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강-암 8장 4-6절(안식일위반)210310-이 근호 목사
28강-암 8장 4-6절(안식일위반)2103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8장 4-6 절까지입니다.
아모스 8:4-6
“궁핍한 자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를 망케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궁핍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아모스 당시에도 시장경제가 있었습니다. 인간들이 하루 일해서 그것으로 먹는 자급자족하는 시기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미래를 대비하게 되어 있고 대비하려면 여유분의 양식이라든지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장래에 대한 현명한 처사라고 그렇게 생각들을 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에게는 특징이 있어요. 세상민족 같으면 장래를 대비해서 뭔가 축적하는 것이 관행상 옳은 일로 여겨지겠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적재적소에 작용하는 나라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는 것보다 더 우선시 되는 것, 말씀이 살아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이에요.
우리 한국 같으면 말씀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살아 있고 국민이 살아 잇지요. 인간들 상식에서는 본인이 살아 있는 것이 그것이 유일한 현실로 느껴지지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말하기를, 말씀이 먼저 있고 그 말씀이 현실화 되기 위해서 이스라엘 나라가 나중에 생겼다고 그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 자기가 우선이 아니니까 아무리 살고자 애를 써도 이스라엘 같은 경우에 말씀에 위배되고 율법에 어긋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망하게 되는 이런 나라에 있어서 어떻게 생각하게 되면 배짱 같은 것을 부릴 수가 있어요. ‘말씀을 못 지켜서 망하면 망하는 거지. 망해도 할 수 없지 뭐. 망해보지 뭐. 하나님이 망하게 한다는데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느긋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초탈한 듯 초월의 마음을 가질 것 같은데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아모스 7장 17절 같은 페이지에 있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했을 때 이스라엘의 미래입니다. 이스라엘이 당할 일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네 아내는 성읍 중에 창기가 된다’ 이 말을 조곤조건 짚어볼 필요가 있어요.보통 남자에게 아내가 하나지요. 귀하다 그 말이지요. 특히 30대 초반 혹은 20대 후반에 막 결혼했을 때 아내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냐 하는 것을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내 얻기 위해서 모든 아부, 모든 것을 아내한테 여자한테 다 쏟아 부은 입장이기 때문에.
그리고 결혼할 목적을 가질 그 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혼인하기 위해서 어떤 일도, 심지어 굴욕적인 일도 해가면서 아내를 얻는 것 그것을 남자의 용기라고 보통 이야기들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 내가 미워하는 사람 말고 사랑하는 사람을 반드시 내가 차지하고 말겠다. 남자가, 자기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정도로 하게 되면 아내도 감동해서 내 사람이 되겠지.
그래서 결혼하게 되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어떤 사람은 결혼식장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남자도 있어요. 이게 멀리 있는 사람은 아닌데. 눈물 줄줄 흘리면서 스스로 자기 자신이 대견스럽고 감동스럽습니다. 그 때 마음가짐은 ‘내가 지켜 주리라. 내가 굶는 한이 있어도 네가 굶는 일은 없다. 이제 나 말로 어떤 남자도 내 아내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한다. 왜?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나보다 상대를 귀하게 여기는 것을 사랑이라 해요. 고귀하게 여기는 것, 말이나 행동에서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두뇌 상 신경전달 물질이 그렇게 오래 가지를 못해요. 그래서 어떤 경우 빠르면 6개월 만에 그 사랑이 없어진다고 하고 좀 후한 사람은 3년 만에 사랑이 없어진다고 하는데 그렇더라도 처음 결혼했을 그 시기의 아내는 귀합니다.
내가 아니면 어떤 남자도 내 아내 손 못 댄다. 직장도 제대로 못 다니지요. 집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하고 싶어서. 그리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서. ‘친구 다 떨어져도 좋다. 친구 가려면 가라. 나는 아내가 소중해.’ 이런 아내가 뭇 사람들의 창녀가 된다면 이래도 호탕함을 부리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던 그 이스라엘이 사랑하는 아내, 모든 것을 바친 그 아내가 뭇 사람들의 노리개 감, 창녀가 될 것이고 그리고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들이 칼에 엎드러지고.
자식은 또 얼마나 귀한 것이 자식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율법의 만남에서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준 것은 이스라엘만이 모든 민족가운데 인간의 자아의 끝을 그들로 하여금 체험케 하는 겁니다. 인간의 자아의 끝이에요.
제가 신체의 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체의 끝은 자살이에요. 사람은 자살정도의 용기를 갖고 있어요. 그러니까 신체의 끝이 인간의 진정한 끝이 아니고, 인간의 죽음은 신체가 죽는다고 죽음이 아니라 자아가 죽는 것이, 자아가 비참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끝이에요.
율법은, ‘죽으면 죽지 뭐. 지옥가면 지옥가지.’ 이게 율법의, 심판의 끝이 아닙니다. 율법의 끝은 바로 이 자아, 자기가 스스로 지키려는 이 자아가 스스로 지킬 수 없음을 계속 확인시켜 주는 것, 이것보다 더 비참한 것이 어디 있어요? 저 아내만은 내가 지키려고 했는데 그 아내를 농락하는 것은 내 자아를 농락하는 것이고 자식을 죽이는 것은 나를 죽이는 거예요.
인간의 자아가 있는 이상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믿음은 뭐냐? 성경에 나오는 믿음이라 하는 것은 교회에 돈 갖다 바치고 기도하고 열심히 전도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에요. 창세기 22장에서 믿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야기하기를 “네 사랑하는 아들 있지?” “아들 있습니다.” “그 아들 네 손으로 죽여라.” 이게 믿음이에요.
네가 사랑하는 아들, 남이 사랑하는 게 아니고 내가 무엇보다 사랑하는 그 아들, 내 대체물, 나의 우상인 아들, 자식, 시집가면 그만인 딸이 아니라 아들이에요 아들, 그 아들을 네 손으로, 있었다고 여긴 아들을 아예 없는 아들로, 그 자리를 없애버려라. 그 아들이 없다는 것은 곧 내가 없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가 네 손으로 너를 없앨 수 있느냐를 묻는 거예요. 없앨 수 있다면 그게 믿음이라 그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뭘 못 놓는다는 것을 알아요. 뭘 놓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간이 놓지 못하는 것, 인간이 불가능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요청합니다. 그래서 교회 나와서 믿음 믿음 이야기하는데 구라입니다. 이것은 같은 인간들, 교회 다니는 인간들끼리 서로 서로 비교해서 얼추 그 정도 믿음 있으면 믿음인줄 알고 있어요.
믿음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해요. 나를 죽이는 것은 가능하지요. 성질나면 자살하면 되거든요. 고층 아파트 왜 지어놨습니까? 뛰어내리기 좋잖아요. 우울증 걸리고 성질나면 훅 뛰어내리면 그만이지요. 하지만 내 자식과 같이 죽는 것도 가능해요. 왜? 눈 꽉 감고 너 죽고 나 죽자, 되는데 나는 살고 자식은 죽는 것, 이것은 완전히 돌아버립니다 이것은.
그것도 남이 죽이는 게 아니에요. 세월호 선장이 내 어린 자식 죽이는 것, 안양의 그 고등학생 죽이는 그것 말고 내가 선장이 되어서 내 자식을 세월호 태워서 남쪽 바다에 빠뜨리는 그것이 가능할까요? 인간의 어떤 시도, 어떤 노력, 어떤 깊은 철학도 인간에서 믿음을 만들어내지 못해요.
그러면 인간에 믿음은 없고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요구하니 인간이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위장하는 것, 신앙을 위장하는 수밖에 없어요. 신앙을 조장하는 거예요. 내 선에서, 가능한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최선을 다하는 것, “하나님,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가 신도 천사도 아니니까 인간으로서 할 바를 다해서 이 정도라도 하는 것을 가상하게 좀 봐주면 안 되겠어요? 이 정도로 노력한다고 내 딴에 노력했는데 내 성의를 봐서라도 믿음이라고 좀 쳐주세요.”라고 간곡하게 당부하는 그 정도, 그거 빠꾸(후진)입니다. 그것 소용없습니다. “장난 치냐?” 이렇게 나오지요. 하나님이 인간하고 장난칠 마음 아니거든요.
인간은 자기 자신이 믿음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본인이 인정 안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뭘 주느냐? 오늘 본문에 안식일이 나오지요. 안식일 율법을 줘버린 거예요. 안식일 율법을 딱 던져주게 되면 그 내용이 뭐냐 하면, “그 날만큼은 아무 노동을 하지 말라. 일하지 말라.” 그 법이에요. “그냥 놀아. 그냥 놀아. 그냥 푹 놀아!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 푹 놀아.” 그게 안식일이라 그 말이지요.
왜 안식일을 주셨느냐 하면, “네가 바쁘게 설치고 일하니까 뭐 네가 인생 잘된 것이 다 네 덕으로 알고 있지? 그러나 그날만큼은 네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돈 버는 일, 생산적인 일 하지 말고 그냥 쉬어버려.” 쉬면서 내가 이만큼 살아온 것은 내 노동이 아니라 지금도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노동의 대가로서, 결과로서, 선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날이 안식일이에요.
그 동안은 뭐 자기가 너무 싸대고 설치니까 전부다 자기 덕이에요. 모든 것이 내 덕이 되게 되면 그 후유증이 뭐냐? 잘되면 자기 덕인데 못되면 그 후유증이 다 조상 탓이고 못되면 다 하나님 탓이에요. 자기 빼놓고 남에게 원망 돌릴 맘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만큼 자아가 살아 있는데 그 자아를 자기가 죽일 수가 있습니까? 못 죽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 안식일 줬을 때 아니나 다를까 인간의 본색이 여지없이 튀어나옵니다. 5절에 보면 월삭, 월삭도 안식일처럼 노동하지 말고 제사 드리는 날이에요. 월삭이라 하는 것은, 옛날에는 농사짓기 때문에 음력위주의 캘린더가 작용했거든요.
첫 초승달 뜨는 날부터 계산해서 하루를 월삭이라 해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데 소제 번제 전제를 드린다고 되어 있어요. 민수기 28장에 보면, 거기에 월삭에 드리는 제사가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 소제라 하는 것은 식물성 제물을 드리는 것이고, 번제라 하는 것은, 동물성 제물을 다 태우는 것이고, 전제라 하는 것은 마지막에 포도주를 붓는 것 그걸 전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간에 그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이 주신 덕분으로 우리가 사니까 이 풍성한 곡식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제사 드리는 그 날이 바로 월삭이에요. 이 월삭, 율법을 줬잖아요. 노동하지 말라는 안식일 날의 연장으로 줬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이 명색으로는 율법 있는 것으로, 율법 없는 그 민족과 구분해서 자기의 자존감을 세우는 겁니다.
“너희들은 조상 중에서 하나님을 독대한 사람이 있어 없어? 없지. 우리는 모세가 있어서 하나님과 독대, 하나님과 단독으로 만나서 빈손으로 내려온 것이 아니야. 하나님의 율법을 들고 내려왔어. 그러니까 너 같은 민족은 개 같은 민족이고 우리민족은 선민, 택함 받은 민족, 이 세상에 유일하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직접 만나서 계약을 맺은, 하나님의 뜻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민족이다. 이스라엘은 친히 하나님이 동행해서 인도했던 민족이야.” 하고 자부심을 가진 거예요.
이것은 민족적 자부심, 민족역사의 전통적 자부심이에요. 세상 모든 민족들이 비스무리하게 다 그런 것이 있어요. 우리나라도 ‘댕글이’인지 단군인지 하는 무당 하나가 백두산에 내려와서 마늘을 먹고 어쩌고 그런 단군신화가 있잖아요. 홍익인간이라 해서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정신도 있어서 단군이 우리 조상이다 하잖아요. 배달의 민족 알지요. 짬뽕 시키면 불기 전에 빨리 배달하는 그런 것.
이스라엘에게 이 자부심이 있었다는 말이지요. 형식적으로는 안식일을 지키는데 뭐라고 하느냐? 5절에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그러니까 안식일 지키다 보니까, 강제적으로 안식일을 쉬라 하니까 취지가 갈수록 날라 가버려요.
날라 가서 무슨 재미에 빠지느냐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재미에 빠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독자적으로 자기 재물로서 본인이 독립해서 살 수 있는 에너지, 여력을 축적하는 재미, 돈을 모으는 재미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 본색으로.
하나님 덕분에 사는 것이 아니고 내가 내 덕분에 산다는 이 성질, 이건 아무리 율법으로 가르치고 어릴 때부터 훈계해도 소용없어요. 나는 내 잘난 맛에 살아간다는 이 속성, 하나님의 거룩한 법도 이걸 누를 수가 없습니다. 튀어나와 버려요. 오히려 이방민족과 똑같은데도 불구하고 안식일 지켰다는 핑계를 대니까 더 노골적이고 더 얍삽해져 버린 거예요.
성경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 나오지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또 마태복음 5장에 재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했잖아요. 그러면 교인들이 그 성경말씀을 보고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내가 하늘에 재물을 얼마를 하게 되면 이 땅에 재물 쌓았다는 하나님의 잔소리가 중지되는가? 하나님 입막음용으로 몇 푼 드리고 나머지는 내 본성대로 이 땅에서 부자 되고 싶다. 그 본성, 교회 오래 다녔다고 그걸 감출수가 있습니까?
본성은 감추는 게 본성이 아니에요. 못 감추는 것이 본성입니다. 돈을 노골적으로 좋아하는 것보다 돈 안 좋아하는 척 하면서 뒷구멍으로 돈 좋아하는 것, 이게 더 못된 짓 아니에요? 그러면 왜 이렇게 소위 하나님 믿는, 율법 있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안식일만 되면 짜증나는 거예요.
공직에 있는 사람은 좋아요. 강제로 놀게 하거든요. 물론 열정 있는 사람은 일요일에도 일부러 가서 애들 성적관리 해주고 이런 샘도 있어요. 특히 전교조 쪽에 그런 선생님도 있기는 있는데 그게 아니고 일반 개인적인 사업을 하고 있는 사람, 예를 들어서 미장원을 한다.
요 아래 근처에도 미장원이 세 개나 있어요. 미장원 협회에서 전부 화요일에 놀게 되어 있는데 자기는 교회 간다고 일요일에 문을 닫아 버린다. 일요일이 아니면 장사가 안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발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남자는 한 시간, 염색까지 하면 한 시간 반 정도, 여자는 파마 하면 머리에 뭐 뒤집어쓰고 화장실 세 번쯤 왔다 갔다 해야 돼요. 좀 비싼 파머 하면 세 시간도 걸린다고요. 좀 비싼 것, 십 몇 만 원짜리 하는 파마.
그러면 미장원에 언제 가느냐? 노는 날 가겠지요, 노는 날. 그래서 일요일에 바짝 돈 벌고 화요일 그 때는 쉴 때 장사가 되잖아요. 그런데 교회 간다고 일요일에 문을 닫아요? 야 그거 힘듭니다. 교회 갔다 와서 문 열겠지요. 왜? 예배는 일단 드려놨으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 안 지켰다 하는 그것은 막아놓고 돈은 버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러한 심보가 계속 해서 이게 관행상으로, 봐주기로 계속 온 거예요.
왜냐하면, 네가 안식일을 어겼다고 손가락질을 할 사람들이 주위에 점점 줄어듭니다. 왜 그러냐? 안식일 지키면 안식일 돈 못 번만큼 하나님께서 재난보상금이라도 주면 괜찮아요. “네가 안식일 날 장사 안하고 안식일 지킨다고 가게 문까지 닫았구나. 네가 지난 주일에 가게 문 닫아서 얼마 손해 봤나? 25만원 손해 봤다고? 그래 내가 30배, 아니 30배는 너무 했고 한 50만원 줄게.” 이렇게 딱딱 주시면 25만원 손해 봤지만 하나님이 재해보상금이라고 50만원 주니 남는 장사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가게 문 닫은 만큼 손해가 된다면 나중에는 마음에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처음에 백 명이 있으면 다 안식일을 지키려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중에 한명이 안식일 어기고 가게 문을 열었어요. 공적인 일 말고 사적인 일, 공직은 강제로 노니까, 은행 같으면 강제로 노니까 그것은 믿음이 좋은지 안 좋은지 그건 몰라요. 교회 안 나오고 물론 놀러가겠지만.
그것 말고 가게들, 일요일에 장사 잘 되는 치킨 집, 월드컵 하면 대목 보는 그런 장사. 백 명 가운데서 한 명이 도저히 못 참겠다, 해서 “지금 애가 아파서 수술실에 들어갔으니까 좀 봐주세요, 목사님!” 해서 가게 문 열었다는 말이지요. 그럴 때 99명이 “너 이제 망했다. 하나님이 안식일 안 지키면 저주받는다 했으니 너는 이제 저주 받았다.”라고 해도 아무리 기다려도 저주를 안 받네요. 저주를 안 받고 가게 문 연만큼 소득이 올라가요.
그러니까 조심스럽게 두 번째 용감한 사람이 등장하고, 또 세 번째 용감한 사람……. 나중에 백 명 다 안식일을 지킨 듯이 아니 지킨 듯, 지킨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지킨 것 같기도 하고, 이런 묘한 관행, 관습이 되고 마는 겁니다. 만약에 거기다 안식일 안 지켰다고 지적질 하면 그 사람은 그 교회 안 나오고 다른 교회 가버립니다. ‘교회가 한 두 곳이 아닌데 내가 잔소리 들으려고? 이 교회 아니면 교회 없습니까?’ 이런 식으로.
“왜 안식일 날 가게 문 엽니까?” 시류에 떨어지는 그런 목사가 자기 딴에 믿음 있다고 그런 잔소리라도 해보면 교인들이 ‘당신도 목사 망하고 난 뒤에 장사 해 보라고! 가게 문 열 수 있는 용기가 있거든 해보라고!’ 안되지요. 그러면서 다른 교회 가버리는 겁니다.
한 때 교사 임용시험을 국가에서 일요일에 쳤거든요. 일요일이 안식일이라고 우기는데 이게 말도 안 되는 소리거든요. 주일날이 안식일의 완성이라고 우기고 있어요. 주일날 자기 교인들중에 사범대학 4년 동안 공부하고 어려운 임용시험 쳐야 되는데 하필 나라에서 시험치는 날이 일요일입니다.
특별히 교회 생각해줘서 토요일에 시험 치는 법을 제정 안 해준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그것은 억지로 그 교회 예배 참석 못하고 시험 치러 가게 되면 또 목사가, 믿음 있는 줄 알았더니만 믿음 없다고, 교사 되는 것이 뭐가 중요하냐고 천당 가는 것이 중요하지, 이래가지고 목사가 철없는 소리해서 시험 들거든요.
그런데 목사 딸은 목사가 아니잖아요. 목사 딸도 사범대 갈 수 있다고요. 교사 임용시험 준비할 수 있다고요. 그러면 목사 딸은 어떻게 하느냐? “너는 쉿, 아프다고 하고 가만있어.” 목사 딸은 임용시험 칠 수 있게 밀어주는 거예요. 왜? 남의 딸은 내 자식이 아니니 욕을 하지만 만약에 자기 딸이 사범대 나왔는데 임용시험 못 쳐서 교사 못되어 질 떨어진 신랑……, 여기서 좀 잘 유념해서 들어야 돼요. 내 말이 아니고 세상 말이니까.
자기 딸이 교사 못되어서 질 떨어지는 신랑 만나면 평생을 죽을 때까지 “아빠 때문에 교사 못되어서 내 인생 망쳤다. 물어내라.” 물어내라는 그 말이 뭡니까? “재산 대 줘.” 그 말이거든요. 그 소리 밖에 할 것 없다 그 말이지요. 그 소리 듣기 전에 밀어내는 거예요.
관행이라 하는 것은 바로 세상 자체가 합세해서 율법이라는 것을 개무시하기로 마음속에 작심들을 한 거예요. 율법, 하나님을 개무시하는 거예요. 하나님을 모독하기로, 일부러 모독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선되는 것이 내 생존이고, 그냥 생존이 아니고 가치 있는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뭐가 필요하냐? 돈이 필요한 거예요.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루를 쉬는 것도 아까워 미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본성상 안돼요. 흔히 말하기를, 성경 보면서 부자들 욕하는데 여러분, 부자가 선합니까, 가난한 사람이 선합니까? 부자가 선해요. 몰랐어요? 부자가 품위 있습니까, 가난한 사람이 품위 있습니까? 부자가 품위가 있고 예의 발라요. 가진 게 있으니까.
반면에 돈 없으면 비굴해지고요, 세상을 삐뚤게 보고요, 세상을 천박한 관점으로 평가합니다. 돈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사람이 쩨쩨해지고요. 오죽했으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하는 노래가 있겠습니까?
이 세상을 제대로 보세요. 이 세상은 절대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수가 없는 세상인 것을 이미 우리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어떤 인간도 내 생존보다 하나님의 법을 우선할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자꾸 자기 자신을 속이려고 해서는 안돼요.
따라서 신앙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아의 자신감 때문에 그런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밀렸습니다. 인간에게 밀렸거든요. 법 줘도 법이 튕겨져 나가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잔소리가 튕겨 나와 버린 겁니다. 하나님이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고 말았어요. 인간은 자기가 살아 있는 게 우선이고 하나님 살아 있는 것은 뒷전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무 일도 안하고 당하고 “아이고 인간 세네. 나는 인간 못 당하겠네.” 낙담하고 그냥 손 놓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이 세상을 하나님관점으로 어떻게 볼 줄을 알아야 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돈 벌고 사는 것 그 자체가 이미 벌 받고 있는 겁니다.
율법을 주고 못 지켜서 벌을 받는 게 아니고 벌부터 받아요.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징벌, 저주부터 받으면서 왜 네가 이 땅을 힘들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뒤늦게 율법을 주면서 확인케 하는 거예요. 네 인생이라는 것이 힘들게 사는 그 원인이 뭐며, 왜 고생고생 해야 되는 그 원인이 율법을 봐야 있다는 겁니다.
인간을 고치라는 말이 아니에요. 새사람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개과천선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은 그런 자질도, 여력도, 그런 마음도 없어요. 그런 의지도 없습니다. 안식일, 월삭 주니까……, 뒤에 나오거든요. 여기서는 저울까지 조정해서 전부 다 한 푼이라도 더, 고객을 속여서 한 푼이라도 더 끌어내겠다는 것, 장사할 때 저울눈 속여서 돈 더 벌겠다는 이런 심보를 어떻게 장사하는 사람들 그들만의 속성으로 돌리겠습니까?
모든 직종에 있는 사람들 다 그래요. 회사 운영하는 사람들이 제일 기분 나쁜 것은 월급 주는데 틈만 나면 놀아요. 컴퓨터 켜놓고 주식 투자하고 있고요. 간부가 왜 있습니까? 감시하라고 있는 거예요. 노가다 십장 왜 있습니까? 돌아다니면서 일 안할까 싶어 감시하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틈만 나면 일하기 싫거든요.
물론 어떤 사람은 자진해서 하지 말라는 일까지 하는 사람도 있어요. 간혹 있지만 드물지요. 일이 재밌어요. 그런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거의 드물고요. 공부가 제일 쉬워요, 그런 사람은 거의 드물고 대부분은 틈만 나면 놀려고 하지요. ‘월급 나오는데 열심히 일할 필요가 뭐가 있어?’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왕따 시킵니다.
인간의 본성은 아이 때도 벌써부터 나와 있어요. 맛있는 밤 과자가 있어요. 아빠가 딸애하고 놀고 싶어서 “맛있어? 맛있어? 그래, 아빠 좀 줄래?” 딸이 맛있는 것은 아빠에게 안줄 수가 없거든요. 재정적권한을 아빠가 쥐고 있으니까. 자기는 돈이 없으니까.
아빠가 과자를 달라고 할 때 주기는 줘요. 내가 그 현장을 목격을 했어요. 밤과자 요만한 것 중에서 거의 안보여요. 점 만한 것을 떼어서 줍니다. 그런데 애가 늘 그런 것은 아니고 맛 없는 것 있잖아요. 맛없는데 아빠가 좀 달라고 하면 거의 다 줘요. 이게 아이의 본성이고 커서 어른이 되어도 마찬가지거든요. 이세상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납니다.
이 세상은 웃고 있어도 얼마나 이게 아팠으면 그냥 억지로라도 웃고 싶어요. 한평생 사는 것이 늘 속으로 울고 있으니까. 문제는 그래도 그 원인을 몰라요. “제가 뭐가 잘못됐습니까?” 아무 잘못된 것 없어요.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된 것이 없어요.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세상 자체가 잘못됐어요.
그러면 세상 자체가 왜 잘못되었는가? 그것은 내 책임 아니에요. 왜? 세상 자체가 지옥이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법에 보기에 반대쪽으로 가고 있어요. 어느 누구도 탈출 불가합니다. 사냥개를 훈련하는 방법은 사냥개 앞에다 먹잇감을 주고 달리게 하는 겁니다. 사냥개 레이스 하는 것 보면 먹잇감 보고 미친 듯이 달리지요.
악마가 인간을 다루는 방법은 인간 코끝에 돈 매달아서 죽을똥살똥 돈 보고 온 사력을 다하여 달리게 만들고,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지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 있고, 스트레스 받아서 몸 아픈 사람도 있고, 모든 사람이 돈, 돈, 돈, 돈밖에 없어요.
인간에게 진리는 딱 하나입니다. 이거 참 적어놓으면 좋은데 인간의 진리는 뭐냐? 딱 하나에요. 인간은 이것만 기억합니다. ‘이 돈 내꺼다.’ 끝이에요. 자식이고 부모고 이 돈 내꺼다. 이게 인간이 아는 유일한 거예요. 이것은 아무리 무식하고 못 배웠다, 그것과 관계없어요.
인간은 교육정도가 아니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이것 내꺼다, 방금 아빠가 맛있는 것 줬어도 딱 자기 손에 들어가면 “이것 아빠 좀 줄래?” 하면 이 맛있는 것은 내꺼다, 내 것, 소유가 곧 나에요. 소유에 대한 기억, 마지막 남는 것은 그 기억밖에는 안 남습니다. 장기기억이지요. 치매 걸려도 남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것은 내꺼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율법이라는 것, 안식일은 뭐냐? 나를 애초부터 없애려고 하는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줘서 내가 내 본성을 이기지 못하고 안식일과 반대쪽으로 슬금슬금 달아나는 내가 바로 율법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발각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과외 받고 교육받고 성경공부 해서 아무리 집어넣으면 집어넣을수록 그런 것들은 그저 나에게는 신앙인 척을 하는 핑계와 변명들만 쌓이고 비축될 뿐입니다.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나에게 어떤 변화의 조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은 나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벗겨내는 거예요. 네 속에 마귀 있다, 하고 벗겨내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천국은 뭐며, 구원은 뭐며, 신앙은 뭐며, 사랑은 뭐며, 그런 고상한 이야기들, 개념들, 그런 것은 우리하고 상관없는 이야기냐?
이것은 구약을 통해서, 지금 우리가 구약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구약을 통해서 신약 쪽으로 넘어가 줘야 돼요. 구약에서 철저하게 인간을 분석하고 분해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쪽으로 달려가는 그러한 괴물의 힘에 눌려 있다. 그것은 본성인데 본질상 진노의 본성이기 때문에 인간 자기 힘으로 못 고쳐요.
그러면 구원은 뭐냐? 구원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믿음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주님의 자기 성과에요. 주님의 자기성과, 주께서 홀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그냥 주시는 거예요. 천국은 그냥 주시기 때문에 그냥 주심이 먼저 오게 되면 우리는 뭐라고 외치느냐 하면, 나는 내 죄 값을 치렀다고 그것을 큰 기쁨으로 외치게 되어 있어요.
시속 60킬로로 가야 될 것을 82킬로로 갔을 때 범칙금 7만원 나옵니다. 전에는 좀 봐줘서 일찍 내면 깎아주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냥 7만원 내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했던 사람이 만나는 사람마다 동네방네 말하고 다니기를 “나는 7만원 냈다! 7만원 내버렸어!”라는 이야기를 큰 소리로 너무 기뻐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것은 곧 뭘 의미하는 겁니까?
“나는 과속한 자요! 나는 법 위반자요!”라고 광고하는 거지요. 바로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7만원을 낸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우리 평생의 법을 지키지 못하는 모든 죄책에 대해서 죄 값을 다 치러버린 거예요. 그러면 우리의 자랑이 뭐냐 하면, 바로 죄 값을 치렀다고 그것 자랑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세상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자가 되려는 이유는, 품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그래요. 부자가 된다는 것은 찌질이가 아닌 거예요. 부자 돼야 찌질하지 않아요. 이웃집에서 담배 피운다, 시끄럽다, 층간소음 있다, 이웃이 술 먹고, 행패부리고, 맨 날 구급차나 경찰차 오고, 쓰레기 싸이고.
이런 모든 문제를 구청에 민원 넣지 마시고요, 돈 버세요. 돈만 벌면 아파트 한 채 60억짜리에 가게 되면 그런 것 싹 다 없어져요. 못사는 동네에 오니까, 찌질이들이 사는 그 동네 오니 그런 일들, 그런 경우들을 다 당하는 겁니다. 여학생 혼자 밤길 가는데 무섭지요. 휴대폰 꽉 쥐고 가는데 뒤에 누가 막 쫓아오고요.
이런 일이 왜 생깁니까? 돈이 없어서 그런 거예요. 참, 돈이 없어서 못사는 동네라 그렇다고요. 다닥다닥 붙어사는 빌라 동네에 있어서 그런 거예요. 고급주택 가보세요. 입구부터 수위들 죽 나와 있지요. CCTV 다 달려 있지요. 거기서 누가 어슬렁거리기만 해도 이쪽저쪽 수위들이 다 나와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 무슨 볼일 보러 오셨습니까?”
외판원도 하나 없어요. 미리 다 걸리기 때문에. 사람도 길에 다니지도 않아요. 노점상도 매점도 하나 없어요. 깨끗해요. 청소 다 해주지요. 사람 만나러 가면 힘들어요. 정원들이 있어서 집에서 보면 안보여요. 홀로 살면 돼요. 돈이 없어서 문제지요, 돈이 없어서 문제에요. 돈이 없어서!
그 품위 있고 고귀한 삶, 그걸 마다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한시도 잊지 않고 돈 버는데 매진하는 거예요. 매진! 공부 잘하는 것도 돈, 사람의 윤리 도덕도 돈. 착해야 인정해주니까 모든 목적이 하나로, 돈으로 쏠립니다.
그런데 신약에 오게 되면 그 자체가 범칙금을 내야 될, 율법에 위반된, 안식일에 위반된 천하에 벌 받고 있는 인생, 부자 되겠다는 자체가 이게 벌써 저주 받고 징벌 받는 모습인 것을 예수님의 피 앞에서 자기를 다시 한 번 크게 발견하는 거예요. ‘아, 이것은 내가 신앙을 가질 필요가 없구나.’
주님께서 치렀다는 그 관계가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이라는 관계, 믿음의 관계에요. “나는 없어도 괜찮습니다. 없어도 괜찮습니다.” 내 구원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루신 주님의 자기 성과에요. 천국도 주님의 자기 성과에요. 내 것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끝으로 이 이야기 하고 마치겠습니다. 라는 그 드라마에 보면 철종이 안동김씨 세력에 쫓겨나서 수배당합니다. “만나면 죽여 버려라.” 김 병인인가 그래요. 야구선수 말고 안동김씨 세도가. 그런데 철종이 몰래 궁궐에 들어와야 일이 되는데 왕과 왕비가 들어올 때 궁궐에 들어오는 음식 반입하는 그 수레 밑에 누워 들어와요.
“이게 궁궐에서 쓰는 물건이다. 대왕대비마마 음식에 쓸 재료다” 뇌물도 주고 해서 통과했는데 역시 안동김씨 쪽 똑똑한 사람이 딱 보더니 “멈춰라!” 하고 드라마 거기서 끝났어요. 그 다음 편……, ‘멈춰라, 해서 끝났으니 이제 큰일 났다.’ 멈춰라, 하고 칼을 빼 들었어요.
부하들은 그것도 모르고 “음식밖에 없는데요.” “멈춰라! 조사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다.” 킨 칼을 가지고 팍, 팍, 음식 밑에 둘이 손잡고 누워 있는데 칼 가지고 사정없이 찔러 버립니다. 그런데 이게 드라마가 되려는지 그 칼이 다 피해가는 거예요. 마술처럼 피해갑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 율법의 칼이 우리를 쑤셔버립니다. 멈춰라, 다 쑤시는데 죄밖에 아무것도 내 의가 없고 내세울 것이 없으니까, 내세울 것이 없는 거기다 예수님의 피로서 값을 치렀으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쑤셔도 심판 때릴 것이 없어요. 왜? 인간은 타고난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잘난 체 할 것이 없으니까.
예수님의 피와 연결된 하나님의 불 칼이거든요. 피만 있으면 이미 죄 값을 사했다는 말이지요. 유월절 어린양처럼 그 피가 다 사해버렸으니까 그냥 천국으로 무사통과돼요. 천국으로 그냥 통과해버려요. 이게 신약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그 세리가 기도할 때 바리새인이 그 옆에서 기도했습니다. “구제했습니다, 금식했습니다, 십일조 했습니다…….” “그러면 세리 너는?” “아무것도 안했습니다.” “통과!” “아무것도, 인생 살면서 나는 죄지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통과!”
요한복음 8장에서 간통하다 현장에서 걸린 여자에게 주께서 말씀합니다.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그 때 하는 말, 그 유명한 말 “주여 없나이다.” 여러분, 이런 배짱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관행, 그렇게 세상 돌아가는 풍세에 평생을 살다보니 세상 기준이 전부인줄 알았습니다. 다른 기준 몰랐습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웬 선물인지, 모든 죄를 씻 어 주시는 피로 말미암아 이제는 꿀리지 않고 살아가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피만 십자가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