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강-암 5장 10-13절(책망)201209-이 근호 목사
15강-암 5장 10-13절(책망)2012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5장 10-13절까지입니다.
아모스 5:10-13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이스라엘이 ‘악한 때임’을 반드시 겪어야 될 이유는, 이스라엘이라는 위상 자체가 처음 만들어질 때에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 나타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유월절 날 출애굽, 애굽에서 나오던 그 날 밤에 히브리인들이 사는 집 대문 문지방 문설주에 양의 피가 흥건히 페인트칠해져 있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사람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다면 그 거주지마다, 집집마다, 다른 사람이 봐서는 좀 이상한 건데요, 양의 피, 그 붉은 색깔로 대문마다 색칠이 되어 있을 때에 다른 사람들, 애굽사람들이 볼 때에 얼마나 이상하게 보겠습니까? 마치 노아가 방주 홀로 만들 때 노아의 모든 식구들이 쓸데없는 짓 한다고 핀잔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멀쩡한 대문에 양의 피를 바르면 파리 떼만 들끓지 그게 무슨 효력이 있느냐,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바로 그러한 일을 하고 난 뒤에 그 날 밤에 애굽 최대의 경악적인 잊을 수 없는 밤이 된 겁니다. 애굽의 모든 가정, 달리 말해서 대문에 양의 피가 발리지 않은 가정은 천사들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대로 업무를 추진하면서 빠트리지 않고 그 집안 대를 이을 가장을 다 죽여 버립니다.
그냥 막연한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집에 큰 아들 있는 사람들, 또는 손자, 손녀 말고 손자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집안의 대를 이을, 집안의 미래를 짊어질 자식이기 때문에 모든 식구가 그의 안녕을 최우선적으로 기원하는 그 대상이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없고 아무 어떤 대책도 없이 그날 밤을 넘기지를 못했습니다.
그날 밤을 무사히 넘긴 것은 바로 히브리인들의 맏이였어요.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우리가 매일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날 때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요. 그러나 그 밤에, 그 밤중에 매일같이 유월절 사건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백성 됨이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순간이 되는 겁니다.
내일 아침부터 일어날 때는 큰 아들부터 코에 손가락 대서 숨 쉬는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큰 아들이 숨을 쉰다고 할 때 사람은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하는데 그게 결코 당연하지가 않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하나님이 시작한 나라, 그 나라의 그 출현, 출몰, 하나님의 계시의 출몰이지요, 하나님의 뜻의 출몰입니다.
그런 나라의 등장에 이방나라는 들러리 선 거예요. 이방나라는 멋도 몰라요. 도대체 저쪽 히브리인 아들이 죽는 것 그게 신기한 것이 아니고 내일 아침에 눈을 떠야 될 아들이 지금 죽었다는 것이 이게 용납할 수 없는, 받아들일 수 없는 재앙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도 그런 경우지만, 아들 죽인다는 말은, 곧 현재 있는 나, 아들을 낳은 그 아버지, 너는 더 이상 희망 없다는 뜻입니다. 너는 더 살아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너의 팔자는 비참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존재라는 것이 여러 나라 중에서 하나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담은 없어야 될 나라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통해서 모든 이방민족을 책망하고 심판하는 계기로서 이스라엘이 등장한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자기 맏이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그 자체 때문에 우리가 존속되어야 되지, 하나님의 뜻이 없는데 우리끼리 산다는 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을 명심했어야 돼요.
그리고 그들이 약속의 땅에 갔습니다. 유월절에 살아난 자기들 장자가 구사일생 산 것처럼 약속의 땅에서 얻을 수 있는 포도원,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모든 것도 자기들의 성과이거나 자기들 노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님 은혜로 거저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 돼요.
그러나 만약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 동일하다면 여기는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나타냅니다. 그게 뭐냐 하면, “너희는 ‘당연히 집을 지어야 되고, 당연히 포도나무 심고, 당연히 포도주를 마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될 이스라엘 너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노력했으니까 집짓고 잘 살아야 된다. 노력했으니까 풍족한 산물도 당연하다.’ 당시는 농경시대니까, ‘농사지어서 그 소산물 내는 것이 내 노력에 근거해서 당연한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마라.”
뭐냐? 하나님의 법을 잊어버리면 그 당연하다고 생각한 그것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자기존재의 생존을 위해서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유월절 그 날 밤을, 그 취지를 놓치면 안돼요. 그것이 사라지면 안 됩니다. 그것이 없어지면 안돼요. 그러면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다들 죽었는데 너희들만큼은 살았잖아, 하는 하나님의 뜻이 그들에게는 유지되어야 되고 그 뜻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그들은 주목해야 되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그 율법을, 이방나라 우상을 섬기면서 그들은 맥이 빠졌다 할까요, 시큰둥 한다고나 할까요, 그들의 육신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버렸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버리면 이스라엘은 제 기능을 못하느냐? 율법을 버리면 버린 대로 율법의 기능, 다른 기능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저주요, 심판하는 기능 속에서 율법은 안 죽었고, 이스라엘 하나님도 살아계시고 여전히 활동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멸망과 패망을 통해서 더 확실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망해도 이스라엘을 만드신 하나님의 취지는 여전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북 이스라엘은 왜 율법을 버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아담에서 내려오는 우리의 신체, 육신의 본능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이 아주 간단한, 순간적으로 시작했다가 순간적으로 끝나는 에피소드처럼 짧은 일로 마감되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그 때부터는 인간이 악마의 정신으로 미쳐버린 거예요. 정신이 돈 거예요.
어떤 건널 수 없는 것을 건너버렸습니다. 그 점은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생명나무 있는 곳에서 추방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이 있는 곳과 네가 앞으로 살 곳과 건너올 수 없는 갭이 있음을 분명히 이야기하지요.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었을 뿐인데 따먹었다는 자기 일과 중에서 그 짧은 텀, 순간적으로 따먹었을 뿐인데 그 뒤 후유증은 자기 삶의 현실자체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거예요. 환경자체가 다 바뀐 겁니다.
살기 힘들다, 괴롭다, 그것은 여러분이 다 아시잖아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은 자신의 죄를 모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악마가 인간을 통해서 노리고 있던 점이지요. 자기의 죄를 모르니까 자기의 자기정당성을 항상 자기 안에 품고 있습니다. 왜 자기 죄를 모르느냐? 죄라고 지적하고 있는 그것을 따먹었으니까, “누가 뭐래? 누가 나보고 뭐라고 해? 뭐라고 했어?” 그러면 그것을 찢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렇지요.
만약에 어떤 왕이 있는데 신하가 진짜 충성되게 일을 하게 되면, 왕이 그걸 듣게 되어서 자기가 죄인이 된다 싶으면 왕의 대처는 간단해요. 그 신하를 죽여 버리면 되지요. 얼마나 간단해요? 그러면 나한테 직언을 하는 신하를 죽임으로서 나는 여전히 정당한 왕이 되어버리겠지요. 실제로 그런 왕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 36장 23절에 화로불이 나와요. 거기에 누가 앉아있느냐 하면, 여호야김이라는 왕이 앉아 있습니다.
21절에 보면 “왕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라고 되어 있지요.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비서 되는 바룩이 다 썼는데 그 쓴 책, 옛날에는 두루마리로 책이 마들어졌거든요. 그 책, 서기관 엘리후가 여후디를 보내서 그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해놓고 “여후디가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서 가져다가 왕과 왕의 곁에 선 모든 방백의 귀에 낭독하니” 22절에 “때는 구월이라 왕이 겨울 궁전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불이 꺼졌으면 괜찮은 데 불 피운 화로가 있더라, 그리고 23절에 “여후디가 삼편 사편을 낭독하면 왕이 소도(작은 칼)로 그것을 연하여 베어 화로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왕의 모습을 여러분이 쉽게 연상할 수 있어요.
허름하게 비어 있는 폐 공장 혹은 창고 같은 것,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조명도 어둑어둑 하고 지붕도 깨진 허름한 창고, 거기에 조폭 한 열 댓 명 둘러서 있고 가운데 오야붕이 앉아 있으면서 화로 불 쬐는 그 장면 생각하면 됩니다.
화로 불 옆에서 주인공이 조직폭력배에게 뭔가 간청하기 위해서 편지 같은 것을 보여주면 그걸 칼로 죽죽 그어서 불에 넣는 것, 진짜 조폭이지요. 옛날 왕은 조폭이고 따라다니는 군사들은 양아치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게 고대 국가관을 설명하는 가장 심플한 방법이에요. 조폭과 양아치. 왕 건은 조폭두목 신 숭겸은 양아치, 이 성계는 조폭대장, 전부다 서민들 등쳐먹고 왕 질하는 인간들, 이게 세상 왕이에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간혹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어진 지도자가 등장해요. 오늘 본문 아모스 5장 10절에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성문에서’라는 것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세상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광장 같은 곳이지요. 요즘으로 하면 광화문 광장 비슷한, 혹은 교황이 베드로성당 베란다에 나와서 축복의 말을 하는 것처럼 백성들에게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장소가 성문이었는데 거기서 책망하는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북 이스라엘의 원래취지, 진짜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 취지를 놓쳐버리고 그들은 출발점을 내가 죽었어야 되는데 왜 살아 있지, 이것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출발점을 나는 마땅히 살아야지, 남은 죽더라도 나는 살아야지, 모든 시작을 나로부터, 나 사랑으로부터 시작하는 그런 조로 분위기가 다 흘러간 겁니다.
그렇게 흘러 간 것에 대해서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어요. 이 육신을 갖고 있는 인간들은 아담의 속성을 그대로 받았기 때문에 잔소리 하면 다 찢어버리는 거예요. 아까 그 여호야김 왕처럼 그 성깔이나 백성들 성깔이나 똑같지요. 물론 여호야김은 유다왕이지만 지금 북쪽 이스라엘을 말하는 거고요.
그래서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특정인물이 등장해요.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왜 가난한 자를 그들이 구박을 해서 세금을 많이 때려서 가난한 자의 돈을 탐을 내느냐? 그것은 시작이 나 살고부터, 나부터 살자, 이왕 사는 것 잘살자, 잘 살려면 어떻게 하느냐, 안 죽으려면 안 죽을 만큼 살아야 된다, 안 죽을 만큼은 어떻게 사는 것이냐, 남들보다 더 넉넉한 재물을 확보해야 덜 죽고 덜 아프고 오래오래 살 수 있다. 자기의 그 욕망부터 챙기는 거예요.
분명히 유월절에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 때문에 살아놓고 그 생각은 날라 가버린 거예요. 시작점을 어린양이 대신 죽었다, 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난 모르겠고, 난 그냥 현재 내가 있으니까 내가 남보다 더욱 더 유리하도록 사는 게 내 목표다. 어떻게 하느냐? 뺏어야지요. 가만있으면 줍니까? 뺏어야 얻을 수 있잖아요. 빼앗기게 되면 뭐가 발생되느냐? 가난한자가 발생되는 거예요. 가난한자.
이 발생된 가난한 자에 대해서 여호와께서는 아모스 선지자를 보내서 책망하시는 거예요. 그 당시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 ‘가난하다’는 말이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에서는 가난하다고 하지 않고 이걸 영이라고 합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 하늘나라 가려면 육에서 영이 되어야 된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런데 아모스의 경우에 그리고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마태복음 5장 3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 다음 나오는 말이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을 바꿔서 하면, “천국에 가고 싶으냐?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면 돼.”라고 되는 거예요.
그러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내가 잘 먹고 잘살아야지, 가 출발점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 어떤 인간도 내가 사는데 불리하게 해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아담의 육신을 입었기 때문에 보다 유리하도록, 풍족하게 가져서 사는데 유리해야 불안감이 좀 줄어들고 편하게 살겠다. 이것이 모든 인생의 본심입니다.
이게 본심이고 그래서 누구나 다 그런 생각 갖고 있거든요. 그런데 남이 와서 내 것을 빼앗아 가버리면 그리고 그 빼앗아간 것을 내가 다시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나는 타인에 의해서 본의 아니게 가난하게 되어버리지요. 그러면 그 가난한 사람이 어디에 호소하겠습니까? 하나님께 호소하겠지요.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는 계기가 열린 겁니다. 기회를 부여받은 거예요.
아모스 5장 11절 말씀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이 말씀은 이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당해야 너는 천국 간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이런 일을 일부러 당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이 말씀대로, 아모스의 예언 5장 11절의 말씀대로, 가만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당하도록 되게끔 당한 사람, 더 이상 그 사람은 세상에 대해서 미련이 없으니까 누구한테 부르짖느냐 하면, 주님을 찾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하게 되지요. 왜? 이 세상에 미련과 기대가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말씀은 인간이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대로 되도록 주께서 말씀이 빈 말씀으로, 헛된 말씀으로 돌리지 않고 다 충실하게 성취해 나가시는 겁니다. 천국가기 위해서 일부러 가난한 그런 사람은 지옥 갑니다. 어디서 꼼수를 부려요? 그것은 꼼수고요. 모든 것을 버리고 수도원이나 수녀원에 가고, 그런 것은 진짜 지옥 안가면 내 손에 장을 지집니다.
톨스토이는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 다 주고 산상설교 말씀처럼 주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자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인데 ‘초반 끗발은 개 끗발’이라는 말처럼 초반에 산상설교를 지킬 수 있다고 한 그것이 나중에 엉망 되었잖아요. 아무 의미 없는 거예요. 말씀은 주님이 지키지 본인이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인간은 아담의 육신이라는 그 점에서 똑같아요. 자, 그래서 이 본문에 보면 그렇게 해야 되는데 그들이 말을 들을 수 있느냐? 절대로 들을 사람들이 아니지요. 아모스가 뭐라 해도 아모스 제키면 되고 말씀 안 들리는 곳으로 피하면 그만인 거예요. 그러면 나는 죄가 없는 거예요. 법이 없으니까 죄가 없는 거예요. 성경에 그런 말씀 있었나, 나 모르겠는데, 나 몰랐어,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면 자기는 죄가 없는 거예요. 눈에 돈만 보이고 말씀은 안 들어오니까. 그래서 사람이 가난하다고 해서 심령까지 가난하지는 않아요. 이 말씀이 있는 사람은 부자가 되든 가난한 사람이 되든 간에 그 부자 된 것이 시작을 나부터 시작했잖아요. 가난한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나도 부자 되고 싶어 하는데 능력이 모자라서 가난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본문 말씀대로 진짜 천국 가는 백성은 뭐가 필요하냐 하면, 10절의 말씀처럼 책망을 들으면 되는 거예요. 책망, 오늘 말씀은 간단합니다. 책망 받는 것에 대해서 얼굴을 안 돌리면 돼요. 책망 받는 확률은 벼락 맞는 확률과 같습니다. 사람이 책망 안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책망 받는 것을 복이라 여기는 사람은 정말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에요.
책망 받고 구원받는 겁니다. 책망을 받게 되면 이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칼집에서 칼을 꺼낼 때 어중간하게 중간쯤 빼다가 안 되겠다, 하지 말고 칼집에서 칼을 끝까지 잡아당기세요. 끝까지, 끝까지 잡아당기는 거거든요.
이스라엘이 책망을 받는다는 말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원래 이스라엘이 있었던 그 지점, 유월절 그 지점, 고요한 그날 밤, 그 무서웠던 밤,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입을 뗄 수 없었던 그 밤, 오직 천사만 왕래했던 그 밤, 그걸로 칼집에서 칼을 다 잡아 당겨야지요.
그러니까 책망을 받는다는 것은 대충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끝까지, 이스라엘의 뿌리, 근원, 시작점, 그 때까지 끝까지 가는 거예요. 바로 선지자를 따라서 주님을 따라가면 끝까지 갈 수가 있어요.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면서 계속 책망 받으면 이 세상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과 저세상 경계선까지 우리를 데려가기 때문에.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거든요. 예수님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끝나고 새 세상이 시작되는 그 입구까지, 아니 그 안쪽까지 우리를 데려가거든요.
데려가면서 계속 책망하는 거예요. 왜? 우리는 아담의 육신, 뭐든지 ‘시작을 나부터 시작했다. 나 잘난 것이 이 세상 성공이다.’ 그런 생각이 계속 뿜어져 나오니까. ‘남에게 지기 싫다.’ 뿜어져 나온다는 말이지요.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몸에 들어 있는 것은 스스로 서려고 해요. ‘복음이고 책망이고 이제는 아무도 간섭하지 말고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내가 알아서 한다는 것이 뭐냐 하면, 두 가지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자존감과 자존심. 자존심을 높이는 사람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별로 자존심 안 세워도 되겠지요. 편의점 아르바이트 하면서 “네 소원이 뭐고?” 하면 “페라리” 참 내 페라리, 그거 46개월 할부로 해야 돼요. 아르바이트 하면서 무슨 꿈이……. 그러니 가난해도 부자를 목표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청년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면 개코, 그런 법을 화로 불에 칼로 찢어서 버려버립니다. 돈이 중요하지 말씀이 왜 중요하냐, 안 듣습니다. 부자라서 안 듣는 것이 아니라 가난해도 안 들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전부다 책망입니다. 결국은 그들이 안 듣거든요. 안 들으니까 이게 얼마나 무서운 세계인지 마치 유월절 그날 밤의 고요함처럼 고요한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모스 5장 12절에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라고 주님이 이야기 하셨는데요. 이 이야기해도 이야기자체가 잔소리하는 말씀이잖아요. 칼 가지고 째면 그만이라는 거지요. 오늘 본문 말씀은 이런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이야기할 때 현실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질문을 던지고 질문을 던진 현실 속에 답이 있는 거예요.
현실을 살면서 목 쳐들고 “하나님이여 뜻을 주옵소서.” 이렇게 하지 말고 뜻은 이미 살고 있는 그 현실 속에 있어요. 아모스 5장 10-13절에 보면, 이미 거기에 답이 나와 있다고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전부 다 부자 되려고 하는 거예요. 전부다 주식투자, 투자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주식투기. 주식 왜 합니까? 가난하게 되려고 합니까, 부자 되려고 하는 거예요? 모든 삶의 목표가 살고보자에요 살고보자.
개척교회 왜 하십니까? 살고보자. 절에 왜 가십니까? 살고보자. 갓 바위에서 기도 왜 합니까? 살고보자. 코로나 때문에 교회 안 나온다고 하는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살고 보려고. 모든 게 살고보자, 에요. 시작이 ‘살고보자’가 시작된 겁니다. 이것은 악마가 가르쳐 준 거예요. 살고보자, 하는 인간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은 뭐냐? 나의 종말, 나의 끝이에요.
그러나 내 끝을 알아야 나를 알아요. 내 끝을 모르는 사람은 테스형이 아니라 뭐가 와도 자기 자신을 몰라요. 자기의 끝을 아는 자가 자기를 아는 자입니다. 그 끝에 설 때에 나의 시작은 내가 아니라 나의 시작은 주님인 것을, 주께서 친히 이끄시는 자에게만 자기의 끝을 알고 그 끝은, 주님의 끝이 나의 끝이고 나의 시작된 천국이 새로운 내 세계의 시작이 되는 겁니다.
책망 말고는 다른 게 없지요. 그래서 이 본문자체가 책망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문제고 주님께서 스스로 문제를 던지고 답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제가 아무리 이야기하고 아모스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은 이 말씀에 대해서 궁금하지를 않아요. 궁금하면 5백 원 줘버리지 이 성경말씀이 어떤 내용일까, 궁금하지가 않아요. 사는데 바빠서.
그러니까 말씀이 궁금하지 않으니까 도대체 내가 하나님께 뭘 질문할지 질문 할 수도 없어요. 기도하라고 하면 얼굴부터 창백해져서 시퍼렇게 돼요. 평소에 주님을 향하여 묻는 적도 없고 답변 받은 적도 없거든요. 나는 나 살기 바쁜데 바쁘신 주님 붙들고 미안하다는 거예요. 나는 나를 몰라도 살기만 하면 된다는 그것이 세상에서 들었던 거예요.
나는 나에 대해서 몰라도 그냥 잘 먹고 잘 살면 잘 사는 것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마태복음 7장 22, 23절에 보면, 아무 겁나 무서운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여기다 하나 집어넣어야 돼요. “교회 나오지 않았습니까?” 23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왜 도무지 알지 못하느냐 하면, 이들이 선지자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한 것이 맞아요. 하지만 그렇게 권능행해도 그 권능 행함 그것이 책망 받을 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자기 끝을 모르는 거예요. 이거 해서 밥 먹고 살려고 했던 거예요. ‘내가 이것 하면서 나는 죽어 마땅해.’가 안 된 거예요.
설교하면서 설교하는 이 자체가 이게 죄라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이게 죽어 마땅한 죄고 그리고 오늘 죽으면 내일 주님께서 유월절 일으켜서 나를 죽여도 그것은 주님이 정당하다는 그 정도로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선지자 노릇하면서, 남에게 가르치면서 본인은 살려고 목사 질을 하고 있어요.
수요설교 때려치워버리고 내일 맛있는 만두나 해먹을까, 이런 식으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하는 마태복음 16장 26절처럼. 말씀을 대할 때는요 목숨 내놓고 바꿀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돼요. 왜? 나의 끝을 미리 안다는 것, 현재 허접한 이 목숨가지고 써먹을 데 뭐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이 목숨, 지옥 갈 목숨을 후딱, 책망 받을 때, 이거 왔다, 아닙니까? 콜! 책망 받을 때 책망하시는 주님께 내 목숨 드리고 주님 따라 가게 되면 어디에 도달하는가? 십자가에 도달하고요. 그 십자가에 같이 들어가면 그게 바로 부활의 세계 아닙니까? 생명의 세계 천국입니다.
그래서 매일 우리가 살림을 받는 것은 새로운, 오늘 몰랐던 책망을 내일 받기 위해서인 거예요. 이걸 제가 강남강의에서는 어제의 복음을 내일의 복음으로 완전히 콘크리트 해버린다고 했지요. 또 그 다음날 되면 다음날 콘크리트 해버리는 이것이 책망이에요.
책망이 없는 자는 지옥가고 책망이 있는 자는 천국 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책망을 받는다는 것은 질문과 해답을 함께 받는 게 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책망을 받게 되면, 보통 나부터 시작하는데 그 나부터 시작하는 것을 끊어버린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내 것이 없으니까, 시작이 내 지점이 아니고 주님 것이니까, 내 것이 없으니까 어떤 사람이 되느냐?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가난이라는 말은 뭐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이 불가능한 것이 가난의 내용이에요.
그러니까 가난하다고 해서 한 달 수입 5십만 원이 가난한 것이 아니고 월급으로 1억을 받더라도 이게 전부다 내가 가능한 것이 아니고 불가능함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은 심히 가난한 사람이에요. 돈을 주체를 못해서 강남에 집 세 채 ,부산 해운대에 두 채, 저어기 어떤 정보를 또 알아서 세종 시에 한 5만평 땅을 가졌는데 그 사람의 마음은 심히 가난해요.
왜?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니까. 내가 머리 굴려서 얻은 게 아니니까. 그동안 내가 책망받기 전에는 내가 노력해서 얻었다 한 그 모든 것이 전부 다 불가능으로 바뀌었어요. 시험쳤다하면 백점, 학교에서 1등, 서울법대 수석, 어디갈래 골라잡아라, 할 때 그 학생이 심히 심령이 가난해요. 왜? 이것이 나의 가능성이 아니고 불가능이기 때문에.
어떻게 시험 치는데 아는 것만 나왔어요. 어쩌라고? 일부러 틀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은 시작점이 나의 똑똑함이거나 나의 노력이 아니고 ‘그 전에’ 가는 거예요. 그 전에. 없는 나를 만드신 주님의 솜씨로 보는 거예요. 그것이 아담의 육신과 섞이면서 책망의 대상이 되고 책망 받는다는 것 그것보다 더 가볍고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책망 받고 살아가는 성도의 특징은 뭐냐? 한마디로 말해서 이겁니다. 웃음입니다. 웃음. 책망을 통해서 나오는 것은 감사의 웃음, 물론 너무 실실 웃으면 정신이상자지만, 그냥 존재의 가벼움에서 나오는 웃음이에요. 그냥 싱긋이 웃어요. 감사합니다, 그 뜻에서 웃는 겁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뜻에서. 코로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여기 ‘고요함’이 나오는데 오늘 아모스 본문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아모스 5장 13절에 “그러므로 이런 때에 지혜자가 잠잠하나니 이는 악한 때임이니라.” 여기 이런 때가 어떤 때냐 하면 바로 천사가 나설 타이밍이 된 거예요. 천사가 나설 타이밍이 되면 요한계시록 8장 1절에 보면 사방이 조용해요. 사방이 조용하고 시간의 진척은 의미 없습니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지요. 마치 유월절 그날 밤처럼.
천사가 설칠 때는 피만 바르고 가만있어야 돼요. 시끄러워도 조용한 걸로 쳐주지만. “일곱째 인을 떼실 때에 하늘이 반시 동안쯤 고요하더니” 고요해요.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을 볼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 분주함과 요란함을 일체 무의미로 완전히 일괄 통일하는 거예요.
이 세상의 생각들이 얼마나 동일한지요. 별 인간 없거든요. 드라마 보면 이런 대사가 나와요. 술집에 가서 하는 대사인데요. 요새 술집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요. “뭘 드시겠습니까?” 하고 웨이터가 물으니까 “저 사람과 같은 걸로 한잔.” 이렇게 하거든요.
같은 걸로 한잔이 뭐냐 하면, 너나 나나 똑같다는 뜻이지요. 이걸 그대로 삼성 tv 같은 걸로, 김치 냉장고는 딤채로 같은 걸로. 모든 인간은 흉내 내고 모방하고 그것이 전염돼요. 오죽했으면 코로나도 같은 코로나. 인간은 코로나 걸림으로서 별다른 인간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처음 만들어질 때 인간이 별 인간 없다는 차별 없음으로 천사가 와서 돌려버리는 거지요.
이것은 성령이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3장 22절에 보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는 거예요. 개성이 없다 이 말이에요. 내가 저 사람보다 더 낫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처음에도 그랬고요. 그리고 우리의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없지요. 왜? 내 노력, 내 가능성을 발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책망 자체가 그렇게 나의 원래 내 모습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방식이 되기 때문에. 그게 또 아모스 말씀이 십자가를 통해서의 실현이기도 하고요. 그게 얼마나 모든 것을 알게 된 데서 오는 가벼움입니까?
그래서 이 천사가 활동한다는 것은 “잠잠하나니.” 다 심판하는 때라 그 말입니다. 첫 번 유월절 그날처럼 심판을 해버려요. 심판을 해버리면 칼에서 칼집 뺄 때 끝까지 빼고 나면 칼집 남고 칼 따로 나오잖아요. 이게 뭐냐? 칼집이 같이 있어도 중복된 현실이에요. 현실이 중복된 거예요. 이 현실 속에 또 다른 현실이 같이 공존하고 있는 겁니다.
이걸 알기 쉽게 설명하려면 크로마키 스크린을 생각하면 돼요. 크로마키 스크린 이라는 것은 유-튜브 촬영하는 사람이 자기 방에 작은 스튜디오를 차려놓고 하는데 크로마키 스크린으로 15만원에서 2십만 원 주면 한 세트 살 수 있대요. 녹색바탕의 빈 스크린을 걸어놓고 주인공 되는 나는 카메라로 찍고, 그 다음에 배경에는 우주나 단풍든 풍경 같은 것을 집어넣을 수 있는 거예요.
집어넣을 때 그걸 이렇게 표현한답니다. 키 컬러라는 장치를 누르게 되면 초록색 배경에 구멍을 뚫는다는 식으로 나와요. 구멍을 뚫는다는 말은, 지금 현실에 다른 현실이 구멍을 뚫고 들어와서 두 개의 현실이 중첩이 되어서 같은 현실로 보이게끔 하는 거예요.
심령이 가난한자도 살고 여기에 부자 되려고 애쓰는 그런 사람도 같이 중복되어서 사는데 이것은 마치 유월절 날 히브리인들도 살고 그 다음에 애굽사람도 사는 중첩된 현실, 섞여 있는 현실, 누가 천국 갈지 지옥 갈지 구원받은 사람은 알지만 그렇지 않고 책망을, 그 말씀,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현실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거예요.
그 현실이 무슨 현실이냐? 천사가 활동하고 성령님 활동하셔서 주시는 천국현실을 배경을 깔고, 그걸 뒤 배경으로 하면서 살아가는 자, 그 자가 오늘날 심령이 가난한 천국 백성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보면서 웃으세요. 공동묘지의 볼록볼록 한 그 위에 올라가면서 밑에 누워 있는 시신한테 할아버지 미안합니다, 할머니 미안합니다, 하면서 실실 웃으면서 밟듯이 이 죽은 현실인 것을 제대로 알면서 살아가셔야 돼요.
왜? 우리는 칼끝을 다 뺐으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천국의 백성으로 벌써 시작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이나 우리나 다를 바 없었던 저희들, 그저 성공하면 행복이고 부자 되면 축복 받은 것으로 여겼던 저희들, 그러나 천사의 활동으로, 성령님의 활동으로 우리의 끝이 십자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주님에게 책망 받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항상 마음속으로 기뻐하면서, 웃으면서 살아가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