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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201214a 부산강의 : [시편]34(22편)-적절함과 정확함자유게시판시편

20201214a 부산강의 : [시편]34(22편)-적절함과 정확함
(강의:이근호 목사)

시편 22편, 하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많이 들어본 이야기고요, 이게 마태복음 27장 46절에 보면,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즈음에,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 대목이지요.

십자가를 내세우시면서 십자가에 담긴 의미가 뭐냐 할 때 마태복음만 채택할 게 아니고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오늘 본문 시편 22편부터 다윗의 체험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 겁니다. 다윗의 체험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 다윗이 있다면, 십자가가 뭐냐 하면 십자가는 불소통성이에요. 소통되지 않는 겁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일부러 끊어버린 거죠.

하나님께서 다윗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끊어버리는 것, 이걸 신약에서 방금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의 취지고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의도적으로 끊어버리는 이유가, 우리가 보통 다윗이 무슨 죄가 있는 건 아니거든요. 다윗은 죄가 없어요. 여기서 다윗은 죄가 없다. 그러나 로마서 3장에 보면 모든 사람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단 말이죠.

그러나 구약에서는 외부질서가 인간의 내부로 전환되거든요. 다윗이 개인적으로 마음으로 어떻게 악한지 따지는 것이 아니고 외부질서, 외부질서가 뭐냐 하면 사울이 다윗을 압박하는 그 당시 정치적 질서, 사회적 질서가 내부적으로 전환되게 되면 다윗은 이유도 모르는 채 쫓겨 다니는 거예요.

쫓긴다는 이것을 그대로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집어넣으면 이건 이유 없이 미움 받는 걸 의미하는 합니다. 그러면 다윗은 사울에게 미움 받고 쫓기면서 그걸 고자질하면서 하나님이여 살려주세요, 하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소통이 됩니까, 안 됩니까? 소통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다윗에 있어서 사울에게 미움 받는지 하나님께 미움 받는지 분명히 해야 돼요. 하나님께 미움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거예요. 하나님께 버림받는 건지, 아니면 사울에게 버림받는 건지 그걸 분명히 해줘야 됩니다.

바로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은 여기 뭘 거쳐야 되느냐 하면 바로 체험이 있어줘야 돼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관념도 아니요 이념도 아니요 여기에 체험이 뒷받침돼야 돼요. 체험이 뒷받침되지 않는 십자가는 이거는 지식에 불과한 겁니다. 그냥 이론에 불과한 거예요. 누가 카더라, 하는 설에 불과한 겁니다.

쉬운 예를 들게 되면 화산, 요새 화산 중에 제일 활발한 것이 인도네시아 화산. 인도네시아 화산, 이태리 화산 그리고 페루의 화산이 요새 활발하거든요. 일본도 들썩거리고 있고. 인도네시아 화산이 있는데 분화구가 라면 물 끓듯이 끓고 있는데 여기에 화산학자 여섯, 일곱 명이 모여서 세미나를 연다 합시다. 무슨 세미나? 화산활동세미나를 화산 정상에서 연다고 봅시다. 그러면 화산 마그마가 터지면 세미나 열었다고 불덩이가 떨어질까요, 안 떨어질까요? 아무 상관없지요. 지식을 설을 풀고 이론을 해봐야 화산의 마그마는 가차 없이 그냥 퍼부어버리죠.

십자가를 논하는 신학, 십자가를 연구하는 복음적인 탐색, 설이 이론이거든요, 이론. 아무리 정교하게 이야기해도 그게 이론이거든요. 뭐가 뒷받침 안 됐습니까? 체험이 안 된 거예요. 십자가 체험이란 아까 불소통성, 전혀 하나님께서 소통하지 않는 것, 이것은 다른 말로 버림받은 것, 다른 말로 하면 쫓기는 것.

궁극적으로 제일 힘든 것은 몸이 아파서 힘들고 다리 접질려서 힘들고 이런 힘든 것보다 제일 힘든 것은 뭐냐 하면 미움 받는 거예요. 미움을 체험을 누가 다윗에게 주느냐 하면 사울 왕이 해야 될 기능이 그거에요. 사울은 다윗을 영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무조건적으로 미워해요.

초반이니까 덜 피곤할 때 성경 찾아봅시다. 사무엘상 24장 8절에,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사울에게 이르되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이렇게 해서 14절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다윗은 왕에 비해서 자기는 죽은 개나 벼룩에 불과하다고 그러니까 저를 그만 쫓아오세요,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 할 때 다윗이 5절에 보면, 사울의 옷자락을 베어버립니다.

그 다음에 사무엘상 26장 9절에서 11절에 보게 되면,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그 다음에 18절에 보면, “또 가로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계속 쫓아오는 거예요. 쫓을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결탁해놨으니까.

다윗은 자기 내부적으로 안정돼있는 질서에요. 하나님께선 의도적으로 안정된 질서를 혼돈으로 바꾸는 겁니다. 혼돈으로 바꿀 때 다윗이 스스로 자기를 혼돈할리는 없고요. 여기에 무엇이 개입하느냐 하면 혼돈의 주인공, 누구냐 하면 사울 왕이 엉망진창인데 그 이유가 악신 들려서 그래요. 악신 들린 사울 왕으로 하여금 다윗의 내부에 안정된 질서에 투입시켜버려요.

그러면 다윗은 혼돈상태에 빠져버려요. “하나님, 이게 뭡니까? 제가 뭐가 잘못됐는데요?” 아무 이유도 없이. 뭔가 이유가 있으면 고치면 되잖아요. 미움이라는 것이 이유가 없어요. 어제 오후 설교에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지옥 가는 사람을 왜 지옥 보냅니까? 이유가 없어요. 그냥 지옥 불 주게 되면 지옥 가고. 그러니까 배급이죠. 북한의 배급처럼. 지옥 가면 지옥 가고 생명나무 과실을 주면 그냥 천국의 생명나무를 따먹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이미 저주받아 쫓겨난 지경이기 때문에 거기서 인간의 어떤 선택권이라는 게 성립이 안 돼요.

그러면 인간들 입장에서 흑암의 권세에서, 악마의 입장에서는 이게 납득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따지겠지요. 근거가 뭡니까? 왜 일방적으로 누구는 지옥 보내고 누구는 미워하고 에서는 미워하고 왜 야곱은 일방적으로 사랑합니까? 야곱은 사기꾼인데. 왜 사기꾼을 사랑하고 거짓말한 적 없는 에서는 왜 미워합니까?

야곱 입장에서 에서가 미움 받는 이유가 나중에 등장하지요. 너는 왜 구라를 안 쳤냐 이 말이죠. 너는 왜 거짓말 안 했어, 왜 사기 안 쳤어? 사기 안 친 이유는 현재 있는 상태, 이 질서가 하나님한테 인정받을 거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 자신이 나를 미워해줘야 돼요.

근데 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미워할 사람, 아무도 없거든요.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미 모든 인간은 지옥 같은 이 세상에 추방된 이상은 인간의 힘으로 육을 스스로 벗어나서 영의 세계로 갈 수 없어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특별한 혜택이 어떤 은혜가 주어지게 되면 이 세상의 일반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 너무나 대립되는 본인도 낯설기 짝이 없는 그러한 내부질서가 혼돈이란 이름으로 폭발해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을 따라가게 되면 안정돼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못 따라가게 만들어버리는 겁니다. 넓은 길로 가지 못하게 만들어버려요. 자진해서 왕따 되고 자진해서 따돌림 되는 그러한 혼돈의 질서를 내부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그 변화가 다윗을 통해서 우리에게 대한 말해주지요.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나이까.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왜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합니까? 왜 저 사람은 자꾸 나를 따라옵니까? 나는 그 사람에게 주여, 라고 이야기했고 그 사람에게 나의 왕이여, 라고 했고 나는 그 사람에게 기름 부은 왕으로 최선의 대우를 배려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따라와요.

사무엘상 24장에서는 옷자락을 잘랐지만 26장에서는 물병을 가져오거든요. 18절 다시 봅시다. “또 가로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다윗을 지금 자기 나름대로 자기가 옳고 정당한 질서를 갖추는 것이 자기에게 합당하고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걸 오늘 강의에 나온 제일 어려운 단어를 쓰겠습니다. 다윗은 안정돼있으니까 적절한 관념, 관념은 정신이거든요. 적절한 정신체제를 갖고 있습니다. 다윗은 악신 들린 게 아니니까 적절해요. 적절한 정신체제가 부적절한 관념체제로 바뀌게 된 겁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묻는 거예요. 제가 당신에게 무슨 악을 저질렀기에 당신은 나를 미워하면서 쫓아옵니까?

이렇게 내부에 뭐가 생기느냐 하면 자기자아분열이 발생됩니다. 나쁜 짓해서 쫓아오는 것은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데 내가 기존에 알고 있던 모든 정신체제로서는 내게 일어난 이런 현상과 이런 체험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지요.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부적절한 거예요. 어떤 단어 하나 있으면 그 단어가 원인과 결과가 아귀가 딱딱 맞아야 되잖아요. 치과에서 이빨 했는데 이상하게 되면 다시 뽑아야 됩니다.

내가 생각한 그것과 현실 돌아가는 것이 이렇게 적절해야 돼요. 적절해야 한다. 그게 내가 안정적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 그게 뭐가 어려운가 하면 문제는 다윗이 지금 뭘 모르느냐 하면 적절한 것과 정확한 것을 구분을 못하고 있어요. 상당히 어려운 말이죠. 적절한 것과 정확한 것을 다윗은 동일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바르게 살면 뭘 안 받는다? 미움을 안 받을 때 이게 적절한 거예요. 그런데 바르게 사는데 미움 받는다? 이건 적절하지 않지요. 그런데 하나님 보시기에 그게 정확하다는 거예요. 이게 미치는 거예요. 그 근거를 다윗을 그걸 찾아가는 거예요. 다윗은 당하기는 당하고 따지기는 누구한테 따지느냐 하면 하나님한테 따지는 겁니다.

오늘 시편 22편,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저를 어찌 미워하십니까? 어떻게 저를 쫓아오게 조치를 합니까? 제 안정적인 마음의 질서가 왜 이렇게 혼란스럽고 아귀가 전혀 맞지 않게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이 체험 빠져버리면 십자가 모르는 사람이에요. 무슨 거짓말하는 게 취미가 되고 나쁜 생각하는 그것이 어디 교양이 되겠어요. 안 되잖아요.

그런데 악한 일하고 싶지가 않아요. 세상에서는 악하면 벌 받게 된 게 적절한 겁니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오케이, 동의했어요. 동의해서 세상의 일원으로서는 불편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구원받아야 될 사람은 갑자기 주변 자체가 오케이고 나도 거기에 대해서 동의했어요. 인간은 바르게 살아야 된다. 동의합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대로 하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성화된 삶을 살아야 된다. 우리는 오케이, 하나님의 성도라면 빛과 소금이 돼야지. 오케이, 나 동의해. 이게 뭐냐 하면 적절함이거든요. 적절함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가능한 거예요. 부부가 너무 싸우면 못 살지요. 근데 싸우는 것보다 평화롭게 사는 게 나한테 이익이잖아요. 적절한 거예요.

적절한 것을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이걸 정확하다고 생각해요. 그걸 두 자로 진리라고 하는 거예요. 복음은 진리다.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럼 진리가 뭐꼬? 진리는 내가 생각할 때 적절한 게 진리다. 왜 나는 정당하니까 나는 의로우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나는 복음에 대해서 알고 있으니까. 이게 적절한 거예요.

그럼 다리는 왜 삐었나, 다리는 왜 접질렸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머리는 왜 아픈데? 나쁜 짓해서 머리 아프면 되는데 머리는 띵 하고, 별로 나쁜 짓한 것도 없는데 편두통 일어나고. 왜 그래야 되는데. 우리가 인간성이 너무 좋아서 가만있지만 다윗은 대번에 이야기합니다.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굉장히 다윗 입장에서는 난처한 겁니다.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따라오고 더욱 더 난처한 것은, 사무엘상 26장 21절 봅시다. 얼마나 이게 난해한지.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

뿐만 아닙니다. 25절에,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네 것이다, 라고 사울 왕이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이걸 다윗이 이 말을 믿습니까, 안 믿습니까? 믿으면 바보인 거예요. 이 세상에서 나는 믿습니다, 나는 복음을 압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인간이 병신이에요.

사울은 그 순간 본인이 굉장히 잘못된 걸 알아요. 그러나 사울의 특징은 자기내부적인 결심이나 각오가 전혀 세상에 나가면 먹혀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마음 나도 몰라. 내 마음 갈 곳을 잃은 것처럼. 이 세상은 적절한 것만 생각했기 때문에 내 적절하면 세상도 따라줘야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세상이 돌아가는 것과 내 자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내세우는 명분 있잖아요. 그것이 어깃장난다는 생각을 세상 어떤 인간도 그걸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다윗도 그걸 몰랐으니까. 내가 생각한 걸 다 비틀어버리는 세상. 욥의 친구와 욥의 차이가, 둘 다 생각은 같아요. 바르게 살면 복 받고 나쁘게 하면 벌 받는다. 둘 다 똑같은데 어디서 차이 나느냐 하면 체험에 차이나요.

그런 가설, 그런 세미나, 그런 신학, 복음적인 설, 이론 푸는 것, 거기에 대해서 욥의 친구들은 그걸 적절하다고 쥐고 있고 욥도 그걸 쥐고 싶은데 욥에게는 내부분열이 일어난 거예요. 분명히 나는 나쁜 짓한 게 없는데 내게 주어진 모든 징벌은 이거는 극악무도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조두순한테나 주어지는 그런 징벌을 다 받고

그리고 욥이 더 답답한 것은 지금 곧 자기가 죽어 가는데 얼마나 죽어 가는지 자기 육체가 그림자 같다고 했거든요. 두께가 없어요. 무게가 한 사십 킬로도 안 나가는 하여튼 바짝 그림자 같이 얇은 습자기 같은 그런 몸이 되어 곧 죽는다고 알았다고요. 죽어가기 전에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왜 이런 어떤 원리원칙으로 나한테 적용시키는지 그걸 알고 가야지요.

현재 욥과 욥의 친구 이론에 의하면 그것 모르면 나중에 주님 앞에 심판을 받기 때문에 죽기 전에 미리 정보를 빼내야 된다니까요. 마지막 늘 빌면서 기도하는 것이, “내가 모르는 바를 알려주시옵소서. 내가 죽기 전에 이건 알고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오케이. 죽는 것은 내가 죽겠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죽지만 영문이나 알고 죽고 싶습니다. 이게 마지막 소원입니다. 하늘에 나의 증인이 있을 거예요.” 이런 식으로 욥이 계속 나가거든요.

그래서 어제 오후 설교 때 그런 이야기했지만 욥이 뭘 모르느냐 하면 송가인과 홍자가 싸운 걸 모른다고. 진짜 싸웠는지는 모르겠고요. 안 싸웠지요. 인간은 자기의 적합성을 위해서 정당성을 위해서 자기의 정당성에 방해되는 건 다 잘라버리는 거예요. 이건 내가 몰라도 되고 이건 내가 필요한 것, 이건 몰라도 되는 것.

미국 대선에서 부정투표는 내가 몰라도 되고 그건 알 필요 없고. 나이지리아에 무슨 일이 있는지 내게 나이지리아 이야기까지 왜 필요하냐? 필요 없고. 필요한 것은 내게 정당성으로 돌아올 정도로 나의 선함과 착함이 고스란히 잘 보호가 되는 그 내부질서, 그것만 필요한 거예요. 그래야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반박과 변명하고 내가 그들에게 나의 방어체제가 가동할 수 있는 그런 것들만 사드처럼 배치가 돼있거든요.

그래서 사울도 그렇고 다윗도 그렇고 둘 다 뭘 적절함으로 보느냐 하면 나는 미움 받기 싫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다윗과 사울에게 다 같이 이야기합니다. 사울은 정신없이 움직이니까. 나는 미움 받기 싫어요, 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응답했습니까? 그 근거를 성경에 의해서 대봐라. 나는 절대로 미움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그 근거를 성경적으로 제시해봐라. 성경적으로 제시됩니까, 안 됩니까? 될 수 없어요. 왜? 나를 집어넣었으니까.

삼십 대에 결혼해서 팔십, 구십까지 남편과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라고 했을 때 주님의 응답은 뭡니까? 그렇게 살아야 될 근거를 너의 정당성을 성경으로 증명해봐라. 예레미야로 할래, 스가랴로 할래? 어디에 그런 게 있느냐? 그런 근거가 없어요. 그럼 근거는 어디서 온 거예요? 마귀로부터 온 거예요.

그럼 근거는 뭐냐?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나를 버림받아도 괜찮다는 게 근거에요. 그리고 그 근거에 의하면 어느 누구도 적절한 것은 마귀 생각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거죠.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저 사랑해주세요, 라고 내세울만한 근거를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나 구원해주세요, 천당 가게 해달라는 그런 근거가 성경에 없는 이야기에요.

너무나 일방적이거든요. 생명책에 기록된 자. 누군데요? 보지 마. 넌 보지 마. 다만 체험으로 너에게 주어질 거야. 생명책에 누가 기록됐는지 몰라요. 모르니까 생명책에 있다는 게 지워져버리지요.

구약적으로 다윗이, 이야기하다가 이야기할 것 잊어버렸다. 근거지요. 근거에 의하면 주님은 누구를 사랑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 일단 모든 인간을 생명나무에서 추방했기 때문에 생명나무 때문에 추방했다면 주님이 사랑하는 것은 생명나무에요. 이것은 뭐 딱 봐도 나오잖아요. 선악과 따먹었느냐? 나가. 생명나무 보호할 거야. 너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를 보호하는 거예요.

그러면 생명나무는 보호하고 선악과 따먹은 자는 미워한다는 것은 분명히 정해졌잖아요. 그러면 한쪽은 사랑하고 한쪽은 미워한다는 이 대립을 그대로 유지한 채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거예요. 그대로 유지해줘야 돼요. 이게 십자가에요. 그런데 인간들은 여기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뭐가 발생되느냐 하면 자아가 발생됐습니다.

자아라 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나’에요. 나가 발생되니까 모든 선택과 모든 성경말씀, 모든 성경구절을 나로부터 설을 푸는 겁니다. 나 성경 아니까 괜찮지요. 남은 지옥 가도 나는 천당 가야 되지요. 전부 다 설을 푸니까 이 세상의 대변자로 자아가 등장하고 나가 등장하면서 나와 누구하고? 나와 하나님 뜻하고 극단적인 대립관계가 수립되는 거예요. 부딪혀야 십자가 터질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선 성경을 통해서 장차오실 예수님 자리에다 다윗은 언약을 받았으니까(다윗언약) 예수님 오실 자리에다 배치를 해요.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베드로 설교에 나와요. 배치를 하고 여기 다윗을 그대로 두고 다윗을 어떻게 보느냐 하면 사울에게 미움 받고 이유도 없이 쫓겨 다니는 쪽으로 합니다. 그러면 다윗이 몇 개에요? 여기 있는 다윗과 여기 있는 다윗, 두 개가 있지요.

그러면 다윗 입장에서 사울에게 당하는 다윗과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다윗 사이에 여기서 내부분열이 일어나지요. 이것이 뭐냐 하면 십자가를 증거하는 기호가 됩니다. 이 기호는 물화,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육화가 되지요. 이걸 신약에 오면 기호는 말씀이 되고 육화는 육신이 돼요. 말씀이 육신이 되는 거예요.

다윗 자체가 그 당시에 성경이에요. 상형문자에요. 움직이고 있어요. 기호라고 기호거든요. 그러면 왜 다윗이 아니고 기호라고 할 수 있느냐? 다윗은 자꾸 사울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당신은 기름부음 받은, 이러한 요소를 내 쪽에서 보호하겠다는 거예요. 당신이 아무리 악해도 난 당신을 보는 게 아니고 하나의 기호로 보는 거예요.

기름 부었다는 것은 어디 있느냐 하면 다윗언약 오기 전에 무슨 언약? 바로 모세언약에 있어서 왕과 제사장은 뭘 바릅니까? 기름 바르죠. 그럼 이건 언약의 지속성이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이 계신다는 뜻이고 하나님의 이름은 자기가 스스로 던져버린 그 언약을 따라오면서 완성시키는 역할이 하나님 이름이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모세언약에서 다윗언약으로 올 때까지 단절이 있다, 없다? 단절은 없어요. 단절이 없다는 증거가 뭐냐 하면 사울이 아무리 악하게 굴어도 사울을 둘러싼 기름부음, 다른 말로 메시아죠. 기름부음의 기호성, 말씀성은 유지돼야 되는 거예요. 견지돼야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어릴 때 다윗 자체가 골리앗과 하기 전에 다윗이 이미 사무엘 죽기 전에 기름부음 받았잖아요. 기름부음 받음이 유지가 되는 겁니다.

요셉이 착하다, 안 착하다 할 것 없이 요셉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시편 105편 봅시다. 17절에,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한 사람을 앞서 보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대표자가 되는 거죠. 왜냐하면 앞서 보낸 사람의 모든 체험이 뒤에 오는 사람의 체험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그래요.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자, 여기서 아까 우리가 공부한 것 해봅시다. 착고에 상하고 몸이 매였다는 것은 누구한테 해당되느냐 하면 죄수에게만 해당되잖아요.

시편 105편 17절,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요셉이 싸가지 없는 건 알지만 싸가지 없다고 해서 이런 벌을 받을 리는 없고요. 이런 일은 죄수가 받은 거잖아요. 그런데 요셉이 죄 지을만한 원인을 제공했습니까? 안했지요. 그러면 이 땅에서는 원인이 없지요. 적절하지 않지요. 부적절하지요.

그런데 그 뒤에 봅시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시105:19) 그러니까 여호와 말씀이 기호화된 이 세상과 대립관계에 있는 겁니다. 이게 십자가에요. 십자가가 십자가 안다는 자를 대립하는 거예요. 십자가 아는 것을 설이니까. 자기 구원받으려고 십자가 믿으니까. 이것과 진짜 십자가 체험은 반대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아는데 왜 이렇게 사는 게 고됩니까, 고생스럽습니까? 이런 고백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기호가 육신화되지요. 육신은 체험을 말하는 거예요. 그냥 이론으로 알던 십자가가 진짜 성도라면 이 땅에서 무슨 체험을 합니까? 분명히 십자가 알고 챙길 것 다 챙겼는데 이상하게 왜 모든 게 내 뜻대로 안 되지? 주께서 나를 꼭 지옥 가는 사람처럼 분명히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라고 하면서 자꾸 삶은 지옥 가는 사람처럼 다뤄지는 이유가 뭐냐?

욥처럼 분명히 믿음 자인데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자랑했잖아요. 욥 같은 믿음 자가 없다고. 욥 같이 믿음 좋은 자가 없는데 욥은 실제 자기 삶의 상황에서는 천하에 지옥 가는 사람으로 미움 받고 살잖아요. 이 앞뒤가 안 맞는 걸 모순이라 하지요. 논리가 연결이 안 돼. 논리가 단절됐어, 끊어져버렸어요. 설득하고 납득해야 되는데 설득한다 하다가 말이 그만 스톱이 된 거예요.

논리로 하면 되는데 체험을 하게 되니까 나도 내 마음 몰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내 마음 나도 몰라가 뭔 뜻이냐 하면 왜 주님이 나를 사랑하는지 왜 주님이 나를 생명책에 의사 물어보지도 않고 기록했는지 왜 나를 천국 가라고 생명나무 과실을 주는지 도대체 나는 모르겠다는 거예요. 모르면서 천국 가는 거예요. 원인과 결과가 연결되지 않는 채 천국 가는 거예요. 그게 주의 증인입니다. 이게 언약의 사람 특징이거든요.

그 점을 좀 더 깊이 있게 보기 위해서 로마서 9장 16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라고 돼있지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11절에 보면,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뭐로 말미암지 않고? 행위를 반드시 집어넣어야 돼요.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그러면 성도가 구원받는데 성도가 주인공이 됩니까, 아니면 성도 안에 들어오신 분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들어오신 분이 주인공이 되지요. 그것이 바로 다윗 안에서 무엇으로 확장되느냐 하면, 예수 안으로 확장되는 겁니다. 다윗 시대는 물론 예수가 아니고 하나님이죠. 언약의 하나님, 하나님 이름. 어려우니까 그냥 하나님 안이라 합시다.

다윗은 하나님과 같이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왜? 자기가 원해서 기름부음 받은 게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 안과 자기 안이 서로 적절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신약에 와서 성도와 성도 바깥에 있는 예수 안은 적절한 게 아니고 대립이 돼버리는 겁니다. 그 대립이 유지되는 한 이 사람은 예수 안에 있는 거예요. 대립이 유지되면서.

어제 낮 설교한 것 잠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어떤 절뚝발이가 있는데 절뚝발이를 예수 이름으로 낫게 했습니다. 또 소경을 낫게 했어요. 소경은 눈 뜨는 게 소원인 거예요. 남들처럼 적절하게. 남들은 멀쩡한데 자기는 절뚝발이 됐다는 사실이 납득이 안 돼요. 왜?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착하기 때문에.

나보다 못된 사람은 걸어 다니고 착한 나는 앉은뱅이 돼있고 어린아이 강간하고 성폭행해서 죽여 버린 사람은 멀쩡하게, 멀쩡하진 않지만 안산에서 살고 있고 팔굽혀펴기 천 번 하면서 건강하게 살고 있고 나는 아버지도 없는데 사고 나서 다리 두 개 못 쓰고 있을 때 소원이 뭐냐 하면 나도 적절하게 해 달라. 내 행함에 딱 맞는 딱 맞춤 해달라고 하지요. 만약에 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앉은뱅이에서 나았다고 칩시다. 주여, 제가 앉은뱅이 그 자체였군요.

그러니까 죄인이 예수 믿고 의인되고자 했는데 기도응답 없이 그냥 진짜 의인되고 보니까 천하에 죄인이 본인이었어요. 이제야 내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죄인 돼야 될 이유를 이제 안 거예요. 그 죄인 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거예요. 남들이 나에게 어떤 요구를 하고 어떤 비난을 해도 그건 나한테 마땅한 조치인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평생을 강도로 살고 평생을 창기로 살고 평생을 세리로 살아도 그까짓 게 뭐가 문제가 돼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보다 더 못해도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주인공이 나였던 거예요. 이게 모든 타락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모든 인간이 어떤 상태인가? 자기가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주인공 노릇하고 있는 이 자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한 그러니까 주님 보시기에 악마의 세계라는 사실을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기호화된 거예요.

다시 사무엘상 26장 21절,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범죄 했으면 다신 안 찾아와야 되잖아요.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차라리 북한 김정은의 말을 듣지 사울 왕을 들을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다윗은 이제 간파했지요. 사울이 말을 어떻게 하든지 자기 말하는 게 아니라 나는 잘못했고 너는 옳다는 게 기름부음의 요소에서 나온 거예요.

사울이 말한 게 아니고 사울과 함께 있는 기름부음 요소니까 결국은 사울을 통해서 사울 너만 기름부음이 아니잖아요. 차기 왕으로 누가 기름부음 받았어요? 나에게 주어진 기름부음, 이게 메시아니까 메시아 안에 있는 우리에게 바로 메시아가 하는 이야기가 있는 거예요. 내 뜻의 연속성이 아니고 내 적절함의 연속성이 아니라 주님의 정확한 것, 정확한 걸 두 자로 진리라 하지요. 주님의 진리의 지속성을 위해서 나는 죄인이 돼야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의의 공로를 위해서 십자가를 위해서 그 역할로 조인트 된 거예요. 결합이 된 겁니다. 성도라는 게.

사무엘상 26장 24절 봅시다.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이걸 화살표로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질서에서 혼돈, 혼돈에서 질서로 바뀌지요. 그러면 이 질서는 주인공이 누구 질서냐 하면 나가 질서가 돼요. 나 위주의 질서가 되는데 혼돈이 되게 되면 여기 두 번째 나오는 질서2, 질서1은 나를 위한 질서인데, 질서2는 뭐냐 하면 바로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신 여호와께서 여호와 자신에게 경로를 겪게 하고 주어진 하나님이에요.

다윗에게 질서에서 혼돈, 쫓겨 다니는 그 경로를 결국은 그 경로를 따라서 예언이니까 장차 누가 오셔요?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이 경험한 이 체험에 뛰어들어요. 그러면 장차 성도와 함께 있는 주님은 어떤 주님이냐? 다윗처럼 질서에서 혼돈에서 질서로 이어진 그분이 주인공이 되는 새로운 질서에 성도가 여기에 가담하게 되면 이것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단절 또는 불소통성, 이 지상의 어떤 인간도 천국을 안다, 모른다? 일체 모른다. 체험적으로 다가와야 돼요. 예수 믿고 천당 간다는 말은 악마의 사기술이죠. 악마의 사기입니다. 물론 그 악마의 사기로 교회가 있고요. 그러면 이러한 질서가 되게 되면, 질서란 관념이죠. 안정적 관념인데 이건 적절한 게 아니고 정확한 관념이에요.

진리는 우리는 모르니까. 우리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은 생명나무 따먹은 적이 없어요. 생명나무 어떻게 생긴 지 모르지요. 내부적으로 그냥 적절함을 찾은 거예요. 착하면 복 받는다, 이것만 적절함을 찾는 거예요. 선악체계에 의해서. 그러나 정확한 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거예요. 하나님 쪽에선 알지요.

이것은 관념이니까 관념이 오기 전에 실제로 체험을 했잖아요. 그러면 체험이라는 것은 우리 육신이 물질이 있어야 되니까 물질을 경유해서 관념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물질로 인한 체험의 경유 또는 과정은 필요하지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의 내용이 비로소 풀리는 겁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질문을 했어요. 고린도전서 11장의 내용이 뭐냐? 그 어떤 분이 여기 계시는 어떤 분이에요.

11장 3절에,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게 무슨 뜻이냐는 거예요.

도대체 이게 무슨 설이냐? 사도 바울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 하나의 관념이거든요. 하나님의 정확한 진리체계는 그냥 진리체계에 직접 갈 수 없어요. 왜냐하면 다시 이야기할게요. 다윗은 직접 하나님과 호소할 때 여기서 어떻게 됩니까? 불소통성이죠. 소통이 안 돼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응답이 없어요. 이 말은 뭐냐? 세상 고생 많이 해라. 이 말이거든요.

네가 나한테 정답을 알려고 하지 마라. 정답은 이미 네 움직임 자체가 정답이다. 네가 납득이 안 되고 이유도 없이 고생하는 자체가 정답인 거예요. 다리 접질리고 팔 접질리는 것도 정답이고. 네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경험하는 것이 정답이다. 왜? 앞뒤가 안 맞는, 자꾸 적절한 것만 찾았지 정확한 것은 몰랐던 거예요.

이 적절함은 나의 의로움, 결국은 나 잘났다는 걸로 끝나는 거예요. 남한테 욕 안 얻어먹고 살고 남한테 미움 받지 않으려고 하는 그 자체가 적절함이지 정확한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실익이지 진리가 아닌 거예요. 실제 나한테 이익이지 진리가 아닌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여기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악마는 영적인 관념이기 때문에 인간의 세계, 물질의 세계에선 관념이기 때문에 악마와 제일 먼저 접촉한 사람이 누굽니까? 여자지요. 그 다음에 여자는 누구와 접촉했지요? 남자. 그 다음에 여자의 후손이 등장하지요. 메시아. 그 다음에 약속으로 주신 것은 하나님. 이 절차가 이 물질적 세계, 이 인간들의 세계에 체험화 돼야 되는 거예요. 단계가 올라가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일종의 벌칙 같은 게 주어지지요. 여자는 남자 밑에서 종속돼야 된다는, 이건 벌칙입니다. 여자를 향한 벌칙이에요. 에 보면 세계챔피언 한 여자 권투선수가 있어요. 그렇게 되면 관중들 모으고 수입이 들어와야 되는데 프로모션 하는 사람들이 여자 권투시합을 구성을 못해요. 돈이 모여야 되는데 기업에서 후원을 하든지 그런 게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으니까 살 빼려고 권투하는 사람은 많은데 권투선수로 나가는 여자들은 점점 없는 거예요.

세계챔피언이지만 챔피언 되려면 계속 시합을 해줘야 랭킹이 유지가 되거든요. 안 되면 챔피언이고 뭐고 다 날아가니까. 시합할 데가 없어서 결국 뭘 했느냐 하면 남자 고등학생과 시합을 했답니다. 기술은 여자가 좋은데 시합 끝나고 난 뒤에 이 여자 챔피언이 며칠을 계속 아파요. 왜냐하면 남자 고등학생의 훅이 들어왔는데 그게 아픈 거예요.

여자선수의 주먹과 달리 남학생의 한 방이 챔피언도 아픈 거예요. 물론 기술로 점수로 이기긴 이기지만 아픈 것은 다른 체험이란 말이죠. 내가 느낀 점은 여자가 아무리 권투선수지만 남자 고등학생한테 한 방 맞고 난 뒤엔 며칠 간 아프구나. 여자의 한계를 못 벗어나지요. 못 벗어나면 여자는 약한 거지요. 약하면 10분 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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