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5b 울산강의-레위기 27장 : 세겔과 십자가
20210305b 울산강의-레위기 27장 : 세겔과 십자가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외부에서 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이렇게 살아야 천국 넣어진다는 그렇게 자신 없어요. 적어도 인생이라 하는 것은 스토리, 이야기가 어디와 이어지느냐 하면 천국까지 이어지는 스토리여야 하거든요. 영원한 나라. 영원한 나라와 이어지려면 인간 쪽에서 자꾸 제안하고 이해한다고 이어지는 게 아니고 천국 쪽에서 스토리가 거꾸로 들어와야 돼요.
이스라엘이 멸망한 것 여러분 다 아시죠. 그리고 우리가 봐왔던 레위기, 하나님께 바쳐라, 너희들이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다, 라는 쪽으로 이야기를 해도 이 이야기를 들었던 그 이스라엘이 다 망했지요. 그러면 이 말은 뭐냐? 망했다는 말은 율법 쪽에서 하자나 문제 있다는 게 아니고 인간들이 오해하고 곡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뭐냐 하면 인간들이 이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제대로 바쳐야 된다. 이 바쳐야 된다는 것은 신명기에 나오는 사랑이란 대목에서 나와요. 몸과 마음과 정성을 뜻을 다하여 네 몸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돼있지요. 사랑하고 드리고 그렇게 해서 너처럼 이웃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돼있을 때 이게 신명기에도 그렇게 돼있어요.
인간으로선 안 된다는 걸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 이야기해요.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이게 안 된다고 돼있거든. 분명히 신명기 이전에 그냥 할례라 했지 마음의 할례는 없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함께 있으면서도 하나님에게, 아까 인간들의 본능은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께 뭐한다? 대든다, 저항한다, 반발한다, 원망한다 이게 하나님께 함께 있으면서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육의 남성의 생식기 끝을 잘라내야 되는 게 아니고 자르려면 뭘 자르느냐? 마음 자체를 잘라야 한다는 거예요. 마음 자체를 자르면 마음이 마음을 잘라야 되는데 마음이 어떻게 마음을 자를 수 있습니까? 칼이 칼을 어떻게 자를 수 있어요? 그냥 망해야 되지요. 마음을 자르겠다는 그 마음은 안 더러워요? 더럽지요.
그래서 신명기에 마지막 대목에 보면 모세가 예언을 해놨어요. 너희들은 마귀에 잡혀서 망한다. 그냥 망하는 게 아니고 마귀의 족속들아 너희들은 마귀한테 못 이긴다. 마귀한테 못 이긴다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뜻은 결국 뭐냐 하면 이 세상 전부를 초상집으로 만드는 거예요. 장례식장으로 만드는 겁니다. 장례식장이 지금 특수한데 있잖아요. 병원마다 있잖아요. 그게 병원에 있으면 장례식장이 아니고 온 세상이 다 장례식장이란 말이죠.
그래서 전도서 7장에 있지요. 네가 잔칫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 네 본모습이 거기 있다는 거예요. 네가 죽었다 치고 너 어떻게 살래? 이 말입니다. 네가 지금 죽어서 관에 누어있을 때 죽은 자가 네 운명을 어떻게 손볼 것인가를 묻는 거예요. 진짜 다들 초상집에 와있다면 이미 자기가 죽는 것이 확정됐다면 살 길이란 것은 인간에게는 없음을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께선 이스라엘을 보냈고 율법을 보내주신 겁니다. 마음의 할례가 안 되니까.
그러면 다 바쳐라, 성전세 바치라는 이것도 인간의 힘으로 그냥 돈 바치면 구원받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돈 안 바쳤겠어요? 바쳤지요. 바쳤는데 멸망했잖아요. 그것은 온전히 바친다, 돈을 바치지 말고 마음을 바쳐야 되는데 마음을 바치는 이것이 근원적으로 인간 안에 요물을 들어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저항세력이 인간에게 있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자기 믿음이란 겁니다. 아까 제가 천벌 받는 대상이 뭐라 했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믿지 말라 했지요. 인간은 모든 걸 안 믿어도 누굴 믿느냐 하면 본인을 믿어요. 천벌을 자초하는 거예요. 아주 매를 사. 매를 산다고요.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예수 믿는 나를 믿는다는 이 말입니다.
그러니 천벌을 안 받을 수가 없어요. 내가 믿기 위해서는 나는 죽어서는 안 된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왜? 내가 죽으면 뭐도 죽는다? 나의 믿음도 소용없고 소망도 소용없고 사랑도 소용없어버리면 그럼 나는 누가 구원하느냐고 자기 본전 생각하는 겁니다. 얍삽한 꾀로 하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 지분에 손을 못 놓고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해줬으니까 해준 만큼 지분을 얻어야 되겠다는 그 심보를 못 놓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이야기하면 인간은 다 그렇지 뭐. 인간은 최선을 다해도 그것밖에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것으로 닦달하면 우리 보고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여러분 반발하고 싶을 거예요.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고 마지막 때에 율법에 합치되는 어떤 분을 보냈어요. 그분이 예수님이죠.
그러면 우리가 누구와 비교해야 돼요? 농땡이 치는 나와 열심히 하는 나, 나와 나 사이를 비교해야 되겠어요, 누구와 비교해야 되겠습니까? 예수님과 비교해야 되지요. 남과 비교하면 안 됩니까? 남이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요. 그 인간이나 나란 인간이나 똑같은 또이또이 똑같은 인간끼리 비교해서 무슨 의미가 있어요.
율법을 다 지킨 분과 비교해봐야지요. 예수님은 온전하게 다 바쳤어요. 마치 레위기 1장에 나오는 번제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그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어두운 세상은 말씀과 일치되지 않기에 천벌 받아도 당연하다, 마땅하다. 이게 하나님의 결정 난, 확정 난 태도에요. 확정적이에요.
말씀과 언약과 일치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군소리하지 말고 천벌 받아야 마땅하다. 오히려 천벌 안 내리는 하나님이 잘못이겠지요. 자신의 약속과 안 맞는 데도 봐주는 그런 하나님은 없어요.
그러면 아까 인간들의 태도는 저항하고 반발한다 했지요. 오늘 저항입니다. 저항 주의해야 돼요. 저항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말씀을 밀어냅니다. 복음 안 듣습니다. 말씀 듣는 자리에 오지도 않아요. 그럼 뭐냐? 세상이 돌아가는 일 년 스케줄을 그대로 자기한테 돌려버려요. 구정 있지요. 정월대보름에 호두 사고 콩나물국 끓이고 찰밥 해먹지요. 3월 1일에 삼일절이라고 태극기 달지요.
이 스케줄은 인간들의 자신의 죄를 드러내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자기가 건재하다는 용도의 스케줄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나 아직도 안 죽었다. 나는 나름 의롭다, 살만한 가치 있다. 그러한 놀이동산에 돌아가는 큰 수레바퀴에 사람들은 못 끼어들어서 환장하는 겁니다. 같이 안 놀아줄까봐 걱정하면서 살아가요.
세상 사람들 달력 보세요. 3월 6일, 돌아가신 시어머니 제사. 제사 안 드리면 왜 안 되느냐? 제사 안 드리면 나한테 경제적 도움 되는 일가친척이 배타시하면 나한테 도움 될 것 없다. 이렇게 되겠지요. 4월 5일은 내 아들 생일. 성경에 내 생일 나옵니까? 성경에 우리 스케줄이 나와요?
우리의 관심사가 뭐에요, 도대체? 교회 다니면서 관심사가 뭡니까? 그걸 지향성이라 하는데 우린 뭘 지향하고 바라봅니까? 우리가 만들려는 우리 스토리와 방향이 어느 쪽이에요? 천국과 연결돼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럼 천국의 소릴 들어야 되지 않습니까. 관계 끊어져도 좋다는 그런 이야기거든요. 나는 천국 안 가도 좋다는 그런 이야기란 말이죠.
아까 요한일서 2장 15절, 16절 보셨지요. 17절까지 보셨지요. 이 세상은 하나님과 반대돼있어요. 반대성향을 가지고 있어. 그럼 우린 어느 쪽을 더 좋아해야 돼요? 하나님께 반대하는 세상을 좋아해야 됩니까, 하나님 편에 서야 돼요? 이 질문을 내가 진짜 질문하지 말아야 될 질문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굉장히 미안스러워요.
하나님은 알아요. 율법을 줄 때 너희들이 지킬 만한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아요. 그래서 율법 하나 오늘 본문에 세겔이란 무게단위로 묶는 율법을 제시하는 것도 우리가 하는 우리가 듣고 있는 우리의 하나님과 반대되는 성향을 벗기고 또 벗기고 다 벗겨내기 위해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얼마나 너희들이 싫어하는지를 너무나 하나님이 확실하고 알고 주신 말씀이에요. 싫지? 네 자아를 포기하기 싫지, 다 바치기 싫지. 그냥 다리나 하나 걸치고 싶지, 그지? 그걸 다 알고 하신 말씀이에요.
옛날에 우리나라 못 살아서 먹을 게 없어서 소나무 껍질을 벗겼답니다. 그래서 소나무가 말라죽었데요. 애꿎은 소나무만 말라죽은 거예요. 주님께서 율법을 주게 되면 애꿎은 내가 말라죽어요. 말라죽기 전에 우리 인간의 조치는 뭐냐? 말씀을 안 들으면 돼요. 말씀 안 들어도 세상 돌아가는 스케줄 있잖아요. 그들의 축제일.
장사꾼들이 전국의 축제일을 메모지에 수첩에 다 적어서 요샌 축제 잘 못하지만, 축제란 축제는 다 돌아다니면서 장사하는 것처럼 사람 사는 재미 어디 있어 그냥 으샤으샤하는 재미지. 술 먹을 수 있는 핑계나 찾고 있으면서 친구 만날 핑계나 대면서 그 재미로 그 시간에 낙을 얻으려고 하는 그 세상의 거대한 수레바퀴, 그 저주받은 수레바퀴에 왜 기어들어갑니까? 왜 그런데 관심을 둬요? 이게 다 돈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세겔은 우리를 벗기는 겁니다. 아까 제가 신약적인 완성적으로 세겔은 뭐라 했습니까? 성령이라 했지요. 성령의 기능은 우릴 다 벗기는 거예요. 우리가 얼마나 세상을 사랑하고 육신의 정욕을 사랑하고 안목의 정욕을 사랑하고 이생의 자랑거리를 비축하는데 온 힘을 쏟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성령께서는 그 말씀을 우리에게 하는 거예요. 네가 죄 없다는 내 백성 아니다. 예수님의 피로 화목제물로 그 죄를 사해주셨다, 라고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벗기고, 벗기고 또 벗기고 또 벗기고 다 벗기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세겔은 어떻게 완성됩니까? 우리는 안 된다며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해서 못한다며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인데 중간에 우리 못한다고 없는 걸로 합시다, 취소합니다, 이런 게 있을 수 없거든요. 바로 그것이 세겔과 관련해서 오신 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3절 봅시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설명 필요하지요. 가룟유다는 세상 편입니다. 세상 편은 저항한다, 반발한다, 개 무시한다, 우리 세상에 끼어들지 마세요. 우린 우리대로 삽니다. 내 것은 고귀하고 귀합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은 인생 손대지 마세요. 이쪽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님을 팔아넘겼지요.
팔아넘길 때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라고 됐지요. 은 삼십은 노예 사람값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을 값으로 환산이 가능하다. 사람을 돈 값으로 환산이 돼버리면 더 이상 인간의 가치는 뭐로 이전되느냐 하면 돈의 가치로 이전되지요.
인간사회에서 돈이 무가치합니까? 인간세계에서 돈은 가치가 있어요, 없어요? 가치 있지요. 그러면 가치 있는 돈, 인간세계에서 필요한 그 돈으로 환산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나는 가치 있다고 우길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나, 돈 값했다. 이게 인간세계에서 자기를 포기하지 못한 이유가 거기 있어요.
어떤 가정에서 그런 이야기했답니다. 엄마가. 이 집에서 돈 버는 사람 나밖에 없잖아. 그 소리 듣는 순간 나머지 네 식구가 숙연해졌어요. 인간의 가치는 뭐로 환산된다? 생산성이 있어야 돈을 벌어야 이 세상에서 알아줘요.
그래서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돈으로 팔아먹었다는 것은, 예수 당신은 하늘에서 온 사람이 아니고 그저 이 세상에 일반인들 그것도 일반 노동자에 준하는 존재일 뿐입니다, 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반발하고 저항하는 거예요. 가룟유다의 그런 안목이 모든 인간의 출발점이 돼요. 모든 인간의 시작점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볼 때 당신은 나보다 월등하기 때문에 나는 당신 앞에서 죽어도 좋아, 이렇게 시작하는 게 아니고 나라는 가치를 예수 당신이 얼마나 높여줄 것인가를 거래하듯이 예수 믿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시작이란 말입니다. 가룟유다도 그렇게 시작했으니까. 더구나 예수님을 팔아먹었다는 말은 주도권이 자기한테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들이 하나님께 저항하고 반항한다는 것은 결국 마지막에 어떤 권리를 포기 못하겠다는 겁니까? 내 인생 어떻게 결정할 그 권한은 기어이 이것만큼은 때려죽어도 못 놓겠다는 게 있어요. 그게 뭡니까? 내 인생은 누가 결정한다? 내가 결정한다. 그래서 나는 최종적으로 진짜 중요한 가치 있는 인간은 나라는 거예요.
그런 인간이 복음을 받아들인다고요? 진짜 하늘에서 마귀가 웃을 일이에요. 그것 복음 아닙니다. 최종 가치가 자기한테 있는데 그게 무슨 복음이에요. 복음 언급하는 목사들 많아요. 그런데 다 믿지 마세요. 복음으로 어디 써먹으려고 하는데? 내가 목사다움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당신 가치 그대로 있잖아. 복음 앞에서 우린 뭘 해야 됩니까? 자기 생각 없어야 버려져도 상관없어요. 왜? 모든 게 죄가 되기 때문에 내 것을 내가 쥘 엄두도 내지 말아야 돼요.
어떤 분이 이런 표현을 했어요. 인간을 두 가지로 표현해서 제대로 표현했다고 보는데 인간이란 첫째, 공중변소다. 두 번째는 흉가다. 인간이 공중변소인 이유는 여기에 똥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이 흉가인 이유는 귀신만 있기 때문에. 무슨 공중변소를 좋아하고 흉가를 좋아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인간은 바로 공중변소고 흉가이면서도 악마가 인간의 정신을 자아를 우수한 자아로 이미 왜곡시켰기 때문에 꽉 잡았기 때문에 자기가 귀신 집합소인지 모르는 거예요. 누가 오기까지 이 땅에 누가 나타나기 전에? 예수 올 때까지 모르는 겁니다. 같은 변소끼리 해봐야 전부 깨끗한 줄 알고 같이 흉가 보면서 저택이네, 이렇게 나온다고.
예수님이 와야 이게 들통 난다고요. 아까 했지요. 성령은 우리를 감추고 있는 것을 벗겨낸다고요. 초근목피란 말 있잖아요. 노래 가사에도 나온다고요. 에 초근목피 나와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진 아무도 내가 누구라고 이야기해준 사람 없었습니다. 그럭저럭 흉내 내며 살아가면 그게 인생사는 줄 알았어요.
그리고 죽으면 천당 있는 줄 알았지요. 천당과 스토리가 연결도 안 되면서, 예수님 복음과 전혀 연결이 다 끊어졌으면서도 소원은 천국이야. 누구 마음대로요? 무슨 천국이 덜렁덜렁 간다고 다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잖아요. 주제를 알아야지요, 주제를. 주님은 의사기 때문에 죄인으로 본다고요. 주님의 안목으로 내가 나를 볼 수 있는 안목이 돼야, 나를 보는 모습으로. 십자가 달리신 분이 또는 흠 없는 제물이 찢겨지고 찢어지는 그 제물의 안목에서 얻어맞는 안목에서 나를 볼 줄 알아야 돼요.
레위기 1장에 보면 제물 나오지요. 첫 번째는 데리고 오고 두 번째는 안수하지요. 세 번째는 안수한 자, 가져온 사람 죽입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가 각을 떠요. 마디마디 각을 뜬다고요. 히브리서 4장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골수와 마디를 쪼개지요. 왜냐하면 제물은 인간의 단칼에 죽지 않아요. 각을 떠야 돼요. 각을 뜨고 난 뒤에 가죽을 다 벗겨요. 가죽을 벗기고 난 뒤에 내장을 물에 담가 버려야 돼요. 그 다음에 제사장이 피를 받아서 제단에 던지고 내장 빼고 나머지 몸체는 제단에 다 불태우는 그 일을 제사장이 해요. 나머지는 가져온 사람, 죄인 본인이 다 해야 돼요.
그 흠 없는 제물을 칠 때 얼마나 미안하겠어요. 그 칼로 누굴 쳐야 됩니까? 본인을 쳐야 되는데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안수했다는 이유 때문에 나를 치지 않고 저쪽을 치는 거예요. 바로 침을 당하는 인간에게 죄인에게 얻어맞는 그 일을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셔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흠 없는 예수님이. 나 대신 인간이에요.
그럼 나는 인간이다, 아니다? 아닌 거예요. 하나님이 인정한 인간은 예수님이지 내가 아닌 거예요. 내가 인간도 아니면서 왜 자꾸 인간이라 우기면서 살려고 하느냐 이 말입니다. 성경 그동안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어요. 우린 장례식, 이 세상은 장례식의 확장입니다. 장례식장의 확장이에요. 다 죽었어요. 아담에서 관계 끊어져서 다 죽은 거예요. 죽으려고 살아가는 거예요.
마태복음 27장에서 가룟유다가 은 삼십 냥을 줄 때 이것은 예레미야나 스가랴 같은 경우에 스가랴 11장 13절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바 그 준가를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을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12절에 보면, 자신의 고가를 은 삼십에 바꿨어요.
이것을 돈값이 아니고 이 세상에 돌아가는 경제 속에 수레바퀴 속에 예수님도 값으로 환산되는 그렇고 그런 일반인 경제인 중에 하나로 포함이 된 겁니다. 왜? 노예 값이기 때문에. 종의 값이에요. 그것도 귀족 값이 아닌 무가치한 일꾼 수준의 가치가 삼십 냥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이 삼십 값을 했고 가룟유다는 그걸 요구했고 가룟유다에게 돈을 준 제사장들은 그걸로 성인 남자의 몸값은 노동력 값은 그 정도로 됐다고 치고 합의를 본 겁니다.
그러니까 제사장과 가룟유다 사이에 예수님이란 존재의 특이성이 있습니까? 없지요. 일반 노동자지 없지요. 이 세상에 인간들 머릿속에 예수는 없습니다. 없는 분이 우릴 구원한다는 게 복음이에요. 내 머릿속에 없는 분이 나를 구원하는 거예요. 내 마음속에 내 아이디어 속에 없기에 내가 구원받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있는 것을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게 진리가 되는 거예요. 내가 아는 것으로 내가 믿는 것으로 구원되지 못해요. 내가 사랑하고 내가 소망하는 것으로 나는 구원되지 못해요.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나지 않는 그분에 의해서 나는 구원되는 겁니다. 따라서 나는 나를 잊어야 돼요. 내 쪽이 없다고 여겨야 돼요. 결국 나이 들면 없어질 거고 지금 있더라도 곧 없어질 장례식장에 들어왔다고 치자 이 말이에요. 우리를. 나는 곧 없어진다고 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돼요.
그 당시 이스라엘 같으면 이미 몸 바쳤으면 성전만 있고 성전 앞에서 나라는 것은 단독적으로 용납이 안 된다는 걸 알아야 돼요. 왜? 성전에선 주의 이름만 있으면 되니까요. 하나님만 있으면 되니까요. 성전이 하나니까요. 하나로 결속이 되니까, 세겔로서.
마태복음 17장에 성전세가 나옵니다. 이 성전세금에 대해서 예수님 당시 예수님은 성전세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 대목을 24절부터 27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가로되 너의 선생이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가로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가라사대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뇨 세상 임금들이 뉘게 관세와 정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베드로가 가로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하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반 세겔은 성전세인데 하나님의 백성 말고 일반인들에게 받는 성전세가 반 세겔이었어요. 거기 종사한 제사장들 말고 일반인들에게 받는 세금이 반 세겔이란 말이죠. 이건 남녀 누구든지 주민등록 돼있는 사람은 다 내야 되는 게 반 세겔. 그만큼 율법이 인간들 선에서 그렇게 변질됐다고 보면 돼요. 어쨌든 간에 그 시대에는 예수님 당시에는 반 세겔 내게 돼있단 말이죠. 반 세겔이니까 요새 같으면 14만원 내게 돼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여기 본문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야기하기를 나는 성전세를 받을 입장이지 낼 위치에 있지 않다, 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왜냐하면 성전세는 성전을 위해서 있는 세죠. 어떤 나라가 있는데 나라의 주인이 왕이란 말이죠. 그러면 나라는 왕의 소유인 동시에 왕가의 소유가 되지요. 왕 아들이 있겠지요.
그러면 왕가, 아들 이걸 중심으로 나라가 돌아가니까 왕가에 속하지 않는 자들이 백성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왕의 재정을 위해서 운영되는데 필요한 제물을 왕이 운영자니까 왕가 밖에 자신의 식구 밖에서 세금을 받아서 운영이 된다, 라고 예수님이 이런 걸 확인하기 위해서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베드로야 임금의 아들이 자기 집안에 세금 낼 필요 있나, 없나? 없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성전은 이미 누구의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것이죠. 예수님께서 성전이란 개념을 사용할 때 기존에 인간들이 생각하고 인간들이 이해하고 있는 그 성전 개념을 프레스 눌러버리는 거예요. 압박을 가할 때 진짜 예수님의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하늘나라에 의미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의미라 하는 것은 세상이 저항하는 세력, 하나님의 뜻에 반발하는 세력과 부딪칠 때 그때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예수님의 힘으로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의 효과로 구원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힘 있게 잡아당겨서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구원되는 거예요. 그것도 그냥 자살해서 구원되는 게 아니고 인간과 부딪쳐서 나오는 살인현장, 그 살인의 현장을 놓치면 안 돼요. 왜? 살인현장이 있어야 예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긍휼이 그 현장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를 반대한 자를 구원함으로 말미암아 반대한 자가 기여했다든지 자기 지분이 있다는 소리를 안 나오게 해야 되는 거예요. 구원은 그렇게 되는 거예요. 천국은 그래서 면류관도 반납하는 겁니다. 요만큼도 우리의 노력이 거기에 첨가되면 안 돼요. 예수님은 성전세를 받아야 될 분입니다. 본인이 성전이고 본인의 나라, 예수님의 가족이 성전이기 때문에 성전세를 받아야 된다 이 말이죠.
받아야 되는데 아직 십자가 충돌 직전이기 때문에 이것도 모르는 바리새인들이 왜 너희 선생과 베드로 너는 성전세 안 내느냐고 이렇게 독촉이 온 겁니다. 그럼 누가 옳고 누가 맞느냐? 예수님이 맞고 바리새인 잘 나가는 그들은 틀렸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옳은 이야기했으니까 안 줘야 되잖아요.
주지 않아야 되는데 여기 보면 뭐라고 돼있냐 하면, 27절에 “그러나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오해란 말이 나와요.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잡아라” 오해의 반대말이 납득, 이해가 되는 겁니다. 여기 오해란 말을 왜 주님께서는 끄집어냈을까? 오해란 말을 끄집어내면서 그들의 요구조건대로 베드로에게 한 세겔을 가져다, 한 세겔이니까 예수님 반 세겔, 베드로 반 세겔 두 사람 합치면 한 세겔 되잖아요. 28만원. 28만원을 그들에게 줘버렸습니다.
그러면 성전세 달라는 그 자들이 예수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겠어요? 전혀 모르지요. “성전세 주세요.” 베드로가, “좀 기다려보세요. 우리 선생님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러면 멀뚱멀뚱 세금 거두는 사람은 팔짱 끼고 있는데 좀 있다 베드로가 와서, “여기 있습니다.” “예. 영수증 끊어드릴까요?” 이래서 갔다 이 말입니다. 그들한테는 전혀 오해의 소지가 없지요.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의미란 뭔가 두 이질적인 것이 부딪쳐야 의미가 생기는 거예요.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주님 제가 갖고 있는 것을 박살나게 하옵소서. 내가 내 위주로 살아가는 인생, 세상을 닮아가고 세상의 일부로 살아가는 것을 간절히 소원하는 내 뜻이 말씀을 복음을 통해서 아주 작살나게 해달라고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들어주셔야 돼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와 만날 때 하나님이 작살나잖아요. 좋게, 좋게 만날 수 있는 사이가 아니란 뜻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이 세상과 천국이 만날 때는 박살나는 거예요. 평화롭게 소통 되는 법이 없어요. 적대적인 힘을 갖고 있는데 어떻게 그게 좋게, 좋게 넘어가는 게 어디 있어요. 작살나야 되지요. 너는 마귀 들린 흉가라는 소릴 들어도 우리는 좋~다고 감사해야 돼요. 그게 박살나고 난 이후에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뭐 더 센 욕 없어요? 이제 그 욕도 너무 약해서 더 센 것 없습니까?” “독사의 새끼다.” “그것도 나한테는 너무 순한 표현인 것 같아요.” “너 망해라.” “그게 좀 산뜻하게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저한테 맞는 것 같습니다.” “당장 죽어라.” “예. 사도 바울의 소원이듯이 저의 소원입니다.” 장례식장은 죽으라고 있는 것이지 살라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장례식장과 걸 맞는 일치되는 주님의 안목과 일치되는 삶을 산다는 것, 그게 하나님의 목표고 뜻 아니겠습니까?
오해케 한다는 이 모든 말은 결국은 제자들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런 모든 이야기와 흐름이. 인간들이 갖고 있는 성전세 개념이 하나님 나라에서 진짜 개념과 어떤 식으로 바뀌어져 서로 다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세를 낼 때 그냥 고기 잡아서 고기 팔아서 내지 않습니다. 본인 자신은 성전세를 낼 수 없는 존재인 것을 분명히 해줘요.
성전은 있어야 됩니까, 없어야 됩니까? 말씀에 성전은 있어야 되지요. 성전은 있어야 되는데 이 지상에서 성전세를 거둘 위인들은 아무도 없어요. 성전은 분명히 하늘나라에 언약의 목표, 말씀의 목표로 있어야 되는데 이 성전에 협조할 위인들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왜? 도중에 가짜 성전 만들어놓고 돈 빼고 가짜 성전으로 사람들을 이동시킨 거예요.
가짜 성전은 그냥 예수 필요 없이 세워진 성전이 되겠지요. 예수님 필요 없는 성전. 예수 없어도 인간들만 세워지는 성전. 쉽게 말해서 십자가가 인간들이 알아듣는 십자가, 믿을 수 있는 십자가가 진짜 십자가를 가려버리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십자가, 십자가 한다고 해서 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진짜 십자가는 누가 죄인이고 누가 죽어 마땅합니까? 십자가 믿는 내가 죽어 마땅한 존재지요. 가짜 십자가는 뭡니까? 나 잘났다가 돼버려요. 나 훌륭하다가 돼버려요. 나 참 좋은 결정하고 좋은 선택했다는 내가 그냥 살아 있는 십자가에요. 가짜 십자가에요. 나는 안 망해야 된다고 우기는 십자가고 난 이 세상에서 성공해야 될 십자가가 가짜 십자가라고요.
십자가가 두 종류인 것처럼 그전에 성전도 두 종류가 있어요. 가짜 성전 만든 인간들이 성전세 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그럼 가짜 성전은 멸망해야 되겠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이 필요 없어도 성전이 유지되는 성전, 오늘날 교회 같아요. 인간들이 모여서 대한예수교 합동 측 간판만 걸면 그게 교회 되는 줄 아는 그 교회, 똑같은 거잖아요.
자기 박살난 자기 죄인 이런 것 하나도 없고 잘난 맛에 모여드는 교회, 나 칭찬하고 위로해 달라고 요청하는 교회, 하나님께 기도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뜻대로 잘 되고 인생 성공해달라고 비는 교회, 그 교회가 그냥 교회가 있다가 아니라 진짜 교회를 저항하고 반발하고 공격하는 그러한 일을 하는 교회에요.
교인들이 복음 전하는 목사를 망치게 한다니까요. 강력하게 저항하고. 태도가 불량하기 이를 데 없지요. 복음 전하면 설교 내내 삐딱한 자세로 인상 그려서 시계 보고 휴대폰 보고. 듣기 싫다 이 말이거든요. 다 아는 이야기 왜 하느냐 그런 뜻이죠. 그럼 그 교회 왜 왔나? 박살내려고 온 거예요. 시비 걸려고.
아까 무당 이야기해볼까요. 용한 무당 있다니까 멀리서 와서, “내가 여기 왜 왔게. 알아 맞춰봐?” 용한 무당이 진짜 용해서, “내 보니까 나이 37살인데 지금 남편 말고 남자 있제.”“아닌데.” “어허 우리 할머니가 신랑 하나 있다고 하던데.” “아닌데.” 용한 무당이, “왜 거짓말하느냐?” “거짓말하는 것 아닌데.” 무당 시험하러 온 손님이 하는 말이, “그 소리 말고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해라. 내가 언제 결혼했게.”
그게 바로 십자가 현장에서 로마군인이 요청한 거예요. 내가 원하는 메시아여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 둘 중에 누가 당신의 옷을 가질지 당신이 알아 맞춰봐, 라는 식으로 지금 십자가 앞에 있는 거예요. 내가 궁금한 것을 당신이 미리 예측해서 주식이 오를까 말아먹을까 그걸 알아달라고 비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이 말은 뭐냐?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삼위일체 어떤 누가 있더라도 나는 내 것에 손실이 안 나고 싶다, 나는 안 뭉개지고 싶다, 안 망하고 싶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저항이에요. 대드는 겁니다. 주님은 뜻이 이거에요. 이 땅에 성전은 없다. 단지 내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내가 하는 일이 없는 데서 있게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성전 짓기 위해서 성전세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 세는 어디서 나왔습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아까 마태복음 17장 봤잖아요. 그 성전세 어디서 나왔습니까? 누가 줬어요? 제자들이 고기 잡아서 고기 팔아서 줬습니까, 누가 줬습니까? 성전세가 어디서 나온 겁니까? 사람에게서 나왔어요, 고기에서 나왔어요? 물고기 입에서 나왔지요. 이게 무슨 뜻이에요?
인간세상에서 성전의 의미에 부합되는 성전세는 있다, 없다? 아무도 없죠. 그럼에도 성전은 있어야 되겠지요. 그럼 누가 성전을 만들고 성전세는 누가 줍니까? 바로 예수님 본인이 레위기 27장의 성전세를 완성하는 겁니다. 인간세계를 대표하는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인간에 필요한 노동력의 값으로 전환시켰죠. 예수님께서 순순히 그걸 응했어요. “그래 나를 일반인으로 봐라.”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먹은 것은 그 일을 했다고 해서 가룟유다와 제사장들이, “ 세계는 없어져야 돼. 이 세상은 없어져도 마땅해.”그렇게 생각했습니까, 아니면 누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란 그 사람이 없어져야 마땅하다고 본 거죠.
그러면 오늘날 교인들은 내가 없어져야 되겠어요, 내 가정에서 예수가 없어져야 돼요, 어느 쪽입니까? 둘 중에 누가 있어야 돼요? 예수님 물에 빠졌고 나도 물에 빠졌다면 누굴 건져야 돼요? 나를 건져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는 건져내지 말고. 내 자식과 예수님 물에 빠지면 내 자식 건져야 되고 예수님은 버려도 괜찮다는 거예요. 왜? 나는 귀하니까, 나는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세상에 성전세 그 정도는 재정담당 가룟유다 주머니에 있어요. 있는 걸 주는 게 아니에요. 이 땅에 없는 걸 준다고. 없는 걸 주는 방법이 고기 잡아라. 고기 잡을 때 고기 안에 돈 들어있다는 아이디어는 이 세상에 어떤 아이디어에선 안 나오지요.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안 나온다는 말은, 인간은 있으나마나 하늘나라 성전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보탬이 안 된다는 뜻이에요.
내가 하나님의 성전에 보탬이 안 돼요. 그냥 안 되기 때문에 성전 되려면 바치면 돼요.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께 다 드리면 되는 거예요. 흉가라도 좋고 공중변소라도 괜찮아요. 그냥 드리세요. 원래 추접스럽고 더러워요. 귀신 들렸어요. 그냥 드리세요. 드리시면 그 드린 것을 주께서 받아주십니다. 전이시켜서. 안수하게 되면 죄가 전이된다 했지요. 넘겨가지요. 주께서는 고물, 폐품 수집해서 신상으로 만들어버리죠. 없는 것으로 있게 해요.
우리는 이 땅에 있더라도 우리 자신을 생각하지 마세요. 우린 없는 존재니까. 우리 자신에 그다지 미련두지 마세요. 나를 믿고 세상을 믿으면 천벌 받습니다. 천벌 받는 인간에게 그렇게 애착 갖지 마세요. 내 과거 공로가 어떻고 백날 해도 그 스토리는 천국과 연결되지 않고 지옥과 연결돼있어요.
지옥 가려고 꾸역꾸역 그렇게 애쓰면서 인생을 힘들게 살았습니까? 기껏 가봐야 지옥 가는데 넓은 길로 가봐야 다 지옥 가는데. 지옥 뭐 그리 좋다고 뭐가 궁금해서 지옥은 가만있어도 가고 애써도 가지만. 도중에 뭔가 노선변경이 있어줘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예수님 십자가 중심으로 묶인다는 것, 하나님 천국은 십자가로 묶인 사람들만 간다는 것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천벌 받은 인간으로 보시는 것이 하나님의 안목이란 말이죠. 그러면 성령을 받았으면 그 안목으로 우리를 볼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그들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해서, 이 말은 그들의 모든 의견들이 우리 집단, 제자들과 예수님 집단에는 끼어들지 말게 하기 위해서란 뜻이에요. 다시 말해서 저 예수 집단은 이단 집단으로 성전세도 안 내더라. 저게 별 것인 줄 아나. 아무 것도 아니지, 라고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함께 있는 것을 특별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의 평소에 생각한 것처럼 저들은 별 것 아니야. 그러니까 성전세 달라 했잖아요.
그처럼 그들에게 아무 생각에 변동을 주지 않기 위해서 주님께선 그들이 요구한대로 줘버리고 여기 제자들한테는 있는 것을 주는 게 아니고 그들이 인간이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물고기 잡아서 아가리 벌려보니까 두 세겔도 아니고 반 세겔도 아니에요. 딱 그들이 요구한 만큼 너, 나의 세금 합쳐서 한 세겔만 있어요. 딱 건져서 줬잖아요.
그렇게 해서 영원한 결별, 세상에 대한 영원한 결별을 예수님의 모든 행위와 십자가를 통해서 진짜 이스라엘과 진짜 성도들과 이 세상과 영원한 결별을 천국, 지옥 오기 전에 이미 지금부터 복음을 통해서 그걸 확인시켜주는 그 말씀이 오늘날 말씀 전파의 현장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옵소서. 복음으로 십자가로 보는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 굴러가는데 같이 섞여서 남들의 평가에 놀아나는 식으로 보는지 우리가 어떤 점에서 죽어 마땅함을 깨닫는 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 시선뿐인 것을 감사히 여기면서 이미 바쳐진 존재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