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강-암 9장 7-10절(뿌리)210414-이 근호 목사
33강-암 9장 7-10절(뿌리)21041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9장 7-10절까지 입니다.
아모스 9:7-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 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보라 주 여호와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그 한 알갱이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내 백성 중에서 말하기를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
“칼에 죽으리라” 또는 “멸하리라,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다 멸하리라” 그렇게 하나님이 강조하시고 선언을 하시는데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 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블레셋, 아람 사람,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이지요. 뿐만 아니고 9절에 보면 만국, 이 모든 만국의 뿌리가 그들이 스스로 세운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들을 배치하고 조정을 하는 거예요.
장기판에서 장기알을 오늘은 저쪽으로 밀고 차(車)를 이쪽으로 당기고 하는 이 모든 조정을 주관자가 있어서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들의 흥망성쇠를 가지고 뭔가 이 세상 나라들에 대한 계획이 있어요. 그렇게 의도를 가지고 조정을 해 나가셨던 겁니다.
이렇게 조정을 하시는 하나님의 그 계획, 지금 여러 가지 나라가 나왔으니까 저는 이것을 국가의 다양성, 다양하다 해서 다양성으로 부르겠습니다. 나라들이 이렇게 다양하게 될 때 창세기 초반에 보게 되면 처음부터 나라가 다양한 게 아니고 하나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에서 출발한 그 나라가 오늘 아모스 9장에 와서는 어떤 대상이냐 하면, “내가 범죄한 나라를 주목해서 지면에서 멸하리라”라는 그런 심판성으로 꾸준히 일관성 있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2장 3장을 거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어요. 무슨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 인간세계에. 하나님으로부터 노함을 받아도 마땅한 그런 일들이 일어났었어요. 그 일의 결과가 멸하는 겁니다. 그리고 처음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본문 10절에 보면 “화가 우리에게 미치지 아니하며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모든 죄인은 칼에 죽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칼이 등장한다. 칼은 공연히 등장하는 게 아니잖아요. 고기나 썰라고 칼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고 멸해버리려고 칼이 등장하지요. 8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범죄한 나라에 주목하여 지면에서 멸하리라.”라고 되어 있고 8절 그 뒷부분에 봐도 “……그러나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아니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야곱의 집은 온전히 멸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근본적으로 전제 자체가 야곱의 집 이스라엘도 멸망의 대상에서 빠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멸망의 대상이 맞는데 하나님의 추가적이고 연이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조치에 의해서 야곱의 집의 다는 멸망하지 않는다, 다 저주받지는 않는다. 그런 취지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느낌 자체가 애초부터 너희들은 구원의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구스 족속, 이스라엘, 블레셋, 아람, 그리고 여러 만국들이 왜 멸망 해야 되는가, 그 이유를 알아야 되겠지요. 하나님께서 좀 맞자, 그렇게 하는데 맞을 때 맞더라도 맞는 이유를 알고 맞아야 되지 않습니까? “왜 때리십니까?” 그러거든요. 왜 때리십니까. 그것은 이 세상 나라, 물론 이스라엘도 포함되지만, 이 세상 나라가 삶의 방식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뭐냐 하면, 자꾸 밑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어요. 이 지면, 이 지구, 땅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 올라오는 것을 인간들은 자기의 생존하는 데 급급하고 거기에만 신경 쓰다 보니까 아무리 부자가 되고,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행복하다고 주장해도 끊임없이 올라온 그 기운, 땅에서 올라온 그 기운이 굉장히 공포스러워요. 그리고 불안하고. 불안하고 공포스럽고.
아무리 하하, 웃더라도 돌아서면 다시 허무가 찾아오고 두려움에서 전혀 떨쳐서 도망칠 수 없는 그런 처지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은 아시는데 인간들은 도통 모르지요. 그게 당연한 겁니다. 어느 인간이 자기 자신을 저주하겠어요? 자기는 뭔가 사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거든요.
그런데 그 바탕, 그 땅이라는 그 기본 바탕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 일이 과거의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세상 끝날까지 꾸준하게 지속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러면 그 내용은 창세기 3장 14절에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창세기 3장 1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영악스럽다는 말이 있지요. 간교하다. 머리 쓰는 것이 굉장히 수상하다. 머리는 잘 쓰는 데 그 목적하는 바가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쪽으로 머리가 팽팽 돌아가더라,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이미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이 뱀에게 하나님께서 어떤 조치를 내리는가를 보게 되면 14절에 그 저주가 나옵니다.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저주의 형벌, 처벌이.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악마는 바닥을 기는 거예요. 그 바닥에서 못 벗어나면서 바닥을 기는 겁니다. 그런데 이 악마가 굉장히 영악스럽고 간교하다고 되어 있지요. 저주받은 처지가 뭐냐 하면, 맨날 바닥에서 기니까 바닥에서 뭐가 올라오느냐 하면, 저주가 올라오거든요. 범죄하고 난 뒤에 땅 자체가 저주받았으니까. 아담도 마찬가지고요.
땅 자체가 저주를 받았으니까 저주의 기운을 계속 받으면서 악마는 간교하기 때문에 뭘 하느냐 하면, 저주가 아닌 척을 해요. 그 뱀이. 그러니까 이 악마가 선악의 지혜를 이걸 자기가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바닥 존재인 것을 계속해서 감추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위장하는 거지요. 악마에게 이런 마음을 받았던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위장해요. 이게 쉬운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나인 척하는 거예요.
내가 나인 척한다는 말은, 그 하루하루 삶을 살면서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이 땅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이 공포스러움과 불안함, 이게 없는 척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허세 떨면서. 아무리 성공하고 아무리 출세해도 이 불안감은 어떻게 제거할 수가 없어요. 친구들하고 좋다고 놀다가 집에 가서 홀로 방에 잠을 자 보세요. 무섭지요. ‘이게 뭐지? 이게 사는 거야?’ 갑자기 회의가 확 밀려오지요.
이것은 홀아비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모든 인간이 온종일 자는 사람 빼놓고 의식 있는 이상은 전부 다 공포스럽지 않은 척, 나는 불안하지 않은 척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아까 말한 ‘내가 나인 척’ 살아가는 거예요. 가상적인 나, 남이 부러워하는 나를 설정해놓고 거기에 마치 내가 일치가 되는 것처럼 그게 나인 것처럼 상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러한 인간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호수에서 물을 다 뺄 때가 있잖아요. 욕조에서 물 다 빼는 것. 수영장 20년 동안 청소 안 하고 나뒀는데 20년 만에 청소한다. 바닥에서 100원짜리 동전부터 해서 온갖 쓰레기는 다 나오겠지요. 주님께서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7절에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블레셋 사람을 갑돌에서, 아람 사람을 길에서 올라오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말은 뭐냐 하면, 지금 아람 사람들이 아람 사람인 척하는 것을 나는 두고 못 보겠고 내가 블레셋 사람이 블레셋 사람이라고 척하는 그것도 내가 그냥 두지 않겠다. 하나님께서 블레셋이나 아람 사람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을 어디에 한데 불러모았느냐 하면, 지금의 팔레스타인 땅,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다 불러모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나올 때 그냥 나온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놀라운 개입으로 나온 거예요. 그냥 나올 수 없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라고 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겁니다. “너희들은 너희들 뿌리를 모르지만, 바닥을 모르지만 나는 너희의 바닥을 알아. 너는 애굽에 살던 사람이었어 그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분리시켜서 약속의 땅에 들어오게 했다.” 이 말이지요.
그리고 이스라엘만 약속의 땅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곁에 누굴 두었느냐 하면, 블레셋 민족을 두었습니다. 그 블레셋 민족은 어디서 왔는가? 갑돌에서 왔다고 되어 있지요. 갑돌이와 갑순이, 그 갑돌이 아니고요. 이 갑돌이라 하는 것은 크레타섬을 갑돌이라 합니다.
크레타섬은 지금의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바다를 에게해라 해요. 그 에게해에 해삼같이 생긴 섬이 있어요. 그 섬이 크레타섬이에요. 크레사, 그레데,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데 크레타섬에서 살던 민족이 블레셋 민족이었습니다.
원래 블레셋 민족은 해적들이었어요. 해양민족인데, 기원전 1200년경 상당히 오래되었지요, 그때 이집트의 람세스 3세 때,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모세의 인도로 가나안 땅으로 진격해 올라올 때 그때 해양민족이었던 블레셋이 해적 생활 청산하고 좋은 땅에 정착하려고 이집트의 삼각주도 공격하고 우가릿, 지금의 레바논이나 시리아 그쪽도 공격하고 그밖에 여러 곳을 공격했어요.
그러다가 이집트의 람세스 3세에게 패배했는데 람세스 3세가 블레셋 민족을 배려해서 지금의 가나안 땅 지중해 연안의 남쪽 지방에 정착하게 해줬어요. 그게 블레셋 민족이 된 겁니다. 그리고 아람이라는 것은 지금의 시리아를 말하는 거예요. 아람은 어디서 나왔느냐? 길이라는 곳, 기리 혹은 길, 여기는 지금의 터어키 남쪽에 강이 있는데 그게 기르스 강, 그 강하고 지금의 시리아 그 지점에 있던 원주민들이 아람 나라가 되었다. 이사야 22장 6절에 ‘기르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이 아람 나라가 하나의 종족인데 한 나라가 된 것은 다윗시대 때 BC 10세기 경이지요. 그때 아람 나라가 국가가 되어서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을 특히 북이스라엘을 굉장히 괴롭혔지요. 그러니까 아람 나라는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나라고 블레셋 나라는 이스라엘 서쪽에 있는 나라에요. 지중해니까 서남쪽에 있는 나라.
이 두 나라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라고 주께서 장기알 배치하듯 딱 붙여 준 거예요. 왜 붙여 줬는가? 그것이 9절에 나옵니다. “내가 명령하여 이스라엘 족속을 만국 중에 체질하기를 곡식을 체질함 같이 하려니와”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냥 한번 이스라엘이라고 계속 이스라엘로 보지 않고 체질을 하는 거예요.
진짜 이스라엘과 가짜 이스라엘을 골라내기 위해서 체를 드는데 그 체가 뭐냐? 바로 이방 민족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오늘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세상 돌아가는 것을 일부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네가 성도 맞아? 백성 맞아?” 그러면 세상 전부를 다 알아야 돼요.
어떤 입장에서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 올릴 때 그 원리원칙을 그대로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는 그 안목을 가지고 세상 220여 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아야 된다 이 말이에요.
얼마 전에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남편 필립공이 99세에 죽었지요. 참 살기도 오래 살았어요. 그 일과 복음과 관련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 미얀마의 일도 알아야되고 다 알아야 돼요. 왜? 체니까 체. 그러면 체질을 해서 알곡과 가라지를 갈라 내야 되는데 알곡은 뭐고 가라지는 뭐냐?
창세기 3장에서 간교한 뱀이 받는 저주와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 창세기 3장 15절에 있는 대로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운다는 그 약속을 받은 택한 백성 아담과 하와의 그 차이를 둬요. 뱀의 후손도 땅 위에 살아요. 아담의 자손도 땅 위에 삽니다. 그러면 둘 다 땅에서 올라오는 저주를 온몸으로 받아냅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습니다. 뱀은 바닥을 기어요.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닥을 깁니다.
바닥을 기니까 아무리 세상 적으로 성공하고 출세해도 이 바닥에서 근원적으로 올라오는 이 저주를 감당할 수가 없어요. 공포심을. 두려움이라는 것은 대상이 있어서 대상 치워버리면 두려움도 없어지는데 공포라 하는 것은 두려움 정도가 아니에요. 심각해요. 왜냐하면 대상 자체가 없어요. 어디서 주는 불안감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것은 뭐냐? 항상 인간은 뿌리 자체가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이 뿌리가 안정적이지 못한 데서 오는 공포심이에요. 10억을 벌어도 20억을 벌어도, 뭐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지만, 이 바닥과 뿌리가, 나의 존재의 뿌리가 결코 영원히 안정적으로 보장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공포와 불안감이에요.
그러면 그 공포와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은 뭐냐? 그것은 바로 자기의 뿌리를 감추고, 공포를 감추고 불안감을 억지로 감추는 방식으로, 공포를 스스로 이겨내기 위해서 그것을 오버해서 과도한 행동으로 자기의 가진 힘과 자기 잘난 것과 자기 의를 가지고 자기를 포장을 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은 스스로 전시용 존재가 되는 거예요. 스스로 전시용 존재, 스스로 흥정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타인보고 묻는 거예요. ‘나 값어치가 어느 정도 나가는데?’ 지나가는 사람 보고 묻는 거지요. 서로가 서로를 보고 묻는 거예요. ‘아빠, 이 정도 공부 잘하면 나 인정해 주겠어?’ 이런 식으로. 이게 뭐냐 하면, 가게 보면 상품을 진열해 놓잖아요. 그 진열장에 자진해서 자기를 안치해서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아야 조금이라도 자기의 불안감이나 공포에서 해소가 좀 될까, 라는 식으로 하루하루를 매일같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참 불쌍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느냐?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산부인과에서 갓 태어난 아이가 울지 않을 경우에는 거꾸로 들고 엉덩이를 친답니다. 그런 사진을 본 적은 있어요. 오늘 본문 선지자 아모스의 계시에 의하면 이스라엘을 거꾸로 들어요. 거꾸로 들어서 뿌리가 나오도록. 네 뿌리를 내가 정직하게 감추지 말고 목격하게 만드는 일들을 일으킨다는 거예요.
‘……인체’ 하지 말고,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 말고 나의 뿌리가 어떤가를 보게 하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7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내게 구스 족속 같지 아니하냐” 구스 족속이라 하는 이 사람들은 지금의 에티오피아를 구스라 하는데요, 아프리카 흑인들입니다. 멜라닌 색소가 많아서 피부가 까만데 거기에 대해서 예레미야 13장 23절에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이 말은 뭐냐 하면, 타고난 피부를 변할 수 없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어떤 존재냐 하면, 스스로 피부가 달라지려야 달라질 수 없는 흑인과 같은 존재 자기 죄로 인하여 벗어날 수 없는 존재. 무는 얼른 보면 하얗게 예쁘잖아요. 그런데 그 뿌리 채 뽑아서 보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뿌리를 뽑는 거예요. 뽑으면 그것은 뭐냐? 시커멓다는 겁니다.
네가 허연 체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나는 뿌리마저 하얗다고 우기지 말라는 겁니다. 거기에 속아 넘어가는 하나님 아니십니다. 그래서 알 수 없는 공포, 알 수 없는 이 불안감은 뭐냐 하면, 자꾸 자기 뿌리를 감추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현대인들, 현대인뿐 아니고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입니다만, 현대인의 삶의 방식이라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을 하느냐 하면, 우리가 감추고 있는 그 뿌리를 주목하고 그것을 들춰내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과의 차이가 없지 않느냐? 창세기 3장에 보면 이스라엘에게는 뭐가 주어지느냐 하면, 생명이 주어져요.
원래 저주받아서 흙에서 흙으로 가서 저주받은 흙의 존재가 되어야 되는데 끝까지, 죽고 난 뒤에도 불안감과 공포심에서 못 벗어나는, 그래서 벌벌 떨면서 살아가야 되는 그것이 마땅하고 그게 기본이거든요. 그게 인간이다, 그 말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하라는 말이지요. 네가 행복을 원하거나 구원을 받거나 그런 쓸데없는 환상을 꿈꾸지 말라. 네 뿌리에 합당한 존재인 것을 네가 자각하라 그 말이지요.
그래서 그 드라마에 보면 “이 근본도 없는 것이!” 하잖아요. 그 말이 맞아요. 근본 없는 것 맞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말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바로 하와의 이름, 아담의 아내 이름이 생명이에요. 이름이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생명과 관련해서 무화과 나뭇잎 치마를 벗겨버리고 하나님께서 가죽옷으로 치마를 해 입혔던 겁니다.
이것은 앞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이스라엘에게는, 택한 백성에게는 개입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방 민족이 아무리 많이 이스라엘 곁에 있더라도 차이가 나지요. 한쪽에는 생명이 없는 자들인 만국인들, 그리고 생명이 있는 자들, 생명이 있는 그 사람만이 이스라엘이라고 체질 골라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작업은 계속된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게 뭐냐 하면, 그 여자의 후손에 생명이 있다고 할 때 그 진짜 이스라엘, 뿌리가 죽음이 아니고, 저주가 아니고, 지옥이 아니고 천국에 뿌리를 둔 사람들은 그러면 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말인데 그 이스라엘은 어디 있습니까, 라고 궁금해하는 거예요. 그 이스라엘은 누구 십니까, 라고 하겠지요.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예언한 것이 이사야 7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이름을 하나님과 같이 있다 해서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름이 바뀌는 거지요.
주님이 친히 뿌리가 되시는 거예요. 주의 생명이. 거기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나오는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여러분은 ‘아, 그 정도는 우리가 압니다. 아는데 실제 우리가 살아가면서 체험적으로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 것이 처녀가 잉태한, 그야말로 없는 데서 새로 생기는 새로운 피조물다운 삶의 방식이 됩니까?’라고 여러분이 궁금해한다면 그것은 뿌리가 바뀌었을 때 나타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뿌리가 바뀌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뿌리가, 죄와 저주의 뿌리가 있으면 우리는 아무리 성공하고 좋은 일이 있더라도 돌아서면 다시 불안감이 찾아오고 공포가 찾아오는 거예요. 이만하면 되었다 했는데. 딸 결혼식 상견례 전에 저쪽 부모를 먼저 만났거든요. ‘저쪽에서 우리 딸이 싫다 하면 어떻게 되지?’ 많이 불안했겠지요.
그리고 ‘다 잘 되어 가는데 내가 말을 또 함부로 해서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것이 되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인간은 자기가 자기인 척을 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가 다르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상상을 할 뿐이지 진짜 자기가 어디로 어떻게 튈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사돈도 참 좋네, 하는 그런 소리 들으면 좋겠다.’ 그런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을 가지고 동성로에 있는 카페에 갔다 그 말이지요. 거기서 이야기가 대체로,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대체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아까 사돈 만나기 전의 모든 불안감과 공포는 사라졌지요.
그러고 난 뒤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또 새로운 공포와 불안감이 발생 되기 시작하는 겁니다. ‘날짜 조정에서 또 틀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 그래서 모든 인간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올라오는 거예요. 이 불안감과 공포가.
그런데 이 모습이 성도다운 모습이 아니거든요. 그러면 성도다운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경험한 체험이 우리에게 밀려오게 되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주어지게 되느냐 하면, 그 모든 것이 순간에 갇혀 버립니다.
마태복음 26장에서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 예수님만 기도하라 해놓고 제자들은 기도하러 간 게 아니라 자러 갔거든요. 기도원에서 청년회나 주일학교 수련회 할 때 전도사만 기도하고 나머지는 다 MT나 간 듯이 놀다가 자고 오는 것처럼. 삼육구삼육구, 그런 거나 하다가 내려오는 것처럼. 제자들 그냥 다 잔 거예요.
그럴 때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마태복음 26장 40절에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는 말씀을 해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과 함께 있으면 모든 것이 순간으로, 순간 안에 이게 얼어붙어요. 순간 안에 얼어붙으면 뭐도 얼어붙느냐 하면, 공포와 불안감도 얼어서 아무런 영향력을 나에게 줄 수가 없어요. 주와 함께 있으면.
그 찰나적 순간, 짧은 순간,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고 아는 그 순간은 그게 몇 분이 되든 몇 시간이든 관계없이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과 함께 있는 체험이 나를 덮쳐버려요. 욕조에서 물을 다 빼낼 때 쓰레기만 있잖아요. 그러니까 욕조의 물을 다 빼보니까 거기는 사돈도 안 보이고 결혼식 날짜도 안 보이고 주님이 함께 있었던 거예요.
그러면 날짜 잡을 때 티격태격하지 않겠는가, 결혼식 혼수는 얼마나 하고……, 그런 쓰잘데 없는 쓰레기 같은 생각들이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 앞에서, 용서하심 앞에서 그것은 아무 염려나 걱정거리가 되지를 않는 거예요. 왜 사람이 자꾸 염려하고 걱정하느냐 하면, 염려걱정이 있는 것을 애써 다른 것으로, 자기 역사나 자기 찬란한 과거나 그것 가지고 남에게 뭔가 그럴싸하게 보이려고 하니까 이러한 동작, 몸짓 자체가 본인이 보기에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평소에 집에 있을 때 그렇게 이야기 잘 하는 사람도 이 앞에서 기도해 보라고 하면 벌벌벌벌, 떨지요. 혼자 있어요, 혼자. 혼자 있었기 때문에 그래요. 얼어붙지를 않은 거예요. 주님과 함께 있으면 모든 시간 가는 것도 의미가 없고 나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왜 그렇게 순간이 되느냐 하면, 바로 그것이 사도바울의 편지에 나오는 복음의 핵심으로서 계시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로마서 16장 25, 26절에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바 되었으며……” 감추었던 것인데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다. 우리의 뿌리, 내가 생각하는 내 바닥, 내 뿌리, 내가 사는 그 땅에서 뭔가 하나님이 감추었다가 이제는 드러내는 것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 26절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그걸 가지고 복음의 비밀, 비밀의 계시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3장 9절에도 요약되어 나오지요.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방 민족과 더불어서 함께 붙어 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이 ‘……인체’ 하는 그것, 잘난 체하는 그것, 불안과 근심을 애써 억지를 부리면서 힘으로서 나 잘났지, 우리나라 힘 많아, 우리나라 무기 많아, 이런 식으로 잘난 체하는 그것을 본받았어요.
그러나 자기가 긁어모으는 힘으로 언제까지 하나님을 속일 생각이었습니까? 그것은 자기에게 밀려오는 공포와 저주와 이런 것을 억누를 수가 없어요. 감당 못 합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이 복음이 오게 되면 하나님께서 감추어진 우리 뿌리, 생명, 생명으로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그 여자의 후손, 처녀로 태어난 여자의 후손, 그 여자의 후손이 너의 뿌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그 복음 앞에서, 자수 하면 안 되고요, 체포 당해야 돼요.
“몰랐습니다. 반성합니다. 이제는 자수합니다.” 하지 마세요. 그런 짓 하지 마세요. 그건 또 자기 잘났다, 하는 겁니다. 장래가 위태하고 지옥 갈까 겁이 나니까 예수 믿어서 그 공포를 애써 감추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그것은 자수하는 방법이에요. 그렇게 자수해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자수해서는 천국 가는 것이 아니에요. 유사신앙인 되어서 지옥 갑니다. 벌벌 떨면서.
체포 당해야 됩니다. “귀하를 현 시각으로 ○○법 위반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권리가 있으며 변명의 기회가 있고 체포구속적부심을 법원에 청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미란다원칙 고지하고 “강서경찰서에서 봅시다.” 하고 유치장에 집어넣을 때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사랑의 구속이에요. 사랑의 구속입니다.
창세 전에 있었던 그 비밀에 구속당하는 겁니다. 영원부터 감추었던 그 비밀, 그 비밀에 구속당하는 거예요. ‘아, 안되는 것을 되게 하셨구나!’ 누가?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 힘으로 감당되지 않는 공포와 악마의 그 저주에서 못 벗어나는 것을 주께서 강제로 체포해서 구원하시는 거예요.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체질한다’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는 “너는 실컷 이 세상 삶을 살아라. 살면서 그들과 동화될 수밖에 없는 너의 한계를 알아라.” 욕하면서 닮아가는 우리 자신의 본 모습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공포와 저주에서 어떻게 하면 자기를 벌벌 떨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 읽고, 그것도 모자라서 성경 쓰고, 기도도 빡세게 하고, 전도도 하고, 온갖 것 하면서 ‘이 불안감을 공포를 어떻게 해소할까? 지옥 가면 안 되는데, 지옥 가면 안 되는데……’
바로 그러한 것이 너뿐만이 아니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오늘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님 겟세마네에서 기도할 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나 성령이 와서 주님께서 얼음! 순간 얼음으로 동결시켜 버렸어요.
딱 동결시키니까 근본이 없는 게 아니고 몰랐던 근본에서부터 주님께서 시작을 하기에 이제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겁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잘난 것을 자랑할 때 우리는 우리를 우리 되게 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임마누엘, 바로 인간에게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처녀가 잉태했으니까, 그런 존재가 되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성도,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예언된 하나님의 일관된 일의 결과인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의 일관성을 우리는 그동안 놓치고 살았습니다. 그저 내가 스스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에 온 신경을 다 쓰고 몰두하고 땅에서 올라오는 저주를 내 식대로 해소하려고 부질없는 노릇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다 그것이 헛된 짓인 것을 깨달았사오니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어린양의 유월절의 피만 자랑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