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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7강-암 8장 1-3절(과일광주리)210303-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아모스

27강-암 8장 1-3절(과일광주리)2103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8장 1-3절까지입니다.

아모스 8:1-3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하리니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처처에 내어버리리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이 결국은 시체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끝, 2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이라고 되어 있거든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기 뒤에 끝이라는 것이 붙어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 끝이 그냥 생존에 불리하다, 자연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끝이 의도적으로 끝을 내신다는 것이 2절 끝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다시는 저를 용서치 아니한다.” 이스라엘의 끝은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끝, 우연한 끝이 아니고, 그러니까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이야. 우리 끝내자.” 하고 맺는 끝, 그러한 식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세상에 어느 누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한,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 자신이 우리가 끝을 보기 위해서, 우리가 끝장나기 위해서, 심지어 더 노골적으로 말해서 용서되지 못할 자라는 것을 규정받기 위해서 우리가 이 땅에 인간으로 살았다는 것을, 어느 누가 그런 안목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끝을 내리고 용서치 아니하겠다는 것은 그 이스라엘 내부에 하나님이 도저히 용서하지 못할, 끝까지 용서 못할 어떤 요인, 요소가 이스라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끝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 그 요인, 그것이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밝혀지고 그 외에는 밝혀지지 않는 겁니다. 다른 민족으로서는 그게 밝혀지지 않아요. 오직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그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8장 1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스라엘을 뭐로 표현하느냐? ‘여름실과 한 광주리’ 여름실과 한 광주리, 여름실과 달랑 한 개가 아니고 한 광주리, 한광주리니까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집단체제라는 말입니다.

집단적이다. 개인적인 것이 용납이 안 되고 집단적인 운명을 함께 겪어야 되고 맞이해야 될 그 대상이 바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계시를 보이는데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여름 실과 한 광주리를 보이시며 가라사대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가로되 여름 실과 한 광주리니이다.”

여름실과 한 광주리에서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되었다고 보면 돼요. ‘여름실과’ 하고 그리고 ‘한 광주리.’ 지금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살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살고 있으면서 거기서 나오는 여름실과라 하는 것은 약속의 땅에 조성된 땅과 기후와 모든 조건이 실과를 맺힐 수밖에 없는, 여름철 제때에 따는 실과를 얻을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이 바로 약속의 땅이요 이스라엘이 사는, 거주하는 땅입니다.

그러면 여름실과라 하는 것은 곧 이스라엘을 두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희들이 이 땅에서 과일 따먹고 살 수 있도록 한 그런 여름실과 같은 존재, 너희들에게 내가 자양분을 제공한 그것이 바로 약속의 땅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이 약속의 땅에서 나온 실과가 이스라엘이라면 거기서 모든 실과가 무르익게 하는 맛있는 실과가 되게 하는 모든 요소는 오로지 그 약속의 땅의 조건에서만 개입된 거지요. 제공된 겁니다. 공급된 겁니다.

그래서 실과 한광주리라고 하는 것, 여름실과의 범주를 한 광주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지요. 따로 따로 놀 수가 없다 그 말이지요. 너라는 과일과 나라는 과일은 차이난다.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어요. 한 광주리에 담아버리니까. 그러면 이스라엘은 광주리인데 어떤 광주리인가? 하나로 다루어져야 할 하나의 광주리 안에 담겨 있는 거지요.

그런데 뭐가 담기느냐? 하나님이 제공한 자양분에서 익은 과실로서 한 광주리에 담겼기 때문에 여름실과와 한 광주리는 잘 결합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거지요. 그래서 이 여름실과 한 광주리는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6장 4절에 보면 제사장이 나오는데,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통하는 국가 이스라엘, 그것은 기정사실이지요. 제사장은 그 이스라엘 중에서도 통로가 되는, 중심점이 되는, 구심점이 되는, 하나님과 통하는 그러한 직능 그러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제사장입니다.

신명기 26장 4절에 보면,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취하여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 앞에 놓을 것이며……” 약속의 땅에서 나오는 과일을 광주리에 담아서 누구한테 드리느냐? 제단에 가서 하나님 만나는 장소에 가서 그걸 하나님께 바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 맞닿을 수 있는 유일한 지점, 제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과일을 무르익게 했고, 이스라엘은 “이것은 하나님의 솜씨요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뜻에서 무르익은 과일을 광주리에 담아서 제사장이 자기가 대표로, 단독으로 나서서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에 광주리를 들이밀지요.

여기 2절에 봐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신명기 16장 2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당시 제사장에게 나아가서 인계하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개인으로 각자 농사를 짓더라도 집결하는 곳은 어디냐? 제사장이에요. 제사장이 대표로 해서 그들의 소산물, 생산물, 농산물을 “이것은 하나님의 솜씨입니다. 하나님 덕분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신 결과입니다. 그 결과물을 가져왔습니다.” 하고 드리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신명기에서는 그렇게 약속해놓고 오늘 아모스에 들어와서는 그 광주리에서 뭐가 나타나느냐 하면, 끝이, 이스라엘의 끝이 광주리를 통해서 계시된다는 겁니다. “아모스야, 뭐가 보이느냐?” “과일광주리가 보입니다.” “그것은 끝장내기 위한 과일이야. 이스라엘은 왜 멸망해야 되느냐를 보여주는 과일이야.”

그 과일이 끝을 뜻한다면 그 끝은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그 이유가 뭐냐? 나는 너희를 용서하지 않고자 하기 때문에 결코 저를 용서하지 않는다. 내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런 증거로서 내가 너에게 과일 광주리를 계시로 보게 했다는 겁니다.

정리해서 간추려보면, 이스라엘은 용서받지 못할 자의 대표가 되어버려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용서하지 않는다. 반드시 용서하지 않는다. 그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줄곧 보여주셨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안에 용서받지 못할 요인이 있다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러한 약속, 언약을 버리고 언약이 없는 다른 신을 그들은 찾아갔던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특징과 전혀 이스라엘 같지 않은 이방민족, 이스라엘일 수가 없는 이방민족과의 차이성을 이스라엘이 무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다른 신의 차이점을 완전히 무시한 거지요. 신은 절대자로 다 같은 신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한테는 만남의 장소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약속의 땅이니까 약속이 있었고요. 언약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언약을 무시하고 다른 신을 섬겼다는 말은, 그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뭘 뜻하느냐 하면, 언약적인 안목으로 생각하지 않고 언약이 빠진 사고방식 가지고 너는 세상 이방신을 섬겼고 이방민족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해왔다. 따라서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언약 안에는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근거가 들어 있다는 뜻이거든요. 이스라엘과 이방민족과의 차이점을 우리가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용서하는 근거가 무엇인가가 나타나게 될 거에요.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을 흉내 내서 그들의 신을 섬겼기 때문에 이방민족과 이스라엘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면 아,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끝장내면서 ‘용서하지 않으리라’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은, 용서의 근거가 이스라엘 안에 전에 있었다는 이야기거든요.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걸 버렸을 때는 용서가 안 되었으니까요. 그러면 이방민족의 특징은 뭐냐? 그것은 바로 광주리를 모르는 거예요. 광주리라 하는 것은 집단체제, 전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보는 겁니다. 개개인이 있더라도 무시하고 그 단체를 하나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이방민족들은 하나님이 맺어준 광주리의 의미가 상실되어 버리고 나위주로, 개인위주 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 개인위주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언약이 굳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이. 나로 하여금 개인의 모든 의사를 인정치 않고 한 광주리에 담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는 그 약속은 내 본성과 너무나 차이난다는 겁니다.

나에 대해서 내 속에 어떤 요소가 있느냐 하면, 끝까지 나를 변호하고 변명하고 나를 방어하고 지키고자 하는 그러한 비언약적인, 언약이 없는 그런 요소가 우리 개개인마다 다 들어 있어요. 그 개개인에 들어 있는 그러한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 날에 그 본색이 유감없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14-1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마지막 진노, 하나님의 심판 날에 각 계층이 있고 자기 일이 있는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자기 직업을 가지고, 종이나 장군이나 왕족이나 각자 가지고 있는 그 직업을 가지고 도피하기 바빠요. 각자 살기 바빠요. 개별위주입니다. 자기위주에요. 끝이 이르렀을 때 자기본색이 유감없이 다 드러난 겁니다.

제발 어린양의 진노와 하나님의 그 심판 앞에서 나를 지켜 달라. 나를 지켜 달라. 이게 언약적이지 않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비언약적이라는 겁니다. 근원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가 지킨다는 식으로 살아가는 그러한 속성, 본성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거예요. 그 본성이 하나님 보시기에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요인이 되는 겁니다.

인간들은 광주리에 안 담길 요량으로, 안담기고 싶어서 계속해서 어떻게 하면 독자적으로 살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이제 20세 되었다고 아빠 엄마하고 살다가 자기는 독립한다고 하고, 남매간에도 각자 돈 좀 번다고 찬역이 오빠는 오빠대로 집 나가고 여동생은 여동생대로 또 나가고. 악동뮤지션 이야기입니다.

전부 다 각자 떨어져 나만의 공간을 원하는 거예요. 왜?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지키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나만의 공간을 지킨다면 인간의 평소의 모든 행동은 뭐냐 하면, 무작정 같은 인간들 붙들고 싸우고 이기고 경쟁하고, 이러한 요소, 요인이 하늘로부터 절대로 용서되지 못할 대상으로서 그 면면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자아의 무한돌려막기’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제 강남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인간은 자기가 살아 있다고 여기고 괜찮게, 살아 있다고 여기는 사람을 자꾸 모델로 삼아서 돌려막기를 해요. 나 저 사람처럼 되어야겠다. 저 사람처럼 되고 나면 또, 나 저 사람처럼 되겠다. 꼭 살아 있는 사람들을 라이벌로 여겨서 저 사람처럼, 또 저 사람처럼, 계속해서 자기의 이상형과 모델을 돌려막기 하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나 보다 더 최종적인 가치는 없다, 라는 이러한 본성, 본능이 모든 인간들 각자 속에 다 스며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다른 민족을 통해서 알려주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그걸 다 밝혀주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민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는 이야기는 그 당시에 다른 민족한테는 해당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이 자기 하나님한테 들어야 될 소리에요. 다시는 내가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언약적으로 볼 때 어떤 인간도 용서받을 만한 인간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용서받을만한 인간, 용서받을 만한 자격이 되는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끝까지 밀어붙이이겠다는 거예요. 용서받을 근거가 사라졌으면 용서 못 받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 세계에 이것이 인간의 끝, 그 인간의 끝을 다른 민족은 몰라도 이스라엘은 드디어 인간의 끝, 인간의 위상과 위치와 그 존재의 끝은 결국 하나님 앞에 한마디 듣고 끝나는 겁니다. “나는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 너희에게 자비는 없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로 지칭되는 여름 과실 광주리에 주어지는, 또는 그들이 부여받은 사명입니다. 임무이기도 하지요. 아, 인간은 처음부터 끝을, 심판, 하나님의 저주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기능을 이스라엘이 대표로 보여주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에게 배제되고 용서받지 못할 자라면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인간의 배제되더라도 언약은 살아 있잖아요. 언약이 추구하는 것은 항상 이것입니다. 원래대로 가자. 언약의 원래대로 가자.

인간에게 주어질 자비는 없습니다. 용서도 없어요. 왜냐하면 용서받지 못할 자는 변동이 없어야 되니까 용서받지 못할 자가 용서받는 그런 경우는 없어야 돼요. 그러면 언약의 일관성이 깨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일관성은 깨집니다.

사람들은 생각하지요. ‘끝, 이스라엘의 끝인데 설마 끝이 끝이겠냐? 뒤에 뭐가 있겠지.’라고 하는데요. 하나님 앞에는 그러한 인간들의 기대마저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특징은 끝을 계속 끝까지 끌고 가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계속 끌고 가는 거예요.

한번 화내고 자식들 애먹이면 집에 들어오지 마라, 하지요. 아빠는 위엄세운다고 “나는 네 꼴 못 본다. 너는 내 자식 아니다.”라고 이야기해봤자 두 시간도 안 되어서 벌써 엄마하고 통화하고 있어요. “돈 떨어졌지? 내가 갈까 잡채 해 가지고 갈게. 걱정하지 마. 아빠 성질 알지? 저래도 이틀 뒤에는 다 풀린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있잖아. 그냥 엄포야 엄포. 너 인간 만든다고 한번 엄포 놓은 것이지 실제로 너를 버릴 리가 없어.”

이것은 인간 자기들끼리, 용서받지 못할 그런 본성들끼리의 인간들이 지어낸 것이고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끝, 그 다음은 없습니다. 끝을 계속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끝을 유지시키고 지속시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언약이 먼저 있고 이스라엘이 있었거든요. 그러면 언약이 있다는 말은 언약 안에 뭐가 있다는 말이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이 거기에 잠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잠재되어 있는 그 이스라엘마저 날라 갈 것인가? 그것은 아니에요. 기존에 있던 구약에 있던 이스라엘의 끝을 보고 용서하지 않음으로서 여기서 이미 어떤 인간도 끝 너머에 올 수 없고 어떤 인간도 용서의 대상은 없다는 것을 확고히 하고 분명히 하시는 그 상황, 그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이스라엘이 등장하게 됩니다.

아까 본 신명기 26장 2절 다시 해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그 광주리를 바치라는 거예요.

그러면 광주리라는 계시의 원천이 있기 마련이고 그 과일광주리가 나오게 된 그 원래의 자리가 있을 겁니다. 그 원래의 자리에 광주리 계시가 잠복되어 있어요. 이미 거기에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 광주리 계시가 바깥에 등장하게 되면 이것은 심판, 저주의 극한을 보이게 되는 겁니다.

언약은 유지되어야 되니까. 언약은 중간에 좌절되고 끊어지고 완성을 못 보는 그런 경우는 없거든요. 내 백성 이스라엘을 만들겠다. 제사장 나라를 만들겠다. 제사장이 대표니까 제사장 나라를 만들겠다. 나의 친백성을 만들겠다는 그 약속은 언약 안에 그대로 살아 있게 되는 겁니다.

살아 있으려면 여기서 값을 치르면 되는 거지요. 자기 백성을 용서치 않는 그 값, 하나님의 언약 안에는, 율법 안에는 지키는 자에게는 복이 있지만 지키지 못하는 자는 저주가 주어진다는 그 확고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결심, 그 결심에 준해서 그 심판의 결심이 온전하게 계속 살아 있고 그 심판이 유지되는 그것을 값으로 받아내는 그것을 그대로 품고 있는 구원자가 나타난다면, 그 언약의 완성자가 나타난다면 이스라엘은 그 안에서 새롭게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 나타난 그분을 신명기 26장 2절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하는 겁니다. 여호와의 이름. 여호와의 이름이 있는 그 장소에서 그 값을, 곧 온전히 다 심판이 치러지게 되면 그것은 율법의 완성이 되고, 율법의 완성이 된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받을 수 있는 값은 다 받은 게 돼요.

율법이 실패로 끝나지 않고 율법이 계속 성사될 수 있는 바탕은, 율법 또는 언약이 성사될 수 있는 바탕은 그 값이 그대로 고스란히 유지되는 그 조건하에 언약은 어떤 축복도 행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됩니다. 왜? 값이 살아있으니까.

일단 그 값을 치른 분이 누구냐,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인간은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변명하고 변호하면서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 값을 치를 선행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 자기가 자기를 측정하면 안 되거든요.

이건 광주리가 아니고 개별자기 때문에 개별자는 자기를 측량하거나 측정하거나 판단하거나 평가할 권한에서 이미 끝났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미 끝났다는 말은, 더 이상 우리 자신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 돼요.

심판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복음이 되어버렸지요? 내 자신의 운명이나 팔자, 내가 얼마나 착하냐 악하냐에 대해서 내가 신경 쓸 대상이 내가 아니에요. 나는 나에 대해서 신경 쓸 대상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왜? 나의 측정과 판단은 이미 끝났어요.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는다고 끝나버렸다 그 말이지요.

이미 바둑은 끝났는데 바둑돌 주물럭주물럭 하고, 화투판 끝났는데 너 무슨 패 가졌는지 보자, 너는 4땡인가, 나는 7땡이었는데 너한테 기죽지 않는다. 이미 게임은 끝났어요. 게임 끝났는데 게임 끝난 지점에 가 가지고 아, 내가 너보다 더 낫다든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해가면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할 이유가 없어요.

그게 자기변호에요. 그 자기 변호하는 요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 이유가 된 겁니다. 네가 너에게 관심을 갖고 신경을 쓰고 그 자체가 네가 저주받을 만한 이유가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주의 이름이 하시는 것은 뭐냐? 신약에서는 간단하게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분이 죄인을 대신했다.

이렇게 ‘대신’이라는 간단한 말로 이야기했다고요. 신약에서는 우리를 대신한다, 대체한다, 이렇게 했지만 구약에서 이사야 53장 7, 8절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예수님께서 값을 치르는 겁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지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말은, 먼저 값을 치러줘야 돼요.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과일광주리, 이스라엘, 그 언약, ‘너는 과일광주리’라 한 그 언약을 대체할 새로운 어떤 개인이 등장해야 되는 거예요. 개인이 언약을 받아들였다는 말은 더 이상 내가 나의 개인에 대해서, 자아에 대해서 그 다음부터는 신경 쓰거나 미래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할 수 있는 권한은 이미 우리한테서 박탈당한 겁니다.

왜? 우리는 이미 규정받았기 때문에. “절대로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는다.” 규정받았기 때문에. 너의 임무는 네 속에 영원히 저주할 그런 괴물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스라엘을 기피하고 자기 자신을 이 우주 끝날 때까지 영원토록 지키고자 하는 그 괴물이 들어 있어요. 악마지요. 악마의 요소가 우리 자아를 절대화 시켜서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내가 나를 변호하고 내가 나를 변명하는 그런 요소가 모든 개인에게 다 들어 있었던 겁니다. 그게 이방민족이에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광주리 과일 광주리에요. 본인의 자리에서 종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누구하고 경쟁하거나 비교할 그럴 필요조차 없어요. 이방민족이나 그런 짓하지 이스라엘은 누구하고 경쟁 비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언약이 담기면 끝나는 거예요.

주님이 주신 과일이 무르익어서 광주리가 되면 그걸로 종결되는 거예요. 단독이라는 것, 개인이라 하는 것은 성립이 안 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개인의 운명, 개인의 팔자 같은 것은 아예 이스라엘은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 어린양의 피 발랐거든요. 양의 피를 발랐다고요. 물론 양마다 몸무게나 키가 다 다르겠지만 피는 동일한 양의 피에요. 동일한 양의 피.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제자들 각자의 빵이 있고 각자의 포도주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고 “내가 주는 포도주를 먹고 내가 떼어주는 떡을 먹어라.” 이래서 자아, 개인, 절대적 자아는, 악마의 사주를 받은 절대적 자아는 하늘나라에서 이미 그 요소를 보고 나는 그 악마가 있는 한 절대로 너를 용서할 수 없다고 단정 지었어요.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는 요소가 우리 안에 있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할 수가 없는 겁니다. 언약적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이 인간세계에서는 용서받을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기도하실 때 겟세마네 기도에서 중요한 기도를 했어요.

자기 자아를 아버지께 언약에 일임하는 거예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내 뜻에 가위표 쳐주세요.” 백성들의 죄 하나님의 택한 자 구원받게 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자기가 가져가요. 그들 각자 자기 죄를 아는 것으로 그들은 용서받지 못합니다. 용서의 대상이 안돼요.

그들의 죄를 예수님이 대신 가져와요. 가져와 놓고 “이러한 나의 뜻을 주께서 받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약속대로, 창세전 언약대로 그냥 제 몸을 던지겠습니다.” 그것으로서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구원될 대상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확실해졌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흘 만에 누굴 부활시켰느냐? 그 하나님의 이름, 주의 이름 되시는 예수님을 사랑으로, 자비로 건져버려요. 그러면 그 말은 뭐냐 하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 안, 그 약속 안에서는 더 이상 죄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가 되어버려요. 심판이 없는 새로운 공간 영역이 생긴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단 하나의 자아,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심판이 없어요. 심판이 없는 채로 거기서 이스라엘이 성령을 통해서 생산되고 만들어지는 겁니다. 마치 옛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와서 그들이 노동하고 애쓰지 않더라도 약속의 땅에 주는 그 환경으로 인하여 과일이 자양분을 얻고 영양분을 얻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 것처럼 그것이 주의 이름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 가운데 주의 이름, 과실을 거두어서 광주리에 담아서 제사장이 그걸 대표로 누구한테 바치느냐? 이게 다 주님의 이름의 덕분입니다, 하고 바치는 것처럼 그 주의 이름이 마지막 때 언약을 완결 짓기 위해서, 모든 것을 종결짓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의 이름으로 오게 되면 우리는 약속의 땅에 사는 것처럼 주 안에서 살게 돼요.

주 안에서 사는 새로운 사람으로 주님의 혜택을 입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한 분의 효과기 때문에,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한분의 효과기 때문에 나의 자아가 거기에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주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았고 또 주의 이름을 그들이 거부했을 때 용서받지 못한 것처럼 오늘날 성도는 예수님 덕분에 내가 구원받았다,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성도의 존재 이유는, 나의 구원이라든지 나는 심판이 없다고 헤헤거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일을 우리를 통해서 증거하고 보여주는 그 기능이 바로 오늘날 교회 오늘날 성도의 기능입니다.

주 안에서 연합체가 된 거예요. 연합체라는 말은, 사적인 내가 따로 변명하거나 설명할 필요조차 없는 존재가 된 거예요. 뭘 죄를 지어야 변명을 하지요. 율법이 없는데 무슨 죄를 짓습니까? 율법이 해당되는 대상이 아닌데 무슨 죄를 지어요? 옛날 자아는요, 율법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뭘 해도 죄가 되었어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고 했지요. 더 이상 죄를 지적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뭐냐? 단독적으로 내가 나를 측정할 사적인 개인은 그리스도 안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집단생활 하는 겁니다.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이름으로 한 가정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엄청난 행운이고 축복인지요. 왜? 서로가 서로를 사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적이 없다, 가 아니고 지적이 있지요. 뭐냐 하면, 그게 예수그리스도의 용서하신 모습이냐, 이런 식으로 지적하는 거지요. “그게 용서받은 자의 태도냐? 왜 용서받아놓고 개인적으로 구차한 변명이나 쓸데없는 변호를 하고자 하느냐? 그게 전혀 필요치 않는 존재가 되었음을 왜 네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게 되는 거예요.

내가 나의 운명이나 미래에 대해서 방어할 이유가 없어요. 이 몸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기 때문에. 이미 주님이 값을 치렀거든요. 끝으로 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주님께서 도살할 양처럼 되어서 값을 치렀던 그 값, 그 값을 통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용서의 대상은 없다는 것, 내가 이런 식으로 한다고 해서 용서받을 수 있는 어떤 행위를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애초부터 인간은 용서받지 못할 인간으로 확실히 굳어졌고요. 용서받은 분은 오직 한 분 우리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 예수 안에서 있는 자는 예수님의 값을 부여받아서 그리스도 이름으로 집단체제 안에서는 그 값 때문에 오직 사랑과 자비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너의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히브리서 10장 16-18절 말씀에 나오지요.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로는 저희와 세울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

내가 다시 기억 지 않는다. 내가 너를 기억 지 않을 테니까 제발 너도 너의 행함에 대해서 네가 기억하지 말아라. 자, 끝으로 바로 오늘 아모스 8장 1절의 이 말씀을 이제는 일단 예수님께서 자기 말씀으로 가져가요. 예수님 자신이 언약의 이스라엘이니까요. 이 말씀을 자기가 가져갑니다. 그리고 그 끝, 용서치 아니한다는 것, 용서치 아니하니 저주받는 거지요, 그 저주받는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라 하는 것은 어떤 잔소리 한다고 그게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을 제치고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와서 아버지로부터 저주 받아야만 이 말씀이 성취가 돼요. 이 아모스 말씀이 성취가 되고, 근거가 되고, 분명한 증거가 마련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의한 이러한 모든 사정이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를 위한 말씀으로 예수님이 제공하는 거예요. “심판받는 너는 더 이상 없다. 너는 죽고 네 안에 이미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그런 근거가 되는 내가 너희 속에 산다.”

그래서 아까 기도한 것처럼 우리가 다시 한 번 그 점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내가 어떻다, 가 아니라 주님을 보일 수 있는 방안을 항상 잊지 말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모든 것을 통해서 주님의 용서가 나오고, 주님의 값이 나오고, 사랑이 나올 수 있는 그쪽으로 여러분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단밖에 없었던 이스라엘인데 어느 날 그들이 사적으로 개인적인 부귀영달을 노렸습니다. 그 대가가 용서치 아니함으로 주어졌음을 깨달을 때 또 다시 우리가 나를 지키고, 나를 변명하고, 나 잘되기를 원했을 때 그것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요소인 것을 이제는 회고적으로 뒤돌아보면서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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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0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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