님은 피를 받아요. 인간의 것을 받지 않습니다. 피를 받아요. 피 묻힌 걸 받아요. 피 묻힌 것을 받는다고요.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 바로 피라 하는 것은 그 우리가 받을 심판에 누가 합세해서 같이 심판에 참여한 흔적이 징후가 바로 피 입니다. 또다시 여기서 오늘 강의 존재와 사건에서 이 징후적이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 걸 알지요.
자, 피로서 죄를 씻는다고 이야기하니까 저 자유주의 계열 성경을 윤리 책으로 보는 그런 신학교가 있어요. 그 신학교에서 교수들이 조롱하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피로서 우리 죄를 씻을 거 같으면 피를 한바가지 바케스 부으면 죄가 씻어지겠네. 이런 식으로 놀렸다고요. 그 사람은 그럼 피를 뭐로 본 거예요? 실체로 본 거죠. 실체로 본 이유가 본인이 본인을 어떻게 봅니까? 사건으로 보지 않고 존재로 보는 거예요.
내가 눈으로 관찰해서 내가 납득이 되고 지식을 알아가지고 내가 나를 평소에 관리하는 것처럼 내가 천국가기 위해서 나는 뭘 하면 되지. 라는 지식 끌어 모으는 식으로 본인을 성경을 보는 거예요. 그런데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상은 뭐라고 했어요? 우상의 공식은 E=mc² 우상의 공식은 나를 위해서 모든 성경을 보는 게 그게 우상이에요. 자아라는 존재, 자아라는 허구. 그 허구인 줄 몰라요. 그 나가 여기에 있는 줄 알고 있어요. 자기 육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있다고요. 그놈의 자아는 맨날 주위의 환경에 따라 바뀌면서.
여러분들이 대학교 다녀본 사람은 알겠지만, 교수들이 강의하는 내용보세요. 이거다, 하는 건 없어요. 이런 이론도 있고, 저런 이론도 있지요. 신학교에 대해서 잘 알 거 아니겠습니까. 질문하면 교수 되게 신경 쓰이지요. “질문하지 말고 내 이론은 이렇다는 이야기지요.” “목사님, 이 본문의 뜻이 뭡니까?” “이런 이론 있고, 저런 이론도 있는 거야.” 띵! 수업 끝. 후다닥 챙겨 나가지요. 왜 그럽니까? 정답을 내려버리면 자기의 교수직이 날아가 버려요. 교수직이 날아가 버려요. 왜? 본인이 개척한 교회가 없어. 자기는 이게 밥벌이에요.
자, 악마가 인간에게 준 첫 번째 마음이 뭐라고 했어요? 사람 사는 이유는 배불러야 된다. 그러니까 배부른 장소가 신학교 교수했고, 교수 했으니까 거기서 뭐냐 하면 신학 이론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자기의 본심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이론을 이야기해요. 이런 이론이 있으니까 자꾸 나한테 따지지 말라고. 비겁하지요.
주체라 하는 것은 바로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주체라 하는 것은 실체로서의 나하고 나 사이에 그 틈에서 나온 게 주체입니다. 틈에서 주체가 나와요. 자기는 자기하고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걸 아이덴티티 자기정체성이라 하거든요.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나로 움직이지만, 남들 보기에는 나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이는 게 아니고 주체로 움직이지요. 요령부리면서. 또는 끼 부리면서. 강한 자에게는 약하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끼를 부리면서 버텨내야 명예퇴직이라도 합니다. 가족들 밥이라도 먹고 삽니다. 사는 게 그거에요. 그게 사는 거예요. 뭐 정의로움, 필요 없어요.
악마의 최고가 되는 그 출세욕, 남한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누가 거기서 탈피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세상을 향하여 공격합니다. 도마는 보이는 것을 손으로 예수님의 창자국을 만짐으로서 확인하려했지요.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하는 말은 추가적인 것이다. 추가적인 것.
다시 말해서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뭐를 포기한 거예요? 평소에 자기가 생활하는 삶의 태도. 나는 내 자아를 위해서 관찰해서 이익이 된다 싶으면 내가 얻겠다는 그 전체의 자아의 삶의 방식을 포기한 사람. 이게 바로 신앙인이에요. 보지 않고 믿으니까. 나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종속되어있다는 것을 그걸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받아들인 거예요. 나라는 존재는 그냥 하나님의 존재의 사건에 징후에 불과한 것을 감사합니다. 이리 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난 오후에 제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괜찮은 사람 되지 말고 뭐되라고 했지요? 괜찮은 사람 되지 말고 천사가 되어라. 천사됐다고 백옥같이 피부 좋고 그런 거 말하는 게 아니고 시키는 대로 하는 거예요. 그냥 내가 여기 있음 자체도 주님이 있다는 증거로서 내가 이 땅에 있는 거예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주님이 십자가 졌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제 잘라내느냐 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을 때, 이제 슬슬 잘라낼 때 된 거예요. 더는 하고 싶은 거 없지? 잘라버리지요. 나의 존재, 나의 존재됨, 내가 이렇게 잘났음을 충분하게 다 맛보게 해놓고 잘라버리지요. 뭐 더 하고 싶은 거 있어? 없어? 없지. 이제 데려간다. 잘라버려요. 하고 싶은 거. 니 막 살았잖아.
천사가 동쪽, 남쪽, 북쪽으로, 서쪽으로 가는 이유가 뒤에 나와요. 가는 이유가. 모퉁이 선점입니다. 니가 달려가고 달려갈 가봐야 사방의 모퉁이 있잖아요. 사각의 링. 이걸 누가 선점한다고요? 천사가 먼저 선점해버려요. 갇힌 거예요. 우리의 존재의 세계는 갇힌 거예요. 이 선점하는 것을 예레미야 49장 36절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바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바람. 천사의 다른 말은 말이 될 수 있고 또 같은 말은 바람이 될 수 있고. 그걸 합쳐버리면 말들이 바람같이 다닌다. 그렇게 합성할 수가 있고.
그대이름은 바담, 바담, 바담. 김 범룡의 바람이에요. 전도서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바람이 모든 세계를 울타리를 쳐버린 겁니다. 프레임이지요. 바람이 프레임을 쳐버린 거예요. 아무리 달려가도 누구를 만납니까? 천사가 있어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요. 천사가 가둬버렸어요. 쉽게 말해서 천사가 악마의 세계를 완전히 포위해버린 겁니다. 엘리사의 전쟁처럼. 아람군대가 엘리사있는 곳에 쳐들어왔을 때 엘리사 쪽이 전체를 다 공격해버리지요.
창세기32장에 보면 야곱이 형하고 분리되어가지고 따로 갔을 때 그 때 사다리에서 내려왔던 천사들이 야곱을 일단 만납니다. 그 천사의 집단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하지요. 그 마하나임의 기능이 있어요. 이 땅에 꽃구경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야, 봄철인데 인간세상 좋대이.” 이렇게 해가지고 온 게 아니거든요. 32장에 보면 야곱이 그들을 볼 때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하더라.
이름이라 하는 것은 다시 말씀드리면 이름이라 하는 것은 바로 존재로 나타났을 때의 이름이에요. 그런데 그 천사들이 잠시 존재로 나타났잖아요. 그런데 그들이 계속 눈에 보였습니까? 휙~ 하고 사라졌어요. 꼭 뭐와 같으냐, 바람 같아요. 요한복음3장에서 성령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뭐라고 묘사했습니까? 성령이 임한다는 것은 성령에 대해서 니고데모가 모르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그 징후적으로, 징조적으로 표현한 게 뭐냐 하면 성령은 마치 뭐와 같다? 바람과 같다.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흔적은 남긴다.
니는 바로 바람이 남긴 흔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니가 하늘나라를 볼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니는 뭘 고집하느냐, 니는 눈에 보이는 육을 고집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육은 영의 영역으로 못 넘어가요. 존재는 존재로 끝이에요. 우상이 될 수밖에 없어요. 내가 우상이고, 내가 믿는 예수가 우상이고, 내가 믿는 하나님이 우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모든 출발점을 스타트를 존재로 시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를 실체로 보는 거예요. 그러나 인생 살아가면서 나는 실체일 수가 없었지요. 뭐로 바뀝니까? 나는 주체로 바뀐다는 것을 이제는 제가 이 주체를 용어를 썼기 때문에 이해되시지요.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고 아무나 와서 힘 좋고 권세 있고 돈 많은 자가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주체지요. 집에 혼자 있을 때는 자기가 나는 신이 되지만, 직장이나 회사나 바깥에 나가면 나는 뭐가 됩니까? 타인의 코치와 눈치를 봐야 돼요. 남을 생각해야 돼요. 나를 상실해야 돼요.
이 전체의 세계, 이 전체의 세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전체를 오인의 세계, 착각의 세계, 뭔가 아닌 걸 알겠는데 해답은 없는데. 해답이 없어요. 교회에 백날 다니고 성경공부해도 해답이 없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해답을 찾을 필요도 없는데 해답을 찾아야 되겠다는 그 마음자체가 우상적 마음이에요. 그 해답을 알아서 뭐 할 건데. 해답을 알아서 뭐 할 건데.
“주여, 언제 오십니까?” 제자들이 물었지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니가 그걸 왜 알아야 되는데.” “주여, 그 때가 언제니이까?” “니가 그걸 왜 알아야 돼” 요즘 사람 같으면 “시간과 공간을 알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시간과 공간은 내 소관이야. 니 소관 아니야. 니는 징후야. 징후가 왜 이 세상 주님의 예수님의 돌아가는 시간과 공간을 니가 왜 알아야 되는데.”
그 때라고 했잖아. 그 때. 때. 주님의 때는 제자들은 어떤 시간과 공간을 흡수될 때로 보지만, 주님께서는 그 인간의 시간에 개입되지 않고 따로 독립적인 때를 이야기하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사건’. 영어로 하면 이벤트. 사건이에요. 이벤트의 특징은 그 때 뿐이라는 거예요. 소유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소유 대상이 되지 못해요. 주님이. 제자들은 자꾸 예수님을 자기 소유화 시키려고 했어요.
주님께서 강제로 어떻게 했습니까? 닭을 동원해가지고 강제로 제자들과 예수님의 그 소유성을 떼 냈지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당신이에요. 나는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으나, 너는 나와 함께 있을 수가 없어. 그 차이를 사람들은 몰라요. 가역적 반응이 아닙니다. 화살표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반응이 아니에요. 주님은 찾아올 수 있으나 나는 주님을 찾아갈 수 없어요.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래야 종속이 된다고요. 종속. 그걸 어제 수요일날 뭐라고 했습니까? 구속. 김종서가 이야기한 아름다운 구속. 당신이 만난 건 행운이었어. 아름다운 수갑이에요. 아름다운 수갑. 그래서 내가 했잖아요. 자수하지 말고 체포되어야 된다고요.
사건을 내가 찾아가면 안돼요. 사건이 와서 나를 체포해 버려야 돼요. 꼼짝 말라고. 사랑의 포로에요. 이게 얼마나 이런 행운이 어디에 있습니까. 정말. 이건 정말 눈물 날 정도로 감격적인 순간이고 모든 복의 완료입니다. 드디어 골칫거리인 내가 누구한테 체포당했어요. 요 말성꾸러기인 내가. 까불락 까불락 거리는 내가. 우상적인 나 위주로 평생을 나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나. 올챙이 같은, 미꾸라지 같은 내가 고맙게도 천사의 사건에 포로가 되고, 사건의 체포가 될 때 신약에서는 그걸 사랑의 포로, 이제는 너를 위해 살지 말고 너를 위해 죽었다가 살아난 나를 위하여 살아라. 하는 그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 앞에 하는 말이 나는 미쳤다. 사도바울이. 나는 미친놈이 맞는데,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쳤다. 그리고 말하기를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거 정말 최후통첩 같은 이야기에요. 누구든지 사랑을 모르면 그 자체가 저주다. 희망 없다 이 말이에요. 니가 출세하고 성공하든 관계없고 희망 없다는 말이지요.
자, 이렇게 이야기했으면 이제 여러분들이 답변할 차례지요. 6장2절에, 첫째는 홍마요, 둘째는 흑마요, 셋째는 백마요, 넷째는 어롱지고 건장한 말이다. 왜 말의 색깔이 다릅니까? 왜 색깔이 따로따로에요? 그것은 이 세상이 저주로서 단일화 되어있고 동질화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단일화 되어있고 동질화되어 있어요. 몽땅 다 존재의 세계이기 때문에 존재의 세계를 가둬놓으면 이 안에 어떤 다양한 직장이 있고 직업이 있다 할지라도 그 상태는 다 같은 상태에요. 다 같은 상태. 스테이트를 상태라 하지요. 이 스테이트를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국가가 되는 겁니다. 국가.
국가는 모든 것이 그 안에 동질화되어 있어요. 똑같아요. 동질화되어있는 세계가 무슨 세계냐 하면 존재의 세계이고, 그 존재의 세계는 뭐냐 하면 수학으로 다루어지는 세계에요. 수학으로. 자, 딱 수학이라 하는 것은 둘로 나눕니다. 1과 그리고 다수. 그런데 성경 여기다 하나 더 넣지요. 바로 공백. 공백은 뭐와 관련되느냐 하면 사건이에요. 요게 사건이에요. 사건이 사건과 영이지요. 그걸 공집합이라 하는데. 공백과 빈자리. 빈자리는 인간 존재의 세계에서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그럼 사건은 어디서 생깁니까? 빈자리에서 생겨요. 빈자리에서 생기기 때문에 사건의 특징은 누굴 고발합니까? 모든 있음의 세계를 고발하는 거예요. 그럼 있음의 세계는 뭐냐 다수의 세계지요. 다수의 세계 맞지요. 다수의 세계라는 말은 이건 개별자의 세계고 개체성의 세계입니다. 개별자, 개체성의 특징은 뭐냐 하면 첫째 시간에 누누이 이야기했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한다. 내가 알아서 내가 판단해서 내가 선택해서 내가 결정하지요. 그런데 마스크는 왜 썼습니까? 취미에요? 이리 되지요.
아! 그렇다면 이 다수를 영적으로 다루는 1. 일자아닙니까. 1. 일자가 정신적으로 뭘 하고 있다? 통제하고 있고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로마서5장에 나오는 죄가 왕 노릇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게. 그런 의미입니다. 악마는 우리가 상대할 수 없어요. 왜? 우리의 어른이니까. 왜 우리는 악마를 못 이기느냐 하면 악마는 간교하고, 영악하고, 더 지혜로워요. 뱀처럼 지혜로워요. 그 지혜에 우리가 밀리게 되어있어요.
인간의 모든 지혜는 3+5=얼마지요? 8이지요. 진짜 말을 이상하게 하다보니까 이것도 이제 답변하기 불편해요. 2x6=은요? 12잖아요. 다 아는 이야기를 왜 입 다물고 있습니까. 12잖아요. 그런데 뭘 묻느냐 하면 왜 2x6을 이런 계산을 하고자 하는 의도가 뭐냐는 거예요. 의도가. 그 의도가 뭐냐 하면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인정받으려고 하고 남을 지배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거예요. 의사 월급이 한달에 오십만원이고, 청소하는 분 월급이 한 이백오십만원 받는다면 의사 하고 싶은 사람 아무도 없지요. 그렇지요. 아무도 없을 거예요. 이 사회는 일자가 정해진 거예요. 일자. 일자가 정해졌다는 것은 피라미드처럼 되어있어 가지고 밑에 있는 사람들은 뭘 바라보느냐 하면 저 자리에 앉고 싶지? 저 자리에 앉고 싶지? 저 자리에 앉고 싶지?에 순서로 의자가 짜여있는 거예요. 중소기업하지 말고 삼성그룹에 가고 싶지? 가고 싶지? 가고 싶은 거예요.
여고 동창생 오래간만에 만났다. 나이 서른쯤 되어 만났다. “남자친구 있나?” “있다.” “어디에 다니는데?” “중소기업 다니는데 너무 좋대.” “그래?” “그럼 니는?” “나는 삼성그룹 대리야. 월급이 10배 차이나지.” 할 때, “아~ 부끄러워 미안하다. 삼성그룹밖에 못 들어가서 미안해.” “음매! 중소기업 기 살아!” 이런 사람 봤습니까. “니 친구 공무원 됐는데 몇 급 됐어?” “5급 됐어.” “니 친구는?” “신난다. 9급 세 번 만에 합격됐어. 9급.” 이걸 자랑삼아 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이미 우리는 아무리 자아를 주장해도 이 주체밖에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우리는 이미 서열 속에 하나의 단계에 계단에 지금 서있는 겁니다. 이건 내가 원하지도 않는 스테이트 상태에요. 그래서 색깔이 있는 이유는 기능이 달라서 그래요. 기능이. 그런데 기능의 공통점이 있어요. 엎어먹든, 대처 먹든, 구워먹든, 이 모든 천사의 기능은 이 세상을 동일성으로 만드는 거예요.
대통령이든 비서든 하찮은 직업 백수든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똑같이 저주의 대상으로 불도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노아홍수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필요 없이 물로 어떻게 합니까? 완전히 쏵 다 쓸어버렸지요. 그걸 예를 들 때 좋은 말로 예를 들지요. 탕수육 옆에 있는 소스. 꿀 소스. 돼지고기 조각을 튀겼잖아요. 그걸 찍어먹는 사람도 있지만 이걸 붓는다고 치고 확 부어버리지요. 소스로 다 덮어버리지요. 맛이 전부 다 동일한 거예요.
그러면 지금까지 강의한 거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건은 인간 세계를 뭐로 만든다? 뿔로 만드는 거예요. 그 대표자가 악마가 되고. 이건 영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이 이 스가랴에 나오는 이 해석을 인간은 해석을 못합니다. 왜? 존재기 때문에.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는 이걸 알아 듣지요. 왜? 하나님의 신이 임했기 때문에. 성신이 임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징후적으로. 증상이에요. 나는 주님의 일하심의 천사의 일함에 하나의 징후로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징후? 존재 아니고 사건 세계에 속한 징후가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계속 보겠습니다. 자, 다시 하면 없음에서 침투가 되면 천사가 침투해서 이미 세상을 가두어놨지요. 그렇지요. 없잖아요. 주 앞에서 뻗어나갔지만 있음의 세계에서는 없는 분이잖아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에 처녀가 아기를 잉태하기 전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임신하기 전에 예수님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이 있음의 세계에서는 예수님이 없었지요. 뭐만 있느냐 하면 말씀만 있고, 예언만 있지요. 예언대로, 말씀대로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언질을 준 겁니다. 세례요한에게. “마리아야, 니가 임신할 것이다.” 마리아의 임신에 대해서 천사가 이야기하고, 또 남편 되는 요셉에게도 이야기했잖아요. 임마누엘.
그러면 예언 있고, 말씀 있는데 주님은 안 계시잖아요. 예수님이 안 계시잖아요. 오셨다. 오셨으면 여기 있음의 세계입니다. 있음의 세계에 침투가 될 때에 예수님이 찾아오게 되면 여기 모든 서열화, 피라미드. 뜀틀 있잖아요. 탁 집고 올라가는 거. 우리 초등학교 때 이 뜀틀 많이 했어요. 일단계, 이단계 높여가지고 많이 했거든요. 뜀틀 하듯이 죽 올라가있다 말이죠.
올라가있을 때에 세례요한이 왔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정하고 세례요한을 공격했을 때 이 뜀틀 가운데 이 바닥에 있는 세리와 창기가 공격했습니까? 누가 공격한 거예요? 이 뜀틀의 우두머리가 자기의 정체를 드러냈지요. 이게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과 이런 사람들이지요. 요한복음8장에서 예수님은 이들보고 뭐라고 합니까? 너희애비는 뭐라고 했습니까? 악마라 했지요. 악마. 요한복음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 인간세계에 모든 피라미드는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가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낸 거예요. 제가 지금 무슨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 이야기하려고 뜸을 드리고 있습니다. 다니엘2장31절에서35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다니엘이 계시 받은 그 대목인데. 계시의 내용이.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자, 신상은 몇 개입니까? 제가 물어요. 몇 개입니까? 한 개입니까? 두 개입니까? 몇 개입니까? 신상이 몇 개지요? 하나밖에 없어요. 동일시 되어있다니까요. 전부 안에 들어있어요. 인간 역사가 통으로 하나밖에 없어요. 인간 역사는.
그걸 제가 응용해서 묻습니다. 당신의 기억은 몇 개입니까? 오직 하나에요. 어릴 때부터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요. 꿈속에서 그게 편집되어서 꿈속에서 중간에 툭 툭 튀어나오지요. 꿈은 우리가 죽는 기간이기 때문에 지 맘대로 기억이 살아있는 거예요. 내 실체는 죽고 꿈은 돌아다니고. 가끔가다가 이 꿈이 나를 깨우면 몽유병환자 되고 그런 거죠.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기억이 살아있는 거예요. 우리 평소에 대낮에도. 햇빛 장렬히 쬐는 이 대낮에도. 기억이 살아있는 거예요.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고. 아무개가 길에서 “어이, 어이, 니 가 맞지?” 라고 물으면 어떤 육체가 나한테 묻는 게 아니고 나의 뭐를 호소해요? 내 기억에 호소하잖아요. “누구신지요?” 이리 나오면 “모르겠나?” 이리 나오면 나중에 보면 빚쟁이 아니면 동창생이고 그렇죠.
기억이 떨어져버리면 자식도 못 알아봐요. 여러분들은 그렇게 안 되기를 바랍니다만, 그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고. 기억이 살아있는 한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거예요. 그리고 기억의 특징은 자기위주에요. 자기 동질성. 자기 역사는 자기 소설책은 오직 하나밖에 없어요. 개인적으로 역사도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모든 인류의 역사도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느브갓네살왕이 다니엘이라는 하나님 편에 속한 하나님과 링크된 연결되어있는 사람을 체포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상황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 이스라엘 언약의 공동체를 의도적으로 호랑이굴에 기어들어가게 만든 거예요. 포로 잡힌 게 전략이었던 겁니다. 포로 잡힌 게. 트로이 목마 같은 거예요. 트로이 목마. 간교한 악마를 이기려면 이럴 수밖에 없어요. 십자가도 마찬가지에요. 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전략대로 하자. 나랑 같이 죽자. 그러면 살리라.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죽을 나이도 안 됐는데 죽었지요. 누이동생 난리 났습니다. 기둥 같은 오빠였어요. 오빠! 오빠! 살려내라고 자칫하면 예수님 멱살 잡을 뻔 했어요. 그런데 전략인 줄 몰랐습니다. 존재로 사는 거 안되거든요.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뀌려면 반드시 뭐를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개입해줘야 존재에서 사건으로 넘어와요. 오빠 나사로는 이게 땡잡았어.
원래 아플 때 주님이 병 고치는 전문가로 알았기 때문에 아플 때 미리 불렀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기다렸어요. 죽을 때까지. 여동생이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비정하고 냉정하고 차가운 남자로 알았겠어요. 평소에 자기한테 얻어먹은 잡채와 탕수육이 얼마나 많았어요. 챙긴 용돈 얼마나 줬습니까. 그런데 정작 자기 아쉬울 때 내가 믿는 예수, 내가 믿는 하나님 어디 갔습니까? 없어요. 없어야 돼요. 그게. 없어야 돼요. 내 뜻을 응답해 주는 그런 하나님은 없어야 돼요. 그건 우상이 된다고요.
주께서 기도하는 내가 박살내는 그 타이밍, 그 때가 있어야 돼요. 내가 박살내는 타이밍.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여겼던 내가 작살나는 그 타이밍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육에서 영으로 바뀌어요. 주께서는 그 가족을 체포해 버렸지요. 죽었어요. 오빠가 죽은 게 그 집안에 주신 그 집안을 징후로 만든 거예요. 징후로.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을 것이고,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러니 마지막 예수님의 액센트가 강점이 살겠고, 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반드시 그 경유가 뭐가 있어야 돼요? 존재로서 죽어야 되는 거예요. 자살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니 주제파악을 제대로 하라는 거예요. 니 주제파악을. 니가 지금 악마에 매였다는 거예요. 주님에 매였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경유해서 니가 다시 너를 징후적으로 너 자신을 다시 보라는 말이지요. 너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라는 말이지요. 징후적 존재지요. 그럼.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지요. 그러니까 오빠가 죽은 것은 그건 주님 안에서는 소급해서 보게 되면 그건 자는 것이지 죽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사건이 터져야 앞에 있는 사건을 소급해서 해석이 되는 겁니다. 그 일도 주께서 알아서 했어요.
그래서 다니엘 계속해 봅시다. 왕이 보니까 큰 신상이 있지요. 신상이 있는데 머리는 뭡니까? 정금이지요. 가슴은 팔이고 은이지요. 배는 넓적다리고 놋이지요. 종아리는 철이지요. 발은 철이지요. 그러니까 오늘 네 번째 스가랴6장에 나오는 네 번째 그 말의 특징이 어롱진 거잖아요. 개별 색깔이 없어요. 앞에는 색깔이 있는데 뒤에는 섞여버렸어요. 하이브리드에요. 혼합체에요. 혼합체. 갈수록 혼합체에요. 그런데 그 신상을 무너뜨리는 것은 금이 아니고 은도 아니고 놋도 아니에요. 무너뜨리는 것은 그 혼합체 철과 진흙으로 된 그 발을 무너뜨리니까 앞에 있는 모든 역사가 존재에서 무 존재. 사라져버린 겁니다.
첫 번째 말이 붉은 말, 두 번째 말이 검은 말, 세 번째 말이 흰색 말, 네 번째 말은 어롱진 말. 얼룩덜룩한 말. 이건 인류의 역사가 아무리 호화찬란해도 결국은 죽도 밥도 아닌 그런 흐지부지한 그러한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결국은 주님 앞에 산산조각 내버릴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2장35절에 보니까 때에 철과 흙과 놋과 은과 금은 다 부서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와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서, 바람이 또 나오네. 바람은 존재를 없애는 게 바람이니까요. 존재를 흔들어버리고 사라지게 하는 거죠. 간곳이 그 다음에 뭡니까? 간곳이 없지요.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어요. 애초부터.
그런데 없는 것에 있게 한 것은 바로 주님이 전쟁하는 신인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악마를 불러내가지고 인간을 악마 편에 서게 해서 그걸 없앰으로 말미암아 없는 것이 되어야 없어져야 언약이 이루어져요. 이스마엘이 개과천선해서 이삭 됐습니까? 아니지요. 이스마엘은 따로 가고요. 아브람 아들은 이스마엘 밖에 없어요. 그 이스마엘 외에는 다른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면서 이름은 분명히 자식이 많은데, 아브람에 있는 자식은 이스마엘 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이스마엘은 아브람과 관련되어있다면 아브라함과 관련된 자식은 없어요. 없는데 아버지가 먼저 생긴 거예요. 이 말은 자식이 등장함으로서 아버지의 의미가 새롭게 발생된다 이 말이거든요. 없음에서 나온 분. 예수님이 그런 분 아닙니까.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 분. 남자, 여자의 수정에서 나오지 않는 분. 그 분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박혁거세? 알에서 나왔다고요? 예수님밖에 없지요. 사건입니다.
왜? 인간의 물리학에서 사건이란 일회성이에요. 단회성이에요. 존재라 하는 것은 반복이 될 때 존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단회성은 사건은 어디서 배제되느냐 하면, 법칙에서 배제돼요. 어떤 공간, 어떤 시간 뒤에도 동일한 결과가 나와 줄 때 법칙이 되는 겁니다. 만유인력 법칙같이. 그렇게 되어야 로켓을 목성까지 날려 보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사건은 어디에도 어느 물리법치에도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성도가 사건이에요. 성도를 본인을 본인으로 물리적으로 이 세상 법칙으로 설명이 안돼요. 다만, 주께서 그렇게 하셨나이다. 그것뿐이에요. 성령이 와서 그렇게 했다는 것뿐이지요. 그럼 듣는 사람이 성령 빼고 이야기하자. 성령 빼고 이야기하면 이야기할 게 없어요. 그때는 이렇게 하세요. “나도 모르겠어.”
사도바울보고 “당신은 삼층천에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겠어. 내 말로 설명이 안 돼.” 여러분들은 설명이 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결국은 그 동일성이 다 날아가 버리지요. 그래서 결론입니다. 이 세상은 언약이 끝날 때까지 언약이 주어질 때까지 유보적이에요. 한시적이고. 야고보서4장에 의하면 이 세상은 안개 같은 거예요. 있다가 없어지는 거예요.
연극이 끝났을 때, 그 연극무대 다 끝나고 난 뒤에 관객이 떠나고 난 뒤에 여러분, 유령이 되어서 연극무대에 다시 올라가 보세요. 재미없어요. 가끔은 그런 연극무대 찾을 때가 있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지는 사법고시 합격하고 난 뒤에 오징어 구운 거하고 술 들고 아버지 묘 찾아가서 “아버지, 아버지 소원대로 저 합격했습니다.” 하고 연극무대를 수유리 그 잔디밭에서 연극을 벌리잖아요. 아버지 없는데. 연극하고 있는 거예요. 상대역이 있어야 되니까. 왜? 나를 나 되게 했으니까.
우리는 이제 우리의 상대역은 주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기능을 하도록 천사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 성도의 위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천사를 닮아가게 하옵소서. 이 세상을 주의 시키는 대로 이 세상을 네 모퉁이로 붙잡아 매고 심판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징벌하는 최후 통첩하는 그 자유함을 저희에게 허락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보충강의
보충강의에서 아까 내가 질문을 하고 답변을 안 한 게 있어요. 뭐냐 하면 국가가 없다는 이야기에요. ‘국가가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국가가 없다니 무슨 말이냐.’ 라고 여러분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걸 제가 말씀드리면. 국가가 없다는 말이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국가가 있는 게 아니고 개별자가 있어요. 개별자. 국가는 없어요. 대학은 없어요. 그러니까 직원들하고 총장 있고 학생들 있고 건물 있지요. 건물은 인간이 아니니까 빼고. 캠퍼스 빼고. 학생들이 있다고요. 한 사람씩 보면 전부 개별자에요. 이게 무슨 신비냐 하면 개별자가 모이면 반드시 자기를 통제하고 자기를 지시 명령할 일자를 인간들마다 지어낸다는 겁니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에요.
개별자가 큰 소리 치기를 특히 남자가 객기 부리잖아요. 나는 나다! 이리 하잖아요. 20대 젊은 애들 전부 살아가는 게 뭡니까? 내가 나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세상은 나하고 만만치 안잖아요. 그러니까 뭐 키웁니까? 고양이 키우고 개 키우는 거예요. 지 말 잘 들으니까. 그거 안 키우면 정신병 날 거 같아서. 자기하고 대화 상대가 있어야 내 스트레스를 개한테 풀 수가 있는 겁니다. 외로워서. 외롭다는 말은 짝이 필요하다는 말이고.
옆에 개 키우는 게 좋을까요? 대통령 키우는 게 좋을까요? 대통령이 좋지요. 개는 매일 줘야 되는데 대통령은 알아서 나한테 권력과 취직자리와 내가 요구하는 거 어디 놀러가고 싶다 하면 그런 권한과 그런 월급을 주고 다 할 수가 있잖아요. 청와대 비서라든지. 권력을 주잖아요. 권력이 없는데 내가 요청하는 거예요. 내가. 권력이라는 것을 내가 요청한다고요. 이 개별자가 요청한다고요.
그러면 요청하게 되면 내가 대통령의 종이 됩니까? 아니면 대통령을 이용하게 돼요? 대통령을 이용하게 되어있다고요. 그러니까 국가라 하는 것은 누가 만드느냐 하면 내가 그 권력이 필요해서 내가 만들어내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악마가 저쪽에 있는 악마하고 흥정한 겁니다. 그게 국가에요. 그래서 말 잘 들어요. 이게 대통령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럼 뭐냐, 다른 사람도 있잖아요. 내 식구도 있고.
예를 들어서 애는 세 살, 네 살 밖에서 놀고 싶은데 엄마가 강제로 다섯 살 때에 학원에 보냈다. 그러면 애한테 타당성 있는 왜 엄마가 나를 강제하는 타당성 있는 논리를 제시해야 돼요. 첫째 애가 “엄마, 왜 저를 이렇게 영어 유치원에 보내십니까?” 할 때, 엄마는 이렇게 답변해야 돼요. “니는 나를 누구로 보느냐?”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면 “방금 엄마라 했잖아요.” “엄마 맞지.” 그러면 엄마가 물어요. “엄마가 뭐지?” “나 없을 때 나를 낳은 주신 분.” 답변 속에 이미 종속관계 성립 됐지요. 나 없을 때 낳아주신 분이지요. 없을 때.
“그러면 니 배고플 때 누가 젖을 주었고 누가 옷을 입혔느냐?” 할 때 “엄마” 이러지요. 그러면 이미 엄마가 권리를 행사할 근거는 이미 바닥재는 마련돼 있는 거예요. 거기서 약간 더 보태는 거예요. 영어 유치원 약간 보태는 거예요. 만약에 엄마라는 존재의 관계를 끊고자 한다면 그 애는 다른 집에 입양가든지 뭔가 가출하든지 해야 돼요. 그러나 본인이 판단하는 거예요. 아까 했지요. 모든 개별자는 누가 판단한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결정한다고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하는데 왜 국가의 권력이 왜 필요 하느냐 지금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나만 있는데, 나만 최종적으로 있기 때문에 나를 위해서 국가가 필요하다는 그 논리를 제가 펼치고 있는 겁니다. 그 예로서 엄마이야기 든 거예요.
엄마가 요청을 해요. “영어 유치원 가라.” “더 놀고 싶어요.” “아니 가야 돼” “왜 가야 됩니까?” “일단 엄마니까 니한테 요구할 권리는 니가 인정했지?” “인정했습니다.” 제가 지금 이 논리를 아이한테 하라는 말이 아니고 엄마가 요런 걸 갖고 있으라는 말이지요.
“엄마 자격이 된다는 것은 니가 인정하지?” “인정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니가 유치원에 가서 영어를 배우게 되면 니가 다른 아이보다 초등학교에서 앞선다.” 애가 “앞서서 뭐할 건데요?” “앞서면 사랑을 인정을 학급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니가 독차지하게 된다.” 그러면 애가 그때부터 사랑, 인정받음, 여기에 대해서는 애가 눈이 바짝 뜨여요. 왜? 애 안에는 마귀가 들었기 때문에. “아! 맞아.”
그러니까 사랑 받는다는 말은 이게 경쟁적이에요. 혼자 사랑 받는 게 아니고 쟤보다 많이 받을 때 사랑이 되는 겁니다. 같이 사랑해 주면 동질성이 되면 안돼요. 차이성이 되어야 돼요. 쟤보다 많이 받을 때 나는 사랑 받는다,를 느끼는 거예요. 똑같이 받으면 사랑이 아니에요. 쟤보다 많이 받아야 돼요. 그런데 그게 유리해요. 왜? 공부를 잘하면 왜 선생님한테 사랑을 받느냐 하면 선생님 수준에 어프로치 접근해 가거든요. 선생님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에 짝짝 아구가 맞다 이 말이지요. 농땡이들은 지금 딴 짓 하고 있다 말이지요.
그런데 얘는 눈을 마주친다고요. 그러면 선생님의 아바타가 되고 대리자가 되면서 선생님이 다루는 그 권력에 얘가 그 권력에 맛을 봐요. 학교에 가는 것이 재미있어. 왜? 다 지 똘마니들이니까. 자기가 선생님이니까. 사랑을 받게 되면 점수가 후한 점수가 나오면서 그 동네에서는 자기가 최고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악마에서 엄마는 배고픔을 채워주고 두 번째 그 사회에서 내가 악마가 두 번째 주는 그 혜택을 맛을 보게 된 겁니다. 그걸 가지고 아주 쉬운 말로 “공부 참 잘한다.” 공부 잘한다, 이리 되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처벌이 달라요. 공부 잘하게 되면 좋은 대학가고, 공부 못하면 빌어먹는 게 돼요.
빌어먹는 사례를 이제 엄마가 애한테 좍 하는 거예요. 사진을 보는 거예요. 우물 없는 아프리카 아이들. 깡패들 보고. 범죄애들, 성폭행부터해서 죽 보면서. “공부 못해서 그런 거다. 저 사람들이 이 사람들.” 그 다음부터는 양당 결정에 죽 나가지요. “엄마, 아빠한테 고마운 줄 알아라.” “그래도 가기 싫어.” “저리 빌어먹는 애가 너같이 이야기해서 다 그런 거다. 남들 놀 때 니 힘들게 하게 되면 나중에 성과가 주어진다.”
“그러면 공부하면 뭐 사줄 건데?” “스마트폰 사줄게.” 그 다음부터는 당근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제 당근이 들어가요. 그런데 이게 장애물이 있어요. 그게 뭐냐 DNA에요. 이게 책보고 된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결국은 아무리 엄마가 나대도 엄마위에 악마가 있잖아요. 악마는 이미 모든 걸 서열화 시켜 놨어요. 모든 것이 피라미드 뜀틀로 조성이 되어있어요.
조성이 되어가지고 니 자리에서 나름 노력해봐라. 올라가게 한 만큼 올라가게 한다. 라는 그것을 하나의 동기부여, 이 세상을 계속 내가 살아가야 될 이유, 그것은 올라갈수록 보다 많은 숫자의 사람으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는 거예요. 그 사랑도 인정도 못 받거들랑 개나 키우라. 주인이 물어주는 먹이에 얼마나 사랑하겠어요. 돈 없으면 그것도 못 키우지만. 그런 자리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는 것.
그래서 인간은 그 결핍. 악마가 해주는 최고의 자리와 현재 자기 자리에 결핍. 그 결핍을 그 간격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체라고 하는 겁니다. 자아는 뭐냐 내가 되고 싶은 모델과 일치시키는 것을 자아라고 해요. 내가 되고 싶은 나. 그러니 자아는 정신병적이에요. 정신병적입니다. 항상.
꿈꾸면 50대는 항상 40대로 나와요. 항상. 이게 착각이에요. 오인입니다. 오인. 잘못 생각한 거예요. 그게 자아고. 주체는 주변 환경에서 나를 정해줘요. 신입사원이 까불락 거리고 지 맘대로 했던 그 신입사원이 대학 졸업해서 딱 취직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완전히 회사에서 밟아버리지요. 그래서 그걸 못 견디는 사람은 일주일 안돼서 사표내고 인턴 할 때 사표내고 이거 아니면 내가 굶어죽나. 사표내고 “엄마 사업할래.” 이런 식으로 나와 버리지요.
그런데 일이 재미있다. 이리 되어버리면 그 자체가 하나의 국가가 돼요. 회사가. 내가 원하는 국가를 내가 찾고 있는 거예요. 인간은 혼자 살수 없어요.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국가라는 그런 환경을 내가 찾아다니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나만 있고 국가는 그 때 그 때 달라요.
만약에 나라에서 세금을 많이 뗀다 하면 그 사람은 어디 가느냐 국가 찾아 미국으로 캐나다로 후딱 살기 좋은데 캐나다, 뉴질랜드 있잖아요. 그런 데로 가버려요. 국가는 내가 정하는 거니까. 이상하게 말이 이상하지요. 모든 결정은 내가 정한다고 해놓고는 누굴 요청합니까? 나를 지배해줄 어떤 정신세계를 또 원하고 있어요. 정신세계를.
돌아가신 부모님이 그립다던지. 자꾸 이게 뭐냐 하면 자아의 허구성을 사회 환경에서 충족되기를 찾고 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이게 보충수업의 10분짜리 강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