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20201210a슥4장1절(장애물)-이 근호 목사
안양20201210a슥4장1절(장애물)-이 근호 목사
스가랴4장1절,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스가랴2장3절에 보게 되면 거기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그렇게 되어있지요. 천사가 자기를 스가랴를 또 깨웁니다. 스가랴를 깨울 때에 천사의 하는 일이 일관성이 있습니다.
천사의 일이 일관성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하는 일은 일관성이 제대로 하나님께 인정받겠느냐, 인정받지를 못합니다. 모든 그림이 창세기부터 마지막까지의 그림은 우리 인간이 있어서는 이게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다 몰라요. 모르고 누가 아느냐, 그 많은 도면을 그 설계도는 하나님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기 스가랴를 깨운다는 말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나의 일의 철회, 내 계획의 철회를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일의 철회.
내 일의 철회가 되는 이유는 내가 무능하기 때문에. 내가 무능하기 때문에 철회하는 거예요. 힘이 없어서도 철회하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계획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철회되는 겁니다. 여기 스가랴4장 6절에 보게 되면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이렇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걸 그대로 적용시키면 내가 내 힘으로 되지 않으니까 이게 무능하지요.
이 무능하다는 말은 이걸 아주 쉽게 말해서 내가 죽었다는 말입니다. 쓸 능력이 없으면 그건 있으나 마나에요. 그건 죽은 거예요. 자기가 안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자기 능력이 어디에 쓸 데 있다고 자꾸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어야 되고 거기에 대해서 인간이 과연 쓸모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보니까 인간은 아무짝도 소용없어요.
보통 교회 나와서 복음을 알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쓸데없다.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 하지요. 겸손해서 그런 얘기를 누가 못하겠어요. 미리 아부하는 식으로 그냥 할 수 있는데.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냥 겸손 떨면서 아무 것도 아니다, 하지 말고 자기가 낮춰보려고 자기가 애써서 하지 말고, 성경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됩니다. 성경적으로.
“나는 못난 자입니다.” 라고 할 때, “어디에 근거해서 못 났습니까?” 를 제시해야 돼요. 흔히 엄마가 자식들 훈계할 때, “그래, 이 어미가 못 났다.” 하잖아요. 그 때는 자식들이 가만히 있지 말고 “어머님! 성경 어느 대목에서 어머님이 못 났다는 근거를 제시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님의 겸손으로 우리를 협박하지 말고, 나는 못났다는 이야기가 자꾸 들리기를 봉투에 돈 더 내라 하는 이야기로 자꾸 들리는데. 나는 못났으니까 혼자 못사니까 돈이나 보내 달라는 이런 소리로 자꾸 들리는데. 친정 엄마가 하면 들 섭섭하지만, 시어머니가 그리 나오면 많이 섭섭하지요. 니 아들보고 달라하세요. 뭐 이런 식으로. 그리 나오는데.
아휴, 주님이여,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낮춰지고 못났습니다. 그럼 주님이 좋아하지 않아요. 니가 어디에 근거해서 니가 못났는지를 봐라 이 말이죠. 스스로 자기가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이리 낮추면 내가 나를 불쌍히 여기면 주께서 뭐 봐주겠지. 하지 말고 주님의 관심은 내가 얼마나 낮아지느냐가 아니라 말씀이 말씀의 현실화, 실제화를 거기에 니가 동참하느냐를 보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착하냐가 아니라 말씀이에요. 그래서 우리의 도덕, 윤리를 걷어내야 되잖아요. 윤리, 도덕을 걷어내야 돼요.
이제 십자가를 알고 이제 윤리, 도덕에서 벗어났습니다. 라고 말들을 하지만 십자가 알고, 윤리, 도덕을 걷어내고 난 뒤에 윤리, 도덕을 대체한 그건 뭐냐, 어머니한테 물으세요. 그동안 니 윤리, 도덕적으로 살았는데 그러면 그걸 걷어낸다고 그럼 좋다. 걷어냈다. 걷어내고 그동안 살아왔던 그 원리원칙 제시해봐라. 없지요. 그냥 못났습니다. 그 못났다는 게 윤리도덕이에요. 윤리도덕을 뜯어냈는데 또 윤리도덕이 들어가 있어요.
나는 나의 의를 주장하지 않겠습니다. 이게 새로운 겸손의 탈을 쓴 새로운 자기의가 되잖아요. 이게 되어버린다고요. 그럼 그거 뜯어내야지요. 그거 뜯어내면 또 생기는데요. 이게 전부 다 발생 원인이 뭐냐, 자아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자아가. 그렇다면 이 천사가 스가랴를 이렇게 찾아와서 깨울 때에 외부적 요소지요. 천사가 깨울 때에 천사가 가지고 온 것은 하늘나라의 스케줄이지요. 스케줄에 대해서 여기 내가 무능하다가 됩니다. 내가 무능하다가 되어버리면 이것은 뭐냐 하면 이렇게 논리가 돼요.
천사의 개입으로 계속 반복해서 나의 무능함이 나오게 된다. 계속 나의 무능함이 나오게 되겠지요. 그러면 천사의 개입으로 내가 계속 무능하게 되려면 천사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자신의 유능함, 무능함의 반대는 유능함이지요. 유능함이라 하는 것은 이건 윤리와 도덕을 또 장착해요. 윤리와 도덕을 장착해서 아까 이야기한 윤리 도덕은 뭐로 이어집니까. 자기 의로움. 내가 안 죽을 이유 같은 거. 이것을 근거를 윤리도덕으로 또 채우잖아요.
채우게 되면 또 천사가 계속해서 반복해서 개입이 되려면 나의 유능함에 대해서 중간에 계속 차고 들어오는 거죠. 그래서 결과는 나의 무능함을 생산물로 내놓습니다. 무능함의 생산물. 무능하니까 나는 빠지고 천사 혼자 다하세요. 가 아니라, 그러면 천사 혼자 다하지 우리를 찾아올 이유가 없잖아요. 우리를 찾아와야 될 이유는 우리의 무능함이라는 생산물을 남기기 위해서 우리하고 같이 계속 관여를 하는 거예요. 천사가. 관여할 때 우리는 이제 어떻게 나는 유능하다고 여기는 유능함이 천사의 개입으로 뭐가 됐습니까? 무능함이 되었지요. 무능함.
그러면 여기에 뭐가 개입되었느냐 하면 바로 스가랴 3장에 나오는 옷 바꿔 입히기. 주님께서 죄 사함입니다. 옷 바꿔 입히기, 주님의 공로가 여기에 개입되는 거예요. 이리되면 나의 무능함을 유능함으로 살짝 바꿀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무능하다는 사실을 이건 내가 유능해서 내가 무능으로 바꿀 수 있는 재주는 없었다. 이것은 주님이 개입했기에 나는 무능함을 자랑하고 즐거워한다. 이리 되지요. 그게 뭐냐 하면 십자가를 자랑하는 거예요. 거저주심을 자랑하는 거예요. 이것이 반복해서 계속 나와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너무 기니까 이걸 한 번 이렇게 줄여보겠습니다. ‘기호의 충격으로부터 시작입니다.’ 기호의 충격으로부터. 여기 기호라 하는 것은 어떤 사물이 이 땅에 있는 이 땅의 사물이 아닌 게 충격으로 다가오는 거예요. 그럼 이 땅에서의 천사의 내왕은 뭐가 되느냐 하면, 이건 힘으로 오는 겁니다. 힘으로 오는 겁니다. 힘이 느껴지는 겁니다. 이 스가랴에게.
여기에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할 때,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날 때 뭐라고 합니까? 내가 깼습니까, 아니면 깨어남이 나한테 도달한 거예요? 깨어남이 도달한 거죠. 만약에 6시에 일어난 사람은 5시58분 나는 2분만 자고 깬다. 깬다. 이렇게 하면 마치 자기가 내가 6시에 깨어날 걸 조정하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은 벌써 5시58분에 깨어났어. 벌써.
깨어난 거예요. 깨어난 거니까 6시에 깨어날 것을 의식할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왜 5시57분도 아니고 5시56분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58분에 깨어나 가지고 6시에 깨어날 거라는 말을 왜 합니까? 라고 하면 본인은 모르지요. 그건 5시55분에 5시58분에 깨어있어야지. 라고 했다면 그럼 5시 55분에는 당신은 어떤 식으로 왜 깨어났느냐. 그럼 4시26분. 그럼 4시26분은 왜 깨어났느냐. 이렇게 되게 되면 처음부터 그 사람은 어제 밤 9시부터 한잠도 안 잔 사람이 되어버려요. 그렇잖아요. 잔다는 것은 죽음입니다. 죽은 자는 스스로 깨어나면 그건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겠지요. 잠잔다는 것은 죽음에 일단 넘기운 거예요. 자기의 모든 능력은 능력의 공간에서 벌써 자기는 일단은 은퇴한 겁니다.
그 다음에 처분에 맡기는 겁니다. 4시에 일어날 때, 3시에 일어날 때, 처분에 맡기는 거예요. 여성분들이 갱년기에 걸려가지고 맨날 자다 깨다 잠도 못 이룬다.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런 것이 바로 처분에 맡긴 겁니다.
이렇게 깨어나 보니까 내가 깨어났다. 내가 깨임을 받았다. 이게 오늘 성경 말씀인데. 내가 깨우임을 받았다. 이게 어렵다 참. 성경에는 4장1절에 보면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깨우임, 깨어났다 이 말이거든요. 그런데 실상은요, 이건 뭐냐 하면 내가 깨우임을 받았다는 말은 같은 말이 뭐냐 하면 천사의 작업장에 내가 초대된 거예요. 초대된 것. 천사의 작업장에. 구경꾼이 아닙니다.
유능한 내가 뭐로 바뀐다고 했어요? 무능함으로 바뀌어야 주의 일이 돼요. 그래서 그 주의 일에 초청된 겁니다. 천사의 작업에 대상이 된 겁니다. 그렇게 작업에 대상이 되어버리면, 천사와 비교해 봅시다. 나는 어떤 거점을 갖고 있어요. 어떤 지점. 그걸 제가 설교시간에 stock이라고. 어떤 거점을 갖고 있다고요. 모든 관계를 할 때, 관계의 중심점을 나라고 일단 잡고 대인관계나 모든 하나님의 관계나 그렇게 거점이 있는데. 초청을 받은 천사한테는 천사에게는 거점이 없어요. 왜냐하면 지시받고 있기 때문에.
거점은 누구냐 하면 하늘에 있는 주님이 거점입니다. 따라서 거점이 없으니까 천사한테 오는 것은 거점의 반대말이 흐름이에요. 흐름인데 무슨 흐름이냐, 힘의 흐름입니다. 힘의 흐름. 거점이 없는 피조물인 천사가 활동하는 것과 이미 거점이 확보되어있다고 보는 인간이 활동하는 것과 활동의 양상은 정 반대가 돼요. 어떤 일을 해도 성과를 내가 측정하고 수시로 측정하는 거예요. 수시로.
잘하고 있나, 못하고 있나, 수시로 측정하는데. 천사는 그런 게 없어요. 인정사정도 없습니다.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주군이 시키는 대로, 주군, 일본의 자기 주인이 시키는 대로 죽여! 하면 죽이는 것이고, 처단하라 하면 처단하는 거예요. 그 사무라이처럼 잘 나타난 게 유월절 그날 밤이잖아요. 그날 밤~ 그날 밤, 죽음이 가득한 그날 밤. 정막감의 그날 밤. 죽여! 죽여! 다 죽여! 하는 그날 밤. 유월절 그날 밤같이 그날 밤이 뭐냐, 바로 천사의 사냥터입니다.
인간은 무능해야 돼요. 무능하다는 말은 곧 인간은 죽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일에 뭐가 어떤 요소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인간은 죽은 자이어야 한다. 살아있어서는 안 돼!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러면 천사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천사는 뭡니까. 유월절 그날 밤처럼 사람마다 다 족치는 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거기에 스가랴가 그 작업에 초청받은 겁니다.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거점을 다 없애버리는 겁니다. 이걸 4자성어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도장 깨기’라고 하는 겁니다. 도장 깨기. 도장 깨기 아십니까? 도장 만드는 집에 가가지고 도장 파가지고 전부 다 돌로 깨는 게 도장 깨기가 아니고 중국영화에 나오는 소위 무림의 고수들이 서로 지가 잘났다고 하니까 대장이 너무 많아요. 그렇다면 깊은 산속에서 무술을 연마한 사람이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그 동네 무림의 고수들 도장들 다 찾아가지고 여기 최고 고수 나와! 박살내서 일단은 그 도장 깨지고, 간판 내려! 그 다음에 또 내려놔! 도장 깨기입니다. 이게 천사가 하는 일이에요.
사냥터라 하고, 다른 말로 쉬운 말로 하면 땅의 폐업. 이 세상의 인간의 모든 땅은 폐업된 겁니다. 내가 오다가 버스 타려고 집에서 나와서 동대구 가려고 보니까 아주 색다른 간판이 있었어요. 가게 이름이 ‘폐업가게’에요. 이게 가게이름이에요. 폐업가게. 밑에 유리판에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천원, 삼천원, 오천원 이리 써있어요. 그 제일 밑에 12월1일까지 영업합니다. 이리 되어있어요. 보니까 오늘이 몇일인가, 12월 10일이라. 폐업가게라는 이름으로 지금 영업하고 있어요. 아~ 이거 아이러니하지요. 폐업가게 라는 이름으로 영업하고 있다고요. 꼭 성도를 닮았어요. 성도는 이미 죽었잖아요. 죽었는데 지금 살아있어요. 물론 이천원짜리, 삼천원짜리 있지만.
천사가 이 땅에 관여한다는 말은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다 테스트해봤다는 겁니다. 실험해봤다는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이 스가랴에서의 메시지가 뭐냐 하면 성전 세워라, 에요. 하나님 내가 없애버린 성전을 다시 세워라. 그 대지 위에. 그 땅 있잖아요. 성전 땅 예루살렘. 거기에 다시 세워라. 그 메시지가 그 지시가 스가랴의 지시거든요. 그러나 그 지시 같으면 굳이 천사가 올 필요 없어요. 사람들과 하나님과 직접 지시 받고 스가랴가 직접 지시 받고, 스가랴하고 하나님하고 직접 통하면 된다고요. 중간에 천사가 개입할 이유는 없는 거예요.
“예, 알겠습니다. 하나님” 백성들보고 성전 세우라고 할게요. “예, 스가랴 선지자가 학개 선지자가 잘 전달하겠습니다.” 이러면 될 문제지, 스가랴는 완전히 천사 이야기잖아요. 천사가 굳이 왜 개입해야 되는가. 그건 성전을 세우는 방식에 있어서 인간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성전이어야 하나님이 원하는 성전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무능함을. 인간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성전이라면 그럼 인간은 뭐가 되겠어요? 장애물이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의 성전에 인간은 장애물이 되는 거예요.
오늘 아침에 7시에 일어나가지고 앞에 제가 산책 겸 운동 겸 나가는데. 6차선 도로거든요. 차가 깜박이를 켜놓고는 차가 있는 거예요. 차가 횡단보도 앞에 턱하니 있는 거예요. 보니까 고장 났어요. 아침 되어가지고 신호위반하는 차들이 속도내서 빨간불 꺼지면 통과하려고 시속 막 달려오거든요. 걱정이 살짝 되는 거예요. 이 차는 고장 났지요. 남자, 여자는 핸드폰 들고 밖에 나와 가지고 고장신고하려고 나오고 있어요. 나는 산으로 가는데 건넜어요. 건너려고 하는데 걱정되는 거예요. 야, 이거 방해물 된다. 라고 하면서 언뜻 생각한 것이 바로 이거였습니다. ‘내가 주님의 방해물이다.’ 내가 주님의 장애물이라는 사실.
아담이 범죄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냥 오실 필요도 없고 그냥 하늘에서 복주면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루는 방법은 “너희들은 자기가 하나님의 장애물이라는 것을 인정 안하지. 그러나 그건 니가 니를 몰라서 그렇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앞에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뜻이 장애물과 결합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뜻이에요. 그게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걸림돌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귀 들렸기 때문에 주님도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우리의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거든요. 로마서8장3절에 나온다 말이죠. 그런데 과연 인간들은 장애물이라. 완전히 보고도 못 보는 소경들이라. 완전히 장애인이라서. 십자가 지고 가는 망가지고 처참하게 망가진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 사람은 메시아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게 설명하는 거예요. 로마서8장3절에 보면,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8장3절에 나오는 말씀이잖아요. 하나님은 율법이라는 미끄럼틀을 타고 이 땅에 내려오는데 그게 어떻게 내려오느냐, 망가지는 모습으로 오는 거예요.
어떤 인간도 기피하는, 어떤 인간도 나는 저렇게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이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진 어떤 인간도 그 주님을 본받고 싶은 생각이 전혀 절로 들지 않게 만드는 그 모습으로 오셨다고요. 이게 니 모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거예요. 이게 네 모습이야. 그런데 우리는 피해버립니다. 나와 상관없다고. 근사하게 오셔서 나로 하여금 예수 믿는 보람을 제공해달라는 겁니다. 예수 믿는 보람을.
모르지요. 뭐. 오늘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이 근사하고 싶어서 참석 안한 게 아니고. 주께서의 천사의 초청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수요일날 제가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자기 자신을 모르는 이유는 자기가 죄인인 걸 모르는 이유는 지적하고 책망하는 법이 없어서 그런데 그 법을 줘도 치워버리는 이유가 기본적으로 자기는 그다지 잘못이 없고 이건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밥 먹고 사는 그만한 권한과 자격은 이건 기본적으로 나한테 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나는 이런 수준으로 그냥 열심히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리 나오는 거예요. 그럼 이런 사람은 유능한 자에요? 무능한 자입니까? 유능하게 되지요.
자기 유능함을 못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이 다 튕겨져 나오는 거예요. 그 장애물에. 하나님이 오셔서 이야기하고 싶어도 뭐 제자들뿐만 아니고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전부다 예수님을 튕겨 내버린 거예요. 튕겨내니까 예수님께서는 튕겨서 십자가 죽으신 거예요. 예수님이 죽었을 때 저희는 조치를 잘했다고 봤거든요. 죽었는데 완전 죽었어요. 숨을 거뒀어요. 완전히 뻗어버렸다 말이죠. 십자가에서.
그런데 사흘 뒤에 일어나버렸다 말이지요. 사흘 뒤에. 이거 뭐 터미네이터도 아니고 말이죠. 귀신입니까? 아니에요? 천사의 기능을 발휘하신 거예요. 천사가 했던 전에 구약 때 스가랴 때 천사가 한 기능을 이제는 하나님 자신이 육신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 천사는 죽일 수가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그리고 피조세계에 있는 것이지, 천사는 죽음이 없거든요. 왜냐, 천사는 거점이 아니고 실체가 아니고 흐름이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천사는 흐름이기 때문에. 주님을 죽일 수가 없어요. 하늘에 있는 실체가 땅에서는 흐름으로, 성령이란 이름의 흐름으로 우리에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흐름을 건드리는 것은 주님의 실체 그 자체를 건드리는 거예요. 그러면 실체의 역할은 누가 하느냐, 바로 스가랴가 해야지요.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작업장에 초청받은 거예요. 흐름은 누가 하느냐, 천사가 하는 거예요. 힘이기 때문에.
그러면 지금까지 이렇게 한 것을 다시 연장해서 하게 되면 이 땅은 인간들의 세계지요. 인간들의 세계. 앞에 뭐 하나 붙이면 더 낫겠지요. 유능하다고 착각하는 인간들의 세계지요. 각자 유능하고 착한 인간들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스에스라5장1절~3절,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하여 돕더니 그 때에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가 다 나아와 저희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를 명하여 이 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이렇게 되어있지요.
분명히 성전 건축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이방민족인 바사 페르사 나라를 성전 건축을 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시작한 일이잖아요. 그럼 수월하게 아무 장애물 없이 이루어지리라고 인간들은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여기 방해자가 등장한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사 자기 백성이스라엘 선택받은 자기의 언약적 백성을 건져라. 그것만 있다면 예, 건지겠습니다. 하고 건지고 가면 되거든요. “너, 일어나. 오늘 집에 가자.” 이러면 되는데 말로 해도 되는데 왜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 되고 왜 십자가에 죽어야 됩니까?
하나님의 모든 하나님의 일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반드시 장애요소를 경유해야 되고 경과해야 된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통하지 않는 것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은 주의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유능한 인간들은 스가랴에 의하면 천국에 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능하다는 것은 자아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자아가 살아있는 인간은 두 번 다시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 없습니다. 왜, 그 자아는 선악과로 무장되어있기 때문에.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에 천국에 넣어주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성전 부서지고 다시 성전 짓는 그 작업 과정 속에 요소를 집어넣는 거예요. 이 총독이 그냥 동네 애들이 반대하는 게 아니고 총독이 반대하니까 공사가 보류되지요. 보류되니까 그 당시에 지시받은 그 돌아온 유다백성들이 “뭐 안 되는데 안하지 뭐!” 안된다는데 못하지 뭐~ 하고 포기한 거예요.
그런데 학개, 스가랴가 뭐합니까? 빨리 성전 재건하라고 수리하라고 독촉을 하지요. 그런데 백성들은 “하지 말라는 데요.” 이러고 있다 말이죠. 마치 오늘날 십자가 피를 받아들이고 천국오세요. 이렇게 하니까 “우리 남편이 반대해서 교회가지 말라하는데요.” 그 소리와 똑같은 거예요. “베드로야, 니가 나를 따라오겠느냐.” “따라가겠습니다.” 해놓고는 잘 따라가면 되는데 그 소녀 하나가 “아저씨, 내가 아는데 체포된 예수하고 한패잖아요.” 하니까 겁이 나가지고 경상도 말로 “아이다. 뭐라카노.” 이리 된 거예요. “야봐라, 사람잡겠데이. 내가 언제 저 사람하고 한패였나. 나 저 사람하고 모른다카이.” 이리 된 거예요. 경상도말로 하면.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얼마나 원망했겠어요. 주님 체포해가지고 내 자존심 다 상했습니다. 이렇게 원망할 게 아니냐 말이죠. 곱게 데리고 몰래 우리끼리 기도원을 통하던지 그냥 가면 되는데 왜 십자가 달려가지고 내 입장 난처하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하는 거예요. 그것은 뭐냐 하면 니가 장애물이라는 사실을 니가 인식하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그 장애물이 우리 안에 있는 이유가 우리가 홀로 있는 게 아니고 마귀와 함께 있기 때문에 마귀는 천국에 갈 수 없잖아요.
천국은요, 마귀하고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귀신 쫓아낼 때, 귀신이 알아보고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당신하고 우리하고 상관없잖아요. 이미 일 다 끝났잖아요.” 라고 하는 거예요. “당신과 나는 상관없지 않습니까. 왜 우리에게 찾아왔습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전화소리로 강의 다시 해야 됩니다. 강의 다시 하겠습니다. 왜냐, 중요한 못 들은 부분이 있어가지고. 못들은 부분 다시 해야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할 때, 예수님이 십자가 안 졌으면 베드로 입장이 난처하지 않아요. 그냥 누가 봐도 수제자다워요.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는데 까지 본인이 그 근처에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베드로의 위신과 체면 다 날아갔습니다. 베드로의 자아가 날아간 거예요. 다시 이야기하면, 베드로의 과거의 인식. 지금까지 나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받들어오던 그 과거의 인식이 있잖아요. 인식이 얼마나 주님 앞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본인이 그걸 알면서도 자력으로 그 장애를 돌파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돌파 못하지요. 못했지요.
이건 뭐냐 하면 내가 내 힘으로 자아를 버린다? 못 버린다? 못 버리지요. 내가 내 힘으로 전화 온 걸 어떻게 중간에 끊습니까. 못 끊는 거예요. 주께서 내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잖아요. 이리 되는 겁니다. 주께서. 그러면 주님께서 하실 일이 뭡니까. “베드로야, 너는 거점을 갖고 있다. 실체를 갖고 있다.” 너는 뭐냐, 실체를 파괴하고, 폐쇄시켜 버리고 뭐로 바꿔야 돼요? 베드로를 흐름으로 바꿔야 되지요.
흐름으로 바꾸기 위해서 누가 오느냐 하면 성령이 오는 겁니다. 성령. 성령이 오는 거예요. 내가 보관했던 자아가 깨어질 때 본인이 굉장히 아프지요. 굉장히 아플 거 아닙니까. 지금의 나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어요. 눈치코치 보면서 소리 듣고 싫은 소리 들어가면서 내가 이만큼 됐잖아요. 이게 깨어질 때 아프고 슬프겠어요. 그 슬픔을 성령이 보상해 주는 게 뭐냐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니가 지금 나와 함께 두렵다는 것은 깨어지는 것이 겁나서 그런 거예요. 겁나서. 깨어지는 게 겁나서. 깨어지니 겁났다는 말은 그동안 깨어지면 안 돼! 라는 목표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자기 관리해온 거예요. 조심스럽게. 나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해가 되는 것은 피해버린 거예요. 복음이고, 예수고, 십자가고 간에 나한테 손해는 다 피해버린 거예요. 주께서 강제로 데리고 왔으니까 온 것이지. 전부 다 통밥 굴리면서 이익일까, 손해일까. 복음 듣는 것과 내일하는 게 어느 것이 이익일까, 손해일까를 우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계산합니다.
저는 그것을 좀 비꼬는 말로 이야기합니다. 그걸 나는 기도라고 해요. 왜냐, 기도고 호흡이니까. 기도는 어떤 호흡이 나오느냐 하면 죄가 나오는 호흡이지요. 평소에 하는 짓거리가 기도라는 형식으로 형식만 바꿨을 뿐이지 기도할 때마다 무슨 소리가 나느냐 하면 마귀의 호흡이 괴물이 숨 쉬는 호흡이 막 나와요. 내 입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입을 통해서. 그래서 우리교회의 교인들이나 여러분들이나 아예 기도를 안 하잖아요. 입 냄새 날까봐서. 더러운 입 냄새, 괴물의 썩은 내 입 냄새 날까봐서 입을 다물어요. 음~~
에스라5장1절에서 5절에 보면 그 에스라 5장 그 다음에 방해해가지고 하니까 6절에 보면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서 이렇게 되어있지요. 조서를 내려서 다시 후원해 줍니다. 그러니 이게 방해하는 총독의 방해 없이 순하게 세상만사가 왜 자꾸 매듭이 있어요. 왜, 순하게 죽죽 안 내려갑니까. 복음을 안다. 앞으로 만사형통. 얼마나 간단한 공식입니까. 왜 그렇게 안 해요? 왜 덜커덕 들리게 매듭도 촘촘이라, 걸리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내가 바로 복음의 장애요소라 하는 것을 깨우치게 하는 겁니다. 누가 방해하느냐, 내가 주의 일에 방해해요. 내가 주의 원수가 되고. 마귀로부터 사주 받는 마귀의 졸다구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지가 마귀에서 벗어나서 구원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처음에 무능하게 만들지요. 자, 무능한 자는 곧 뭐라고요? 죽은 자지요. 죽은 자에요.
죽은 자라 하는 것은 거점이 깨진 거예요. 거점이 깨진 자는 연락 거점 중심이 없지요. 그럼 전화해도 안 받는 거예요. 일종의 흐름이니까. 복음은 흐름이니까. 이게 바로 지금 스가랴가 천사한테 깨움을 당할 때 그 작업에 합류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은 무슨 세상이냐, 누구 세계냐, 인간의 세계지요. 이 인간의 세계를 이렇게 하면 인간의 평면이다.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인간의 평면. 인간의 평면이니까 인간들은 평면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지도로 표시하지요. 지도.
지도해가지고 자기 지점들을 나는 여기 있고, 너는 여기 있고 하지요. 지난 강남강의에서도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아브라함이 이쪽에서 이쪽으로 가잖아요.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터키를 떠나서 헤브론 다시 말해서 베들레헴 보다 남쪽이에요. 예루살렘 남쪽이에요. 사해 근처 남쪽에 왔다 말이죠. 그러면 그건 이동경로가 나오지요. 수사관한테 하면 가는 길 CCTV 다 깝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가는 경로가 있지요. 그런데 아브라함이 헤브론에서 죽고 난 뒤에 아브라함 어디 갔습니까? 가는 경로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부터 해가지고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건 나그네 길이라 했고, 정착지가 이 땅에는 있다? 없다? 정착지가 없는 거예요. 이 땅 같으면 내비게이션 해가지고 갈 수가 있다 말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는데 어디를 갔습니까. 하늘에 있는 본향에 갔다 했지요. 히브리서11장에 본향에 갔지요.
본향 갈 때 어떻게 갔지요? 이게 관건이에요. 본향 갈 때 어떻게 갔느냐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알려드려요? 궁금해요? 이게 뭐냐 하면 하늘이 내려앉은 거예요. 하늘이 드리워진 거예요. 이 땅에다가. 아브라함이 팔짝 팔짝 뛰어서 하늘나라 간 게 아니고 하늘나라가 드리워진 겁니다. 하늘나라가 드리워지니까 아브라함 가는 길에 하늘의 요소와 땅의 요소가 서로 충돌되니까 이것이 아브라함 자체를 장애물로 여기면서 장애물로 제시하고 장애물을 주고 그 장애물이 극복되는데 있어서의 어떤 낯선 힘이 개입되는데 그 낯선 힘이 오늘 본문 스가랴에서는 뭐냐 천사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천사2명이 아브라함 만나러 온 거예요.
니 노선은 땅의 노선이 아니고, 육의 노선이 아니고 약속의 노선에 해당된다고 알려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스가랴에 있어서의 천사와 만난 스가랴에 있어서는 뭐냐 이 땅은 인간의 평면 대신에 뭐냐 하면 천사의 평면. 천사의 작업장이 되는 겁니다. 천사가 이 땅에서 어떤 힘으로 흐름들을 유발시키고 야기 시키는가 그걸 추적해보면 하나님께서 자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식. 방식들이 다 나오지요. 그렇게 해석하는 거예요. 이 천사가 개입된 성경 해석은 그렇게 해석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석한다고 해놓고는 뭐였지? 어떻게 해석한다고? 뭐 어떻게요. 준비 안됐는데 확 들어왔지요. 이게 뭐냐 하면 장애물로 들통 내게 하고 장애물로 하여금 장애물이 스스로 장애를 통과 없는 무능한 자로 만들고 그 무능함을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같이 통과했는가, 희생이지요. 통과해서 기어이 천사의 일에 납득이 되도록 아! 천사의 노력으로 우리가 성전 짓는가, 이건 사람의 뜻이 아니고 인간의 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신이 된다는 의미를 간파가 되는 겁니다. 그런 눈이 열리는 거예요. 천사가 보는 안목으로 땅의 평면을 바라보게 돼요.
그럼 소속은 뭐냐, 천사가 속한 하늘나라의 소속이면서도 내가 하는 모든 밥 먹고 집에 지내고 살림하고 일하고 모든 것은 이건 내가 실체가 되고, 거점이 되어서 스톡이 Stock 되어서 하는 일이 아니고 이것은 이제는 천사가 아니지요. 신약이니까. 성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우리가 흐름이 되는 겁니다. 마치 천사와 같이. 천사가 찾아와서 사바 사바~ 천사와 같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강남강의 때 어려운 이야기했잖아요. 물질과 물질. 명사를 보지 마시고 물질과 물질 사이 새로운 의미를 주는 동사를 보라고요. 그래서 제가 언급한 재미난 노래가 꼬마인형이었지요. 꼬마인형 보면 나라는 여자 있고, 떠나버린 남자있고. 두 물질입니다. 명사에요. 그 사이에 빗방울 떨어지는 거 있었고, 헤아렸고, 그 다음에 명사가 아닌 걸 주지요. 남자가. 다시 올게. 라는 약속을 줬고. 그 약속을 기다리면서 어떤 약속에 의해서 동작을 보여주는데, 동작이 뭐냐 꼬마인형을 안고 마치 그 남자가 여기 현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꼬마인형을 안고 또 다른 짓을 하고 그 다른 짓이 뭐냐 하면 모래성을 쌓고 또 쌓고.
쌓고 또 쌓는 행동 자체가 이게 뭐냐 하면 나 잘났다. 나 유능하다가 아니고 나의 모든 아픔을 보상하는 그 약속 속에 있는 사랑으로서 그게 극복이 되는 거예요. 그 사랑에 반응을 나타내는 행동들을 그 여성이 보여주는 겁니다. 첫 째 시간 마치고 숙제 낼 거예요. 숙제가 뭐냐 하면 장 보윤이라는 여자가 불렀던 꼬마인형. 요거 듣기. 그게 가사가 나와 있어요. 가사를 가만히 보세요. 딴 거 보지 말고 동사, 명사 그것만 구분해서 보면 돼요. 왜냐하면 우리는 내가 있어버리면 명사가 되거든요. 나라 하는 지시 대명사가 되거든요. 명사가 된다고요. 명사 말고. 동사로 해체되어야 돼요.
힘은 나로 하여금 명사를 동사로 해체하는 흐름으로 해체하는 힘이 우리에게 느껴질 때 이미 그 사람은 주와 함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이 땅이 목사님 말씀대로 하면 이게 천사의 평면이라면 아까 목사님 말씀은 그 실체, 거점은 예수님에게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 세상이 천사의 평면이라면, 천사의 평면이 인간의 평면을 지금 누르고 심판하고 있지만. 이 세상 전부 다 장애물이니까. 마귀의 세계니까.
그럼 여기의 거점은 뭐냐, 거점이 그게 스가랴4장에 나옵니다.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이렇게 되어있지요. 자, 스가랴는 이걸 봤지만, 스가랴 말고 옆에 있는 다른 사람은 순금 등대를 봅니까? 못 봅니까? 못 보지요. 왜, 스가랴는 천사의 평면에, 천사의 작업장에 와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바울이 사울에서 사도바울 될 때에 예수님 만났지요. 옆에 있던 사람은 예수님 봤습니까? 못 봤습니까? 못 보지요. 못 보는 거예요. 소리만 들었지요. 예수님은 본 사람은 사도바울 본인밖에 없어요. 실체로서 보는 게 아닙니다. 실체로서 본 것은 사울이 나중에 장님 되었어요. 니가 실체로서 본 것은 이건 취소해라. 왜, 내가 보게 되면 이건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장애물을 제거한 상태는 주님을 보는 게 아니라 주님의 힘을 느끼지요. 예수님을 보는 게 아니고. 힘을 느끼는 거예요. 장애물이 성령 안에서 제거된 상태에서 주님을 느끼는 겁니다. 듣는 것을 느끼고, 보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맡는 것을 느끼는 거예요. 그 실체가 있다고 했지요. 그 실체가 뭐라고 했습니까? 여기에 보면 순금 등대. 순금 등대가 실체에요. 순금 등대.
순금 등대는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여기에 가지가 일곱 개. 일곱 개가 이렇게 되어있어요. 감람나무가 있는데. 감람나무 가지에서 여기 중간에 기름을 저장하는 곳이에요. 기름을 저장하는 곳이 있고, 저장해서 여기 잔 하나마다 전부 다 연결 관이 있어가지고 영원토록 기름이 끊어지지 않고 감람나무니까 기름 빠지는 나무거든요. 거기서 기름이 와가지고 잔에서 불꽃이 계속 피워지는 그 일곱 등대를 이게 거점으로서 실체로서 스가랴에게 보였습니다. 10분 쉽시다. 숙제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