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4장 29절 (암반층) 201208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4장 29절 (암반층) 201208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4장 28절에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30절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이 무슨 situation이냐 하는 겁니다.
분명히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들고. 붙들 땐 예수님이 붙잡혔지요. 사람들이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끌고 가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갑니다. 그 의도가 그냥 협박이나 할려고 끌고 가는 것이 아니겠지요. 산 낭떠러지니까 거기서 이렇게 밀게 되면 죽게 되지요. 밀쳤습니다.
붙잡고 밀쳤는데 그 다음의 상황이 예수께서 저들 가운데 지나서 가시니라. 예수님이 기체인가요? 분명히 붙잡아서 떠밀었는데 방향을 반대 방향으로 해가지고. 나 지나갈래 한다고 지나가세요 할 것 같으면 끌고 올 이유가 없을 거 아닙니까. “그냥 지나가세요”가 안 되고 그냥 끌고 가는 거에요. 이 대목을 이제 우리가 한번 알아봅시다.
두 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신체를 세워놓고 파악하는 거에요. 신체를 세워놓고 파악하는 것. 그 다음에 신체를 세워놓고 파악하는 것과 신체를 따라가며 파악하는 것. 그 신체를 따라가며 파악하는 게 이 파악이 서로 달라요. 한쪽이 신체를 세워놓고 하게 되면 이 신체는 뭐냐 하면은 고정이 되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움직이는 것은 뭐냐 하면은 신체가 아니고 영혼 또는 정신, 이것을 측정할려고 하는 겁니다. 신체를 고정시켜 놓고 정신과 영혼을 뽑아내서 당신은 누구라고 설명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면 이것을 그대로 해 봅시다. 예수님을 세워놓고 파악하는 것.
세워놓고 파악하는 것. 예수님은 누구신가 파악할 때 여기서 뭘 꺼내느냐? 예수님의 영혼과 예수님의 정신을 측정할려고 하겠지요. 똑같으니까. 신체니까. 예수님은 신체를 가지고 오셨으니까. 그러면 사람들은 뭐만 뽑아내요? 예수님의 신체는 놔두고 이것만 뽑아내지요.
그러나 이걸 그대로 적용시킵니다. 예수님의 신체를 따라가며 파악할 때 이것은 열두제자가 실패한 겁니다. 열두제자가 실패했어 이거는. 따라갈려면 어디까지 따라가느냐 하면은 십자가 지기까지 따라가야 되거든요. 그거는 겁나는 일이거든요.
여기서 우리가 평소에 신체라는 것을 배제하고 정신과 영혼을 따로 뽑아내는 이 자체가 그분에 대해서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됩니다. 이런 사고관을 가지고 예수님의 말씀 말고, 오늘 본문, 밀고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밉니다. 고정되어 있는 신체를 떠밀어요. 붙잡아서.
그러면 예수님이 움직입니까? 본인이 움직여요? 본인이 움직이는 거에요. 떠미니까. 본인이 움직이고 예수님보고 우리 움직임 따라서 너는 강제로 우리한테 붙잡혀 가지고 우리 이끄는 대로 가야돼 라고 낭떠러지로 가게 한거에요. 그런데 그 마지막 낭떠러지 마지막에 서서 그들의 신체들이 있는 사이에 예수님의 신체가 그냥 스윽 지나가서 반대 방향으로 나 집에 갈래 해가지고 그냥 와버린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신체가 떠미는대로 떠밀린다라고 생각했던 그 신체, 그 신체관 자체는 본인의 평소에 본인을 생각하는 신체관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을 성립할 수 있지요. 그래서 여기서 어디서 잘못 되었는지를 제가 쉽게 예를 들겠습니다.
그 다음에 31절에 한번 봅시다.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말씀에 권세 있음이라” 그 다음에 33절에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귀신 들린 자가 있는데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귀신 들린 자가 있어서 소리 지르며 나옵니다.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하니까 예수님이 그 말을 듣고 좋아하시는게 아니고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라” 잠잠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잠잠하라’.
그래서 지금 30절과 33절 이걸 한꺼번에 제가 해석해 보겠습니다. 이 해석을 쉽게 하기 위해서 이걸 다 지우겠어요. 다 지우고 이걸 한번 문장을 한번 써볼게요. 수술 칼로 살점을 자른다. 수술 칼로 살점을 자른다라는 이 문장이 있다면 수술 칼 눈에 보이지요. 살점 눈에 보이지요. 그러면 뭐는 눈에 안보입니까? 자른다는 눈에 보입니까? 안보입니까? 안보이지요.
수술 칼, 이걸 명사라고 하고 자른다는 이걸 동사로 생각하는 거에요. 사람들은 명사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동사가 겉에 붙어있다고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동사 자른다는 것은 여기 살점이 여기 이렇게 있으면 이걸 가지고 실존한다 이렇게 하고 동사 있는 이것은 지속한다. 또는 존속한다. 지속한다, 존속한다 이렇게 됩니다.
이 자른다 할 때 이걸 동사라고 했는데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건의 표현. 수술 칼이 있고 살점이 있고 이것은 존재가 됩니다. 존재로써 예수님을 설명해버리면 예수님 말씀 특히 귀신이 나가고 하는 이런 말씀들은 전혀 이해를 할 수가 없어요.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존재로 하게 되면.
그럼 뭐냐 하면은 사건으로 표현하는 거에요. ‘주님의 사건’. 주님의 사건으로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은 키가 몇센치고 얼굴은 어떻게 생기고 거기에 주목해야 됩니까? 아니면 아까 신체를 세워놓고 봐야 돼요? 따라가며 봐야 됩니까? 신체를 따라가며 파악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움직임이고 그 자체가 늘 이렇게 전부 다 하나하나가 전부 다 움직일 때마다 사건이 되는 거에요.
사건이 되어버리면 여기 사건에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이게 첫 번째 중요한 겁니다. 사건에서 뭐가 생기느냐?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사건이 될 때 의미가 생기는 거에요. 수술 칼 있다 여기 살점 있다. 이거 의미 없어요. 자른다 할 때 의미가 생기는 겁니다. ‘자른다’. 자르는 것은 칼이라는 존재에 매여 있는 것도 아니고 살점에 매여 있는 것도 아니에요. 자른다는 그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서 두 물체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볼 때에 내 존재로 보니까 예수님은 내가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 수 있고 멀어지면 멀어졌다고 생각을 하지 내가 여기 존재하는 여기 있음 자체도 예수님의 일하심, 예수님이 벌린 사건을 위해서 내가 동원됐다는 생각을 우리가 잘 안하게 돼요. 평소의 모든 습성들이 동사 위주가 아니고 명사 위주기 때문에 그래요. ‘나’라는 실체 위주가 되는 거에요.
그러면 여기서 또 한가지 ‘나’ 이거는 물체지요. ‘물체’. 명사지요. 그러면 쉽게 말해서 ‘늙는다’ 이건 뭡니까? 늙는다 이것은 움직이는 거에요. 형태를 보여주는 동사잖아요. 늙는다. 눈에 보입니까? 안보이지요. ‘단풍’. 단풍은 명사지요. 단풍이 물든다. 든다를 본적 있습니까? 없어요.
늙는다 본적 있습니까? 늙어 가는 여러 가지의 변화된 어떤 물질 그런 모습만 볼뿐이에요. 늙는다는 그 과정은 눈에 보이지를 않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눈에 보이는 걸로 세상을 설명하는 자체가 잘못이에요. 그 자체로 설명한다면 예수님의 활동 하나도 이해 못합니다. 잘못된 거에요.
다시 할게요. 칼과 살점 사이에 여기에 의미가 부여가 됩니다. 의미가 부여가 되듯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중간에 사건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건을 부여하는 예수님이 중간에 들어가버립니다. 그러면 들어가버리면 인간에게 뭐가 나오느냐? 악마가 나오지요. 귀신이 나오는 겁니다.
그냥 아무리 분석하고 엑스레이 찍어봐야 악마 안 나와요. 악마가 인간 속에 있다라는 그 눈은 그 관점은 사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만 비로소 그걸 밝혀낼 수 있어요. 자, 그렇다면 좀 더 생각을 수술 칼로 자른다라고 되어있는데 자른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느냐? 상처지요. ‘상처’.
수술 칼과 살점을 자르는데 나중에 수술의 경과가 지나서 뭐가 남지요? 상처가 남지요. 이게 갈라디아서 6장 17절 내 몸의 십자가의, 십자가 사건이죠. 십자가 안보이죠. 십자가의 뭐다? 흔적이 있다. 내 몸에 십자가의 흔적이 있다.
그러니까 성도의 살갗에 뭔가 상처가 있다가 아니라 성도 존재 자체가 그리스도의 상처가 되는 겁니다. 성도 자체가. 성도 자체가 주님 주신 상처가 돼요. 이 존재를 포기하라는 시그널이 되는 거에요. 존재로 세상을 보지 말고 사건으로 보라는 시그널이 되는 겁니다. 이 상처로 사건을 집어넣어서 이해하게 되면 모든 게 이해돼요.
자, 기도란 무엇인가? 이걸 그대로 응용하면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라는 것은 결코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기 위한 모든 일을 벌리는 것. 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 어떤 결과가 나에게 도착되지 않는. 기도하는 이유는 모든 것도 내게로 돌아오지 않도록 하는 것, 이게 기도에요. 기도에요. 사건이 사건으로만 계속 이어지라고 하는 게 기도에요.
왜? 나는 사건의 효과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사건의 효과. 사건의 효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만약에 여러분 천국 갔을 때 누가 너 천국 오라고 했어? 할 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주님의 십자가 사건 때문에 사건의 흔적으로서 천국 왔습니다 이렇게 답변을 그렇게 해야 되겠지요? 그 답변을 기도라는 것으로 지금부터 하란 말이죠. 기도를 통해서.
어떤 경우도 내 존재로 유리하게 돌아오지 않게 하옵소서. 그게 바로 이 신체, 존재로만 예수님을 생각하는 인간들이 낭떠러지에 밀어서 떨어뜨릴려고 했는데 주님께서 중간에 스윽 통과해버린 거에요. 네 눈에 내가 존재로 보이냐? 나는 사건이다. 어떤 사건? 존재가 붙잡을 수 없음을 내가 보여줄게. 존재가 붙잡아서 낭떠러지까지 강제로 끌고 가는 그것이 사건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보여줄게. 무용지물. 그게 다 헛된 짓인 것을 보여줄게. 그렇게 되는 겁니다.
불도가 심한 집에 시집가니까 약속과 달라. 그 다음부터는 무조건 교회 못 가게 했습니다. 그다음에 교회 못 가게 해도 교회 가니까 머리 자르고 수치스럽게 만들어서 온갖 수단으로 교회 못 가게 만들었다 이 말이죠. 머리 막 잘랐는데 아무데나 막 잘라가지고 숭덩숭덩 잘랐다. 영구처럼 이렇게 막 자른 거에요.
그리고 모자도 못 쓰게 만들고. 옷도 집에 몸빼 밖에 없어서 몸빼 입고 돌아다니고. 설마 내가 저렇게 해도 부끄러워서 교회 사람 많은데 못 가겠지 했는데 그 새댁이 머리 다 잘리고 모자도 안 쓰고 몸빼 입고 교회 갔다 온 거에요. 시어머니가 네가 안 부끄럽더냐? 어머니 저를 존재로 보십니까? 어머니 보기에 내가 지금 존재로 보여요? 어머니가 본인 스스로 이해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이해되는 대상이라고 생각했습니까? 착각이십니다. 주께서 가게 하셨습니다.
그걸 제가 오후 설교 때 ‘얇은 그림자’. 우리는 폭이 없는 그림자, 얇은 그림자. 존재의 가벼움. 늦게 오신 분을 위해 다시 말씀드리면 신체를 세워놓고 보는 방법과 신체를 따라가며 신체를 보는 방법이 있어요. 그런데 세상 모든 사람은 선악과 따먹어서 자기가 절대화되었기 때문에 자기 절대화, 내 존재의 절대화를 포기를 못합니다.
그걸 주께서 아시고 주님께서도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왔거든요. 보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자기를 세워놓고 파악을 하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예수님도 그렇게 파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거에요. 가능하다고 오해한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 붙들고 낭떠러지에 떨어뜨릴려고 한 겁니다. 그러나 주님을 세워놓고 보면 안 되고 주님을 따라가며 봐야 되지요.
따라가며 봐야 열두제자가 왜 십자가 길에서 되돌아갔는지. 아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들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뽑아낼 재주가 없구나. 이 의미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거든요. 의미라는 것은. 의미라는 것은 사건이 일어나야 의미가 있어요. 부부가 주말에 할 일 없어서 그냥 텔레비전만 보고 그냥 가만히 있고 리모콘은 보통 여자가 갖고 있으니까 남편이 옆에 앉아 있습니다. 아침 먹고 티비 보고 점심 먹고 티비 보고 저녁 먹고 티비 보고 잤어요.
그럴 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의미라고 하는 것은 둘이 티비 보고 있을 때 갑자기 지붕이 무너져야 의미가 있어요. 갑자기 태풍 불어서 유리창이 깨질 때 그동안 움직이는 태풍을 따라가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말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 건너갈 수 있는 길은 있다? 없다? 없어요.
우리가 남하고 잘 사귈 수 있다? 없습니다. 반드시 사람과 사람이 하나 됨과 사람이 주님과 하나 될 때는 여기에 사건이 개입 되어야 돼요. 사건이 개입 되어야 이게 하나 되는 겁니다. 사건 없이는 그냥 거래고 흥정이고 그저 지켜보는 것이고 이용의 대상이 될 뿐이에요. 나 좋아라고 그냥 아는 척하는 것 뿐이에요. 하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건으로 딱 다가올 때 여러분 다 아는 것이니까 여러분 이 점은 쉬울 거에요. 예수님께서나 사도 바울이 여기서 입을 벌리고 뭘 하느냐? 복음을 이야기해요. 피 복음을 이야기 합니다. 세상의 모든 언약은 다 이루어졌다는 피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사건입니까? 존재입니까? 복음은 사건이죠. 복음은 사건이고 주님의 의미죠. 갑니다. 쭉쭉 가요.
그러면 이쪽의 사람들은 전부 다 존재입니다. ‘존재’. 사람을 존재로 만드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 따먹고 자기가 절대 존재가 된 거에요. ‘절대 존재’. 최후의 마지막 목적은 내 존재가 절대적인 존재로 굳어지는 그것이 악마의 목적이고 본인의 목적이 된 거에요. 모든 인간에게.
기도를 해도 나 잘되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 점 어렵지 않아요. 기도해도 모든 기도의 열매가 누구한테로 온다? 나한테 택배로 도착하기를 바라고 있는 거에요. 나에게 돌아오지 말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돌아오라고 기도하는 거에요. 간절히 그것도. 그 정도란 말이죠. 그럼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이쪽은 사건인데 받아들이는 인간은 존재지요.
주님은 피 복음을 이야기하면 주께서 정상적으로 이야기하면 피 복음을 이야기하게 되면 성도에게 성도의 피가 피는 피끼리 통하니까 그걸 아까 존속이라고 했지요. ‘존속’. 이어지는 것 지속. 같은 사건에서 같은 사건으로 주님이라는 사건이 성도에게 일어나게 되면 성도에게 뭡니까? 사건이 중심을 잡고 있지요. 그럼 피 복음이 왔을 때 거칠게 없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분명히 자기는 신자고 성도고 누구 앞에서 나는 피 복음 안다 막 피 복음 막 설교하고 강의하고 돌아다니면서 강의하고 나는 복음 안다고 해놓고 피 복음을 쭉 이야기하니까 중간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암반층 나와요. ‘암반층’. 이거는 마태복음 13장에 나오잖아요. 복음을 뿌렸는데 안에 뭐가 있다고? 바윗돌 암반층이 나와요. 암반층이 나와 가지고 팅~~ 복음이 튕겨 나가버립니다.
마중을 나올 필요 없어요. 복음 전해보니까 복음이 없다는 것이 들통이 나버린 겁니다. 내 절대적 악마가 들어있는 악마가 만들어낸 작품. 내 존재 건드리지 마라. 내 존재는 절대적이라는 것이 이게 암반층이 되어서 툭 튀어나와버리는 거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나 그 복음 안다. 고마해라 많이 먹었따 이렇게 되는 거에요. 튕겨져 나오는 거에요.
쑤욱 들어오는 게 아니고 사건이니까 존재가 아니니까 끝까지 피가 있는 곳으로 두 손가락이 만나듯이 ET에서 만나듯이 피를 이야기하면 피라고 답변 나와야 돼요. 다시 말해서 피 이야기 하면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되야 되는데 내가 뭐가 잘못됐는데? 이렇게 나와요. 갑자기 암반층이 나오는 거에요. 가짜였습니다. 이게 바로 존재라고 하면 왜 꾸미지 않겠어요.
오늘 아침 뉴스에 보니까 어떤 여자 가수가 코로나에 걸렸다는 거에요. 혹시 압니까? 설정인지 모르겠어요. 이찬원이 코로나 걸린 건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이찬원 누군지 모르지? 어떤 여자 가수가 코로나 걸렸단 말이죠. 그런데 그 여자가수는 TV 나올 때 항상 화장 떡칠하고 나오거든요. 반들반들 뭐 뿌려가지고 촉촉하게 나오잖아요.
그럼 여자가 화장을 한다는 것은 극한 고상함과 깨끗함과 순결함을 얼굴에 담았잖아요. 그러면 이 더러운 코로나에 걸릴 수 있다? 없다? 순결 그 자체 고상함 그 자체가 설마 저렇게 깨끗하고 순결하고 고상하고 촉촉한데 그 코로나, 더러운 사람이나 노숙자가 걸리는 그 코로나 걸릴 리가 없겠어 라고 했는데 걸렸어요. 한번 찾아봐요. 나는 모르겠는데 유명한 여자 가수래요. 청하. 얼굴은 깨끗하다니까.
깨끗하기 때문에 깨끗하다는 것은 건강의 표상이에요. 코로나하고는 정반대거든요. 코로나 걸렸다고요. 그러면 화장빨은 뭐냐? 은폐지요. 감추는 거에요. 자기의 더러움을 감추는 거에요. 메이크업은. 더러운 사건이 없다고 존재로서 커버하는 거에요. 이게 바로 복음 들어오면 피 마중을 해나갈 때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잖아요.
그러면 죄인을 부르러 왔다면 죄인은 내 것을 가질 권한이 있다 없다? 없지요. 없으면 고집 부릴 이유가 없잖아요. 내 것이 있어야 저항하지. 내 것이 없는데 왜 저항을 해요? 내 것이 없는데. 나만의 고유한 것이 없는데 왜 저항을 하느냐 이 말이죠. 앞뒤가 맞아야죠. 앞뒤가. “건드리지 마세요.” “실례지만 본인 것이 있습니까?” “없는데.” 없으면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왜 나와요? 본인 것이 있기 때문에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이죠.
33절에 “더러운 귀신아 나오라”. 그냥 귀신이 아니고 더러운 귀신이에요. 인간 속에 더러운 게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를 절대 존재화했다는 것이 창세기 3장에 그것과 연관된 내용입니다. 사건의 특징은 사건, 다른 말로 의미의 특징은 이게 구조화된 거에요. ‘구조화’. 다른 말로 ‘계열화’. 같은 말이에요. 모든 것이 전부다 계열화, 구조화된 겁니다.
이 말은 하나의 구조에 들어가면 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에요. 거기에 그 사건, 사건 유발자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인간은 빠져도 괜찮아요.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관계없어요. 무엇을 하든지 다 그리스도께서 하게 하신 거에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입니다. 나의 존재는 내 것이라고 따로 챙길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그러면 존재에서 사건 들어갈려면 망가져야 되지요. 망가져야 되지요. 귀신 빼내줄 때 아이고 더러운 귀신 있었구나 하고 후회하지 마시고 고마운 줄 알란 말이죠. 고마운 줄.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꿔주게 되면 “나 죄인입니다” 라고 감사의 고백을 하면서 나와야 돼요.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볼 수 있어야 돼요. 존재의 특징은 수리하고 개선하는 겁니다. 존재의 특징은 뭐냐? 인테리어 하는 거에요. 집 다시 뜯어고치는 거에요.
그러나 사건은 창조입니다. 네 것 뭐 있었어? 없었잖아. 너는 이제 네 것을 만드는 게 아니고 두 번 다시 너의 것이라는 게 없게 만들어줄게. 내 것으로 만들어줄게. 주님은 자기 것 창조해 나가시는 거에요. 무슨 내 것이 왜 있어요. 저 사람은 왜 키가 큽니까? 키 크게 창조했고 나는 왜 키가 작습니까? 작게 창조하신 거에요. 왜 거기에 대해서 실망하고 이러지 마세요.
실망한다는 것은 다른 상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대구강의에서 했거든요. 상상계는 이상자아고 상징계 현실계에서는 자아이상이라고. 그게 뭐냐 하면은 인간은 자기 잘될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전부 상상에서 하는 거에요. 어릴 때부터 상상하는 거고 막상 현실에서 하니까 이거 뭐 나를 인간취급 안하거든요. 인간취급 안하니까 나름대로 거기서 한번 두고 보자. 내가 여기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리라. 이게 자아이상입니다.
현실에 맞춘 새로운 나를 내가 만들어 나가겠다고 시도하는 게 자아이상이에요. 이상자아나 자아이상이나 둘 다 귀신들린 거나 마찬가지에요. 둘 다 귀신들린 거에요. 자기 것도 없는데 왜 자기 인생 자기가 신경 씁니까? 사건이 주어지는데. 의미가 주어지면 되거든요.
그러면 의미가 주어진다는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걸 어렵게 설명하면 굉장히 어려운데 여기 또 제가 동원되는 게 있잖아요. 동원되는 게 뭐냐 하면은 여러분 잘 아는 노래 가사 가지고 설명해보고 이걸 가지고 여러분한테 사건과 존재의 차이를 잘 아는지 물어보겠습니다.
가사를 그냥 읽어볼게요. 그날의 황홀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당신을 알았죠. 당신을 알았죠. 그 다음에 늦어도 그날 밤의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새벽이 되면 떠나야 될 사람을 보면서 자기는 뭘 하느냐 하면은 너무 그리워서 창문에 흐르는 빗방울 하나둘씩 헤아리고 있었는데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을 보면서 말없이 흐르는 눈물을 나는 감출 수가 없어요.
이런 가사를 조립해 보면 이게 무슨 노래냐 하면은 꼬마인형이에요. 꼬마인형 알아요? 그날의 황홀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어요라는 그 노래. 꼬마인형 노래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여기에 명사들이 계속 나와요. 명사들이. 꼬마인형이 뭐냐 하면은 모래성을 쌓고 쌓아도 나중에 한번 찾아보세요. 최진희가 부른 노래인데.
모래성을 계속 쌓고 쌓아도 모래성이니까 허물어지잖아요. 허물어져도 계속 쌓는 거에요. 왜냐하면은 약속 때문에. 그러니까 의미가 뭐냐 하면은 약속이에요. 의미할려고 꼬마인형까지 동원했는데. 자, 꼬마인형을 가슴에 품고 계속 그 좋았던 밤에 떠났던 그 사람을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뭐 때문에? 약속 때문에.
약속은 뭐냐 하면 이건 보이지 않아요. 이건 뭐다? 사건이고 이건 뭐다? 의미입니다. 의미인데 그 사람은 그 모래성을 쌓고 보고싶어서 뭘 꼭 쥐느냐 하면은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기다릴래요. 꼬마인형을.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그리고 허전함을 유리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나하나 세는 거에요. 언제 그 사람이 다시 오는가. 그 때 그 사람 잊지 못해서.
여기 빗방울, 그 다음에 밤, 새벽, 모래성, 꼬마인형. 전부 다 명사에요 명사. 존재라고요. 이런 존재 이런 행위를 계속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 나 언제 다시 돌아올게라는 거기에 뭐 때문에? 약속 때문에. 아 이거 은혜롭지 않습니까? 안 은혜로와요?
모든 것이 나의 일상은 무슨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분이 남긴 약속 중심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도저히 못 참겠다. 나중에 10분 쉬는 시간에 꼬마인형 가사 한번 들어보세요. 명사와 그리고 동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러니까 물론 이 꼬마인형 안고 있는 걸 잘했다는 건 아니에요. 왜 그러느냐 하면은 그 사람은 자기 존재를 세워놓고 보기 때문에.
따라가지 왜 안 따라갔어. 나라는 존재를 따라가야 되는데 나 있는 곳에 꼬마인형 안고 있는 나에게 돌아오라는 거에요. 이것은 뭐냐 하면은 존재에서 존재로 가는 거에요. 그런데 그 떠나보낸 님을 그리워하는 그 여자라면 그 여자는 뭘 모르느냐 하면은 자기가 그 남자의 약속으로 인하여 자기 자신이 명사가 아니고 동사로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지식으로 해가지고 오실 예수님 기다리는 게 성도가 아니에요. 그 주께서 활동함에 있어서 성도 자체가 본인도 모르게 지금 명사에서 동사화되어가고 있는 겁니다. 본인도 그걸 몰랐지요. 주께서 나를 어떻게 변신시킨다 되는데 아까대로 이야기하면 어떻게 창조하는지를 어떻게 모르는 거에요. 그럼 정답은 뭐냐? 나를 허물어트리는 거에요.
인테리어 정도가 아니고 아예 나를 죽게 함으로서 나의 것이 아니고 주의 것으로 창조하는 작업을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시행사한테 맡겨가지고 성령한테 맡겨가지고 일방적으로 지금 내 것은 허물고 나의 과거는 허물고 주님의 미래, 주님의 약속으로 우리를 다시 창조하는 작업을 다시 하시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귀신아 나가라 한 거에요.
그런데 귀신은 창조의 대상이 아니거든요. 입 다물어 너는 입 다물라. 입 다물라. 마귀도 알아요. 예수여 당신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우리가 하는 존재, 구축된 존재의 세계에 왜 이렇게 공격하십니까? 주님은 너 말고 내 사람 창조하기 위해서. 그러면 주님의 사람 있습니까? 없어요.
없는데 주께서 귀신과 그 인간을 분리함으로써 드디어 존재에 속한 인간을 주님의 사건에 집어넣음으로써 그 사람은 예수님 존재를 예수님의 존재의 확장으로서의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거에요. 이 점을 한번 설명하겠습니다.
아까 꼬마인형을 가지고 내용을 대체로 알았으니까 다시 하게 되면 그 여자라면 그 님을 기다리는 여자라면 자아는 어디서 규정하느냐 하면은 자아는 과거가 규정해요. 과거가. 나의 과거가 지금의 나를 규정을 한다고요. 나 왕년에 잘나갔어. 이 규정을 이렇게 해요. 현재 나는 받쳐주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은 과거의 기억이 나를 받쳐주는 겁니다.
그러면 과거라고 하는 것은 현재에 와서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은 그리움이 되는 거에요. 그리움. 그래서 현재에 사는 사람이 뭐로 사느냐? 뭐로 사느냐? 보통 사람은 미래의 꿈으로 산다고 하는데 미래의 꿈은 그냥 올 수 없고 과거를 돌아서서 미래로 가거든요. 내가 그리운 사람, 내가 보고 싶은 사람, 내가 함께 있는 사람을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나가 나의 미래가 돼요.
사람은 체험하는 것 외에는 바라지를 않아요. 체험하는 것 외에는. 엉뚱한 것 나는 하늘을 날고 싶다. 나는 싫어요. 군에 가서도 공수훈련 안 받았습니다. 그 짓 왜 하느냐. 하늘 나는 것을 왜 하느냐. 사람은 걸어다니는 것도 감사하지 하늘을 왜 날아요. 그런데 과거에 공수훈련 받았던 날아 본 사람은 군에 제대해도 뭐가 그리워요? 헹글라이더 해볼까 이렇게 나온다고요. 그 사람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어디서 나온다고요? 과거의 본인이 체험한 것 중에 나온다고요.
그러면 인간의 자아라고 하는 것은 중간의 현재 미래 과거를 관통하는 자아는 무엇으로 규정된다? 과거가 현재의 자아를 규정을 하는 겁니다. 과거의. 어떤 사람이 만약에 20살 때 결혼을 했다. 어떤 남자하고 결혼을 했다. 그러면 이 사람의 만족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20살 때 말고 18살 때 19살 때 자기가 결혼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겠지요.
나는 어떤 남자와 결혼해서 이렇게 행복하겠다 이런 꿈을 꾸잖아요. 잘 들어보세요. 18세 19세 때는 미래지요. 미래. 그러면 어떤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어요? 그거는 1살 때부터 18세까지 봤던 남자, 어떤 남자? 백마 탔는데 왕자인 남자. 이건 미쳤지요. 백마 탔는데 돈 되고 성격되고 키 되고 집안 되고 건강하고. 키는 꼭 커야 돼. 머리되고 성격되고 집안 잘 살고 마음 좋고 나만 사랑하고 모든 걸 포용할 수 있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그걸 사랑으로 보듬어줄 수 있는 사람.
그거 어디서 체험했습니까? 동화책에서. 자기는 뭐에요? 늘 연약해. 사과 먹고 엎어져 있고. 자기는 연약해. 자기는 언니한테 구박을 받아서 누구 나한테 신발 주는 사람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서 항상 어릴 때 그 동화. 동화의 특징은 동화의 내용이 망하는 쪽이에요 성공하는 쪽입니까? 주로 동화 마지막에 지지리궁상으로 저주 받는 내용이에요? 복 받는 내용입니까?
복 받는 내용이지요. 누가? 남이요? 아니 내가 복 받지요. 그게 바로 마귀가 우리한테 심어준 인생의 엔진 아닙니까 엔진.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인간아” 이렇게 되거든요. 누가 누구 보고 이야기해요? 내가 나보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아이고 인간아. 그것도 사는 거야? 때려쳐.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너 나이 그만큼 먹도록 그것밖에 안돼?”
누가 누구보고 질책하고 있는 겁니까? 나보고 질책하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도 거기에 대해서 또 누가 위로해줘요? 내가 위로해주죠. 그래서 여러분 참 이야기 들으셔야 돼요. 죄란 뭐냐? 죄란 지금 잘 듣고 있는데 또 강요합니다. 잘 들으세요. 지금 잘 듣고 있는데. 죄란 나를 동정하는 것. 이게 죄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동정하는 것. 이게 지옥이죠. 자기 연민과 자기 위로.
어릴 때 과거가 규정된 나. 그 ‘나’가 그리운 거에요. 그 ‘나’가 그리운 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은 1세부터 18세까지에요. 그래서 뭐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충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20살 때 결혼했어요. 20살 때 결혼했는데 아 결혼하고 난 뒤에는 무를 수도 없고 결혼한 지 1년도 안돼서 무를 수도 없고 이렇게 됐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과거 속에 자아가 지워졌습니까? 안 지워졌습니까? 오히려 과거가 반격을 나타내지요. 뭐 괜찮은 남자 없나? 괜찮은 남자 이렇게 나오지요. 요새 드라마 이런 제목 있어요. 바람 피면 죽인다. 드라마. 조여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바람 피면 죽인다.
과거에 이런 생활을 기대하면서 나는 결혼이라는 것을 나는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내 자아가. 내 자아가. 따라서 이 자아는 과거가 규정했기 때문에 이 자아를 대충 양보하고 대충 그냥 어물쩍 넘어가버리면 무엇이 나를 공격하느냐 하면은 이 과거, 과거를 뭐라고 했습니까? ‘그리움’.
그리움 내용은 뭐냐 하면은 내가 보고 싶고 내가 살고 싶은 사람은 계속해서 꿈속에서 계속 나타나는 거에요 이게. 이게 귀신이 아니고 뭡니까. 이게 마귀가 아니고 뭐에요. 너는 이런 고생할 사람이 아니였었었어. 계속해서 나에게 닦달내고 나를 힘들게 합니다. 친구만 그런게 아니고 친구는 내 좋은대로 눈치 봐서 나 격려한다고 아까 이야기했지요. 죄란 뭐라고요? 서로가 서로를 동정하는 것. 격려하는 것.
이 모든 잘못이 존재에서 나옵니다. 존재에서. 존재라고 하는 것은 주님 보시기에 존재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놀이동산에 가게 되면 이걸 뭐라고 합니까? 이게 묶여져 있고 이렇게 달려가지고 빙빙 도는 것. 그네지요. 회전그네. 존재라고 하는 것은 악마가 인간을 회전그네처럼 달고 다니는 거에요.
휘휘~~ 아무리 미국 가서 살아도 독일 가서 살아도. 미국 가서 살아도 맨날 보는 게 뭐냐 하면은 7080이고, 왜? 그리움 때문에. 미국 간 교포들 그리움에 사무칩니다. 아이고 내가 죽을 때는 한국에 가야되는데. 맨날 이 생각하면서 벌써 나이 80, 90 넘었어요. 어떻게 자아 자체가 과거인데 어떻게 과거를 잊어버립니까. 어떻게 과거를 잊어버려요.
심지어 나를 버리고 나를 차고 간 그 남자도 그리울 때가 많아요. 노래에 그런 게 있어요. 혼자서 상상하는 거에요. 상상계. 너는 나를 찼지만 그러나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내가 받아줄게. 자기가 자기 보고. 올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내가 다시 오면 내가 옆자리에 받아줄게. 그 가사가 노래는 모르겠는데.
아가서 나온 책 있지요. 거기에 보면 그 가사가 나와요. 아이고 되게 배려심이 많아요. 누구 위한 배려심입니까? 자기의 그리움이 주는 그 칼날, 살점 베이는 그리움. 이 그리움은 아무리 집안이 잘 살고 아무리 자식들이 잘 되고 아무리 남편이 잘해줘도 소용없습니다. 너의 과거는 너의 과거고 나의 과거는 나의 과거에요. 어떻게 두 과거가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돈 때문에 그냥 사는 거지. 어떻게 말이 통할 수가 있어요. 안되지.
마태복음 11장 보겠습니다. 참 안 되는걸 주께서 되게 하시니까 참 감사하지요. 11장 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무엇이 보며? 무엇이 봅니까? 소경이죠. 그 다음에 무엇이 걷습니까? 앉은뱅이죠. 그 다음에 무엇이 깨끗함을 얻습니까? 여러분 짜증나지만 조금 참으세요. 그 다음에 무엇이 듣습니까? 귀머거리. 그 다음에 뭐가 살아납니까? 죽은 자.
여기에 보이고 듣고 살아나는 것 전부 다 동사에요. 그러나 앞에 뭡니까? 전부 다 존재라니까요. 존재를 주께서 어떻게 한다? 사건으로 만드는 거에요. 나 소경인데 눈 뜬 소경이라고 하면 안돼요. 나는 소경인데 눈 떴다가 돼야 돼요. 눈 뜬 정상인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럴려면 이거는 예수님의 증인 아니고 나의 증인되어버려요.
그러면 주님께서 도로 소경되게 할 수가 있어요. 왜? 주님을 따라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도로 소경되면 주님을 위해서 소경 되라면 소경 되야지요. 어차피 더 이상 이거는 인테리어 정도가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니까. 날 위한 피조물은 없어요. 주님을 위한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주께서 원하시면 도로 소경 되야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존재는 주님이 차지하시고 우리는 그 존재를 보여주는 사건, 움직임만 되면 되는 거에요. 하나의 주님의 그림자만 되면 되죠. 그러니까 아까 처음에 악마가 우리의 존재를 했지요. 이제는 주님이 그 존재의 자리에서 우리를 사건으로 돌려버리는 겁니다.
그러면 귀신보고 나가라고 할 때에 그 귀신 자리에 누가 들어오죠? 주님이 들어와서 주님이 새롭게 만드는 그 작업을 주께서 십자가 지고 가는 과정을 통해서 지금부터 계시한다는 뜻이에요. 말씀이. 이 말씀이. 주님 그렇게 귀신 잘 쫓아내는데 내 귀신도 쫓아내세요 이러지 마세요. 결국 그것은 내 존재가 주님의 존재를 이용하는 거에요.
나를 이런 인간 만들어 주세요라고 할 때 그건 뭐냐? 자기가 과거 때 내가 과거에 체험한 내 자아이상, 이상자아. 내가 그리워하던 어릴 때는 이상자아고 클 때는 자아이상 되겠지요. 현실 속에 살기 때문에. 어쨌든 간에 내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으로 바꿔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지요.
그러나 그 기도는 존재에서 존재로 가는 기도. 육에서 육으로 가는 기도죠. 육에서 영이 되는 기도가 아닙니다. 고체에서 고체로 가는 기도지 고체가 기체가 되는 기도는 아니지요. 우리는 이 땅에 잠시 태어났다가 사라지면 하나의 연기처럼 사라져도 상관없어요. 왜? 전에 귀신을 붙잡고 있던 그 자리에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증인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