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10218B슥4장6절(이스라엘 쪼개기)-이 근호 목사
안양20210218B슥4장6절(이스라엘 쪼개기)-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꼭 비단 대중가요란 노래 음악 그런 것뿐만 아니고 미술이라든지 연극이라든지 그런 것이 위로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육의 특징은 나를 알아주는 거예요. 나를 알아주는 것. 나를 인정해주는 것. 으샤 으샤해 주는 거거든요. 그럼 나는 뭐냐, 나는 기억의 다발이에요. 내가 그런 노래나 음악으로 또는 가까운 일가친척의 옛날의 헤어졌던 사촌과 만나서 즐겁다는 말은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내 기억과 새로운 기억이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친근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내가 아직 안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에 위로가 되는 겁니다.
나의 절대성, 나의 고귀함, 나의 가치를 늘 옆에서 그것을 찬미하고 그걸 칭찬해주고 격려해줄 때 우리는 위로를 느끼는 겁니다. 그럼 위로가 하는 결국은 뭐냐 악마의 마귀라 할 수 있지요. 너를 절대로 끝까지 너를 포기하면 안 돼! 막이 있는 거예요. 만약에 그 막이 떨어져나가면 마포대교에서 자살하지요.
그 마지막다운 막 같은 거. 자기의 과거의 기억과 유사성을 갖고 있는 겁니다. 행복했던 가정 이런 모든 게 하여튼 기억의 그게 그 안에서 나라는 것을 아까 뭐했다? 현실화시킨 거예요. 이게 착각인데. 착각이라도 좋아요. 왜? 나의 절대성이 되는 조건하에는 그걸 착각이든 허상이든 뭐라고 욕해도 나는 그걸 나를 위해서만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에.
나는 그 현실 없이는 내가 나의 절대성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걸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모든 공간을 내 의미로 다 뻗어나가 채웠다. 모든 공간을. 내가 아는 모든 공간을 내 의미로 나와 관련된 상호작용이라 했지요. 상호작용. 다 의미로 가득 채운 거예요. 그럼 여기는 뭐가 없습니까? 빈 공간이 없지요. 빈 공간이 없습니다. 전부 다 나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영은 뭐냐, 빈 공간을 새로 만들어버려요. 내가 점유한 나의 현실, 포함되지 않은 다른 공간을 만들어버립니다. 다른 공간을 만들어버린다는 말은 그 공간에는 비어있겠지요. 나는 지금 꽉 채워져 있어요. 내가 꽉 채워진 내 채움에 대한 이 내용이 무용지물이 돼요. 무용지물. 아무짝도 소용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나를 건사하고 나를 지키려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그 새로움 앞에서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 신약에서는 그냥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라고 하는 겁니다. 죄인 중에 괴수다.
지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그 중풍병자가 특이성을 갖게 된 것은 중풍병자가 예상하지 못하는, 중풍병자가 예상한 것은 뭐냐, 내가 중풍병이 없어지는 낫는 걸 바라지요. 그런데 거기에 죄사함이 들어왔다는 말은 꽂혔다는 말은 결국 나는 그 죄사함을 꽂히기 위해서는 나는 중풍병을 낫겠다는 시도 자체도 뭐가 되느냐 하면 죄가 되어야 돼요. 죄가 되어야 죄사함이 의미가 있잖아요. 그게 뭐냐 창조보다 더 낫다는 그게 뭐냐 하면 새로움이에요. 새로움.
십자가의 반복은 우리에게 새로움을 줍니다. 그 새로움을 위해서 우리는 계속 육적이어야 돼요. 십자가 안 것까지도 나의 영역에다가 집어넣어서 십자가 아는 것까지 테두리 쳐서 그걸 나의 세계로 절대화시키는 그런 육적인 작업이 또 시작되는 거예요. 나 복음 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성령께서 어떻게 한다? 또 빈 공간을 만들어요. 이건 몰랐지롱. 새로운 빈 공간을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복음 안다고 우겼던 그것이 하나의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죽은 사물체가 되지요. 죽은 게 되어버립니다. 복음 알고, 십자가 알고 한 이런 나라는 인식 자체가 그건 생동감이 전혀 없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 자기의 무너진 내용을 쓰는 것과 정답을 쓰는 것과 그리 차이가 나요. 설교할 때 정답을 이야기하는 그것은 설교라 할 수 없어요. 무너져 내린 것을 써야 돼요. 무너져 내린 그것을.
정답이야 뭐 십자가마을에서 한 정답사하지요. 정답 얼마나 잘한다고요. 새로움이 없으면 새로운 글이 안 나옵니다. 새로운 글도 안 나오는데 억지로 쓴다. 이건 내 알아줘! 밖에 안 나와요. 나의 세계, 나의 가상세계, 내가 존대하는 그 세계, 니도 같이 존중해 주오! 그런 뜻이거든요.
십자가는 우리를 심판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를 용서하는 행위고 그것이 긍휼하심 행위입니다. 우리가 확보된 나의 세계를 늘 새롭게 심판 때려주는 거예요. 얻어맞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깨지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육에 대한 환상은 영이 아니면 누가 깨겠습니까. 그래서 성령은 어떻게 깨느냐 하면 근거가 십자가 영으로서 깨어버려요. 십자가라는 것은 인간의 한계선 그 바깥에서 인간 전체를 심판주가 심판했던 그 결과물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너희들의 모든 시도, 현실구축, 아까 열 가지 있지요. 인간의 한계. 그 인간의 한계는 십자가 앞까지 도달되는 거예요. 십자가 앞까지. 제가 어제 들었던 이야기인데. 수요일에 참석하신 그 분께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신입사원을 뽑았어요. 한 명 뽑는데 300명이 왔다는 겁니다. 서류심사 300명이 왔다는 거예요. 요새는 어느 대학 출신이고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이런 거 하나도 안 묻는 답니다. 서류적인 것으로서는 모든 걸 가리고 사회복지사 갖고 있는 사람만 뭐든지 원서 낼 수 있는 그 한 명 뽑는데 300명이 왔어요.
면접을 봅니다. 면접을 보는데 5명이 면접을 보는데 면접 보는 사람들은 막 4년 초년생이지요. 대학 졸업하고 이제 사회복지사1급자격증이 있으니까 그 관련된 과 졸업해가지고 시험 쳐서 합격해가지고 그런 사람들인데 면접을 봅니다. 이 면접관이 묻지요.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면 잘 합니까? 물었어요. 그러니까 이 면접 보는 사람도 답답한 게 잘하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에요. 떨어질 사람을 뽑는 거예요. 배제하면 나머지는 남는 사람이 되니까. 한명 만 남으면 돼요. 300명 왔으니까.
개인감정 없는데도 미안스러운 거예요. 목적이 얼마나 훌륭하냐가 아니라 떨쳐내는 것에 급급하다는 것을 현실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질문을 하지요. 사회생활 잘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니까, 어떤 사람은 눈치를 잘 봐야 됩니다. 면접관이 신났지요. 대번 하나 추려낸 거예요. 어떤 지원자는 말하기를 “저는 절대로 원장 말씀대로 저는 안 듣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걸 듣던 원장이 빼야 돼. 빼버렸어요.
그러면 면접관이 원하는 답변은 이거에요. 시간을 지키고 내게 주어진 일은 책임감 있게 다합니다. 요런 말만 하면 돼요. 그런 말한다고 다 합격되는 건 아니지만 사전에 잘릴 일은 없다 이 말입니다. 사전에 잘릴 일은 없거든요. 이건 뭐냐 하면 직장을 구한다는 것은 나의 절대 세계를 허무는 거예요. 나는 내 고유의 나를 위한 시간 따로 있고 내 세계 지키고 싶은 내 세계 있지만, 그 돈이란 것이 나보다 더 세. 더 정확히 말할까요. 내가 꾸미고 싶은 내 이 현실을 누가 박살내는가. 돈이라는 자본주의가 박살내요. 나의 세계를 돈이 들어오면 내가 고이 고이 평생 아름답게 고상하게 했던 이 세계가 여지없이 박살납니다.
참, 이 세상 고맙지요. 어느 인간이든 자기가 착하고 바르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는 것. 본인이 생각해도 흐뭇한 거예요. 나 같은 이 착한 사람, 선한 사람, 천사 같은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그래. 나와 보라고 그래. 이게 자기의 의에 부합되는 자아상이거든요.
그런데 무엇이 용납이 안 된다. 한 자로. 돈이에요. 돈. 예수님 시험할 때 첫 번째 시험이 뭐였습니까? 돈이었지요. 떡이었지요. 돈, 떡, 재물, 소유물, 이게 소박한 나의 현실을 작살냅니다. 그러면 그 취업하는 사람은 일단 나중 취업되고 볼 일이지요. 내가 취업되고 본다는 것은 내가 취업한 내가 원장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는 말은 그렇게 말한 지원자는 뭘 모르느냐 하면 내가 이 회사에 오더라도 나의 고유의 것은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시간 지키고 바르게 하겠습니다. 라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더 나은 나를 위해서 잠시 나의 세계를 접겠습니다. 그런 뜻이지요. 이게 아까 말한 요령부리는 거예요. 요령부리는 겁니다. 사회생활 그리하는 거예요. 자기 부인을 하는 거예요. 사회생활은 꼭 십자가에서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이 아니고 돈 앞에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 이게 사회생활입니다. 돈 앞에서 자기를 스스로 부인하는 생활.
일단 벌고 보자. 다시 잃어버린 나를 만회하고 찾으면 될 거 아니냐. 그러나 직장생활해보세요. 마귀가 그렇게 싶사리 우리가 이 세상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럼 다른 직장 알아봐야지요. 그게 아까 뭐한다? 연결을 꾀한다. 연결을 취한다. 직장생활하면서 쉬는 시간에 눈치봐가면서 뭐한다? 주식 투자를 한다. 하나의 개미가 되어서 해본다. 이건 직장 그만뒀을 때 내가 사업할 밑천 얻기 위해서 주식투자를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말은 내가 책임 있게 다하겠습니다. 해놓고는 딴 짓하고 있는 거예요. 회사 측도 그걸 알고 있는 겁니다. 이걸 무슨 현상이냐, 이걸 가지고 이 이야기가 일반 회사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게 소위 교회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무슨 현상이라 하느냐 하면 레임덕현상이라 해요. 레임덕. 들어봤습니까. 국정 후반기에 권력이 누수가 되어버려요. 초반에는 딱 잡았는데 나중 끝에 되게 되면 민정수석하고 법무부장관하고 싸우고 있어요. 이게 레임덕 현상이에요.
대통령이지만 관여 못해요. 권력의 장악력이 점점 더 약해져버리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처음에 교회에 나왔을 때 울고 불고 찬송가 손들고 나옵니다. 있잖아요. 천부여! 손들고 옵니다. 그 때는 레임덕이 없어요. 주여! 이 몸 주님께 다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 몸, 주님이여 받을 수 있거든 받으세요.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주를 위해 살리라. 내가 방황할 때, 가사에도 나와요.
그런데 한 5년, 10년 하면 레임덕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육적이 영적 세계를 완전히 전부다 찢어 놔버린 거예요. 교회 와서도 지 자존심 챙기고 남한테 안 지려하는 그 현상.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바로 이스라엘이 진짜 영적 이스라엘, 육적 이스라엘을 구분 지을 때 레임덕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올 때 어떻게 땅에 들어왔는가, 전혀 그런 생각 못하고 일단 들어왔으면 내 직장이고, 내 거라고 본 거예요. 나의 꿈을 실현시킬 장소다. 이리 보는 겁니다. 육이 영을 장악하려한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장악하려고한 겁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내 손에 있으니까 자기 내부는 영적인 아주 고상한 거룩한 영적인 세계라고 착각한 거예요.
그런데 아까 외부에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이방 민족에 뭐를 갖고 있다? 내 능으로, 힘으로 했으니까 그들은 어떤 인간의 능력이 발휘되고 인간의 힘이 발휘돼요. 그게 부러운 거예요. ‘아~~ 하나님 믿다가 이게 완전히 거지꼴 나겠다.’ 이런 생각이 막 드는 겁니다. 내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지, 복음으로 살아야지, 라는 그 레임덕. 내 복음을 장악하는 내 권력이 누수가 생긴 겁니다. 이게 벌써 그게 틈이 벌어진 거예요. 틈이.
그러면 이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이렇게 망해버렸다는 말은 신약에 오게 되면 신약의 복음에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이 구약처럼 망하는 경우는 두 번 다시 일어나겠습니까? 안 일어나겠습니까? 안 일어나게 조치하겠지요. 왜, 인간의 육이라 하는 것은 한계가 뻔히 구약을 통해서 이미 다 노출됐잖아요.
이스라엘이 왜 망했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이 둘 다 고유한 실체가 있는 한 결코 이건 만날 수 없다. 하나가 될 수 없다. 이것이 분명히 드러났어요. 나도 살고 주님도 살고 이건 있을 수가 없어요. 나는 죽고 주님은 내 안에서 살아나는 것. 그게 절대적이에요. 나는 죽고 주님은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서 요령 부려서 알아서 주님 저 죽었습니다. 라고 할 때 그게 죽은 걸까요? 죽은 척을 하고 있는 겁니까? 죽은 척을 해서 나를 죽은 상태에서 따로 내가 나를 살수 있다면 죽은 척도 할 수 있다. 아니 죽은 척이 아니고 진짜 죽으라면 죽을 수 있습니다. 하는 그것도 꼼수에요. 꼼수. 그냥 사시면 되는데 내가 예수님 앞에 원하는 십자가의 삶, 자기 부인의 삶을 살겠다는 것도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나의 힘과 나의 능에 해당돼요.
아까 했지만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뭐냐 뭘 감사하고, 뭘 찬미하느냐, 세상이 주의 뜻대로 계획대로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찬미하면 되지요. 주의 계획대로. 그 다음에 나올 문제는 계획이 뭐냐는 거예요. 계획이. 주의 계획이 뭐냐,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망하는 겁니다.
내가 망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흔쾌히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흔쾌히 감사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망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중국집에 데려가 가지고 자장면 시킨 사람 천국가고 짬뽕 시킨 사람 지옥 보낸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쾌히 자장면을 선택하겠지요. 그러면 그건 자장면 먹는 게 아닙니다. 내 능과 힘으로 자장면 먹은 거예요. 아 이 예가 괜찮네. 지금 이야기해 놓고.
내가 좋아서 자장면 먹는 게 아니고 주님이 자장면 좋아한다니까 내 힘과 능을 가동시킨 거예요. 동원시킨 거예요. 주님께서 자장면이냐, 짬뽕이냐 하는 것은 너희들은 원래 짬뽕 먹게 되어있기 때문에 짬뽕 먹어서 망해버려라 이 말이거든요.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뭐냐 짬뽕 먹으면 돼요. 짬뽕 먹으면 뭐가 우리한테 살아나느냐 하면 짬뽕 먹는다 하면 지옥 간다는 주의 뜻이 짬뽕 먹는 우리를 통해서 발현되잖아요. 그러면 그게 감사고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말입니다.
왜, 그게 주님의 존재와 내 존재를 비교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함이기 때문에. 십자가라는 것은 이미 나를 망한 존재로 인정한다면 그걸 극구 부인해서 안 망하려고 할 게 아니라 십자가만 드러낼 수 있다면 언제든지 망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내 힘으로 내 능으로 안 망해도 그냥 살아도 이미 십자가에 의해서 규정된 거예요. 망했다! 짬뽕이나 먹어라. 그럼 짬뽕 먹으면 되지요. 전혀 어렵지 않지요. 굉장히 쉽습니다.
그런 경우가 사도행전19장에 나옵니다. 19장하기 전에 비유 하나를 들겠어요. 아버지께서 가족들 모아놓고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오늘 저녁상을 차린다. 선언하고 직장하고 퇴근할 때 내가 저녁상을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차린다. 딱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버지 올 때 쯤 되어가지고 심판주 올 때 되어가지고 아버지 좋아하는, 아버지는 뭐 좋아하더라? 아버지는 피자 좋아하더라. 피자.
이건 여담인데요, 이건 성경에도 관계없는 여담인데. 지난 주일날 이렇게 인제 주일학교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제 아내가 귓속말로 내 책상에 피자 있으니까 집에 갈 때 삐딱 들지 말고 옆으로 잘 들으라는 거예요. 으쌰! 피자인 줄 알고 좋다했거든요. 나중에 딱 보니까 피자가 아니고 파이였어요. 아내가 말 실수한 거예요. 피자, 피 들어가니까 어떤 호도파이를 만들은 거예요.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 내 현실이 작살났다 이야기하려고. 피자가 왜 맛있느냐 하면 과거에 피자를 먹어본 기억이 내 안에서 대조를 하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아무튼 아버지가 피자를 좋아한다 해가지고 큰 딸은 피자 준비하고 그 다음 둘째 딸은 아버지는 치킨 좋아한다고 치킨 준비하고 가만히 보니 내 좋아하는 이야기만 계속하는데. 세 번째는 단팥죽 좋아한다고 준비하고. 이리 죽 한 거예요.
아버지는 또 해물탕 좋아한다고 엄마는 해물탕 준비하고. 아버지는 딱 와가지고 짜자잔! 아버지는 퇴근해가지고 딩동댕~~해서 들어왔다 말이죠. 아버지가 막 화를 내는 거예요. 다 치워라! 나는 내가 갖고 온 피자로 만들겠다. 그게 뭐냐 처음 출발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오늘 저녁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겠다고 했거든요. 음식을 하겠다는데 식구들이 그걸 듣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 힘으로 능으로 미리 친히 준비를 한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 뜻은 그게 아니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내가 준비해서 내가 먹을 때 니가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에 같이 동참하라고 내가 그 소리한 건데 아버지가 피자 좋아한다고 니가 피자를 사와? 니가 사온 피자는 내가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는다고 확 치워버린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십자가사건이에요.
일체 우리의 육에서 나온 힘과 능은 안 받습니다. 우리의 종교나 경건은 안 받아요. 이제 확 이해되지 않습니까. 인생 바르게 사는 거 받지를 않습니다. 그게 스룹바벨입니다. 스룹바벨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망했습니다. 망한 게 당연합니다. 가 요소가 담겨 있는 인물이 스룹바벨이에요. 우리는 바벨론에 잡혀가도 합당합니다. 외부에서 그러니까 일본에서 돌아온 조선사람 이거든요. 일본 유학 갔다 온 사람 이리 보면 돼요. 우리가 일제시대때 어떤 사람은 강점기라고 하는데 새로운 용어는 다 싫어해요. 무조건 나는 강점기 아니에요. 일제시대에요. 무조건.
일제시대때 일본의 통치아래 있었던 그 시절에 대해서 통치할 만하다고 내 내부가 작용되어있는 사람으로 새로운 성전으로 만듭니다. 스룹바벨에 의해서. 무슨 줄로 해서 다람줄. 다림줄은 두 자로 뭐라 했습니까? 율법. 양보 없는 율법이에요. 이 율법이 다림줄이 완성되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간단하잖아요. 성경이 이렇게 보니까 굉장히 간단하지요. 그런데 우리의 육신이 있다 말이죠. 우리의 육신은 아까 육신의 열 가지 봤지요. 육신은 어떻게 하냐 육신에서 납득이 되는 그것만 뭘로 본다? 유일한 현실, 이것을 가지고 공간 점유.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공간점유에요.
공간점유가 되기 위해서 여기서 뭐냐 하면 선택과 인간은 분별력을 작용해요. 선택과 분별. 과거의 나와 닮은 것과 내 과거의 나를 인정해주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 이걸 분별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 목사 당신 지금 북한 김정은 만나러 갈래?” “아니” 이거 뭐예요? 분별하는 거죠. 북한 가서 고구마 삶아먹을 일이 있어요. 내 과거에는 하루 세끼 고구마 먹는 거 싫어. 감자 먹는 거 싫어. 그러면 뭐를 배척합니까? 북한 김정은 만나는 거 어떻게 됩니까? 나는 선호하지 않지요. 좋아하지 않지요. 그러면 이 공간은 어떤 공간이냐, 내가 원하는 공간과 내가 배척한 공간, 그걸 플러스 합쳐보면 내가 아는 현실의 전부잖아요.
당신 지옥 갈래? 천국 갈래? 지옥 싫어 천국가고 싶어. 이건 뭡니까? 내가 아는 천국에 내가 가는 모습이 과거의 내 위주의 현실과 합치되지요. 그런데 내가 지옥 불 그것도 한 번 들어가면 못나오는 이게 문제인 거예요. 사람이 희망이 없으면 못사는데 그것도 10년 살다가 정신 차리고 나오면 그래도 지옥가도 희망은 있잖아요. 지옥가도 희망이 없어요. 복음이 없는 사람은 복음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희망이 없어요. 희망이.
안타깝지요. 아, 애먹이는 남편이야 지옥 가는 거 속이나 시원하지만, 내 자식은 딸이나 아들은 어쩔 건데. 지 딴아 희망이라 하는 것은 가짜고, 허구거든요. 지 밖에 모르는 거지만. 그거 말고 주님이 준비하신 성경에서 말씀 있는 이 천국. 거기서 아무 대책도 없는 거예요. 그럼 뭐 복음 이야기하면 듣기 싫다! 시험 준비해야 돼. 나는 나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어제 수요일에 마태복음 22장 혼인잔치 이야기했잖아요.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왜 즐거워야 될 결혼잔치가 완전히 살육의 현장이 되었는가 이건 뭐냐 하면 나는 밭 샀다. 소 샀다. 상업차 어디 출장가야 된다. 나는 내 장가가기도 바쁘다. 라고 하는 자들이 왜 무참하게도 임금에 의해서 혼인잔치 주체자한테 살육을 당해야 되느냐 하면 그 사람은 혼인잔치에서 주안점은 뭐냐 하면 여성으로서 갖는 신부로서 갖는 행복이 핵심요소가 될 때 천국의 혼인잔치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거든요.
그런데 내가 밭을 사고 내가 소를 사고 내가 출장가 버리면 주인공이 뭐냐 그 사람은 자기가 누구, 누구의 여자가 아니에요. 자기는 지금 남성상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자기 개성을 발휘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혼인잔치 때 작살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기뻐요? 작살내는 그 임금님이 주체 자가 되게 기쁜 혼인잔치 날이 되는 거예요.
변사또 생일잔치할 때 춘향이 작살내야 그 기쁨이 배가 되는 것처럼. 이게 바로 심판주의 지금 하실 계획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횡포로 보지만. 지금 신약 때에 이 구약을 보는 이유는 스룹바벨이 누구냐 하면 그 당시의 예수님으로 보시면 돼요. 예수님의 영이 임했다. 그러면 예수님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너그는 이미 죽었어!” 내용이 포함돼 있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 사건의 의미입니다. 죽은 자한테는 아무것도 받는다? 안 받는다? 헌금이고 기도고 아무것도 안 받아요. 본인이 답답해서 한다고요. 답답하든 말든 안 받아요. 안 받든 말든 나는 하겠다는 거예요. 하든지 말든지.
하나님이 원하는 예루살렘은 여성성을 지니고, 그거는 태어날 때부터 독자적으로 갖고 있던 남성성으로서는 자신의 행함이나 능으로 할 수 없는 거예요. 철저하게 모든 인간은 구원되지 못한다, 를 그걸 명확하게 해주는 그 영이 무슨 영이냐 십자가에서 하는 성령입니다. 성신입니다. 니는 죽은 놈은 아무것도 못하고 활동하는 것은 누구만 활동한다? 성신이 활동하고 성령이 활동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차질 없이 이루어진다, 를 니가 찬미할 수 있는 그러한 안목이 있느냐를 보는 거예요.
그 안목은 바로 성령을 받아야 알 수 있어요. 왜, 성령은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비로소 밝혀지는 게 성령의 일이고, 성령은 모든 것이 종결되고 난 뒤를 볼 수 있는 눈이 성령의 눈이기 때문에 그래요. 확정적이에요. 절대적이지요. 확정적, 절대적이 없어버리면 우리는 또 시도하게 돼요. 고개를 쳐들고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 이런 거 있잖아요.
그래서 사도행전19장 이제 봅시다. 사도행전 하는데 되게 길다. 사도행전19장11절, 12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아까 우리가 한 거 복습해 봅시다. 인간은 예상하지요. 예측합니다. 자기의 영역을 넓히는 것을 멈추지를 않아요.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내가 판단하는 나의 공간으로 점유되어야 되니까. 아~ 싫어. 아~ 나한테 오지 마! 싫어. 아! 저건 내가 원해. 나한테 오라. 한명 뽑는데 한명 왔다고. 아~ 시시해. 300명 왔다고. 아~ 합격되어야 되겠어. 이리 되거든요.
왜, 300명 와서 한 명 합격되는 것과 한 명 왔는데 한 명 합격되는 것, 미달되는데 합격되는 것과 50:1의 합격되는 것과 어느 것이 나를 절대성을 보장해 주는가, 센데 가야 되지요. 이게 뭐냐 현실 판단이에요. 어떻게 판단한다. 내 절대성을 준해서 현실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거예요. 버릴 것은 버리고 얻을 것은 얻는 것.
그래서 이건 나로 꽉 차있는, 저건 내가 버린 거니까 나는 탐 안내. 나의 것으로 꽉 차있는 내 의미로 꽉 차있는 그 현실. 빈 공간이 없어요. 빈 공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뭐가 나타났습니까? 빈 공간이 나타났지요. 예상 못했어요. 미리 예상 못했습니다. 바울이 손으로 희한한 능력을 행하고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니까 그 병이 나았어요.
그건 그 현장에서 새롭게 알게 된 거에요. 새롭게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새롭게 알게 된 것을 가지고 그걸 구경하는 관찰자들 중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 자신의 과거에 인간은 자기의 기억이 자기 자아잖아요. 자아니까 새로 일어난 새로운 게 굉장히 무척 좋아보였던 겁니다. 좋아보였으니까 자기가 자기 공간이 알고 있는 공간 바깥에서 무슨 빈 공간 새로움이 채워졌지요.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하느냐, 그 빈 공간에 채워진 것을 다시 내 공간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하겠지요. 그럼 비교하겠지요. 아~ 저거 괜찮네. 나도 그 능력 있으면 좋겠다. 하겠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 이건 사람 몸도 피부도 아니에요. 사도바울의 피부도 아니고 아예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병이 낫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말이지요. 그러면 사람은 그걸 보면 어떤 욕심이 육신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등장하겠습니까? 내 손수건으로도 남들이 병이 낫는다면 이 손수건을 똑같은 손수건을 대구 서문시장가가지고 열 장을 사가지고 내가 코침을 바르고 내가 세탁기에 돌려버리면 거기서 능력은 계속 살아있어서 이왕이면 보다 많은 사람이 병에서 나아서 예수 쪽으로 오게 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잘했다. 이득이다. 우리 장사 잘하고 있네. 라고 칭찬해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그 생각이 왜 드느냐 하면 과거에 이미 그 생각을 갖고 있었단 뜻이에요. 나의 존재의 가치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 무슨 짓도 할 수 있습니다. 내 가치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위로 받고 호응 받고 나의 절대성이 나만이 인정하는 게 아니라 남들까지 나의 절대성을 인정한다면 내가 무슨 짓을 못하리오. 그게 바로 예수님이 광야에서 당했던 몇 번째 시험? 마태복음에서 두 번째 시험이에요. 니가 여기서 뛰어내려라. 사람들은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 줄 것이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시험했다는 말은 이미 마귀 안에 마귀가 예수님에게 하고 있는 모든 인간이 그 마귀의 시험에 전부 다 넘어갔다는 뜻이에요. 너도 마찬가지다. 니가 별거냐. 이미 그 안에는 여러분들도 저도 포함되어있고 이미 넘어간 거예요. 유튜브 조회 수 팍팍 좋아요! 막 올라와 보세요. 갑자기 기분이 막 업 된다니까요. 전날에 20명 봤는데, 요번에 이천명 봐보세요. 기계가 잘못됐나. 50만명. 강다니엘 그런 사람한테는 수천명, 수천만명이 되겠지요. 방탄 소년단 말이지요. 나는 방탄복도 없다. 지금.
그걸 한꺼번에 잃어보세요.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강남강의 할 때 제가 그렇게 했잖아요. 100미터 올라갔는데 높이 50미터 했지요. 사람이 그만큼 힘들게 인생을 살아왔으면 우리는 뭘 확인하고 싶어 하느냐 하면 바닥에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높게 올라왔는가를 본인이 확인하고 싶어요. 교회를 다니면 다닌 만큼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성화론이 절로 생긴다니까요. 성화론이.
내가 50년을 다녔으니까 뭔가 달라졌는가는 확실한데 어디까지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 높이를 보고 싶은 겁니다. 이 높이의 공식이 되는 그게 수학공식에 뭐하고 했습니까? 사인. 수학한지 너무 오래돼가지고. 사인은 빗변에 높이를 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높이 왔는가를 확인하는 순간 또 똑같은 마음 때문에 뭐냐 하면 이렇게 대단했는데 한순간에 추락하면 안 되겠지. 라는 공포가 달려오겠지요.
이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경건을 위장한 속물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했다. 세상에서 방황했다고 이제는 그 세상 생활에 안 들어가겠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중이에요. 뭘 기대해요. 뭘 기대하겠어요.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향상된 나를 기대하겠지요. 그건 뭐를 모독하는 겁니까. 안티그리스도. 십자가.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예요. 전혀 지금 복음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자꾸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하고, 사도바울을 본받으려고 해요.
자, 사도행전19장 해봅시다. 저렇게 하니까 그 뒤에 그걸 보고 하니까 13절 악귀도 나갔더라. 이에 돌아다니면서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 대해서 주예수를 불러서 말하되, 아~~ 이거 주 예수를 부른다는 거 굉장히 중요한 대목인데, 이건 뭐냐 하면 그 브랜드 상표와 내용물이 다른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몰라요. 내용물은 주변이 시커머니까 내용물은 모르고 뭘 보고 사느냐 하면 상표보고 사겠지요. 브랜드보고 사겠지요.
예수 이름으로 자기 몸에다가 예수 이름으로 거기다가 상표 떼어가지고 거기다가 붙이는 거예요. 주님이 봤으면 상표법 위반이에요. 그거. 자기 내용물이 뭔지도 모르고 본인의 상표로 붙이는 거예요. 왜? 남한테 인정받는 것이 나한테 유리하다는 자기의 과거의 자아생활이 기억이 내 두뇌 안에 활성화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뇌는 판단하잖아요.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하고. 그게 자아가 공명화되어서 자아가 성립되거든요. 절대적이지요. 그러나 정확한 건 아니에요. 정확하고 절대적인 건 없지만, 무슨 성이라 해요? 정확성이 아니고 무슨 성. 유용성. 유용성이란 말은 앞에 뭐가 붙지요. 누구한테 유용하냐. 누구한테 유용하겠어요. 나한테 유용하지요.
그런데 그 자아가 없는데요. 두뇌는 자아가 없어요. 왜,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두뇌를 공부하면 할수록 뭘 느끼느냐, 나마저도 절대성이 아닌 걸 아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보이지 않는 미지의 X에요. 두뇌를 연구하는 사람은 미지의 X를 감지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괴물이지요. 괴물.
나마저 굴복시키는 그 모순의 괴물. 다만 우리는 나는 돈 좋아하고 인기 좋아하고 세상 좋아하고. 그 괴물이 시키는 대로 그저 움직일 뿐인데 그 괴물이 누구인지는 정체는 나는 모르겠고. 다만 그 괴물이 나하고 너무 친하게 익숙하게 기억에 박혀있기 때문에 그 괴물이 시키는 대로 나는 나다. 하는 것으로 살 수밖에 없지요. 쉽게 말해서 자기밖에 모르는 거죠. 아까 쉬는 시간에 자폐증 환자라고 했는데, 자폐증 빼세요. 그냥 환자에요. 그냥 환자입니다.
날 때부터 인간은 이단이라니까요. 인간은. 날 때부터. 그래서 여기 등장하는 사람이 어떤 유대인이 사도바울에 일어난 희한한 현상, 그러니까 빈 공간이지요. 인간이 예상 못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걸 좋아할 때 우리가 이 마술사를 욕할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항상 성화론처럼 이 위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십자가라는 것은 항상 바닥이에요. 바닥부터 시작하고 이 일은 누가 일하는가, 성령이 일하고 주님이 일하신 거예요. 주님의 계획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십자가 안에 어제의 십자가, 오늘의 십자가, 내일이면 내일의 십자가, 항상 십자가. 나는 죽었음을 확인하는 쪽으로 결과가 주어져야 돼요. 항상 바닥이라. 사인곡선이 성립되지 않아야 돼요. 이게. 탄젠트도 물론 성립되지 않아야 되고. 성립되지 않기 위해서 자꾸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서 십자가를 통해서 또 다시 박살나는 경우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 다음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 다음이에요. 그렇게 하니까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절은 우리가 잊지 말자고 한 목소리로 이야기합시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세상에 우리 바깥에 또 다른 현실, 영적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공간, 시간, 이게 전부인줄 알았는데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게 나의 평가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다른 공간이 있었어요. 악마가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니는 예수계에 속한 인물도 아니고 너는 놀라운 사실은 우리 같은 인간 성정을 갖은 바울인데 니는 사도바울에 속한 인간도 아니야. 라고 누가 이야기해요? 귀신이 악마가 이야기해요. 악마가 뭘 인정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은 지금 죽어도 어디 간다? 천국에 갈 사람이라는 것을 누가 지금 증언하고 있습니까? 악마가 증언하고 있어요. 악마가.
예수님과 바울은 같이 붙어있다는 겁니다. 이건 악마가 증언하고 있어요. 악마도 다 쓸데없는 게 아니지요. 악마가 뭐를 증거 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손수건과 앞치마가 이것이 사도바울의 힘이나 능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악마가 증언하고 있어요. 악마가.
사도바울이 이건 내가 한 거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야.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내가 안했다 해도 그것도 믿음직한 게 못돼. 겸손을 위장한 교만일 수가 있거든요. 그게 아니고 그냥 세상 돌아가는 것이 증언해준다니까. 사도바울이 악마하고 돈 거래 있었습니까. 니 내할 때 니 증언해달라. 그런 거 없었거든요. 사도바울은 그냥 살뿐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은 결과적으로 오늘 강의의 결론입니다.
결과적으로 뭐냐 하면 결과적으로 모든 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고백하는 거예요. 고백하는 거. 뭘 하자는 게 아니에요. 움직이면 돌아보면 그것이 마태복음5장의 달성이요, 마태복음6장의 그 나라의 의가 되고, 마태복음7장에 개나 돼지에게 복음 전하지 말라한 일이 되었고, 돌아보면 좁은 길로 가는 거고, 이건 내가 좁은 길로 가겠다가 아니라 내가 돌아보면 다 주의 지시에 의해서 주께서 자기 천국 현실을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열심히 차질 없이 자기 천국을 이루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니 힘도 아니고 니 재주도 능력도 아니라 이건 하나님의 성령, 십자가의 완성에 의한 전개로서 결과물로 오늘날 니가 여기 있다. 그게 스룹바벨이에요. 그 당시에 스룹바벨이에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뭐 사도바울은 워낙 진짜 신앙이 대단하고 워낙 사도니까 그 정도 수준 되니까 우리는 뭐 흉내도 못 내겠지만, 일반인이야 어떻게 그렇게 사도바울처럼 살겠습니까?” 라고 또 싶지요. 이건 내가 하는가.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럴 때 다시 한 번 데살로니가전서2장13절을 한 번 봅시다. 여기는 사도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교인들이 나와요.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 다음에 다 같이 시작.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스톱입니다.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이게 가능합니까. 이게 가능해요?
이게 어떻게 설명이 불가합니다. 저 사람이 어떤 말을 들을 때 성경 말씀이나 무슨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사도의 말을 사도가 분명히 하고 있는 걸 눈앞에서 다 알면서도 사람의 사도 당신의 말이 아닙니다. 라고 믿어지는 게 이것이 인간의 힘이나 능으로 될 일이냐 말이지요.
그러니 사도바울만 위대하고 사도바울만 귀신이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다는 그것이 귀신이나 누가 봐도 그 사람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에요. 예수님께.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리 되어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말은 내가 말씀을 지킨다는 말이 아니고 지키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여기서 역동적으로 지금 되게 바쁘게 지시하고 활동하고 있고 성과를 내고 있다는 거예요. 이건 유독 믿음 좋다는 사도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천국 가는 보통 사람들, 야~ 천국 가는 보통 사람들 말이 안 어울린다. 천국 가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에요. 보통 사람이 아닌 게 꼭 이런 소리해요. 나는 보통~ 사람입니다.
돈을 벌라 합니까. 뭐 예배당을 지으라 합니까.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그냥 내말을 할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주의 말씀 받아들이는 거. 이것이 우리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하고 성령이 임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아~ 그러면 됐지. 뭐 꼭 큰 교회 다녀야 됩니까. 내 자체가 이미 교회고 내 자체가 십자가 꽂혀가지고 날마다 주의 말씀 듣습니다. 해놓고는 돌아서면 또 육신이 높네. 그걸 나는 이 정도야. 그걸 또 자기의 절대성을 위한 자기 잘남을 위한 그걸로 딱딱하게 굳어내는 이 육신. 그 다음 또 작살내지요.
또 주의 말씀 들어옵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계속해서 주의 말씀이 한 번이 아니라 쉬지도 않고 주의 말씀이신 개 짖는 것도 주의 말씀으로 들리고. 전부 다 주의 말씀. 술 먹고 사람 짓을 못하는 짐승 짓을 하는 인간도 성도의 입장에는 그게 주의 일로 주의 행하심으로 받아들일 정도입니다. 모든 만사가 주님의 활발하게 활동하심. 일하심으로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한시도 주의 지시에서 떠나 본적이 없어요.
아침에 밥 먹으면서 “주여, 죄 짓습니다.” “그래, 그게 죄야.” 하는 것도 주의 말씀으로 들리는 거예요. “주여, 제가 샤워하는 것도 주의 죄짓는 겁니다.” “그래, 그게 죄짓는 거야.” 라고 들리는 주의 말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처음에 제자들이 그 말을 이해 못했습니다.
자, 끝으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후서11장에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스가랴에 나오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기 직전에 이스라엘이 있잖아요. 바벨론에 포로 잡혀서 박살나기 이전까지 이스라엘. 그게 육적과 영적 요소가 같이 있는 것처럼 그 당시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과거로 끝난 게 아니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마찬가지에요.
여기 고린도후서11장에 보면 4절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자, 교회되기 3가지 상품이 나왔지요. 하나는 뭐냐, 예수 이야기하면 교회된다. 또 하나는 성령 이야기하면 교회된다. 또 하나는 복음 이야기하면 교회된다. 할 때 그 복음이 그 복음이 아니고 그 성령이 그 성령이 아니고, 그 예수님이 그 예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너희들은 뭐냐 13절에,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 사탄이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악마가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그럼 악마를 어떻게 분간하느냐. 자기를 모독할 줄을 몰라요. 자기를. 왜, 아까 너무 성화 많이 되어가지고.
자기 모독하면 추락된다는 거예요. 추락하라는 거예요. 주께서. 매일같이 우리보고 추락하라는 겁니다. 세리나 강도나 거지가 되라는 거예요. 우리보고. 신앙의 연수 채우지 말고. 그거 채운다고 아무 소용없고.
그래서 이게 필요해서 날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이 사람의 말이 아니고 주의 말씀으로 들려지도록 말씀이 우리한테 작용하도록 거짓과 참이 구별되도록 정말 자기를 모독하는 것도 지옥 갈만한 존재라는 것을 날마다 확인해주는 그것. 그것만이 십자가가 살아있는 주의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의 원칙에는 한결같고 변함이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어떤 일이라도 결과적으로 우리 힘과 능으로 하지 않았음을 오직 주께서 하셨고 성령께서의 자기 작품인 것을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기쁘게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