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4b 부산강의 : [시편]34(22편)-적절함과 정확함
20201214b 부산강의 : [시편]34(22편)-적절함과 정확함
(강의:이근호 목사)
첫 번째 시간 끝날 때 고린도전서 11장에 하나님과 지상의 인간세계까지 계층을 제가 설명했지요. 하나님 안에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남자, 남자 안에 여자. 그러면 하나님보다 예수님이 낮나 할 때 예수님께서 육화되셨으니까 육신이 되셨으니까 이 세상 안에 있는 것은 하나의 계층으로 짜여있어요.
계층이 있다는 말은 통합이 안 된다는 거고, 이것은 층마다 단절성을 지켜줘야 해요. 각자의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그런 육신의 한계 체험을 무시하고 바로 이념으로 갈 수 없는 거예요. 여자가 아무리 보이시해서 남성답다 할지라도 남자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세계에서, 이건 구약에서 애굽나라거든요. 애굽나라에서는 여자라도 남자의 의복을 입으면서 남자처럼 행세하는 그런 경우를 많이 용납을 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육신에서 나오는 적절성은 흔히 요즘 말로 하면 본능대로. 전미라 남편 이름이 뭐예요? 윤종신이 불렀던 노래, 몰라도 돼요. 나를 정립하는데 아무 관계없어요. 본능대로는 뭐냐 하면 나에게 불편함이 없이, 본능대로 사는 거예요. 본능대로를 주변에서 인정해줘 버리면 이건 뭐냐 하면 동성애가 돼요. 여자는 여자끼리, 남자는 남자끼리 하는 걸 사회가 용납하지 않는다. 사회, 네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나는 내 본능대로 살 거야.
이게 뭐냐 하면 구약에 보면 바로 애굽의 이방풍습이에요. 뭘 위반하고 있습니까? 남자, 여자 계층을 깨는데 뭐로 깨느냐 하면 내가 주인공이란 이유 때문에 내가 주인공으로서 적절하기 위한 불편함이 없는 내 정신과 육신이 거리가 없고 괴리가 없는 적절함을 위해서 나는 이런 것은 다 깨버리겠다. 이것이 바로 내가 그런 권한이 있다는 식으로 나오니까 하나님이 쳐놓은 계층 있잖아요. 남자, 여자란 계층이 다 깨져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 옷을 입지 말라는 게 나와요.
전에 울산강의에서 했지요. 레위기 26장이었습니까? 하여튼 여자가 남자 옷을 입지 말라는 이스라엘에게 주는 율법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애굽나라는 저주받아 마땅함을 전제로 해서 절대로 애굽의 풍습을 본받지 말아라. 왜냐하면 너희들은 애굽나라의 풍습과 이스라엘의 풍습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유월절 어린양으로써 강제로 이별시켰거든. 강제로 떼어놓았잖아요. 떼어놓은 그걸 건졌다 또는 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강제로 끄집어내면서 강제조치 그걸 거룩이라 하고 거룩의 뜻은 구별된다, 같지 않다, 같은 종족이 아니란 뜻이에요. 그러나 육체적으로 보면 똑같은 종족이잖아요. 아담의 육신이니까. 그 육신에 뭐가 개입되느냐 하면 바로 같지 않음의 요소가 개입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낯선 체험이에요. 특이한 체험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안 해도 되는 체험을 해요.
두 번째 시간 초반 들어갑니다. 초반에 정신 있을 때 어려운 것 해야지요. 죽음입니다. 둘로 나눠집니다. 첫째, 육신이 예상한 죽음. 첫째 시간에 공부한 걸 해봅시다. 육신이 예상했다는 것은 육신은 정확함이 아니고 적절함, 내 몸이 불편함이 없는 것을 끊어질 때 그걸 죽음이라고 해요. 내 육신이 불편한 걸 죽음으로 이해하는 거예요. 육신을 확대시키면 혈육도 포함되잖아요. 내 자식이 유월절에 죽어 버렸잖아요. 장자가, 애굽 사람들.
이런 것도 전에 강의했는데 나라고 하는 것은 홀로 있으면 안 되고 누구와 대화 속에서 자아가 구축되는 거예요. 이것 설명하려면 몇 시간 걸리는데. 제가 그래서 어제 로사리오 이야기할 때 언니가 동생한테 뭐라고 하느냐? 네가 없으면 내가 없는 거예요. 대화 속에서 내가 있는 겁니다. 만약에 대화할 사람이 없으면 혼자 살면 혼자 누구와 계속 이야기해요? 나와 계속 이야기해서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나 홀로 삶의 정당성이 확보가 돼요.
그런데 내 옆에 누가 있으면 계속해서 나한테 거치적거리죠. 거치적거리면서 이게 생겨요. 자아의 경직성. 사랑이 없이 거치적거리면 자아가 경직되고요, 이러면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어요. 사랑이 넘쳐버리면 자아의 해리성, 해체성인데 해리성은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게맛살을 꽂이로 한다면 게맛살 사각형 형태를 유지해야 되겠지요.
만약에 게맛살로 잡채를 한다. 그러면 약간 찢어줘야 돼요. 중국요리에 게살을 찢는, 한국식에 그런 게 있는가. 신선로 할 때 찢어주지요. 그러면 게살 자체가 또 거기서 해리가 되지요. 찢어주지요. 사랑이 있어버리면 사랑 앞에서 자기는 없어도 된다는 것이 자기 육신이 굉장히 편해요. 남편이 다 해줘버리면 그게 익숙해지고 관행이 되고 관습이 되면 여자는 남편 죽으면 아무것도 못해요. 왜? 다 해줬기 때문에.
다해줘도 문제가 돼요. 혼자 자립성이 하나도 없어. 애도 못 키우고 돈 벌 줄도 모르고 그냥 지는 쇼핑백 들고 아침에 나가서 맨날 쇼핑백 서너 개 끌고 와서 치마 펄럭이면서 집에 돌아오는 것. 신발 쇼핑에다 옷 쇼핑에다 그것 밖에 할 줄 모르다가 남편 죽어 버리면 졸지에 남편 빚이 있다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모든 죽음을 내 육신이 편한지, 불편한지로 따지는 죽음이 애굽 사람들이 알고 있는 죽음이에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이스라엘도 육신이기 때문에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애굽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미움 받는 것, 버림받는 게 죽음이에요. 버림받아버리면 뭐가 저주스러우냐 하면 나라는 것이 있음 자체가 저주스러워요. 차라리 내가 눈 감아버렸으면 좋겠어. 내가 없으면 저주가 쏘아댈 수 있는 표적지가 없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이 세상 살아가면서 타인이든 혼자 살든 계속 자아가 경직돼있는 거예요. 너는 나한테 뭐 해줬는데, 할 때 이미 자아는 경직돼있는 거예요. 사랑이 넘칠 때는 태어나서 1개월부터 16개월까지 자아가 없을 때는 그게 없어요. 스트레스가 없어요. 애한테는 암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옆에서 다 해주니까.
그런데 자아가 생기고 또는 동생이 태어났다. 이러면 동생 배 위에 올라가게 되고 또 사자머리 교수 나와서 설명해야 돼요. 자아가 생겨버리면 전부 다 자아중심으로 돌아가고 경직돼있어요. 경직돼있으니까 무조건 나는 사랑받아야 돼. 아무리 내 동생 태어나도 나는 무조건 사랑받아야 돼요.
할아버지가 동생 돌보면 누나는 애 꼬집고 발로 차고 지가 더 사랑받기 위해서 스스로 행동을 해요. 소파에서 일부러 넘어져서 불쌍한 척하면서 넘어지고요. 개와 인간하고 똑같아요. 에 나오는 개 대통령을 데려다 애들 교육시켜야 돼. 똑같아. 성질대로 안 되면 막 집어던지고. 보이는데 집어던져요. 무려 14개월 된 아이가 집어던져요. 엄마는 어쩔 줄을 몰라요. 저걸 교육하게 되면 트라우마가 생길까 걱정을 하는데 자아의 경직성이거든요.
그러니까 자아가 생겨버리면 이건 구원불가가 돼요. 구원이 안 돼요. 왜? 자아는 계속 경직돼있으니까. 안 되는 걸 누가 한다? 안 되는 걸 주께서 되게 하시는 겁니다. 되는 방법은 뭐냐? 이 자아를 죽여 버리면 되죠. ➀번은 자살 밖에 안 되니까 실패고, 자아는 미움 받는 지경으로 나가야 됩니다. 그 방법이 어려워요. 그래서 두 번째 시간이 어려워요.
미움 받는 방법은 사랑을 함으로써 대립된 생명나무와 선악과는 대립돼있으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지요. 사랑을 하게 되면 은혜 줄 자에게 은혜가 주어지는 겁니다.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이 자아가 자아를 미워하게 됩니다. 왜? 인간은 자아가 하나가 둘로 갈라지게 만들어버려요. 이것을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체험하는데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이 갈라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첫 번째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두 번째 이스라엘은 요단강 건너간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둘로 쪼개버려요. 어느 쪽이 약속의 땅에 들어갑니까? 요단강 건넌 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조상의 실패, 조상의 패배 안에서만 새롭게 등장한 이스라엘이 그 패배했다는 것, 인간의 육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함을 재료로 해줘야 구원이 성립돼요. 나는 아니고 육은 아니고 주님입니다, 라는 그 경과가 다 장착되고 내용이 살아 있어야 구원되는 그 내용물이 채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저는 죄인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면 죄인인데 의인인 체하는 나밖에 모르는 내가 나 같은 건 버려도 괜찮습니다, 라고 탕자의 요소가 체험이 있어줄 때 주님께서는 그 탕자체험을 건지는 거예요. 잃어버림을 건진다고요. 누구한테 잃어버렸다고요? 사회에서 잃어버렸다고요? 아니에요. 누구한테 잃어버렸다고요? 내가 나한테 잃어버린 거예요. 내가 미워져. 내가 너무너무 미운 거예요. 그것은 말씀 때문에 그런 겁니다.
불교신자들은 원래 엉터리니까 논할 필요도 없고요. 소위 기독교적 냄새 나는데 불교, 기독교적 냄새 나는 가짜 기독교, 천주교지요. 천주교에 예를 들어서 작은 형제들, 이름도 보세요. 형제인데 어떤 형제다? small. 여기에 외국사람도 많고 한국사람 청년들 들어가 있어요. 평생을 폐쇄공간에 따로 모여서 옛날 베네딕트수도원처럼 기도하고 노동하고 그 다음에 성경보고 기도하고 하루일과 마치는 것, 이것은 선배가 있어요.
이 선배 공동체를 무슨 공동체냐 하면 쿰란공동체, 사해 근처에 본거지가 있었어요. 우리 둘이는 가봤거든요. 쿰란공동체는 뭐냐 하면 기도하고 노동하고 말씀보고 기도하고 잠자고. 그렇게 뺑뺑이 도는 거예요. 물론 결혼 안 하고. 결혼하면 나가줘야 돼요. 이 아이디어가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첫째 시간에 공부한 정확한 게 아니고 무엇 때문에? 적절함, 나의 정당성. 나의 정당성이 있어줘야 내가 더 이상 나를 미워할 요소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절대성이에요. 얼마나 악마적이에요.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선악과부터 이미 잘못됐고 우리가 엉터리라면 본인이 죽을 때까지 그 엉터리를 발산하는 것이 그게 정답 아니에요? 그게 정답이거든요, 뭘 해도. 그런데 이 사람은 뭐냐 하면 자기 힘으로 자기 행함으로 이 적절함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정확한 진리로 바꾸려고 이런 쓸데없는 시도를 다 하는 거예요. 이건 하고 이건 안 하고 하는 거예요. 한 번도 자기를 미워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혹시 미워하게 되면 사랑해줄까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사랑이 오게 되면 어디에 집어넣느냐? 성령으로 온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내 자신이 미워지는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게 아까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죠. 하나는 먼저 건너온, 이 갈라짐이 40년 걸리죠. 내용들이 함축되더라도 다시 들으시면 이해되십니다.
광야가 얼마라고요? 40년. 이게 40년 체험입니다. 세상의 40년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광야의 40년은 개념화되고 이념화되는데 세상의 40년은 의미 있습니까? 의미 없어요. 세상은 시간의 흐름이 전체가 아무 의미 없어요. 죽음의 세계에서 이미 저주받은 세계에서 나이가 몇 살입니까가 의미가 없어요. 천 살 되고 만 살 되도 심지어 창세기 5장에 나오는 무드셀라 같이 969세, 난 오래 살 생각 없기 때문에 나이는 별 관심 없어요. 백날 해도 죽음 안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렇다면 시간이 흘렀는지 안 흘렀는지 그 자체가 차이 나지 않으면 의미 없는 겁니다. 모든 의미는 차이에서 발생되기 때문에 어제나 오늘이나 똑같다면 나이 먹는다는 것, 예순 아홉, 칠십, 그것 뭐. 육신이란 건 의미 없어요. 육신은 원래 죽기 위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죽음의 노선 이탈이 안 되게 되면 아홉 살 먹으나 열 살 먹으나 방향이 벡터라 하지요. 물리학 방향이 벡터가 죽음으로 가기 때문에 같은 노선이기 때문에 이탈 없으면 의미 없는 겁니다. 아홉 살 먹어 죽으나 구십 몇에 죽으나 송해 같이 살다 죽으나 방금 태어나 죽으나 같은 방향이면 그건 둘 다 차이 없는 겁니다.
시간이란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왔기 때문에 시간이 의미가 있으려면 언약적으로 규정된 40년 이런 기간이 의미가 있는 거예요. 시간이 있으려면 뭐 달라져야 돼요. 안 달라졌는데 세월만 가면 무슨 뜻이 있어요. 조두순이 예순 여덟입니다. 예순 여덟, 일흔 여덟 되든 무슨 의미 있겠어요. 몰라 아흔 여덟 되면 남 패진 않겠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죽은 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세월이 갔다든지 우리 결혼한 지 20년 됐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아나? 무슨 날인데? 결혼기념일. 오늘 크리스마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사람이 달라져야지요. 맨날 시계 해주고 차 사주고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게.
40년은 있음 자체를 저주하라는 기간이에요. 네가 있냐? 복 받았다가 아닙니다. 그게 저주받았어. 저주로서 있는 거예요. 저주로서 있음을 감사하는 기간이 40년입니다. 나는 애굽에서 나왔는데 애굽 사람들은 홍해 다 빠져 죽었잖아요. 죽은 사람을 눈으로 본다는 것은 나는 상대적으로 죽었다, 안 죽었다? 살았다고 여겼는데 그게 착각이었던 겁니다.
약속의 땅에 가까이 왔지만 못 들어감으로써 비로소 내가 몰랐던 이념적 죽음을 체험하게 된 거예요. 40년 동안 체험한 겁니다. 뺑뺑이 돌린 거예요. 40년이라는 이념이 왜 중요하냐?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시간적으로 규정할 때 40년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광야 시험 받을 때. 악마가 인간을 시험할 수 있는 모든 수능문제는 다 끄집어내. 그게 세 가지잖아요. 그게 현실이죠.
현실에서는 뭐냐? 사람은 역시 돈이 최고라는 것, 그리고 사람은 타인을 통해서 나를 규정한다는 것, 인기 있어야 돼요. 요새 자연인도 인기 있는 자연인과 인기 없는 자연인이 있어요. 이승윤이 찾아가면 인기 있고 이승윤이 안 찾아가면 인기 없어요. 여기서 이승윤이 누군지 알 필요 없어요.
홀로 있다는 것이 절대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홀로 있으면서도 간음, 살인 다하는 이유가 내가 나한테 계속해서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적절함을 계속 붙들고 어떤 의미에선 적절함을 붙들기 위해서 기도원에 간다든지 깊은 산골 찾아오지 말라고 가는 거예요. 물론 그전에 돈 많이 버려놨겠지요.
성경에서 40년이란 시간개념으로 이 세상을 그렇게 설명합니다. 세 번째 뭐냐? 악마로부터 노골적으로 나오지요. 모든 세상 영광, 현실이죠. 현실을 어디에 다 모이게 해줄게? 너에게. 나에게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욕조 안에 물 빠지는 배수구 있지요. 물 빠질 때는 이 배수구의 존재를 못 느껴요. 물속에 있을 때는 안 보여요. 마지막 빠질 때 쑥 빠지면서 욕조에 이 세상에는 구멍이 있으면 나머지는 구멍에 빠져야 될 허상이고 망상이란 것이 드러나지요.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선 40년 이념이란 확실한 정확한 것은 어디에 쑥 빠뜨리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에 다 빠트리는 거예요. 이 세상은 원래부터 하나님께 버림받아 마땅하다. 왜? 내가 이제는 하늘의 사람이 아니고 이 세상 사람으로 대리해서 왔기 때문에 나의 죽음을 똑바로 봐라. 내 죽음의 자리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주님은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마태복음 27장에서,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미 버림받은 세계에 속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마땅히 아들을 버려야 되는 거예요. 안 버리면 아버지가 아니에요. 왜? 세상 사람이기 때문에 죄는 없지만 육신의 죄를 졌기 때문에 육신 때문에 버림받아야 되는 거예요.
이 버림받음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이미 버림받았다가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버림받았다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서 굉장히 버림받은 세월이 즐거운 거예요. 아까 탕자 이야기해봅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가 탕자를 선택하고 같이 늘 살았던 큰아들을 배척하는 이유는, 큰아들한테는 버림받은 세월이 없어요. 아버지께 버림받았다는 그 체험이 없어요. 효자 중에 효자지요. 그래서 망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버려진 자를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서. 잃어버림의 요소가 없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께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왔기 때문에 이 세상에 어떤 인간도 자아중심이기 때문에 잃어버리려한 사람도 없고 잃어버린 자도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서 네가 잃어버렸어, 라고 자기 백성을 새롭게 생산해냅니다. 그게 기호의 생산 작업, 생산기능.
주님의 기호는 그 기호의 본질에 맞도록 합당하도록 없는 데서 주님께서 잃어버렸다가 얻었다면 잃어버렸다가 얻었다는 그 기능을 예수님 빼놓고 아무도 없기 때문에 심지어 제자들도 없었어요. 왜냐하면 도망치기 바빴잖아요. 십자가 때. 도망치기 바빴기 때문에 자긴 자아만 챙기고 도망치는 거예요. 가룟유다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성령을 보내면 베드로와 성령 받은 사람들은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성령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성령 안에 살기 때문에 이제는 너끈하게 이 세상에 구애받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단어 하나 적어볼게요. “구애받지 않고” 반대말은 구애받는 것. 구애받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이 본인이 아니고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께서 뭘 통과했느냐 하면 율법의 표적지에서 빠져나온 거예요. 의도적으로 율법은 예수님을 쏘아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화살을 맞고 즉사했어요. 그런데 사흘 뒤에 가보니까 시체를 찾아야 되는데 시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시체가 없어요.
이 체험이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누구한테 오는가? 성도한테 와버려요. 그러면 성도의 육신은 밥 먹고 살아야 되고 안에 들어온 내용은 뭡니까? 네 자신에게 구애받지 않는 그런 예수님이 주인공 되어 들어와 버린 거예요. 그래서 성도 내부에 계속해서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성도 육신은 내 시간, 내 공간 강조, 주님은 니 시간, 니 공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이것을 마태복음 6장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뭐냐? 참새도 기르시고 들풀도 기르신다. 그러면 참새를 기르실 때 참새는 어떤 조건이 구비돼야 되는가? 참새이어야 돼, 이게 없어지고 들풀은 들풀이어야, 라는 요소를 주님께서 용납을 안 합니다. 내가 악착같이 참새 돼야 돼, 들풀 돼야 돼. 그렇게 되면 기르심이 없어요.
그래서 그걸 첨가하기 위해서 뭘 하느냐 하면 사람의 머리카락이 한 자나 자라는 것도 네 뜻대로 안 된다고 하거든요. 그런 구절이 있어요. 마태복음 6장에 그 참새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건 같은 대목인데 누가복음에도 나와요(12:25). 네 머리카락도 한 자나 네 뜻대로 안 된다고 되는 겁니다. 머리숱 없는 사람은 할 수 없이 병원에 케어 받아야 돼. 내 뜻대로 할 수 없어요.
여기는 뭐라 돼있습니까? 키로 언급돼있지요.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돼있지요. 왜 염려가 됩니까? 내 몸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내 몸이 돼버리면 누가 길러준다는 의식은 없어요. 내 몸은 나의 정확함이 아니고 나의 적절함이에요. 적절해야 내가 계속해서 나를 지속할 수 있고 지속된 그것은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사랑이 오게 되면 뭐가 됩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오게 되면 내 사랑은 나를 지키는 거지만 주님의 사랑은 나를 포기하게 나를 미워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요한복음 12장에 보게 되면 자기를 미워하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 했지요. 목숨 버리고 생명 얻는 거예요. 내가 미워할 때 사랑이 이미 도달했음을 그때 우리가 느껴지는 겁니다. 내가 지금껏 키워온 게 아니구나.
그럼 나는 참새가 되고 나는 들풀이 되면 되겠다. 물론 참새, 들풀 감사하지요. 구애받지 않으니 감사하지만 참새는 짹짹이는 기능이고 들풀은 그냥 불쏘시개 되는 기능인데 우리의 기능은 그보다 더 고귀합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뭐하면서? 염려하지 않으면서. 기어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도록 그렇게 조치하겠다. 그렇게 지금껏 길러냈다는 거예요. 그 나라와 의를.
우리가 하는 게 아니에요. 마태복음 5장, 6장, 7장 모든 말씀은 이건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일점일획이라도 빈틈없도록 율법을 다 지키도록 오신 주께서 십자가 지신 그 영이 오게 되면 어떤 상태라도 이런 상태가 되게 하신다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오른뺨을 쳤을 때 왼쪽 커버하고 쳤다. 그 상태가 어떤 상태냐 하면 오른뺨을 칠 때 왼뺨을 내놓은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왼뺨 안 맞으려고 상대방이 먼저 선방 때릴 때 나도 같이 때렸다는 그 내 모습이 미워지거든요. “아아, 또 성질나왔네, 또 성질. 술도 안 먹었는데 성질나왔네.” 내가 미워질 때 율법의 표적지가 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미 빈 무덤이 된 주님께서 나로 율법의 표적지로 사용했다는 그 관계성이 느껴집니다. 그게 체험이에요.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주와 함께 있는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우린 항상 율법에 의해서 마태복음 5장에 의해서 우리는 죄인 됨을 다시 한 번 느끼는 그러한 즐거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성깔대로 사는 체험, 막 사는 체험, 이게 어디서 같이 패는 체험, 남편이 휴지 던지면 나는 티비 던지는 체험. 막 가자는 이야기지요.
네가 막을 마지막을 모르는 모양인데 이게 마지막이야. 티비가 날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남편이 예수 믿는 여자가 이러냐. 나도 성령 안 받을 땐 너처럼 생각했는데 성령 받고 난 뒤에는 이래야만 이래도 하나님이 기르신다는 뜻을 이런 여자를 기르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바로 신약에 나오는 주님과 같이 있어서 모든 게 표적지가 없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최종 목적지가 안 되게 하는 거예요. 내 자신이 적절함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고 나의 정확함을 진리를 위해서 주께서 쓰시다 버려도 나는 괜찮다는 겁니다. 주께서 쓰십니다. 지금도 쓰셔요. 백만 하나, 백만 둘, 백만 셋. 그동안 많이 썼잖아요. 이젠 더 이상 밧데리 다 떨어졌는데 뭐. 버리셔도 괜찮아요.
이게 바로 사도들이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빌립보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더 심하게 이야기해요. 나는 모든 것이 정결하며 모든 것이 깨끗하며 모든 것이 합당하며. 네가 언제 그렇게 착했어? 착한 게 아니고 그렇게 진리를 적절함에 위에다 적절함을 깨고 진리가 주어지는 거예요. 고난을 통해서 또는 버림받음을 통해서 되찾음을 얻은 거예요. 버림받음이 없으면 되찾음도 거기에 없어요. 반드시 버림받는 것, 혼돈 속에 새로운 질서가 나오지 혼돈 없는 곳에 새로운 질서가 안 나옵니다.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조용하다는 거예요. 교회 그만 합시다, 할 때 가장 교회다워요. 그동안 교회는 교회가 아니었음을, 이게 교회임을.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계층관계, 천국까지 이어지는 계층관계, 여기는 뭐가 없어요? 시간이 없습니다. 세상이 육체적 체험이기 때문에 시간은 없고 주님의 개념만 계층으로 주어졌지요. 악마는 영적 존재기 때문에 빠지고 여자 제일 밑에, 그 다음에 남자, 그 다음에 예수님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인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이런 이야기하거든요.
고린도전서 11장을 질문할만해요. 왜냐하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여기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8절에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이렇게 돼있지요.
이게 뭐냐 하면 이 예수님이 누구냐 하면, 여자의 자손이에요. 창세기 3장 15절 약속, 여자의 후손이라고요. 여자의 후손이면 이건 그냥 남자가 아니라 여자의 후손으로서의 남자거든요. 남자, 여자는 이 선까지 끝이에요. 그 다음에 이 선, 남자까지는 남자, 여자를 따지지만 예수님과 이 사이에서는 무엇의 후손이냐로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니 단절돼있지요.
단절을 뚫고 올라가려면 밑에 있는 여자가 아니고 없는 여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없는 여자로서 여기에 아들로 등장하는 겁니다. 그럼 여기 앞에 남자, 여자는 뭐가 됩니까? 천국 가면 전부 다 무효가 되겠지요. 천국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어요. 부부도 없어요. 부부로 있을 때 살아 있을 때 마음껏 즐기세요. 천국 가면 남자도 여자도 없어요. 누구 시계 사주고 그런 여자도 없어요. 결혼하는 것도 없어요. 결혼이 없다고요. 천사와 같다 했거든요.
천사와 같은 그 고리가 바로 여자의 후손과 예수님과 남자, 여자. 그러니까 예수님을 남자라고 할 의미가 없어요. 그냥 여자의 후손이라고요. 그러면 남자, 여자 이 개념은 이 땅에서 언약을 위해서 체험할 체험의 단계에서는 이게 필요하겠지요. 이게 뭐냐 하면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줄 때 이스라엘이 육체가 있기 때문에 율법과 결합되면서 신약에서 율법이 쏘는 게 없을 때까지 계속 유효하게 작용되는 겁니다.
그걸 어디서 보느냐 하면 바로 레위기 12장 봅시다. 오늘 복잡한 게 많아서 오늘 오후에 올릴 테니까 다시 한 번 차분하게 하고 녹취한 것 줄 그어가면서 보시면 됩니다. 레위기 12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율법입니다. 율법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우리 육체에 체험을, 어떤 체험? 죄인 되게 하는 체험을 부가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죄인 아니라고 한 자에게 계속 율법을 줌으로써 이래도 네가 죄인 아니야, 이것도 다 지켰어, 라고 자꾸 몰아넣는 겁니다. 율법의 계층화, 창세기 3장에서 범죄 한 순서, 그 사건현장을 율법 안에 고스란히 담아서 계속 십자가 올 때까지 전달, 전달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거기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제 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 삼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2~4절)
이게 어떤 과정을 보여주느냐 하면 거룩한 공간에서 다시 버림받는 체험을 하고 그 체험을 애 낳았다고 훅 들어오지 말고 네가 버림받는 과정에 어떤 요소가 가미되어야 거룩하지 않은 네가 거룩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거룩이 거의 하나의 기호거든요. 물질화된 신체가 체험케 하는 거예요. 누구 따라서? 율법의 지시에 따라서 하는 거예요.
뭐 여자를 무시하느냐, 이러지 말고 여자가 악마 결탁했다는 그 사실을 근거로 해서 이스라엘의 여인들은 이런 체험을 함으로써 율법이 하나님의 뜻은 선악과 있던 그 사건현장은 계속 살아 있게 한다는 주의 취지에 너희들이 종으로서 따라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 사건, 여자가 악마와 접촉했다는 그 사건을 계속 살려줘야 되는 거예요.
그럼 이스라엘은 저는요, 하지 말고 어떤 기능을 하느냐가 중요해요. 제가 맡은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래 되는 거예요. 여자는 여자 역할하고 남자는 남자 역할하는 거예요. 남자, 여자 역할하고 그 다음에 기다려야 될 것은 여자의 후손, 그 여자의 후손은 메시아거든요.
여러분들이 여기까지만 보게 되면 여자가 아기 낳을 때는 칠일 동안 부정하고 다시 원상복귀 할 때는 삼십삼일 동안 기간이 또는 거리두기, 자기 자택감금 비슷하게 있어야 되는구나. 바이러스 없을 때까지 하고 이러는데 뒤에 보니까 딸을 낳았을 경우에는 곱빼기에요. 그 다음에 나오지요.
“여자를 낳으면 그는 이 칠일 동안 부정하리니 경도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 륙일을 지나야 하리라” 칠일은 같은데 다시 돌아올 때는 육십육일이에요. 앞에 남자 낳을 때 삼십삼일, 곱하기 2해서 의도적의 차이를 두는 겁니다. 계층을 벌어지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칠일 동안 부정하고, 부정한 것을 찍어버리는 거예요. 하나에 코드화시키는 거예요. 칠일 동안 부정함을 코드로 찍어놓고 나가! 삼십삼일 동안 격리수용, 아들 낳았을 땐 삼십삼일, 여자를 낳으면 육십육일 격리수용하는 거예요. 수용할 때도 그냥 못 들어와요. 여기 뒤에 또 제사를 드려야 돼요. 제사장한테 가서 속죄하고, 요샌 애 낳는 게 대센대 애 낳았다고 이렇게 복잡합니다.
“자녀 간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자녀 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6, 7절)
산혈이 깨끗하다는 것은, 사람 몸이 이게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관계하는 관계를 통해서 살아 있다고 보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목숨, 숨 쉬면 살아 있잖아요. 성경은 그게 아니고 율법이 살아 있어야 살아 있는 게 돼요. 그러면 인간 안에 무슨 기능이 삽입되어서 그 안에 살아 있어야 되겠어요? 율법이 살아 있어야 되겠지요.
그러면 율법의 내막은 뭐냐? 장차오실 메시아가 이 땅에 와서 다시 승천할 때까지 경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죄인을 위해서 죽었다가 대신 희생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다시 하나님께로 복귀하는 그 상태를 보여주거든요. 그 상태가 전에 이스라엘에게 임하는 겁니다. 이렇게 메시아가 왔다 가지 아니하면 더러움이 돼요.
그런데 메시아가 왔다 감으로 경과를 거치면 더러움에서 뭐가 됩니까? 거룩함이 되고 정결함이 되고 깨끗함이 되고 이거는 깨끗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요건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뭐가 된다? 의가 되려면 인간의 힘은 안 되고 누가 왔다 가야 돼요. 왔다 가지 않으면 자기 스스로 죄를 의로 바꾸려고 형제수도원처럼 그 짓하고 있는 거예요. 불교처럼.
그런데 왔다 갔다면 왔다 가신 분을 자랑하려면 나는 졸지에 뭐가 되느냐? 스스로 나의 의를 미워해야 되지요. 의를 미워한다는 것은 나의 과거 중에서 잘난 것만 수집해놓은 나의 과거사 자체를 잘라버리는 겁니다. 나, 이렇게 잘났다는 요소를 잘라버려요.
처음에 부부가 결혼해서는 나는 당신만 있으면 좋아, 하고 자기 의를 안 내세우다가 조금만 살게 되면 너 때문에 나 망했다고 전부 다 자기 의, 자기 창고에 모아놓은 모든 주특기는 다 끄집어내서 저쪽에서 총 내놓으면 여긴 기관총 내놓고, 저쪽에서 너 올 때 이천만원 했지 나 삼천만원 해서 집 사줬잖아. 그 무기를 버리질 않았어. 그 무기를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고요. 기억 속에. 기억 속에 내 잘남에 필요한 재료는 일체 버리지 않습니다. 언젠가 써먹을 때가 온다는.
다녀가게 되면 나의 의를 인정하지 않지요. 나의 의가 사라지지 않으니까 나의 의를 미워하면 그만인 거예요. 전에는 죄 지은 것이 죈데 이젠 그것보다 심화되면 더 깊이 들어가면 나의 의가 바로 죄란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왜? 주님의 하심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악마 짓이 되기 때문에 나의 의가 죄가 되는 겁니다.
다시 이 경과를 반복해서 순환해서 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체험을 하게 합니다. 체험을 하게 되면 삶을 살면 지 잘난 체하고, 잘난 체하다가 성령에 의해서 또 깨지고, 깨졌다고 또 잘난 체하는 자기 의를 반복하는 거예요. 그냥 막 살면 되는 거예요. 막 살다보면 뺑뺑이 돌 수 있습니다. 원위치로 돌아온단 말이죠.
육십육일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육십육일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무엇의 비용이 많이 드느냐 하면 원상태 오기가 육십육일이 그만큼 비용이 많이 들겠지요. 그만큼 주님은 남자 사랑의 곱빼기나 여자를 더 사랑하는 거예요. 왜? 남자들은, “여자 놔두고 우리만 빼내서 천당 보내세요.” 하는데 주님은, “아니야 죄 지었던 악마와 결탁된 저 끝까지 마지막까지 다 건져야 돼.” “주님, 그렇게 되면 너무 수고가 많은데요?” “난 수고하려고 왔어.” 마지막 사람까지 다 건지고 가는 거예요.
홍해에서 애굽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주님께서 중간에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 물이 닫히도록 안 해요. 어딜 쳐다보느냐 하면 마지막 남은 어디 가도 굼벵이 같은 인간 있거든. 빨리 와, 마지막 나올 그때 지팡이로 닫아버리면 다 죽어버리잖아요. 주님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할 그때를 위해서 시간은 2020년, 21년 계속 가는 거예요. 마지막 건질 자를 건지기 위해서 끝까지.
그 마지막이 심지어 강도라 할지라도 세리라 할지라도 조두순이라 할지라도 창녀라 할지라도 그런 건 묻지 않아요. 모든 인간은 동일하기 때문에 마지막 주께서 건질 때까지 이 세상 현실을 닫아두지 않습니다. 그냥 공개하는 거예요. 먼저 구원받은 사람은 구애받지 않고 살면 되니까요. 느긋하게 이미 챙길 것 다 챙겼으니까 합격통지서 받아놨는데 뭐 걱정입니까.
그렇게 해서 여자가 남자보다 밑에 뒀다고 해서 여자들이 더 신경질 내고 짜증내지 말라는 거예요. 왜? 많이 사함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니까. 차라리 남자들은 이렇게 하세요. 나는 곱빼기 받았다. 그래서 그 역할은 이 세상 있을 때까지만 육체로 있을 때까지만 그 연극은 드라마는 끝납니다. 드라마는 끝나고 그 다음부터는 다른 세계가 열리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은 그냥 드라마입니다. 드라마 할 때 아무리 힘들지만 끝날 때가 있잖아요. 15회 내지 16회 끝나잖아요.
어제 교회 예배 전에 누구와 이야길 하는데 추미애와 윤석렬 열심히 봤다고 하기로 그것 드라마입니다. 추미애, 윤석렬 끝나고 나면 또 다른 드라마가 정치무대에 올려줘야 사람들이 사는 재미가 나요. 이 말은 남이 드라마 본다는 것은 본인도 그냥 곧 있다 없어질 드라마의 출연진에 지나지 않아요. 이 세상 모든 것이 꿈이에요. 드라마입니다.
무슨 드라마? 창세기 3장에 있던 범죄 한 그 드라마를 계속 반복시키는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이 우리를 활용하시는 드라마에요. 그게 남자, 여자 역할 드리고 여자의 후손 역할 예수님, 그 뒤에는 하나님 역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주님도 이 땅에 올 때 한 드라마지요. 아버지께 죄 없이 오셔서 모든 일을 하시고 새로운 율법을 주시면서 결국은 이 세상 사람으로 취급받아서 버림받고, 완전히 끊어져버리고. 그런데 창세전 약속대로 다시 건짐 받는 그 드라마, 하늘에 올라간 드라마 그 드라마 다윗이 거기에 참여해서 보여줬다면 그 다윗의 생애가 오늘날 우리의 생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을 매개로 해서 갈 때까지 가게 하시는 그 주님의 작품에 우리가 들어갔습니다. 성령을 받음으로 십자가를 앎으로 이미 우리는 죽었고 주님의 생명이 살아 있기에 마음 놓고 세상살이에 구애받지 않고 우리 역할 다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