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행 16"11-15(마음이 열리다)
Re..행 16:11-15(마음이 열리다)
이름 : 이근호(IP:)
마음이 열리다
2005년 1월 5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16:11-15
16:11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6: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6: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 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16:14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16:15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왜 마음이 열리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마음을 장악하는 세력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에베소서 2:1-4에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오는 여러 세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활동은 아무리 인류의 역사가 오래 지속된다 할지라도 상관없이 계속 적용될 수 있다는 겁니다. 도중에 미약해지거나 쇠퇴하거나 감소하는 법이 없이 항상 세상 영이 장악하고 있는 그 장악력을 거뜬히 걷어내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겁니다.
문제는 이러한 큰 사랑의 활동력은 항상 고난받는 사도나 전도자를 통해서, 그리고 성도를 통해서 실시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여는 일은 돈을 미끼로 던져준다고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그 사람의 입맛에 맞는 처신을 한다고해서 수월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기도를 열심히 한다고해서 주어지는 일도 아닙니다. 오로지 보내심을 입은 자가 보내시는 분에 의해 활동을 하게 될 때에 그 활동을 통해서 성사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결정은 인간 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선에서 결정되는 겁니다. 인간은 타인의 마음을 열어 줄 수도 없고 열어볼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신 마음은 그 어떤 경우에서도 다시 닫히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이 열게 하신 마음을 본인이나 혹은 다른 주변 사람에 의해서 상처받아 도로 닫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냥 마음을 열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열린 마음 안에 주님으로서 상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그 마음을 주님이 가져가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사용당하는 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인간 평가는 항상 자기가 실천에 옮기는 그 선에서 정하기 마련입니다. 본인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수준을 가지고 남을 평가하기 마련입니다. 닫혀있는 마음 속에다 아무리 온갖 성경 지식과 신학지식을 쑤셔 넣어도 주께서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상황에서는 뒤죽박죽이 됩니다. 그래서 기껏 나온다는 것이 타인과의 우열논쟁입니다.
마태복음 7:1-4에 보면,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하라 하겠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4:11-12에 봐도,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의식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하면 모두 육적인 행함의 가능성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즉 인간이 어느 수준까지 자기 힘으로 도달될 수 있느냐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평가를 내리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세상 악한 영 앞에서 철저하게 농락 당할 구실 밖에 안됩니다.
왜냐하면 수준을 높이게 되면 그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점점 더 조심해야 될 사항이 증가하기 때문에 나중에 본인도 감당 못한 지경입니다. 진짜로 예수님에게 은혜를 받아서 이 악한 영의 속박에서 벗어난 자라면 이와같은 법적인 기준에 입각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로마서 7:1-4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전에는 율법이라는 남편과 살았지만 주께서 마음 문을 열어주신 이후에는 우리의 마음을 빼아버린 성령께서 우리의 남편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후의 영이시기에 우리들의 죄에 대한 용서와 끝없는 용납과 자비를 제공하시는 남편입니다.
이런 상태가 마음 문이 열린 상태입니다. 우리의 남은 인생을 책임져주시는 성령님이 계시기에 그 분이 인도하는대로 살아라 는 말입니다. 부부의 특징은 함께 산다는 데 있습니다. 떨어져 있거나 딴 몸처럼 움직이는 것이 부부가 아니라 반대로 한 몸처럼 같이 움직이는 것이 부부입니다.
전에는 율법이 인간에게 있어 딱 들어 붙어있어 항상 우리를 죽이는 쪽으로 몰아갔습니다. 우리를 더욱 더 처신 곤란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결국에는 죄가 주는 절망에 빠트리는 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잔소리꾼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분과 붙어삽니다. 물론 결코 혼자 살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새로 혼인하게 된 남편은 다름 아닌 성령이십니다.
이 십자가의 능력의 재현은 십자가 당시에만 한 번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때 근처 공동묘지에 있는 무덤들이 열리면서 어떤 이들은 죽음에서 도로 살아나서 돌아 다녔습니다.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지금도, 그리고 이 후의 오는 여러 세대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납니다. 더 이상 스스로에 갇혀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자립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의 실천력으로 살아가다보니 같은 성도를 무시한 적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관련지어 형제를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