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20201225a 마가복음16장 8절(부활의 힘)-이 근호 목사
광주강의20201225a 마가복음16장 8절(부활의 힘)-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6장 1절-6절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눈을 들어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 다음에 가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니까 제자들이 무서워하고 아무 말도 못한 그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가 부활의 이야기인데 이 부활의 이야기가 둘로 나뉠 수 있어요. 하나는 내가 듣고자하고 믿고자하는 부활, 다른 하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활 이렇게 둘로 나뉘는데 성경에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활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부활이냐 하면 내가 믿을 수 있는, 내가 믿고자하는, 내가 희망하는 그러한 부활에 대해서 언급을 하죠.
내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활은 곧 나는 그동안 헛살았다 또는 공연히 살았다. 살아도 아무런 의미 없다. 간단히 말해서 그냥 ‘나는 그동안 헛살았구나. 앞으로 사는 것도 의미 없구나.’ 라는 식으로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바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활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자하는 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부활이 아니고 내가 믿고자하는 부활이고 이것은 ‘나 이제는 땡잡았다’ 뭐 이런 식의 부활. 아이고, 예수님 부활 알기를 잘했다. 예수님 부활 몰랐으면 나는 희망이 없었겠네. 이제부터 예수님 부활 믿고 살아야지. 이게 전부다 거짓부활입니다. 잘못된 부활이에요.
왜냐하면 여기 실제로 그 부활을 목격한 이 여성들은, 그들은 심히 놀랐고요. 그리고 부활소식을 전했던 그 제자들도 놀랐고 8절에 보면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무서워했고 놀랐다 이 말이죠. 그리고 11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소식과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그들이 “믿지 아니하니라” 되어 있죠. 믿지 아니하죠. 그러면 인간은 평소에 누굴 믿느냐 하면 나의 진실됨을 믿는 거죠, 나의 진실됨.
인간을 또 둘로 나누겠습니다. 첫 번째, 부활이 진실이냐. 이것에 대해서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난 게 진실이냐에 관심이 없고요. 두 번째, 부활을 믿는 나는 진실되냐. 여기에 관심 있어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도 그 부활을 믿는 내가 창피스럽지 않기를 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 순간에 여자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놀랐고 무섭고 떨었죠. 무섭고 놀랐고 떨었다는 말은 지금까지 시간에 따라서 공간에 따라 인생을 쭉 살아오면서 이 시점에 막달라 마리아가 이 시점까지 살았다 합시다. 나이가 40, 50쯤 된다 합시다. 살았는데 이 시점에서 누굴 만났느냐 하면 예수님이 부활했던 그 시점을 만난 거예요. 만난 순간 내가 알던 ‘나+부활’ 이고 싶은 거예요. 왜냐하면 부활이 진실되고 내가 그동안 살아온 것도 진실되고 싶은데 부활을 만나고 여기서 무서워 떨었다는 말은 이 부활로 인하여 내가 온 노선과 이 부활의 노선이 핀트가,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살아온 것은 전부다 헛살아온 거예요, 헛살아온 것. 그것도 아무 의미 없이. 살아도 그만 안 살아도 그만.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내 존재 자체에 의미를 준 게 후회스러워져. 내 존재에 의미를 준거. 나는 뭐 애를 둘이나 키우고 나는 아파트에 살고 이런 식으로 살아온 이 자체가 원망스러울 정도에요. 그동안 뭐하고 살았어요? 그동안 도대체 내가 왜 살았지? 앞으로도.
그러니까 부활이 있는 순간에 이제는 부활 믿고 부활 장착해서 부활까지 알아있는 똑똑한 사람으로 살아야지 하는, 부활이 진실이 아니고 나의 진실을 붙잡고 있는 이 사람은 거짓부활의 지식을 장착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여자들은 예수님 부활의 그 현장을 보는 순간 그들이 살아왔던 것은 공연한 것이고 무상하기 짝이 없는 거죠.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내릴 결론은요. 부활은 우리를 다시 원위치로, “네 원래 있던 지점으로 돌아가.” 라고 되돌려 보내는 기능을 하는 겁니다, 부활은. 네가 살아서 예수님 만날 생각하지 말고. 네가 있던 자리는 죽을 자리라는 사실. “네가 죽었던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갓! 안 살아도 되고 안 태어나도 되는 존재로 돌아가.” 이겁니다, 부활이.
우리가 좀 일찍 시작했기 때문에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제가 다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부활은 두 종류가 있다 했죠. 첫째 한 종류는 뭐냐 하면 내가 기대하는 부활의 소식. 그거 하나 있고 또 하나는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살아온 것을 공연한 헛짓으로 만드는 부활. 우리가 예상 못한 부활이죠.
인간은 항상 부활이라는 이런 희망적인 소식에 대해서 기대하겠어요, 기대하지 않습니까? 기대하죠. 기대한 나를 헛짓으로 만드는 부활이 진정한 부활입니다. 내가 부활해서 이제 주님과 영원히 천국가야지. 그것이 헛짓, 헛생각이라는 것을 언급하는 부활이 진짜 부활이에요.
그럼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그 여자들이 깜짝 놀랄 만큼 예상도 못한 부활을 주셨느냐. 이걸 구약의 언약과 관련해서 이렇게 쓰겠습니다. ‘진실된 거짓말’ 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진실된 거짓말에 대해서는 제가 조금 전에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무엇이 진실이냐. 여기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자기를 위장하는데 사실은 뭐냐 하면 무엇이 진실된 나인가. 관심은 여기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진실을 알아야 될 이유가 나는 필히 진실되어야 되고 나는 공연히 살아서는 안 되는 괜찮은 존재이어야 하기 때문에. 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야곱이었습니다. 야곱이 거짓말하는 이유가 뭐냐. 거짓말하는 이유는 야곱 본인이 야곱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어떤 야곱? 내가 나다운 야곱. 야곱이 야곱다운 나. 야곱에 합당한 나. 그 야곱에 합당한 나는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복을 따내는 그러한 복 받은 내가, 장자가 되는 내가 나에게 합당한 나다움에 제대로 딱 먹혀들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나의 나다움을 위해서 거짓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내가 진실됨을 증거하는 하나의 과정이고 경로이기 때문에 그거는 뭐 전혀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그 야곱이 야곱다운 그것이 본인 자체가 거짓이라는 것을 본인이 알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밤에 얍복 강가에서, 창세기 32장에서 밤에 천사가 왔을 때 비로소 야곱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가 존재하는 그 자체가 거짓된 존재인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거짓된 존재. 비교대상이 되니까. 지금 천사하고 야곱하고 씨름했잖아요. 싸웠잖아요. 부딪침이죠. 부딪침.
여러분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에 기온 보게 되면 온도가 -5도다. 그러면 아침에 산책 갈 때, 운동갈 때 -5도에 맞는 옷을 입겠죠. 그런데 막상 나가보니까 바람이 불어요. 그럼 분명히 -5도인데 체감온도가 -10도까지 내려가겠죠. 그럼 왜 -5도인데 -10도처럼 느껴지는가. 나하고 바람하고 부딪침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하고 바람하고 부딪쳤어요. -5도가 -10도 되는 게 부딪침 때문에.
그런데 인간은 부딪침을 고려 못하는 겁니다. 자기는 어떤 진공상태에서 내가 여기 있으면 내가 할 수 있는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누가 와서 부딪친다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오게 되면 내가 잘해주면 되고 내가 좋게 잘해주면 된다는 거죠. 부딪침을 생각 못하는 거예요.
이 집에 손님 오니까 집사님께서 식혜를 딱 준다 이 말이죠. 이거 부딪침입니까? 식혜를 주시는 거예요, 여기 식혜 있잖아요, 보석 같은 식혜. 식혜 해가지고 잡수세요. 이거하고 손님 오니까 식혜를 들고 그 사람 면상을 내리쳐버리는 거하고. 아나, 식혜 먹고 꺼져라. 이거하고 다르겠죠?
야곱과 하나님의 관계가 야곱은 야곱이 대접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는 관계라고 생각한 거예요. 자기는 하나님께 공손하게 대접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본인의 그러한 행동이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거짓됐다는 것을 야곱이 상상도 못한 거죠.
그런데 결과적으로 야곱은 식혜 들고 천사의 면상을 때려 치는 그런 결과를 낳은 겁니다. “어디 감히 진실된 나를 공격해! 네가 내가 누군 줄 알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야곱이야! 너 야곱 이름 들어봤어? 나 야곱이야, 야곱!” 이렇게 나온 거예요. 천사입장은 이래요. “야곱이냐?” 야곱이라는 것은 거짓됨의 전형으로서의 야곱이라는 거예요, 그 야곱이. “네가 거짓을 모르지? 네가 거짓이야, 네가!” 네가 거짓이라는 거예요.
야곱이 이걸 알았어요. 아, 하나님이 나에게 주려고 하는 복은 이 거짓됨을 드러내고 거짓됨에 대한 합당한 조치, 그건 죽여 버리는 거예요, 나를 죽이려고 오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복을 받고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죠. 이스라엘로 바뀌어도 하나님이 나를 죽였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요. 내가 죽는 그 현장이, 하나님과 내가 부딪치는 현장이, 싸우는 그 현장이 바로 진실이 나타나는 유일한 현장이 되는 거예요. 진실이 나타나는 유일한 현장.
인간이 생각하는 부활, 그 부활을 생각하는 나 사이에 내가 생각하는 부활은 부활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그 현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 여자들이나 제자들로 하여금 어디로 보내느냐. 죽은 네가 처음 있을 자리는 살아있어서 부활을 만나야 될 나의 자리가 아니고 너는 죽어있어야 될 자리라고 돌려보내는 거예요. 돌려보내는 그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바로 십자가 자리에요.
그러니 부활은 우리를 어떻게 해야 진짜 부활이다? 우리로 하여금 부활 봤다고 좋아들하는 그 자리가 아니라 부활이 우리를 다시 십자가 죽음자리로 가슴 딱 밀어가지고 “저리 가”하고 밀어내는, “죽는 자리가 네 자리야” 라고 돌려보내는 그 자리가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럼 돌려보내는 자리가 십자가 자리죠. 사람들은 십자가 다음에 부활로 여기잖아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부활을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어디로 돌려보냅니까? 예수님이 겪었던 경로, 십자가 진 자에게만 부활이 주어진다는 이 경로, 공식을 고정화시키기 위해서 제자들을 십자가에 죽게 만들죠. 누가 떠밉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십자가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는 자가 부활을 바라보게 되면 이것은 거짓된 부활이죠.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진실되다? 이게 아니에요. 어떤 부활도 우리가 살아있는 한 그것은 진실된 부활이 아니고 왜곡되고 거짓된 거예요. 그 거짓된 게 아까 이야기했죠. ‘부활은 실제냐’가 아니라 ‘부활을 믿는 나는 참으로 믿을만하냐’ 이거 따지는 거예요.
자, 지금까지는 아주 쉽게 이야기했는데 지금부터 이제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A를 선택할 것인가 B를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선택을 할 것인가 선택을 말 것인가’를 인간은 따지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고집은, 선택 이전에 나라는 존재가 필히 ‘반드시 나란 존재는 여기 있어야 마땅해’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 천국갈래, 지옥갈래?” 물으면 천국갈라고 할 인간은 없고요. “그 선택을 저한테 강요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 인간의 인간다움의 진실이고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예수그리스도와 비교할 때 그것이 거짓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진실만, 늘 참되고 옳고 진실만 찾는 거짓말쟁이에요. 이게 인간입니다. 진실만 찾으니까 본인이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까, 인정 못합니까? 인정 못하죠. 인정을 못하니까 주님을 자꾸 상대하려고 하는 거예요. ‘저 예수님을 계속 내가 믿을까 아니면 믿지 말까? 저 예수를 믿는 선택을 할까 아니면 예수님을 버리는 카드로 생각하고 내가 버리는 선택을 할까?’ 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더 나아가면 ‘예수님을 믿을까 말까하는 그 선택을 내가 구태여 할 필요가 있겠어?’ 까지 나가는 거예요. 제가 어렵다 했죠.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요.
그러니까 이래 됐든 저래 됐든 간에 이미 무엇이 진실로 확보되어 있습니까? 내가 여기 있음은 진실로 확보되어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내가 나에게 항상 우상이 되어 있어요. 자기가 이미 진실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무엇을 선택하거나 할 때는 믿을 거 아닙니까. 그 믿는 내용을 누구 쪽에서 일방적으로 변경하느냐 하면 내가 믿을만한 것으로 내가 변경시켜요, 내가. 내가 변경시킨다고요.
어떤 목사님이 무슨 설교하게 되면 교인이 와서 “목사님, 설교 어려운데 내가 알아듣도록 설교해주세요.” 이게 뭔 뜻입니까? 내가 알아듣도록 설교해달라는 것은 믿을 수 있는 내용은 내가 알아서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 그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당신 말 믿고 믿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떤 내용을 믿을 때는 ‘나는 항상 따질 것 없이 항상 이유 없이 무조건적으로 원천적으로 나는 진실되다’를, 내가 나를 증명하고 싶은 거예요. 증명하려면 내가 믿고 싶은 내용이 있을 경우만 긁어모아야 그 긁어모은 그 내용은 이미 진실한 걸로 내가 판정 내렸기 때문에 진실된 것만 끌어 모았으니까 자동적으로 누가 진실된 겁니까? 내가 진실된 겁니다. 내가 진실스러운 거예요. 모든 인간은 다 그렇게 살아요.
지금 이 여인 3인방이 예수님의 무덤에 왜 갔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신체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향품이나 바르러 갔잖아요, 여기 3절에. 무덤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의 시신 닦아주고 잘 있는가 확인하고 싶은데 문제는 여성들이 돌을 어떻게 굴리느냐 그것 때문에 고민하면서 갔죠.
그런데 돌은 이미 열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누가 있었습니까? 흰 옷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아있었죠. 천사가 와 있는 겁니다. 물론 이 천사가 야곱에게 찾아온 천사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있지만 어쨌든 하나님 편에 속한 피조물이 앉아서 여성들과 함께 대화하십니다. 그는 살아났고 여기 계시지 않는 거예요. 여기 계시지 않는다.
이거는 쉬워요. 예수님은 계시지 않는데 어디 계시지 않아요? 여기 계시지 않죠. 그럼 여자 3명이 예수님 만나려면 어디에 계시지 않아야 돼요? 여기 계시지 않아야 돼요. 여기 계시지 않는 방법은 뭐냐 하면 그들이 십자가에 죽는 방법 외에는 없어요. 그들이 십자가 죽을 때 그들은 여기 계시지 않는 자신들이 되고 여기 계시지 않으면 주님과 함께 있겠죠.
그럼 여기 계시지 않으려면 여기 계시지 않는 이유가 타당성이 있어야 돼요. 왜 나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가. 타당성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게 뭐냐 하면 여자들은 모두 태어날 때부터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에. 죽어 마땅하기 때문에.
인생 살아도 거짓말로부터 시작해서 거짓말로 인생 끝나는 거짓말쟁이이고 얼마나 거짓말쟁이인지 태어난 것부터 해서 거짓말을 줄줄 내뱉으면서도 거기다 무슨 거짓말을 합집합으로 또 만들어냈습니까? 나는 진실돼. 나는 살아 마땅해. 나는 반드시 진실을 찾을 거야. 옳은 선택이 나를 구원할거야. 나는 이제 천국 선택할거야. 나는 지옥 안 갈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자신이 거짓됐다는 사실을 모르고 진실과 연결되리라고 하는 그 착오를 계속 해온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여성들로 하여금 다시 십자가로 돌려보내게 되면 그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죄의 개념이 진실된 죄의 개념과 거짓 개념들이 십자가에서 드디어 시작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지만 사도바울이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고 외치고자 하는 것은 뭐였습니까? 십자가였죠. 부활이 아니고 십자가였죠. 구원의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부활에 있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 있죠. 오죽했으면 그걸 미련하다고 했겠습니까. 오죽했으면 그걸 어리석다고 했겠습니까.
인간들이 거짓말쟁이이니까 거짓말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할 게 없으니까 자기 존재를 위장하고 맨날 위조하니까 주님께서 그들을 십자가로 돌려보내는 방법은 그들로 하여금 화나게 만드는 거죠. 분노하게 만드는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당신이 메시아라면 우리가 알아듣는, 우리가 따져서 납득이 될 수 있는 그것을 알려다오. 늘 예수님한테 요구하는 것은 그거였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그것을 간파하시고 너는 내가 누구냐, 진리가 무엇이냐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 믿는 내가 진실되다는 그것에만 관심 있지. 그게 바로 우상이었어. 그게 우상이야. 따라서 너희들로 하여금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 그것만 내가 너에게 언급한다. 하고 계속 이야기하신 거예요.
그 중에 한 가지 그런 식으로 주께서 답변하는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하는 말은 예수님 부활 만나면 살아온 것이 다 공연히 산 것이고 이제는 안 살아도 된다는 그런 느긋함이 있어줘야 돼요. 이게 진짜 부활의 영, 주님의 영을 바람맞은... 아까 성령의 찬바람 맞으면 체감온도 내려가죠. 이 바람이 성령의 바람 아닙니까. 우리 자신을 확 아는 거예요.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11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 대목이요. 다시 한 번 읽어보면 12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고” 이것은 얼추 이해가 되죠. 밥을 먹는데 반 있는데 짬뽕 보통 시켰는데 주방장이 와서 면을 더 곱빼기로 주게 되면 있는 자는 더 받겠고. 아 이 경우가 이 경우구나. 되는데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되어 있죠.
자, 빼앗긴다는 말은 상당히 좋은 사이가 아니고 껄끄러운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없는데 뭐 빼앗길 것도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은. 없는데. 예수님의 말투가 이래요. 예수님께서 말씀을 던지게 되면 그 말씀은 “너는 너 자체가 전부다 구라야. 거짓말이야. 너는 김구라야 김구라. 너는 이구라고. 너는 완전 거짓말이야.” 라고 지적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십자가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십자가로.
우리는 아담에서 태어났죠. 아담에서 태어났잖아요. 주님은 아담에서 태어나게 하지 않고 십자가로부터 새로 태어나게 하는 거예요. 아담에서 태어나는 게 아니고 십자가에서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겁니다. 아담에서 태어나게 되면 우리가 육신을 가지게 되지만 십자가에서 태어나면 이건 태어남부터 죄인입니다. 십자가로 가는 건 죄인으로 태어난 거예요. 죄인임을 인지할 수 있는 거예요. 죄인임을 의식할 수 있는 거예요. 내가 죄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십자가로 돌려보내는 거예요. 아담으로 돌려보내는 게 아니고.
그러면 일본말을 써서 죄송하지만 ‘요이 땅’ 하는 말이 있죠, 요이 땅. 옛날 운동회할 때 선에 딱 서서 ‘요이 땅’ 하는 거 있잖아요. 하나님은 성도들에게는 어디서 요이 땅 하느냐. 출발하느냐. 스타트하느냐. 십자가로부터 요이 땅하는 거예요.
이미 십자가에 있는 자에게는 더욱더 너희들을 죄인됨으로 만들겠고. 인간은 거짓되지만 이 언약, 하나님의 계시, 언약은 진실되기 때문에 진실된 것을 더 받겠고 아예 십자가가 없는 자는 이 아담이라는 것조차도 회수를 해버리는 겁니다. 회수할 때 “주세요” 이게 아니고 강제로 빼앗아버리는 겁니다. 빼앗겨도 할 말 없어요. 있으나 없으나 다 헛짓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해보게 되면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십자가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어디서 힘이 나옵니까? 부활의 힘. 이게 부활의 힘이에요. 일반 십자가 성령이 없는 사람에게 부활의 힘은 무엇입니까? 죽었던 나를 다시 살려내는 힘이죠. 이게 얼마나 괴물적입니까. 드라큐라를 죽여 놨는데 드라큐라가 다시 살아나 보세요.
내가 거짓말쟁이죠. 그럼 나는 괴물이죠. 괴물 살려놓으면 이게 기가 차요. 이건 좀비 되죠. 기가 차죠. 다시 이 괴물을 없애야 되는데 괴물을 부활시키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괴물은 없애야 되잖아요. 다시 십자가로 돌려보내야죠, 제자들을 다시 십자가로. 제자들은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예수님 남고 나머지는 다 도망쳤잖아요. 도망쳐도 내가 봐 줄게. 구원할게. 이게 아니라 도망친 자를 도로 어디로 돌려보냅니까? 전부다 십자가로 돌려보내는 겁니다.
우리 국민학교 때 선생님께서 분명히 체육시간에 체육복 입고 공을 차든 뭘 하든 운동장에서 놀라고 하고 선생님은 볼 일 있어서 집에 잠깐 갔다 왔는데 아이들이 전부다 체육복 안 입고 집에서 입고 온 옷 그대로 입고 있으니까 애들을 다시 불러내서 어디로 다시 집어넣습니까? 교실에 가서 전부다 체육복 갈아입게 하죠. 체육은 체육복입고 하는 거야. 하죠. 체육복 없는 아이는 집으로 돌려보냅니다.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아버립니다. 집에 가.
제자들로 하여금 자기가 거짓되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 인생을 진실되게 살았기 때문에 여기다가 진실된 예수까지 보태어버리면 나는 진실된 채로 천국 간다고 그렇게 종교적 희망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다시 너의 원천으로 가란 말이에요.
내가 십자가 진 것은 바로 ‘너의 원천이 이렇다’ 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떠나가도 도망쳐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가셔서 사흘 동안 대기했잖아요. 그때 누가 살려줬습니까? 아버지의 영, 성령이 와가지고 죽은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켰잖아요. 똑같은 체험을 하라 이 말이에요. 똑같은 과정을 밟아야 된다는 겁니다.
죽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이거 뭐 다 아는 이야기지만 예수님은 죽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가 아니라 죽은 자만이 나를 죽일 수가 있는 거예요. 먼저 죽은 자만이 나를 죽일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자기를 못 죽여요. 이게 사단났어. 이게 문제에요. 자살은 할 수 있지만 자살하는 순간에도 지는 ‘난 못났어’ 하지 않잖아요. 잘나서 죽잖아요, 잘나서. 이게 문제입니다.
내가 참으로 거짓됐다는 것을 평생을 아무리 공부하고 철학을 공부해도 공부한 이것 자체가 거짓되다는 자체를 알아낼 재간이 없네. 재주가 없어요. 그렇게 나훈아는 진짜 소크라테스한테 물어가면서 테스 형, 세상이 왜이래. 소크라테스가 말한 핵심 이야기가 뭡니까? 너 자신을 알라했죠. 너 자신을 알라하는 본인도 몰라요.
나를 거짓됐다고 비교하셔서 오셔서 찬바람 부딪치듯이 부딪쳐야 되는데 야곱처럼 부딪쳐야, 야곱 이름 자체가 사기꾼, 거짓됨이잖아요, 거짓됨을 알려야 되는데 소크라테스는 그게 없어요. 테스 형 찾아봐야 없어요. 테스 누나 찾아봐도 소용없고. 내가 누군지를 알려줄 사람이 아무도 없네. 성령의 바람이 불어야 되는데.
그렇게 율법의 흠이 없다는 사울이라는 사람도 다메섹에 내려가면서 예수님을 만났죠. 사울이라는 사람과 예수님이 만났을 때 여기에 껄끄러움이 있잖아요.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오직 하나님중심주의거든요. 누구를 핍박해요? 아무도 핍박 안했어요. 오직 하나님 일념으로 살아온 거예요. 왜? 하나님만이 나의 진실됨을 증명해 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의 진실됨을 증명해준다는 희망 때문에 하나님이 좋은 거예요. 내가 좋은 거예요, 내가. 자기가 우상이기 때문에. 내가 이 정도로 좋은 만큼 좋아해줄 사람이 없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기대면서 자기 잘났다 하다가 이게 부딪침, 충돌, 그리스도와 충돌이 있죠. 핍박이죠.
한번 물어봅시다. 그럼 그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까, 십자가 지신 주님을 만났습니까? 사도바울로 하여금 어디로 돌려보냈어요? 십자가 자리로 돌려보냈죠. 그래서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산다. 나를 죽이는 주님이 진짜 부활하신 주님이다 이 말이에요. 나를 죽이신 주님이. 나를 죽이는 일을 하시는 분이 진짜 살아계신 주님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살아도 의미 없고 더 살 이유도 없죠.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자유’라는 겁니다. 우리 자신의 부담에서, 짐에서부터 우리가 해방되는 겁니다. 내가 의로워야 되고 나는 구원받아야 되고 나는 진실되어야 된다는 그 악마가, 괴물이 뒤집어씌운 그 무거운 짐에서 우리는 이제 가벼워지는 거예요. 껍데기만 남았어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아요.
“너 자신을 알라”던 소크라테스가 만약에 여기 앉아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나는 내 자신을 아는데요.”, “뭡니까?”, “나는 거짓되다.” 이렇게 하죠.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하면 “언약의 완성상태에서 알았습니다.” 언약의 완성상태가 뭡니까? 약속의 완성상태가 뭐죠? ‘다 이루었다’가? 십자가에서 다 이룬 거죠.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용할 수 있는 의미는 다 드러날 대로 다 드러난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은 참 진실을 추구하는 거짓말쟁이. 그렇게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진도 나가 봅시다. 우리 자신이 십자가에서 요이 땅 출발합니다. 성령의 바람 또는 부활의 바람에 의해서 십자가로 밀려서 십자가에서 사도바울처럼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이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x축-시간, y축-공간이 나오죠. 하여튼 이 데카르트의 좌표만 나오면 사람들은 골치아파해요. 그렇게 여러분들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아주 쉬운 것 하겠어요. x축과 y축일 때 시간, 공간으로 인간은 이 세상을 생각합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으로써 자신을 규정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의 기억, 여러분들 일기장을 살펴보세요. 무슨 내용 나옵니까? 오늘은 몇 일이다. 시간 나오고 공간 나오죠. 시간과 공간을 구성해서 여기서 기분이 나와요. 감정 또는 어떤 사람은 정동(情動)이라고 어려운 말로 하는데 그냥 쉽게 말해서 기분. 오늘은 비가 왔다. 오늘 꿀꿀하다. 이런 거. 갑자기 옛 생각이 나네. 이렇게 되죠, 전부다. 옛 생각이 난다. 고등학교 때 생각하면 풍경 나오겠죠. 공간이죠. 거기서 뛰노는 선생님, 친구들 모습 보이겠죠. 뭡니까? 시간이죠. 그때 그 시간. 그래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 사이에서 규정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항상 시간과 공간으로 이렇게 축약하는 이유가 있어요. 인간은 사물+기분(감정)이기 때문에. 인간은 사물에다가 기분이 엎쳐진 게 인간입니다. 사물은 인간의 육체, 신체를 얘기하고 인간의 신체에다가 기분이 얹혀졌거든요. 이 신체를 살리기 위해서 인간에게 돈이 필요한 거예요. 악마가 이 점을 노린 겁니다. 결국 돈이 있어야 인간은 살고 돈이 있으면 인간은 기분이 업(up)된다는 거예요. 이게 가장 기본이에요, 기본.
예를 들면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할 때, 남편이나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냥 복음 전하지 말고 분명히 사전에 꼭 해야 될 게 있습니다. 뭐냐 하면 우리 집하고 땅하고 지분을 누구 걸로 할 건지 분명히 해야 돼요. 아파트 명의를 누구 걸로 하고 당신 죽고 난 뒤에 지분을 어떻게, 보험금을 누가 타느냐 분명히 한 뒤에 복음을 전하세요. 괜히 그냥 복음 전해버리면 복음 듣는 대신 지분을, 돈을 그쪽에서 가져갈 수가 있다니까요. 가장 기본적인 것이 흔들리면 안돼요.
아무리 착하고 복음적으로 이야기해도 반드시 뭐는 확보되어야 돼요? 네 돈과 내 돈은 분명히 확보되고 난 뒤에 복음을 전하세요. 야, 진짜 기쁜 소식 전한다, 정말. 크리스마스 날에. 인간은 거짓되다는 말은 본인이 본인을 어떻게 주장할 수가 없어요. 본인은 기분일 뿐이고 진실은 본인도 어찌할 수 없는 사물성이에요, 괴물성. 돈이 있어야 산다는 그 괴물성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본인이 복음으로 덮어도 안 덮여져요. 이게 없어지지 않는다고요, 죽을 때까지.
목사가 복음 실컷 전했는데 나와 보니까 빚이 5억이다. 이게 무슨 기쁜 소식이 되겠어요? 챙길 건 챙겨놓고 그 다음에 복음이죠. 이게 사물성이잖아요, 사물성. 좌표거든요. (x,y)=0에요. 이게 불교입니다. 인간은 죽고 나면 그만이라는 게, 0되는 게 불교에요. 그런데 복음은 뭐냐 하면 (x,y)=죄가 돼요. 시간, 공간하면 죄가 된다고요. 뭐 좌표라 해서 대단한 거 나오는가 했더니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불교에서 x,y좌표 인간의 존재는 그냥 0가 된다. 무(無)가 된다. 그냥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x를 공간의식으로 보고 y를 시간의식으로 보는 거예요. 의식 나옵니다, 의식. 현대철학에서는 공간의식, 시간의식 그 밑을 더 파보는 겁니다. 파보니까 여기 무의식이 나오는 거예요. 무의식은 그냥 혼돈이에요, 혼돈.
온도를 높여 펄펄 끓이면 죽 되죠. 쌀알이 죽 되어 버리죠. 어느 것이 쌀이었고 어느 것이 물이었다는 구분이 안 되죠. 혼돈 상태로 들어가 버리는 거예요. 시간도 녹아지고 공간도 녹아지고 인간도 녹아져서 혼돈상태니까 인간=짐승이 되는 겁니다. 인간=짐승이 되어야 짐승에서 진화되면 인간이 된다. 이게 바로 진화론 아닙니까.
이걸 최초로 언급한 사람이 있어요. BC5세기경에 아낙시만드로스, 터키 동부에 있던 철학자에요. 제일 큰 도시의 철학자가 아낙시만드로스, 한번 써볼게요, 이름도 어려워, 이 사람이 BC5세기경에 헬라의 철학자에요. 이 철학자가 3가지를 주장했는데 하나는 지구는 공중에 붕 떠있다. 그리고 인간은 짐승에서부터 인간으로 진화되었다. 진화론을 주장하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환경의 모든 변화는 태양의 물기, 수증기에서 비롯된다. 과학이 발달되기 전에 이러한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겁니다.
이 사람이 왜 이렇게 주장했는지 여러분들이 궁금하실텐데 그걸 말씀드리면 그 당시에 헤카타이오스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헤카타이오스라는 사람이 역사책을 찾는데 헤라클레스라는 옛날 유명한 반인반신 영웅이 있어요, 신화에. 케이프 테나로(Cape Tenaro), 그러니까 테나로곶이라는 장소에서 헤라클레스가 하데스, 죽은 자들이 가는 음부에 내려갔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거든요. 옛날에는 역사가 없었고 그 당시 전부다 전설이 실재했거든요. 그런데 헤카타이오스라는 이 역사학자가 실제로 테나로곶이라는 항구를 가봐서 뭘 조사했느냐 하면 지하통로로 내려가는 어떤 굴이나 길이 있는지 조사를 해봤어요. 없었어요. 그래서 그거 딱 하나해서 모든 전설은 구라라고 선언한 겁니다.
그 당시에는 신들의 세계에요. 신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던 시대에요. 설명하는 시대인데 아낙시만드로스나 헤카타이오스 같은 사람들은 모든 신화와 전설을, 종교적인 방식을 전부다 엎어버립니다. 인간으로 관찰하고 측정하고 인간으로 설명하는 그것만이 참으로 진실되다. 이렇게 했거든요.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뭐라고 합니까? 그렇게 진실되다고 하는 너는 진실되냐를 묻죠. 네 자신을 알라. 그러니까 분명히 눈으로 다 확인했는데 뭐는 확인 못했어요? 내가 진실되냐를 누군가 대조해서 확인시켜줄 사람이 없네. 확인시켜줄 사람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하면 됩니까? 10분 쉬어야죠.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