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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강남-누가복음 4장 29절 (암반층) 201208b-이근호 목사자유게시판누가복음

강남-누가복음 4장 29절 (암반층) 201208b-이근호 목사

인간에게 그리움이 하나의 고문처럼 작용하게 되어있어요. 그래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도 내가 옛날에 그리워했던 그 사람인지를 이렇게 대조하면서 만나게 되지요. 38절에 봅시다.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기존의 사건을 기존에 주님 보시기에 모든 것이 구조고 배열이기 때문에 기존의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어요. 뭉쳐져 있지요. 기존의 사건. 이것을 어려운 말로 어제의 사건을 오늘의 사건으로 덮어버립니다. 이 사건이라는 말 대신 뭐를 집어넣느냐. 복음이라고 봅시다. 어제 알았던 복음을 오늘의 복음이 그걸 콘크리트 쳐버리죠. 덮어버려요.

그래야 십자가 복음을 아는 내가 어제 알았던 내가 오늘까지 이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되면 내 존재가 그냥 존재로 해버리면 그 중에 나는 누구 증인되느냐 하면은 내 존재의 증인이 되어 버려요. 어제의 사건과 오늘의 사건 사이에 여기서 뭐가 수립되어야 되느냐 하면은 어제의 사건과 오늘의 사건 사이에 이게 죽음이 있어야 돼요.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예수님의 피에다가 뭐를 집어넣느냐? 나의 피를 집어넣어야 이게 복음이 되거든요. 이게 현실적 복음이 돼요. 이게 이제 무슨 뜻이냐 하면은 구약을 보면 쉽게 설명돼요. 구약의 사람들이 어린양을 잡았잖아요. 구약 사람들은 기분 좋았던 거에요. 자기가 전쟁에서 승리할 때 이것은 무슨 효과냐? 아 우리에게만 여호와 계시는 효과다.

그럼 여호와 어디 계시냐?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에 계시다. 그럼 제단에 계시는 방법은 뭐냐? 주님의 율법대로 시키는 대로 제사 드려서 어린양 바치면 된다. 그러면 이 말은 다시 하면 제사 정기적으로 드려서 어린양 바쳐버리면 주님은 우리와 함께 있고 그 주님이 함께 있는 이상 우리가 어느 나라하고 전쟁해도 우리는 승리를 할 수 있고 우리는 약속의 땅에 살 수 있다. 이렇게 되겠지요. 그들의 그것이 치명적인 오류라는 사실을 몰랐던 거에요.

왜? 자기 존재의 혜택을 입으면 그게 끝이기 때문에. 보통 복음 모르고 성경 몰랐을 때 절에 가다 교회 가는 이유가 뭐겠어요? 이렇게 하나님 모르다 하나님 믿으면 나한테 뭐가 온다? 하나님의 혜택을 입을 것이라고 기대하지요. 살아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가는 혜택. 그게 온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그 오류를 이스라엘이 그대로 그 짓을 한 거에요.

예수님의 피로 구원받을 때 나는 멀쩡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유월절 어린양 또는 제사는 희생이 있잖아요. ‘희생’. 희생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멸망과 고난 가운데 집어넣어버려요. 너희들이 어린양 죽으니까 어린양 혼자서 굉장히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어린양이 있는 그 취지를 이스라엘 전체로 확장시켜 버립니다.

확장시켜 버리면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멸망의 길로 가요. 망하지요. 그 망하는 모습이 평소에 그들이 무심코 드렸던 흠 없는 어린양의 망하는 모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잖아요. 또 베드로전서 2장 21절에 보게 되면 나를 따라오는 것은 전에는 곧잘 외웠는데 지금은 곧잘 외울 수가 없어요.

여기에 보면 베드로전서 2장에 21절에 보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고난을 지신 것은 예수 피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십자가의 길을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라.

어린양을 죽은 어린양의 혜택만 볼 생각하지 말고 그 어린양의 운명 속에 그들이 함께 파급되어서 확장되어서 놓이게 하는 거에요. 그 아까 첫째시간 마쳤을 때에 제가 중요한 이야기한게 지금의 나라는 존재 또는 ‘나’라는 것은 과거의 체험이 누적된 거에요. 과거의 체험, 기억이 누적된 겁니다.

저는 주일날 설교하고 몰랐는데 제 아내가 이렇게 이야기해요. 당신은 설교하면서 뭐 틀렸는지 모르지? 모르는데. 대장금이라고 이야기해야 되는데 자꾸 대장간이라고 이야기했다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곰곰이 분석을 해봤어요. 녹취는 대장금으로 되어 있어요. 오목사님이 친절해가지고 고쳐놨는데. 왜 대장금인데 왜 대장간으로 했는가.

보니까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 대해서 굉장히 내가 싫어했던 것이 생각나요. 사극이기 때문에 사극은 절대로 미화되면 안돼요. 왜냐하면 모든 봉건주의 사회는 양아치 사회에요. 깡패가 왕이 되는 세계거든요. 이번 수련회할 때 할 거에요. 깡패가 힘 있는 깡패가 대장질하는 세계에요. 우리나라 조선시대 때는 50%이상이 노비에요. 인구의 반 이상이 노비라니까요.

그들에게는 뭘 안 가르쳐 주느냐? 절대로 문자를 가르쳐주면 안돼요. 무식해야 돼요. 미국에 남북전쟁할 때 남부 쪽에서 흑인이 40%인데 40%를 개 다루듯이 살육이 가능했던 것은 절대로 그들에게 글을 이야기 안 했기 때문에 그래요. 무식해야 다룰 수 있어요. 여자에게 글 가르치면 안돼요. 여자에게. 기어올라서 안돼요. 추미애처럼 그렇게 되면 안 된다니까. 똑똑하면 안 된다니까. 조선시대는 그랬거든요.

그 세계를 미화한다는 게 아 굉장히 거부반응을 일으켰어요. 그런데 그 여자를 그렇게 학대했던 조선시대 때 그 드라마가 이란에서는 무려 90%의 시청률을 보였거든요. 이란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이런 데서는. 평소에 대장금을 안 좋아했던 모양이에요. 안 좋아해서 대장금이 안 나오고 대장간이 나왔나 봐요.

이처럼 인간의 모든 언어와 언어뿐만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가 껄끄러울 때는 개들이 물 먹기 싫을 때 억지로 안 가듯이 본능적으로 자꾸 거부하고 거역하는게 생겨요. 거부하고 거역하는 것. 도덕과 윤리를 나누는데요. 도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만 하는게 도덕이에요. 윤리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윤리에요.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느냐 이것은 도덕입니다. 윤리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이렇게 되요. 그러면 윤리의 입장에서 도덕은 뭐냐 하면은 이것은 허황된 거죠. 허황된 것. 그런데 허황된 것이 있어야 윤리가 빛이 나요. 왜? 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할 수 없는 것을 고상하게 지향하니까. 그걸 추구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자기를 굉장히 으스대게 만드는 거에요.

지금은 비록 지금은 내가 이렇게 변변치 못하지만 언젠가는 내가 훌륭한 사람 되고야 말리라 그런 선한 목적이 있다는 자체를 자기는 아주 대견하게 생각하는 거에요. 대견하게. 그게 이제 기도로서 나오지요. 기도내용 들어보세요. 본인이 할 수 있는 겁니까? 하고 싶은 거에요. 어느 쪽이에요? 하고 싶은 걸 해야 내가 못한 것을 누가 채워줘야 된다? 하나님이 채워주세요 라고 하는 거에요.

이 윤리와 도덕은 다 어디서 나오는가? 이게 바로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선악논리에서 나왔지요. 인간은 이렇게 선악논리 자체가 죄잖아요. 인간은 죄의 출신들이에요. 죄의 출신들. 죄의 출신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복음을 이야기해도 올라오는 사이에 뭐가 개입되겠어요? 뭐가 개입되겠습니까? 선악요소가 개입되겠지요.

내가 선하고 악하고 아는 것. 아는 존재, 아는 나가 되어 버리면 내가 이걸 안다는 이유 때문에 내가 뭐가 된다? 절대화돼요. 나 그거 아는데. 건들지 마. 나 그거 알아. 복음이 중요한 게 아니고 복음을 안 내가 중요하다니까 내가.

사회에서 인정 못 받고 사회에서 지지리 궁상으로 허접하다고 욕 얻어먹는 인간들 교회와서 열심히 함으로써 사회에서 대접 못 받는 것을 교회에서 대접받는 방법일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성경공부에 매진하는 것도 자기를 감추는 방법이에요. 자기 암반층을 감추는 방법이 성경공부에 열심히 매진하는 거에요.

여러분들이 고시원. 고시원 저는 안 가봤는데요. 고시원에 보면 좁아요. 문을 이렇게 여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미닫이라고 하지요. 이렇게 여는 것을 여닫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고시원에 어떤 사람이 여기 이제 밥솥해가지고 이 사람들 밥 먹으라고 해 놓으면 배고파서 막 달려갑니다. 막 달려가거든요. 그런데 방마다 여닫이가 되어 가지고 한참 가는데 면상에 문을 제껴버리죠. 얻어터지죠.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은혜 주께 가자 하더라도 여닫이가 좁은 골목에 여닫이가 왜 그리 많은지 주춤할 수 있고 얻어터지고 자빠지고 이렇게 돼요. 미닫이로 바꾸든지 해야 되는데. 이것은 세상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 자신도 이렇게 여닫이가 촘촘히 박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나도 착해질 수가 있는데 나도 의로울 수가 있는데 나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는 것은 그 정도는 내가 알고 있는데 내가 도덕성을 지향하고 행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남한테 욕 얻어먹을 거기까지는 아직 막나가지는 않았다는 거에요. 내가 나를 돌아볼 때에. 측정을 뭘로 합니까? 복음으로 측정 안 하고 윤리와 도덕으로 측정합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그 도덕 윤리로 측정해서 뭘 얻고자 합니까? 나는 나의 증인이 되고 싶은 거에요. 나 잘난 맛에 내가 살고 싶은 거에요. 이것이 바로 어린양과 그 다음 텀, 오늘 어린양 내일 어린양 사이에 계속되는 겁니다. 이게 나중에 매뉴얼화 되게 되면 작년에 했던 십일조 올해까지 계속 써먹고 있어요. 작년에 십일조 했는데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우리가 제사를 잘 드리고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저는 이방민족이 들어와도 누가 지켜준다? 우리의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거에요. 지금 하나님 어린양 되서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는 멀쩡한 것만 챙기는데 급급한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새로운 창조자를 어떻게 하느냐. 성령 받은 성도를 주님의 어린양 그 십자가에 동참시켜버립니다. 예수님의 자기 피가 사건이 되어 버리면 우리의 존재를 찾아와요. 물론 성령께서 그렇게 하세요. 십자가로서 다 이루었으니까 성령께서 우리를 찾아오게 되면 어떤 꼴이 나느냐 하면은 이런 꼴이 나지요.

제가 지난 주일날 주일학교 설교를 하는데 뭐가 있느냐 하면은 동화책이 있어요. 그림책이 있는데 그림책이 너무나 제게 인상적이고 좋았어요. 나지막한 집들이 있는데 그 그림에 보면 지붕은 좀 작게 그리고 대문을 커다랗게 그려놨어요. 어두워요. 밤이에요. 이렇게 있는데 그림을 어떻게 과장되게 그렸느냐 하면 지붕이 이렇게 있고 그냥 단층집인데 여기에다가 이런 그림을 그려놨어요. 이건 여러분들이 동영상을 봐야 돼요.

이게 뭐겠습니까? 이게. 어떤 고깃덩어리 그려놓은 것처럼 고깃덩어리는 아닌데 이게 뭐냐 하면 피 발라놓은 거에요. 밤중에 집집마다 이게 이스라엘 사람들 사는 집단촌 같애. 집집마다 전부다 피 발라놓은 삽화를 동화책에 그려 있었어요.

애들한테 설교를 하면서 그림을 딱 보는데요 와~~~ 나의 윤리 도덕으로 나를 증명할게 아니고 성도라면 우리 집 입구에 피 발라놨다 그걸 지붕은 작게 그리고 사람은 안보이고 그냥 피 바른 대문짝만 계속 연이어서 그림을 그려놨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게 없다는 것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낸 삽화에요. 내가 보기에는. 그림 그린 사람은 그걸 모르겠지만.

신약에 사도 바울이 그런 이야기한지 모르겠지만 그걸 강조 안했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강조해야 될 것이 뭐냐 하면은 피만 자랑하는 거에요. 피만. 인간은 쑥 들어가 버렸어요. 거리에 사람도 없어요. 죽음의 사자가 돌아다니는데 걸리면 큰일 나지요. 다 집구석에 다 앉아있고 그냥 피만 이렇게 집집마다 피만 빨간 컬러로 그림을 그려놨다 이 말이죠.

참 그게 지난 주일이니까 벌써 한 이틀 지났지요. 저의 과거 체험 속에 하나에 벌써 들어갔어요. 과거 체험 속에 들어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을 만든 이유가 망하라고 만든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어린양을 잡을 때 어린양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어요. 미안하다 네 덕분에 우리 살자 이런 생각이었지요. 주님께서는 그 인간의 의도를 묵살해 버립니다.

감사가 나는 멀쩡하고 주님은 고생했으니까 감사가 아니라 주님 고생에 같이 참여한 그것을 감사해야 이게 새로운 피조물 되는 거에요. 주님의 고난에 들어가는 것. 그러면 주님의 고난에 들어갔다 안 들어갔다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주님의 고난에 들어갔다 안 들어갔다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 모든 생활 가운데서 모든 대화 가운데서 전부 다 그 어린양을 드러낼 수 복음을 드러낼 수 있어요. 사건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대화해 볼게요. 어떤 사람이 와가지고 묻습니다. 이 개는 참 예쁘네요 라고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럼 집주인이 하는 말이 개 주인이 하는 말이 저 개는 주인 닮아서 성질이 지랄 같아요 할 때 이게 뭡니까?

갑자기 존재는 존재인데 이 존재를 예수님의 죽으심에 집어넣은 존재로 했을 때에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뭘 부르러 왔어요? 죄인을 부르러왔던 죄인의 사건을 무심코 내뱉는 보통 인간의 대화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표출이 가능합니다. 주인 닮아서 성질이 엉망입니다. 얼마든지 이렇게 할 수 있거든요.

뭐 피, 피 해서 코로나 시대에 코로나 안 걸린다 한다고 믿는 거 아니에요. 평소에 예수님의 피가 있다면 피가 있는걸 어떻게 아는가? 바깥에서 인간이 누구한테 이야기 건다는 것은 이것은 쇠꼬챙이 가지고 나를 찌르는 그런 형국이거든요. 누가 나한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저기서 찌르러 오는 거에요. 마치 고구마 익었는지 찌르러 오듯이. 찌르러 오는 거에요.

제가 어느 강의에서 했던가요? 이 고구마는 그냥 통과하면 된다고 했지요. 마구 찌를 때 그냥 고구마 다 익으면 그냥 통과해요. 예수님의 피는 뭐냐 하면은 죄인이며 이 죄를 위해서 죄인 아니지만 죄인 되게 하신 그 결과가 피 아닙니까. 아까 이야기했지요. 이 피라는 것은 명사죠. 물질이죠. 물질은 뭐라고 했습니까? 흔적이잖아요. ‘흔적’.

중요한 것은 이 흔적을 남기는 사건이 중요하죠. 이걸 가지고 갈라디아서 1장에서는 이 피 말고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뭘 받는다? 저주 받는다. 이건 새삼스럽게 저주받는 게 아니고 이미 저주 아래 있는 거에요. 저주 아래. 다 같은 공동묘지인데 피가 와서 똑똑똑 두드리는 거에요. 너 이스라엘이야. 내 어린양의 피로 너 구원 받았어 라고 깨우는 거에요.

뜰채 가지고 건지는 것도 되고. 깨우는 것이 복음 전파입니다. 짝대기가 쑤셔보니까 통과해야 되는데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통과하니까 뭐가 걸려. 암반층 온 거죠. 고만 찔러라 나 마이 묵었다 아이가 이런 식으로 아프다는 거에요. 아파요? 왜 아프지? 왜 아픈가 보니까 이 안에 피의 반대의 것이 있어요. 이게 세 자인데 피의 반대.

주님께서 이미 결과로 피의 반대로 복음을 하는데 뭐가 있느냐 하면은 이게 자기 의가 있었던 겁니다. 그 자기 의를 이렇게 보니까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나는 복음을 알고 있다. 이게 자기 의가 될 줄은 상상도 못한 거죠. 어떻게? 이게 시간이 하루만 지나도. 하루만 지나도 이렇게 암반층 생기는 거에요. 하루만 지나도. 그러면 어떻게 돼요? 어제의 복음을 못 써먹잖아요. 새로운 사태를 일으키는 거에요. 새로운 사태를.

이제는 개 말고 고양이 기르든지 이제 다른 사태를. 또 시어머니 와가지고 냉장고 보면서 집꼬라지 보니 내 아들 불쌍하다 이런 식으로.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보기에도 어머니 아들 참 불쌍해요. 이러면 되는 거에요. 제가 뭐 어때서요?! 제가 일하고 밤에 살림하고 두가지 다 됩니까? 어머니는 직업도 없이 한평생 다 보냈는데 나는 지금 애 키운다고 하고 있는데 남편도 같이 해야죠!

이렇게 구질구질 자기 의 이야기하지 말고 자기 의 하기 전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도덕과 윤리에서 도덕은 뭐다? 우리가 뭔가 해야 된다. 윤리는 뭐다?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에서 뭘 지향한다? 도덕 윤리에서 뭘 지향해요? 도덕을 지향해요. 왜? 도덕은 허황된 거니까. 허황된 것이 있어야 이 허황된 것이 뭘 대변하느냐?

‘나’라는 이상적인 그걸 이상자아. 착하디 착한 나를 늘 허황되게 상정을 해 줘야 내가 지금 사는 이유와 보람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 점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늘 변하지만 주님은 불변하다.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말은 쑤시는 작대기는 다른 작대기는 이제 생각하지 말라는 거에요. 나는 피 가지고만 쑤셔대는 거에요.

그러면 고구마 뚫었을 때 나오는 이 마지막 장면이 뭐냐? 오직 나는 뭐만 자랑한다? 나를 뚫고 지나가는 피만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그 정도 아시고 응용문제 해 봅시다. 자, 38절에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지요.

제가 묻습니다. 왜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습니까? 제가 예루살렘에 갔을 때 베드로 장모 집에 가봤거든요. 갈릴리 그 근처. 집이 있어요. 베드로 집이 있다고요. 가버나움 그 동네가 처갓집이에요. 베드로가 처가살이 했는가 모르겠어요. 아무튼 있어요 흔적이. 그러면 왜 장모가 열병에 걸렸습니까? 소용없다니까요. 사건이죠.

사건은 뭐와 만난다? 사건과 만나겠죠. 왜 열병에 걸렸습니까 라는 질문 자체가 어폐가 있을 수 있는데 ‘열병에 걸리지 않는 나’를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 베드로 장모가 태어날 때부터 열병 걸린 건 아니잖아요. 때가 되매 열병 걸렸지요. 그 때가 되매 누가 왔다? 예수님이 찾아오신 거에요.

주께서 피를 이야기하면 우리는 피를 내면 되는데 피를 이야기할 때 제 존재 괜찮아요? 이렇게 나오면 이게 대화가 돼요? 안돼요? 연결이 돼요? 안돼요? 연결이 안 되는 거에요. 이쪽은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복음이 아니고 나 잘났다가 마중이 나와버리면 복음으로 교제가 안 되면 참 이것은 엽전꾸러미가 안돼요. 엽전꾸러미.

대전강의 때 했지요. 구멍 뚫려야 되는데 성도는 구멍이 뚫려야 되는데 그 구멍 뚫린 터널 속에 주님이 통과해야 되는데 다른 데는 다 구멍이 뚫렸는데 그 사람은 구멍이 안 뚫려서 튕겨 나와 버리죠. 주로 교회에서 튕겨 나온 사람들이 장로들이에요. 장로들. 아이고 얼마나 고집 센지. 더는 이야기 안 하겠습니다만 튕겨 나와요. 자존심 상한 것을 목사가 자존심 굉장히 상하거든요. 굉장히 고집이 세요. 제가 목사니까 편하게 이야기합니다.

자존심 자리에 주님의 피 갖고 있으면 되잖아요. 그게 참 어려워요 그게. 그럴려면 나를 근원적으로 이 땅에 태어났다고 하지 말고 그냥 사건으로 내가 태어난게 아니고 태어남이라는 사건을 위해서 내가 어린애가 되었다 이렇게 좀 동사를 앞장세우고 명사를 뒤로 좀 돌리세요. 태어남을 위해서 내가 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남들이 보면 이상한 소리겠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에 걸리지 말아야 돼요? 꼭 걸렸어야 돼요? 열병 나았다고 좋아하지 말고 39절에 보면 병을 어떻게 합니까? 병을 꾸짖는다고 되어 있지요. 꾸짖는다는 말은 예수님 눈에만 보이는 다른 존재가 있는 거에요. 존재니까 꾸짖지요. 바다와 바람을 꾸짖고 마치 사람 나무래듯이 나무래는 거에요.

따라서 우리의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존재가 되지 않고 뭐가 되야 되느냐 하면은 존재가 되지 않고 우리는 늘 우리를 성령 오게 되면 우리는 사건화. 오늘 하루 오늘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오늘 그냥 산 거에요. 살았다는 사건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뭐냐? 주께서 살려주는 증거물로 흔적으로 우리가 앉아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존재가 사건 되기 때문에 존재를 버려야 되기 때문에 버리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나를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지 마세요. 자기연민이라고 하는데 자기동정하면 안돼요. 자꾸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미련을 갖게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딱딱한 존재가 되어버리면 내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 누구를 공격하게 되느냐 반대로 타인을 공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십자가 사건 아닙니까.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해서 타인을 공격하는 거에요. 그리고 나의 의는 뭐로 구성되었다고 했습니까. 선악이죠. 선악으로 구성되어 있죠. 선악을 보통 이 사회에서 뭐라고 합니까? 도덕과 윤리.

윤리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을 통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까지 내다보는 것. 내가 언젠가 저 목표에 도달하겠어라는 그런 희망 있는 나를 좀 대견해해 달라. 나를 칭찬해 달라. 나를 위로해 달라. 나를 격려해 달라 식이에요. 모든 것이 나로 시작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가는 거에요. 인간들이. 우리는 변하고 있는데.

그러면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을 때 그럼 불쌍히 여기는 몫은 누구 몫입니까?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지요. 주님이. 만약에 내가 나를 불쌍히 여겼는데 주님이 불쌍히 여겨버리면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누가 가로막는 셈이 되느냐 하면 내가 선제조치, 내가 한 선제조치가 주님의 피를 완전히 개무시한 게 되어버려요.

불쌍히 여김을 받을려고 온갖 인상을 다 써가면서 40일동안 굶어가면서 이래도 내가 안 불쌍해요? 이런 식으로 시위지. 이것은 반항하는 거에요. 이거는 반항하는 거라고요. 옛날에 아버지들이 그런 거 했잖아요. 자식을 때리지 않고 아버지가 자기 종아리에 놓고 나쁜 짓 한 자식보고 회초리 넘겨주면서 네가 나를 때려라 하잖아요.

그러면 그 다음에 나오는 시나리오는 어떤 시나리오가 적합할까요? 이건 초등학교 1학년 도덕시간에 나올법하죠. 아이가 매우 모질게 아버지를 때린다 1번. 2번 회초리를 던지면서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2번. 둘 중에 어느 것이 맞습니까? 요새 같으면 1번이 맞다고 해요. 어디 쇼를 벌리십니까? 당신의 쇼는 나를 모욕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지금 주님께서 베드로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인간은 어떤 인간도 주님 외에 존재라고 할 사람 없다 이 말이죠. 끝까지 존재를 주장하면 어떻게 되는가? 가룟 유다가 되지요. 가룟 유다의 그 비장한 각오로서 자살할 때에 목매여 자살할 때, 목 매달아서 자살할 때 그 자살하는 심령은 뭡니까? 주께서 지시했습니까?

성경에 예레미야 5장에 목 매어 자살하라는 대목이 나옵니까? 성경의 지시대로 했습니까 아니면 성경의 지시 없이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한 거에요? 마지막 남은 최후의 그 가치, 의미를 나를 위한 의미만큼은 안 다치고 싶은 거에요 그걸. 이거 다치면 나 살 이유 없다는 거에요. 처음부터 그것은 암반층이었어요. 오늘 제목을 이게 좋다. ‘암반층’.

그 암반층을 내가 몰라요. 모르는데 계속해서 복음으로 복음으로 이야기해보면 드디어 딱딱한게 나오죠. 암반층이 나오는 거에요. 복음으로. 그 복음 나오면 그 현장에 십자가 현장이죠. 십자가 원수가 되겠지요. 41절 봅시다. 존재와 사건의 연속입니다. 41절 보기 전에 아까 첫째 강의한 것 다시 복습차원에서 보겠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복습해야 이해가 돼요.

수술 칼 명사지요 살점, 근육 명사지요. 물체지요. 여기 자른다 나오지요. 자른다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이게 의미에요. 이게 의미이기 때문에 이 의미를 위해서 두 개의 물체가 동원되는 겁니다. 동원된 거에요. 자, 응용문제 들어갑니다. 예수님 계시지요. 나 있지요. 주께서 나를 구원한다 할 때에 성령이 오지 않은 사람은 내가 구원받았다가 되지요. 성령 안 온 사람은. 성령이 온 사람은 존재에서 떠나지요.

구원이 구원을 위해서 나를 사용한 게 돼요. 주님이. 구원을 위해서. 구원을 위해서 나를 사용하게 되면 내가 평소에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뭐가 되지요? 한 자로 뭐가 됩니까? 불쌍히 여기는 것은 뭐가 됩니까? 죄에서 벗어나야 될 원형, 죄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나를 동정하는 것은 이게 죄가 되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과거의 부모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배웠던 것은 뭐냐 하면은 내가 안 다치는 거죠. 내가 위대하게 되는 최후에 최고자가 되는 거죠. 이게 과거가 되는 거에요. 과거가 무엇을 규정한다고 했습니까? 오늘날 ‘나’라는 자아를 규정하는 과거다. 과거가 오늘 나를 규정한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날마다 성령이 필요해요? 필요 안 해요? 날마다 필요한 거에요.

과거라고 하지만 어제의 나. 어제는 분명히 주님의 복음에 의해서 구원됐는데 오늘 되니까 뭐가 됩니까? 나는 어제부로 나는 구원되었다 되지요. 그럼 이 존재는 어떻게 돼요? 오늘의 복음이 와서 덮쳐버린 거에요. 콘크리트 한 데 다가 콘크리트 한 번 더 쳐버리는 거에요. 주님의 일하심을 위해 있는 것이지 너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기도라는 것은 뭐라고 했습니까? 제대로 된 성령의 기도는 그 기도의 내용이 절대로 나에게 오지 마세요. 나에게 돌아오지 마세요 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제발. please. 이걸 한국말로 하면 쫌. 쫌. 쫌 나한테 그 기도 결과가 나한테 쫌 안 돌아오게 하옵소서. 누구한테 돌아간다? 주의 이름으로 했으니까 누구한테 돌아가야 돼요? 주님한테만 돌아가게 하옵소서. 나를 수단으로 사용해서, 나를 도구로 사용해서.

그 작업을 위해서 여기 41절에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할 때 그 다음에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병 고치고 나가는 사람보고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는 귀신보고 꾸짖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뭐로 보이겠어요? 병 고침 받은 사람보고 어떻게 합니까? 꾸짖는 거에요. 너는 병 고치고도 존재로 환원되어 버리죠. 병 고침 받고. 그런 경우 있었습니다.

문둥병자 10명이 왔는데 다 문둥병이죠. 소경도 있고 문둥병도 있는데 문둥병으로 봅시다. 10명 왔는데 전부 다 고침을 받았잖아요. 헤헤 거리며 다 돌아갔지요. 돌아온 사람은 몇 명밖에 없습니까? 딱 한사람 밖에 없어요. 돌아온 사람 한사람 밖에 없어요. 소경이 눈을 떴다. 소경이 눈 뜬 것이 그것이 구원받은 거에요? 요한복음 9장 이야기입니다.

9장 이야기에서 실로암 못가에 가서 진흙 발라서 눈 떴지요. 눈 감았을 때 존재고 눈 떴을 때도 존재지요. 사건은 없어요. 그럼 뭐가 돼요? 누가 네 병을 낫게 했느냐 할 때에 소경이 주저합니다. 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의 가장 위험은 뭡니까? 내 존재가 목숨 끊어진 게 제일 무섭잖아요. 기존의 그 세력 때문에. 그래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몰래 불러가지고 주께서 믿음 주니까 비로소 그 사람은 눈 뜬 것이 결코 눈 뜬 상태가 아닌 것을 알았어요. 그냥 육신에서 육신이지 육신에서 영으로 간 게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눈 뜬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눈 뜨게 하신 동사, 눈 뜨게 하신 주님의 그 사건 그게 더 중요한 거에요. 그러고 난 뒤에 요한복음 9장에서 하는 말씀이 눈 떴다 하니까 네가 보지 못하고 네가 감겼다고 하니까 네가 바로 눈 뜬 사람이다.

결국 이것은 무슨 소리냐? 떴다 감겼다 소경이다 아니다 그 사이에서 뭘 끄집어내요? 그 사이에서. 수술 칼, 잘랐다는 그 사이에서 뭘 끄집어내요? 의미를 끄집어내요. 그 의미는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관통되는 계열화되는 의미입니다. 의미는 구조화되어 있어요. 의미는 구조화되어 있다 이걸 설명해 보겠습니다.

의미가 구조화됐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제가 주일날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장터에 열악한 도넛가게. 나쁜 기름 써서 파는데 있잖아요. 거기에 뭐가 있다 했어요? 뜰채가 있죠. 뜰채. 뜰채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뜰채가 있지요. 뜰채 이렇게 손잡이 보게 되면요. 테두리는 굵지만 여기에 이렇게 철망 되어 있으면 틀망에 구조 틀만 있지 안에 내용이 있습니까? 없지요. 이 안에 내용이 있으면 안돼요.

왜냐하면 여기 도넛만 건지고 뭐는 빠져야 돼요? 기름은 빠져야 되거든요. 따라서 철망만 있어야지 본인이 뭐 여기 나는 서울대학 나오고 이런 거 필요 없어요 이거. 사건의 계열만 있어야 돼요. 사건의 계열. 사건의 계열만 있어야 돼요. 계열만. 내가 이만큼 축적했습니다. 돈 이만큼 모았습니다. 이만큼 공부 잘한다 필요 없어요. 사건의 계열. ‘사건의 계열’.

사도행전 9장에서 사도 바울이 너 뭐야? 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주님이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리고 베드로에게도 이야기했지요. 베드로에게 너 뭐야? 할 때 하는 말이 우리가 예전에 변화산에 올라갈 때 갑자기 해 같이 빛나서 그 이야기하지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의 말을 들으라” 그러면 이것은 자기 존재가 아니고 주님의 존재잖아요.

주님이 일으킨 사건의 그 사건 계열에 속해 버렸으면 그 사람은 더는 다른 소원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어떤 기쁨을 새삼스럽게 기쁨을 찾을 필요가 없어요. 그걸로 게임오버에요. 그 인생은 게임오버되었어요. 죽던지 살던지 상관없어요. 죽음이 나를 슬프게하지 않습니다. 그걸로 게임오버된 거에요.

왜? 자기는 사건의 계열 속에 이미 성령을 통해서 포함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먹든지 마시든지 뭐든지 즐겁게 살면 돼요. 즐겁게. 골프치던지 아니면 해외 놀러가서 코로나 걸리든지 관계없어요. 뭐든지 즐거워요. 난 이 크루즈 여행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그런 소리하지 말고.주님께서 사건으로 나를 건졌다는 것을 감사해서 크루즈여행 한 오천만원 들여가지고 돌아 다니는 거에요.

그게 무슨 흠이 됩니까? 증거하는게 십자가인데 그게 뭐가 흠이 돼요. 돈 못 써서 환장 했구나 욕을 하든지 말던지 나는 돈 때문에 기뻐하는게 아니고 크루즈 여행 때문에 기뻐하는게 아니고 이미 나는 완료됐다는 거에요. 이 사건 속에. 그러니까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존재가 뼈만 앙상한 존재가 된 거죠. 귀신이 떠난 자리는 메우지 마세요. 그냥 귀신이 떠난 자리는 비워두세요. 귀신 떠난 자리에 귀신 모시지 말고.

돈 떠난 자리, 돈을 떠난 자리에 돈으로 보상받을 생각하지 마세요. 한 800만원 보이스피싱 걸려가지고 날라갈 때 어떻게든 기도해가지고 빨리 800만원 후딱 들어오기를 기대하지 말고 비워두세요. 오년 전에 안 날린 것도 주님의 은혜였고 또 내일 한 오천만원 날릴 수도 있을 문제지만 어쨌든 간에 그것은 존재에 속한 내 관할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내게 속한 문제 아니에요. 그래서 사건이 있으면 뭐가 날라가 버립니까? 윤리 없지요. 도덕 없지요.

윤리 도덕 없으면 뭐가 없느냐 하면은 세상적인 죄에 대한 책임감 없습니다. 죄에 대한 책임감 없어요. 세상에 대한. 그러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주께서 우리 이 성도의 육신을 가지고 어린양의 취지를 반복하기 위해서 육신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죄를 더 계속해서 생산해내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더 살게 하는 겁니다.

주님 중심으로 주님으로 만족하다가 하루만 살짝 지나가버리면 온갖 동네 쓰레기는 다 모였어요. 머릿속에 다 들어옵니다. 애가 운전 배운다고 나갔는데 사고는 안 일으키는지 그것부터 시작해가지고 온갖 걱정 근심은 다 들어와요. 내일 윤석열 체포한다는데 남 체포하는 것까지 걱정 다 하고 있어. 온갖 걱정 근심은 다 들어오지요.

누가 들어오게 하게 하십니까? 온갖 열병은 다 들어와요. 온갖 열병. 누가 그렇게 하셔요?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왜? 새로운 복음으로 그걸 콘크리트 하기 위해서는. 내 힘으로 천국까지 가지 못하도록 방지를 해주시는 겁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열병은 나았지만 치과는 가야돼요 나중에. 그리고 귀신은 갔지만 그 귀신 있는 집은 또 다른 게 또 들어와요.

42절 보겠습니다.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야 이거 진짜 오늘 결론 부분 나옵니다. 예수님을 소유화하는 겁니다. 이렇게 좋은 분 써먹을 데가 많다는 뜻이겠지요. 써먹을 데가 많은 거에요. 그래서 주일 낮에 이런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거주할 수는 있지만 정주해서는 안된다. 흐름이죠. 인간은 흐르는게 아니고 스탑. 어떤 정지된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리고 세상과 연결중심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흐름이죠 흐름. 왜?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잖아요. 예수님의 신체를 고정시켜놓은 것으로 보지 마시고 어떻게 하느냐? 따라가면서 신체를 따라가면서 파악을 해야 돼요.

제자들도 일부러 제자들에게 자꾸 예수님께서 데리고 다닌 거에요. 갈릴리에서 유다로. 주님의 신체와 더불어서 우르르 가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대구강의에서 그걸 뭐라고 했냐 하면은 cloud. 크라우드라는 개별자 개체가 아니고 이것을 영어로 하면 구름이죠. 컴퓨터 용어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정보를 집어넣어놓고 뽑아내는 것 크라우드라고 하잖아요.

이걸 쉬운 말로 하면 이게 뭐냐? 덩어리에요. 덩어리. 어떤 덩어리? 구름 덩어리. 기체덩어리. 이 세상은 개인과 개인의 싸움이 아니고 각자가 자신이 속해있는 덩어리의 대표자로서 싸우는 거에요. 우리의 씨름과 우리의 모든 활동은 영과 육에 관한 것이 아니고 공중권세 잡은 세상신이다.

공중권세 잡은 자 나오라 하지 마세요. 세상 자체가 하나의 덩어리니까. 구름 덩어리니까. 그 영향을 다 받고 있으니까. 누구 하나 똑바로 회개한다고 해서 그 사람 회개한다고 세상이 달라질 리는 없습니다. 그냥 두 구름사이에 충돌이죠.

그 충돌 사이에 번개 치듯이 충돌하면 충돌할수록 십자가 사건만 점점 더 반복해서 일어날 뿐입니다. 지지직 지지직 음극 양극 충돌하듯이. 그게 우리 살아 있으면서 십자가 증인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우리가 속한 구름과 저쪽 구름이 서로 충돌하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서로가 개별자가 충돌한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그럼 나 잘난 게 돼요. 내가 그렇게 한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몰아세웠고 내 책임 아니고 주께서 그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도록 조치했기 때문에 그냥 십자가만 증거되게 되면 우리의 할 일은 다 끝나지요.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 이렇게 병고치고 하니까 사람들이 한적한 곳에 오니까 자꾸 떠나지 못하게 하니라.

그 다음에 43절 봅시다.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됐습니다. 다른 동네에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복음 전달 자체가 사건이기 때문에 어떤 시간과 공간에 종속되지를 않아요. 이 말은 예수님만 그런 게 아니고 저와 여러분들도 그렇게 되는 거에요.

여러분 자신의 장기나 주특기를 드러낸다면 여러분들은 개별적 의미가 있지만 내가 장기와 주특기를 드러낸 게 아니고 복음의 십자가를 드러내게 된다면 그것은 내가 미국 가서 사나 독일 가서 사나 어딜 가서 살아도 내가 어느 지점에 있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겁니다.

내가 누굴 만나고 헤어지고 내가 결혼한 사람과 어떻게 되고 또는 우연히 첫사랑을 만났다. 개별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첫사랑을 만나든 두 번째 사랑을 만나든 세 번째 사랑을 만나는 뭐 몇 번째 사랑까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은 만나도 중요한 것은 주께서 그렇게 만나게 하셨기 때문에 너라는 죄인이 나같은 죄인 만났구나라고 생각하면 되지 달리 생각하면 안돼요.

이제 와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혼자서 울고 진작 내가 붙들 때 유학 간다고 도망가지 말고 그때 같이 결혼하지. 너는 다 말아먹고 나 잘 되니까 찾아왔구나 자꾸 뭐 드라마 생각해가지고 저거 어떻게 처치하지?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만나나 헤어지나 관계없이 내가 전할 것은 나는 내 성질은 지랄같다. 나는 한결같이 엉망이다. 첫사랑 두 번째 사랑 만나도 관계 없어요.

그것만 증거하면 되는 거에요. “네가 달라졌구나.” “그래 내가 달라졌다.” “누구 때문이냐?” “복음 듣고 달라졌다.” “나도 달라졌는데.” 둘 다 달라졌다고 삐지는 영화가 밀양이라는 영화에요. 전도연이 달라졌다고 교도소에 가가지고 자기 아들 죽인 사람이 나도 달라졌는데 그걸 듣고 삐져가지고 나 예수 안 믿는다 이렇게.

전부 다 암반층이 나온 거에요. 복음은 지식이고 젓가락이 통과를 못하네. 십자가만 자랑하면 되는데 십자가 믿는 나를 자랑한다고 그렇게 한 거에요. 그것은 바로 복음 아는 것이 선이라고 여겼던 새로운 윤리와 도덕에 그 귀신에서 못 빠져나와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다시 다른 주님의 시선으로 보게 하옵소서.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로 주님의 사건으로 죄 사함을 위해서 살아있음을 확신하고 그것을 감사하면서 더는 걱정하지 않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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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113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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