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4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안식의 과정
20201204b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안식의 과정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강의하겠습니다.
첫 번째 강의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친다, 이스라엘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 것을 친다는 뜻이고요, 그 모습은 바로 어떤 인간도 자기 것을 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천국이라든지 구원이라든지 주님이여 사랑을 주세요, 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일체 없었다는 겁니다.
다만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침투해서 하는데 그 밀고 들어오는 율법의 장벽 속에 거기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들어있는 겁니다. 그 저주와 심판의 경과, 그 저주와 심판이 얼마나 혹독한가를 우리보다 앞서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그냥 말로는 약속이지만 그게 실제화로 올 때는 아주 혹독한 저주의 모습으로 이게 현실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이것은 빈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당했던 그 혹독함을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도 동일하게 현실세계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어느 정도 혹독하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안식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안식을 두고 아까 제가 이야기했지요. 두 개의 해석이 서로 격돌한다 했지요. 하나는 주님이 보시는 안식과 인간 쪽에서 얻고자 하는 안식이 상충되고 격돌하지요. 부딪치고 있습니다. 늘 우리 몸에서 이게 격돌이 되고 충돌이 됩니다.
그러면 주께서 주시는 안식은 거저주시는 겁니다.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아예 거저주세요. 성도의 몸이라면 인생이라면 거저주심이 오게 되면 이미 거저주심을 받았다면 들어왔다면 바깥으로 나올 때 거저주심이 왔으면 바깥에 뭐가 나와야 돼요? 거저주심이 나와야 되겠지요. 거저주심을 받은 게 있기 때문에 거저주심이 나와야 되겠지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범사에 감사가 나와야 되겠지요. 코로나 걸려도 고맙고, 자식이 어떻게 되도 고맙고, 범사에 감사가 나와야 된다 이 말입니다.
거저주심이 들어왔을 때는 거저주심이 나오는데 그러나 인간들이 벌이는 안식은 뭐냐 하면 평소에 나의 절대적 존재가 될 때 인간은 안식이라고 이해합니다. 제일 높은 자리에 홀로 있을 때 내려다 볼 때 그걸 안식이라고 해요. 자기가 최고가 되는 겁니다. 약을 잘못 먹었지요. 선악과 약을 먹어서 자기가 최고 되는 겁니다. 이 말,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피라미드구조에서 사장, 임원들, 밑에 대리부터 아르바이트 학생들까지 쭉 있겠지요. 여기 알바하는 학생과 신입, 대리, 그 다음에 과장, 팀장, 그 다음에 차장, 부장, 임원, 사장 있을 때 각 사람이 보는 선과 악의 기준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층마다 다 달라요. 나는 아르바이트 시급을 한 만원해주시면 안식 얻겠다. 이게 제일 밑바닥이 생각하는 거예요.
알바 밑에 뭐가 있느냐? 자기 엄마가 있는 거예요. 오늘은 네가 좀 일찍 들어왔으면 좋겠다. 이게 엄마의 안식이에요. 엄마의 하루하루 소망이고. 우리 과년한 딸이 밤늦게 잔업까지 해서 택시 타고 들어오지 말고 6시 땡 퇴근해서 일찍 들어왔으면 좋겠다. 이게 엄마의 소원이에요.
아들이 군에 갔을 때 너는 군에 갔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이런 엄마, 이런 아들 같으면 듬직하지요. 왜냐하면 아들의 그것이 엄마의 선악체계 밑에 종속됐기 때문에 엄마가 아들 생각보다 더 높기 때문에 엄마와 아들 사이에서 엄마가 더 높기 때문에 아들은 엄마 시키는 대로 마마보이처럼 한 거예요. 군에 안 가고 눈앞에 있을 때는 시키는 대로 했기 때문에 엄마가 자기 기준을 절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아들이 군에 가서 어쩔 수 없이 아들과 엄마와 떨어져있다면 여러분에게 군에 간 아들이 있고 그렇게 애탄다면 어떻게 하겠어요? 아들이 배치된 지역에 대대장이 있겠지요. 찾아가지요. 찾아가서 우리 아들 잠은 어떻게 자고 있고 밥은 어떻게 먹는가, 편한데 배치는 받았는가, 하고 압력 넣겠지요. 이거 몇 푼 안 되는데 받으시고. 그러니까 군대라도 치맛바람을 넣을 수밖에 없단 말이죠. 그래야 엄마의 기준이 유지되니까요. 유지되게 되면 엄마는 안식하는 거예요. 마음이 편한 겁니다.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 계층마다 다 다른 거예요. 알바 학생은 일찍 나가면 마음이 편하지만 사장 입장에서는 회사가 운영이 안 되는데 마음 편하겠어요? 안 편하지요. 그러니까 사장님의 안식을 위해서 알바 학생의 안식은 포기돼야 되는 겁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절대적 최고점이 마련돼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직책에 대한 문제고요 피라미드 나에 대해서 해봅시다.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까지 쭉 올라간다면 10대 아들이 생각하는 안식과 20대 안식이 다 달라요. 10대 애들은 학교에서 시험 안 쳤으면 좋겠다. 그게 안식이죠. 20대는 군에 안 갔으면 좋겠다. 30대 다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다 다를 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이게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이상은 뭐가 성립 안 되느냐 하면 거저주심이 나오질 않는다는 거예요.
거저주심이 나오려면 어떻게 되느냐? 이 모든 절대기준은 모두 다 깡그리 무너져야 되지요. 제가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했지요. 주님이 주신 장벽이 우리를 덮쳐서 우리를 뭉개버리면 그 자체가 뭐냐 하면 여호와의 안식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최고기준으로 봤을 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예요. 육이 영에 의해서 무너지는 거예요.
그러면 육은 뭐로 구성돼 있느냐 하면 바로 내 삶에 내가 사는 기준으로 돼있어요. 그 기준이, 내 뜻이 내 뜻대로 안 되고 누구 뜻대로? 주님의 뜻대로 아버지의 뜻대로 될 때 그걸 즐거이 기꺼이 고맙게 여기면서 받아들일 때 주님의 안식이 그 사람 속에 꽉 차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들어오게 돼있어요.
그 안식이 여기 34절에 보면,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라도 돼있습니다. 계속 진도 나가보겠습니다. 황무함=안식. 신약에 와서 성령이 와서 우리를 덮쳐버리면 우린 졸지에 뭐가 되느냐 하면 황무함이 되겠지요. 황무함, 다른 말로 하면 황당함. 이걸 알기 쉽게 나의 무의미성, 영어로 하면, I am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것.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정반대, 내가 뭐가 됐다 할 때 그것을 잘 보여준 사람이 있었어요. 옛날에 연예인 시상식 할 때 장미희란 영화배우가 한 유명한 멘트가 있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밤이에요.” 상을 타는 순간 그 조명 밝기 똑같은 건데 참 아름다운 밤이에요. 기분 좋다 이 말이거든요. 나 이 순간 즐기고 싶어, 그런 뜻이잖아요. 내가 기분 좋으니까 주변이 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왜? 상을 탔으니까. 그런데 시험에 떨어져보세요. 그게 아름다운 밤인지.
이제 나는 나만의 의미를 가질 때 이것을 아름다운 밤이라 하는데 이것은 바로 아까 피라미드구조에서 한 층계 올라갔다는 뜻이거든요. 내가 대리하다가 과장 되었으니까 그날 밤 참 아름다운 밤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 자체가 뭉개져야 되는 거예요. 백날해서 사장 돼봐야 아름답지 않아요. 이 세상에 어떤 곳에 가서 뭘 해도 주님의 언약적 권역 밖으로 도망칠 수 없습니다. 못 벗어납니다.
이미 이 세상은 의미 없어요. 따라서 성도가 성령을 통해서 알아야 될 것은 애초부터 의미 없음을 왜 이제야 내가 알았느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거예요. 처음부터 의미 없었는데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긴가, 이게 대단한가,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이 말이죠. 그게 후회스럽지요.
이걸 달리 이야기해서 이 땅에 인간에게는 어떠한 심각하거나 진지한 일은 인간에게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어떤 것도. 어항에 있는 물고기가 검찰개혁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 씁니까? 주제넘게. 어항은 오늘도 주인이 사료 주느냐, 안 주느냐 그것만 신경 쓰지 없잖아요. 왜? 자기 나름대로의 안식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의 안식에서 내가 벗어나야 돼요.
이 비슷한 이야기가 마태복음 5장에 나옵니다. 33절에,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네가 맹세할 쨉이 되느냐 이 말이죠.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왜? 하나님은 네가 간여할 데가 아니란 말이죠.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어딜 가도 네 것은 없고 전부 다 주님이 언약을 위해서 마련한 무대인데 네가 주제파악도 안 되고 사적인 개인적인 의미를 거기서 따로 챙기려고 하지 말라.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이것은 메시아지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 머리가 아니고 주님이 키워준 머리란 말이죠.
그럼 이 말 들으면 뭐라 하겠습니까? 그럼 내 것은 어디 있습니까, 하겠지요. 네 것이 없으니까 너는 맹세해도 소용이 없다 이 말입니다. “네 것도 없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맹세해. 나는 앞으로 이렇게 하겠습니다, 저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맹세하지 마.” “네 것 있나?” “없습니다.” 없으면 입 다물고 거저주시는 대로 받고 살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언약을 이 땅에 이루시는 취지는 뭐냐? 언약을 거저주어서 거저주심의 그 거저가 거저 있는지를 그것만 확인할 뿐이에요. 주님께서는. 내가 무의미함을 안다면 그게 안식이에요. 주님의 안식이 살아 있어요. 내가 의미 없다는 걸.
그럼 의미 없이 인생을 성도가 살려면 성도가 사는 꼴은 어떤 꼴이어야 하는가? 전도서 5장 봅시다. 이 질문 하나하나가 중요한 질문이에요. 그러면 의미 없는 내가 살면 어떻게 사는가? 전도서 5장 구약성경 951페이지 13절부터 보면,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 그 재물이 재난을 인하여 패하나니 비록 아들은 낳았으나 그 손에 아무 것도 없느니라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그렇데 돼있지요.
그래서 18절에,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먹고 마시려하니까 먹고 마실 돈이 있어야 하지, 이렇게 또 따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죠? 그냥 있는 대로 먹고 마셔. 욕심내지 말고.
여기 다른 구절 가게 되면 같은 전도서에 있는 말씀인데요, 전도서 초반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렇게 돼있어요. 전도서의 어떤 대목에 9장 9절에,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찌어다” 그렇게 돼있어요. 8절에 보게 되면, “네 의복을 항상 희게 하며 네 머리에 향 기름을 그치지 않게 할지니라” 주신 은혜에 대해서 마음껏 누리면서 살라는 쪽으로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여기 9장 7절에 보면,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이렇게 돼있어요. 하나님께서 영광스럽게 받는 일은 뭐냐? 밥그릇의 밥을 맛있게 먹는 거예요. 영광 돌린다고 별나게 하는 게 아니고 너무 맛있게 먹으면 살찌니까 곤란하고.
하여튼 맛있게 감사하면서 안 주셔도 되는데 주셔서 감사히 먹겠다고 먹는 거예요. 이게 어렵습니까? 밥 먹을 때 아프리카 아이들까지 걱정하지 마세요.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아프리카 아이들보다 지금 앉아있는 내가 더 궁핍해. 주님께서 이미 우리를 규정을 했잖아요. 너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아무것도 아닌데 왜 맛있는 음식을 주고 포도주를 주고 아내를 주고 이렇게 먹을 걸 주십니까? 거저, 북한말로 고조, 고조, 이것 거저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거저주신 것이 누적이 되어서 내 몸을 이루었고 한 평생을 이뤘다면 평생 자체가 나의 일이 아니고 누구 일이에요? 주의 일이죠. 주님께서 나 좋으라고 주신 게 아니고 주님 자신의 일을 하기 위해서 먹이시고 입히신 거예요. 그러니 하루하루 기쁘고 즐겁게 감사하며 살아라. 이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겁니다.
이러한 말씀이 기초가 전도서에서 뭐냐 하면 너 아무것도 아니야. 허무해, 라는 것을 깔고 즐겁게 살아라가 되거든요. 허무하기 때문에 안 즐거운 일이 없게 하라 이 뜻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짜증내는 이유는 결국 전도서에 의하면 뭡니까? 내가 이 지경으로 살 위인이 아닌데. 맨날 허무 안 하데.
자기 자신을 너무 가치 있게 봐버리게 되면 도대체 그 가치를 유지하려면 얼마나 자기 자신이 조적해야 됩니까? 인간은 아무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나를 여기서 억지를 부려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쪽으로 계속 조작하니까 이게 실패로 끝나니까 그 결과는 자살이죠. 그냥 죽는 거예요. 난 이러고는 못 산다. 이런 거예요.
아들 귀하게 키웠는데 아들이 연애해서 시어머니 마음에 하나도 들지 않은 며느리를 데려왔다. 그때 시어머니는 나는 이러고는 못 산다. 내가 눈 감기 전에 나는 너를 내 며느리로 인정 못하겠다. 그러면 이건 누가 손해입니까? 시어머니 지가 손해지요.
그러면 며느리가 복음을 안다면 전도서를 안다면, “어머님, You are nothing.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게 내가 하는 최고의 사랑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죠. 당신은 이 며느리, 저 며느리 골라낼 그런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이 자식 키운다고 동부화재 다니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냐 하는데, 그러니 이건 동부화재가 문제라. 동부화재가 뭐예요, 이러면 이야기가 다 끝난 거예요.
어떤 여자가 우리나라 사슴 치는 농장에 결혼을 했는데 베트남 여자에요. 그 여자가 얼마나 가난한지 자기뿐만 아니고 그 집안 누구도 베트남 글을 몰라요. 그래서 시집에서 베트남 글도 가르쳐주고 초등학교도 입학시켜서 다니게 해서 글을 알게 해준 겁니다. 그리고 난 뒤에 베트남 여자가 한국말을 알고 글도 알고 저건 병원이구나, 저건 식당이구나. 배고프면 가면 되겠구나. 이걸 알고 난 뒤에 눈물을 흘리면서 하는 이야기가, “내가 어릴 때 글 모르는 게 딴 건 불편한 것 없었는데 친구들이 나를 무시한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노래방에서 자기는 노랠 못 불렀어요. 가사를 알아야 글을 알아야 노래를 부르지요. 무시당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 베트남 여자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아닌데 주변에 글 아는 자가 등장했어요. 그 순간에 나는 왜 저처럼 되지 못하느냐, 해서 아무것도 아닌 게 갑자기 나는 글을 배워야 되겠다는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다. 바로 이게 인간세상이라면 주님은 반대로 나가요.
소위 똑똑하고 잘 안다는 것을 아무것도 아닌 쪽으로 전부 다 환원시키는 작업을 주께서 하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우리 안에 주님이 안식을 주시는 겁니다. 안식을 주는 방법은 주님이 이 땅에서 얻어낸 방법을 그대로 적용을 시켜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아버지께 버림받았다. 그 사실을 우리 안에 집어넣어버려요.
나는 성도이기에 아버지께서 버림받고 되찾는 작업이 제 안에서 이루어주옵소서. 성도이기에 마지막 이스라엘이기에 하나님이 진짜 최후로 결정한 참된 이스라엘이기에 오늘 레위기에 나오는 이 버리고 다시 택하는 이 작업이 나에게도 그대로 적용시켜주는 것을 감사합니다. 그게 바로 감사의 이유가 되는 거예요.
이스라엘을 버리고 황무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게 내가 원하는 안식이라고 그들에게 딱 보여줄 때 내가 잘났다고 설치는 모든 일이 주님의 안식을 완전히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호작질하는 짓임을 아는 것, 그 아는 순간에 안식이 되는 겁니다. 방금 제가 이야기한 걸 이렇게 정리합시다.
율법의 기능이 내 속까지 밀치고 들어온다. 율법의 기능이 내 속까지 들이닥치는 거예요. 일본순사가 조선족 가정에 허락도 없이 수색영장도 필요 없이 빠가야로 하면서 호작질하는 것처럼 내 허락 없이 안식을 위한 율법의 기능이 온화한 평안한 내 가정을 쑥 들어와 버리는 거예요. 막무가내로 들어오지요.
그러면 여기서 들어오게 된 들어와야 될 이유가 있어요. 율법은 인간들은 하나의 거울로 봐요. 여러분들이 선팅이 너무나 짙게 된 차 안에서 앉아있을 때 지나가던 어떤 여자 분이 차창을 거울삼아 얼굴 고치고 머리 만질 때 앉아있는 사람은 기가 차지만 지는 그것도 모르고 보지요.
율법 안에 계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요. 그런데 인간은 법을 보면서 내가 이 정도로 지켰나, 안 지켰나, 내가 이 정도 훌륭하나, 안 훌륭하나, 하고 율법을 자기 일방적으로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율법을 활용하는 거예요. 이것을 거울기능이라 해요. 거울기능의 특징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들여다보는 거예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뭐가 없느냐 하면 폭이 없어요. 표면효과기 때문에. 그리고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내가 보여준 것만 되받아올 뿐이에요. 진짜 내 모습은 두께, 폭, 인간성 다 볼 수 있는 거울을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율법의 완성 또는 율법이 와서, 율법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율법이 살아서 꿈틀거리면서 내가 보고자 하는 내 이미지를 찢어버리고 깨버리고 전혀 다른 이미지가 율법 속에서 튀어나와서 내 안을 공격할 때 이것이 바로 말씀의 살아 있는 기능입니다. 내 잘남을 위해서 보던 성경이 아니라 그 안에서 십자가가 튀어나오는 성경, 주님의 심판과 무서움과 엄위함이 튀어나와서 네가 어딜 함부로 법을 보느냐는 식으로 나를 공격해댈 때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테러당한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나라에 왔을 때 유대사회가 혼란에 빠진 이유가 진짜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신 분이 각자 집에서 율법을 거울로 보는 사람들을 상대하여 진짜 율법의 완성자가 심판과 저주로 내쳐버리니까 그들은 대혼란에 빠진 겁니다. 집에 손거울이 있는데 화장대에 거울이 있는데 그냥 내가 보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어느 날 보니까 거기서 척키라는 괴물인형 같은 게 튀어나온다면 또는 머리 풀고 아가씨가 티비 브라운관에서 기어 나온다면 기절초풍하지요.
사실은 성령 받으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내가 나를 잘난 척하려고 본다는 자체가 그걸 성령께서 허락하지 않고 성령 안에 살아 계시는 원래 성경의 저자, 모든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시는 그 예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언급할 때 우리는 내 모습을 볼 자격조차 안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 안식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해봅시다. 그러면 영원한 안식이 레위기에서 이야기한 예언이 어디서 끝나느냐? 우리가 안식한다는 게 레위기 26장 34절, 이것이 예언이거든요. 예언의 끝이 어디서 나오는가? 예언의 끝이 70년으로 끝날까요, 아니면 70이레로 끝날까요? 이게 굉장히 어려운 문젠데 70년으로 끝난다는 것은 역대하 36장 21절에 나옵니다. 여기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 70년으로 끝나요. 70년 끝나면 다시 자기 백성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기원전 605년에 시작해서 포로 잡히고, 첫 번째 포로 잡힐 때에요. 536년, 첫 번째 성전이 부셔지고 다시 세워지는 기간이 몇 년이냐? 70년이에요. BC605~536, 70년 동안 약속 맞춰서 오게 되는 이게 ➀번 경우에요. 70년 만에 끝난다. 현재 유대인들은 이걸 주장하는 거예요. 그러나 다니엘서에선 70년이 아니고 70이레에요. 70 곱하기 7일로 묶어진 것, 7일로 묶어졌으니까 창세기 1장과 2장을 생각하면 되지요.
하나님이 며칠 만에 천지를 창조했습니까? 7일 만에 창조했지요. 7일 만에 끝나고 완성을 했지요. 완성의 본질이 다 구현이 될 때 이 70년은 끝난다. 이게 70이레에요. 묶었으니 풀면 안 됩니다. 70 곱하기 7 해서 490년, 이렇게 계산하면 안 돼요. 이건 묶음을 푸는 거예요. 단위가 일의 단위거든요. 7이 아니고. 7일을 한 단위처럼 생각하는 거예요. 7일이 7년이 아니고, 그리고 77년도 아니에요. 7 곱하기 7이 아니란 말이죠. 이것은 바로 완성이니까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도약했던 그 상태가 70이레가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70년은 인간이 속해 있는 시간대가 70년이에요. 월, 달, 일년, 이년. 이 비슷한 이야기가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데 희년이 뭐냐 하면 7곱하기 7, 49+1=50년, 이게 희년이거든요. 구약에서. 희년인데 예수님께 지금 내 때가 바로 그때다. 50년 다음에 예수님의 경우엔 51년이라는 게 없어요.
50년 자체가 예수님 안에 쑥 들어가 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인간의 시간을 적용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완료한 시간을 우리한테 적용받게 되는 겁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고 완료되어서 중지된 시간이죠. 멈춰버린 시간이에요. 하루가 천년 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그런 시간대가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70년 동안 안식했으니까 그 다음부터 다시 그 땅에 돌아오면 되지 않겠느냐? 역대하 봅시다. 성경이 예언과 시련을 연결시키는 것은 복잡하긴 하지만 알아야 될 사항이기도 합니다. 역대하 제일 마지막에 36장 21절에 보면,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이렇게 돼있지요.
그리고 난 뒤에 나오는 책이 에스라 나오고 느헤미야 나오지요. 이건 뭐냐? 70년 지나서 이제 성전 지어라, 하고 성전 짓도록 이방나라가 부추겨서 자금 다 대주고 고향에 와서 성전을 짓는데 그 성전은 어떤 성전이냐 하면 허물어져야 될 성전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완성의 때가 아니란 말이에요. 완성의 때가 아닌데 왜 성전을 짓느냐, 완성할 때 다 지으면 되지 왜 짓느냐?
완성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성전이 허물어졌느냐, 무슨 죄 때문에 허물어져야 했느냐를 그걸 되풀이하는 현상이 나타나면 그게 완성입니다. 쉬운 예로 우리는 뭐로 구원받아요? 십자가로 구원받지요. 십자가라는 것은 내가 지식을 보유하게 되면 그거는 구원이 안 돼요.
예를 들면 제가 지난 수요일에 설교한 건데 어느 숲속의 호수에 물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드렸잖아요. 그러면 물귀신 나온 것을 구경하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그냥 물귀신은 너는 너고 나는 나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물귀신에 같이 묶여서 갑자기 재수 없어서 붙잡혀서 같이 호수 물속으로 들어가 버리면 진짜 물귀신 집안의 가족이 되겠지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그냥 관람용이 아니고 십자가에 묶여서 내가 십자가 속으로 쑥 들어가는 거예요. 빨려 들어가는 거예요. 그 블랙홀에. 그렇게 되면 내가 지킨다는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내가 밥 먹고 아까 즐기고 기뻐하는 것조차도 뭐가 되느냐? 십자가의 고난이 되는 겁니다. 고난치고는 너무 밥을 많이 먹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웃고 즐기고 아내와 함께 생각하는 것, 전부 다 십자가의 고난이 되는 거예요.
자리가 어디냐? 십자가 안이기 때문에 그래요. 십자가 안에는 내가 지금 몇 살이냐, 몇 년 남았느냐, 그런 것 필요 없어요. 시간이 정지돼있기 때문에. 안식의 완료상태에서 누리고 있는 것을 우리는 증거하는 겁니다. 두 번째 시간할 때 뭐라 했습니까? 거저주심이 우리 몸을 통해서 뭐가 나와야 된다? 고저, 고저, 자꾸 거저주심이 나와야 된단 말이죠.
고구마 삶을 때 젓가락으로 찔려보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젓가락으로 쑤셔서 관통하면 다 익었고 관통 안 하고 부딪히는 게 있으면 빼고 하거든요. 십자가로 쑤셔서 저쪽으로 젓가락이 나오면 그 사람은 복음 아는 사람이고 성도고, 아니면 분명히 십자가 집어넣었는데, 나 십자가 안다, 이렇게 나오면 그건 다시 빼야 됩니다. 덜 익은 겁니다. 덜 익은 정도가 아니고 진짜 성령 안 받은 사람이죠. 나 십자가 아는 사람인 것을 좀 알아줘, 이런 식으로 나오면 참 곤란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70년을 70이레로 바꿉니다. 바꾸면서 여기서 7+62+1인데 7은 뭐냐 하면 성전을 짓는 거예요. 경남 합천에 가면 뭐가 있느냐 하면 50년대부터 80년대의 영화세트장이 있어요. 제가 여러 번 가봤어요. 일종의 성전 세트에요. 이 세트는 62이레 때 무너져야 돼요. 그러니까 70이레는 뭐냐 하면 왜 이렇게 약속의 땅에 온 이스라엘 민족이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그 땅을 건사하지 못하고 추방돼야 했던가를 되풀이해서 보여주는 그러한 기능이 살아 있으면 그 사람은 어디 속했습니까? 70이레에 속한 사람이죠.
7이레는 성전 허물어졌음. 허물어진 터 위에 40년 짓는 성전 말고 46년 동안 짓는 성전 말고 단 며칠 만에? 사흘 만에 짓는 성전, 그게 1이레에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가 떠나고 다시 하나님이 새로운 방식의 묵시세계에 천국세계에 부합되는 새로운 완성된 성전을 짓는 그 기간이 70년에서 70이레로 바뀌는 과정 속에 이게 필요한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70이레로 오지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영을 받은 사람은 뭘 반복하느냐 하면 왜 나는 무너져야 되는가, 그리고 왜 무너지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다행스럽고 이게 기적인가? 그것은 주님의 완료된 성전이 내 안에 작용하기 때문에 바로 내 안이 주님이 만든 마지막 때의 성전이다.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겁니다. 70년, 70이레 이것을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언젠가 주일설교에서 이걸 설교했잖아요. 직류는 방향이 한 방향이지만 교류는 집과 발전소 하고 전류가 왔다 갔다 한다고요. 60헤르츠 같으면 1초에 120번을 켰다 껐다를 하는 거예요. 파동 때문에. 1초에 켜졌다 꺼졌다를 두 번씩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매일같이 우리의 육신 때문에 이미 구원받았지만 다시 이 십자가가 왜 구원이냐, 능력을 보여주는 십자가 안에서 물귀신 안에 들어가서 늘 반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가 그걸 하라는 말이 아니고 자동이에요. 자동으로 하게 돼있어요. 복음 듣고 돌아서서 또 딴 생각하고 또 성령 오셔서, “됐네, 이 사람아. 욕심 부리지 마. 주제 파악해야지. 또 네 자신의 가치와 잘남과 너의 우수함과 남한테 안 지려는 오기, 그런 쓰레기 또 생겼구나. 그러면 또 쓰레기 비워줄게.” 십자가 죄 용서로 또 해서 역시 십자가 최곱니다. 또 감격의 기쁨의 눈물 흘리다가 돌아서서 그런데 왜 우리 애는 공부를 못합니다. 항상 교류, 방향이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어요. 어떤 인간도.
성령 받은 사도 바울도 자기가 모든 걸 감사할 줄 안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육신의 가시, 그것도 그냥 가시가 아니에요. 뺄 수 없는 가시, 장미가시면 빼버리면 그만이죠. 사탄의 가시죠. 악마의 가시가 박혀서 그걸 빼달라고 세 번 기도했는데 주님의 말씀은, “됐네, 이 사람아.” 끝났어요. “그만 됐네, 이 사람아. 네가 약하기 때문에 은혜야. 네가 강하면 은혜가 아니라 자랑이 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약한 데서 강함이라. 약한 그 자체가 주님의 강함으로 나오도록 주께서 하신 거예요.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쫓겨 갔는데 그 자체가 안식이 되게 하시는 것. 주인공이 내가 주인공일 수 없단 말이죠. 주인공은 애초부터 주님이 주인공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자, 36절하고 마치겠습니다.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대적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으로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게 분명히 약속의 땅에서 나가라 했는데 안식한다고 했는데 꼭 나는 약속의 땅에 살고 싶어요, 하고 억지로 이 땅을 고집한 자들이 있어요. 자기가 그 땅에 살만한 어떤 자격이라도 된 듯이.
첫째 강의에 제가 이런 이야기했지요. 주님의 권역을 피하려 도망칠 장소는 없다. 약속의 땅을 비우라 했잖아요. 고집스럽게 알박기도 아니고 남은 자들이 있지요. 남은 자들 지가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적들을 보내버립니다. 후다닥 놀래서 벌벌 떨면서 예, 나갈게요, 하고 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성도가 있다면 성도 안에 빈 운동장을 항상 유지하라 이 말이죠. 내 것으로 꽉 채우지 말고 나의 잘난 그 옛날 상장, 상장 받긴 받은 적 있어요? 상장이나 개근상 이런 것, 과거에 내 자식 잘 키운 것, 참 이건 아무도 장담 못한다. 자기가 과거에 장사하면서 콩나물 팔아서 애 키웠다는 그런 것 있잖아요. 그런 것 쫌 남겨두지 말란 말입니다.
오늘 제목은 쫌이다. 제발 please, 제발 좀, 그런 것 좀 남겨두지 말고 자기 안에 공백을 두라 이 말이죠. 허공 알지요. 허공 속에, 조용필의 . 그 허공, 빈자리. 수고하고 무거운 짐 다 거둬내세요. 다 퍼내세요. 껍데기만 갖고 있으면 돼요. 그냥 껍데기만 갖고 빈껍데기 밖에 없음을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십자가만 자랑하는 거예요. 내 안에 나 없다, 이걸 자랑하란 말이죠.
“아이고, 자식 어떻게 그리 잘 키웠습니까?” “내 안에 자식 키우는 재주 없어요. 주께서 하셨지, 뭐.” 내 안에 내가 없어야 돼요. 참 귀한 말씀인데 돌아서면, 돌아서는 게 문제라. 돌아서면 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내 안의 빈자리에서 또 쓰레기로 꽉 차인, 완전히 치매 할머니만 그런 게 아니라 구청에서 와서 4톤을 걷어내도 다음 며칠 지나면 또 온 동네 쓰레기는 다 있듯이 우리는 쓰레기 모으는 재주가 있어요? 쓰레기 모으는 게 취미입니까? 온갖 쓰레기, 너는 좌파고 나는 우파고 나는 우파쓰레기.
나이 들어보세요. 리모컨 들고 1초에 두 번씩 바뀌어요. 할 일 없이 티비만 드르륵 드르륵, 고장 나서 수리 부르고 또 드르륵 드르륵. 걷어내는 것, 들어올 때는 항상 걷어낼 준비를 하세요. 다 토해낼 준비를 하세요. 그래서 주여 제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께서 거저주신 주의 것만 있을 뿐입니다, 라는 고백이 있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한테 안 지려고 평생 동안 힘들게 살아가고 있고 남한테 무시 안 당하려고 남한테 기죽지 않으려고 오기와 고집으로 납같이 우리 안에 가득 들어있는 죄악된 것을 성령께서 예수님의 피로 다 걷어내 주시고 예수의 피 용서하심만 가득 들어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