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5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예 아니요
20210205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예 아니요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 줬잖아요. 그 율법이 yes, no를 유도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질문을 먼저 던질 때 딱 둘로 나눠져요. 네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지 마라. 그러한 지시는 딱 두 가지 경우만 용납이 돼요. 따먹었다, 안 따먹었다. 그렇게 되지요.
따먹는 날에는 어떻게 된다? 정녕 죽으리라. 죽는다는 것은 소멸이죠. 왜냐하면 아담이 흙이 되니까, 없어지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선 인간을 구원하지 않아요. 나를 구원하지 않는다고요. 왜? 없애버리고 새로 만들지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인간은 어설픈 유사 삼차원, 이게 참 가관인데 지금 표면이죠. 점은 일차원이고 표면은 이차원이고 그 다음에 입체는 뭡니까? 삼차원이죠.
인간은 표면을 통해서 삼차원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게 요물이라서 영물이라서 영적 존재라서 그래요. 마귀 들려서 그래요. 쉽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왔습니까? 하늘에서 왔지요. 하늘이란 삼차원 세계에서 이 땅에 왔으니까 이차원으로 왔지요. 다시 어디로 올라갔지요? 들리시니, 하늘로 들렸지요. 삼차원이죠.
유일하게 삼차원에서 이차원 거쳐서 삼차원으로 가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은 미끄럼틀 타고 올라간다. 내려왔다 율법 타고 올라갔잖아요. 다 이루었다 했으니까. 그럼 율법 자체가 삼차원에서 꽂아주는 거란 말이죠. 삼차원 세계, 하나님 세계에서 이 세상을 향하여 질문을 던진 거예요.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은 먹지 말라 할 때에 아담은 이차원적으로 생각해서 따먹어도 된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배후가 누가 있었습니까? 영물, 악마가 있었지요. 하나님께서는 yes냐 no냐를 묻는 식으로, 그러니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식으로 율법을 이 지상에 이차원 세계에 보내버렸어요. 그럼 그게 십계명이죠. 십계명은 뭡니까? 전부 다 yes 아니면 no잖아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어기면 너는 삼사대 저주받는다. 지키면 천 대까지 복을 받는다. 모든 계명이 yes 아니면 no로 규결된다고요. 그런데 이 세상이 그냥 조용한 표면이 아니에요. 이 세상은 표면, 이차원적인 인간들이 마귀의 술책에 의해서 여기서 뭐냐? 나름대로 삼차원 세계를 상상합니다. 이게 종교지요. 이게 하나님 믿기입니다. 하나님 믿자. 구약에선 이걸 뭐라고 하지요? 우상이라 하지요. 성경에선 우상이라 하지만 그들에겐 참 된 신이죠.
우리나라도 보세요. 우리나라에서 전래된 노래 중에 제일 유명한 게 아리랑이에요. ‘아리+랑’이에요. ‘랑’은 ‘함께’란 뜻이에요. 너랑 나랑 하지요. 달래랑 먹고 나오지요. ‘아리’가 뭐냐? 이게 ‘엘’에서 나온, 중동부터 중앙아시아 거쳐서 전부 다 ‘엘’에서 ‘알’, ‘알’이 이게 하나님이에요. 핵심부분, 영어로 하면 egg, 계란이란 뜻이지요.
알과 더불어서 태양이 알이라면 밑에 있는 광채 있지요. 이 광채가 금빛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랄알타이 민족이라 하는데 우리 민족 원조가 샤머니즘 민족이에요. 신을 믿는 민족인데 그 신을 믿는다는 것이 가장 국가를 정립하는데 기조가 되는 겁니다. 요새 같으면 헌법이 돼요.
인간의 사고, 인간의 정신을 하나로 보편적으로 모을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보우하사, 하나님이에요. 로마서 1장에 나오잖아요. 21절에 저희가 하나님을 알되, 하잖아요. 신 의식은 모든 인간이 다 갖고 있어요. 타고난 거예요. 왜냐하면 이차원에서 뭘 꿈꾸는 거예요? 삼차원, 나름대로의 신의 세계를 계속해서 꿈꾸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생각하는 삼차원 신의 세계는 이차원을 다치게 할까요, 보호할까요? 보호하지요. 우리나라 애국가에 나오잖아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아닙니까. 하나님이 깽판 놓아, 안 하지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두가 하나로 대동단결한 거예요. 저쪽에 중앙아시아, 중국부터 해서 몽골 저쪽 카자흐스탄, 이슬람 알라신도 마찬가지에요. 알에서 나온 거예요. 엘에서 나온다고요. 바알신도 엘에서 나온 거예요.
각 민족마다 알, 엘이란 신에 의해서 마음이 하나가 된 겁니다. 국가는 신이 있어야 성립이 됩니다. 신이 없으면 국가가 성립이 안 돼요. 아무리 과학시대라도 모든 국가는 다 신이 있어요. 태국이란 불교국가도 마찬가지고. 태국 불교에서는 미륵보살이 신이에요. 석가모니 말고 따로 있어요. 석가모니가 진화되고 발전된 게 미륵보살이에요. 미륵보살이 더 세요. 부처보다. 미륵은 신이 인간으로 성불한 거예요. 신이 육신이 된 게 미륵보살이라니까. 중국에서 얼음판에 넘어지면, 아이고 하나님 하는데.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비전, 꿈꾸는 것, 계시 받는 것, 그래야 종교가 되니까요. 모든 종교, 계시는, 이번에 사무엘상 할 때 박수무당과 점쟁이는 죽이라 하잖아요. 왜 죽이냐 하면 이 신은 우리를 안 때려요. 우리는 지켜준다고, 보호해준다고요. 여러분들이 교회, 기독교를 생각해보세요.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개혁주의신학이 철학인 이유가 있어요. 왜 철학이냐 하면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에게 비전을 줘요. 비전이란 말은 신의 계시란 뜻이에요. 신의 계시에 대해서 우리가 no하겠어요, yes하겠어요? yes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yes한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나를 박살내라고 yes하는 게 아니고 현재 있는 나를 천국에 가도록 고이고이 지켜달라고 yes가 되는 거예요.
아까 그 상표와 내용물과 우리 인간은 다르다고 이야기했지요. 내용물은 이스라엘도 아닌데 상표는 이스라엘로 돼있어요. 왜 인간은 자꾸 이렇게 자기를 조작합니까? 그것은 자꾸 자기 뒤를 돌아봐서 아직도 자기로 인하여 숨 쉴만한 공간을 확보하고 싶은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죽어서 관 속에 있고 거기다 흙으로 덮었다고 보세요. 아직 나는 숨이 안 끊어졌는데 나쁜 사람들이 산채로 관 속에 집어넣고 못질해서 못 나오도록 흙까지 덮어버렸다. 여러분 딱 인상이 느낌이 뭡니까? 야 답답하겠다, 하지요. 마스크 쓰는 것보다 심하게 답답하지요.
그런 영화 있어요. 이란 여자 사무라이 나오는 그런 영화가 있어요. 손가락으로 관을 뚫고 아주 무술이 뛰어나기 때문에 탈출에 성공하는데. 왜 그게 답답하지요? 내가 답답증을 느낀다는 것은 내가 살아생전에 내 죽음을 목격한다는 뜻이거든요. 느껴진다는 거예요.
왜 내가 죽는 것이 답답하냐? 내가 관 속에 있고 다른 식구들은 우는 척하고, 요샌 울지도 않지요. 아이 잘 갔다, 이러고 있을 때 그게 답답하냐 하면 평소에 살아 있을 때 내가 살아야 될 이유, 내가 사는 목적, 그래도 힘들지만 내가 살아가는 그 근거는 나만의 숨 쉴 공간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나만의 공간. 따라서 그것을 계속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아직도 지킬 게 약간은 있겠지,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하나님이 밀어오면 작전상 후퇴하지요. 후퇴하지만 점점 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래도 그 나름대로의 소박하고 작지만 그 공간이 나를 위한 공간이잖아요. 나를 위한 공간이라면 그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사람은 희망을 갖고 살 용기를 냅니다. 왜? 그것이 뭐냐 하면 표면은 뭘 희망한다? 삼차원을 희망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입체가 될 거야, 삼차원이 될 거야란 희망. 나는 답답하면 못 살아. 나는 내가 있어야 살아.
이걸 생각하게 되면, “나 예수 믿어요. 목사님, 나 예수님 사랑해요.” 그 말을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끝까지 고집부리면서 극히 작으나마 나만의 공간을 따로 갖고 싶어 하는 거예요. 심지어 50평짜리 아파트 살다가 쫄딱 망해서 원룸에 있더라도 그 원룸이 어딘데, 얼마나 좋은데. 비록 좁디좁지만 문 열고 들어가면 그 세상 어떤 세상이에요? 그 세상은 누구의 세상이죠? 나만의 세상, 천국이 따로 없어요. 나만의 세상이에요.
땅₁입니다. 땅₂가 아니에요. 땅₁이에요. 자기가 왕이 되는 거예요. 그 안에서만 주변은 다 자기가 정 주었던 거예요. 저 소파, 저 책상, 저 책들, 다 아끼고 아낀 것들이에요. 만약에 결혼한 남편이 애먹인다. 나가! 쫓아내버리죠. 정 줬지만 지금은 정 안 주니 나가라. 왜? 나의 yes에 침입하기 때문에. 내 공간은 나의 yes만 남아야 돼요. 강아지는 들이고 남편은 내보내고. 그 안에서는 아무도 내가 나를 때리지 않기 때문에 그 누구한테도 내가 당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 그 안엔 yes가 있지요.
그런데 레위기에 보면 그 안에 누가 찾아옵니까? 그것은 바로 언약이 없다는 거예요. 그거는 네가 있지, 네가 최종적으로 자리 잡지 언약이 자리 잡은 곳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게 레위기입니다. 언약이 자리 잡았단 말은, 그 중심 공간을 펑퍼짐은 네 엉덩이로 깔고 앉았다는 거예요.
이게 원룸이라 합시다. 원룸 중앙에 뭐가 있어야 되느냐 하면 레위기 언약에 의하면 비워있어야 되고 여기는 불이 타야 돼요. 무슨 불, 누굴 태우는데? 정결한 짐승이 타는 제단 불이 있어야 돼요. 뜨거워라. 뜨거워야 돼요. 그러면 나는 뭐냐? 여기에 하나의 관람객이죠. 엮여진 불에 태워 저주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언약의 구조입니다. 국가 이스라엘 나라의 구조에요.
아까 스물다섯 먹은 남자와 스물세 살 먹은 여자 그 둘, 그 제목을 뭐라 했습니까? 둘만의 세계지요. 그 두 젊은이만 나무랄 수 없는 세상이에요. 이 세상 전체가. 그렇게 안 살아가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요. 차이도 안 나지요. 관계없이. 다들 그렇게 살아요. 나만의 세계, 그 나만에 대한 집착과 말이 좋아 집착이지 아까 말대로 하면 그냥 미친 거예요. 나한테 미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올 때 하나님이 아주 날카로운 연필심 끝이라 봅시다. 율법이 들어오잖아요. 아까 우리 배웠습니다. 율법의 끝은 뭐가 있다 했습니까? yes와 no가 있지요. yes와 no라는 답변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을 율법으로 주신 거예요. 그러면 yes가 뭐냐 하면 바로 천국이고 no는 지옥이지요. 그러면 율법, 다시 구세주, 삼차원에서 이차원으로 오신 그 구원자는 구원을 하시는 목적뿐만 아니고 뭐도 있습니까? yes와 no로 나누는 겁니다.
“좀 맞자.” 할 때 때리시옵소서. yes가 되겠지요. “좀 맞자.” “내가 미쳤다고 레위기 26장 듣습니까? 나 당신 같은 하나님과 볼 일 없습니다. 나는 나를 지켜주는 하나님을 내가 선택해서 믿겠어요.” 왜? 그 신은 나에게 yes가 되기 때문에 나가겠지요. 그게 바로 no에요. 그게 지옥이에요. 때릴 때 “때리옵소서.” 해야지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다윗이 시편 22편 1절에서 하나님에 맞는 백성 맞지요. 하나님의 백성 정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왕 맞지요. 분명히 왕입니다. 사무엘이 기름 부었으니까 왕인데 그 왕의 결정적인 고백이 뭐냐 하면 시편 22편,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버림받지요.
그 버림받음 요소가 없으면 이스라엘 왕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버림받는다는 것이 내 가운데 내 죄 때문에 버림받는 어린양의 희생이 제단에서 지금 태워지잖아요. 그것이 원룸이든 투룸이든 간에 내 중앙은 내가 차지하면 안 돼요. 뭐가 차지해야 돼요? 하나님의 언약이 차지해야 된다고요. 아버지가 이삭을 잡는 그게 차지해야 돼요.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을 잡는 그것이 사랑이에요. 안 잡으면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미움이에요. 이스마엘은 미움 받은 거예요. 하나님이 야곱을 죽여서 뭐로 만듭니까? 이스라엘 만들지요. 그게 사랑이라고요. 그냥 야곱을 야곱으로 보내면 사랑이 아니고 그거는 배제된 거예요. 지옥에서 배제된 것, 버림받은 겁니다. 영원히 버림받은 거예요.
지난 서울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하나님의 성도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중보자의 속성과 하나가 될 때 성도거든요. 그럼 성도는 어떻게 되느냐? 문둥병자에요. 저주받은 문둥병자와 중보자의 조합, 그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무슨 다른 종교적인 삼차원적인 비전해서 이런 것 상상하지 마세요. 내가 여기 있으면 나는 천국 간다는 그런 이상한 착각하지 마세요.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만드는 그게 홀로그램이라 해서 그걸 허상이라 합니다. 인간은 눈만 뜨면 허상이죠. 그 허상을 위해서 주변에 있는 원자재를 세상 속에서 자기 눈에 띠는 속에서 그걸 찾고 있습니다.
어떤 대학 4학년이 군에 갔다 왔는데 대학공부가 취미도 안 맞고 공부도 잘 안 되고 그런데 장래는 걱정되잖아요. 보통 군 제대하고 난 뒤에 철이 드는 이유가 그 다음부터 친구들과 놀 생각 안 하고 지 살 궁리하는 거예요. 그걸 세상에선 철이 들었다고 하는데, “아빠, 나 대학교 치우고 유튜브해서 돈 벌래.” 유튜브 구독자가 얼마나 돼야 한 달에 이백만 원 나오겠어요?
어떤 사람이 유튜브로 10억 벌었다, 20억 벌었다 하니까 철없는 대학생들이 통박 굴리는 거예요. 그냥 카메라 하나 빌려서 중고로 사서 앉아서 말 몇 마디하면 구독자 수만 명 되면 나는 가만있어도 한 달 수백만 원 들어온다. 이것 벌어서 아버지 효도할게. “그럼 네가 콘셉트를 뭐로 잡을 건데?” “난 노래할거야. 노래해서 구독자 많이 모아서 한 달에 수백만 원 벌어서 아버지께 효도하겠습니다.” 이게 얼마나 철없는 생각입니까? 그게 누구냐 하면 박완규 아들이에요.
그걸 보세요. 아까 말한 이게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이 안 망하는 쪽으로 주변에 있는 원자재 있잖아요. 원자재 알지요. 뭘 만들 때 재료로 쓰는 그 원자재를 유튜브 보고 인터넷하면서 그걸 찾아내는 거예요. 그걸 발굴해내는 거예요. 내가 이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할 이유가 없는데. 왜냐하면 다 그렇게 살잖아요. 부모가 20대 자식에게 밥상머리에서 다그치는 게 뭡니까? 남자애한테는, “너 뭐하고 밥 먹고 살래. 공부 다 시켜줬다. 언제까지 이렇게 놀래.” 이것 묻고, 딸한테는, “너 언제 시집갈래?” 나이 서른 넘었는데 언제 시집갈래. 요샌 딸한테도 시집가는 건 모르겠고 언제 돈 벌래. 딸도 마찬가지로 언제 돈 벌거냐고 묻지요.
내가 이상한 이야기하는 거예요? 지금 땅₂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땅₁이야기하는 거예요. 땅₁은 표면적이에요. 표면적이기 때문에 뱀으로 생각하면 돼요. 뱀이다, 뱀이다. 뱀은 엎드려서 본다고요. 보면 지평선이 보인다고요. 지평선, 눈앞에 보이는 것 있잖아요. 어떤 사람 유튜브 해서 10억 벌은 것, 음식 10인분 시켜서 그걸 홀라당 다 먹고 한 달 수입 몇 억씩 버는 것 있잖아요. 먹방 있잖아요. 밥만 먹고도 돈 버는 거예요. 한 자리에 10인분씩 먹고. 그게 어떻게 자기가 죽는 거예요. 몰라. 밥 먹다 배 터져서 죽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거기에 빈자리가 있어요, 없어요, 중앙에? 없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아버지가 아들 잡는 아브라함, 이삭 언약 있습니까? 없지요. 이 소리하는 내가 미친 사람 같아. 내가 성경에 없는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저 보고 왜 그렇게 유별나냐고 욕하는 것 같아. 제가 말하는 것은 지금 교인들이 무식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고 육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무식함이 아니라 육적이에요. 성경을 몰라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육적이에요. 육, 육신적이에요. 너무나도.
천국 같은 소리, 누가 천국 넣어줘요. 고린도전서 봅시다. 사도 바울이 천국 가는 사람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2장 14절에 보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 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여기 보면 육적의 일은, 13절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여기서 사람의 지혜와 무엇과 대결이 됩니까? 사람의 지혜와 무엇과 극한 대조를 이뤄요? 성령의 지혜지요. 그러면 사도 바울 말에 사람이 알아들을 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알아들을 말이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인간 자체가 개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라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에게 철저히 가려져 있습니다. 막혀 있어요. 오직 택한 백성에게만 잠시 열어주고 도로 닫아버려요. 여기 13절에,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이 얼마나 사도 바울이 철저하게 육적인 것과 영적인 사람을 이렇게 구분합니까. 철저해요. 교인수 많고 적고 그딴 것 신경 쓰지도 않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은 자기가 숨 쉴 공간만 있으면 제대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숨 쉴 공간 있고 언젠가는 옛날처럼 넓은 아파트 산다고 지금 희망과 비전을 꿈꾸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꿈만 꿉니까? 아니지요.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은 나한테 yes가 되고 긍정이 되는 것이 오도록 자꾸 세상을 향하여 질문을 만들어간다 이 말이죠. “저 것 내 가져도 좋습니까? 그 직장 내가 들어가면 어떻겠어요?”
어떤 분이 생활이 너무 극한까지 몰려서 호텔 주방일 하려고 갔는데 뽑는 사람이 보더니만, “아줌마는 안 됩니다.” “왜요?” “아줌마, 이것하면 몸살 나서 안 됩니다. 쓰러집니다. 그럼 다른 사람 뽑아야 되니 귀찮아요.” 그러니까 허드렛일을 하겠다는 그것도 마음대로 안 돼. 나한테는 그걸 기대해서 yes 될 줄 알았는데 그것도 no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지혜의 말씀, 성경말씀을 어떻게 아느냐? 바닥을 체험, 여기 바닥체험이 나와요. 바닥체험은 지난 주 낮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는데 깡패가 긴 파이프 들고 거친 콘크리트 바닥을 끌고 지나가면 소리가 어떻습니까? 참 짜증나는 소리 나오지요. 주의 말씀은 우리의 바닥을 끌고 지나가는 쇠파이프 소리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항상 환상으로 솜사탕 같은 솜이불 두껍게 깔아서 내 바닥이 안 들키길 원하고 있어요. 아까 제가 예를 들었잖아요. 손님 오니까 세워놓고, “아이고, 내 사는 꼬라지가 더러워서 좀 가만있어 봐요. 청소 좀 하고.” 청소하고 오겠다는 거예요. 항상 자기 자신을 어느 편에 서냐? 천사 편에 세워두는 거예요. 그게 아까 브랜드와 내용물이 다른 점이에요. 자꾸 자기 쪽을 천사 쪽에 세워놔요.
그러나 주님의 말씀의 끝, 그것이 우리를 끌고 지나가게 되면 우리는 온 천지에 긁히지요. 이렇게 우리 바닥을 할퀴는 이유는 뭐냐 하면 중심자리를 비워 놔라 이 말이에요. 중앙자리를. 그게 어렵습니까? 나의 마음의 한 자리를 제일 정중앙이에요. 내 정중앙을 주님의 약속이 들어오도록 비워놔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럼 나는 뭡니까? 내가 중앙에 있으면 나는 누굴 믿어요? 중앙 지키기 위해서 egg 중앙 알을 지키기 위해서 살았는데 내가 나가버리면 이 중앙에 누가 찾아온단 말입니까? 죽어도 사신 분이 있어요. 그럼 나는 아까 요한복음 11장 말씀처럼 누굴 믿어요? 살고자 하는 나를 내가 안 믿어요. 애써서 살아야 한다는 이것이 거짓말인 것을 이제 알았어요. 그럼 누굴 믿어요? 죽어도 산다는 걸 믿는단 말이죠. 그럼 우린 뭡니까?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게 돼요. 이게 바닥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공식 하나 나오지요. 율법은 누구에게 주었느냐? 율법은 율법에게 가지요. 그럼 율법 주신 자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은 율법을 누구한테 주었느냐? 하나님의 아들에게 줬지요. 이게 정답이에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겨냥해서 한 거예요. 그게 무슨 땅? 안식의 땅. 그게 땅₂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이미 태어나면서 죄인인지라 다시 말해서 악마의 속성으로 사는지라 항상 추구하는 게 뭐냐 하면 악마가 악마한테 하는 그 행세를 우리가 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제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 시작합니다. 옛날부터 줄곧 들었던 이야기, 마태복음 4장 이야기 이렇게 정리될 수 있어요. 세 가지였지요. 악마가 예수님 시험할 때 세 가지했지요. 순서상 있더라도 하여튼 세 가지에요. 첫째는 뭐냐 하면 생존하라. ‘생존하라’의 반대말은 죽으리라.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했지요. 그런데 악마는 그 반대로 나가잖아요. 네가 떡을 먹고 생존하라, 살아라. 이 말입니다.
창세기 2장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네가 알아선 안 된다 했지요. 두 번째 시험이 뭐냐? 악마가 말씀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네가 알아라. 네가 지식을 알게 되면 지식이 곧 뭐로 바뀐다? 지식이 곧 현실이다. 아는 게 힘이라 이 말입니다. 지식이 곧 현실이다. 이거에요. 내가 아는 그것이 나의 현실 되기를 우리는 소망하는 거예요.
내가 아는 것 아까 이야기했지요. 대학 4학년이 제대해서 그 다음부터 아름아름 뭘 압니까? 자기의 지평선 안에서 세상에서 자기가 밥 먹고 살 독립할 원재료들을 얻지요. 결국 내린 결론은 뭡니까? 집에서 밖에 안 나가도 돼. 방 하나에 커튼 쳐놓고 조명시설, 마이크 하나 해놓고 노래 부르면 구독자 한 천만 명 넘으면 월 백 만 원씩 나오는. 지 노래 부르면 구독자 나옵니까?
내가 아는 것이 곧 무엇이 되고 싶어요? 나는 아니까 아는 것을 누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이게 현실이기를 원하지요. 젊은 사람뿐만 아니고 인간은 늙어죽을 때까지 그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애가 이번에 중간고사 백 점 맞았으니까 세상은 우리 애가 천재이기를 알아줬으면, 내가 애를 좋아하는 것처럼 남들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게 현실이고 싶지요.
두 번째 시험이 뭐냐? 내가 아는 그것이 곧 현실이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 시험에서는 사탄이 시편 91편으로 뛰어내려라. 그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뛰어내리면 천사가 와서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뭐로 변한다? 말씀이 곧 현실화되기를 현실화되는 그것을 네가 실시하라고 악마가 예수님한테 시험하고 있는 거예요.
세 번째는 뭐냐 하면 내게 절하라. 왜? 나는 신이기 때문에. 신이면 모든 것을 소유한 신, 이게 세 번째에요. 그러니까 레위기고 뭐 이런 것 다 접어두고 나는 생존하고 싶다. 나는 아는 것이 현실이고 싶다. 결국 나는 내가 신이다. 내가 신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나만 믿을 거야. 이 세 가지 현상이 울산이고 서울이고 대구고 간에 미국이고 간에 이게 바로 현실이 아니고 뭡니까? 이게 현실이잖아요.
그러니까 굳이 성경을 안 봐도 성령 받은 사람은 현실을 보게 되면 거기서 뭐가 보입니까? 예수님의 원수들이 지배하는 세계가 뚜렷하게 보이지요. 그리고 이런 요소가 육신이 있는 우리 속에 스펀지처럼 들어왔잖아요. 이게 바닥입니다. 이 바닥을 평소에는 정답인 줄 알아요. 남들 다 그렇게 하니까 자기도 이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없다고 여겼지요.
그러나 연필심 같이 날카로운 하나님의 말씀 또는 말씀의 완성인 십자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찌이찍 거리는 깡패들이 거친 콘크리트를 끌고 지나가는 쇠파이프의 거친 소리가 우리 마음 밭을 긁고 지나가지요. 아 내가 맞아야 되는구나. 내가 진즉에 죽어야 되는구나. 내가 중심 되면 안 되는구나. 나는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하나님은 나를 때리기 위해서 찾아오신다는 거예요.
그게 무엇에 협조입니까? 언약을 언약대로 이루는 일에 우리가 참여된 모습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일기장을 쓰기 위해서 우리를 이용한 거예요. 나의 일기장은 존재하지 않아요. 앞으로도 없어요. 전부 다 주님의 일기장이에요. 말썽꾸러기를 내가 데려왔다는 주님의 자기 공로와 자기 성과가 기록된 것이 천국입니다. 말썽꾸러기 천하의 죄인을 내 몸을 바쳐서라도 내 피와 살을 쏟아서 기어이 그들을 나 있는 곳에 데려와서 오직 나에게만 찬양하고 구원자가 하신 구원의 공로만 높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준 거예요.
여러분 이것 시뮬레이션입니까, 홀로그램이에요, 허상입니까?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게 허구에요? 지어낸 겁니까? 이스라엘 멸망을 보세요. 이게 지어낸 이야기인지. 유월절에 애굽의 장자들 죽은 것 보세요. 이게 지어낸 이야기인지. 십자가 죽었다 부활한 게 지어낸 이야기인지. 이게 진짜 현실이거든요.
현실을 가리기 위해서 사람들은 뭘 만드느냐? 교회를 만든 거예요. 이걸 감추기 위해서. 기독교를 만들고 교회를 만든 거예요. 말씀이 와야 되는데 말씀은 안 오고 자기가 교회 찾아와요. 그리고 예배드리고 오늘 교회 갔다 왔다. 하나님 출근도장 찍었습니다. 이번 주 벌 내리기만 해봐라. 분명히 교회 갔다 왔습니다. 복음 들었습니다. 가버렸어요. 뭐에요, 그게. 도대체 뭐하고 사는지, 하루 종일 무슨 생각하고 사는지를 모르겠어.
이야기하면, “아이고 성경에 무식해서.” 성경에 무식한 게 아니고 관심이 없어요. 너무 육적이에요, 육적. 너무 육적이라 미안해서 영적인 것을 흉내 내는 거예요. 복음을 이야기하고 세상 교회 썩은 걸 이야기하고 우리 교회는 안 그렇다고 자랑질하고. 너는? 이 세상은요 기대하지 마세요. no입니다. yes 없어요. no 자체가 주님 앞에 yes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망하고 죽는 것도 주님 앞에는 yes가 되는 거예요. 합력하여 뭘 이룬다 합니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겁니다. 주님의 계획엔 차질이 없어요. 왜냐? 이미 원칙을 정해졌어요. 죽어라. 살려줄게. 가자, 이삭아. 나와 같이 너 잡으러 간다. 바위 위에 엎어지고 아무 소리 말고 내 칼아 맞아죽어라. 제발 좀 죽어줘. 펄떡이는 광어처럼 나대지 말고.
네 한 가운데 중앙에 앉아서 제단을 다 가리고 십자가 다 가리고 펑퍼짐한 궁둥이로 깔아 앉아서 이 가정은 나만의 가정이다. 남 오면 아이고 부끄러워라. 신앙생활 잘 못해요. 이런 식으로 구차한 변명이나 늘어놓지 말고. 중앙자리 다 차지해놓고 세상에 나가선 누가누가 잘난 존재인지 그것이나 비교하면서 그래도 내 인생 그나마도 선방했잖아. 맨 날 선방했데, 그 정도로. 몇 달 전까지 교회 안 다녔는데 교회까지 나오니까 얼마나 내가 착해. 이런 식으로요. 자꾸 천사 편에 서는데 그게 상표가 달라요. 자기 간접광고하지 마세요. 유사품에 주의해야 됩니다.
이스라엘은 얻어맞는 아픔이 담겨있는 곳이 이스라엘이에요. 이렇게 하나님이 때리더라. 그 때리는 것만 살아 숨 쉬어야 돼요. 맨 날 얻어맞아요. 매일같이. 나중엔 나이 들어서 화장도 안 받아. 왜? 얻어맞아요. 우리는 하루 살면 하루 얻어맞는 거예요. 또 하루 살면 또 얻어맞은 거예요. 갈수록 피부도 안 좋아지고. 이게 얻어맞아서 그런 거예요.
끝으로 민수기 봅시다. 민수기 24장 17절,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첫째 시간 공부했기 때문에 왜 이스라엘이 이 민족들을 치는지 알겠지요. 땅₂가 땅₁을 치는 거예요. 아무 의미 없는 그냥 살기만 하는 땅, 그 땅은 저주받은 땅이에요. 그걸 이스라엘이 나올 때까지는 모압이나 세일 이런 사람들 몰랐지요. 에돔도. 이스라엘이 와서 거침없이 쳐버리니까 우리가 이 땅에 살 자격이 아니구나. 그걸 알아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 다음에 17절에서 제가 이야기한 것은, 한 별이 애굽에서 나오며, 그 다음에 뭡니까? “한 홀” 왕이죠. 자 이스라엘 중앙에 비워 놔라 했지요. 이 말은 우리 가운데를 비워놔야 돼요. 이스라엘 한 복판에 뭐가 있습니까? 제단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 마음 한 복판에 삼차원 세계에서 오신 분이 이차원적으로 여기 있어야 돼요. 여기서 나오는 외치는 말씀은 매일같이 똑같아요. 죽으면 살리라, 죽으면 살리라.
그럼 이쪽에 있는 사람, 바깥에 중앙 밖에 있는 사람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죽어도 살겠고. 나는 죽을 거야. 주님이 죽이시는 그 죽음으로 나는 살겠고. 이게 끊어지면 안 되지요. 그러니까 마지막 율법의 완성이 누구냐 하면 왕이 오십니다. 왕이 오셔서 이 중앙부분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셨잖아요.
그러면 진짜 성도는 자기 중앙에 자기 집안의 중앙, 자기 교회의 중앙, 자기 마음의 중앙이든 이 안에 뭐가 보여야 됩니까, 이 안에 무슨 일이 계속 벌어지고 있어요? 그것도 이틀에 한 번이 아니고 매일같이 뭡니까? 십자가가 계속 일어나야, 계속 보여야 되지요. 이게 바로 성령의 사람이에요. 이게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성령의 사람입니다.
그러면 내가 오늘 저녁에 맛있는 자장면을 먹었다. 그 자장면을 왜 먹었습니까? 죽으라고 먹은 거예요. 너는 먹을 가치도 없는데 자장면을 줌으로써, “주여, 살 가치도 없는 인간에게 또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감사와 늘 고마움이 나오게 하는 거예요. 내가 젓가락 들고 내가 먹은 게 아니기 때문에.
젓가락 들고 먹으려고 하면 만약에 손목 부러지면 못 들어요. 우리가 멀쩡한 게 아니고 주께서 멀쩡하게 하신 거예요. 뭘 위해서? 언약을 위해서. 뭘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뭐가 아니게? 나의 yes가 아니게. 누구의 yes? 주님이 하는 모든 일에 yes가 되기 위해서 나로 하여금 no. 너 빠지고 주님의 yes에 네가 합류된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yes에 합류된 거예요.
제 머리 많이 빠졌지요. 주님의 yes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있지요. 네가 염려한다고 키가 한 자나 더 자랄 수 있겠느냐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참새를 누가 키운다? 주님이 키운다. 이 말은 참새가 참새 나름대로 자기긍정, 자기 yes하지 말라는 거예요. 반드시 yes의 출처가 따로 있어야 돼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복음으로 하신 일, 십자가로 다 이루신 일을 위해서 우리가 지금 울산바닥에 이렇게 아직도 숨 쉬고 있지요. 그럼 우리 안에 십자가가 숨 쉬고 있는 거지요. 들숨날숨 안에서 십자가가 숨 쉬고 있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이것이 상표에 합당한 우리의 내용물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왜 우리가 이렇게 세상 사람과 차이 나지 않는 식으로 살아가는 이유를 이젠 알았습니다. 바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죽어 마땅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 말씀 주셨사오니 이제는 세상 말보다 주의 복음과 말씀을 더 좋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