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4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안식의 과정
20201204a 울산강의-레위기 26장 : 안식의 과정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6장 31절부터 보겠습니다.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너희 성소들로 황량케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향을 흠향치 아니하고 그 땅을 황무케 하리니 거기 거하는 너희 대적들이 그것을 인하여 놀랄 것이며 내가 너희를 열방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거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공격하는 그 대목입니다. 자기 백성을 공격하면 되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사람은 못하지요. 적어보겠습니다. 사람은 자기 것을 공격 못한다. 바벨탑을 못 짓게 하는 것은 바벨탑을 짓는 본인들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못 짓게 했지요.
사람은 자기 것을 공격 못한다. 이것을 하나님께선 인간의 한계로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은 이스라엘은 누구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자신의 것이에요. 하나님 자신의 것을 공격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자기 것을 공격 못하는 인간들로 하여금 이러한 하나님 앞에 온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이 사는 세계가 천국이죠.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에 인간들이 왜 들어갈 수 없는가? 본인이 본인을 공격 못해서 못 들어가는 거예요. 인간이 자기 사랑을 공격 못하고 인간이 자기 구원을 자기가 공격을 못해요. 자기 소망과 자기 믿음을 자기가 공격 못해요. 뭐 이렇게 추상적인 것보다도 쉽게 해서 부모가 자기 자식을 공격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아버지가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버립니다.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과냐, 하나님 과가 아니냐를 측정하는 방법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기 자식을 남이 아니라 본인 손으로 본인 자식을 죽이는지, 안 죽이는지 여부를 테스트하는 거예요. 네가 네 아들을 죽이면 합격, 네가 네 아들을 못 죽이면 믿음 없는 걸로 여겨서 불합격.
하나님께선 아브라함에게 일부로 시켜서 그 뒤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의 조상에게 있었던 테스트를 그 후손들도 공히 다 같이 통과해야 된다는 거죠. 그렇다면 집에 가서 곧 결혼을 앞두고 있는 자식을 죽여야 합니까, 할 때 그건 죽여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그 자식은 약속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혈육으로 난 자식이 이스마엘이거든요. 혈육으로 난 자식이기 때문에 그거는 테스트 감이 안 됩니다.
그러면 내 자식 죽이지 말고 누굴 죽여야 되는가? 약속으로 오신 분을 죽이면 돼요. 누구냐 하면 예수님을 죽이시면 되는 겁니다. 그럼 여기서 공식 하나 만들어냅시다. 예수를 죽이는 자만이 구원받는다는 공식, 희한한 공식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이 어디 눈에 보여야 죽이지요. 안 보이는데. 예수님이 어디 아파트에 살면 우르르 가서 죽이겠는데 아파트에 사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어디 있는 줄 모르잖아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예수를 죽이는 자가 성도지요. 성령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예수님을 반복할 때마다 뭐가 쏟아지느냐 하면, 성도가 톡톡 생산되도록 성령께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가동시켜서 십자가 복음을 가동시켜서 제가 예수님 죽인 사람 맞습니다, 하는 사람마다 쪽쪽 성도가 되게 하시는 방법을 성령께서 하시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그래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지 아니하면 예수님 나라에 갈 수 없어요. 예수님은 자기를 죽인 자를 통해서 죄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굳히고 그 죄에서 어떤 인간도 스스로 죄를 벗어낼 능력이 없음을 분명히 하시고요, 그 다음에 자기 힘으로 구원을 하겠다든지 천국 가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건 나로서는 말도 안 됨을 분명히 하시고 바로 그러한 자를 주께서 건져내심으로써 건져냄에 투입된 모든 방법이 오로지 예수님의 공로에서만 꽉 채워서 있음을 드러낼 때 그 관계가 천국입니다. 천국은 나로 인하여 살지 않는 세계거든요. 나의 행복, 나의 즐거움, 나의 편안함 이것을 기대하고 내다보며 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 성사된 것을 찬미하는 모임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 점을 말을 좀 길게 하게 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성령을 통해서 개입할 때 그것은 남들이 모르는 예수님이 규정한 그 죄가 내가 스스로 죄 지어놓고 죄다, 하는 것은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죄에 대해서 이건 어렵지 않아요. 아주 쉽습니다. 성경에서 죄라는 게 있잖아요. 죄에 대해서 두 방면에서 이해를 하려고 해요.
하나는 인간 쪽에서 죄라는 것을 규정하려고 합니다. 물론 인간 배후에는 누가 있습니까? 악마가 있지요. 악마가 죄를 해석하는 것과 주님 쪽에서 하나님 쪽에서 죄를 해석하는 해석이 서로 상충돼요. 이게 대결한다고요. 이게 경쟁이 돼요. 이게 죄뿐만 아니고 천국도 마찬가지고 구원도 마찬가지고 성경에 나오는 율법도 마찬가지고 모든 개념에 대해서 하나의 해석만 있는 게 아니고 두 개의 해석이 서로 대결하고 있는 중이에요.
인간이 이해하는 죄라는 해석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에서 나왔어요. 선악을 지식은 또 어디서 나왔는가? 나는 홀로 살란다, 하는 정신에서 나온 것이에요. 나는 홀로 사는데 지장이 없도록 나는 선과 악을 구분하겠다. 이게 선악지식입니다.
선악지식은 이건 선이고 이건 악이고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건 선이고 악이고 규정함으로서 내가 사는데 유리한지, 불리한지 따져서 항상 인간은 내가 건재하고 내가 좀 더 잘 살고 내가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은 어떻게든 알리는 방식으로 선과 악을 규정하게 돼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죄라는 것도 구원도 모든 개념이 다 그래요. 죄라는 것은 나는 잘 아는데 내가 이것은 나쁜 짓이라고 생각함으로서 그 다음에 뒤에 내가 이건 나쁜 짓임을 아는 자체를 뭐로 보는 거예요? 나는 선하기 때문에 나는 혼자 살 자격과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거는 나쁜 짓이야, 살인은 나쁜 짓이야, 간음은 나쁜 짓이야, 도둑질은 나쁜 짓이야, 라고 규정하는 당사자가 최종 판정자가 돼야 한다는 거예요. 내가. 나도 알만큼 안다는 겁니다.
그럼 주님께선 네가 뭘 아는데?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당당하게 더 살 수 있는가?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의식을 유지하는 그 방법에 대해서 내가 잘 알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와 여러분 자신들의 평소에 행동하고 생각하는 걸 쭉 보세요. 모든 행동이 다 자기의 정당함과 관련돼있어요.
그러니까 인간의 선악은 잘못됐습니다, 회개합니다, 하고 아무리 가슴을 쳐도 회개를 한다할지라도 그게 진정 자기를 치는 행동일까요, 아니면 자기를 변호하는 행동할까요? 어느 쪽일까요? 자기를 변호하는 행동이죠. 금식하고 회개하고 두드리고, “나는 죽어야 해, 죽어야 해” 하고 막 벽에 들이박는 이유는, “이러니까 내가 안 착할 수 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 이렇게 통회 자복할 수 있는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를 천국 넣어야지 누굴 천국 넣어주겠어요.”
이건 교회에서 노골화된 것이고 평소에 사람 만나는 사회에선 조금씩, 조금씩 튀어나오지요. 다시 말해서 어떤 경우라도 내가 나를 치는 것은 내 사전에는 그런 것 없다. 내가 있는 한 그런 일은 아예 없다고 여겨라. 그게 인간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너도 그렇게 살고 나도 그렇게 사니까 그런 인간사회가 정상인 줄 알았지요.
그런데 여기 주님께서 죄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치지 않는 것이 죄가 돼버렸어요. 하나님 쪽에서는.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발악을 하는 게 죄가 돼버린 겁니다. 아버지로부터 저주 안 받으려고 애쓰는 이게 죄가 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도 마지막 순간에 할 수만 있으면 이 저주의 잔을 그냥 안 마시면 안 되겠습니까? 하다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아버지 뜻이 뭔지 알아요. 뭐냐 하면 아버지께서 자기 아들을 버리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버리는 거예요. 창세기 22장에 볼까요. 창세기 22장 5절에,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사환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같이 갔어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갔는데 어느 지점에서 딱 떼놓고, “기다려. 더 이상 오지 마.”
그 다음에 번제 나무를 자기 아들한테 지우는 거예요. 그러면 이삭을 제단에 눕기 전에 불타기 전에 이미 자기는 무엇과 결합돼 있느냐 하면 자기가 짊어진 그것이 자기를 불태울 재료와 같이 묶여져서 가는 겁니다. 가면서 이삭은 뭐라고 질문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이 누군지 전혀 알 수 없어요.
7절에 보면,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아무리 살아도 본인이 누군지 몰라요.
지난 낮 설교 동영상에 어떤 사람이 댓글을 달았어요. 제가 그 설교에서 임재범의 가사를 했거든요. 그분이 임재범 편에서 서서 옹호를 하는데 고해란 노래는 임재범이 성경 읽다가 은혜 받아서 그녀가 여자가 아니고 인간을 말하고, 내 피 흘린 죄라는 자기가 예수님이라 생각하고 우울증 걸려서 그렇게 썼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댓글을 달아놨어요. 요한복음 보세요. 어디 인간을 그녀라고 한 요한복음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 사랑의 대상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것은 죽으라고 만든 겁니다.
여기 보세요. 이삭 옆에 뭐가 붙습니까? 번제할 나무도 이삭한테 짊어지우지요. 이게 인간이 태어나서 가야 될 길이에요. 예수님만 그 길 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은 우릴 대신 대표해서 보여준 거고, 집에 이는 모든 식구, 모든 가족들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번제할 나무와 함께 죽어야 될 그러한 속성을 태어났는데 이것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내가 나를 치다니 있을 수 없어.” 전부 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주님을 자기 십자가 지고 갔는데 우리는 예수님이 별나서 그렇다는 거예요. 재수 없어서 그렇다는 거예요. 예수님 십자가 지고 가셨을 때는 우리는 그런 식으로 나를 치는 그런 짓을 안 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버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사탄인 가룟 유다였어요. 팔아먹었습니다. 나는 손해 보는 장산 안 한다. 이거거든요. “내가 실망한 만큼 당신도 실망해봐. 보복이야.” 이런 식으로 공격한 거예요.
다른 제자들은 소극적으로 그 자리를 피해버렸지만, 피해도 소용없어요. 주께서 다 불러 모았어요. 오순절에 성령을 통해서 불러 모았다고요. 불러 모으니까 사도들이 안 것은 뭐냐 하면 예수님 가셨던 그 길이 이게 남의 길이 아니고 내가 미처 몰랐던 본인이 처음부터 가야 될 길은 주께서 먼저 시범적으로 가셨구나. 그러면 우리의 길은 안정 빵이죠. 우리의 길이 이미 정해졌어요.
아버지가 재벌이다. 아들 대학 나왔다. 취직하겠습니까? 아버지가 수시로 불러서 내가 늙었으니까 네가 이 회사를 물려받아라. 이런 이야기를 매일 하는데, “아, 나 요새 취직 못해서 미치겠어?” 이런 말하겠어요? 이미 갈 길이 정해졌지요. 아버지 회사가 내 회사, 이미 정해졌잖아요.
그러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안식되는 것, 편안한 게 뭐냐? 오늘 안식이 나올 건데 안식되는 게 뭐냐 하면 이미 안정권에 속한 거예요. 언약보다 더 안정권은 없어요. 여러분, 언약을 방석처럼 깔고 앉으세요. 그리고 여러분 마음대로 사세요. 이 방석이 언약이거든요. 언약을 내가 깔고 앉는 거예요. 깔고 앉아서 자식이 서울서 결혼식을 하던 대구서 하던 울산서 하던 몰라. 하여튼 관심 없어.
지금 코로나가 몇 명이고 600명이고 천 명이고 관계없어요. 이미 안정권이라, 안정권. 확보한 거예요. 정서적으로 안정이 안 되려야 안 될 수 없어요. 무슨 우울증이 걸려요. 무슨 고민상담이 있어요. 남편이 이혼을 하자고 하는데, 해줘요. 안정 빵인데, 뭐. 그게 무슨 고민거리가 됩니까.
이스라엘이 자기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자기 것으로 여겼거든요. 뭐가 방해받느냐 하면 언약의 안전 빵이 방해받잖아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뭐냐? 다 잃어야 네 방석이 보인다는 거예요. 네 덩치 다 날아가야 방석이 보여요. 그동안 너는 진짜 안전 빵, 그걸 안식이라 하는데 여기 34절에, “너희가 대적의 땅에 거할 동안에 너희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동안 하나님의 안식을 이 나라는 내 나라다, 내 몸은 내 것이다. 이러한 너무나 터무니없는 비언약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안식을 완전히 가려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그 엉덩이 안 치우나, 치워! 치우는 방법이 뭐냐 하면 약속의 땅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른 나라로 다 흩어지게 해서 네가 깔고 앉았던 것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쫓겨난 상태에서 보라는 거예요. 그게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남과 비교할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남과 비교할 주체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비교당하는 주체에요. 사람한테 비교당하는 게 아니고 주님 자신과 우리를 비교하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 비교할 때 비교의 기준이 언약입니다. 약속, 완성 쪽으로 이야기하면 안식. 안식으로 하는 거예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안식을 했고 안전 빵인데 너는 도대체 왜 그렇게 흔들리고 매일같이 바람 불면 덜덜 떨고 왜 그렇게 사느냐는 거예요. 그래서 네가 언약 있다 또는 주님 안에 있다, 약속 안에 있다 할 수 있느냐 말이죠. 약속만큼 안전한 데가 없어요. 그럼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저 사람은 교회 안 나와요.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하잖아요. 우리는 남과 비교할 필요 없는데 자꾸 비교한다고요.
성경에서 이스라엘과 거론하는 게 대적, 이방민족이죠. 이방민족과 견주어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어떤 권역도 주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저 사람 교회 2년 나오다 삐져서 안 나온다. 가봤자, 지요. 가봤자 주님의 권역, 주님의 통치 영역 안에 있어요. 물론 잘리지요. 잘리든 말든 지옥 가든 천국 가든 어딜 가도 지옥과 천국, 그 둘 장소 외에는 다른 장소에 갈 곳이 없어요, 인간은. 이미 언약에 의해서 정해진 겁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지요. 나를 지키는 자는 복을 받고 나를 지키지 않는 자는 저주받고. 제3의 장소가 없어요. 그 정도로 안정돼있어요. 주님의 계획이. 모호하지 않아요. 확고하고 확실하고 명백합니다. 명확하고 명백해요. 우리가 안 믿어서 그렇지.
예수 안 믿고 촐싹거리고 지 마음대로 사는 걸 부러워하지 마세요. 지옥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지옥에서 노는 그게 노는 거겠습니까? 난 교회 안 다녀도 돈 많이 벌었다, 부자 됐다, 그런 소리하잖아요. 그 사람은 사는 게 기적이 아니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는 게 기적인 것을 몰라서 그래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사람들은 이걸 기적이라 하는데 마태복음 6장에서 그건 기적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그건 이방인들이 원하는 거고요. 진짜 기적은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는 눈을 가졌다는 눈이 열렸다는 이게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기적입니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보세요. 그 나라와 의를 바라보는 기적을 못하고 결국은 주님의 권역, 그러니까 지옥이라는 권역에 배치 받잖아요.
인간은 도망칠 수 있다, 없다? 도망칠 수 없어요. 딴 생각하지 마세요. 난 다른 해석을 어떻게? 다른 해석 찾지 마세요. 도망칠 데가 없어요. 사람들이 다른 해석, 주님의 방금 이야기한 하나님이 자기 아들 버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치는 그 해석 말고 다른 해석을 자꾸 찾는 이유가 본인 도망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해요. 난 복음에 숨이 막히겠다. 이게 목이 덜 졸려서 그래요. 호되게 목이 졸려봐야 돼요. 살려주세요, 할 때 이렇게 하세요. 사는 게 기적이 아니고 죽어가면서도 그 나라와 그 의를 알면 죽어도 괜찮아요. 그리고 살려달라는 말도 쓸데없는 말이에요. 살아봤자 죽어요. 마리아, 마르다 오빠가 살아난 건 맞지만 또 죽었어요. 참 군에 제대해놓고 다시 군대생활하고 이게 무슨 고생이에요. 마르다, 마리아 오빠 나사로 말이지요.
이스라엘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느냐 하면 본인이 본인을 살리기 위해서 자꾸 정보를 모아왔고 어떤 진리와 지식을 수집했단 말이죠. 내가 뭘 알고 있으면 날 살릴 수 있을 것인가, 한 거예요. 이게 선악구조라 했지요. 선악구조는 선과 악을 그 자체가 배후에 뭘 노린다 합니까?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그것과 관련돼있지요. 살아도 당당하고 정당하게 살 수 있는가, 그것과 관련된 선악이에요. 그래서 선악으로 많은 지식을 구원받는 지식을 확보하게 되면 내가 사는데 더 유리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그동안 앞의 본문에서 얼마나 공격한지 몰라요. 자기 백성을 못 살게 굴고 공격하는 것은 내가 뭘 아는가가 아니라 주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란 말이죠. 너 말고, 내가 어떻게 많은 지식을 확보하느냐 말고, 주께서 무슨 지시를 하시느냐, 자기 권역 아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지 보라고. 어떻게 하시기는 언약대로 일하시지요. 인간은 배제해버리고.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바칠 때에 심지어 사환까지 “너는 손 떼. 이건 아버지와 아들 문제야. 대기하고 있어. 우리 일 처리하고 내려올 테니까.” 올라가면서 아들 잡는 나무 불쏘시개는 아들 등에다 짐을 지운 거예요. 여러분 등짝을 혹시 만져보세요. 간지럽다고 긁지만 마시고 뭐 있는가, 나무 등짐 있는가 보세요. 아들 장가보냈으니 난 인생 끝났다. 모든 무거운 짐 다 없어졌다. 글쎄요. 아들 있던 자리에 뭐가 또 짐이 올지.
이스라엘을 공격하시는 주님, 정말 낯선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레위기에 예언돼있듯이 망했느냐? 레위기 26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예언이 구약 끝날 때까지 계속 돼요. 그 예언에 관한 내용이. 너희들은 망한다, 이 땅에서 쫓겨난다. 왜요? 기다려봐. 역사가 진척되게 되면 우리가 왜 쫓겨났는지 그때에 너희들이 알게 될 것이다.
그 쫓겨난 이유가 뭐냐 하면 다른 신을 섬겼다는 거예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여호와도 선택할 수 있고 다른 신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나에게 있다, 라는 식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한 것이 바로 잘못이었던 겁니다. 나한테는 선택권이 있고 부처를 믿던 예수를 믿던 내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과 일치하지 않는 악마의 일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온 이유는 아버지 뜻을 이루려함이라.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오거든요.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함이다. 요한복음 6장 처음에 보면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오천 명을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이는 게 있지요. 그때 예수님께선 아버지께 기도를 하시고 떡을 떼어줬습니다. 그게 아버지 뜻이었어요. 오천 명을 먹이는 게.
사람들이 예수님의 뜻을 모르는 이유가 떡을 배부른 까닭으로 모든 이해가 스톱이 된 거예요. 무슨 말이냐 하면, 여기 예수님 계시고 사람들이 오천 명 있잖아요. 예수님은 그 뜻이 어디까지 돌파하느냐 하면 아버지께 돌파한 거예요. 내가 오천 명을 먹이는 것은 축복하사 아버지 뜻을 대행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의 뜻은 뭐냐?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거든요. 떡만 먹었으면 자기 뜻은 굳이 아버지한테 기도할 필요가 없어요. 왜? 배고팠는데 배불렀으니까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 된 거예요. 이걸 가지고 요한복음 6장에서는 네가 나를 찾는 까닭은 너희들이 육의 것을 찾기 때문에 그렇다.
육을 돌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주님께서는 떡을 떼시면서 알려준 이것이 어디에 포함되느냐? 아버지 뜻에 포함됩니다. 어떤 인간도 아버지께 나아갈 사람은 예수님 자신 빼놓고는 없다. 이게 아버지 뜻이에요. 그럼 인간은 왜 태어났습니까? 육에서 태어난 이유가 뭡니까? 육에서 태어났으니까 육 값을 하라. 육갑? 육 값을 하란 말이죠. 육신의 값을 치루라고 하는 거예요.
뭐와 비교하기 위해서? 너희들은 이렇고 나는 이렇다는 것을 대조하기 위해서 인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마지막 아담을 위해서 기존의 아담이 먼저 태어나야 했던 거예요. 그래서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란 말은 뭐냐 하면 대리자다, 하나의 모형이었다. 모형이라면 이해 어렵습니까? 인형이었다.
예수님의 인형으로서 아담을 만들었고 아담이 아무리 몸부림쳐도 한 번 죄 지으니까 그 죄의 세력에서 못 빠져나오잖아요. 그런데 오실 자가 주시는 하나님의 의는 아담과 비슷해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의에서 벗어날 수 없고 기어이 주께서 배정한 배치한 천국의 자리에 들어가야만 하는 거예요. 그게 피조물의 운명입니다. 내 행동 따라서 내가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그런 것 없어요.
오늘 본문에서 이걸 생각해볼 때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출애굽 해 들어왔을 때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는 이 약속의 땅에서 지어봐라, 마음껏 해봐라. 온갖 죄를 다 짓지요. 그런데 본인들은 죄 짓는다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고 인간으로선 마땅히 살고자 하는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그렇게 변명들 하는 거예요.
살려고 하다보니까 이렇습니다. “배고픈데 주님, 해결해주세요.” 이게 잘못입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아까 분명히 했지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그런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요. 그런데 인간으로 따져보면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이게 다 충족되게 되면 그게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뭐가 빠졌지요? 그 나라와 그 의는 빠져 있잖아요. 그 빠진 대가는 처절한 저주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려서 이 땅에서 하루 산 게 기적이 아니고 살아가면서 그 나라와 의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신 것이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그 나라와 의란 막연한 게 아니에요. 너무나 구체적인 제가 방석을 깔고 앉은 것처럼 언약 위에 우리가 하나님의 그 나라와 의의 혜택 위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육이라 하는 것을, 진도 나가겠습니다. 육의 세계, 여기에 큰 장벽이 있고 장벽 뒤에 영의 세계가 있지요. 이것은 제가 한 말이 아니고 요한복음 3장에 육은 육이고 영은 영이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마실까 이것 하고 여기서 그냥 장벽이니까 벽이니까 맨날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무한반복, 테이프 잘못 얹어놓으면 맨 같은 노래 반복하잖아요. 반복하면서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그 다음 날도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반복하지요.
그럼 이걸 뚫어야 영의 세계가 있다는 거예요. 그럼 주님은 여기서 기다리는가? 아니에요. 주님 쪽에서 찾아와요. 찾아올 때 이 벽을 뚫고 찾아오겠지요. 이 벽이 뭐냐 하면 육에서 영으로 넘어갈 때 아버지께 버림받은 아버지께로부터 심판 받은 또는 저주받은 이것이 칸막이 되어서 육과 영이 구분되거든요.
그래서 성령이 오게 되면 내가 지금 나이가 얼마고 월수입이 얼마고 집이 몇 채고 뭐가 있든 간에 그것은 주님의 심판 받음과 저주받음의 작용인 것을 받아들이게 돼있어요. 이게 장벽이 고정된 게 아니고 주님의 영에 의해서 성도한테는 밀려서 우리에게 덮쳐버린 거예요. 이걸 아주 고상한 말로 하면 깔린다. 길 가다가 갑자기 태풍 불어서 공사장의 부실한 벽이 무너지면서 깔려버리듯이 난데없이 성령에 깔려버린 거예요. 성도는. 이건 죽음이죠. 죽음이란 말은 이게 심판이고 저주란 말이죠.
그래서 성령 받은 기쁨은 뭐냐? 깔린 기쁨, 제목을 이걸로 할까. 깔려버린 기쁨, 일찍이 저주받고 일찍이 심판 받은 기쁨, 즐거움. 깔려버렸으니까 주도권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에게 있지 않고 나를 깔아뭉개버린, 점점 더 고상한 제목이 자꾸 나오네. 나를 깔아뭉갠 그쪽에 주도권이 있는 거예요. 성령에 주도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8절, 육으로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 나를 깔아뭉개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 잘났다는 것밖에 없는데 이 나 잘났다는 늘 불안과 초조하게 만들어요. 계속 잘나고 싶은데 남들이 뭐라 할까 싶어서 늘 잘나고 싶은데
어떤 사건에 휘말렸는데 그 사건이 이낙연 총리와 연관돼있다, 나는 그 측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의리, 의리는 뭡니까? 자살이죠. 내가 죽게 되면 내가 죽기 전에 알았던, 내가 그동안 모아놓은 게 있어요. 나의 잘남, 나의 가치, 나의 우수함, 인생 성공했음, 이걸 살리기 위해서 내 목숨 바치는 거예요. 내가 나를 위해서 내 목숨 바친 거예요.
자살한 사람만 그럴까요?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내가 사는 이유는 내가 잘난 존재임을 증명하는데 있어요. 나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인생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사는 겁니다. 그러니 사는 것이 어떤 사건이나 조금만 일이 벌어지게 되면 항상 사시나무 떨 듯이 떠는 겁니다. 벌벌 떨어요. 무슨 일 하나 터지면 저게 내게 이익일까, 손해일까 염두에 두면서 벌벌 떨어요.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아요. 쉴 곳이 없어. 꼭 가시나무 새 같아. 어쩔 수 없네. 이게 하루 이틀이 아니고 이게 고질병이에요.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이 고질병에서 못 벗어납니다.
프로이트란 정신분석학자는 인간을 딱 하나로 봤어요. 딱 하나로 보고 끝냈습니다. 아이는 엄마 없이 못 산다. 그래서 정신병자다. 아이가 태어날 때 엄마 있으니까 자기가 정상인 줄 알지요. 그런데 엄마는 늙어죽어야 됩니다. 엄마를 떠나야 돼요. 엄마를 떠나야 되니까 엄마와 더불어 있던 그것이 난데 자아인데 엄마가 떠난 그 빈자리에 뭐로 채워야 돼요?
엄마를 대행자로 계속 교체해야 되는 거예요. 그것 없으면 내가 깨지니까 나라는 그림이 이미지가 완성이 안 되니까 그래서 엄마 죽고 난 뒤에 교회 나와서 예수님이 엄마 자리에 떡 앉아있는 거예요. 하나님 찾는 겁니다. 온전한 나를 위하여. 깔려죽어야 정신 차리지. 마리아한테 빌고,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
“주여, 믿습니다.” 주님 뭐라 하겠어요? “왜 믿는데? 네가 왜 나를 믿고자 하느냐?” 진짜 그런 음성이라도 들리면 천만다행이지요. 지금 너의 문제는 네가 너를 못 버린다는 그게 문제다. 네 뒤에 악마 있는데 너는 악마가 그렇게 사주했다는 생각 안 하고 맹목적으로 무조건 나는 손해 보면 안 돼, 나는 잃어버리면 안 돼.
도대체 언제까지? 나이 한 팔십 넘으면 철이 날까. 이런 말하면 안 돼, 조심해야 돼. 진짜 개코같은 말이에요. 팔십 넘어 나이 구십, 뭐 구십, 나이 백 살을 먹어보세요. 자기 고집의 엑기스. 도대체 그 많은 백 년 살면서 단 한 순간도 나를 버리는 것이 정상이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교회 와서 그렇게 복음을 듣는다 하면서도 말이죠. 자꾸 계산하고 오늘도 이문이 얼마나 남았는지 자기 인생을 계산해서.
이스라엘이 버림받으면서 꼭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나의 일은 나의 일이 아니었음을. 나의 일이 나의 일이란 이것이 바로 오인 또는 착각이죠. 키 작은 사람은 왜 나는 키 큰 자가 되지 않아야 되는가, 라고 따지지 마세요. 키 작아도 네 일 아니고 키 커도 네 일 아니다. “엄마, 나는 왜 쌍꺼풀이 없어?” 쌍꺼풀이 있으나 없으나 네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다.
태어나서 일찍 희귀한 병에 걸려서 햇빛 며칠 보고 죽은 아이가 있다 합시다. 그런 애들 많잖아요. 뭐 걔는 인생 실패했다 하는데 실패한 게 아닙니다. 자기 일이 아니니까. 주의 일이거든요.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앗수르 군대가 십팔만 오천 명이 죽었습니다. 하나같이 귀한 집 자식이에요.
그 군의 용병들 월급 많이 받거든요. 앗수르 임금으로부터 옛날부터 군인들 돈 많이 받았어요. 위험하니까. 네팔의 구르카 용병이 영국군인이 되는데 월급으로 네팔 성인남자의 칠십 배를 받아요. 그러니까 서로 되려면 200명 뽑는데 몇 만 명 오고 그래요. 그렇게 용병들 하루아침에 십팔만 오천 명 다 죽었어요.
그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너희들은 눈에 보이는 사람을 건드린 게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건드린 거예요. 우리가 지금 성도로 살아 있는 것은 뜻을 안 건드려서 살아 있는 게 아니고 언약이란 방석 보고 다시 날마다 살려준 거예요. 어젯밤으로 운명하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내 일 아닙니다. 내 일 아니에요. 주의 일이니까 더 필요하다 싶으면 계속 살려두는 겁니다. 내 일이라고 고집부리면 부릴수록 주님한테 더 힘들게 시련을 당하게 될 겁니다.
여기에 레위기 26장 24절 봅시다.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 배나 더 칠지라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너희의 배약한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붙일 것이며 내가 너희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29절에 “너희가 아들의 고기를 먹을 것이요 딸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을 헐며 너희의 태양 주상을 찍어 넘기며” 아까 읽었던, “내가 너희 성읍으로 황폐케 하고” 모든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입니까? 흩어버리고.
이게 뭐냐 하면 안전 빵인 방석을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근데 자꾸 방석에 앉아있으면서 자기 걱정하고 있으니까 네 엉덩이 치우란 말이죠. 네 걱정은 네가 한다는 자체가 그게 죄라는 겁니다. 너의 일이 없는데 자꾸 저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 아들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 남편은 어떻게 됩니까? 맨날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앞으로 나는 내일 되면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할까요, 어찌 합니까, 제발 저 여자만큼은. 맨날 임재범의 처럼 말이죠.
그게 나의 일인 이상은 어떤 여자를 주던 떼돈을 줘도 그건 지옥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평생토록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율법으로 우리에게 밀어붙이죠. 자, 율법이란 것은 아까 이야기했지요. 육과 영 사이에 뭐가 있다 했습니까? 육과 영 사이에 장벽이 있지요. 이 장벽을 예수님 쪽에서 뚫고 들어오기 때문에 뚫고 들어오면 장벽의 본질이 드러나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심판 받고 저주받아야 될 세계가 인간들이 사는 이 세계다. 그 사실을 가지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안 떨어지려고 육적으로 애를 쓰지요. 그러니까 성령을 통해서 오게 되면 주께서는 그냥 네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라고 네 손을 놔라 해도 우리는 계속 붙들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이 와서 레위기 26장에 나오는 그런 모든 일을 계속해서 우리한테 퍼붓는 거예요. 우리가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분 쉽시다.