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01225b 마가복음16장 8절(부활의 힘)-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01225b 마가복음16장 8절(부활의 힘)-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제자들이 특혜를 입었는데 특히 여성들도 마찬가지이고. 예수님의 부활의 그 장소, 이제 여러분들이 제가 왜 x,y를 거론했는지 아시겠죠, 그 장소 그리고 안식 후, 지나매, 그 시간, x,y, 인간이 갖고 있던 시간과 공간의 좌표가 예수님 만나는 순간 (x,y)=0가 되는 거예요. 0는 더 깊이 들어가면 죄가 되는 겁니다.
만약에 여자들이 60대에 만났다. 그러면 60년 산 것이 뭐가 돼요? x=0, y=0가 되는 거예요. 원점. 공간의식과 시간의식이 0가 된다는 말은 네가 태어나서 아무리 살아도 살아온 그만큼 십자가의 범주, 0되게 하는 힘을 너 따라서 같이 확장시키겠다는 겁니다. 다메섹에서 내려가든지 안 그러면 미국에 살든지 관계없이 그건 0, 0이라 하는 것은 헛살았다. 죄라 하는 것은 너는 죄만 지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자 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시선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응시. 누가 쳐다본다. 누가 쳐다봐요. 이게 바로 혜택입니다. 누가 나를, 테스 형이 아니고 부활하신 주님이 나를 쳐다보고 지켜보는 그 시선이 나온다면 거기서 50을 살든 60을 살든 졸지에 나는 뭐가 됩니까? 0가 되고 이것은 곧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쳐다볼 때 우리는 십자가지려고 예루살렘 요새 텔아비브공항 내려서 예루살렘 이동할 필요도 없어요. 내가 사는 그곳이 0지점이 되죠.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지점이니까.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편리하죠. 편리하지만 그 시선을 보는 순간 우리는 죄인이 된다는 겁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죄인이 된다는 말은, 주님 앞에 첫째 시간에 배운 것처럼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옳지 않아요. 나는 죄인이라고 하는 그것을 내가 의식하는 순간 나는 죄인이 아닌 진실된 의인이 되기 때문에 이런 논리는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응시할 때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돌이 돼요. 돌 하루방. 굳어버립니다. 누가 딱 보게 되면. 딱 보게 되면 굳어버려요.
만약에 이태가 딴 짓하는데 “공부해!”하는 순간 딱 굳어버리죠. 돌이 되는 거예요. 제가 강남강의에서 했잖아요. "Stop!"하는 순간, 그 개는 맛있는 거 먹으려고 하다가 스톱이 되죠. 그러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쳐다보는 순간 우리는 내 꼼수, 내가 뭘 이렇게 하겠다는 그 자체가 stop이 돼요. 의식의 stop이 되는 겁니다.
stop이 되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뭐든지 할 수 있어요. 경직되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돌이니까 돌 하루방이니까 강도가 세거든요. 남한테 욕 얻어먹는 것도 할 수 있고 마트 가서 캐셔 일도 할 수 있고 식당에서 설거지를 해도 되고. 이제는 뭐 어떤 부끄러움도 없는 거예요. 양양에 가서 콩나물 공장에서 일할 수도 있고. 양양 콩나물 공장 이야기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옛날 잘 나갔던 개그우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사고난 뒤 은퇴하고 나서 거기서 일한다는 겁니다.
뭘 해도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뭐든지 할 수 있는 순간이 어떤 순간이냐 하면 타인이 나를 응시하는 것보다도 주님이 나를 응시하는 순간, 나의 의식은 일체 인정받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평가하고 측정하고 나에 대한 가치를 정리정돈하려는 모든 시도는 Stop! 그런 짓 하지 마. 주님에 의해서 이제는 하게 하셔요.
그러니까 참새도 주께서 키우시고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오늘 키우잖아요. 내일 아궁이에 들어가는 들풀도 오늘 주께서 친히 기르시지요. 참... 그러니까 구약의 욥이 그걸 몰랐던 거예요. 자기가 돌이 되면 되는데 자기가 있는 거처가 황무지가 되면 되는데. 자기는 살아온 x,y그래프에 의하면 내가 2살 때 어디 갔었고 3살 때 원주에서 살았고 7살 때 대구 왔고 시간이 흘러 어느 학교 나왔고... 이 자체가 전부다 의미 없는 황무지가 되는 겁니다. 주께서 찾아온 순간, stop이 되는 순간.
이건 나의 의식이고 나의 의식은 공간의식과 시간의식이에요. 공간의식과 시간의식을 합쳐버리면 인간이 되는 게 아니고 사물이 되고 사물에게 필요한 것은 돈밖에 없죠.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돈이 있어야 인간다움이에요. 돈이 없는데 무슨 인간다움이에요. 돈 없이 난 인간이라 하면 이걸 누가 알아줍니까? 아버지도 돈이 있어야 아버지지 돈이 없는데 무슨 아버지가 되고 돈 없는데 무슨 어머니가 돼요. 그래서 은퇴한 50대 후반, 60대 부부가 제일 먼저 신경 쓰는 것이 자식이 하나든 둘이든 있으면 자식을 발로 차서 내보내는 거예요. 자식을 떼내야 사물로서 내가 살 수 있는 여력으로 노후대책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같이 붙어있으면 그것도 세 명이나 붙어있으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미래가 암담하죠. 그런데 이렇게 미래가 암담한데 이런 사람이 있어요. “목사님, 그래도 믿음으로 살면 주께서 먹을 것, 입을 것 채워주시겠죠.” 하면 그 말은 ‘어떤 경우라도 나는 진실되다’ 라는, 지금 자신을 우상시하는 발언입니다. 아주 위험한 발언이에요. 왜 살아야 되는데요.
인간은 돌이 되죠. 돌이 되고 이건 진실되죠. 돌이라 하는 것은 흙. 삶과 죽음의 경계선으로 오는 겁니다. 이 경계선이 십자가죠. 십자가에 우리는 돌로써 참여하는 겁니다. 이걸 누가 한다고요? 시선이 하죠. 우리를 응시하는 시선이 합니다. 이제부터 좀 어려워지는데.
내가 예수님 몰랐을 때는 최종적인 마지막 사람이 나에요. 숫자 1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응시가 되어버리면 여기 하나 더 있죠. 1과 1이 있으면 1+1=2가 되죠. 응시가 있으면 2의 세계가 구성되는 거예요. 나 여기 있고 나를 쳐다보는 누가 있고. 모든 거치는 것 다 떼어 내버리면 2가 되죠. 2가 될 때 여기서 관계가 성립되는 겁니다, 성경에서는.
그래서 아담을 만들 때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았다. 아담이 홀로 사는 것이 좋지 않았다고 보는 겁니다. 나 혼자 있는 것은 나의 나다움이 될 수 없어요. 나를 응시하고 뭔가 말을 던지고 지켜보는 그 분이 있을 때 나는 나다운 것이 비로소 천지창조하고 처음 아담을 만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에요.
부부가 좋은 점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상대방 앞에서 옷을 벗을 수 있다는 거예요. 뭐 옷을 못 벗어서 환장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원래로 돌아가도 자연스러울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나를 부끄럽게 보지 않는 어떤 자가 있을 때 나는 원래로 마음 푹 놓고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2인의 관계거든요.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우리를 보고 있다는 말은 네가 어떤 짓을 해도 괜찮다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어떤 짓을 해도. 어떤 짓을 해도 훌륭하다는 뜻이 아니고 상관없다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그동안의 관계는 뭐냐 하면 절대적인 1이 된 내가 하나님을 하나의 상대자로 내가 만들어냈겠죠. 그럼 나는 우상이고 나는 나 자체가 우상이면서도 감추면서 신을 믿는다고 이렇게 인간이 내놓는 건 거짓말밖에 없기 때문에 거짓말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진정한 2자관계가 아니고 자기를 선악과 따먹고 절대화시키는 그 방법이란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나를 응시하니까 나는 뭐가 돼요? (x,y)의 좌표값은 뭐가 됩니까? 0, 돌 또는 나는 죄가 되는 거예요. 죄가 되기 때문에 그 분이 요구한 것이 이거였단 말이죠. 내 앞에서는 죄인이고 내 앞에서는 넌 흙이라는 것을 우리는 구애받지 않고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는 이 자유. 아, 이거 참 기분 좋지 않습니까.
둘이 있어야 나의 나됨이 되는 거예요. 주님이 있어야. 이것을 가지고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이라 하는 것은 김종환이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거짓의 옷을 벗었다’ 하잖아요. 더 이상 나는 나를 거짓되게 속이는 그 피곤함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거예요. 더 이상 남한테 인체하고 거룩한 체하고 고상한 체하고 돈도 없으면서 있는 체하고 그 자체가 참 얼마나 그동안 힘들었습니까. 연말을 맞이해서 그동안 사기 친다고 거짓되게 인간도 아닌 게 인간답게 살라고 얼마나 참 힘들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 우리를 십자가 출발점으로 늘 돌려보내시는 그 주님 앞에서 그런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죠. 거짓의 옷을 마음껏 벗어도 괜찮은 겁니다. 윤리도덕의 옷을 벗어도 괜찮고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키지 않게 하신다.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키지 않는다는 말은 뭐냐.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내가 될까요?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나’가 돼요.
따라서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키지 않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내가 되겠다는 나는 사라지고 주님이 원하는 나는 따로 있습니다. 그 따로 있는 나는 어떻게 생산되고 만들어지는가. 이것이 상당히 어려워요. 그렇지만 여러분들 실력을 믿기 때문에 하겠습니다. anchor. 닻이라 하죠. anchor뒤에다가 man붙이면 anchorman되죠. 릴레이할 때 최종주자를 anchorman이라고 하거든요. anchor, 닻. 판이 이렇게 있는데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전부다 여기다가 닻으로 내리는 거예요.
배가 있는데 배가 정박하기 위해서는 가까운 해변 가에 닻을 내리든지 안 그러면 뭐를 묶든지 해야 되겠지요. 무거운 걸 내리잖아요. 그러면 배 모습이 물에 떠있는데 내릴 때는 anchor, 닻이 내려진 모습이죠. 그러면 부둣가 밑에 있는 바다의 모습을 보게 되면 배가 열채 있다면 닻이 내려와 꽂히겠죠. 닻1, 닻2, 닻3... 전부다 동일한 닻이 되는 겁니다. 이걸 '앵커의 판' 또는 '앵커의 평면’이라고 제가 칭하겠어요. 이런 말이 있는 게 아니고 제가 지어냈으니까, 뭐 지어낼 때 주의해야 됩니다. 닻4, 닻5, 닻 6....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 하면 편하게 살면 되지 왜 앵커라는 말을 지어내서 닻을 내린다는 말을 하느냐면 이 세상에서는 사람 따로 사건 따로 개구리 따로 기차 따로 자연 따로 바람 따로 인간은 전부다 분류를 해놨기 때문에 사람, 사건, 마음, 사랑 이런 걸 전부다 결합할 수 있는 요소가 없어요, 분류를 할 때.
인간은 분류를 할 때 그냥 분류하는 게 아니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지 잘났다 하는 쪽으로 나를 어떻게 밥 먹여줄 수 있느냐는 쪽으로 분류를 하게 되어 있어요. 옛날에 중국의 임금 중심으로써 생물학을 할 때는 오늘날처럼 뭐 종속...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네 발로 기는 것, 두 발로 다니는 것...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임금님이 좋아하는 것과 임금님이 못 먹는 것, 이런 식으로 분류했다고요. 분류할 때 의도가 다 담겨있어요.
아수라백작 있죠. 감기 조심하세요~라고 하는 판콜 선전할 때 소녀가 썼던 비옷 비슷한 거 뒤집어쓰고 나오는 아수라백작. 마징가제트에 나오는 나쁜 놈이에요. 반은 여자고 반은 남자고. 그 아수라백작이 닻을 내려버리면 그 마징가제트도 역시 동일한 닻이에요. 아수라백작은 악하고 마징가제트는 선하다는 선과 악의 차이를 이 세상에서는 남기거든요. 남기지 말고 그걸 완전히 무시해버리고 차별 없이 한번 만들어보자.
차별 없이 만들면 아수라백작도 하나의 사건이고 또는 사물이죠. 이걸 전부다 마지막 릴레이주자처럼 마지막 최종의 닻의 모습으로 전부다 꽂아버리자는 말이에요. 그럼 이게 좌표가 되겠죠. 닻을 내린 좌표의 평면을 하나 떠버리는 거예요. 제 아이디어입니다.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해야 돼요.
다시 말씀드려서 내가 뭔가 분류하려고 한다면 내가 귤을 안 먹는다면, 먹지 않는 분류에다가 한꺼번에 다 넣어요. 그러면 과일 농장하는 사람은 기분 되게 나쁘다고요. 과일 공장하는 사람은 귤은 일단 귤이고 수박은 나중인데 나는 귤을 안 좋아한다면 귤 제키고 뭘 하는 거예요. 나는 개고기를 못 먹거든요. 그러면 개고기는 못 먹는 것, 한꺼번에 쓰레기통에 다 분류해 버리고, 순대 같은 거 곱창 이런 거 못 먹거든요. 그런데 대구곱창 대구에 명품 곱창전골 먹어봤습니까? 이렇게 나오는 사람들은 그 곱창을 왜 못 먹지? 또 화를 낸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분류하는 자체를 주관적으로 보지 말고 객관적으로 보는 방법은 그런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다 닻을 내려가지고 이 세상 말고 그 밑에다가 판대기를 만들어가지고 전부다 점으로 좌표로 표시하자 이 말입니다. 그럼 이 세상은 아담의 세계가 돼요. 아담의 세계, 현재 세계.
그럼 아담의 세계에 왜 닻을 내려야 되는가. 이 아담의 세계에 누가 들어 있느냐 하면 마귀도 마귀로 오지 않습니다. 마귀도 우리와 똑같은 하나의 닻이 돼요. 이거 이야기하려고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놀랍게도 예수님마저도 우리에게 오게 되면 그냥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에요. 그 당시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을 우대하는데, 예수님을 우대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성경 그 당시 시절로 돌아가 보자 이 말이에요. 돌아가 볼 때 유대인들이 아이큐가 낮은 것도 아니고 성격이 고약한 것도 아니고 그냥 예수님을 볼 때 어떻게 보겠어요? 그동안 자기들이 있었던 이념, 우리가 생각하는 메시아는 저런 모습은 아니야, 했던 그런 입장에서 봤을 때 예수님은 그냥 보통 사람이에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마귀를 알았습니까, 몰랐습니까? 그들에게 귀신 쫓아내고 마귀 쫓아내는 것은 병든 사람에게 해당되죠. 그러나 본인이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을 유대인들이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죠.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의 사고방식을 이렇게 앵커판, 앵커의 평면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12제자와 이 모든 사람도 어디에 속했느냐. 피라미드 형식으로 해서 (예수님께서 누구를 마귀의 자식, 악마의 자식이라 했느냐 보면) 그 당시 지도자급이 이 유대사회에 나름대로의 앵커판을 만들어서 하나의 교육 이념으로 전부다 세뇌를 한 거예요. 메시아냐 아니냐 하는 것은 우리가 전문가니까 우리가 판정할게. 너희들은 우리 시키는 대로 해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판정하다보니까 제일 밑바닥에 세리와 창기가 있었던 거예요. 이게 그들의 분류방법이었어요.
그러나 주님 오셔서 모든 인간을 x와 y의 좌표로 하고 그 모든 좌표값은 0가 되는 거예요. 죄인이 되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죄인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 입장에서 사도바울이 늘 이야기했지만 이 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모든 사물들과 사건들과 짐승들과 대자연 모든 것은 이 앵커, 닻만 모여 있는 앵커의 평면에 의하면 이것은 바로 악마가 지배하는 저주의 세계, 저주판이 되는 거예요.
라디오 뒤에 떼보면 반도체판 나오죠. 라디오나 TV 뒤에 떼보면 판에 도돌도돌 났잖아요. 그걸 하나의 닻, 하나의 앵커라 보잔 말이죠. 보게 된다면 그 판이 고만고만해서 그게 이건지 비전문가들은 모르잖아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그걸 몰라도 그 판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 보시기에는 영적 요소, 악마에요. 그러니까 인간들은 예수님은 핍박해도 악마는 핍박 못한 거예요.
예수님과 악마는 대표입자거든요. 유일한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악마가 대표입자에요. 대표입자가 언제 1대1로 만났습니까? 마태복음 4장에서 광야에 시험할 때에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고 대표, 악마와 예수님이 만났습니다. 그 때 악마가 본인 입으로 이야기했어요.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세는 누구 손에 있다? 내 손에 있다고 자기 입으로 그렇게 이야기했다고요, 자기 입으로. 그 이야기할 때 사람이 근처에 몰래 녹음기 들고 조선일보 기자나 누가 들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그렇잖아요. 아무도 없었죠. 목격자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도 없죠.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간은 악마 중심의 앵커판을 만들 수 있다, 없다? 만들지를 못해요. 뭐든지 내 중심으로 분류를 하기 때문에. 코로나 걸린 사람과 안 걸린 사람, 걸릴 가능성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그렇게 분류를 하는 거죠. 백신 맞은 사람과 안 맞은 사람. 이렇게. 공산주의냐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이런 식으로. 인간들은 틈만 나면 분류해요. 첫째시간에 말한 것처럼 나의 진실됨을 위하여 나의 정당함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해서는 예수님 십자가 지신 이유를 모르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세상을 봐서는 모르는 겁니다. 부활을 언급하고 십자가를 언급할 때는 먼저 예수님이 이 세상을 어떤 식으로 봤는지를 봐야 돼요. 그럼 이 세상은 누구 손에 있다? 악하고 어두운 권세 손아귀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권세자를 보고 싶다? 인간 눈에는 보이지를 않죠. 인간 눈에는 보이지를 않는 겁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악마가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이게 바로 부활의 결정적 의미이죠. 이 세상의 특징은 악마의 세계입니다. 악마의 세계에서 예수님이 죽었다.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이 죽은 것은 하나의 평범한 목수 출신이 죽은 거예요. 평범한 목수 출신이 죽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도 왜 그리 까불었어? 조용히 좀 있고 그만 나대지. 괜히 나대서 죽었잖아. 하고 끝나버려요. 그리고 예수님을 찾아왔던 3명의 여인도 예수님의 그 활약상이 너무 안타깝고 안쓰러운 거예요.
자기가 아는 모든 인식은 악마로부터 뒤집어씌워졌기 때문에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은 없잖아요. 없는데 여기 죽음밖에 없는 곳에서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살아났죠. 살아났다면 예수님 말고 또 살아날 사람이 있다고 여겼습니까, 없다고 여겼습니까? 없다고 여겼죠.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난 것은 예수님이 살아난 것이 아니고 이 전체를 한꺼번에 규정할 수 있는 안목으로서 살아난 거예요.
이게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한 게 아니고 ‘죽은 자에서 부활’이에요, 죽은 자에서. 이 전체를 부활의 입장에서 한꺼번에 이걸 하나의 동일한 평면으로 보게 된 거예요. 그걸 설명하면서 내가 앵커판이라는 걸 막 지어낸 거예요, 여기서. 좀 무리가 되더라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수면 위에 있으면 배도 되고 어떤 건 사람이고 수박이고 되지만 물속에 잠겨버리면 또는 물속으로 내려가면 동일한 하나의 앵커, 닻을 내리는 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어디에 닻을 내렸다? 죽을 수밖에 없는, 결국 죽음이 지배하고 죽음이 승리하는 데에 그 닻이 내려진 거예요.
혹시 여러분 이라는 노래 아십니까? 제가 대전강의 때 소개했잖아요. 거기 가사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사망이 무너졌도다 할렐루야~’ 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거 있잖아요. 한번 적어볼게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사망이 무너졌도다’ 이런 가사가 나와요. 이 가사가 잘못되었어요. 사망이 무너진 게 아니고 현실이 무너진 거예요. 현실이 무너지고 사망이 본격화되어 살아난 거예요. 너도 사망, 나도 사망. 죄가 살아난 거예요, 모조리. (x,y)의 값은 사망이고 죄고 0에요. 죽은 자들이에요. 죽은 자가 살아난 거예요. 코로나 걸려 죽으나 그 전에 살아있으나 다 죽은 자에요. 이것이 바로 부활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사적으로 죽었다가 살아난 게 아니고 빠져나올 수 없는 악마에게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살아난 뒤에 제자들로 하여금 그 빠져나온 구멍 있잖아요, 그 시점, 지점인 십자가 사건으로 되돌려 보내는 이유는 그 십자가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 전체가 사람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구성된 그런 공동체 사회가 아니고 악마가 다스리는 사회에요, 악마가 다스리는 사회.
그 시선이, 그 예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주셔서 제자들을 주시하면서 응시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여기서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나로 사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십자가로서 살게 만들어요, 이 성도를. 십자가는 우리가 살아 있으면서도 우리를 죽은 자라고 제대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 사건에 있는 사람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사망이 무너졌도다 할렐루야~이렇게 되는 게 아니고 무엇이 무너졌다? 모든 현실이 다 무너지고 오직 이 세상은 죽음만 있는 세계. 오직 죽음뿐인 세계. 그 죽음의 힘에서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음을 이제부터는 기분 좋게 즐겨야죠. 주님으로 하여금 날마다 그렇게 돌아가게 하기 때문에. 주님의 응시가 우리에게 계속 지시하거든요. 제발 돌이 되어라. 네 계획이나 네 목적 자체가 없고 앞으로 10년을 더 살아도 공연히 산 것이 되고 아무 의미 없는 삶이라는 것을 미리 즐겨야 돼요.
아까 뭐가 부담이 없다 했습니까? 이 땅에서 내가 의롭게 된다는 그 짐에서 벗어난다 했죠. 그렇죠? (x,y)=0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딱딱한 죄인으로 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만이 이 땅에 유일한 죄인입니다. 죄이기 때문에, 나올 게 죄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자기한테 기대하지 않는 거예요. 이 죄인 되는 것은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응시했고 성령을 보내서 응시하게 되죠.
그러면 이 죄인이 이 땅에 살면서 계속 생애를 이어가겠죠. 시간의 박동. 시간이 뛰기 시작합니다. 이 시간은 죄를 죄 되게 드러내는 시간이 박동해요. 팔딱팔딱. 시간이 뛰죠. 시간이 박동합니다. 그럼 이것은 (x,y)=0에서 의미가 부여돼요. (x,y)=죄가 되는 거예요. 나는 죄인으로서 남은 생애를 살아가는 이것. 이게 1이 아니고 1과 1의 관계, 2의 관계죠. 이 1+1의 관계, 이것을 성경에서는 사랑이라 합니다.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기 때문에 사랑하는 관계기 때문에 그 사랑이 주는 시선으로 인하여 얼마든지 나는 옷을 벗을 수가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거리낄 것이 없고 나를 가렸던 모든 것, 내 잘남을 주님 앞에서는 그 까이것 하고 더러움을 더러움 그대로 노출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x,y)=0인데 만약에 자기가 살아왔던 지역을 대입시키고 자기가 살아왔던 생애 기간, 나이를 집어넣어버리면 어떤 값이 나오겠죠. 57이 됐든 60이 됐든 뭐가 나오겠죠.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 사람은 사는 게 힘든 이유가 어떤 사람이 80이 되었다면 아이고 내 인생 꼬라지하고는. 나는 그동안 뭐했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힘든 거예요. 자기의 과거를 돌아보면서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것밖에 안되지?’ 라고 비교되겠죠.
그러나 주님의 안목, 응시에서 보게 되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여기서는 뭐가 안 나옵니까? 십자가가 안 나오죠. 십자가가 안 나온다는 말은 부활과 연결점이 된다, 안 된다? 부활될 수도 없는 삶이 이런 삶이에요. 나는 인생 몇 점이냐 몇 점이냐. 이게 부활의 요소, 복음의 요소가 안 나오기 때문에 부활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교회 다니면서 부활되겠다는 거예요.
부활은 반드시 코스가 있어요, 코스. 중간에 새치기해서 부활되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십자가로 가야돼요. 십자가로 갈 때는 (x,y)=0가 되어야 돼요. 내가 죄인 되는 거예요. 죄인을 즐기는 거예요. 감사하는 거예요. 고마워하는 겁니다. 그럴 때만 십자가를 통과하신 부활의 영께서 주목하고 지시하고 응시하고 명령하니까 우리는 이 죄인으로써 가뿐하게 살 수가 있는 겁니다.
지난 22일, 한 이틀 전에 경상북도 영양에서 46살 먹은 사람하고 45살 먹은 사람하고 군에선가 시켰는지 모르겠지만 유해조수, 멧돼지 잡으라고 전부다 안 그래도 사냥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들에게 파출소에서 총 줘서 이 겨울철에 멧돼지 잡으라고 했거든요. 그 사람이 멧돼지 잡으려고 하면서 뭐 부스럭하면 총 쏘는 거예요. 그런데 뭐가 부스럭하니까 총 쏴버렸어요. 같은 동료가 죽었어요, 총 맞고.
멧돼지인지 사람인지 그 사람은 뭘로 감 잡았느냐 하면 눈으로 보고 쏜 게 아니고 부스럭할 때 쏜 거예요. 부스럭할 때 왜 총 쏘았습니까? 자기 사냥의 경험에 의하면 자기 (x,y)좌표의 경험에 의하면 저 부스럭 소리는 결코 사람이 낼 수 있는 부스럭 소리가 아니고 멧돼지만이 낼 수 있는 부스럭 소리라고 이미 자기 과거에서부터 좌표에서 익혀온 거예요. 그걸 보고 총 쏜 거예요. 그런데 멧돼지가 죽은 게 아니고 사람이 죽었어요.
이 사람이 실수한 거죠. 실수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거짓말이다, 근원부터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딴 거는 괜찮은데 그 점에 있어서는 약간 오류를 범했다. 실수를 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사람이 사람을 죽이든 살리든 관계없이 이 사람은 어디를 찾아가지 못했습니까? 나는 원천적으로 거짓말쟁이이며 원천적으로 나는 마귀에 속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닻, 하나의 입자, 점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을 그 사람은 생각 못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영역을 축소할 수 없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십자가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자기 힘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십자가로. 자기 힘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마가복음 16장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마가복음 16장 8절을 다시 봅시다.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그 다음에 뭡니까? 도망쳤죠. 도망쳤습니다. 그 다음에 무서워하죠. 벌써 수상하죠. 무서워한다. 도망친다 또는 걱정한다. 근심한다. 이것은 (x,y)=0가 아니죠. 죄가 아니죠.
이게 뭐냐. 왜 도망치고 무서워했느냐 이 말입니다. 첫째 시간 이야기를 다시 하면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에 의하면 ‘나는 거짓되지 않게 살아왔다’ 라는 자기 고상한 영역을 따로 확보했기 때문에 자기가 안 다치기 위해서 도망치고 무서워한 거예요. 이 여자들은 일종의 선택을 한 겁니다. 남들 보기에 내가 무서워하고 놀라고 나를 이상하게 볼 것 같은 것은 사전에 내가 다 차단해가지고 그 현상을 내가 기피하겠다는 생각이 들겠죠.
그러면 아까 닻이라 할 때는 보세요. 여기 물 위에 배가 있다면 닻은 물 속에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여자는 깊이라는 게 없고, 수직적 삶이 아니고 어떤 삶이냐 하면 그냥 평면적 삶이죠. 평면적 삶인 거예요.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앵커판이 몇 장 되어야 돼요? (위, 아래로) 두 장되는 거예요. 두 개의 평면이 준비되어 있죠. 한 쪽 평면은 내 중심의 판이 있고 다른 한판은 주님께서 모두 악마에 속했다고 일괄적으로 보는, 부활의 안목에서 보는 이런 판이 있겠죠. 모든 사물을 일체 차별 없게 만드는 것.
이렇게 이야기하면 모르고요. 로마서 3장 한번 봅시다.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로마서 3장에 보게 되면 3장 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 되어있죠. 이 말은 뭐냐. 인간의 죄는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 많이 지은 사람하고 적게 지은 사람하고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주님 보시기에는 없는 거예요.
어차피 마귀에 속했고 어차피 부활 안 되고 어차피 지옥 가는 거. 차별 없어요. 그렇다면 주께서 주시겠다는 판은 무슨 판입니까? 차별이 있는 판이에요, 차별이 없는 판이에요? 이미 이 세상이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차별이 없잖아요.
아까 어떤 분이 질문한 것처럼 나는 가인에 속했느냐, 아벨에 속했느냐. 나는 어느 쪽에 속했느냐. 인간이 두 종류로 나뉘어지는데 나는 어느 쪽에 속했느냐. 이 말은 결국 나는 어느 쪽에 속했는지 어떻게 아느냐. 같은 이야기죠. 이렇게 질문했어요. 인간은 어차피 가인계통, 아벨계통 두 계통이라면 그럼 나는 어느 계통에 속했는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하셨잖아요. 하실 때 제가 그랬잖아요.
가인이고 아벨이고 내가 선택할 문제가 아니고 가인과 아벨 둘 다 아담의 자손이죠. 아담은 자체가 죽음이죠. 그럼 가인이고 아벨이고 둘 다 죽어야 되죠. 죽은 자에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까? 차이는 아담과 마지막 아담, 예수님과만 차이나요.
그리고 아벨계통이냐 가인계통이냐는 내가 가릴 몫이 아니고 주님이 하실 몫이에요. 주께서 말씀으로 가인계통 아벨계통 일방적으로 정하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빠져야 되죠. 빠질 때 뭘로 빠집니까? (x,y)=0로 빠지면 되죠. 이게 바로 주님이 주신 안목이에요. 그 안목을 가진 사람이 아벨계통입니다.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호빵과 호만두가 같이 있다. 어느 게 호빵인지 호만두인지 알아내는 방법 있어요, 없어요? 손 안대고, 안 찔러보고. 없죠. 제가 그런 실수 많이 했다고요. 호만두 사러 가가지고 호빵 사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지금은 포장지에 표시되어있지만 옛날에는 그냥 쪘을 때 주인이 그냥 호만두, 호빵 했어요. 집에 가서 뜯어보니 야채 나오고 뜯어보니 팥앙금 나오고. 인간은 차별이 없어요. 인간은 차별이 없습니다. 고만고만해요. 뭐 공부 잘하고 못하고 뭐 돈 있고 없고 고만고만. 마지막을 보세요. 마지막은 다 죽잖아요.
지금 (x,y) 값이 0가 이상한 게 아니고. 어떤 사람이 한 100살 살았다. 이 사람은 온 세계를 다 여행했다. 그런데 죽는 순간에는 어떻게 됩니까? 100살 살아간 것이 날라가 버려서 0가 되고 이 땅에서 살 수가 없죠. 0가 되잖아요. 어떤 여자는 남편 죽고 난 뒤에 그 관 위에서 춤을 추고 난리도 아니었죠. 너무 좋아서 그랬는지. 콜롬비아에 있는 어떤 여자가 남편 장례식 관 위에서 춤을 막 추는 거예요. 그게 화젯거리가 되었는데. 남편 없다 이 말이거든요. 2가 되어야 되는데 1이 되어서 아마 실성한 거 같아. 주님이 쳐다봐야 되는데 남편만 쳐다보고 살았던 모양이죠. 서로 똑같은 죄인끼리 응시를 한 거예요, 똑같은 죄인끼리.
주님이 쳐다봐야 그게 부활과 연결되어 있지, 사람이 쳐다보는 그것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죽은 돌 하루방인데 아이고 이쁩니다. 뭘 이뻐? 근접촬영해보세요. 어떤 사람이 이쁘다고 주장하는 사람 있잖아요. 근접촬영해보세요. 근접촬영하면 점들의 집합입니다. 사진 끄집어내서 확대시키면 점들의 집합이에요. 사람 피부가 있으면 이쁜 게 아니고 피부가 이렇게 돋아난 거예요. 그게 어떻게 뭐 잘못 되서 균형 있게 보이면 이쁘고 균형 안맞으면 못생기고 그런 겁니다. 진흙의 높낮이가 달라가지고 이뻐 보일 때가 있어요. 그러나 나이 들면 0이기 때문에 이게 뭉개진다고요. 뭉개지거나 안 그러면 류마티스약을 많이 복용하게 되면 안면근육이 마비된답니다.
이 세상은 차별이 없어요. 호빵이나 호만두나 똑같이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왜냐하면 부활의 세계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이쪽은 죄고 죄가 왕 노릇하고 저쪽 천국은 의가 왕 노릇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차별 없다는 것을 누구한테 이야기하겠어요? 주님이 우리 성도한테 그 임무를 맡기는 거예요. 높은 데서 차별 없는 게 아니고 끌어 잡아당기는 겁니다.
시간은 다됐으니까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뭐가 중한디. 이게 중요해요. 지분. 어차피 이 세상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이게 사물이에요, 전부다 돌멩이라고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아까 말했죠. 자기 영역, 나는 이만큼 살아왔다. (x,y)= 무슨 값이 나옵니다. 나는 70이다, 나는 80이다. 나는 1000이다. 이건희는 몇 조가 된다. 죄인, 사물에 있어서는 그 모든 거짓존재의 특징은 돈에서 나온 겁니다.
이 땅에 진리는 모든 세상, 돈,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했죠. 말씀으로 산다고 했는데. 이 세상은 반대로 뭐로 삽니까? 돈이 되게 하는 말씀으로 산다. 돈이, 인기되게 하는 말씀으로 산다. 세상권력을 쥘 수 있는 그런 말씀이어야 말씀이다. 왜? 나는 거짓되지 않기 때문에. 이게 바로 거짓말, 악마의 거짓말 아닙니까. 오늘 제목을 고쳐야겠다. 제목 아까 너무 어렵더라. 쉽게 . 이게 악마의 거짓말이거든요.
그러면 우리의 태생을 이야기해야 돼요. 우리의 태생은 뭡니까? 지분. 돈의 지분. 이거 뭐 반전인가요? 세상에 죄인은 어디에 관심이 있다? “어머님 제 지분은 어떻게 됩니까?” 딸도 그런 소리하고 아들도 “아버지, 제 지분은요? 저 촌에 있는 부동산 누구 줄 건데요?” 그것을 잘난척한다고 말을 안 하죠. 결정적 순간에 정종 한 병들고 명절날 오기 전까지는 입을 다물고 있어요. 술 취해야, 노래방 가서 술 취해서 한바탕 싸워야 이제 그게 나오고 그 전에는 참고 있어요. 참고 십자가가 어떠니 복음 어떠니. 이 따위 소리하고 있다고요.
항상 우리 자신은 바로 돈밖에 모르고 세상의 명예와 인기와 자존심밖에 모르는 그것을 어떻게 하라? 즐겨라 이 말입니다. 이상하게 끝나서 나도 찝찝한데. 그걸 즐기세요. 바로 나는 나를 주시하는 분이 있다고. 따라서 나는 나를 이제는 알게 되었다고.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차별이 없었습니다. 복음 아는 자나 모르는 자나 세상 원리대로 살 수밖에 없음을 충분히 인정하고 이제는 그것을 즐기고 그렇게 알게 된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