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누가복음 4장 26절 (정착과 뿌리) 201117a-이근호 목사
강남-누가복음 4장 26절 (정착과 뿌리) 201117a-이근호 목사
누가복음 4장 21절부터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사야 61장에 나와 있는 그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응했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두 가지를 구분하시면 간단합니다.
하나는 내가 어디에 정착하느냐? 이거는 구약초기 출애굽 당시의 사정이라고 보면 돼요. 내가 어디에 정착하느냐? 애굽에서 일단은 나왔는데 어니 갈 거냐? 우리들이 어디에 집단적으로 갈 것이냐.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이렇게 되겠지요.
두 번째는 우리의 뿌리가 어디서 솟아날 것인가? 이것은 신약이죠. 이것은 신약입니다. 우리의 뿌리가 어디서 솟았느냐 하는 것은 여기는 내가 있고 우리 또는 집단이 있고 난 뒤에 이 집단이 애굽에서 살았는데 또 어디 가서 이렇게 살 것이냐 이렇게 되는 거죠.
이 집단이 이렇게 있는데 땅이 있는데 애굽에서 나왔던 홍해 건넌 우리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 위에서 이 땅이 아래 있고 이들이 위에 있다면 위에서 땅을 그냥 정착하는 거죠. 이것은 정착이죠 ‘정착’. 정착하는 거에요. 이미 우리는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 특징은 뭐냐 하면은 내가 있음 또는 우리가 있음이 되겠지요.
그런데 이거는 뿌리가 있고 그 뿌리가 자라서 우리가 되는 거에요. 우리라는 자체가 애초에 없는 겁니다. 없는 거에요. 이거는 신약입니다. 솟아나느냐? 아예 우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없고 뭐부터 먼저 있느냐 하면은 뿌리가 먼저 생겼고 뿌리가 자라나서 새로운 우리가 되는 겁니다. 신약적이에요.
구약은 이미 있는 우리가 어디 가서 살 것이냐. 이것은 신약적이 아니고 구약적이죠. 구약적. 시골 살다가 서울에 취직했다. 그러면 서울에 전셋집 어디쯤 얻겠느냐? 서울 시내 가까운데 교통 좋은데 전셋집 알아 봤는데 없어요. 어디 갈까 하는데 의정부로 가. 멀리 가죠. 이것은 정착 문제죠. 여기는 이미 있는 내가 또 어디 가서 또 살 것이냐의 문제고 구약적입니다. 구약적.
신약적은 뭐냐 하면은 아예 ‘나’라는 게 없어요. ‘나’라는 게 없는데 그 천국 가는 나는 없는데 뿌리부터 뭔가 박혀서, 뿌리가 박혀서 뿌리가 땅에 있는 뿌리가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말씀을 뿌리니까 옥토에 떨어지니까 옥토가 저절로 뭘 냅니까? 우리라는 백성을 내는 거에요. 그게 나중에 마태복음 13장에 연속적인 비유에 보게 되면 마지막에 천사가 추수꾼은 천사라. 좋은 알곡과 나쁜 것을 가려내서 심판을 한다 이렇게 되어있지요.
여기 우리는 뿌리부터 먼저 등장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구약적인 ‘나’가 또는 우리가, 구약적인 ‘나’가 신약의 우리로 바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들은 기껏 들어간 것이 가나안땅에 들어갔지 천국에는 못 들어가는 겁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래서 여기 우리의 뿌리가 먼저 생기고 난 뒤에 그 뿌리가 솟아나서 신약의 우리라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하는 이런 것도 다 구약적이죠. 예수 믿고 구원받고 이런 게 없어요. 예수님이 친히 뿌리가 되셔가지고 예수님의 친히 포도나무가 되셔 가지고 예수님이 친히 열매를 맺으면 그거 자체가 천국백성인데 천국백성이 신경 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내가 나의 뿌리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내가 나의 뿌리가 아니다 이 말이죠.
내가 나의 뿌리라고 하는 것은 구약적이에요. 신약에서는 내 뿌리는 내 담당이 아닙니다. 내가 뭐 뿌리까지 걱정. 뿌리가 없는데 일방적으로 주님이 나는 너의 뿌리다 이렇게 해놓고 나중에 몸체로 자라나고 보니까 그게 성도가 된 거에요. 게임 끝났어요.
이건 이렇게 정리하시면 됩니다. 이게 신약적입니다. 신약적. ‘적’ 자 하나 붙이는걸 주의해야 돼요. 신약에 와도 늘 삶은 구약적이니까. 구약만 구약적이 아니고 신약에 와도 구약적이에요. 신약의 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 많은 사람이 다 구약적이고 신약적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백성이지만 신약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여기에 21절에 “이에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여기 새로운 집단이 생깁니다. 집단이 생기니까 23절에 반발이 나오죠. 반발을 뭐라고 보느냐 하면은 너는 예수님을 보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요셉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아들. 요셉의 아들이니까 이것은 굉장히 사적이고 개인적이죠. 사적이고 개인적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때 우선 사적으로 오셨죠. 맞아요. 요셉의 아들. 요셉의 아들로 오셨어요. 사적으로 오셨는데 사적으로 오셔가지고 어디를 가셨냐? 사적으로 들어오셨다가 집단적으로 나오셨습니다. 나오셨는데 이 집단적이라는 게 바로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요.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의 새로운 집단의 유일한 개인이 돼요. 첫 번째 사람 돼요. 따라서 성도라는 것은 개인적인 성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집단적 성도에요. 성도라면 집단에 속해 있어요. 개인은 예수님에게만 개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만. 그래서 이걸 들어갔다 나왔다. 예수님 들어갈 때는 육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성령을 받아서 나왔잖아요.
요단강에서 성령 받았지요. 그 다음에 성령을 힘입어서 광야에서 누구한테 시험 당했습니까? 악마한테 시험 당했지요. 이게 뭐냐 하면은 예수님은 집단의 대표자 자격이죠. 대표자 자격. 집단의 대표자 자격이란 말은 집단은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대표자가 알아서 다 하기 때문에. 대표자가.
요즘 드라마 보면 부잣집 재벌집 아들 말썽꾸러기 마약하고 있을 때에 그 아버지 회장님이 그 망나니 아들 때문에 골치 아파도 아들보고 전화해서 “걱정하지마. 우리 담당 변호사 보낼게.” 그냥 변호사 보내서 돈 주고 해결 다 해버리죠. 회장님이 대표자 자격이죠. 아들은 망나니짓만 하면 되는 거에요.
우리라는 것의 유일한 대표자가 예수님이십니다. 그럼 예수님이 가셨던 그 코스. 들어갔다 나갔다. 그 코스대로 하면 예수님 들어올 때는 육으로 들어왔지요. 사적인 육으로 들어왔습니다. 나올 때는 집단을 대표하는 성령 오셨지요. 그러면 우리가 육으로 태어날 때는 사적이죠. 사적으로 해가지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 세례를 받게 되게 되면.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은 2가 아니고 1이 되는 거에요. 하나가 되는 겁니다. 대표적인 성령세례의 하나의 표현은 뭐냐 하면은 ‘사랑’이죠. 사랑은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거거든요. 이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세례’라고 해도 되고 ‘연합’. 하나의 축에 톱니바퀴가 같이 물려 있어가지고 하나 돌면 같이 따라 도는 이게 연합의 상태. 연합된 상태에요.
주님께서 뭐 우리한테 잔소리할려고 오신 게 아니고 아예 우리 인생 속에 들어와버렸어요. 그러면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끝났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끝나고 집단의 일원이 돼요. 집단의 일원이 됩니다. 이렇게 되니까 또 우리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요. 계속해서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걱정할 것은.
개인 + 개인 해서 이래서 집단을 이룰 것 같으면 이 집단은 육으로 들어가서 나올 데가 없어요. 아까 이걸 무슨 적이라고 했습니까? 구약적. 구약적은 우르르 모였다가 애굽에 모였다가 약속의 가나안 땅에 사는 것, 정착하는 것이 목적이죠. 그러나 신약은 뭐라고 합니까? 아무도 이 땅에 어디에 정착해도 그것은 멸망의 땅에 정착하는 거에요.
멸망의 땅에 정착하기 때문에 정착에서 새로운 뿌리가 등장해요. 새로운 뿌리가. 정착에서 뿌리가 되게 되면 뿌리는 보이지 않는데 여기서 싹이 나와요. 싹이. 여기서 싹이 나와서 나중에 열매가 맺히잖아요. 그게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의 비유에서. 작은 씨 뿌려가지고 큰 나무 생기지요.
이게 바로 뭐냐 하면은 우리도 역시 사적으로 들어왔다가 사적으로 나오면 안돼요. 육에서 육으로 나오면 안 되고 사적으로 나왔다가 우리에게 성령의 세례를 받게 되면 이게 우리가 하나의 예수님이 대표자가 되는 집단을 구성하게 됩니다. ‘집단’.
집단이라는 것은 뭐가 벌써 날라가버렸다? 사적인 자기의 개인적인 소유라는 것은 다 날라가 버린 거에요. 기분 되게 좋지요. 기분 좋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나’라는 자체가 성립이 안 되니까. 내가 성립이 안 되니까 내 걱정하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내 걱정이. 내가 있어야 내 걱정이 되는데 집단이 되는데 걱정할 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또 다시 둘을 이야기해 봅시다. 1번 먼저 하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이 거저 주신 것이다. 사도행전 17장. 하나님께서는 뭔가 받으시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모든 걸 다 주시는 분이다. 사도행전 17장 나오는 말씀인데 이 말 맞지요? 이 말 맞아요. 틀림없이 성경에 나오니까요.
사도행전 17장을 보게 되면 17장 24절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그 다음에 뭡니까?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 이시죠.
이걸 만약에 우리가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는 모든 것을 진짜 썩어가는 이빨까지 하얗게 되는 머리까지 전부 다 주님께서 주시는 거죠. 그러면 이건 뭐냐 하면은 받기만 하면 되는 존재가 돼요. 받기만 하는 존재. 그러면 여기서 받기만 하는 거니까 줄 필요도 없으니까. 여기서 뭐가 나오겠어요? 감사가 나오겠지요.
자, 이런 신앙이 있을 수가 있어요. 이게 틀린 게 아닙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주시는 이유는 도로 받으시기 위함이다. 이것은 이제 유명한 욥기 1장에 나오지요. “주신 자도 하나님이요 가져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2번 주시는 이유는 도로 받으시기 위함이다. 대표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모든 걸 받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액션. 이 땅에 살면서 모든 액션은 챙기는 겁니까? 자기의 목숨, 살과 피까지 아버지께 드리는 거에요? 도로 드리는 거죠. 우리 1번은 받기만 해도 좋으니까 감사가 되죠. 그러나 주님의 감사는 뭐냐? 현재 자기가 받은 것을 도로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드릴 때 드리는 방식이 1번 자살이었다. 2번 살해당함이다. 몇 번입니까? 살해당할 때는 여기에 협조자가 있었지요. 악마의 종들. 다시 말해서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공격해서 예수님의 목숨을 뺏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람에 의해서 빼앗기는데 주님은 그걸 뭐냐? “아버지여 내 모든 것을 받으시옵소서”라고 하는 거에요. “내 모든 것을 받으시옵소서. 아버지여”
지금 우리는 1번에 되게 감사해요. 1번에 감사한데 예수님이 우리의 집단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걱정할 것 없지요. 그 문장을 둘로 이렇게 이어봅시다. 사람에게 빼앗길 때 우리는 걱정할 게 하나도 없어요. 두 문장을 이은 겁니다. 내가 사람한테 빼앗길 때에 우리는 걱정 염려할 게 하나도 없게 돼요. 문장이 이상하게 되지요?
자, 어떤 사람이 보이스피싱 당해서 한 1200만원 날라갔습니다. 1200만원 날라갔다 칩시다. 이 사람은 성도입니다. 성령 받은 성도라면 1200만원 할 때 이 보이스피싱은 나쁜 사람들이죠. 돈을 뺏어가니까. 1번 보이스피싱한테 1200만원 뜯겼다. 2번 1200만원 하나님께 헌금했다. 몇 번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1200만원이나 하나님께 헌금한 거에요.
왜냐하면은 그 가는 경로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우리의 집단의 대표자가 갔던 경로가 빼앗기는 식으로 드리게 되는 거에요. 그냥 내가 헌금하는 게 아니고 빼앗기는 식으로 하나님께 내 몸과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드린 게 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다시 제가 분명히 여러분 때문에 걱정이 돼서 하는 말입니다만 아무 염려하거나 아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이스피싱 당해도 아무 염려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헌금 하는 것 치고는 좀 과격하지요. 혼이 나가지요. 과격하지요.
바로 사람들은 뭘 놓치는가. 성경 해석할 때 2번을 놓치는 겁니다.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감사하겠습니다. 여기서 스탑됐어요. 여기서 스탑되어버렸어요. 뭐할라고? 정착할라고. 정착 왜 하는데? 정착은 구약적인데? 2번이 돼야 돼요. 왜? 우리의 정착은 위에 있으니까. 주님 따라가면 돼요. 주님이 바쳤다면 우리도 같이 바치는데 알아서 바치면 안돼요.
헌금하고 이런 짓하면 안됩니다. 뜯겨야 돼요. 사기당하고 몸 아파서 치료비 2000만원 날라가고. 왜? 건강 이런 것도 뜯기는 거니까. 왜 드린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우리는 왜? 주님은 분명히 드렸는데 어디까지 드렸습니까? 내 살과 내 피 목숨까지 드렸는데 우리는 주님한테 다오 다오 달라고만 하고 있어요. 그거 받아서 뭐할라고? 뭐 할라고 달라고 하는 겁니까?
1번에서 2번으로 내려가야 됩니다. 1번에서 2번. 아무리 이론상 모든 것은 주의 것입니다 신나게 외쳤지만 막상 1번에서 2번의 지경으로 나가버리면 갑자기 사적인 분노가 일어나지요. 이러고는 못 산다. 나 이러고는 못 산다. 하나님 믿는 보람 없이 나 이러고는 못산다. 갑자기 여기서 집단이 나오는게 아니고 개인이 나와 버리는 겁니다. 나 이래서는 못산다.
오늘 본문 다시 봅시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이 성경에 맞춰 보면요 얼마나 어설픈지요. 뭔가 앞뒤도 안 맞고 어설퍼.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여기에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케함을” 이걸 받을 수 있는 위인은 신약에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한명도 없고 단 한명이 있는데 한명이라는 게 이게 사적이에요. 개인적이에요. 개인적입니다. 이 개인적으로 오신 분, 그게 누구냐 하면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 맞아요. 요셉의 아들입니다. 어?! 저 요셉의 아들이잖아. 사적이에요. 요셉 집안의 아들이에요. 다른 집안 말고 요셉집안이라는 하나의 사적인 집안의 아들이에요. 맞아요.
사적인 집안의 아들이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아무도 예수님만 바로 희년의 복을 누려야 될 분 바로 예수님 밖에 없는데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아버리니까 들어갔다가 개인적으로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집단으로 나와요. 집단으로. “너희에게 임하니라” 갑자기 ‘너희’라는 없는 새로운 집단이 발생된 거에요. 이사야 61장에 의해서.
너희가 누구냐는 그것은 이미 있는 자가 정착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도 없는데 문제는 뿌리가 있으니까 뿌리에서 열매가 맺을 거에요. 너희라는 그러한 종자들이 마구 올 겁니다 이제. 예수님이 그 대표자가 돼서 나올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적들은 뭡니까? 이렇게 했지요. 요셉의 아들이잖아요. 그래 요셉의 아들이잖아.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자기들은 짤렸다는 사실을 도저히 모르는 거에요. 자기들이 속해 있는 그 집단과 예수님이 속한 집단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겁니다. 개인에서 어디로 나간다? 집단으로. 개인에서 집단으로 가는데 이걸 좀 어렵게 표현하겠습니다. 어렵게 표현해야 될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이 집단도 이 세상에 눈에 띄니까. 세상의 집단하고 여기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의 집단하고 구분이 안 되니까 이렇게 되는 거에요. 개인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은 말씀으로. 개인에서 말씀으로 되는 거에요. 그럼 중간에서 개인은 여기서 없어집니다. 주님께 바친 게 돼요. 개인이 없어지고 말씀과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들이 쓰레기 버릴 때 어디에 버립니까? 봉지에 담아 버리지요. 개인은 봉지에 담아 버려야 돼요. 이 봉지가 뭐냐 하면은 십자가라는 말씀 완성의 상태에다가 개인이 담겨져서 하나님께 바치던지 드리던지 천국가던지 뭐든지 이 봉지가 있어야 돼요. 개인적으로 못갑니다. 개인의 자격으로 갈수 없어요. 들어갔다가 나와야 되니까.
사적으로 육으로 들어갔다가 뭐로 나와야 된다? 성령으로 나와야 된다는 말은 그 성령이 봉지에요. 봉지에 담겨서 하늘나라 가야 하늘나라는 받아줍니다. 봉지 없이 사적인 자격으로 하늘나라 못가요.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개인은 말씀화 돼요. ‘말씀화’. 말씀화 돼야 돼요. 교회에서 김집사님 이집사님 전부 다 개인화 되거든요. 김말씀 이말씀하면 이건 개인화 아니고 말씀화 되는 거에요. 그런데 발음이 좀 이상해. 안 어울려. 어울리지 않아요.
전부 다 말씀이에요. 말씀이란 말은 말씀 지켰다는 말이 아니고 말씀이라는 검은 봉지에 담겼다. 전부 다. 개인적인 말씀과 결합이 돼서 말씀 안에 담겨버린 거에요. 그러면 말씀은 유동적이고 늘 움직이면서 말씀은 말씀끼리 결합이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김집사 박집사 사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김말씀 박말씀 말씀이 말씀과 만나버리면 그의 끈끈한 연대, 본드. 말씀만 그 현장에 드러나는 겁니다. 말씀만. 목사님하고 제가 만났다. 목사님하고 저와 만난 것이 아니고 말씀이 목사님을 데려왔고 저는 말씀이 데려왔고 그래서 말씀에 의해서 이렇게 중재가 되어서 만났다면 그 현장에서 뭐만 드러나요? 너와 나의 대표자 말씀만 드러나는 식으로 신약적으로 집단을 이룬다 이 말입니다.
들어보면 별로 어려운건 아닌데 이상하게 뭔가 더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왜 개인은 안 됩니까? 왜 개인은 안 되고 개인이 뭐로 바뀌어야 한다? 이게 말씀으로 바뀌지는 이유가 뭐냐? 영적화 예수님의 집단화 같은 말입니다. 왜 개인이 말씀화 되야 되느냐 하면은 이 개인은요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은 이 개인이 따로 그들이 집단화 되어 있어요.
이걸 가지고 욕망은 주어를 만들지 않는다. 욕망은 주어를 만들지 않아요. 욕망은 다른 말로 하면 단일한 주체, 단일한 객체를 욕망은 허용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욕망 자체가 통하기 때문에 그래요. 욕망 자체가. 쉽게 말씀드리면 독가스 안에 들어있는 김신애 이신애 박신애에서 나중에 독가스 먹고 다 죽었을 때에 김신애니까 죽었네. 박신애니까 죽었네 그런 거 없어요. 전부 다 뭐로 표현하느냐 하면 독가스 때문에 죽은 걸로 되어 있어요. 독가스 때문에.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사적으로 이 사람은 나이가 40이네 50이네 이렇게 따지는게 아니고 왜 하나님 보시기에 왜 죽었느냐하면 독가스 때문에 죽은 거에요. 세상이 멸망하는 것은 사적인 것에 비교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고 사적인 것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사적인 것을 능가하는 그들의 욕망 때문에 죽은 거에요. 욕망.
실제로도 이 욕망에 대해서 많은 세상적으로 정신분석학이고 이 욕망에 대해서 굉장히 연구가 많이 되어 있어요. 이 욕망에 대해서. 욕망, 욕구, 요구, 욕심 뭐 이런걸 대표해서 욕망이라고 하면 되는 겁니다. 전부 다. 여기서 desire, 갈망, 기대 전부 다 이 욕망에 해당되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실생활 살면서 이런걸 많이 느꼈을 거에요. 노동시장에 두 사람이 키 작은 사람 키 큰 사람이 새벽 4시반에 일어나가지고 오늘도 취직되기를 어슬렁거리면서 담배피면서 앉아있단 말이죠. 가로등 밑에서. 노동시장에서.
둘이 뭐 너는 좌파니 우파니 하고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봉고차 하나가 와가지고 여기 회 뜰 사람하고 다른 양식할 사람 하면 둘이 그렇게 좌파 우파 싸우다가 차 하나에 타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그들은 하나의 그날 일과는 협조가 잘 돼야 돼요. 안 그러면 일이 안돼요.
종로에 보면 세운상가 있지요. 세운상가에 보면 인력시장 같은 거 있어요. 새벽에. 그러면 여기는 오후에요. 오후 한 4시나 5시에 와가지고 봉고 하나 와가지고 여기 드럼과 기타 칠 사람?! 세션 뽑는 거에요. 여기 드럼 하나 기타 하나 베이스하면 우르르 그날 밤에 룸살롱 가서 기타치는 거에요. 밴드가. 인력시장되는 거에요. 그러면 저희들끼리 밴드니까 마음이 잘 맞아야 되겠지요.
그러니까 나의 사적인 개념보다도 무엇이 우선이다? 욕망. 이 욕망이 나를 길들입니다. 순화시키고 통제시키죠. 회사가 그거 아닙니까 회사가. company. 오늘 영어 막 나온다. 회사가 뭡니까? 사적인 이런 자존심 이런 거 봐줍니까? 안 봐줍니까? 오직 회사를 위해서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그것뿐이잖아요. 집단 욕망 아닙니까?
사표내면 끝나지만. 사표내기 전까지는 이게 욕망이 뭘 이긴다? 사적인 나를 주어 역할 못하게 만들고 단일주체 인정 안 하고 단일객체도 인정 안 해요. 나는 나입니다도 인정하지 않고 저 사람은 저 사람이라고 내가 지목할 권한도 없어요. 객체는 회사가 정하고 욕망이 정합니다. 심지어 방금은 회사라고 했지만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이 욕망, 욕구, 희망, 갈망 이 세상은 전부 다 그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욕망에 대해서 세상적으로 많이 연구가 되어 있어요. 인간의 욕망. 다시 말해서 자아, ‘나’가 어떻게 타인을 만났느냐. 내가 어떻게 타인을 만나느냐? 여러분들이 교도소에 가봤어요. 교도소에 봉사도 가보고 면회하는 것도 가봤는데 교도소 면회하러 가면 여기 앞에 투명한 유리막이 있지요. 구멍 뿅뿅 뚫린 것. 영화 보면 많이 나오잖아요.
죄수복 입고 앉아 있고 대화하는 거 있지요. 나 나가면 너는 죽는다 이런 식으로. 투명한 유리벽이 나와 너 사이에 가로막혀 있어요. 개인으로 자아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할 때 그때는 그냥 쉽게 나는 나인 것처럼 너는 요셉의 아들이라 할 때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게 이게 성립 되냐? 안 되냐 하는 거에요.
제가 처음부터 욕망에서는 단일주체와 단일객체는 성립이 안 된다고 했지요. 누가 나보고 너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이 성립이 된다? 안 된다? 성립이 안돼요. 내가 보기에 너는 이런 사람이야. 내가 딱 보니까 인생 경험상 인생 한 80 살았는데 너는 이런 인간이다라고 단정 지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본인도 욕망에 휩싸였는데 뭘 또 정당한 근거가 내세울 수 있단 말입니까? 없어요.
투명한 유리 안에 딱 들어있습니다. 들어있으면 타인이 나에 대해서 들어오지요. 자기 욕망과 소속될 수 있는가를 점검 차원에서 들어오지요. 내가 소속된 내 욕망의 집단에 저 사람을 넣어줄까 말까 우리 동지로 해줄까 적으로 간주할까 나오지요.
나올 때 자아는 그냥 하지 않고 이 투명한 유리 안에 있다면 여기서 뭘 날리느냐 하면은 가짜 정보를 날려요. 가짜 정보를. 나는 기도도 못하고요 헌금하는 것도 내가 아까워 죽겠어요. 우리 애는요 공부도 되게 못하고 우리집은 맨날 싸워요 라는 것을 처음 간 교회에다가 “어디서 왔습니까? 어디서 신앙생활 했습니까?”
“촌에서 한 20년 신앙생활 했습니다.” “아이고 집사님이네.” “집사님은 신앙생활 어떻게 합니까?” “공부도 못하고 헌금도 집안이 가난해서 못해요. 그리고 맨날 남편하고 싸워요.” 하고 가짜 정보를 날려버려요. 가짜 정보를 날려버리면 왜 날리느냐 하면은 그래야 타인이 나를 장악하는데 혼선을 야기해요. 이게 뭐냐 하면은 가짜뉴스에요. 가짜뉴스라고요.
그러면 자기들끼리 씹어 돌리겠지요. 자기들끼리. 새로운 사람 집사 있잖아. 내가 딱 보니까 자기 집도 엉망이고 우리가 어려울 때 좀 도와주자하고 상대적 우월감을 주는 거에요. 이 가짜뉴스가 퍼집니다. 가짜뉴스 퍼질 때 나는 뭐냐 하면 나를 감추는 전략을 성공한 거에요.
인간은 철저하게 잡을려면 잡아라 이런 식이거든요. 철저하게. 계속 가짜 정보를 날리면서 투명한 유리벽을 딱 깐다고요. 까면 저 사람의 눈빛과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하잖아요.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점점 더 조금씩 조금씩 헨델과 그레텔 동화책에 식빵 던지듯이 계속 내가 던진 가짜뉴스에 혼선을 야기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 네가 감히 나를 알아? 어디까지 속아 넘어가는지 한번 보자.
그 가짜 뉴스 할 때 반드시 앞에 뭐를 하나 붙여야 돼요. 제가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그걸 붙여야 돼요. 같은 우리 신자끼리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이렇습니다. 계속 던져주는 거에요. 그런데 이게 교회 오래 다니면 의도적으로 던지지만 교회 처음 다닌 자아 있잖아요.
처음 올 때는 본인도 의도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게 항상 뭐가 되느냐 하면은 본인도 모르게 가짜뉴스, 조작된 자아에 관한 정보를 계속 바깥에서 날리는데 뭐 보통 두시간 세시간 이야기합니다. 네가 내가 날린 정보 가지고 백날 자료 가지고 백날 주워 모아봤자 너는 나를 몰라. 왜 그러느냐 하면은 욕망 속에서 그나마도 주체가 주체답게 숨 좀 쉴려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입에 마스크하는 수밖에 없어요. 이것 투명한 유리벽 평생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걸 정신분석학 학자들은 발견한 거에요. 그래서 가짜 뉴스를 남발하다 보니까 정작 본인이 누군지 본인도 설명을 못해. 왜? 나오는 것은 전부다 뭐냐 하면은 거짓말이 아니고 나오는 것은 전부 다 속임수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지금 정신분석학에서 발견한 거에요. 인간은 자기를 속이는 그 외에 나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같이 밥 사먹자 이게 속임수에요. 우리 같이 시장갈까? 전부 다 속임수입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형제를 위해서. 전부 다 속임수에요. 속임수 외에는 나올게 없어요. 거짓말은 누가 하느냐? 기생 라합이 거짓말 하지요. 기생 라합이 속임수 이것은 본인도 본성이 속임수에요. 본성이. 거짓말이 아니고 속임수라니까요. 성경공부 이 정도 했으니까 이 정도는 알아아죠. 이 정도는 기본 베이스로 깔아놓으시기 바랍니다.
교인이 두 사람이 있다면 교인 두 사람에다가 목사까지 있다면 교인 세 명은 주일날 서로 속이다가 시간 다 갔어. 하루 주일 다 보냈어. 찬송하며 속고 기도하며 속고 설교 들으며 속고 하며 속고. 속임수 외에는 나올게 없다. 왜? 정신분석학에서 내린 결론은 인간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다만 타인이 왔을 때 그 타인을 속일려는 그 의도 뒤에 미지의 X로서.
미지의 X라고 하지 않고 이걸 또 A라고 하는데. 라캉이라는 사람은 A라고 하는데 어려우니까 그냥 미지의 X. 내가 누구인지 모르니까 X에요. 미지의 X가 타인만 만나면 나오는 천성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게 뭐냐? 나를 속일 수 있는 속임수가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거기에 번지듯이 나오는 거에요.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진짜 너를 보여줘 이럴 거 아닙니까. 진짜 나를 알아야 보여주지. 속임수 외에는 나올게 없는데 무슨 진짜 내가 있어요. 진짜 내가 없는데. 모르죠. 몰라요. 내가 누구인지를 몰라요. 왜?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니까. 환경 따라 다 달라지니까.
인간의 이 말을 정신분석학은 이렇게 정리했어요. ‘나’라는 것은 정확하게 규정된 ‘나’는 없고 타인이 누구냐에 따라서 남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때 그때마다 그 현장에 빨리 조립한 그것이 ‘나’라는 겁니다. 그 인간 떠나버리면 나도 같이 소멸되는 거에요.
그래서 죄라는 것은 뭐냐? 예수님 나타나야 알아요. 예수님 나타나기 전까지는 서로 속고 속이거든요. 디모데전서 몇장 입니까? 디모데전서 4장인가? 속고 속이는. 디모데후서 3장 13절.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성경은 다 알잖아요. 속고 속인다는 것을. 성령이 없는 인간들은 속고 속는 거에요.
그래서 남한테 비양심적으로 했다고 양심 운운하지 마세요. 양심대로 할 재주가 없어요 우리가. 왜? 양심적으로 했는데 그게 나중에 상대 바뀌니까 또 다른 ‘나’가 나왔으니까. 혹시 알고 있나요? 뒤돌아서 가슴치고 그댈 보내준 사람. 그 사람이 나에요.
그 사람을 사랑해줘요. 백지영이 불렀던. 혹시 알고 있나요? 뒤돌아서 가슴치고 그댈 보내준 그 다음에 올라가요. 사람~~~~~. 그 다음에 그 사람이 누구라고요? 그 사람이 나에요. 타인이 없으면 내가 규정이 안 되는 겁니다. 그 규정이 안 되는 나를 가지고 주여 제가 기도했습니다. 거기에 왜 ‘제’라는 말을 왜 붙입니까? 내가 규정이 안 되는데 무슨 내가 기도하고 내가 헌금하고 무슨 의미가 있어요. 내 자체가 모호한데.
지금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이다. 이거 누가 이야기했어요? 사적인 예수님의 적들이 이야기했잖아요. 그 적들의 이야기를 우리가 놓치면 안돼요. 그 적들이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이사야 61장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이제부터 그 설명을 예수님의 적들, 사적인 가치 자기가 뭔가 안다고 여기는 사실은 속임수 밖에 없으면서.
그때부터 카멜레온처럼 변심하면서 그게 나라고 혹시 알고 있나요? 그 사람이 ‘나’라고 하는데 이사야 61장 나오지요. 성경에 의하면 여러분 아까 보셨지만 다시 보게 되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오지요? 이것이 목적입니까? 아니면 이게 목표입니까?
목적과 목표를 영어로 하면 달라요. 목표가 goal, 목적이 aim이에요. 목적과 목표 차이점을 쉽게 하면 골이에요!! 이게 목표에요. 아~ 골이에요. 뒤에다 붙여버리면 굉장히 목표물. 어떤 추구하는 대상을 목표라고 하고 그 의도, 그 과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목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은 목적을 싫어해요. 목표가 중요한 겁니다.
이 목표를 노린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이게 토끼에요. 그리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은 거북이입니다. 왜냐하면은 토끼는 휙 뛰어보니까 상대가 안 되잖아요. 목표가 목표물 깃대가 바로 저기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자기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저것은 벌써 내거야. 깃대 있잖아요 깃대. 교회 관련해서 하면 이걸 천국이라고 합시다.
천국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좀 옛날에 고생 많이 했잖아. 교회 봉사하느라. 좀 한숨 쉬었다 가면 되지 않겠느냐. 이렇게 하면 토끼는 목표를 하기 때문에 거북이 정도는 이겼다고 보고 그냥 한숨 잤지요. 그런데 거북이는 목표가 목적이 아니고 목적이 목표가 되는 거에요. 그 과정이 중요한 거에요. 그 과정이. 과정이.
과정이 중요하니까 목표는 그 사람한테는 없지요. 그리고 토끼한테는 결과가 중요하니까 본인은 뭐냐 하면은 객체가 아니고 하나의 흐름이 되는 겁니다. 하나의 흐름이 돼요. 이사야 61장에 나오는 예언.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 다음에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할 때 여러분 딱 보면 이걸 목표로 삼고 싶어요? 목적으로 삼고 싶습니까?
이게 목표물이 되는 거에요. 이게 사적인 견해에요. 사적인 견해. 집단적 견해 아닙니다. 성도는 집단이라고 했지요. 우리를 대표하는 사적 개인은 누구입니까? 오직 누구 밖에 없어요? 예수님이죠. 예수님이 이걸 이루는데 우리는 예수님이고 뭐고 내가 탐이나. 자유하고 싶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부자 되는 거잖아. 부자 되고 싶고 토끼처럼 목표가 되는 거에요.
이 목표를 향하여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겁니다. 뭐 충성, 봉사, 헌금 할 수 있는 건 다 하겠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이게 목표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결국 이거는 뭐냐? 이거는 다른 사람이 쟁취하는 것을 내가 질투심에 의해서 어떻게 됩니까? 용납 못하죠. 밟아버리죠.
olny 나. 오직 나만 최후의 승자가 돼야 돼요. 최후의 승리자는 둘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둘되면 한번 더 결승전 치러야 돼. 그게 우리의 심보에요. 둘이 있을 수 없어요. 에서 야곱 둘 다? 아니야 아니야. 마지막 최종 결승전 해가지고 야곱은 이기고 에서는 져야 돼요. 둘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격상. 우리 악마의 본성상.
그래서 이 본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천주교 정의사제구현단 얼마나 많이 봤겠습니까? 이들은 뭐냐 하면은 여기 이 말씀을 그대로 구체화 현실화되기를 그들은 말은 그렇게 이야기 하고 더 좋은 말로 하기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해가지고 이 본문을 그대로 우리가 실행에 옮겨서 이 땅에서 구현하자. 그게 천주교 정의사제구현단 이고 맨날 북한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 말씀 그대로 이 땅에서 자기가 나서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할 것은 뭐냐 하면은 데모할 것밖에 없지요. 기존의 정권에 대항해서. 왜? 가난한 자는 정치적으로 가난하다고 보기 때문에. 눈먼 자에게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눌린 자가 누굽니까? 군사독재에 눌린 자들.
그러니까 성경을 이렇게 문자적으로 보는 사람은 그 사람들 말에 혹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 식으로 성경 해방신학에 빠진 교단이 뭐냐 하면은 성공회 그리고 기독교 장로회, 감리교, 대한예수교 장로회 가로열고 통합 가로닫고. 그런 단체.
그러니까 성경 말씀을 아무리 우리 코앞에 있더라도 시작부터가 주체, 객체, 나, 사적인 나, 내가 납득이 되는 나, 이걸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백날 얻어봤자 아까 투명한 유리벽 앞에서 투명하니까 사람들이 격이 없고 서로 통한다고 생각해요. 서로 통한다고 생각하죠. 뭐 있어? 없잖아? 없으니까 마음과 마음이 통한다고 생각해요.
통하고 싶지만 욕망이 우선이기 때문에 이미 입에서 뭐 나와도 속임수고 입 다물어도 표정 자체가 속임수에요. 내가 나를 누군지를 모르니까. 그래서 두 번째 시간 들어가기 전에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구약적인, 정착이죠. 말과 뿌리가 되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예수님이 죽습니다. 죽어버립니다.
죽어버리면 예수님 죽어버리면 뭐가 되느냐 하면은 유령이 되지요. 유령. 유령을 제가 이야기 했던 것. 개인과 말씀이 만난다고 했지요. 두 번째 시간은 이것부터 합니다. 유령을 뭐로 하느냐? 포장을 뭐로 하느냐? 말씀으로 포장을 해버리면 이것이 바로 성도가 됩니다. 이미 죽었고 내 안에 누가 산다? 말씀이 사는 거에요. 10분 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