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강-암 9장 11-12절(다윗의 텐트)210421-이 근호 목사
34강-암 9장 11-12절(다윗의 텐트)2104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9장 11-12절까지 입니다.
아모스 9:11-12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언약은 사람이 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이유는 그 언약의 출제자, 그 언약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언약은 어떻게 성취되고 어떤 마지막 모습을 보여야 그게 실현되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그것조차도 인간은 모르고 하나님만 아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역사를 하나님의 남기신 언약을 이루는 그 범위 안에서 진행 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에돔이라는 그 민족이 나오지요. 이삭의 두 쌍둥이 아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나온 사람이 에서가 되고 나중 나온 사람이 야곱이 되는데 그 에서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가 에돔입니다. 그와 병행해서 야곱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나라는 복을 받게 되어있고 에서의 후손인 에돔은 저주받게 되어있었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인간을 상대해서 그들의 운명을 결정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하신다. 그렇게 안일하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보게 되면, 여기 에돔이라는 나라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 이 모두가 사적인 좋은 운명 또는 나쁜, 저주받은 운명을 결정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 것이 아니고, 11절에 나오는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셨습니다.
다윗의 무너진 천막, 하나님의 일의 목적이 다윗의 무너진 천막에 있었습니다. 언약의 내용도 바로 이것이고요. 구약성경에서 이 천막, 텐트라 하는 이것은……,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하나님과 만납니다. 만날 때 하나님과 모세과 만난 그것을 모세언약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언약을 주시기 위해서 모세를 불렀고요.
그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데 시내산 위에는 모세만 올라가요. 같은 지구의 땅덩이라도 다른 사람은 못 올라가고 모세만 올라가서 하나님과 독대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거기서 그냥 내려온 것이 아니고 모세언약, 하나님의 율법을 가지고 지상에 내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이건 뭐냐 하면, 하늘의 언약이 모세를 통해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 속으로 하강했다, 내려왔다,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내산 밑의 이스라엘 속에는 세상적인 세속과 모세만 경험했던 그 거룩이 같이 동행하게 되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세계와 인간에게는 아예 없는 하나님의 세계가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같이 공존하고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의 특수성입니다. 다른 민족에는 없는 거예요. 다른 민족에는 그냥 모든 것이 인간의 손으로, 인간의 의도로, 인간의 힘으로 구성되어 있고 만들어진 겁니다. 인간의 손때가 도달하지 않은 것이 없는, 전부 다 인간에 의해서 파악이 가능한 것들만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인간이 범접할 수 없고 다가갈 수 없지만 인간 바로 곁에 엄연히 존재하는 하늘의 요소, 그게 뭐냐? 만남의 장소에요. 그게 텐트입니다. 출애굽기 40장 34절에 보면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구름이라는 것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그 때 다른 사람들이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가지 못하도록 구름이 있었는데 그 구름이 이제는 회막, 그 만남의 장소가 만들어지고 그 장소에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보호하기 위한 구름이 함께 머물러 있어요.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는 겁니다.
이게 텐트입니다. 이게 천막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 믿어서 내가 천국 가느냐, 지옥 가느냐?’ 이게 하나님의 최종 관심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만남의 장소가 건재하고 그게 영원토록 보존하는 것,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그게 나중에 신약에 오게 되면 인물화 되고 인격화되는데 그 인물화 된 이름이 ‘임마누엘’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임마누엘.
그래서 다윗의 텐트라는 말을 하는 것은, 그 이스라엘 자체가 하나님과 만나는 그러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다윗시대까지 끌고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장차 완전하고 불멸한, 영속적인, 영원히 함께 가는 그러한 최종적인 만남의 장소가 다윗언약에 의해서 소개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 인물화 될 때 그 인물을 가지고 로마서 1장 2-4절에서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이야기해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복음은……” 이렇게 복음부터 시작해요. 언젠가 지난 강의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성경은 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신을 전해라, 가 아니고 복음을 전해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는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되어있어요. 로마서 1장 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그러면 2절에서 당신이 전하고자 하는 그 복음이 뭐냐?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복음이라 하는 것은 어떤 인물, 인격 속에 모든 하나님의 언약이 거기에 다 집약 되어 있는 겁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이에요. 교회가 아니고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언약의 완성입니다.
3절에 “이 아들로 말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이 다윗의 텐트로서의 예수님이 등장하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느냐 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육신, 세속적인 거지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지만 4절 계속 보면 “성결의 영(성령)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죽고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아들이 된 분, 거기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만나겠다는 거예요. 이게 다윗의 텐트에요. 장막이에요. 그걸 구약에서는 이스라엘로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무너진 거예요. 우상숭배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무너진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에 무슨 차질이 있는가? 차질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너져야 된다는 겁니다.
다윗의 텐트가 반드시 무너지는 것, 무너짐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만남의 텐트답다는 겁니다. 안 무너지는 것은 하나님의 텐트가 아니라는 겁니다. 만남의 장소가 아니라는 거예요. 무너져야 된다는 거지요. 무너짐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은 자기백성과 만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마저도 이 땅에 와서 무너졌잖아요. 십자가에서 죽었잖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에돔의 자손들 그것도 에돔의 다가 아니고 남은 자지요. 에돔의 남은자가 다윗의 무너진 텐트에, 이스라엘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서 예언해 놓으셨는데 그 예언되었다는 말은, 에돔의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고 무너진 이스라엘에 합류해야 되지요.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는 그 원칙과 질서에 저주받아 합당한 에돔의 남은 자들이 거기에 합류됨으로서 그 무너진 자리가 곧 하나님과 자기 백성이 만나는 유일한 situation, 상황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복음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한 복음이에요. 내가 안 무너지려고 애쓰는 것은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교회 사업이지요.
대구 어느 지묘동에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몇 달 뒤에 와보니 무너지고 없더라. 그거 장막이지요. 물론 무너지는 이유가 이유다워야 되지요. 전부 다 코로나 걸려서 무너졌는지 아니면 복음 전해서 교인들 다 흩어지고 없어졌는지. 제대로 복음답게 무너져야 돼요.
교회라 하는 것은 촛대를 옮기기 위해서 있는 겁니다. 일곱 교회가. 촛대가 옮겨지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 세상은 무한이 아니고 유한이거든요. 그런데 유한을 통해서 무한을 나타내는 겁니다. 그래서 유한이라 하는 것은 무한의 특수한 사례를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한받는 사례.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망하게 된 이유는 이스라엘 자체를 무한으로 봐서 문제에요. 자기는 하나님 나라의 그저 초라한 텐트에 불과한데 자기자신이 유한하다는 생각을 못하고 이 이스라엘이, 무한이 계속 간다고 여기는 거예요. 마치 우리 교회는 영원히 간다는 식으로 교만을 떠는 것, 건방 떪, 건방진 것 그걸 그대로, 이스라엘이 그런 자세로 하나님을 대했던 겁 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무너질 때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은 몰랐어요. 그걸 누가 알겠어요? 어느 인간이, 어느 나라가 무너짐을, 그걸 희망 사항으로 삼는 나라가 누가 있겠습니까? 어느 목회자가, 어느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목표로 목회하는 교회, “올해 2021년도 우리 교회 목표는 무너집시다.” 네 살 먹은 어린애까지도 기도하기를 “그저 무너지게 하옵소서. 기독교가 무너지고 교회가 무너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교회 봤습니까? 없지요.
무너져야 이게 텐트가 되는 이유가,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이유가, 그 비밀이 창세기 25장 23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삭의 부인 리브가가 불임여성, 아기를 못 낳아요. 아기를 못 낳기 때문에, 아기가 없기 때문에 이삭이나 리브가의 인간적인 모든 예측과 예상은 아예 할 수 없습니다. 내 자식 어떻게 키워서 어떻게 잘되고, 우리 자식은 영어 유치원 보내고……, 그런 것이 안 돼요. 왜냐하면 아예 없으니까.
자식이 뭐가 있어야 쟤를 어떤 인물로 키우겠다, 하는데 아예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육적으로 자식을 낳게 되면 그 자식이 20대 30대 될 때까지 부모가 계획을 하거든요. 보험 넣는 이유가 그것 때문에 그렇잖아요. 대학교 들어가면 등록금 비쌀 텐데 미리 보험 넣자, 하는데 이건 뭐 이삭과 리브가는 보험 넣을 것도 없어요. 자식이 있어야지요. 애를 못 낳는데 무슨 장래를 계획하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임여성, 애를 못 낳게 하시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자식을 낳게 함으로써 자식의 모든 미래와 운명은 아버지 되는 이삭과 엄마 되는 리브가의 손을 떠났습니다. 확정적이에요. 그 확정된 내용이 애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동반해서 계시도 같이 주어졌습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이미 예언적으로 이 두 자식의 운명은 확정 났습니다. 이것은 아버지 이삭도 개입하지 못하고요 엄마 리브가도 개입 못해요.
아버지는 맏이 에서가 맘에 들었지만 아버지 이삭의 계획은 틀어졌습니다. 동생 야곱의 거짓말과 엄마의 공모로 인하여 완전히 틀어져 버렸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에서는 인간이 손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 보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되어있어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 이 계시를 받았던 야곱이나 에서나, 아버지 이삭이나 리브가가 머리가 복잡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고 한다면 결국 끝에 가서 누가 유리하냐 하면, 큰 자가 유리한 것이 아니고 어린 자가 유리한 바가 되어버려요.
먼저 난 자 큰 자와 나중 된 자 어린 자, 나이가 시차적으로 어린 자가 있을 때에 큰 자가 나중에 등장한 동생이 형을 섬긴다. 이러면 모든 문제가 깔끔하게 정리돼요. 골치 아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형은 형 대로 태어나고 동생은 동생대로 태어났는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동생이 형 되고 형이 동생 되어 가지고 형이라는 작자가 동생을 섬긴다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나오는 문제. 그러면 동생 될까요, 형 될까요? 이 복잡한 경우의 수가 발생 되는 겁니다. 동생 될까요, 형 될까요? 이 문제가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지 제가 문제를 내보겠어요. 형이 있고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은 형의 장자권을 빼앗아서 동생이 형 되고 형이 동생 되었다. 이게 1회전 땡~! 권투의 1라운드입니다.
그래서 동생이 형이 되어서 좋다고 했는데 2라운드에 가서 형이 된 동생이 동생이 된 형에게 자진해서 형을 반납했다. 그러면 2라운드 끝나고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입니까? 원래 형이었던 형이 형이 되고 원래 동생이었던 동생이 동생으로 돌아갔지요. 그게 2라운드입니다.
제 3라운드. 그렇게 동생이 되었던 그 동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형이 받아야 될 축복을 동생이 다 받고 형은 자기가 받을 모든 축복을 동생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그 동생을 섬긴다면 다시 도로 이제는 동생이 형이 되고 형이 동생이 되어버리는 이것이 3라운드 땡~!
이렇게 되었을 때는 누가 이익이냐? 역시 동생이 이익이겠지요. 그러면 이제 4라운드……, 이거 몇 시간 동안 할까요? 성경은 둘 다 큰 자가 될 수 없음을 보입니다. 야곱과 에서 둘 가운데 어느 누구도 큰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 33장 4절에 나옵니다. 32장에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야곱으로서는 죽고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지요.
그러고 난 뒤에 막 뒤따라온 형 에서를 봤습니다. 그러면 그 전에 에서는 야곱에게 어떤 마음을 품었느냐? 창세기 27장 42절에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하나니”
그러니까 에서가 야곱을 미워해서 죽여버리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41절에 나옵니다.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을 인하여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이거 완전히 가인과 아벨식이 되어버린 겁니다. 형이 동생을 죽였던 창세기 4장의 내용 말입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야곱을 빼돌려서 이제 자기 친정 고향으로 보냈지요. 그러고 난 뒤에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 33장 1절에 보면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다음에 3, 4절에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라고 되어있어요.
분명히 창세기 27장 끝부분에서는 형이 동생을 못 죽여서 한이 맺혀 있는데 33장에서는 둘이 껴안고 울고 있습니다. 울고 난 뒤에 형이 틈새 봐서 동생을 죽입니까? 그런 거 아니거든요. 둘 다 평등하게 되어 버렸어요. 왜 그러냐 하면, 야곱은 에서를 만나서 죽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서 죽은 거예요. 그러니까 영원한 큰 자는 뭐냐? 야곱도 아니고 에서도 아니고 이스라엘이에요.
영원한 큰 자, 영원한 섬겨야 될 자에요. 에서와 야곱은 그동안 뭐했는가? 둘 다 큰 자 되려고, 섬김을 받으려고 시도한 아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세속적인 표현을 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니까 trans, 바뀐다, 변환된다는 그 trans 아시지요, 전압이나 전류의 질을 바꾸는 것, 그 trans, 그렇게 trans 되니까 둘 다, 에서나 야곱이나 다 똑같이 하나님을 섬겨야 될 낮은 자가 된 겁니다. 장자 밑의 어린 자가 된 거예요.
그 다음 라운드는 없어요. 그걸로 끝났어요. 그래서 다윗의 장막 텐트가 만남의 장소가 되려면 반드시 여기서 trans가 일어나야 돼요. 내가 세상적으로 남에게 지지 않겠다는 식으로 태어났던 그 조상, 다시 말해서 땅에 있는 조상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 성질과 성격을 물려받은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고 이게 죽어야 돼요.
땅에 있는 조상으로 인하여 죽고 하늘에 있는 새로운 조상으로 인하여 사는 존재, 그 바꾸는 작업이 다윗의 텐트, 복음의 성령에 의해서, 로마서 1장 4절에서 성결의 영이라 했지요, 복음에 의해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분에 의해서 이게 바뀌어야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땅의 사람은 죽고 하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다윗의 장막이에요. 다윗의 장막은 스스로 무너지고 스스로 다시 세워지는 겁니다. 마치 우리 인생이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땅에서 죽고 하늘에서 다시 태어난다. 참 세상 사람이 들어보면요, 어처구니없이 들리지요. 말이 안 된다고 이야기할 거예요. “말 같지도 않다.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야?” 이렇게 비웃을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은 말이 되어서 살아가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 자체가 말 되는 세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늘의 요소가 공존하는 곳이라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요. 거기는 사람은 손 못 대고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일을 일으키는, 인간이 불가능한 일을 늘 일으키는 그 일이 일어나는 현장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따라서 이스라엘은 필히, 당연히 무너지는 민족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 무너지는 이스라엘을 보고 나는 이스라엘을 무너지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무너짐에 같이 참여하겠다는 그들이 바로 에돔의 남은 자, 저주받은 자 중에서 남은 자, 구원받기 위해서 남은 자가 거기 참여하는 겁니다. 왜냐? 그래야 다윗의 텐트의 기능이 확실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 그런 일이 있었지요. 모압 여인, 저주받은 이방 민족인 모압 여인이 나중에 이스라엘이 왕국, 하나님이 세우시는 실질적인 최초의 왕국의 왕이 되는 그 다윗의 4대 할머니예요. 이게 세상적으로 말이 안 되지요. 그러나 성경에서는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주께서 그런 식으로 일을 벌여나가는 겁니다.
세상에서의 다른 민족, 이스라엘 민족 말고 에돔이나 이런 세상 민족, 속된 민족들은 유한에서 자꾸 유한으로 돌아오려고 해요. 이스라엘은 유한에서 무한으로 가야 되는데. 오늘 본문 보면서 사람들은 나도 이스라엘 사람 될래, 하는데 그 무너진 이스라엘 되어야 되는데 그냥 이스라엘 사람 되어버리면 그것은 그 사람이 부러워서 인간적으로 나라는 인간을 저쪽 인간하고 합세해서 구원이라도 따내려고 생각하는 거예요.
더 쉽게 말씀드려서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에 합세하려고 하는데 교회에 합세하는 것은 유한에서 유한이에요. 정 교회 가려거든 무너질 교회 가세요. 주님께 돌아와야지요, 주님께! 만남의 장소가 교회 아니고 무너진 자를 다시 일으키는 바로 거기가 만남의 장소다, 그 말이지요.
그게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안 무너지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안 무너지게 하고 돋보이게 하면서 자기 자신을 건재하는 식으로 자기 가치를 지키려고 하지요. 세상에서의 모든 일들은 그런 거예요.
예를 들면 한식의 명장, 한식 잘 만드는 어떤 할머니가 전직 농구 감독들 얼마나 닦달 내는지요. 육개장 잘 못 끓인다고. 전직 농구 감독들이 육개장을 잘 끓일 리가 있습니까? 그리고 총기류를 조립하고 분해하는데 달인이 된 한 특전대 상사가 제대하고 난 뒤에 작곡가한테 꾸중을 굉장히 듣고 있어요. 곡 해석을 잘못한다고. 특전대 상사 그만두고 이제 트로트 가수로 직업을 바꾸려 하니까 곡 해석 제대로 하라고 꾸중 듣는 거예요.
성질나면 우리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작곡가 보고 “그러면 네가 이 총기 분해조립 해봐라. 할 줄 아는가.” 또 어떤 철없는 손자는 할아버지가 변호사예요. 변호사인데 기차놀이 못한다고 그렇게 짜증을 내요, 기차놀이 못한다고. 인간이 아는 수준이 자기가 잘 아는 수준 거기가 끝이에요. 자기가 잘 아는 것. possible, 자기가 가능한 것, 가능한 것, 거기서 자꾸 자기의 가치와 의미를 찾습니다. 무너지는 것을 그렇게 싫어해요.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가 뭐냐 하면, 하나의 취미고 오락이에요. “교회 잘하는 것은 목사가 잘하지 집사가 뭘 잘하겠어?” 이 말은 나는 무능하다는 뜻이 아니고 나름 본인이 잘하는 주특기가 있다는 이것을 자랑질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세상에는 경쟁할 만한 어떤 의미 있는 것도 없습니다. 의미 있는 경쟁은 이 땅에 없어요.
주님께서 다윗의 텐트를 무너지게 하는 것은 하늘나라 올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증명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자기가 버젓하게 잘난 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런 자를 천국에서는 안 받아 줘요. 무너져야 돼요.
그래서 복음은 멀쩡한 사람을 찾는 게 아니고 죄인 중에 괴수를 찾습니다. 무너진 자, 자기에게 자기의 주특기에 의미 두지 않는 자, 내가 변호사니, 내가 육개장을 잘 끓이니, 내가 총기분해조립 이거 잘하니, 이런 것으로 다시 그것을 나에게 응집시켜서 ‘나 이정도야’ 하는 그런 자, 다시 말해서 완전히 무너짐이 없는 자는 천국에서 받지를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땅에서 죽고 하늘에서 다시 태어나야 돼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다윗의 천막이 무너졌다는 말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이야기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죽음, 죽음 이후에 대해서는 예수님보다 더 잘 아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이야기에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어떤 할머니가 해녀로 있는데 손녀를 하나 키워요. 어린 소녀하고 해녀 할머니가 바닷가에서 살고 있습니다. 어린 소녀가 물어요. “할머니, 하늘이 넓어요, 바다가 넓어요?” 할머니가 “그거야 바다가 넓지.” 손녀는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아주 좋아해요. 왜냐하면 소녀의 그 안목과 시선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에요. 인간들은 뭡니까? 인간들은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에요.
있음의 세계 그 바깥의 죽음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놓고 다 알았다는 거예요. 내가 아는 세계에서는 내가 전문가고, 내가 이정도 살만한 가치가 있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고, 여기서 내가 밥벌이 할만한 그만한 가치 있는 존재라고 자부하는 거예요. 총기분해 그거 해서 밥먹고 사는 게 자기는 정당하다 그 말이거든요.
그런데 감히 죽음의 세계에 대해서 욕심내는 자들이 있어요.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에 심취한 사람들은 다른 주특기는 없고요. 스노우체인도 못가는 주제에 할 거 뭐 있겠어요? 종교인이나 되어야지. 그 종교인 중에 태국의 어느 승려는 5년 동안이나 죽음의 사후세계에서 부처로부터 상을 받기 위해서 준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게 단두대였어요.
법당 천장에 단두대를 만들어놓고 밧줄로 연결해서 5년 동안 치밀한 준비를 했으니 연습도 얼마나 했겠어요? 드디어 때가 되매 딱 맞춰서 밧줄을 끊으니까 그 승려의 목이 댕강 날아가 죽었습니다. 왜? 그래야 그렇게 부처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쳤으니까 나중에 죽고 난 뒤에 하늘의 큰 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과학은 뭐라고 이야기할까요? 단두대 해놓고 밧줄로 연결해 놓았을 때 그 인장력을 계산하라, 거기에 물리법칙은 어떤 것이 있느냐, 이렇게 나오겠지요. 이 세상은, 인간은 그냥 기계에요. 그 외에는 아무 의미 없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죽음에 대해서 승려는 그냥 내질러 보는 거예요. ‘가면 무슨 일이 되겠지.’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바다가 넓은 것이 아니고, 하늘이 넓은 것이 아니고 죽음이 넓어요. 그 죽음 세계가 넓다고요. 그 죽음 세계는 누가 아느냐? 죽었다가 성결의 영으로 부활하신 분 그분만이 알아요. 그분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완전히 무너진 텐트, 이스라엘이 무너진 텐트, 무너지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어야 되고 반드시 다시 온전한 언약으로 세워지는 것, 그것을 위해서는 이 세상 안에서는 이 다윗의 왕궁은 초라한 텐트처럼, 지지대가 아주 연약한, 바람불면 없어질 연약한 텐트 같은 무게만 지닌, 그런 인장력만 갖고 있는 초라한 나라들이 이스라엘이고 그리고 이방 나라에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쓸모 있는 겁니다.
무너져야 돼요. 누구처럼? 진짜 야곱처럼. 얍복강가에서 하나님 만나서 여지없이 자기가 큰 자니 작은 자니, 큰 자니 작은 자니, 1라운드, 2라운드, 3라운드, 그 복잡한 계산 완전히 날아 가 버리고, 나는 우리 조상으로 인하여, 죽어 마땅한 아담으로 인하여 죽어 마땅하고, 마지막 아담, 하늘에서 오신 주님을 위해서 살 자로 다시 태어나게 된 그 경우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죽으면서 다시 살아난 자가 바로 이스라엘이지요.
그러니까 야곱은 그런 것은 개나 줘버려라, 하고 형에게 일곱 번 절하고요. 형보고 “주여!” 하지요, 주여. 누가 잘났나, 누가 높으냐, 누가 상 받냐, 그게 아니고 하나님 만나고서는 이제는 너나 나나 똑같은 것 뭐 둘 다 평등해. 쓰레기로 평등해요. 쓰레기로 평등하다고요. 기죽을 필요도 없고 우쭐댈 필요도 없어요. 지나 개나 다 쓰레기고 죽을 시체인데요.
그 때 다시 살게 된 이스라엘, 야곱이지요, 이스라엘화 된 이스라엘, 그에게 평생에 잊지 못할 고마운 분이 누구냐? 언약의 하나님이 고마운 분이 되겠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복이 있다면 끝까지 고마운 분이 한 분 계시다는 것, 나를 언약대로 실행해주시는 고마운 분이 있다는 그것만 있어도 이 세상에 받을 복은 다 받은 거예요.
그 한 가지 혜택이 모든 세상의 혜택을 능가합니다. ‘나에게 고마운 분이 있어.’ 내가 고마워해야 될 분이 있다는 거요. 여러분 신상에, 인생에 어떠한 격랑에 휘둘리고 어떠한 난관이 있다 할지라도, 주차장에서 차 빼다가 남의 차 받는 그런 일이 있더라도 그딴 것, 그런 것 말고 그래도 여전히 살아 있는 고마운 분 있으면 그 사람은 로또를 부러워하지 마세요. 이 세상 어떤 사람과 견줄 필요 없어요. 너무너무 다행스런 사람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 가장 저주스러운 사람, 누가 저주스러운 인생을 사느냐? 고마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사람. 고마워할 자가 없어요. 그러니까 누구한테 고마워하느냐? 기껏 자기한테 고마워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나는 총기분해 잘해, 나는 노래 잘해, 나는 육개장 잘 끓여, 나는 평생을 하늘을 우러러 한 줌 부끄러움이 없었어, 이런 것 있잖아요. 윤형주의 6촌 윤동주, 그런 사람, 고마운 사람이 없다는 게 얼마나 저주스러운 거예요.
늘 정신병자 같아. 벌벌벌 떨어. 불안해서. 고마운 분이 있으면 오케이. 그 고마운 분은 나 자신을 아예 땅에 속했다고 취급해서 눌러버려도 그 자체가 또 고마워요. 나를 아주 개무시하는 것에 대해서 더할 나위 없는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어요. 그게 고마워요. 나를 묵사발 내는 그게 고마워요. 그런 데 지옥 갈 저주받은 사람은 그런 분이 없어. 나를 해코지할까 벌벌벌 떨고, 조금 뭣 하면 시비 거나 싶어서 달려들고요.
언약대로 실행하시는 분, 죽었다가 부활 되신 그분,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그분이 갖고 있던 그 성결의 영이 이제 확산되어서 우리 자신에게 다가오게 되면 쓰레기 같은 우리를 주께서 이스라엘의 그 완전함에 참여케 했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큰 자 되지 말고, 또 어설프게 낮은 자 되어서 구원받겠다고 꼼수를 쓰지 말게 해주시고,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정말로 우리를 하나님과 만나게 해주신 분은 주님의 십자가 영인 것을 저희들이 반갑게, 감사히, 고맙게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