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2b 울산강의-레위기 27장 : 초과적인 것
20210402b 울산강의-레위기 27장 : 초과적인 것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해보겠습니다.
성경 내용이 얼마나 어려운지 왜 어려우냐 하면 이미 우리가 다수의 다수에 포함이 돼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유일하심은 다수의 다수에 포함이 안 돼있단 말이죠. 우리는 이 세상 안에 들어있는데 주님은 여기에 계시지 않아요. 주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 말씀을 이룰 때 여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초과적인 내용이 있는 거예요. 초과하는 거예요.
그럼 뭐를 초과한단 말인가? 1:1을 초과해요. 다수의 사람은 너나 나나 그렇고 그런 인간들이에요.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나. 네가 내 인생 대신하겠어? 아무리 형제들 있지만 내 인생은 마지막 책임자는 내가 꾸려나가야 된단 말이죠.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1로 친다면 나는 2가 되는 게 아니고 나도 1이에요. 1:1이니까.
그런데 주님은 초과적인 거예요. 주님은 1:1이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1:1.2가 돼야 된다는 거예요. 이 0.2가 뭐가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초과하심을 드러내는 거예요. 그럼 초과하심 안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 순환구조가 들어있어요. 인간의 시간 다룸, 인간이 자기 시간을 다루는 것을 순환구조로 동그랗게 폐쇄회로를 만드는 겁니다. 시간이 직선으로 돼있으면 폐쇄회로가 아니죠. 열려있지요. 그러나 노란고무줄처럼 갇혀있으면 이걸 폐쇄구조라 해요. 빠져나갈 데가 없어요. 뺑뺑이 도는 거예요. 매일같이 쳇바퀴 도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일월화수목금토, 토요일은 안식일이니까 처음부터 창세기 1장에 7의 순환구조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시간으로 허락하신 거예요. 그런데 허락된 것이 뭐냐? 안식일 율법이에요. 그렇다면 율법, 하나님의 법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나 되지 않고 법이라는 조건을 이스라엘 몸에 아예 율법으로 새겨버렸지요. 그게 할례언약이잖아요. 할례언약은 뭐다? 피지요. 바깥에 있는 문밖에 있던 어린양의 피와 이 피와 일치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가 되는 겁니다.
실제로 출애굽 때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도 하나님의 조건은 뭐냐? 모든 남자는 필히 할례를 받으라는 조건 하에 어린양의 피를 발랐던 거예요. 아까 모세가 할례언약을 할 때 십보라가, 당신은 피 남편이라 했지요. 내 몸에 있는 피와 주님의 피와 만남이 내가 살고 있는 다수의 다수 세계에서는 있을 필요도 없고 도저히 그런 생각이 날 수도 없는 초과적인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돼요. 이게 조건이에요.
그런데 모든 순환구조 중에서 모든 것이 초과적인 것이 이 땅에 와서는 이스라엘에서는 순환구조로 주어지는 겁니다. 순환구조로 주어지게 되면 이 안이 뭐냐 하면 전부 다 이스라엘 백성이 순간이 돼버려요. 시간이 아니고 폐쇄시간이기 때문에 안이 순간이 되는 겁니다. 이 안에 이스라엘 백성이 갇혀있어야 돼요. 이 안에 들어있어야 돼요. 여기서 이탈하면 이스라엘은 멸망하는 겁니다.
그 갇혀있는 그것을 시간을 통해서 이야기했지만 또 여기선 밭을 통해서 이야기하지요. 밭을 기업으로 받는 거예요. 기업에 씨를 뿌리잖아요. 그러면 보통 농부들이 씨를 뿌릴 때에 여기에 부피단위가 한 호멜지기라고 나오지요. 이게 220리터라고 돼있고 거기에 세금이 50세겔이니까 28만 원x50이니까 1440만 원을 하나님께 드릴 때는 이런 식으로 드리는 거예요.
이건 어떻게 계산하느냐 하면 바로 50년 되면 어차피 드려야 돼요. 1년에 1세겔씩, 28만 원씩 50곱하면 뭐가 됩니까? 이걸 한꺼번에 드리는 거예요. 한꺼번이란 말은 순간이란 말이다. 앞으로 차차 하나님 잘 믿을게요, 하면 안 되지요. 차차란 것은 시간을 내가 관리하잖아요. 하나님의 성령이 올 때 차차 옵니까, 한 순간에 오는 거예요? 한 순간이죠.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할 때 순간적으로 와버려요. 그걸 성령세례라 하지요. 신약에. 한 순간에 딱 와버려요.
이렇게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이 소위 나는 예수 믿는다, 라고 여길 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아까 다수의 다수에서 자기 시간을 자기가 관리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뭐라 하느냐 하면, “나 죄 용서받았는데 뭐.” 죄 용서받았으니까 내 마음대로 살아도 괜찮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령세례가 와버리면 그 사람은 자기 시간이 있어요, 없어요? 더 이상 자기 시간이 허용되지 않고 고린도후서 5장 15절 말씀처럼 전에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날 위해 죽었다가 사신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걸로 순간적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그 순간이 몇 초인지 묻지 마세요. 그게 10년이 될 수 있고 20년 될 수 있어요. 하지만 10년 동안 애썼다는 말하지 마세요. 10년이 지나도 20년 지나도 하나님 보시기에 고게 성령의 관리 하에 있던 한 순간이 되는 겁니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실어야지 나의 구원욕구나 의지를 실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밭에다 세금을 내라 할 때에 이것은 밭 자체에서 50년, 희년도 되지만 이 순환구조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번제에서 그 다음에 속죄제, 속건제와 화목제, 제사 안의 자체적인 순환구조도 같이 주어지게 됩니다. 여기 레위기 27장 9절에 보면, “사람이 예물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생축이면 서원물로 여호와께 드릴 때는 다 거룩하니 그것을 변개하여 우열 간 바꾸지 못할 것이요”
12절에 보면, “제사장은 그 우열 간에 정가할지니 그 값이 제사장의 정한대로 될 것이며” 여기 제사장 나오지요.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리해서 하나님의 기능을 이스라엘 속에서 백성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그 제사장이 예물을 받는다든지 가축을 받을 때 그 제사장하는 일이 뭐예요? 무슨 일을 하는 게 제사장입니까? 그야말로 제사하는 일이에요.
그렇다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 발랐잖아요. 그 피 바른 것이 이스라엘 역사 내에 매일같이 반복돼야 되겠지요. 그 반복 되는 제사 일에 종사하는 자가 제사장입니다. 그렇다면 그 제사장은 인간적인 1:1이 아니고 뭐냐 하면 초과적인 거예요. 초과적인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나오지 않는 것, 인간의 다수의 다수에서 나올 수 없는 것, 초과적인 것.
적어볼게요. 주님의 일은 인간세계에서 있을 수 없는 초과적인 일이다. 이것을 제사장을 뭐로 정했느냐 하면 물론 하나님 뜻이죠.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뭘 정했느냐 하면 이걸 20%로 본 겁니다. 그러면 이걸 20%로 정했다는 것이 30%도 아니고 10%도 아니고 5%도 아니고 딱 20%로 정했다는 이 일이 어떻게 하나님의 초과적인 일에 해당되는 덤으로 주는 일이 되겠느냐 할 때 그게 제사에 보면 나와요. 어떤 제사에 나오느냐 하면 속건제를 찾아보면 되는 겁니다.
속건제가 레위기 6장에 보면 나옵니다. 7장에도 속건제 나와요. 이 속건제는 사람이 사람에게 죄 지었을 때 죄를 용서하는 그게 속건제에요. 그 속건제 원칙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만약에 물건을 훔쳐갔다든지 또는 가져가서 부셔졌다 할 때는 반드시 오분의 일을 더하게 돼있습니다. 속죄제는 그런 법령이 없어요. 화목제도 그런 법령이 없습니다. 번제도 그런 법령이 없어요. 그냥 범죄 한 것은 제물을 다 태워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속건제 같은 경우에는 제사 드렸다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속건제도 속죄제와 동일하게 하나님께 죄의 제사를 드려야 돼요. 그것이 레위기 5장 16절에 나오지요. 그 다음에 6장, 7장에도 나옵니다. 5장 16절에, “성물에 대한 범과를 갚되 그것에 오분 일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이건 제사장만 오분의 일을 주는 게 아니고 피해당사자에게도 따로 오분의 일을 더 줘야 돼요. 그건 6장 5절에,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보낼 것이니”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왜 오분의 일이냐? 누가 정했느냐? 하나님이 정한 거예요. 어떻게? 초과적으로. 이 말은 내가 너희들 상대하는 것은 인간 대 인간으로 상대하는 게 아니란 거예요. 인간들은 1:1 관계에요. 지금 제가 첫째 시간부터 여러 번 이야기했어요. 1:1 관계에요. “당신 가져갔는데 부셔졌습니다.” “아이고, 아는 사이에 그냥 본전만 돌려줘도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인정으로 할 수 있어요. 당신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인데 그만한 사정 봐줘야지요. 이거는 인간 대 인간이에요. 조정을 누가 하느냐? 본인이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피해자가 누구냐 하면 제사장이 피해자에요. 하나님이 피해자라고요. 네 것이 없어요. 내 것이 없다고요. 내 것이 없고 누구 것이냐 하면 하나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것에 손상이 갔을 때는 거기에 초과적인 것이 담겨야 돼요. 그게 오분의 일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초과적인 것이 담겨야 되느냐? 여기에 15절에 보면, “그 사람이 자기 집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자기 소유가 되리라” 제사장에게 준다 해놓고, “생각 바뀌었습니다. 저 사람한테 주기 싫어요. 내 것 도로 가져가겠습니다.” “그래 도로 가져가라.” 이게 안 돼요. “오분의 일 내놔.” “뭐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말실수 못합니까.” “오분의 일 내놔.”
그 오분의 일이란 것은 소유권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거예요. 모든 소유권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 그러면 이 20%는 뭐냐? 20%의 내막을 쪼개보면 이건 누구냐 하면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자신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 말고 이 땅을 다녀가신 인간세계에 다녀가신 하나님이 20%에 해당되는 겁니다.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이사야 53장 10절에 나옵니다.
이사야 53장 10절에 보면 거기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으리요, 이렇게 시작하는 대목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유월절 어린양처럼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이 된다고 7절에 나오지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니까 제가 아까 했잖아요. 하나님은 뭘 반복한다고요? 출애굽 사건을 반복하는 거예요. 그게 요건이에요. 그게 조건이에요. 다른 건 안 받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그 다음에 무슨 제물 나옵니까? 속건제물이죠. 왜 예수님이 속건제물이냐 하면 예수님은 이 땅의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래요.
이 땅의 사람들은 죄를 지은 죄인들이에요. 죄인들이기 때문에 무슨 사고냐 하면 1:1의 사고를 갖고 있습니다. 죄인이 뭡니까, 물으면 죄인이란 내 인생 내가 관리하는 게 죄인이에요. 죄 한 번 적어볼까요. 죄는 내 인생 내가 관리하는 것, 죄인입니다. 이걸 어떻게 이렇게 규정하느냐? 이걸 규정하려면 사건이 투입돼야 돼요. 무슨 사건? 출애굽 사건.
출애굽 사건 때 애굽 사람들이 장자가 죽었던 이유. 장자는 옛날에 학폭을 했다, 성질이 못됐다, 그것 아닙니다. 우리 아들은 잠버릇이 나빠서 하나님이 죽였다. 아닙니다. 이스라엘 애들은 잠버릇 좋아요? 어떤 경우라도 다수의 다수인 이 세상에서 네가 지옥 가고 내가 천국 가는 이유를 이 세상 것으론 증명 될 수가 없어요. 규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왜 천국 가야 되고 너는 왜 지옥 가야 되는지를 이 세상 것으로서는 해명이 되질 않아요. 그게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까.
그동안 우리가 사는 목적이 뭐였어요? 너보다 나은 사람 티내려고 살았잖아요, 우리가. 너보다 더 잘 먹고 잘 사는 사람, 똑똑한 사람 되려고 했잖아요. 그러나 너나 나나 똑같아 버리면 이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는 그 사고방식은 이 세상에선 통할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에선 일체 통하질 않는 거예요.
제사를 하나님께서 번제부터 드리는 게 아니고 제일 먼저 속죄제부터에요. 속죄제나 속건제 드리고 그 다음에 번제 드리고 마지막에 화목제로 마감돼서 순환구조로 돌립니다. 돌릴 때 속죄제 들어가고 속건제 들어가잖아요. 이 제사에 있어서 속건제는 20% 물어주는 것, 괜히 객기 부린다고, “우리 집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다음 날 돼서, “목사님 죄송합니다. 못 바치겠습니다.” “20% 내놔.” 호기를 부리다가 까불다가 이렇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상대로 그런 식으로 호기부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 속건제 20%을 하나님께서는 인간세계의 실상을 그대로 하나님 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예수님을 보냈어요. 이사야 53장 10절에. 그분이 이 땅에 와서 곱게 죽었습니까, 아니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으로 죽었어요? 도살장에 끌려간 양이라고요. 그러면 이 양은 도살장에 살려고 가는 게 아닙니다.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럼 이 도살장에는 뭐가 짊어져있냐 하면 인간들의 건방짐, 객기, 오기, 인간들 자기관리, 죄, 자기관리가 죄니까 이것을 주님에게 다 씌운 거죠.
예를 들면 땅 바치겠습니다. 아니 취소입니다. 땅 안 바치겠습니다. 이런 것. 받은 계약금 돌려줄게요. 그러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20%을 추가해야 됩니다. 이 추가한 만큼 인간은 건방떨었다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도 모르고 자기만 안다고 우기지만 본인이 누군지도 몰라요. 본인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거부당한 존재인지 몰라요. 그냥 지 평소의 습관대로 다수의 다수 세계에서 자기 살 궁리만 챙기면서 그냥 사는 거예요.
초과적인 것이 인간에게 나오질 않습니다. 자기 시간, 스케줄 자기가 짜나가겠다는 거예요. 출애굽 사건 옛날에 잊었지요. 구원받았으면 됐잖아요. 이제는 출애굽 사건, 십자가 다 잊어버리고 이제는 살고 싶으면 내가 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나가니까. 그게 어떻게 성령세례 받은 사람의 참 모습이라 할 수 있겠어요. 순간인데 순간적인데 하나님의 계획이 그 사람을 압도하고 지배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여기 이사야 53장 9절에 보면,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했는데 예수님이 착한 분입니까, 아니면 아버지의 명을 따르는 분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착한 분이 아니고 명을 따르는 분이지요. 착한 분이 아니에요. 따라서 성도는 착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주의 뜻이 지배하는 사람이에요? 주의 뜻과 관련돼있는 사람이지요. 착한 사람이 아니지요. 여러분 이것 혼동하면 안 돼요. 착오 일으키면 안 됩니다. 예수 믿고 착한 사람 되면 안 돼요. 예수 믿고 나를 위해 살지 않는 사람 돼야지요.
날 위해 살지 않는다면 나는 20%의 덤에 묻혀 구원된 사람이란 뜻이에요. 내 힘으로 구원된 아니고 나의 건방떪에서 오는 하나님한테 헛소리해놓고 다시 물어주려 하니까 20%의 추가된 초과된 게 들어왔지요. 따라서 20%란 말은 인간세계에서 원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초과적인 것의 내용이 속건제 20%에요. 20% 해야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이 말은 뭐냐? 인간이 원래대로 한다면 뭘 경유해야 되느냐 하면 자기의 촐랑댐과 건방짐, 나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는 이런 죄를 경유해야 인간은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이것 무지무지하게 소중한 소식이에요. 사람은 착해야 원래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잖아요. 그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인간은 뭐로 규명됐습니까? 스스로 구원될 수 있는 천하의 죄인으로 확정됐지요.
그 확정된 그것을 감사하라 이 말입니다. 고마워하라 이 말입니다. 자꾸 착해서 천당 갈 생각 말고 선한 일해서 천당 갈 생각 말고. 선한 일도 자기관리에요. 그게 자기 의잖아요. 다시 묻습니다. 인간에게 성도에게 초과적인 것 성령께서 오게 되면 초과적인 게 뭡니까? 누가 뭐래도 나는 죄인이다. 이거에요. 아무것도 안 해도 나는 죄인이다.
왜냐하면 내가 나쁜 짓을 기억나고 생각나서가 아니라 우리를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나보고 죄인이라 해. 그러면 끝난 거예요. 구원하신 분이 나를 죄인이라 한다면 그 죄인 되는 규정을 세상의 천하의 어떤 감사장보다도 감사패보다도 더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돼요. 인생 게임 오버. 인생 끝났어요. 인생 끝났습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설교했잖아요. 우리가 이 시점으로 인생관 정리하자고요. 인생은 코미디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웃으란 말이 아니고 농담이란 뜻이에요. 진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죄를 의로 바꾸려고 진지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주님의 20%가 속건 제물로 희생하신 속건이란 그걸 통해서 아버지 뜻을 이루기 위해서 속건제 제물 되신 그 취지를 우리가 훼손하면 안 돼요.
뭐 주를 위해서 산다고 해서 아프가니스칸 선교하고 헌금 많이 하고 남에게 희생하고 그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방법, 간단합니다. 주님이 추가적으로 더 채워야 될 20%에 해당되는 그 20%가 저의 죄 때문입니다. 주님은 저의 속건 제물 되십니다. 내가 속건 제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주께서 속건 제물 되시는 겁니다. 그게 영광입니다.
그러려면 하루 일과를 지나고 기도할 때 뭐라고 기도해야 됩니까? 참 오늘도 건방떨었고 내가 내 인생 관리하려고 어지간히 애썼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이미 의인으로 규정하고 예수님의 피로써 용서했다는 그 사실이 여전히 최고 귀하고 제일 소중하게 느껴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기도 말고 다른 기도할 게 뭐가 있습니까. 자녀를 위해서 기도하려면 우리 자녀도 이 피를 알게 해주시고 우리 남편도 이 피, 아내도 이 피를 알게 해주시고 우리 자식들도 이 피를 알게 하옵소서. 세상은 게임 오버,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하옵소서.
시간은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동그란 시간 안에 순환된 시간, 순간이죠. 어떤 순간이 긴 순간도 있지만 그 한 평생을 순간 안에 갇혀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다수와 초과적인 것을 다시 이야기하겠어요. 인간은 다수입니다. 어떤 누구도 독보적인 존재는 없습니다. 근데 이스라엘에게는 독보적인 존재가 나타났지요. 오늘 본문에 누구냐 하면 누굽니까? 바로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은 백성들의 마음을 들어야 될까요, 아니면 제사장을 바라봐야 될까요, 어느 쪽입니까? 바라봐야 되는 거예요. 제사장 뒤에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경계선상에 제사장이 있거든요.
이 제사장을 우리 강의에 의하면 어떤 존재냐 하면 초과적 존재, 이제 초과적 존재의 뜻을 아시겠지요. 인간세계의 1:1이 아니란 말이죠. 감히 제사장과 너나 나나 똑같다, 이러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실제로 민수기 16장에 보면 고라자손이 모세한테 대들었잖아요. 너나 나나 출애굽 할 때 같이 나왔잖아. 네가 뭔데 대장질 계속하느냐고 대들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 하면 여러분 아시다시피 땅 갈라져서, 민수기 16장 31절에 보면, “이 모든 말을 마치는 동시에 그들의 밑의 땅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 가족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 물건을 삼키매 그들과 그 모든 소속이 산채로 음부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합하니 그들이 총회 중에서 망하니라”
그건 무슨 뜻이냐 하면 지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관계에서 이탈하게 되면 그 자체가 바깥세계 자체가 지옥입니다. 그래서 그냥 울산광역시에 산다 할 때 못 알아듣는 사람은 할 수 없지만 울산광역시에 산다는 그런 울산과 마음속으로는 울산이란 지옥에 삽니다. 언약 바깥의 세계에요. 1:1의 세계입니다. 민주주의는 투표할 때 다들 똑같이 한 표씩 동등하게 봐요.
초과적인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는 너 믿어라, 나는 나 믿을게.” 그거에요. 여러분 뻔 한 이야기 적어드릴까요? 나 말고는 다 남이다. 이 말 맞아요, 틀려요? 이 말 맞잖아요. 나 빼놓고는 자식이고 부부고 간에 다 남이 되는 거예요. 교인들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이 말의 뉘앙스가 뭐냐 하면 믿을 놈은 뭐밖에 없다? 나뿐이야.
이게 세상에서는 다수의 다수 세계에서는 이게 삶의 기본이고 원칙이고 원리입니다. 사람들이 이걸 죄라는 생각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존재를 천국 안 받아준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생각을 못하고 있어요. 왜? 다수의 다수에서는 다들 이렇게 살아가니까. 이게 뭐냐 문제 되느냐는 식이에요.
그러나 성경을 뭘 이야기하느냐? 너를 믿지 말라 합니다. 그러면 왜 그런가?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조달한 생산품이에요. 이스라엘 개개인은 자기를 자기가 관리할 권리나 권한이 전혀 없는 겁니다. 일종의 주님의 전쟁의 전리품이에요. 전에는 세상에 포로 됐다면 이제는 주님한테 포로된 거예요.
포로 되니까 기분 좀 나쁩니까?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사랑의 포로가 최곱니다. 주님의 사랑에 포로 된 거예요. 포로 됐다면 그 사람은 한 달란트 말고 열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처럼 주인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거예요. 왜? 포로 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고맙게 여기기 때문에 자기를 안 쳐다봐요.
그래서 교회가 뭐냐 하면 자기를 믿지 않는 사람끼리 모인 게 교회입니다. 그래서 대화해도 자기 안 믿는 모습이 대화 속에 섞여 나와야 되겠지요. “내 시간관리 엉망이었어.” 이런 식으로. “하여튼 이상하게 살아가면서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 싱글벙글 웃으면서 좋다고 이야기하면서, “하여튼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어. 너무 감사해, 나. 미치겠어, 정말.” 이런 것.
내 일이 내 뜻대로 안 된다는 말은 주님께서 강제로 나를 못 믿게 만드는 쪽으로 조치해나가시는 중이란 말 아닙니까. 누구 자랑하는 거예요? 자기 자랑하는 게 아니고 주님 자랑하는 거예요. 나는 나 홀로 살지 않는다.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내 뜻은 항상 묵살당하는 쪽으로 이끄신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를 좀 더 해보겠습니다. 백성이라 하는 것은 애굽에서 조달된 것이다. 가져온 것이다. 백성이란 애굽에서 조달한 거죠. 그건 뭐냐 하면 애굽이란 나라에 살던 사람인데 지금은 애굽이란 나라에 살지 않고 이스라엘 나라에서 살고 있는 그런 뜻을 내포합니다. 그렇다면 이 백성의 과거는 뭐가 되느냐 하면 사적인 과거는 아무 의미 없고 애굽에 살았다는 다수의 체험이 백성 개개인마다 심어지겠지요.
이게 교인들이 대화할 때 나는 이렇게 자식 키웠고, 이렇게 살았다는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나는 애굽 같은 곳에서 살았고 나는 애굽의 백성 같은 자식을 키운다고 애먹는다. 모든 것이 이야기할 때 나만의 특수적인 상황이 아니고 이건 성도라면 공히 공통된 동일한 처지와 환경에 우리가 놓여있었잖아요, 라고 말을 주고받고 할 수 있는 거예요. 말의 내용에.
그러니까 개인구원이란 없지요. 조달된 거니까. 뽑아냈으니까 개인구원을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개인구원이 돼버리면 자기가 시간관리에 나서기 때문에 이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고 애굽 사람이죠.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우리 주님께서 레위기를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그 뒤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은 그 바탕이 너희 애굽에서 있었잖아, 하는 것을 항상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아시는 예를 들어볼게요. 출애굽기 20장 1절,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하나님 여호와 앞에 뭐 많이 붙어있지요. 그 붙어있는 게 뭡니까? 네가 애굽 땅에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나 여호와가 너희에게 말하노라.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구약 율법이죠. 십계명이잖아요. 이걸 신약적으로 바꿔보겠습니다. 애굽이란 이 세상의 이름에서 너희를 속건제 제물로서 너희를 건져낸 예수님, 주님이 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십자가 피로 구원했다는 말은 십자가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은 지금 누가 갖고 있다는 말이에요? 우리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거예요. 이건 캐도캐도 계속 나와요. 애굽적인 성향, 내 인생 내가 관리한다는 성향은.
그러니까 주님께서 조달했다는 그것을 과거는 주님이 다루니까 우리는 순간이니까 순간이란 시간의 회로 아닙니까. 날마다 우리로 하여금 애굽 생활에 계속해서 뺑뺑이 돌리는 거예요. 애굽 생활을 하게 해서 구원하신 분은 우리 주님밖에 없다. 그 다음 날 되면 또 애굽 생활하게 해요. 또 그 다음 날 애굽 생활하게 합니다. 이 시간 스케줄 관리를 주님이 하시는 거거든요.
애굽에서 종 되었던 다시 말해서 구약은 이스라엘이 애굽이지만 현재 우리 식으로 고친다면 내가 나를 관리하려는 나로부터 건지신 주님. 그것을 매일같이 되풀이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하루 일과의 끝은 감사와 고마움으로 마감되게 하시죠. 왜냐하면 내가 날 관리한다는 여기서 못 벗어나거든요. 내가 복음 알아도 못 벗어나요. 그건 이론이고 지식일 뿐이에요. 실제가 아니고. 내가 주님만 의지해야 되는데, 하지만 그래 주님만 의지했어.
이것 중요한 건데 적어볼게요. 여러분한테 물어봅니다. 나는 오늘 하루 주님 의지했다. 이게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이것 모르면 오늘 강의 헛수고다. 이것 죄에요, 죄 아니에요?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죄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될 죄에요.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이게. 여러분 죄 안 짓는 게 힘들어요, 죄 짓는 게 힘들어요, 어느 게 수월합니까? 죄 짓는 게 수월해요. 수월한 것 하세요. 되지도 않는 것 하지 말고 수월한 것 하세요.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짓거리하는 것, 이건 타고난 거예요, 우리가. 난 내 인생 잘 관리해서 내가 이만큼 됐다. 그런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마귀 들린 육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거는 툭 치면 그냥 터지듯이 나와요. 그냥 툭 치면 나오는 거예요.
티비 보다가 어느 배우가 이혼했다하면, “잘됐다. 까불더니 이혼할 줄 알았어.” 은근히 기분 좋지요. 왜 기분 좋습니까? 지는 아직 이혼 안 했거든요. 이거는 숨길 수가 없어요. 주님께 감사하기보다는 예수 잘 믿는 자기한테 감사하는 것, 이게 극단적인 죄 아닙니까? 이게 자기 의잖아요. 주님의 요건을 아주 개무시한 거예요. 주님의 요건이 빠져나가면 우리는 그냥 지옥입니다.
주님의 요건은 뭐냐 하면 예수 믿으라는 게 아니고 주님이 너로 하여금 죄 속에 집어넣어서 주님이 스스로 자기 공로만 드러내는 하나의 조달품이에요. 우리는 주님을 드러내는 증거물로 사용될 뿐이란 말입니다. 그게 율법의 완성이거든요. 이미 주님은 율법을 이뤘어요. 속건제 다 이뤘습니다. 아버지한테 20% 다 드렸어요. 속건제 다 준 거예요. 그러면 속건제 20% 안에 우리의 모든 죄는 다 실려서 다 해결된 거예요.
이제 남아있는 것은 도대체 주님께서 우리가 어떤 존재이기에 대신 값을 치러야 되는지 어떤 존재임을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울산바닥에 매일매일 삶 속에 우리를 여지없어 집어넣어요. 돌려버립니다. 돌려버리면 내가 스스로 잘난 척하면서 예수 믿는 것 다 그야말로 코미디입니다. 주님께서 받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데 혼자 자기가 도취되어서, “아 미치겠다. 믿음 왜 이리 좋아.” 이런 식으로, “나 신앙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이런 것.
주께서 살려주는데 마치 내가 어떤 지식을 확보해서 그 힘으로 그 덕으로 스스로 사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다수의 다수 게임이니까. 너나 나나 똑같아.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똑같은 인간이야. 전부 다 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는 이러한 의식, 이러한 사고방식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육신이 있는 한 떨어지지 않습니다.
주께서 원하는 것은 이거에요. 초과적인 것. 초과적인 것이 없는 사람은 낙담을 잘해요. 실망을 해버려요. 착하게 살려고 말씀대로 살려고 예수 믿으려고 애는 썼는데 결국은 자포자기 나자빠져버려요. 할 만큼 했다, 애썼다. 악바리처럼 열심히 잘해보려고 성경 백독하고 했다. 그런데 안 되더라. 그런 분 있으면 제가 묻고 싶어요.
뭐가 안 되신다는 말입니까? 원래 인간은 안 되게 있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원래 인간은 안 된다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가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성령 받았기 때문에 왜 우리 힘으로는 안 되는지를 굴리시는 그 하나님의 다뤄주심 그게 바로 하나님의 조건은 이미 있고 주님의 구원조건 안에서 마음대로 마음껏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성도의 참 모습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요한복음 8장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통해서 주께서 왜 간음한 여인으로 하여금 잡히게 했는가? 그리고 왜 주님 앞에 끌고 왔는가? 바리새인과 다르다 이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다수 중의 다수에요. 자기 의가 넘치는 자들이에요. 그러나 주님은 속건제를 해결 못한 20%을 대신 해결하려고 오신 분이에요. 그래서 아버지 뜻을 이루려 온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성도는 착한 사람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이 있는 사람이에요. 아버지의 뜻이 내재돼있는 사람이에요. 아버지의 뜻과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그 뜻을 뜻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매일 삶을 바로 죄 짓는 일만 남아있습니다. 그 죄 짓는 일이 뭐냐?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겠습니다, 라는 그 악마적 본성, 그건 캐도캐도 계속 나와요.
저는 이것을 뭐라고 이야기하고 싶냐 하면 이것을 비트코인 광산이라고. 왜냐하면 비트코인 광산은 어디 있는 게 아니고 계속 컴퓨터 돌려서 캐도캐도 계속 나오거든요. 전기료는 좀 나오지만은. 우리가 죄의 광산 같아요. 그런데 죄가 더한 곳에 뭐가 넘친다 했습니까? 은혜가 넘치지요. 그러니까 은혜의 은혜 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를 주님께서 비트코인 광산으로 사용해주시는 겁니다.
보자, 내일 되면 네가 어제까지 몰랐던 죄를 또 짓게 해줄게. 보자, 또 매일매일 내 죄가 얼마나 깊이 박혀있고 근원적으로 박혀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계속 죽을 때까지 하루하루 생명을 이어나가주시는 겁니다. 그 작업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주관자는 내가 아니고 주님이 우리 인생의 시간을 주관하시는 겁니다.
끝으로 아까 어리석은 부자이야기 다시 할게요. 창고 지어놓고 넉넉하게 알곡창고 다 지어놓고 자기가 속으로 뭐라고 하냐 하면 자기가 자기보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 영혼아 저 창고 보이지. 곡식 가득 찬 것 보이지. 이제는 편안하게 밥 먹고 살 일만 남았다.”라는 그 죄, 시간관리를 누가 해요? 미래에 예측되는 그것까지 창고 가득 집어넣었으니까 이제는 한 달이고 10년, 20년이고 밥 굶을 일 없다는 넉넉함, 시간 스케줄 관리를 자기가 한 거예요.
그럴 때 주님께서 뭐라 합니까? 그냥 말하지 않지요. 부자 앞에 뭘 붙여요. ‘어리석은’ 자야. 천국도 모르고 지옥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너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게 되면 저 창고 있는 곡식은 네 것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그 부자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오늘날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어리석은 부자처럼 우리를 다뤄주신 것에 대해서 성령을 통해서 주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초과적인 것을 다 해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남아있는 것, 우리가 어때서 주께서 대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야만 했는지 예수님이 죽는 그 의미를 매일같이 되새길 수 있도록 저희에게 기회를 허락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