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강-암 6장 3-8절(종말의 이유)210113-이 근호 목사
20강-암 6장 3-8절(종말의 이유)21011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6장 3-8절까지입니다.
아모스 6:3-8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하고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저희가 이제는 사로잡히는 자 중에 앞서 사로잡히리니 기지개 켜는 자의 떠드는 소리가 그치리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주 여호와가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였노라 내가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그 궁궐들을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대적에게 붙인다. 이것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을 접수할 때 이방민족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함께 계신 나라가 이긴다’ 라는 것을 표현할 때 이렇게 했어요. ‘저 이방민족을 너에게 붙이리라’ 이것이 여러 번 나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저 이방민족을 너에게 붙인다.’ 붙인다는 말은 그들이 다가와서 이스라엘 앞에서 와장창 다 깨진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붙인다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들한테는, 이스라엘은 무조건 이기고 적들은 무조건 진다고 할 때 ‘붙인다. 하나님께서 붙이셨다’ 라고 그렇게 개념이 확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게 뒤바뀌었습니다. 너희들이 이방민족에게 붙이게 하게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조건 이방민족에게 깨지게 되어 있어요.
그 때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에게 이길 때도 하나님이 주선한 전쟁 중이었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에게 여지없이 깨지는 것도 이것도 하나님의 전쟁의 한 일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쟁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 전쟁하셔서 자기 일꾼을 다룬다 할 때에 내게 속한 이 민족이나 나라가 무조건 이겨야 그게 하나님의 전쟁 되는 게 아니고 지는 것도, 우리가 속한 이 나라가 패배하고 지는 것도 하나님이 일관되게 벌이시는 전쟁이고 일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전쟁을 일방적으로 자기편으로 끌어당겨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자체가 ‘싸우리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시도 쉬지 않고 늘 전쟁 중이었어요. 그러면 그 전쟁은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전쟁이죠. 이 말은 전쟁을 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뜻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전쟁을 벌이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이스라엘의 적, 곧 하나님의 적이죠, 하나님의 적을 드러내기 위해서 전쟁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적을 알게 되면 우리한테 무슨 유익이 있느냐. 하나님의 적을 알게 되면 우리가 누군지를 알아요.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잘난 체하고 자기가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붙여주시는 적을 통해서, 내가 적인지 아닌지 그것은 중립입니다만 아직까지 보류됩니다만, 어째든 하나님께서 만나게 붙여주는 그들과 함께 전쟁하는 가운데서 내가 정상이고 내가 올바른 사람이라는 그러한 선입관은 여지없이 깨어지는 거예요.
‘이런 경우나 저런 경우나 나는 정상이고 하자 없고 문제없다.’ 라고 혼자 생각할 때는 누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대단한 존재라고 잘난 존재라고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건 아니거든요. 하나님 자신이 하는 일은 하자가 없고 하나님만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 때문에 흔들기에 들어가죠.
우리는 어떤 인간이든 지옥 갈 인간이든 천국 갈 인간이든 모두 다 자기가 잘난 존재고 ‘나는 문제없어’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나는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대외적으로 뭔가 붙여주게 될 때 성도 같으면 ‘아하 우리가 문제 있구나. 이런 점에서 잘못 되었구나’를 깨닫게 되는 겁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기능이 바로 그 기능이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만들 때 이스라엘만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그 뜻의 입장에서 우리 인간은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찾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전쟁을 유발시켰는데 지금은 전쟁 중이 아니라고 하는 안일한 상태에 있을 때에 사람은 어떠한 오류에 빠지는가. 그 오류를 지금 북이스라엘, 아모스가 활동하는 북이스라엘이 그걸 오늘 본문에서 알려줍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흔들기를 하게 되는데 ‘우리 이스라엘은 문제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흔들기 할 리가 없어.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잘 관리하기 때문에 나는 문제없어.’ 라고 했을 때에 그게 하나님 뜻은 아니잖아요. 하나님 뜻을 곡해해가지고 나는 문제없다고 했을 때에 어떤 파탄이 일어나느냐를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사람은 누구하고 이렇게 늘 전쟁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평화로운 것을 원한다 이 말이죠. 전쟁도 뭐 하루 이틀이지 계속 해보면요 나중에 사람이 질리잖아요. 힘들고 휴식을 원하고. 자기 몸 편하기를 원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뜻이 우선되었을 때에 그들은 무엇을 놓치고 무엇을 잃어버리는지를 이스라엘이 우리를 대신해서 미리 보여주는 거예요.
자, 사람이 편하게 살고 싶다. 본능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심판의 날이 있고 파멸의 날이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전 세계를 멸망하는 때가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거기에 대비하게 됩니다. 아 멸망의 때, 절망의 때가 오기 때문에 내가 마음을 추슬러가지고 하나님한테 해드릴 건 해드리고 또 내 건 내가 하고 그렇게 하자. 이렇게 마음 준비를 하게 되겠죠. 그게 잘못이라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을 엄청나게 근원적으로 오해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한테 자꾸 전쟁을 시키는 이유가 있어요. 인간이라 하는 것은 에덴동산 때부터 선악과 따먹을 때부터 이미 사단 났어요. 문제가 된 겁니다. 만약에 식탁 위에 LA갈비를 놔뒀는데 집에 있는 강아지가 안 그래도 한동안 고기 못 먹어서 환장을 했는데 보니까 식탁에 있더란 말이죠. 그러니 눈치 빠른 개가 LA갈비를 딱 물고 집밖으로 내뺍니다. 얻어맞는 것은 나중이고. 일단 먹고 보자. 그 때 주인이 “이 강아지 안 서나!” 하고 따라오죠. 그게 전쟁입니다.
먹지 말아야 될 것을, 먹지 말라고 분명히 했거든요. “쉿쉿. 먹지 마. 알겠지? 먹지 마. 여기 꿇어앉아. 먹지 마. 먹지 마.” 분명히 이야기 했는데 강아지가 LA갈비, 국산 갈비도 아니고 LA갈비, 그 갈비 맛에 2시간 46분 동안 참았는데 2시간 47분 째를 도저히 참지 못해가지고, 마귀한테 꾀어가지고 개가 그걸 물고 “아이고 내빼자” 하고 도망쳤단 말이죠. 그 때 발생되는 게 주인과 개와의 전쟁. 주인은 개를 쫓아갈 이유가 있고 개는 주인 피해서 도망칠 이유가 성립되는, 이유가 있는 전쟁이에요.
하나님은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잃어버린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 쪽에서 참을 수 없죠. 그러나 아까는 하나님 입장이고 인간 입장에서는 개 입장에서는 신나게 얻을 걸 얻었다는 거예요. LA갈비. 얻을 걸 얻었다는 거예요. 이것은 주인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내가 원해서 나는 그걸 개주인 쟁반에서 가져간 거예요. 그걸 가져간 순간, 주인은 주인 너고 나는 내 결정은 내가 한다. 나름대로 내가 나한테 주인이다. 결국 이게 하나님과 인간의 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주인은 개보고 이야기해요. “어이, 내가 분명히 먹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 너한테 LA갈비 먹으라고 꼬시더냐? 아 옆집 세파트구나. 너는 옆집 세파트 정체를 모르지? 마귀였어.” 이렇게 지적하면서 주인은 따라오는 거예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게 된 건 배후에 악마가 있었던 겁니다. 그 악마를 보고 지적하면서 하나님은 추궁하는 겁니다.
먹지 말라는 과실은 따먹히지 않는 상태로 보존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뜻이에요. 따라서 그걸 먹었으면 먹지 말아야 될 것을 먹었으니까 거기에 대한 벌칙, 죽음이라는 것을 반드시 대가로 치러줘야 선악과 심은 취지가 온전하게 완료가 됩니다. 그 완료를 위한 전쟁을 하나님이 안하실 이유가 없어요. 반드시 그걸 해야 하나님이 선언한 그 말이 먹히게 되는 거예요. 이 우주에 먹히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멸망에 대해서 인간이 대비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원수가 갖고 있는 생각인 이유가 여기 3절에 보면 나옵니다. “너희는 흉한 날이 멀다 하여 강포한 자리로 가까워지게 했다.” 아직까지 멸망할 날이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곧 내일 하늘이 주저앉는 건 아니잖아. 그러니까 지금 여유 있을 때 좀 즐기자’ 라고 하는 강포한 마음가짐을 가지는 그 자체가 멀다고 여겼던 그 흉한 날, 멸망의 날을 가까이 하도록 유발시킨 계기가 되는 거예요. 종말은 정해진 게 아니고 움직이는 거라. 종말은 움직이는 거예요.
그 강아지가 LA갈비를 입에 물고 있는 이상은 하나님은 옆집 개를 치는 게 아니고 LA갈비 먹는 자기 집 개를 치는 거예요. 그 LA갈비를 물고 있는 이상은. 인간은 이미 선악을 아는 지식을 물고 있는 이상은 종말이 먼 날이 아니라 바로 내가 종말을 계속해서 재촉하고 독촉하는 원인 제공자가 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종말은 다른 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움직이면 내가 움직이는 내 자신의 모든 행동으로 인하여 내 움직임 그 하나하나가 이미 종말을 유발하는 겁니다. 나를 치세요. 하는 식이 된다 이 말이죠.
LA갈비를 물고 있는 이쪽이 종말이 떨어질, 하나님의 폭격기의 폭탄이 떨어질 바로 이 자리입니다. 라고 요청하고 부르는 셈이 된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꾸 대비하려고 해요. 종말은 언제로 정해져 있고 지금은 아니고 그때쯤 가서 미리 거기서 종말이니까 정신 바짝 차리자고 대비하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종말이 일어난 이유하고 나하고는 별개라고 생각하는 안일함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결국 인간은 자기를 바라보면서 ‘자기는 아무 문제없다. 나는 정상이다.’ 자꾸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인간이 ‘나는 문제없다. 아무리 따져도 나는 별로 하자 없네.’ 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뭘 보시느냐 하면 그 인간을 통해서 상황을 설명하는, 인간이 속해있는 그 사회, 그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를 설명해주는 하나의 기능으로 그 인간을 보시는 거예요.
나만 착하면 되잖아. 라는 것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네가 생각하는 그것이 너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옆에 있는 사람도 한통속으로 다 같이 생각해서 하나님의 공격이 되는 그 사회를 공통적으로 공히 같이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몰라요. 이걸 왜 모르냐 하면요, 사람의 시력은 얼마 안 되서 자기 코 앞의 것만 자기 정당한 것만 자꾸 생각하기 때문에 남이야 어떻게 되든 나만 잘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저 사람하고 나하고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말하는 저 사람이나 너나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뭉쳐져 있는 동일한 세상이다. 하나의 세상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심판이 떨어질 때 저 사람은 심판이 떨어지고 너는 안 떨어지고가 아니라 너에게서 끄집어낸 사고방식이나 저 사람에게서 끄집어낸 사고방식이나 안 그러면 엉뚱한 사람에게서 끄집어낸 사고방식이나 모두 똑같은 사고방식이 나온다는 것을 네가 네 행동을 통해서 발견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걸 발견할 때 어떤 식으로 발견하는가. 거기에 바로 선지자가 투입됩니다. 선지자를 보낸다는 말은 그들이 서로서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이 세상 사고방식이 전혀 하나님의 뜻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선지자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니 선지자는 오늘날 성령의 기능과 똑같아요. 책망하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한옥에 보면 지붕이 양옆으로 슬라이드 미끌어지듯 쫙 내려오잖아요. 그 꼭대기에 보면 지붕마루가 있잖아요, 마루. 설악산 같으면 설악산 공룡능선. 칼날 같은 능선. 능선의 그 좁은 길을 누가 가느냐 하면 선지자가 그 길을 가요. 그러면 선지자는 어떤 점이 보이느냐 하면 능선 이 좌측도 보이고, 위에 있으니까 우측도 보이는 거예요.
우측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해서 하나의 마음을 갖고 있는가도 보이고. 좌측에서는 현재 지붕이 뾰쪽하니까 지붕 능선에 가려가지고 이쪽(우측)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 전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인간들이 사는 세상,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런 안일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쉽게 예를 들어서 그 지붕에는 파스들이 붙어 있어요. 네모난 파스들이 탁탁 붙어있어요, 파스들이.
왜 제가 파스란 표현을 하느냐 하면 이 파스의 특징이 네모났잖아요. 이게 면적이라 하나의 면적을 장식해요. 파스 붙이고 약간 띄우고 또 다른 파스, 다른 파스, 다른 파스...파스들이 있단 말이죠. 그런데 이 아모스 선지자는 뭐냐. 칼날이에요. 그러니까 이 칼과 면적의 만남입니다. 이 칼날은 공연히 들고 있는 게 아니잖아요. 면적을 째는 거예요. 찢어버리는 기능을 해요, 뾰쪽하니까. 면적은 넓적하고. 파스는 넓적하잖아요.
이렇게 해가지고는 여러분이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죠. 지금 한쪽 면을 봅시다. 선지자가 보고 있는 하늘나라 말고 이쪽 세상나라. 곧 종말이 다가오는, 심판 날이 다가오는 그러한 나라를 보게 될 때 그 파스 하나를 병원으로 봅시다. 병원으로 보고 거기에는 병원 원장이 있어요. 그리고 이쪽 파스 바로 옆에는 교회 목사라는 파스가 있습니다.
병원 원장이 자기가 붙어있는 좌측 편의 미끌어지는 한쪽 면만 있는 한옥 지붕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느냐 하면 코로나가 대유행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코로나가 대유행하니까 이 세상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내 것을 지키는 거예요, 내 것. 내 한의원을 지키고 내 병원을 지키고 자기는 원장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 것을 지키는 거예요.
내 것을 지키니까 이것은 칼날이 아니고 내 것이니까, 여기서 여기까지 파스 면적은 내 것이고 저 쪽에 보니까 교회라는 면적이 있어요. 교회라는 면적이 있으니까 그 병원원장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요새 코로나 때문에 많이 힘들죠? 뭐 병원이나 교회나 다 참 코로나 때문에 힘듭니다.” 라고 말을 할 때 이 병원원장은 나는 원장으로서 내 것 지키면 되고 당신은 목사로서 당신 교회만 지키면 돼. 이게 우리네 세상이야. 이렇게 된 거예요.
그런데 칼날을 거닐고 있는 선지자한테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봅시다. 선지자는 이쪽 면(하나님 나라)을 보거든요, 이쪽 면. 그러니 이 선지자가 주의할 것은 개나 소나 전도하면 안돼요. 개, 소는 전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전도는 누가 하느냐. 주님이 전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불쑥 병원 원장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이고 병원이나 교회나 너는 네 것 챙기면 되고 나는 내 것 챙기면 되지.” 라고 먼저 딱 시비조로 물은 거예요. 그래서 그 목사가 기가 차가지고 쉽게 말해서 “무슨 일 있어요?” 제가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냥. “아니 원장님 무슨 일 있어요?” 예를 들어 이야기를 이어가면, “코로나 때문에 힘들잖아요.”, “그게 왜 힘들어야 되죠?” 원장이 하는 말이 “지금 병원도 힘들어 죽겠어, 코로나 때문에 지금. 코로나 퍼질까봐 장사 안 될까봐 힘든데 당신도 목사로서 장사 안 될까봐 힘들 게 아니겠습니까? 요새 뭐 강의도 못 다니고 집에 있고 그렇죠?”, 목사가 하는 말이, “나 다 다니는데요.”
전도를 하는 게 아니고 그쪽에서 먼저 시비를 딱 거는 거예요. 교회는 그냥 놀러가는 거예요. 그다지 필요치 않은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자기는 정상이기 때문에 그래요. 저쪽 기와 저쪽을 전혀 몰라도 자기 자신은 정상이라 병원 원장으로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예요.
그 목사가 듣기에 더 화가 나는 건 이런 거예요. 이것도 지어낸 이야기니까 공대 교수가 하는 말이 “아이고 참, 목사 부인은 참 대단합니다.” 같이 사는 게 대단하다는 거예요. 공대 교수가 공대 학생이 아니고 공대 교수가. 질문을 대단하다고 하면 안돼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해야 돼요. 왜냐하면 그 공대교수가 ‘성령이 무엇입니까? 악마는 어떤 일을 합니까? 천사는 무슨 일을 합니까?’ 를 물어봐요, 안 물어봐요? 안 물어보는 거죠. 왜? 자기는 정상이기 때문에. 자기는 정상이거든요.
내가 남한테 질문할 정도로 내가 비정상은 아니라고 철썩 같이 자기 자신을 정상인 존재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복음 없어도 성경 없어도 나는 사는데 아무 탈이 없다는 겁니다. 이쪽 슬라이드에 완전 파스 붙여놓고 자기 쪼가리 파스 하나 붙여놓고 그 세계가 아무 문제없는 그런 세계라고 알고 있어요.
그러나 선지자는 지금 공룡능선을 걷고 있어요. 그쪽은 모조리 다 멸망의 세계에요. ‘하나님이 누구시냐’를 왜 안 물었냐는 말이죠. ‘교회는 왜 있습니까?’ 물어본 적 있어? ‘코로나는 왜 일어납니까?’ 라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목사한테 물어본 적 있어요? ‘내 것만 지키면 돼.’에요. 내 것만 지키면 돼.
내가 지어낸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한테 다 필요한 거예요. 성경에서 설교 들을 때 강의 들을 때 뭐 천사가 어떻고 뜻을 알았죠. 막상 응용문제 딱 들어가면 이 복음이라는 게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자기 파스 유지한다고. 그 붙어있는 이 쪽 멸망 영역에 있는 그 파스 하나 이것만 건사하면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문제없다는 게 뭐냐. 오늘 본문 4절 봅시다.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한우 구워 먹는 거예요. 그 다음에 “비파에 맞추어 헛된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대접으로, 대접째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며” 이게 지금 사치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선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그들은 안 들으려고 하는 거예요. 왜? 본인은 정상이니까.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내 것 내가 지키는데 내 것 내가 못 지켜서 문제지 내 것 내가 잘 지켜서 병원 운영 잘하고 있는데 이게 뭐가 문제냔 말이죠. 그러니까 남 걱정하는 거예요. “아휴, 병원도 이렇게 힘들지만 목사님 교회도 참 힘들죠?” 자기 입장에서 남을 평가하는 거예요. 너도 그렇고 그런 교회 맞잖아. 이런 뜻이란 말이죠. 너도 그렇고 그런 교회.
전도할 필요 없어요. 전도는 주께서 전도하는 타이밍을 줘요. 그래서 이제 목사가 이야기하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런 일 있었던 것 아닙니다. “원장선생님, 도대체 뭐를 지키려고 합니까? 그걸 왜 지키려고 하죠? 그 지키는 걸로 당신은 모든 의미가 끝났죠.” 바로 지키겠다는 그것이 LA갈비를 하나님 건 줄 모르고 내 거라 여기고 물고 자기 집에 가서 자기 영역 하나 딱 해놓고 LA갈비 뜯어먹으면서 나는 문제없어~노래 부르면서 아무 문제없는 거예요. 아무 문제없어요. 성경 아모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 아모스하고 내가 무슨 상관있는데? 아무 문제없어.
지금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성경에서 주의할 것은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이게 그 당시에 지도자들만 꾸중하는 일로 여기시면 안돼요. 가난한 자도 모든 인간은 자기가 유혹이 되는 이상 그 사람은 사치하고 있는 중입니다.
돈이 있어서 사치가 아니라 돈 없어도 사는 목적이 나는 문제없어. 나는 아무 탈이 없어. 그러면 이미 그것은 스스로 종말을 유발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게 뭐 부자들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이 정도는 지금 국민소득 3만불 되면 다 하고 있는 거예요. 기름 다 바르잖아요. 가끔가다가 삼겹살 구워 먹잖아요. LA갈비 먹는다고요, 일 년에 한 번씩 정도는. 침상, 요새 침상 얼마나 잘 나옵니까. 헌 침대, 중고 침대도 진짜 좋은 침대에요.
자기가 ‘잘났어’ 하는 그런 모습들은 바로 에스더 7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1절부터 보면 “왕이 하만과 함께 또 왕후 에스더의 잔치에 나아가니라 왕이 이 둘째날 잔치에 술을 마실 때에 다시 에스더에게 물어 가로되 왕후 에스더여 그대의 소청이 무엇이뇨 곧 허락하겠노라 그대의 요구가 무엇이뇨” 그 다음에 하는 말을 보세요. “곧 나라의 절반이라 할찌라도 시행하겠노라”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 내가 내 것 떼 줄 결정을 할 정도로 나는 정상이다 이 말입니다.
세계 여왕 중에 제일 TOP을 끄는 여왕이 있어요.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세계 역사는 바뀌었을 거라 할 정도로 클레오파트라는 너무너무 미인이었던 모양입니다. 옛날 클레오파트라 영화에 보면 그 주연을 누가 맡았는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을 맡았는데 그 어릴 때, 그게 벌써 50년 영화인데 너무너무 예뻤어요. 나중엔 살쪄서 결혼 7번 했지만 엘리자베스 테일러 너무너무 이뻤던 거예요. 아마 실제로는 더 이뻤을 거예요. 안토니우스라는 로마의 최고 왕이 클레오파트라를 방문해서 딱 두 시간 이야기하고 뭐라고 했느냐 하면 “중동에서 내가 정복한 땅을 당신에게 다 드리겠습니다.” 했습니다. 딱 두 시간 이야기하고.
지금 두 시간 이야기했죠? 이 아하수에르 왕도 에스더 딱 만나고 난 뒤에 뭐라고 제안하느냐 하면 그대의 소원이 뭐냐. 이 나라의 반을 주겠다. 부동산 반을 주는 거예요. 강남의 부동산 문제 큰일 났습니다. 전세값 또 오르게 생겼어요. 반을 에스더에게 주겠다. 단순히 이게 허세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정말 개뿔도 집구석 아무것도 없어도 진짜 찌질이 가난한 남자라도 만약에 길 가다가 진짜 마음에 드는 여자 만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집에 와서 라면 먹으면 라면 반을 당신에게 덜어 드리겠습니다.”
주고 싶어 환장했어요. 이걸 상대에게 유혹받았다 하지 마세요. 내가 나한테 유혹받은 거예요. 저 여자, 저 상대는 나한테 꼭 필요하다는 그 유혹, 그 유혹의 시작이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선악과가 그 유혹의 시작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이 전쟁을 벌이게 된 겁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까마득히 잊어버렸어요. 무엇을 잃어야 될 줄 모르고 무엇을 얻어야 될 줄을 모릅니다.
나라의 반을 줘서 그 아리따운 여자를 내 아내로 삼는다면 당신은 나에게 그만한 가치, 중동에서 정복한 땅을 다 주겠다고 안토니우스가 그렇게 이야기했죠. 나중에는 옥타비니우스한테 악티움 해전에서 대패해가지고 자기 것이 하나도 없어요. 나중에 죽었어요. 둘 다 자살했는가 그래요. 전쟁에 패배했으니까. 전쟁에 패배하면 내가 남한테 주고 자시고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여기에 멀쩡하게 정상적으로 있었기 때문에 뭔가 유혹을 하려고 하는데 나를 잃어버리면 내가 원하는 내 것도 유혹도 그 순간 아무 소용없이 다 날라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선악과 따먹은 그 자체 죄를 씻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무엇을 주느냐 하면 애초부터 너를 위한 너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너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네가 유혹한다는 그것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아무짝도 소용없다는 것을 말해주려고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요셉의 환난”이 나옵니다.
요셉의 환난. 요셉의 환난을 쉽게 말하면 십자가로 보시면 됩니다. 시편 105편 17절에 보게 되면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성경 해석할 때에 요셉의 자리에다가 예수님을 집어넣으세요. 성경해석 간편하게 정리됩니다. 예수님이 종으로 팔렸도다. 여기서는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예수님의 발에 착고가 차이고.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예수님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기완성밖에 몰라요. 하나님의 자기완성을 위해서 아들을 아낌없이 버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원래 목적인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된다는 그 완성을 하나님께서는 양보한 적이 없거든요. 선악과 따먹었다. 그러면 주님께서 단언하신 그 정녕 죽으리라. 파멸이죠. 정녕 죽으리라. 종말이거든요. 그 종말을 종말대로 시행하는 이것이 하나님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백성도 같이 망할 거냐? 아니죠. 자기백성을 건지기 위해서 마지막에 네 분수, 너의 진면목, 진짜 네가 누구냐를 알려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장차 오실 예수님의 고난을 미리 요셉에게 담아서 그 당시 이스라엘 히브리 백성들에게, 아직 나라가 되지 않았으니까, 이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너희가 팔아먹은 요셉이 도리어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떠한 너희의 죄를 안고 고생고생 했는가를, 요셉이 당하는 그 환난이 죄 지은 너희를 도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꿈의 실현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너희들은 잊어버리면 너희들은 더 이상 하나님 백성이 아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이 말이 뭐냐 하면 다시 아까 지붕이야기로 갑시다. 한옥 지붕이 있는데 이쪽 지붕에는 파스 같은 게 없어요.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주시는 것으로 부자가 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주시는 것으로 부자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쪽에 멸망 당할, 하나님의 LA갈비를 그게 유혹이 되어서 맛있다고 입에 물고 있는 거기는 각자 오두막처럼 자기 파스가 다 붙어있어요, 덕지덕지. 그리고 자기 것이 안전하면 아무 문제없다는 거예요. 내 교회 멀쩡하고 내 병원 멀쩡하고 내 가정 멀쩡하면 아무 문제없다는 겁니다.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내 것만 잘 지키면 뭐가 문제냐는 거죠.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하기를, 그 한옥 지붕 꼭대기에서 아모스가 외치며 하는 말이 “너희들은 저쪽 편, 요셉의 환난을 너희들이 놓치고 있다. 그걸 놓치면 하나님께서 이 성읍들을 다 불태워버린다. 미워하므로 이 성읍과 거기 가득한 것을 대적에게 붙이리라” 완전히 멸망시킬 것이다. 그렇게 지금 아모스가 지붕마루에 서서 외치고 있는 거예요. 이쪽(하나님 나라)을 다 아니까.
칼날입니다. 그들이 붙이는 파스의 면적을 찢어버립니다. 어느 쪽이 참된 구역이고 어느 쪽이 거짓된 구역인가 한번 보라는 겁니다. 여러분 코로나가 무섭습니까, 내가 평생 공들여서 얻은 이것이 무너지는 게 두렵습니까? 독감이 두려워요, 내 것이 왕창 없어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사람은 내가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해요. 그런데 내가 사라지는 그게 종말의 시작이입니다. 종말의 시작이에요. 그 파스 냄새가 지옥 냄새였어요. 내가 그렇게 지키려고 하는 나에게서 나는 나의 냄새가, 나의 유혹적인 나의 냄새가 이미 자기를 무너뜨리고 있는 심판의 냄새인 것을 왜 우리는 모르느냐는 말이죠.
주의 뜻은 이겁니다. 너 자신을 잃어버려라. 요셉처럼 너 자신을 잃어버려라. 그래야 말씀이 산다는 거예요. 그런데 네가 만약에 든든해서 문제없다 해버리면 말씀이 죽어버려요. 천사가 왜 있어요? 사탄이라는 게 어떻게 일하죠? 성령님은 어떻게 일하죠? 내가 지금 내 것이 풍부하고 나는 아무 문제없다는 사람이 그런 걸 왜 궁금해 하겠어요. 그런 건 안 궁금해 하죠. 그딴 거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이 뭐가 중요하다고.
만약에 정말 자기가 천국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내 지금 한 달 월급이 얼마고 내 가정이 얼마나 행복하냐 보다도 “주의 뜻은 뭡니까? 십자가가 뭔 뜻이에요?” 이렇게 물어야죠. 그러면 십자가를 전하는 어떤 사람이 남편을 지킨다면 “아이고 고마워요.” 참 대단하다 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계속 지켜주세요.” 이렇게 나와야지. 아이고, 참 말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거 같이 살아준다고 참 욕봅니다. 이런 식으로 칭찬도 아닌 것이 욕도 아닌 것이.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금 계속해서 전쟁 중이에요. 하나님은 전쟁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멈췄지. 우리가 멈춘 거예요. 그렇다면 이번에 이쪽 슬라이드, 이쪽 천국에서는 하나님께서 뭘 준비했는가. 고린도전서 1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여기서 부족함이 없다. 부족함이 없다고 했어요, 부족함이 없다.
네가 넉넉하냐 안 넉넉하냐를 네가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 보시기에 네가 그 정도 되도 충분하고 천국 가는 데에, 이쪽 슬라이드 천국 가는 데에 아무 모자람이 없다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그것이 여기 고린도전서 1장 8절에 보면,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얼마나 든든하고 얼마나 넉넉합니까. 목사님, 복음 아는 목사님이십니까? 그렇다면 이거 내가 아무것도 돈 못 벌어도 천국 갈 수 있죠? 이런 질문을 해야죠.
야고보서 2장 5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이쪽 슬라이드, 그러니까 천국 가는 요셉의 환난, 십자가의 환난이죠, 십자가가 귀한 것을 아는 사람, 내 돈보다도 십자가가 더 귀한 것을 아는 사람한테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유업을 넉넉하게 주는 거예요. 비록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산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문제거리가 안 된다는 겁니다.
너희들 도무지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그 정도로 너희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자 있고 문제성 있고 내가 내 능력으로 내 구역 챙기는 이 자체가 이게 하나님의 뜻에 원수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걸 아모스가 지붕마루에서 이쪽 편에 있는 사람보고 계속 책망하는 거예요.
그럴 때 그 당시에 지옥 가는 자들이 그런 아모스를 가만 두겠습니까? 그냥 봐 주겠습니까? 택도 없죠. 그래서 아모스 7장 10절에 보면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저 아모스 선지자가 왕을 도전합니다. 배반합니다. 이렇게 꼰지르죠. 그리고 아모스한테 이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가버려. 이 땅에서 외치지 말고. 꼭 이런 자가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모스가 외쳤기 때문에 이쪽 자기 영역 네모난 파스 붙이고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적이 된다는 사실을 아모스가 외치니까 그때 노출되고 발각되는 거예요. 누가 천국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복음을 가지고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 외쳐줘야 내가 어떤 입장에 있다는 것,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성령 받은 성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야지. 대단하다 하지 말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안일하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꼭 사치스럽게 안 살아도 그걸 인생 목표로 삼는 것, 재벌 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을 때 이게 바로 LA갈비 먹고 달아난, 악마 편에 서서 자처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된 멸망의 유발자, 스스로 종말의 유발자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겁니다.
끝으로 누가복음 21장 34절 보고 마치겠습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코로나 19죠, nineteen. 나중에 ninety-nine, 99 나올 수도 있어요, 변종 돼서. 온 지구상이 우리가 살만한 곳이 못됩니다. 요셉의 환난,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나라, 천국이 따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되지도 않는 인간이 자기가 정상이라고 우기면서 허세 떨면서 남들처럼 사는 게 사는 목표가 된 이 거짓된 삶을 이제는 얼마나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된 하나님 앞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는 거짓된 인생인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