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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17강-암 5장 18-20절(깜깜한 날)201223-이 근호 목사자유게시판아모스

17강-암 5장 18-20절(깜깜한 날)20122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5장 18-20절까지입니다.

아모스 5:18-20

“화 있을찐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의 율법을 대하면서 상당히 희망적으로 이해를 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희망이 곧 하나님의 희망이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소망까지 하나님께서 그냥 들어주는 것으로 여겼던 겁니다. 그래서 인생에 있어서 환경이 어려울 때는 하나님이 도와주는 그날을 사모하기 마련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뜻대로 안되고 뭔가 인생이 힘들다 생각할 때, 자기 나라가 위태하다 생각할 때 여호와를 향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어서 빛의 그날이 오기를, 모든 것이 잘 되는 그날이 오기를……, 하고 그들은 그날을 그렇게 예상하면서 학수고대하고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희망을 제공하지 않는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희망적이지 않은 하나님을 믿을 이유도 없고 선택할 이유도 없지요. 그런데 여기에 아모스가 개입합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실상을 말해줍니다. 너희들이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충분히 아시는데 간절히 사모하는 그날은 여기 18절에 보면 “그 날은 어두움이요” 어두움의 날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현재의 어둠을 해소하겠다고, 거기서 한번 벗어나 보겠다고, 어둠에서 빛으로 모든 사태를 전환시켜 보겠다고 여호와의 날을 학수고대했는데 그러나 그날은 너희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 어두운 재앙의 날이 될 것이다, 라고 아모스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율법을 주시고 말씀을 주실 때 그 말씀을 놓고 인간의 예상과 경쟁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예상과 경쟁하는 그 증거가 19절에 나옵니다.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사자한테 물리는 것보다 사자를 피하게 되는 그 사태가 더 좋은 사태라고 예상했는데 곰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예상한 그 사태 희망적인 것이 오히려 지금 절망보다 더 절망스럽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요리조리, 마치 필드하키 선수가 공을 몰고 가듯이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그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정반대방향으로, 희망했던 그들에게 현재 상황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요모조모 하나님께서는 몰고 있습니다.

그리고 손을 벽에 대었다가 예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뱀에게 물렸다. 이것은 예상 못한 거예요.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 희망적인 하나님을 고대하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이 등장한 거예요.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얼추 통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하나님생각이나 내 생각이나, 물론 격차는 있겠지만 전혀 반대는 아닐 것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거든요. 전혀 반대는 아닐 것이다. “내가 떡을 달라하면 많이 주시지는 않지만 약간의 떡은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입을 벌려라. 채우겠다.” 했으니까. 입의 각도를 많이 벌리면 다는 안 채워주겠지만 요만큼이라도 채워주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의견이 틀어지는 그런 상극적인 대립적인 그러한 분은 아닐 것이다, 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한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자기가 하나님의 원수라는 생각을 못하고 설마 하나님이 악마처럼 닦달하듯이 우리에게 달려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20절에 보면 아모스는 그러한 이스라엘의 희망적이고 낙관적인 여호와의 날에 대해서 아주 단호하게 단언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이렇게 강조해서 거꾸로 되묻는 이런 형식은 결정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진짜 모습은 너희들에게는 일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 또는 아모스는 할 수 있으되 너희는 스스로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느냐, 라고 되묻는 겁니다.

20절에서 여호와의 날이 어두워서 빛이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호와의 날은 너희들 같은 인간을 상대할 때는 여호와의 날이 캄캄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 하는 뜻이에요. 캄캄함이 너희에게는 아주 적절한 여호와의 날이 된다는 겁니다. 절망적인 날.

하나님은 어두운 날이 되어야, 조금이라도 하나님에게는 빛이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러한 약간의 희망도 아예 너희들은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없어야 된다는 겁니다. 20절 말씀에 의하면 인간들은 전혀 생각지 못한, 인간들이 제대로 알지 못한 그러한 여호와의 날이 오는 겁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알았던 여호와 하고 전혀 상반되는 여호와가 여호와였다 그 말이지요.

“하나님이여, 제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만족하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백성이 되겠습니까?”라는 식으로 하나님 앞에 질문을 던지고 다가선다면 그 질문과 정반대편에 서야 된다는 거예요. 정반대편에 서 있는 자라야 나올 수 있는 질문은 어떤 질문이겠습니까?

‘아이고, 하나님 무서워라. 하나님 무섭다. 입 꼭 다물고 있어야지.’ 이것은 반대편에 서 있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조신해야지. 입도 뻥끗하면 안 돼. 하나님 생각하고 우리하고는 너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똑똑하다고 까불어야 봐야 하나님께서 우리 벌준다고 하면 우리는 끽 소리 못하는 거야. 그래 하나님께서 하시는 처분을 기다리자.’ 이런 정도도 아니에요. 소극적으로 물러선다고 해서 그걸로 여호와를 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소서.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희망을 주소서. 이스라엘이 이렇게 외세에 둘러싸여서 지금 파멸 직전에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잖아요.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테니 옛날처럼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약속에 따라서 우리에게 복을 주옵소서, 라는 기도가 너무 주제넘습니까? 너무 건방졌습니까? 그렇다면 입 다물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으라면 맞겠습니다.” 이정도로 많이 물러서고 많이 양보한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 뜻에 부합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하나님 뜻은 뭐냐? “네가 너 자신을 제거하는 방안을 제출해라. 결재서류 올려라.” 네가 너 자신을 제거하는 방안 또는 복안, 네가 너 자신을 버려야 될 이유를 낱낱이 적어서 이처럼 이러니까 저를 버려주옵소서, 라고 그런 방안을 제시하는 그런 질문만이 지금 여호와의 뜻에 부합됩니다. 합당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여, 저는 망해야 되는데 대체 어떤 식으로 하면 제가 망할 수 있습니까? 아, 저는 망하고 싶어요.” 그러한 제안을 하라는 말이자 그게 하나님의 본뜻과 합치된다 그 말입니다.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교회 나오지 말고, 복 받기 위해서 교회 나오지 말고, “도대체 어떤 식으로 제가 망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드리겠습니까? 진심으로, 그것을 진심으로~, 진심으로 ‘내가 망하는 방안 방법이 어떤 게 있습니까? 어떤 것을 준비해 놓았습니까?’ 그런 심정으로 교회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코로나 거리두기 참여한다고 전부 다 “잠시 교회 나오지 말고 집구석에 가서 쉽시다.” 그런 마음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제가 이 생을 끝낼 수가 있습니까?” 그렇게 기도했던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께 아모스를 통해서 이런 식으로 뜻을 전달한 이유는 하나님의 그 심판의 날, 캄캄한 재앙의 날, 파멸의 날, 자기 백성을 파멸하는 날은 그냥 일방적으로 정해놓고 파멸한다, 그게 아니라 너희들의 행동 하는 것을 봐서, 그 추이를 봐서 연동해서 너희를 파멸시키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상당히 어려운 이야기에요.

“너희들 백날 설쳐대 봐야 나는 너희들 멸망하기로 작정했어.” 그게 아니고 너희들 하는 것을 봐서 너희들을 멸망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를 죽여주옵소서.” 할리는 없을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아모스의 말을 듣고 그들은 온갖 재앙에서 피할 수 있는 모든 방안을 다 끄집어냈지요.

기도한다든지, 금식한다든지, 회개한다든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모면할 수 있는 그런 방안들을 이 아모스가 이야기하면 거기에 반응해서 인간이 끄집어낼 수 있는 모든 대비하는 방법을 끄집어내겠지요. 그 대비, 우리를 이 절망에서 심판에서 모면하고자 하는 그 방식으로 인하여 그들은 더욱더 혹독한 멸망을 유발시키도록 하는 방식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도적같이 주님이 재림하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대비해서 신앙생활 잘하자.” 가까운 주유소 근처로 이사를 해야 돼요. 왜? 빨리 기름 준비해야 되기 때문에. 기름 준비해서 어리석은 여자처럼 하지 말고 지혜로운 여자처럼 대비하자, 라는 방식을 인간 쪽에서 끄집어냈다면 그것은 마치 사자를 피하려는 짓거리가 되고 그 짓거리, 예상 못한, 내가 살고자 하는, 구원받고자 하는 그런 짓거리를 했다는 이유 때문에 더욱더 멀어지는, 더욱더 절망을 가중시키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캄캄한 날 심판의 날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설치면 설칠수록 ‘이것 봐라. 살려고 꼼지락 거리는 요것 봐라. 고래? 그런 식으로 네가 살고자 했지? 내가 그거 기다렸다는 듯이 무산시켜 줄게.’ 내가 나를 구원시켜서 천국 가는 어떤 방안, 예수를 믿든, 십자가 피를 온몸으로 찍어 바르든, 피 속에 풍덩 스파 하듯 집어넣어서 목욕을 하든, 그 어떤 방식을 사용하면 그 방식과 연동해서 그 방식이 전혀 먹히지 않고 통하지 않는 방식을 하나님께서는 준비해주시는 겁니다.

정신머리가 잘못됐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처음에 인간들이 선악과 따먹을 때에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말씀을 할 때 악마가 부추겨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죽으리라, 하는 그러한 문장, 그 말씀 그 자체를 없애버리면 죽음도 같이 날라 가버린다는 겁니다.

선악과를 따먹어서 없애버리면 죽음도 같이 날라 가는 거예요. 그게 악마의 아이디어고 거기에 동조한 인간의 아이디어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식은 뭐냐? 죽으리라, 는 것은 영원부터, 창세전부터 이게 살아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인간의 생존보다 앞선 것이 죽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죽음이라는 조항을 낙원에다 집어넣은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이 죽어야 일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인간의 사적인 의견은 뭐냐 하면, 내가 죽으면 나에게 있어서 내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내가 최종의미인데, 나 자체가 최종의미인데 내가 죽어버리면 아무리 하나님이 잘되어도 나는 손해 아니냐, 나에게 돌아올 이익이 없지 않느냐, 죽어버렸는데 무슨 이익이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악마의 생각입니다. 악마는 하나님의 원대한 그 계획에 대해서 자기가 종속되는 식으로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 거예요. 일방적으로 종속되는 식으로, 끌려가는 식으로, 주도권이 없는 식으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을 악마가 대단히 싫어한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반기들고 반항한 거예요. 그 마음을 인간이 그대로 물려받은 거예요. 악마에게 사주 받은 겁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죄지었다고 심판하는 것, ‘오케이, 좋아.’ 하나님이니까, 창조자니까 좋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나는 심판받아서 나에게 돌아올 이익은 뭡니까?’ 이렇게 뒤에 덧붙이고 따지고 싶은 그 마음이 딱 따라오는 거예요. 아까 기도제목 제시할 때 언급한 대로 나는 내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나는 내 안전이 최우선이에요.

나는 나다움이 계속 유지되는 이것은 논리 이전의 문제에요. 이것은 본능의 문제에요. 본능성, 우리는 이 본능이 깔려 있어요. 따라서 하나님의 율법을 주고 하나님의 약속을 주니까 그 약속가지고 약속의 마지막에 어떠한 괜찮은 희망적 소식이 있는가를 귀담아 듣고, 그 괜찮은 하나님의 희망적 소식이 마치 나에게 고스란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꿈을 꾸게 되는 겁니다.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가 승리하는 날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호와의 백성이라면 그 여호와의 승리가 곧 나의 승리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괜찮은 영원한 생명이 보장되니 나는 땡 잡았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이니까 약속이 자기에게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랐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하고는 상대를 안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상대자는 하나님이 따로 챙겨놓은 거예요. 그분이 와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우리 인간, 이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상대자가 아니에요. 약속하지를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인간하고 약속한 바가 전혀 없어요.

하나님은 아브람과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약속하지요. 그런데 아브람입장에서는 아브라함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아브람에 있어서 아브라함이라는 존재는 아브람이 죽어야 비로소 그 죽음의 현장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브라함이에요. 야곱은 이름이 야곱이에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야곱은 상상도 못하고 예상도 못한 겁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약속한 그것을 야곱에게 줄줄 알았어요. 이스라엘에게 주는 것이 아니고 지금 살아 있는 나에게 줄줄 알고 아주 신났어요. “내가 다시 벧엘로 돌아오면 십일조 드리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아주 기분이 업됐어요.

그런데 그 날 밤에, 뭐든지 밤에 이루어져요, 그 날 밤 얍복강, 그 날 밤 미지의 사나이가 야곱을 공격합니다. 야곱은 야곱의 속성을 발휘하지요. 왜? 나의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자기를 공격한 그 인간을 죽으라고 공격했어요. 다시 말해서 나는 살아야 마땅하고, 나를 공격한 너는 죽어야 마땅하다는 그 의지가 유감없이 발휘된 거예요. 이게 야곱의 속성이고 본능입니다.

그 야곱의 본능이 교회 제일 앞자리에서 새벽기도 할 때, 우리교회는 새벽기도 없습니다만, 그렇게 새벽기도 할 때 그 모든 기도의 단어 안에 그게 들어 있어요. 나는 살아야 마땅하고 나를 공격하는 너는 누가 되었든 죽어야 마땅하고. 그게 야곱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한 그 야곱, 브니엘이라는 그 장소, 얍복강 그 장소를 통해서 ‘나를 죽이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구나. 나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고 나를 죽이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구나.’ 하는 것을 그는 알게 됩니다.

내가 죽어야 주의 일이 돼요. 왜? 나는 방해물이니까. 주님이 주시는 그 여호와의 날, 그 약속은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 하면, 이 약속을 방해하는 세력을 인간들을 통해서 전부 다 그걸 뽑아내는 거예요. 인간들이 하는 모든 행세, 태도, 그 인간들의 태도는 아까 말씀드렸어요. 인간은 희망하고 꿈을 꾼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지는 순간 사라지게 되어 있어요. 깨지기 위해서 꿈꾸는 거예요. 그리고 낙담하기 위해서 인간은 희망을 품는 것이고. 그래서 자꾸 인간은 주변의 상황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자기 잘되는 쪽으로 하다 보니 자꾸 꿈으로 기어 들어가고 꿈을 꾸고 희망을 갖는데 그걸 통해서 이 세상이 놀음판이 된 거예요.

물론 판돈 거는 놀음판. 판돈 거는 놀음판을 아주 고상하게 말해서 투자, 또는 주식하기, 그런 겁니다. 생업에 종사하기. 생업에 종사해 보세요. 청소년 같으면 부모가 주는 돈 가지고 살지만 만약에 스스로 살아가 보면 이 세상은 한마디로 말해서 그냥 놀음판입니다. 판돈을 내지 않으면 돈을 벌수가 없어요. 돈 놓고 돈 먹기에요. 산에 가야 범을 잡아요.

그러니까 몸도 마음도 다 망가지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약간 길지만 읽어보겠습니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정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고 싶다.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놀고 있네. 객기지요. 오기입니다. 조 용필이 불렀던 노래 의 나레이션 부분이지요. 이거 뭐하는 짓이에요? 지금 놀음판에서 돈을 못 땄다는 이야기에요. 그 쉬운 말을 이렇게 고상한 말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이라는 그 게임판, 놀음판에서 돈을 못 딴 거예요. 내 꿈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또 꿈을 꾸는 거지요.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또 꿈을 꾸는 거예요.

교회도 다니고, 또 어떤 사람은 사주를 보는데 사주라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사주, 살고 싶은 거예요. 살고 싶은데 살다 보니 놀음판에서 돈 잃고 자기 뜻대로 안되잖아요. 그 상처 나고 멍든데 파스 붙이듯이 하는 그것이 사주보는 거예요. 나는 상처 안 입은 척. 왜? 사주 자체가 어떤 희망을 주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그들은 만날 교회 와서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런데 오늘날 성령을 받은 성도는 뭐냐? “살려내셨네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왜 저를, 내 희망으로도 살수 없고 내 꿈으로도 살 수 없는데 벌써 살려내셨네요.” 그 살려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를 앞당겨서, 마지막 때 상황을 앞당겨서 우리에게 미리 그 속에 들어가게 만들어버려요.

그러면 아모스에 나오는 이 캄캄한 날, 이 날을 아주 어렵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캄캄한 날이 아니고 여호와가 깜깜함이에요. 여호와 자체가 어두움이에요. 어두움의 인격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어두움의 인격화, 모든 인간들이 기피하는 그 어두움자체. 빛으로 달려가는 인간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 어두움 자체가 인격화된 거예요.

인격화된 그 어두움 속에서 예수님은 어떤 기능으로 그 당시 유대사회에 나타냈는가? 요한복음 3장 14절에 나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 대목에서 ‘든 것’ 이라는 말은 땅에 그냥 몰래 숨겨놓았다는 말의 반대말이에요. 들었다는 것은 공개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 아모스의 깜깜한 날, 그 여호와의 날이 어떤 시간으로 어떤 시점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움직이는 인물로서, 시간이 움직이는 인물로 나타나는 거예요.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다 그 여호와의 날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나오는 말씀과 행동과 태도가 그리고 모든 하시는 일들이 다 깜깜하고 여호와의 날에 일어날 일을 주님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왜? 그 시간이 인격화 되었으니까, 그 깜깜한 어두운 날이 인격화 되었으니까.

출애굽기 12장 42절에도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여호와의 밤이라 하는 것은 여호와를 드러내기 위한 밤이에요. 야곱이 밤에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잖아요. 그래서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어요. 유월절로 인하여 생긴 나라 이름이 이스라엘이에요. 그 밤부터 새로운 날짜가 시작됩니다.

유대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가 한 날이 아니고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날이에요. 밤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낮은 인간의 활동이고 밤에는 천사의 활동이에요. 그래서 야곱을 만났던 천사는 새벽이 되니까 떠나려고 하는 거예요. 가스관 타는 도둑도 아니고, 하여튼 낮만 되면 떠나려고 해요. 얼굴 모자이크해야 될 입장인가 모르겠어요. 얼굴이 들키지 않아야 돼요.

밤에는 인간들이 노동을 중지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의 완성은 일체 인간의 노동의 결과가 스며들지 말아야 돼요. 일방적으로 베풀어주는 것으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들이 이미 선악과를 따먹었잖아요. 선악과를 따먹고 끊임없이 놀음판에서 희망과 비전을 이야기한다는 말이지요. 가만있지를 못하고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서 뭐든지 다 해요.

그러니까 계속 밀어낼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과 인간은 약속을 통해서 결코 의견일치가 되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나를 살려보겠다는 겁니다. 내 힘으로 어떻게 선악을 따먹었으니까 죄를 짓지 않음으로서 천국 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 뜻은 뭡니까? 마땅히 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마땅히 죄이어야 해요. 너는 마땅히 죄 지어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복음입니다.

어떻게, 인생의 피곤이 다 없어지지 않습니까? 한꺼번에, 유자차 이상으로 깔끔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한평생 살면서 죄를 적게 지어야 벌을 적게 받고 그러면 복을 받고 천국갈 수 있다.’ 이게 우리 평생에 무거운 짐처럼 주어진 거예요. 야곱이 자신이 천국가야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야곱, 너는 천국에 올 수 없다는 거예요.

야곱의 효능은, 야곱의 해야 될 일은 죄짓는 일이에요. 야곱 자체가, 우리가 태어난 자체가 죄 덩어리이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이 우리보고 네 방안을 제출하라고 한다고. “네가 왜 망해야 되고, 너는 왜 심판받아야 되고 지옥가야 되는지 그 방안을 제출하라.”

그렇게 되면 이미 구원이 된 사람한테는 그 깜깜한 날, 그 어두움이 된 주님의 인격체, 주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주님의 깜깜함, 이 세상을 심판하는 그 정당성에, 그 의로움에 같이 있는 거예요. 그 자리에. “잘 하셨습니다. 예, 이 세상 잘 망했습니다.” 그 정당성에 같이 동의가 되는 거예요.

저는 이걸 무중력 상태라고 봅니다. 무중력상태는 좌,우, 위, 아래도 없어요. 그냥 놓여 있음, 그 자체에요. 주님의 심판의 정당성 안에 놓여 있는 거예요. 주님의 심판의 정당성. 그러면 성도는 어디 있느냐? 주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가득 안고 있는 겁니다. “잘하셨습니다.” 이 말은 뭐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하셨습니다. 인간 만들어놓은 것 죽이시는 일 참 잘 하셨습니다.”

이 일을 누가 먼저 하느냐? 예수님이 먼저 하셨어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지막 때 인류를 불로서 심판하는 것이 얼마나 정당한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자진해서 십자가에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습니다. 그 말은 뭐냐? 이 세상에 하나님이든 누가 되었든 이 세상을 다녀간 인간들은 전부 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을 하나님 스스로 자기가 증명한 거예요.

방사능으로 오염된 세계라면 방사능 오염을 측정하는 기계 자체가 방사능에 흠뻑 오염된 거예요. 우리 주님께서. 그것은 뭐냐 하면, 주님의 모든 시나리오와 계획이 예수님 안에 함축되어 들어 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이 오게 되면, 성령이 와서 이미 구원된 사람은 이 세상이 죄고 이 세상이 멸망되어 마땅하다는 그 함축된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이 성도 안에 고스란히 다 함축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도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4절에 보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해서 예수님자신이, 이 세상이 전부 다 뱀의 소굴인 속성을 예수님 몸에다 담아버리는 거예요. 예수님은 뱀은 아니지만 그 속성은 뱀이 당할 하나님의 징벌을 몸소 예수님의 몸에 꽉꽉 눌러서 다 담아버린 겁니다.

예수님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이 땅에 왔다는 그 이유만으로 아버지께 버림받는 것이 아버지의 정당한 조치 맞습니다, 를 자기 몸으로 증명해 내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 자신이 버림받고 망하는 것을 스스로 자기 몸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증명하는 것 “예, 잘 하셨습니다.” 그 걸 증명하는 그 일이 언약의 완성이에요. 하나님의 약속의 완성입니다.

이제는 그게 성도 담당이에요. 성도가 동일하게 그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성도의 임무는 마태복음 10장 16절에 있어요.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비둘기 같은 뱀 되라는 말이 아니고 뱀 같은 비둘기 되라는 말이에요. 뱀 같은 비둘기, 순결하지만 우리의 모든 속성은 뱀이 당할 그 저주를 합당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이지요.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 방랑자기 때문에, 떠나야 될 곳이기 때문에.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는 그 모든 자체가 징벌입니다. 징벌인데, 주일 낮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모기 한 마리가 창호지에 그대로 들이박고 밑으로 떨어지면 그 자체가 구원상태인데 이게 모기가 아니고 냄비라 합시다. 냄비가 받아버리면 골병만 들어요. 자꾸 우그러지기만 하지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거든요.

본인은 덩치가 크지요. 모기가 되어서 바늘구멍 통과하면 되는데 낙타가 되어서 들어가지를 않는 겁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고, 구원받기를 원하고, 스스로 금식하면 자꾸 골병만 더 들고 이게 냄비가 우그러들기만 하지 없어지지는 않는 거예요. 그래서 다급해서 자꾸 구원의 시도를 더 해보는 거예요.

구원의 시도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내가 나한테 구원받기 위해서 공들이고 애썼던 것이 많이 더 남아 있기 때문에 더욱더 절망적이지요. 왜? 자기 공로를 빼낼 수가 없기 때문에,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위해서 한 그 공로를 의로움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에 점점 더 진짜 결과는 암담해지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모스는 이야기하는 거예요. “네가 구원받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너는 점점 더 망한다. 그게 깜깜한 날이다. 주님은 너처럼 그런 식으로 살지 않았어. 주님의 사는 것은, 나는 망하기 위해서 사는 거야. 그런데 너는 지금 너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교회 나왔잖아. 그러니까 핀트가 안 맞지.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는 짓이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 자신이 어떻게 망할 수 있는가? 망하자, 망하자, 해서 남에게 온갖 행패질 다 해서 경찰서 왔다 갔다 하고 나쁜 짓 골라하면 구원됩니까? 그게 어두움 되겠어요? 방법은 요한복음 4장에 나옵니다. 여기 왕의 신하가 나오는데요. 46절부터 보면 “왕의 신하가 있어 그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이렇게 시작됩니다.

49, 50절에 “신하가 가로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신대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래서 왕의 신하가 예수님 말씀 듣고 아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해서 집에 가다가 아직 가지도 못했는데 도중에 종들이 반가워서 먼저 와서 하는 말이 “살았습니다. 당신 아들이 살았습니다.” 하고 소식을 전하는 거예요. 기분 좋았지요. 그 때 그 신하가 “아, 기분 좋다. 오늘 땡잡았다. 내 희망과 꿈은 이루어졌다.” 이렇게 한 것이 아니고 뭐라고 하느냐?

52절에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언제 나았지, 라고 할 때 “어제 제 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리고 53절에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이 다 믿으니라.”

그러니까 이 신하의 아들이 병이 나은 시점이 주께서 말씀하신 그 때에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 신하의 시간 아들의 시간을 뺏어간 거예요. 내 인생 계획을 주님 앞에 강탈당하면 그게 곧 구원인 겁니다. 왜? 내 시간을 내가 갖고 있으면 우리는 꿈과 희망을 계속 갖게 돼요. 내 눈으로 내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거예요.

이것은 뭐냐? 나에게 실 이익으로 돌아오는 스케줄이 나에게 아직도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묻는 거예요. 그 시간은 누구 시간이냐? 주께서 말씀을 하셨던 그 시간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시간에 아들은 주님의 시간에 예속돼요. 주님의 시간의 메커니즘, 주님의 하신 일, 주님의 완성한 시간에 종속이 되는 겁니다.

그 병이 난 아들은 나중에 결국 죽겠지요. 그 아들이 병이 낫든 안 낫든, 또 병들어 죽든 말든 간에 그 아들의 모든 시간은 누구 것이냐 하면, 바로 주님의 것이 되고 그 아들은 무중력상태가 되는 거예요. 무중력상태, 무중력상태의 반대말이 돌하루방, 이것은 때리면 대번에 부서져요. 성도는 돌하루방 아닙니다. 그러면 단단한 우상이 돼요.

자기가 자기를 지켜버리면 점점 돌하루방이 돼요. 돌덩어리 된다고요. 거칠거칠 한 그것 제주도에 가서 만져봤는데 그거 뭐가 예쁘다고. 제주도에 있는 분들에게 죄송합니다만. 내 시간은 내 시간이 아니고 이미 주님이 다루시는 시간이에요. 어떤 시간? 너는 네가 망하면서 이미 살림 받은, 이미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은 그것을 네가 죽어가면서 즐거워하라는 말이지요.

“너에게서 나올 것은 죄밖에 없음을 네가 즐겨라. 마땅히 죄이어야 한다는 것을 네가 감사하고 고마워해라.” 이게 바로 자유입니다. 이미 통과한, 마지막 캄캄한 날을 통과한 심판을 통과한 그 자유, 심판을 통과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지금 살고 있는 육신은 심판이 있다는 것을 기꺼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재앙이나 전쟁이 와서 우리를 엉망으로 만든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는 충분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그 정당함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시는 그 모든 일이 주께서 영광받기 위해서 하신 일인 것을 우리는 이론적으로 지식으로 안다고 우기지만 그러나 우리 본능은 나 지키는 것, 나 살리는 것, 거기에 있음을 또 다시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밖에 모르는 이것이 주께서 씻어주신 해결해주신 죄 덩어리 인 것을 도리어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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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1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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