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01210b슥4장1절(장애물)-이 근호 목사
안양20201210b슥4장1절(장애물)-이 근호 목사
천사의 평면이 땅의 평면을 덮었을 때에 하늘을 쳐다보면 안 된다 이 말이죠. 왜 그런 이야기하느냐 하면 변화산에 있을 때에 예수님이 엘리야하고 모세하고 같이 나타났잖아요. 그 때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고 같이 모시겠습니다. 해서 인간 쪽에서 하늘나라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베드로가 오해한 거예요. 그런데 잠시 보여주고 날아가 버릴 때에 그 때 제자들은 뭘 쳐다봤느냐 하면 왜 하늘을 쳐다보느냐 말이에요. 하늘의 음성이 들리니까. 똑같은 이야기가 바로 사도행전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을 올라가니까 천사가 있다가 왜 하늘을 쳐다보느냐 말이에요. 스가랴에 보면 이미 천사가 이 땅을 접수했잖아요. 이 땅은 누구의 작업장이다? 천사의 작업장이에요.
초월적인 것이 극히 육적인 모양새로 왔다는 말은 이미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는 활동의 연속 연장이에요. 제가 강의 시간에 대중가요 트로트는 클래식도 아니고 클래식은 옛날식 대중가요고요. 왜 꼬마인형이라는 그 가요를 이야기하느냐 하면 사람들이 그 가요를 작곡한 사람이나 작사한 사람이나 노래 부르는 사람 전부 다 우리 인간들 기분 좋아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 인간들 기분 좋으라고. 그럼 인간들 기분 좋으면 인간 자체가 뭐냐, 실체가 되고 거점이 되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인간 자체가 실체가 되고 거점이 되고 실체와 거점이 된다면 모든 나오는 능력이나 힘들은 어디로 도로 돌아옵니까. 나의 즐거움으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나의 즐거움으로. 물론 내 안에는 마귀가 기다리고 있고. 마귀가 그렇게 우리에게 유도하고 부리고 살았지요. 그러나 이것은 곧 뭐냐 하면 내가 능력 있다는 말은 내가 살아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내가 살아있는 한 우리는 십자가를 몰라요. 십자가라는 지식, 십자가라는 방법, 그런 건 다 알아요. 그러나 십자가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돼요. 왜, 우리 속에 마귀가 있으면 마귀가 예수님한테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과 나와 상관없다고 했지요. 누가복음4장에서. 당신과 나와 상관이 없는 거예요.
상관있으려면 우리로 하여금 내가 산자가 되면 안 되고 어떻게 되어야 돼요? 죽은 자가 되어야 돼요. 죽은 자라 하는 것은 무능한 자가 되고, 무능하다는 말은 내가 이 세상에 거점이 될 수 없다는 겁니다. 거점은 어디서 찾는가, 어디 헤브론에서 찾을까요. 아니면 베들레헴에서 찾을까요. 그건 옛날 거리를 돌아다니는 아브라함의 나그네 때고 지금은 신약 시대는 뭐냐, 위에서 어떻게 한다? 위에서 그냥 내려오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베드로가 오해한 것처럼 여기가 좋사오니, 본인이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인정을 안 해서 그래요. 우리 좋은 게 좋다는 겁니다. 내가 보는 대로 보인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니가 보는 것은 전부다 장애고, 니가 듣는 것도 장애고, 니가 냄새 맡는 것도 장애고, 니가 씹고, 걷고, 먹고, 마시고, 하는 모든 것도 나한테는 그 하나님의 뜻을 막아서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는 겁니다. 장애물로. 그러니까 천사가 와서 스가랴를 깨워야 되지요. 깨워야 되는 거예요. 역사에서 만드는 성전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에. 100층, 180층 짓는데 이거 뭐 성전하나 못 지을까요. 이 성전을 성전이라고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럼 성전은 뭐냐, 순금 등대로부터 확장되는 또는 순금 등대를 모실만한 성전. 이 순금 등대가 천사의 평면, 천사의 작업장이라면 성전은 천사의 작업장 안에서 견딜 수 있는 감당될 수 있는 성전이 새로 등장해야 되겠지요. 그게 바로 예수님이고, 그게 오늘날 우리의 몸입니다.
우리의 몸은 대중가요를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이에요. 이 대중가요를 받아들일 때 전에는 우리의 즐거움이었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내 즐거움 자체가 주님의 장애물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게 만드는 그러한 대중가요. 그러한 꼬마인형. 그 가사를 어떻게 분석하느냐, 거기서 바로 실체와 실체를 연결시키는 동사. 동사 그 흐름을 파악하는 거예요.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들의 세계에서도 본인이 본인을 어쩔 수 없는 감정들이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상당히 마귀적이지만, 그 꼬마인형 가사 초반에 보면 무슨 밤이라 했습니까?
가사.
그 날 밤 황홀한 시간을
난 잊을 수가 없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
당신을 알고 말았죠.
말없이 흐르던 눈물을
난 감출 수가 없었네.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하나둘 세고 있었죠.
늦어도 그 날까지
약속만을 남겨둔 채로
밤이 지나고
새벽 먼 길을
떠나갈 사람이여
부서지는 모래성을
쌓으며 또 쌓으며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그날 밤 황홀한 시간, 이것은 본인의 이성과 본인의 이성을 넘어섰지요. 그러면 갑자기 그 남자 앞에서 자기는 실체로 느껴집니까? 아니면 그 남자가 내 실체를 대신하는 실체로 등장합니까? 그이만 있다면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요. 그냥 합치면 되니까. 이걸 세상에서는 뭐냐 하면 사랑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난 화요일날 어떤 분을 만났는데 성경 이야기하면서 했는데 그 분이 나름대로 성경공부하면서 제일 어려운 게 아가서가 그렇게 어렵다는 거예요. 아가서가. 아무리 봐도 아가서가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왜 이해가 안 되느냐, 본인이 장애물인 것을 모르고 본인이 실체로 다가서서 아가서를 보니까 그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이 연애하는 이야기가 왜 성경에 나와야 하면 그리고 그 성경해석에서 도대체 우리가 무엇을 찾을 수가 있는지를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서로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아름답다고 하는 게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 아는 십자가 복음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 말입니다.
무슨 관계가 있느냐, 라는 말은 솔직히 말해서 은혜가 안 다는 뜻이에요. 뭘 알아야 은혜가 되지요. 그걸 보고 뭐가 은혜가 되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지요. 은혜란 책망하는 것이고, 나를 질책하는 게 은혜거든요. 은혜를 받아야겠다는 나를 공격하는 게 은혜에요. 내 중심의 세계는 천국이 아닙니다. 지옥입니다. 그러면 내 중심 자체가 주님의 나라에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장애물이 돼요. 장애물이.
6차선 도로 한가운데에 차가 서있는 거예요. 뒤에서 박아버리면 그 차도 날아가지만 뒤차도 억울하게 죽는 수가 있어요. 서 있으면. 속도120을 막 달리는데 신호보고 오는데 뭐가 서있다. 브레이크 해도 소용없지요. 박아야지요. 우리가 주의 일에 고장 난 채로 박고 있으면서 우리는 주님이 나한테 박혔다는 생각을 못하고 상처받은 생각을 못하고 자기가 거기에 고정된 중심거점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성경에서는 좋은 것은 다 뽑아요. 십자가 피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기도하면 은혜 받습니까. 좋은 건 자기에게 다 모으는 거예요. 자기에게. 그 자기를 가위표 없앨 생각을 안 해요.
내 좋아라고 예수 믿고, 내 좋아라고 성경 본다는 뜻이에요. 그래도 지금도 자기 일에 바빠. 지금 무지 무지 바빠. 엄청 바빠. 순금 등대는 보여 지는 것이 아니고 스가랴에서는 보여줬잖아요. 보여 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감각되어지는 겁니다. 감각되어진다는 것은 아까 신호가 주는 충돌이겠지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어요. 보이지 않는 주님의 힘이 감각으로 오게 되면 나한테 와서 부딪힘이 발생합니다. 나는 딱딱한 장애물이니까. 어제 은혜 받아도 오늘 되면 또 딱딱해져요. 딱딱한 장애물에 부딪힘이 돼요. 그 부딪힘 속에서 왜 천사가 나를 호명했고, 왜 천사가 나를 사용하는 이유를 우리는 고마운 마음으로 기꺼이 장애물로 우리는 자인하게 됩니다.
제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자인하게 되지요. 변함이 없는 것은 순금 등대에요. 그 순금 등대에 끊임없이 채워지는 것은 두 감람나무라 했지요. 자, 두 감람나무가 신약에서 어떻게 설명되는지 요한계시록11장을 한 번 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천사의 평면입니다. 요한계시록11장에 보게 되면 11장4절 누가 한 번 크게 읽어보세요.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두 감람나무지요. 두 감람나무.
여기 스가랴4장에 우리가 보는 본문에서는 순금 등대가 몇 개입니까? 달랑 한 개지요. 등잔은 일곱 개있지만, 순금 등대는 하나지요. 여기는 두 감람나무와 촛대가 두 개 나와요. 이건 뭐냐 하면 스가랴에서는 천사가 보여주는 것은 순금 등대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보라고 초대받은 사람은 누굽니까. 스가랴 선지자 아닙니까. 이걸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순금 등대가 되게 되면 모든 성도는 예수님을 대체하는, 예수님을 대체한다는 것보다도 참, 이런 단어 여러분들이 감당할 수 있어야 돼요.
예수님의 국면. 시추에이션. 정황. 그 때 그 때 바뀌는 국면. 장면들이지요. 우리의 일상이 누구의 장면이라고요? 예수님의 활동하는 장면들이라 말이지요. 우리의 활동이. 집에서나 여기서나 어디에 가더라도 시장에 가더라도 우리의 모든 움직임은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고 주께서 힘 주셔서 움직이는 장면들이에요.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되어있지요.
이건 우리뿐만 아니고 세상의 모든 피조물 세계가 다 그래요. 하늘의 것이 땅에 드리워졌잖아요. 천사의 평면이 지상의 평면으로 오잖아요. 그게 드리워진 거죠. 드리워지게 되면 그동안 하늘을 차지했던 별들도 어떻게 되겠어요? 같이 동반해서 별도 떨어지고, 달도 떨어지고, 해도 떨어지고, 이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주의 일을 하늘을 보고 쳐다보지 말고 시시때때로 돌아가는 거 보세요. 추미애하고 윤석열 보란 말이죠. 그게 하늘의 뜻이에요. 그게 너무 거창합니까. 국가라는 것이 너무 거창하면 사적으로 아까 꼬마인형. 어떤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사랑을 즐기는데 그만 헤어졌다. 그 다음에 뭘 안고. 꼬마인형을 안잖아요. 모래성 쌓으면서. 그런 경험들이 없는 모양인가.
꼬마인형이 떠난 남자의 대행이거든요. 그걸 사랑이라 한다 말이죠. 사랑. 성경에서 그 사랑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자아가 해체된 거예요. 단순한 연결에서 결합해서 해체. 결합해서 해체되는 거죠. 천사와 연결되고 천사일에 결합되면서 그 천사가 나로 하여금 결국은 니는 무능하다고 되는 겁니다. 이건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 너 대신 하신 예수님이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해체된 입장에서 예수님의 국면, 예수님의 하시는 일을 정황을 그 때 그 때 보여주는 주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이 감람나무를 아까 그림을 잠시 그렸는데 등잔이 일곱 개가 있는데 여기에 기름이 필요하잖아요. 불이 붙으려면. 일곱 관이 있어가지고 스가랴4장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약간의 저장소가 있고 여기에 두 감람나무가 붓는 거예요. 그러면 부을 때 이 감람나무가 요한계시록11장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두 증인이지요. 두 선지자지요. 선지자가 붓는다는 것은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피가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선지자가 피 흘리기 위해서 자살하는 그런 거 아닙니다. 여기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그 선지자가 복음을 전하니까 여기에 12장 7절에 보면 그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있는데 그 짐승이 노림수가 있지요. 두 증인을 죽여 버리는 거예요. 전쟁을 벌여 저희를 이기고 두 증인을 이기고 그리고 두 증인을 죽이지요. 죽일 때 그 시체가 어디 있습니까? 큰 성 길에 있지요.
그러니까 선지자, 성도가 죽는 시체까지라도 주님께서는 딸딸 끌어서 다 활용을 하는 거예요. 왜, 사나 죽으나 어차피 예수님의 국면이니까. 예수님이 일하시는 증거들이니까 그래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는 완전히 빠지는 거예요. 내 주체가 있어버리면 십자가는 보이지를 않아요. 내가 해체되지 않으면 십자가가 내 앞에 등장하지 않는다니까요. 십자가 없어요.
그냥 내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 내가 천당 가기 위해서 믿는 십자가만 뇌리에 지식으로만 있을 뿐이지요. 그 지식이 있어봤자 그건 소용없어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3년 따라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천사가 성령께서 이렇게 다루신다고 보시면 제일 쉬워요.
여러분들이 학교 다닐 때 남자학교에 가면 교무실에 꼭 말썽꾸러기 쉬는 시간에 담배피우고 점심시간에 담배 피워서 걸린 애들 있잖아요. 피우지 말라 했는데 한 번 경고해도 안 되고 계속 피우는 애들 그 학생과장이 빨리 점심 먹고 학생과장이 하는 게 화장실 돌아다니고 담배피우는 애들 적발하는 일을 하잖아요. 작대기 이만한 거 들고 죽 하면 몇 놈씩 걸려온다. 그러면 교무실에 꿇어앉아 있을 때에 그 때 학생과장은 애들 나무란다고 힘들어가지고 팔뚝을 걷어요. 토시 이리 하고. 선생님들 토시 한다고요. 분필 묻지 말라고. 팔뚝 걷어요. 이게 뭐냐 하면 일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자기 일에. 꿇어앉아 있으면 다른 선생님들이 어떻게 봅니까. 그 학생선생님한테.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이러지요.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니 또 끌려왔어!” 나무라면서 “아이고, 선생님 수고 많으십니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우리가 말썽꾸러기에요. “손 들고 있어!” 이게 천사의 국면, 천사의 세계에요. 천사가 작업하는 작업장이에요. 우리는 맨날 내 능력을 자랑합니다. 내 지식을 자랑하고, 성경공부를 자랑하지요. 그거 담배피운 거예요. 맨날 말썽부리는 거예요. 무능한데, 무능하기가 싫은 거예요. 유능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설교를 들어서 위로 받고 싶고. 또 어떤 남자 선생님은 가다가 쥐어박아요. “또 왔어! 내가 피우지 말라 했지.” 또 쥐어박잖아요.
이 두 감람나무라서 스가랴는 신약에 와서 온전히 완성되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율법이라는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거든요. 창세기28장12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하늘에 닿았지요. 드디어 하늘과 땅이 연결이 되는 지점입니다. 연결되는 지점에 땅에 지점은 거점은 야곱이 되고요, 야곱의 돌베개가 되고 그 위의 지점에는 사닥다리의 끝 지점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 위에 누가 그렇게 분주해요?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지요. 그럼 야곱은 뭐예요? 야곱은 무능하지요. 무능한데 야곱의 복 받은 것은 바로 그 언약의 작업에 천사와 성령의 작업에 주님의 작업에 연계되어 있다는 게 행운이지요.
제가 어제 수요설교에서 책망 받을 확률은 벼락 맞을 확률이라 했습니다. 책망을 받아들일 확률이 벼락 맞을 확률이에요. 이게 회개하고 기도한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벼락을 맞아야 돼요. 벼락을. 벼락을 맞아야 내 속이 시커멓다는 것이 벼락을 맞아 옷이고 뭐고 다 타들어가야 돼요. 내장도 이빨이고 뭐 다 시커머야 돼요. 내가 시커먼스. 시커멓게 되어야 돼요. 그래야 뭐 또 해드릴까요. 이런 소리 안하지요. 시커먼 게 뭘 해드려요. 시커먼 게. 연탄재가, 말썽꾸러기가.
그래서 성령께서 천사가 하는 일을 그대로 하기 때문에. 천사는 율법대로 했고, 성령은 율법의 완성을 하기 때문에. 맨날 하는 게 뭐냐 채굴이에요. 발굴입니다. 후비고 발굴하는 거예요. 언제까지 너 편익을 위해서 살거냐고. 계속 발굴하는 거예요. 니 편익. 너가 너 자아를 언제까지 방어할래. 언제까지 방어할래.
다시 한 번 복습합시다. 그 자아라 하는 것은 과거에서 밀려온 거고 그 과거에 누적된 것은 자기의 가치지요. 유능함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제가 쓸모없다는 게 제일 싫어하는데. 그걸 또 복음에서 쓸모없다고 하니까 또 쓸모없을 본인을 또 만들어내요. 나는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본인이 부족하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 받아줍니다. 별이 떨어지듯이 별이 떨어져야 돼요. 이게. 떨어져서 박살나야 돼요. 박살나야 돼. 이 땅에서.
그래서 요한계시록11장 그 감람나무 두 사람. 우리 보기에는 얼마나 성령 받은 선지자 아닙니까. 그러나 이 땅에서는 어떻게 되었다고요? 어떤 예수님의 국면을 남긴다고요? 십자가의 국면을 시추에이션을 남기지요. 죽었다 이 말이지요. 누가 이겼어요? 적들이 이겼어요. 적은 어디서 올라온 적입니까? 무저갱에서 갇혀 있는 적들을 하나님께서 잠시 풀어준 거예요. 풀어줘서 무저갱에 갇혀있는 옥에서 풀어 나와서 뭐를 뭅니까? 그 세파트가. 도사견이 누굴 물어요? 복음 전하는 사람을 물잖아요. 물 때 그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은 어떤 사건입니까? 십자가 사건의 반복이지요.
성도가 이긴 게 아니에요. 누가 이겼어요? 마귀가 이긴 거예요. 그럼 성도는 진겁니까. 아니지요. 이게 요한계시록11장에 보니까 이게 11장 10절에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그러고 난 뒤에 저희가 구름을 타고 어디에 올라갔습니까? 하늘 위에 올라갔지요. 영혼이 올라갔다. 육체는 남았는데 영혼이 올라갔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돼요. 자아가 없는 이상은 영혼도 육체도 의미 없어요.
원래 본인이 있던 자리로 간 거예요. 원래. 땅에서는 죽었고 주 안에 살아있기 때문에 원래 주 안으로, 주 안에 있는 자가 주 안에 있는 자로 티를 낸 겁니다. 그래서 땅의 입장에서 볼 때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 걸로 그렇게 설명할 수밖에 없지요. 원래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잖아요. 구름 타고 올라갈 때 그 당시 제자들 입장에서는 올라간 게 되지만, 천사들 입장에서는 왜 쳐다보느냐, 주께서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있다는데 왜 자꾸 예수님이 우리 버리고 딴 데 갔다고 왜 그렇게 잘못 생각하고 있느냐를 지금 천사가 사도행전1장에서 제자들을 꾸짖는 거예요.
함께 있어. 기도해봐. 약속 주어질 거야. 약속이 오게 되면 떠난 적이 없고 비로소 함께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게 바로 오순절 성령이 오심입니다.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한 패밀리인데 떠나길 어딜 떠납니까. 아버지가 이 방에 있다가 저 방에 가면 떠나는 겁니까. 아버지! 가시면 안 되옵나이다. 이렇게 합니까. “야, 야, 나 좀 오줌 좀 누자.” “아니 되옵니다. 내 눈에 보여야 됩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봐서는 안 되고 주님을 눈으로 보려하지 말고, 이렇게 힘을 느끼는 거예요. 화장실 가도 그 힘을 느끼는 거예요.
물 내리는 소리 직~~, 아! 계시는구나. 느끼는 겁니다. 기침하면, 계시는구나! 늘 우리는 주님의 기침소리를 늘 듣는 거예요. 꼬마인형을 통해서도. 제가 광주강의 할 때, 김정수가 불렀던 이라는 노래 가사를 했다고 강남강의에서 했잖아요. 그 가사를 쓰고 중간에 어떻게 했습니까. 볼펜으로 구멍 뚫어버렸지요. 그 가사 내용이 여러분들이 아시지만 구구절절이 남편이 아내를 보는데 너무 야위었던 거예요. 그래서 잠자는 아내의 그 야윈 모습을 보면서 너무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가사를 써내려갑니다.
아무것도 없는 나만 믿고 시집와가지고 내 니 고생만 시켰구나! 내가 맹세하리라. 이제 맹세 나와요. 맹세하리라. 나 니한테 잘해줄게. 나는 니한테 그렇게 고생시켰는데 니는 이 세월동안 원망하지 않았는데 이제 맹세하리라. 남은여생을 너를 위해서 살래. 라고 할 때, 그 가사를 구멍을 뚫었지요. 찢어버린 거죠. 왜냐하면 그게 뭐냐 거점이에요. 이 땅이에요. 인간들의 세계가 그게 한계입니다. 예수 믿고 나 잘되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런 자기 자신에게 구멍을 뚫어야 돼요. 잠 잘 때 남편이 그런 이야기를 자기 후회하고 못해준 거 후회하면서 앞으로 잘해줄게. 라는 것을 아내가 자는 척하면서 다 들었다 칩시다. 아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여보, 이제 당신 정신 차렸군요. 이렇게 하니까 남편이 “내가 그럴 줄 알았지롱” 이리 나온다면 “미쳤냐! 내가 널 위해서 살아? 기대하지 마!” 이리 나온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꾸 동정하고 불쌍히 여겨버리면 내가 하나의 실체가 되고 거점이 돼서 모든 그 복음적 의미가 나에게 쏠리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11장을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 하면, 나도 예수님처럼 순교하게 되면 구원받아야지.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고요. 이게 말이 돼요? 요한계시록11장 보고 나도 이 땅에서 복음 강하게 외치다가 불교신자가 와가지고 나쁜 놈이 와가지고 나를 잡아가면 나는 기꺼이 잡히고 순교 당하겠다. 주여! 파키스탄 가겠습니다. 아프카니스탄, 스탄, 스탄, 길기스탄, 이슬람교에 가겠습니다. 가가지고 거기서 순교하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가면 이스라엘 나라 자살테러 있잖아요. IS테러 그거하고 다를 게 없잖아요. 똑같아요. 그게 뭡니까.
다시 이야기합니다. 실체가 있어버리면 눈으로 보고, 듣고, 이거에 대해서 굉장히 지저분해요. 우리는 보고 듣는 것, 전부 다 이건 장애물이에요. 내가 보는 것 때문에 주님이 안 보인다니까요. 듣는 것 때문에 주님이 안 들리고. 보는 주체, 듣는 주체, 걷는 주체, 말하는 주체, 전부 다 내가 주체가 되어버리면 주님은 그 자리에 안 보여요. 주께서 우리를 천사로 할 때는 우리의 해체입니다. 왜, 해체할 때 섭섭하게 여기지 마세요. 원래부터 무능한 자니까요.
자, 이제 어려운 거 해봅시다. 지금도 조금 어렵습니다마는 해봅시다. 에스겔1장10절,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 얼굴들, 천사들의 모습입니다. 하늘의 보좌지요. 하늘의 보좌는 그 보좌 자체가 정지되어있습니다. 일단은. 정지되어있어요. 왜냐, 거점이니까.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의 유일한 존재, 유일한 실체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정지되어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모양은 뭡니까? 그들의 모양은 넷은 사람의 얼굴이고, 넷은 사자의 얼굴이고, 넷은 소의 얼굴이고, 넷은 독수리의 얼굴이지요. 그 뒤에 죽 읽어보면 이들이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지상에 활동할 때는 뭐냐, 움직여요.
흐름이 된다고요. 고정에서 파견 받은 움직임이에요. 그런데 이 에스겔1장이 어떤 시점에 섰느냐 하면 지상의 성전이 파괴됐을 때 나온 계시거든요. 불타버렸을 때. 지상의 성전이. 지상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공부한 대로 지상의 인간들이 땅에 거점이 있었던 거예요. 성전이란 거점. 거점에 대해서 인간들이 관리를 못해요.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아까 그 채굴한다는 것.
왜 하나님이 주신 성전을 솔로몬 성전을 왜 관리 못했을까, 하나님의 신이 와서 채굴해보니까, 발굴해보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원수, 언약의 원수, 그 우상들이 있었던 겁니다. 우상들. 오늘 강의는 다 잊어버려도 이거는 잊지 마세요. ‘책망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는 신은 우상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책망으로 다가와요. 십자가라는 책망으로. 니가 나의 원수고, 니가 나의 장애물이야. 왔을 때, 그 한 가운데로 예스, 긍정하면서 그걸 통과해야 돼요. 그러면 우리는 장애물이 완전히 깨 부셔 가지고 살 떨리듯이 살점으로 성령에 의해서 조각 조각나야지요. 해체돼야지요. 해체되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분명히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였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어린양 덕분에 헤헤거리면서 촐랑대면서 그들은 세상 것을 낙을 누리는 거예요. 어린양의 죽음과 그들의 실생활이 연계가 안돼요. 연계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전은 어떻게 됩니까? 성전이 확대되어야 되겠지요. 그 성전 확대, 그 성전 건축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냈는데, 천사의 모습이 사자 같고, 인간 같고, 소 같고, 독수리 같은 그런 걸 보냅니다. 그게 뭐냐, 땅의 일로 나타난 천사의 작업이지요. 땅의 일로 나타난 천사의 작업입니다.
이게 각자 다른 일을 하지만 그 국면은 오직 하늘에 떠있는 유일한 고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보여주는 다양체가 됩니다. 다양체. 다양체라 하면 저는 안 가봤습니다만, 나이트클럽에 빙빙 도는 조명구가 있답니다. 반짝 반짝 돌면. 거기에 보면 색깔별로 색유리가 다른 색깔로 붙여 있잖아요. 모든 성도는 전부 다 다양해요. 다양하지만, 하나같이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국면이 되는 거예요.
남의 신앙을 흉내 낼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종합하게 되면 두 감람나무가 됩니다. 두 감람나무가. 자, 스가랴로 다시 와봅시다. 4장에 오게 되면, 여기에 두 감람나무가 나오지요. 두 감람나무가 땅에 있는 인물들이죠. 아까 봤지요. 요한계시록11장에. 땅에 있는 인물입니다. 땅에 있는 인물이 천사가 왔을 때는 도리어 나는 누구다. 하면 안돼요. 나는 누굽니다. 하지 말고 나는 감람나무 역할, 기능을 맡은 거예요. 왜, 천사처럼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의미가 없어야 돼요. 이미 지시에 따라 움직이니까.
감람나무 기능을 맡은 거예요. 천사는 천사의 기능을 맡듯이 우리는 우리 기능이 있는 거예요. 그럼 우리 기능은 뭡니까? 그냥 사세요. 바나나 먹고 그냥 사시면 된다 이 말입니다. 그냥 사세요. 노래 하나라도 무슨 의미를 찾고, 이 땅과 하늘의 격차를 차이를 발견하는 거예요. 땅의 사랑과 하늘의 사랑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니고 주님을 위한 사랑이에요.
그렇게 되면 어떤 노래도 뭐가 돼요? 찬송가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이게 논리가 너무 억지 아니냐, 하면 억지 같기도 합니다마는, 그럼 교회에서 찬송가 다 찢어버리고 그럼 ①번 임영웅 노래, 꼬마인형, 당신, 그런 유행가책으로 찬송을 하던 교회 와서 찬송가 부르고 집에서 유행가 부르던 마찬가지거든요. 사실은 마찬가지인데. 찬송가는 직접적이고 노골적이지요. 무거운 짐을 나 홀로 지고~, 직접적이고 세상에 나가면 꼬마인형을 가슴에 안고 나는 기다릴래요~~ 가슴에 오실 주님을 기다릴래요. 뭐 이리 되는 겁니다.
두 감람나무가 뭐냐 하면 바로 스가랴3장에 나오는 한 쪽은 왕이 되고, 한 쪽은 제사장이 되는 겁니다. 자, 이제부터 함축해서 여러분들이 정신 바짝 차려야 됩니다. 둘 다 왕과 제사장의 공통점은 기름 발린 자. 기름 발린 자니까 이걸 가지고 용어로 뭐냐, 메시아라고 합니다. 기름 발린 자를 메시아. 또는 헬라어로 하면 그리스도라 하지요. 예수 그 다음에 그리스도지요. 예수님, 기름 발린 자 예수님이에요.
그럼 기름 발린 자라는 것은 비록 땅에서 사셨지만 하늘에 천사들이 활동하는 하늘의 일에 기능자가 되는 겁니다. 그 기능자의 완성이 되겠지요. 이 세상의 기능자는 둘이 되는 겁니다. 왕과 플러스 제사장. 왕+제사장. 이게 하나가 아니고 땅에서는 두 기능이 있고 두 기능이 서로 결합되면서 여기서 희생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냥 제사장처럼 희생이 되어버리면 그 본질이 이 세상을 통치할 왕. 왕은 심판주를 말하거든요. 왕이라는 것이 안 드러나잖아요. 그냥 왕이 되어버리면 대단한 힘센 왕이기 때문에 설마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설마 흠집 하나 안 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말이죠. 그러나 하늘과 땅에서 땅이 이미 하늘에서 쫓겨 난 입장에서 이건 하나님의 일에 장애물이 되는 겁니다. 이 장애물을 하늘에서는 왕이 어떻게 통과하느냐, 제사장직을 가지고 통과하는 거예요.
왕1에서 제사장직을 만나면 나중에 왕2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 완성되는 작업에 자기 백성을 집어넣되 자기 백성은 소극적이고 장애물로 집어넣고 거기에 천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희생을 어떤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을 어떻게 작용해서 육에 속한 죄인을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만드는 그 과정을 보여주면서 하나님께 영광 받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런 이 작업을 위해서 이 지상에 있으면서 여러 민족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특수한 민족이 발생되어야 되겠지요. 그 특수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특수하다는 말은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천상의 요소, 천국의 요소가 언약이 거기에 들어있다는 겁니다.
그럼 언약이 들어있으면 어떻게 들어있는가, 아까 창세기28장봤지요. 야곱이 나중에 이스라엘로 바뀌거든요. 개인 이름이 국가이름으로 바뀐다고요. 그러면 개인에게 일어난 체험이 국가 전체 체험으로 단일화 되어야 되겠지요. 국가 이스라엘이 있어야 될 일을 이미 어떤 일이 하나님의 언약의 이름으로 발생시키느냐 하는 것은 야곱과 하나님의 사적으로 만난 그 일이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겁니다.
모세 뜻이 뭐지요? 물에서 건져냈지요. 50만 대군을 먼저 물에서 건져낸 게 아니고 먼저 모세 하나를 달랑 데려오면서 물에서 건져내듯이 그 50만 남성만 50만 되는 이스라엘을 물에서 통과해서 건져내는 방법을 사용하는 거예요. 이름은 내용끼리 통한다고요. 그 이름의 내용대로 발현되는 것이 이름을 주신 분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분만이 유능하지 그 이름의 뜻에 따라 우리는 무능합니다. 유능하지를 못해요. 일방적으로 주님의 사랑을 긍휼을 입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 은혜를 입는다는 말은 우리를 우리의 실존, 실상을 까발린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성경을 한 번 찾아봅시다. 레위기21장10절요, 자기 형제 중 환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이리 되어있지요. 요 말은 제사장이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런 뜻입니다. 사무엘상10장1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이리 되어있지요. 다윗이 사울 왕이 아무리 밉지만 사무엘을 통해서 기름 부었다는 그 기름 부음이 먼저 존중해주는 거예요. 인간성보고 기름 부은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기름 부었다는 거죠.
그러면 사울 기름 부었지요. 그 다음에 사무엘상 그 뒷부분에 16장에 보면 이새 아들 다윗이 기름을 받지요. 그러면 동시에 한 이스라엘 나라에 기름 부음이 두 개 되지요. 요번에 겨울수련회 제목이 ‘두 개의 구원’이에요. 어떻게 구원이 두 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사다리는 하나인데. 예수님이 구원자라 하는 것은 가짜 예수님을 필히 발생시키는 겁니다. 장애물 되는 가짜 예수님을 발생시킴으로서 비로소 진짜 예수님은 그걸 침으로서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걸 부정함으로서 나오게 되어있어요.
그럼 가짜 예수님은 누가 좋아해요? 내가 좋아하지요. 우리가 좋아하지요. 왜? 나의 실체와 나의 거점과 나의 자아를 격려해주니까. 위로해주니까. 이 복 받은 인간아! 자꾸 격려해주니까 그런 거예요. 누가복음2장에 크리스마스 때 여러분이 잘 아는 기도나오지요. 목자가 들에서 양을 칠 때 그 때 뭐가 나타났느냐 이게 나타났어요. 크로마키스크린. 들어본 적 있습니까. 수요일날 설교 다 나왔지요. 사람이 앉아있는데 녹색 천으로 해가지고 뒤에 가려버리고 녹색 천에 해놓고 녹색 천에 새로운 이미지를 갖다 붙여버리면 이건 새로운 세계가 열리지요.
바로 천사가 거기에 임하는 거예요. 그러면 졸지에 목자는 땅에 존재하면서 무슨 체험을 했습니까. 천사의 세계를 체험했지요. 그게 힘이에요. 그게 낯선 힘이에요. 그 낯선 힘일 때 목자는 버들버들 무서워 떨었다 말이죠. 무서워 떨게 되면 어떤 좋은 점이 있느냐 하면, 오늘 월급날 안됐나, 이런 자기 생각, 평소의 과거가 끊어져버려요. 과거의 내 인생관이 다 끊어진다고요. 과거의 인생관이.
과거의 인생관이라 하는 것은 항상 내 중심으로 퍼져있는 물결의 파동 같은 거예요. 3살 때 기억은 동네 골목은 굉장히 길다는 느낌이에요. 7살 때 되게 되면 학교 말고 딴 데 가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2살 되어서 수학여행 가게 되면 제주도가 세상 끝인 줄 알고 있어요. 드디어 고등학교 가가지고 요새는 시건방져가지고 좋은 데로 가면 우리 같으면 옛날에 경주나 갈 걸가지고 요새는 해외여행 간다고요. 특히 돈 있는 사립 같으면. 돈 있는 사람이 유럽에 왜 갑니까? 오백만원 주고. 이스라엘 같으면 몰라요. 오백만원 주고 왜 가요. 점점 더 견문이 넓혀지잖아요. 그러면 자기의 세계가 점점 넓어지겠지요. 이게 바로 나의 과거의 이미지가 형성되는 거예요.
전혀 무섭고 떨리지 않습니다. 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니까. 신났지요. 그러나 여기에 천국이라는 크로마키 어떤 새로운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이지요. 진짜 현실이 들이닥쳐 버리면 이건 내가 알던 자아가 꿍치고 있던 그 현실과는 너무나 괴리가 되어가지고 자기의 선입관, 인생관, 사고방식이 아무 소용없고 무능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무능해서 구원받습니다. 내가 들었던 십자가가지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찾아오심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십자가는 덮치는 것이지 알아가는 게 아닙니다. 덮쳐지는 거예요. 니가 바로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나의 걸림돌이었다. OK. 콜. 맞습니다.
내가 고장 난 차처럼 딱딱하게 내가 굳어져있었습니다. 주여! 구멍 뚫어주시옵소서. 내가 터널이 되게 하옵소서. 내 안에 주님이 지나가는 빈자리, 십자가의 공터가 있게 하옵소서. 십자가가 있는 게 아니고 십자가는 그냥 뚫고 가는 거예요. 십자가는 달랑 달랑 차고 다니는 게 아니고 나의 제일 중요한 자아 부분을 빵구 내버려요. 그걸 유명한 4자성어로 영구 없다! 하는 거예요. 본인이 분명히 영구인데 영구 없는 거예요. 난데 내가 없어요. 내가 너무나 많은 게 아니고 내가 없어요. 전부 다 거저 주는 겁니다. 거저주신 거예요.
그게 왕과 제사장은 두 기름부음이 있는 겁니다. 기름부음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래서 이번 성전의 프로젝트는 스가랴의 프로젝트는 스룹바벨이라는 왕과 여호수아라는 대제사장이 이렇게 천사의 작업에 끌려올라 가는데 그 두 작업에 결합체가 스가랴입니다. 그 가면서 하나님께서 제사장 따로 왕따로 하면서 두 개가 어떻게 어디서 겹치는가를 보게 하는 거예요.
그 겹치는 장면이 뭐냐,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겹쳐져요. 그 성전은 어디 있다가 아니라 사건이 돼요. 사건이. 그 사건이 무슨 사건? 십자가 사건. 그래서 46년 동안 지었던 이걸 헐어버려라. 내가 몇 일 만에 짓겠다고요? 요한복음2장에 나오지요. 이 성전 46년 동안 지었습니다. 하니까 3일 만에 내가 짓겠다. 하잖아요. 예수님이 사흘만에 짓겠다.
그 당시에 땅의 평면에 속한 사람들은 그걸 이해합니까? 이해 못합니까? 이해 못했지요. 왜 이해 못합니까? 자기가 땅에서 과거에 왔던 그 선입관에서는 실체와 실체, 명사와 명사들의 세계거든요. 그러니까 그 흐름을 이해 못하는 거예요. 실체되면 건물을 이렇게 지으면 건물이 있을 거 아닙니까. 건물이 보이잖아요. 보니까 소경인 거예요.
부활된 주님을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부활된 주님을 보게 되면 그건 주님이 아니에요. 그건 악마가 예수님으로 변형한 거예요. 주님이 아니에요. 성모 마리아 목각 상에서 피눈물 흘렀다 말이죠. 먹어보니까 짜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나주에서. 짜겠지요. 그래서 뭐? 목각 상에서 성모 마리아 피 흘렸다 어때서? 천사한테 잡혀가지고 교무실에서 손들고 있어야 돼요.
그걸 보는 자체가 보는 내가 유능한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니 못 봤지? 나는 봤어. 유능한 사람이 된다고요. 주께서 오시게 되면 기름부음이 덮칩니다. 기름이 덮여버리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십자가 이벤트에 놀아나게 돼요. 이벤트에 놀아나게 되면 이미 우리는 내가 죽었다, 살았다, 죽었다, 살았다, 하면서 유월절을 반복하게 되지요.
죽었다가 살아나면서 이스라엘이 하루씩 하루씩 생산되는 겁니다. 나는 죽고 다시 태어난 나는 이스라엘로 되고. 그 이스라엘이 다시 나의 이름으로 밤에 잠자고 다시 아침에 일어나면 다시 이스라엘 되고. 주님의 이스라엘. 주님의 천사의 작업에 참여된 이스라엘. 하나님의 말씀대로 완성된 이스라엘. 두 감람나무.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죽고 나면 또 다른 감람나무를 보내가지고 끊임없이 이 세상에 유일한 거점은 뭡니까?
순금 등대. 그 순금 등대로부터 이 세상 모두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확대되는, 확산되는 그러한 시점, 유일한 실체, 그걸 천사가 스가랴에게 보여준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만 분주한 줄 알았는데 천사도 참으로 분주하게 활동해서 주의 일을 마무리하고 또 성령께서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줄 이제 알았습니다. 저희들이 성령의 일에 참여한바 되었사오니 주님께서는 우리로 감람나무로 세워주셔서 우리가 실체가 아니라 주님이 여기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증인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