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5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예 아니요
20210205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예 아니요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26장 40절부터 보겠습니다. “그들이 자기 죄와 그 열조의 죄와 및 그들이 나를 거슬린 허물을 자복하고 또 자기들이 나를 대항하였으므로 나도 그들을 대항하여 그 대적의 땅으로 끌어갔음을 깨닫고 그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이 낮아져서 그 죄악의 형벌을 순히 받으면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하나님께서 이 많은 땅 중에서 다른 땅과 약속의 땅을 하나님 쪽에서 구분을 해요.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살고 있잖아요. 이 동그라미가 전체 땅이라면 이 땅에서 특수한 땅을 정해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땅을 땅₁이라 하고 하나님이 생각하는 땅을 땅₂라고 생각합시다. 이 땅이나 저 땅이나 사람들한테는 이게 구분이 지어지지 않아요. 아무 땅이나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게 되면, 땅₂을 하나님께서 뭐로 보느냐 하면 안식해야 될 땅으로 봅니다. 특수한 땅을 따로 구획지어 놨어요. 안식해야 될 땅.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사람들은 땅₁과 땅₂를 구분 못해요. 그냥 땅이에요. 내가 사는 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땅에서 살면서 땅₁이고 땅₂고 없는 거예요. 경계선도 없는 거예요. 그냥 부동산이죠.
자 이렇게 땅₁과 땅₂를 구분하지 않을 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땅에 철저하게 순종했다고 볼 수 있어요. 땅에서 사는데 거기에 아주 몰입했다고 보는 겁니다. 사람이 땅에서 땅을 좋아하고 땅에 대해서 미련 두는 것은 본인 살기 위해서 그런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땅에 철저하게 순응해버리면 땅₁과 땅₂가 경계선이 없어요. 차이가 없어요. 그래서 땅에 철저하게 순응해버리면 무엇이 날아가 버리느냐 하면 하나님이 안식해야 될 땅의 취지가 날아가 버립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아들이 둘 있었잖아요. 이스마엘과 그리고 이삭이죠. 만약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스마엘이나 이삭을 똑같이 자기 아들로 인정한다면, 차이가 없다고 여긴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그 아브라함 집안에서는 있을 수가 없어요. 약속이란 게. 이스마엘과 이삭 아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나야 돼요.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잡으려고 했습니까? 이스마엘을 모리아 산에 가서 칼 들고 죽이려고 했습니까? 그건 아니죠. 이삭을 죽이려고 한 그것도 중요하지만 이스마엘에게는 제물을 안 바치려고 했다는 것도 대단히 중요해요. 그렇게 해줘야 둘 사이에 차이가 난다 이 말이죠.
자, 여기 그냥 땅이 있다면 우리가 여기에 서 있다고 봅시다. 우리가 과연 땅₁과 땅₂를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우리한테 있느냐 말이죠. 우리한테는 그게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내가 사는 게 우선이고 내가 사는 게 급하기 때문에 아무 땅이라도 내 땅이라면 다 좋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을 때 저 두 자식의 차이를 우리가 굳이 생각할 필요가 있느냐? 없어요. 그저 나 죽고 난 뒤에 아들 하나보다 둘이 나으니까 차이를 못 느낀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땅₁과 땅₂를 구분 짓는 것은 우리에게 문제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아무리 해도 이미 우리 자체가 문제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선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한테 들키지 않습니다. 우리 손에 잡히지 않아요. 왜?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요. 죄인이 간파하는 하나님은 그거는 제대로 된 하나님이 아닙니다. 반대로 우리의 죄를 지적해주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죠.
오늘 본문 내용이 그거에요. 하나님께서 세상 이방민족이 사는 땅 말고 안식하는 땅을 구축해놓고 그 땅을 안식하는 방법에 대해서 레위기 26장에 펼쳐졌어요. 그게 뭐냐 하면 너희들 좀 맞자, 이거에요. 때리겠다는 겁니다. 그 때리는 방법은 염병일 수도 있고, 25절에. 전염병이죠. 24절에 보면,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 배나 더 칠지라” 그 다음에 이방민족이 찾아와서 너희를 아주 작살을 내고, 그 다음에 33절에,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그 다음에 18절부터 보게 되면, 너희가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농사가 안 되고 땅이 그 소산물을 내지 않고, 21절에 보면, 재앙을 받게 될 것이고, 22절에 보면,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 자녀를 움키고 너희 육축을 멸하며 너희 수효를 감소케 할지라” 더구나 아주 비참한 것은 29절에 보면,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사랑하는 자식, 이게 배부를 때나 내 자식이지 본인 부모가 먹을 게 없으니까 자기가 낳은 자식을 그냥 사람 고기로 먹는 거예요. 또 낳으면 되는 거니까. 이 정도로 비참하게 때린다는 거예요.
이게 왜 그러냐 하면 땅₂를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레위기에 나오는 이렇게 하나님께서 치신다 할 때에 아마 하나님에 대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대목을 보면서 하는 말이, 바보같이 왜 얻어맞고 그 땅에 사냐. 이민 가지. 너 바보 아니야. 하나님이 널 친다고 한다면 네 쪽에서 먼저 선방 날려서 네가 하나님을 버리면 될 것 아니냔 말이죠.
하나님이 너한테 문제 있다고 너를 지적하게 되면 너를 지적하는 그 하나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피해버리면 되잖아요. 다른 교회에. 다른 교회에 등록하면 되잖아요. 아예 하나님 없는 곳으로 가든지. 교회 안 나오든지. 바보 아니야. 왜 얻어맞고 있느냐 말이죠. 안 그러면 종교를 불교로 바꾸든지. 불교에는 레위기 없잖아요.
불교든 다른 종교는 이게 없어요. 땅₁과 땅₂를 나누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와 대자연은 누굴 위해서? 나를 때리는 게 아니에요. 나를 위해서 내가 이용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내가 복 받을 수 있다는 그러한 환경으로 이 세상이 있는 걸로 하나님 있고 하나님도 나를 위해서 있고 대자연도 나를 위해서 있고 뭐든지 나를 때리기는커녕 나를 더 못 줘서 안달이 난 그런 좋은 하나님 믿는 거예요.
뭐 내 자식을 고기로 잡아먹고 내가 전염병 걸리고 내 민족이 다 흩어지고 내 곡식이 안 되고 이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하나님을 굳이 뭐가 좋다고 거기 붙어있습니까? 다른 교회 가면 되지. 교회 많잖아요. 교회 많다고요. 내가 원하는 소리 안 나오면 그 모임 안 오면 되지요. 내가 뭐 답답할 일 있어요? 언제부터 우리가 하나님 뜻 알기에 미쳤습니까? 우리는 나 자신에 미쳐있어요. 나 자신이 어떻게 더 풍요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거기에, 나는 나 자신에 미쳐있는 겁니다. 나는 나 자신에 너무 미쳐있기 때문에 나 빼놓고 하나님이든 타인이든 누구한테 미칠 여력이 없어요.
예를 들면 옛날 소학교(->초등학교->초등학교) 운동회 할 때 그 풍경을, 제가 운동회 얼마나 많이 봤겠습니까. 어린 마음에도 운동회 하이라이트는 역시 점심시간. 그 점심시간을 보게 되면 어린 마음에도 그랬었어요. 뭐 달리기 하고 막 뛰라고 나무랐던 엄마가, 그때는 할머니까지 와요. 아빠는 바빠서 못 오고. 점심시간 되면 자기애가 못 찾을까 싶어서 나중에 점심시간 되거든 이 느티나무 여기 오너라, 하고 약속을 단단히 하잖아요.
불러서 김밥에 그때 칠성사이다 없었고 말표 사이다 꺼내고 삶은 달걀, 최고의 만찬 아닙니까. 그렇게 해놨을 때 옆에 엄마도 아빠도 할머니도 안 오고 지 혼자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옛날에. 그러면 자기 애 운동회 때 밥 먹는 거기에 미쳐있어요. 밥 먹고 난 뒤에 배불러서 엄마 못 먹겠어, 하면 혹시 밥 못 먹는 아이 있으면 좀 주려고 배려하지만, 지금 점심시간 딱 됐을 때는 누구 먼저 챙깁니까? 자기애한테만 다 줘요. 저쪽에 김밥 싸왔나 보고 자기는 김밥이 아니고 초밥 있잖아요. 유부초밥, 저쪽보다 맛있는 것.
그러니까 인간은 뭐냐 하면 자기 것 챙기는 데는 타고났어요. 지금 내가 내 인생에 미쳐있는데 이 시간에 언제 하나님 뜻 알려고 올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왔긴 왔지만. 누가 오겠어요? 핑계 좋~잖아요, 코로나.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는 이 말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왜? 자기 사는데 급급하기 때문에.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뭐냐? 이삭을 죽이게 해요. 그러니까 이삭은 죽어야 됩니다. 이삭은 죽어야 되는데 옆에 수풀에 숫양이 한 마리 걸려있지요. 준비됐습니다. 이걸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이에요.
내가 죽어야 네가 사는 식으로만 나와 함께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죽지 아니하면 그냥 죽어 있어. 내가 만약에 이 땅에 오지 않았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지 않았으면 그냥 그대로 죽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언약을 줘서 언약의 완성이 안식의 땅인데, 언약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왜 너희는 죽어야 되면 왜 너희는 살아야 되느냐, 그 두 가지를 다 보여주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 25과 26절에 이런 말씀 있어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했거든요.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냥 예수님한테 이 멘트 있잖아요. 이 문장, 이 멘트를 그냥 날리면 되는 줄 아는데 주님께선 그런 뜻이 아니고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할 때 왜 예수를 믿는 것이 죽어도 사는 결과를 낳느냐를 그러한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 주님께서 실질적으로 죽어도 사는 일을 예수님이 이제 보여주시고자 이 땅에 오신 거예요.
내 새끼 챙기고 운동회 때 내 새끼 점심 주고 그리고 나는 나에 미쳐있고 나는 사는데 미쳐있고 이 땅은 내가 살기에 필요한 땅이고 그걸로 끝이고 나만 잘 살면 된다, 라는 그건 네가 믿어야 될 믿음의 내용이 아니라는 거예요. 네가 정작 믿을 것은, 내가 어떻게 하면 삽니까, 하는 것을 믿으면 안 돼요. 어떻게 죽어야 될 내가 죽었는데 왜 삽니까? 이걸 믿어야 된다고요.
그래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할 때 그 죽어도는 내가 죽기 전에 예수님이 먼저 죽은 거예요. 예수님이 죽어도 살았기 때문에 그 죽었다가 사신 분을 내가 나를 믿는 나에게 미쳐있는 나의 믿음의 내용을, 이게 바로 주님이 죽을 이유인 줄 알고 이걸 작살내는 거예요.
레위기 26장은 저주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저주하는 이야기에요. 이 말은 너희가 살고자, 너희들이 안식의 땅을 이루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아 협조 좀 해라. 도망칠 생각 말고. 때리거든 좀 막고. 저주하거든 저주받아라. 나는 네가 네 사는 걸 포기할 때까지 너를 향한 저주를 내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게 레위기 26장 이야기에요.
저주해주시는 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에요.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이 워낙 아니니까. 우리가 믿는 내용이 워낙 아니니까요. 하나님 믿든 예수님 믿든 항상 나는 살아야겠다는 자기 사는 게 우선이고 자기 사는데 미쳐있기 때문에 이런 미치광이 crazy man, 이런 미치광이는 안식의 땅에 어울리지 않아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이중에 성령 안 받은 사람 있으면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내가 저런 소리를 꼭 계속 듣고 앉아있어야 되나 하는 이런 생각한다니까요. 미닫이로 된 문 가볍게 밀고 나가시면 되는 거예요. 내가 교회 온 것은 살기 위해서 왔지 저주받으러 안 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레위기 26장 말씀이 오거든 이걸 덮고 안 들었다 하고 흔들면 돼요. 난 안 들었네, 하고. 집에 가면 자식 있고 손자, 손녀 있고 하니까 걔들 챙기는 게 급선무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살아야 되니까.
어쨌든 간에 살아야 되겠다가 돼버리면 어떤 땅이든 나 살기 위한 땅이 돼버려요. 땅에 철저하게 순응이 돼버리면 땅에 할당된 하나님의 특별한 안식의 효과가 사라져버려요. 땅₁과 땅₂가 구분되지 아니하면. 인간은 땅₂에 못 들어가요. 하나님의 안식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땅₂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의 안식을 위해서 땅₁에 집착하고 거기에 몰입해 있는 인간을 향하여 주님께선 이렇게 레위기 26장을 통해서 철저히 저주해주시는 사랑을 베풀어주는 거예요. 얻어맞으면 언약 성취하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울산 땅에 사는 게 하루하루가 저주입니다. 저주인 줄 믿으셔야 돼요. 내가 이 땅에 사는 것은 이 땅에 죽으라고 사는 거예요. 하지만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안식의 땅의 효과가 녹록치 않게 살아 있게 되지요. 그 사람을 통해서.
자, 땅을 구분했습니다. 땅₁과 땅₂가 있는데 땅₁은 뭐냐? 그냥 사는 땅. 땅은 두 종류가 있는데 첫 번째는 그냥 사는 땅, 두 번째는 얻어맞아가며 사는 땅. 인간의 본성상 인간은 그냥 살고 싶어요. 앞에 뭔가 붙인다면 어떻게 살고 싶으냐? 조용히, 평온하게, 행복하게 그냥 살고 싶어요. 무탈하게 아무 문제없이. 그렇게 살고자 하면 티비 예능프로그램 있잖아요. 지리산 깊은 산골에 혼자 사는 것.
그래서 우리는 얻어맞는, 그냥 때려달라고 약속의 땅에 안식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에요. 때려 달라하는 그것도 일종의 나 살기 위한 수작일 수 있기 때문에 안 돼요. 그러면 우리가 뭘 알아야 하느냐 하면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얻어맞고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자기 하나님이잖아요. 이스라엘 만드신 당사자 자기 하나님한테 외려 된 통으로 얻어터져야 될 그만한 이유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왜 그들이 그냥 사는 땅에 대해서 엉덩이 펑퍼짐 앉아서 나올 수가 없는가? 사람들이 아무리 복음을 전해서 왜 그렇게 복음을 듣기 싫어하고 원치 않는가, 그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인간은 Yes냐, No냐를 유발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살아갑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집에 강아지를 키운다. 강아지를 키우는 이유는 내 집에 강아지가 있는 것이 나한테 no가 아니고 yes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강아지 키우는데 고양이도 하나 키우시죠? No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사람이 아침에 눈을 떠서 세상에 나갈 때 뭘 하느냐 하면, 저건 나한테 yes가 될 것인지 no가 될 것인지 본인이 선별하고 선택하지요.
이 물건 내가 가져도 돼요, 안 돼요? 어떤 복잡한 질문을 해도 마지막은 뭐냐? yes입니까, no입니까, 를 질문을 누가 만들어요? 내가 yes, no라는 답변을 유발하는 식으로 내가 질문을 던지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자기 주변에 있는 것은 전부 다 yes가 되었던 것들만 자기 주변에 포진 돼있는 거예요.
할머니, 손자 좀 맡아 줘. Yes. 그러면 그 다음부터 손자가 내 앞에 있는 거예요. 내가 요새 몸이 아파서 안 되겠다. 그럼 손자는 어떻습니까? 손자는 없지요. 왜? 아들 지가 키워야 되지. 이게 뭐냐 하면 나만의 안식을 누리는 나만의 공간을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내는 거예요. 나만의 안식,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항상 우리는 yes나 no로 끝이 갈라지는 질문을 그 답변이 유도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면서 매일같이 살아갑니다.
오늘 아침에 비가 올 건가, 말 건가? 비가 오면 우산은 yes가 되고, 비가 안 오면 우산은 없는 게 돼요. no가 되지요. 그러면 인간의 세상이란 뭐냐? 내 눈이 보이는 범주 안에서 내가 yes한 것들만 놓여있는 것들이 나의 고유의 나의 영역이 되고 나의 세상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우리 집을 불시에 찾아왔다. 예고도 없이 전화도 없이 찾아왔다. 딩동 누르지요. “누구십니까?” “아이고, 아주머니 접니다.” 어떻습니까? 문 열어줍니까, 어떻게 합니까? “아이고, 좀 기다려보이소. 집안 꼴이 엉망입니다.” 문밖에 손님을 세워두고 안에 들어가 주섬주섬 정리하지요. 만약에 그 사람이 정 나한테 이익이 없으면 우리는 yes라 합니까, no라 합니까? no라고 하지요.
지금 하나님께서 레위기 26장을 들고 우리한테 딩동 하고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문 열어줘야 됩니까, 안 그러면 바깥에 세워둬야 돼요? 내가 너희한테 염병을 보내고, 염병이란 말 좋으네요. 내가 너희로 하여금 완전히 집구석 망하고 너희 자식들 다 죽는다. 네가 네 자식을 삶아먹든지 구워먹든지 할 것이다, 라고 했을 때 세워둬야 됩니까, 내쫓아야 됩니까, 아니면 받아줘야 돼요? 굉장히 당황스러워요.
왜 당황스러우냐 하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yes냐, no냐 하는 그 답변을 누가 먼저 시작해서 이 질문을 유도한 거예요? 내 쪽에서 시작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불시에 들어와 버리면 이건 뭡니까? 주도권이 나한테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한테 없지요. 그냥 밀고 들어온 거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무슨 이야기하려고 왜 쳐들어왔는지 듣고 난 뒤에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의 입장을 받아들일 만한 하나님이 우리 집, 나한테까지 들어올 만한 자기 안에 어떤 구조를 만드느냐 하면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하나님이 우리 집까지 온다는 것은 항상 no에요. 다시 설명해드릴게요.
왜 우리가 no냐 하면, 모든 인간이 yes 쪽은 누가 선호하느냐 하면 내가 yes가 되기를 내 쪽에서 yes란 답변을 유도하는 문제를 낸 거예요. yes냐, no냐 둘 중에 하나를 간편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질문을 던지고 또 세상은 그런 질문이 만들어지는 장이 되기를 우리가 생각하면서 질문을 던져가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여, 우리 집에 저주를 내려주소서.” 이렇게 한다면 거부감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 지금 내가 고생한 내 것, 나의 땅, 나의 안식처 이것 부수면 진짜 교회 안 갈 생각 있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입장에서 갑자기 하나님 찾아오시면 그 다음부터는 예수님이 찾아왔기 때문에 이쪽의 하나님은 no거든요.
왜냐하면 나한테 미쳐있으니까, 나밖에 모르니까, 내 자식밖에 모르니까, 내 몸뚱이밖에 모르니까 예수님은 타인이잖아요. 남이란 말이죠. 그래도 찾아왔으니까 갑자기 no를 yes로 바꾸는데 허겁지겁 난리도 아닌 거예요. 예수로 바꾸기 위해서 우리 집까지 모셔오기 위해서.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우선 청소 좀 하고요. 아이고, 내 사는 게 볼품이 없어서 이 누추한 곳까지 오시겠습니까, 이렇게 너스레떨면서 겸손하지도 않은데 겸손한 척하면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은 뭐냐 하면 평소에 자기 왕국을 따로 챙겼다는 거예요. 자기 바깥은 땅₁이 되고 자기는 땅₂가 되는 거예요. 나만의 안식을 따로 챙긴 겁니다. 그럴 때 주님 오셔서 하는 말이, 기다리세요. 하도 사는 꼴이 어설프고 서글퍼서 우선 대충 치워놓고 오겠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선 치우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너 개판이야.” 그 이야기하러 왔단 말이죠. 개판이면 어떻게 해요? 개판 그대로 노출시켜야지요. 그걸 다 보여줘야지요.
자기 왕국 따로 있으면 이게 충돌된다고요. 충돌되니까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그냥 가만두지 않지요. 아주 박살내는 겁니다. 쉬운 예로 남자는 스물다섯, 여자는 스물세 살인데 둘이 너무너무 열렬하게 사랑을 했어요. 왜 그러냐 하면 둘 다 남자보다 2년 후배가 여자인데 남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고 여자가 중학교 3학년 때인가 그쯤 되는데 그 오빠가 뭐라고 했냐 하면, “너 참 귀엽게 생겼구나.” 그 한 마디에 꽂혔어요. 자기에게 너무 귀엽다는 소릴 듣고 2년 후배 되는 그 여학생이 그 오빠를 너무 좋아해서 그때부터 6년을 사귀었어요. 이 이야기 전혀 어렵지 않지요.
6년을 사귀어서 20대가 되었어요. 그런데 자기가 좋아하는 오빠가 얼마나 착한지 비 오는데 길 가다가 할머니가 비 맞으면 자기는 비 맞고 할머니한테 우산을 줄 정도로 마음이 너무나 착한 오빠란 말이죠. 그래서 결혼을 약속하면서 열렬하게 사랑하면서 그야말로 둘만의 세계에 푹 잠겼어요. 좀 지나서 안정되면 결혼하려고 했는데 그 스물다섯 남자가 아르바이트 하던 동기들한테 맞아 죽어버렸어요.
그때 그 아가씨가 하는 말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뉴스에 이렇게 돼있어요. “둘만의 세계뿐이었는데....” 자, 그 아가씨가 뭐가 문제입니까? 아가씨가 레위기 모른 게 문제입니까. 그건 당연히 모르지요. 요한복음 11장도 당연히 모르고. 지금 뭐가 문제입니까? yes, no에 있어서 오빠 있으면 yes고 오빠 없으면 뭐가 돼요? no가 되는 거예요. 이제는 세상 살 맛이 없게 된 거예요. 그래서 판사님께 편지를 보냈어요. 천벌을 내려달라고. 나와 오빠만의 둘만의 세계, 그걸 아작은 낸 같이 일하던 청년들 네 명 인가에게 엄벌을 내려달라고 판사한테 보낸 편지가 언론사에 공개가 된 겁니다.
지금 우리가 레위기를 접어버리고 성경 덮고 그 이야기만 딱 접해보세요. 그 아가씨가 어떤 문제 있는지 우리가 발견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뭐. 네가 그렇게 사는 것이나 지금 오늘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나 똑같아요. 하등 차이가 없다고요. 그리고 이 당시 저주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오늘날 우리 사는 것에 차이 있습니까? 차이 없어요. 똑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이고 성경이고 안 받아들이는 겁니다. 나만 행복하면 되고 나만 편안하면 돼요. 아무 생각 없어요. 그럴 리는 없지만 행여나 스물세 살 먹은 아가씨가 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던 내가 죽도록 사랑한 오빠를 데려가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언뜻 봤는데 레위기 26장에 나오는 그 말씀,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그 자가 천국 백성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실제로 나에게 일으켰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그 아가씨가 바로 성도지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자기 백성 땅₁에서 땅₂로 데려가기 위해서 자기 백성에 대한 저주를 멈출 생각이 없다고요. 아작을 내든 박살을 내든 너희는 살 가치도 없음을 분명히 해야 인간은 그제야 자기 안식의 땅을 자기 왕국을 포기합니다. 절대로 인간은 포기할 의사가 없어요.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내가 개판이 되던 뭐가 되던 다 나를 위한 거예요.
하나님께 레위기 26장에서 이렇게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은 딱 이겁니다. 상표와 내용물이 차이가 나는 거예요. 상표는 이스라엘인데 내용물은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이걸 상표위조 범이에요. 본인은 백성도 아니면서 하나님이 날 도와주실 거라는 이스라엘이라는 엉뚱한 브랜드를 라벨을 붙이는 거예요. 여기다가. 성도도 아니면서 자기만 위해서 살면서 어딜 감히 ......
레위기 26장에서 말하는 것은 언약의 땅을 이루는데 있어서 네가 협조하라는 것이 레위기 26장의 뜻이었잖아요. 아까 읽어봤지요. 네가 나한테 많이 얻어맞아야 너는 나중에 깨닫고 네가 형벌을 받아봐야 42절,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이게 언약대로 움직인다는 걸 안다고요. 눈이 뜨인다고요.
비로소 내가 죽어도 살겠고, 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기 이전에 예수님이 죽어도 살겠고 라는 실제적인 내용을 본인이 죽었다가 살아남으로써 마련하신 거예요. 너의 안식을 네가 믿으면 안 돼. 나를 믿어야 돼. 뭐?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 그걸 믿어야 된다는 거예요. 방금 이야기한 것을 다른 걸 다시 봅시다.
창세기 3장 14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여기에 뱀이 받은 저주가 뭐냐 하면 배로 다니는 거죠. 배로 기어가는 거예요. 이 땅₁, 그럭저럭 사는 땅, 살기만 하면 되는 땅, 살기 위한 땅, 땅₁입니다.
저주받아야 사는 땅 말고, 그냥 그럭저럭 살면 되는 땅, 흔히 말하는 그냥 땅에서는 표면입니다. 표면이지 결코 부피가 아니에요. 껍질만 있으면 돼요. 기어가면 되니까. 기어가는 그 뱀이 그것도 사는 겁니까? 여기서 악마에 이런 저주를 준 것은, 인간이 이차원 존재에요. 부피가 아니고 표면이에요. 표면만 기어 다니면서 그걸 자기는 땅 투기하고 부동산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인간이 뭐냐? 인간이 뱀입니다. 여러분 아시지요. 유명한 노래. 뱀이다~ 하는 노래 있지요. 인간이 뱀이에요. 지평선밖에 볼 줄 모르니까. 이차원이에요. 삼차원이 아니고 이차원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신약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신약에 와서 땅₂를 하늘로 옮겨버렸어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 이뤘기 때문에.
땅₁에는 구약에서는 표면적이기 때문에 땅₁안에 이방민족 안에 약속의 땅, 땅₂가 따로 아요. 같은 평면에 있으니까. 신약에 오게 되면 골로새서 3장 같은 경우에 보면 우리는 하늘에 있다 했어요. 안식의 땅이 위로 올라가요. 왜냐? 주님께서 위에서부터 내려왔기 때문에 그래요. 로마서 10장에 보면 위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위로 올라감이 아니냐는 말씀이 나오거든요.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땅₂가 뭐가 되냐 하면 yes가 돼요. 땅₂가 yes가 되면 땅₁은 전부 다 뭐가 되겠어요? no가 되지요. ‘아니요’가 되지요. 이 땅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니요’에요. 스물다섯 먹은 남자와 스물셋 먹은 여자와 서로 사랑하다가 남자가 죽었단 말이죠. 그럼 여자가 뭐라고 울부짖겠습니까? 하나님, 우리 사랑하게 해주세요, 이렇게 할 거지요. 그럼 주님께서 yes하겠어요, no하겠어요? no지요.
개인적 사정을 봐줄 수 없는 이유는 너는 죽으라고 살 땅₁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 세상은 죽으라고 사는 땅이에요. 하나님이 주시는 저주가 숨 쉬는 땅이어야 돼요. 내가 숨 쉬는 땅 되면 안 돼요. 주님이 주시는 재앙과 저주와 심판이 살아 움직여서 그게 살아야지 내가 살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20절 봅시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여러 가지 터키 쪽으로 전도하잖아요. 할 때 그게 땅이잖아요. 아까 부피가 아니고 평면, 표면이죠.
신약이니까 표면을 하면서 사도 바울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특수한 공간을 입체적 공간을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예수 안이에요. 이 세상이 되어지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예수 안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지장도 없고 차질이 없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이 복음 전파에 아니요는 없고 전부 다 예가 된다, yes가 되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아는 하나님의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특수한 공간 예수 안이죠, 성령 안이죠, 십자가 안이죠. 안에서 그냥 예가 아니라 얼마든지 예가 된다는 말은 어떠한 경우도 하나님의 계획에 실패하거나 지연되거나 차질이 있는 일은 없다 이 말이죠. 이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이 세상에 어떤 일도 하나님께서는 no라고 규정한 그 규정에 변동이 없다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을 심판하고 멸망하기로 작심한 그 작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보니까 아까 이야기한 것과 비교해봅시다. 인간들은 살 때 평소에 그냥 사는 게 아니고 자기 선택과 자기 결정을 긍정하기 위해서 어떤 질문이 어떤 답변으로 맺어지기를 질문을 던지면서 산다 했어요? 예 아니면 no지요. 나한테 유리하면 yes, 나한테 불리하면 no지요. 그런데 하나님도 똑같이 일하시는 거예요. 하나님도 하나님의 자기 언약, 약속을 이루는데 있어서는 절대로 하나님이 yes만 이뤄져요.
그 yes가 yes 되는 그 원칙이 레위기 26장 우리가 보고 있습니다. 좀 맞자는 거예요. 너 좀 얻어맞아야 되겠다. 네가 많이 얻어터져야 되겠다. 거기 나오지요. 네가 깨닫고 순하게 받으면, 42절에 순순히 받으면 그 다음에 뭡니까? 내가 잘 된다는 거예요? 아니지요. “내가 야곱과 맺은 내 언약과 이삭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며 아브라함과 맺은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 땅을 권고하리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목적은 내 목적이 아니에요. 우리의 목적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편하게 사는 것, 그게 내 목적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체 우리의 목적을 편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목적은 하나님 목적 앞에 완전히 박살나야 돼요. 그걸 다른 이방민족보다 이스라엘 민족한테 뚜렷이 보여주는 겁니다. 네가 내 약속에 의해서 얻어맞으면 너는 고맙다 해야 된다는 거죠.
왜? 얻어맞았다. 날 때부터 죄인인 내가 언약으로 얻어맞았다고 되면 얻어맞았다는 그 내용이 모아져서 이게 안식의 땅이 돼요. 천국 가게 되면, “너 어디서 얻어맞았나?” 여수서 얻어맞았다. 난 울산에서 얻어맞았다. 난 대구서 얻어맞았다. 그 얻어맞았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구나.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내 모습이 아니라 아예 나를 죽이는 식으로 이 천국까지 오게 하셨구나, 하는 그런 고백들만 모아놓은 그게 무슨 땅이다? 그게 언약대로 이루어진 땅이에요. 왜냐? 언약은 죽여 놓고 그 다음에 뭡니까? 살리기 때문에, 그게 언약의 내용이기 때문에. 성도는 그 사실을 믿는 거예요. 나를 죽이는 그분이 나를 살린다는 그걸 믿는 거예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